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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충돌 (4/24)

4장. 충돌

축축한 숨이 공기 중으로 퍼졌다. 더운 호흡이 오가는 만큼 입술은 건조하게 말라갔다. 혀로 축이고 싶은데, 안달이 난 나머지 자꾸만 깨물게 된다.

“아…. 흐읏…. 하아…….”

느리게 아래를 달구듯 쑤시는 묵직한 남근에 허벅지 안쪽이 빠듯하게 조였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부드럽게 애무하는 손길이 감질났다. 유일하게 열기를 돋우는 것은 폭력적인 크기 뿐.

“으응, 읏, 더 세게…….”

애가 닳아 엉덩이를 흔들며 재촉해 보았지만 목덜미를 핥는 남자는 천천한 속도를 유지했다. 다정한 섹스가 성에 차지 않아 울음이 터졌다. 허리를 찧어보려 했지만, 쪽도 못 쓰고 제지당했다.

“가만히 있어.”

잔뜩 흥분한 목소리는 김산의 것이었다. 꿈인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저 성감이 부족했다. 서하는 김산의 어깨를 쥐고 고개를 저었다. 녹녹한 애무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지만, 그건 서하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싫어, 흣, 더, 더 세게요. 선배, 제발, 흐윽…….”

부족해, 제발. 안을 짓이기고 제 목덜미를 살 터지는 소리가 나도록 깨물어 주었으면 좋겠다. 느리게 엉덩이 안쪽을 휘젓는 성기는 거근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폭력적인 면모도 지니지 않았다. 곰살궂게 파고드는 성기는 뜨겁고 단단했지만, 이가 빠질 것 같은 달콤함으로 성행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서하야…….”

제 품 안에서 허리를 들썩이는 서하가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김산이 서하의 이름을 부르며 엉덩이를 매만졌다. 서하의 곧은 성기는 제대로 발기하지 못한 채였다. 김산의 손이 서하의 성기를 쥐었다. 직접적인 마찰에 성기에 힘이 붙기는 했지만 미약했다. 그리고 서하가 김산의 어깨를 할퀴듯 당기며 채근했다.

“아, 제발…!”

“누구한테 비는 거야?”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 순간 귓전에서 들리는 음성엔 노여움과 색기가 잔뜩 서려있었다. 목소리만으로 서하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또 다른 흉근이 이미 김산의 성기가 들어찬 구멍을 짓이기고 들어왔다.

“아윽!”

폭력 그 자체인 삽입에 턱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본능적으로 도망치려는 허리를 단단한 손이 저지했다.

“도망쳐 봐.”

“아, 흐, 흐으윽, 아…!”

안을 후려 박는 흉기에 서하가 그 손을 부여잡고 도리질을 쳤다. 다정하게 가슴을 애무하는 김산의 손길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지막지한 속력과 힘에 서하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통증과 함께 쾌감이 일었다.

“악, 학, 하악, 읏, 아아, 흐윽…!”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바짝 선 서하의 성기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뒷덜미에 이를 박아 넣는 제혁의 거친 애무에 서하가 풀린 눈으로 추삽질에 맞춰 흐트러진 신음을 흘렸다.

“좋아?”

“아, 좋아, 너무 좋아……. 더, 흐읏, 더 세게 쑤셔 주세요…….”

“쑤셔 주세요, 다음은?”

“흣, 주인님……. 제발…….”

서하의 입에선 망가진 신음과 함께 실성한 듯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어느새 돌아간 고개에 저를 집어삼킬 듯한 눈빛의 강제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쾌감을 이기지 못한 몸에 경련이 일었다. 좋아서 울음이 절로 터졌다.

이번엔 강제혁의 손에 턱이 고정되어 김산과 눈이 마주쳤다. 젖꼭지를 희롱하는 손도 강제혁의 것이 되어 있었다. 아프게 꼬집고 짓이기는 손길에 서하가 그의 두터운 팔에 매달려 엉덩이를 움직였다. 눈앞에 있는 김산의 얼굴엔 충격이 서려 있었지만, 서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벌어진 구멍 안에서 거근 두개가 내벽을 무참하게 짓뭉개고 헤집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하, 아으, 악…. 좋아, 어떡, 흐윽, 미칠 것 같아…….”

서하야, 다정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뒤이어 이서하 씨, 매정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콱 처박힌 성기에 연신 희게 번지던 눈앞이 깜깜해졌다. 질척한 정액이 튀었다. 암전이었다.

***

미묘하게 짧은 암막커튼의 밑으로 햇빛이 밀려 들어왔다. 물론 그것 때문에 깬 것은 아니었다. 서하는 축축하게 젖은 속옷에 탄식하며 스스로 벽에 이마를 찧었다. 미쳤다, 이서하. 미친 게 틀림없다. 쌓여서 몽정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꿈을 꿨고, 그래서 쌌다. 쌓였을 리가 없었다. 강제혁과 지독하게 구른 지 얼마나 지났다고.

“미친 게 틀림없어.”

육성으로 다시 한 번 내뱉어 보아도 제 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꿔도 그런 꿈을 꿔? 충격에 흐려졌던 김산의 표정이 다시금 스쳤다. 무슨 꿈이 이렇게 선명하고 생생해. 한 번에 두 개를 넣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꿈은 3p를 꿨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그러면서도 포악스레 제 안을 쑤시던 성기 두 개가 떠오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는 쑤시고 하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어쨌든 제가 느끼기엔 대충 그랬다. 만약 꿈속의 김산이 좀 더 거칠어서 같이 허리를 흔들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건…….

“좋았다는 게 더 쪽팔려…….”

색욕에 미쳤나 보다. 첫째로 30년 만에 과격한 플레이를 연속으로 해서 몸이 미쳤고, 둘째로 김산이 제 옷을 잡아 뜯어서 뇌가 미쳤다.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애써 털어낸 서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기별도 안 간 구멍이 괜히 움찔거렸다. 정말로 성기를 두 개나 받아냈다는 착각이 일 만큼 선명한 꿈이었다.

“일단 씻자.”

마음 같아선 찬물에 씻고 싶었지만 아직 으슬으슬한 아침에 신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진탕 섹스를 한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이것도 한 달 전이었다면 알지 못했을 감각이다. 그땐 섹스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게 변했다. 새삼스러운 자각과 함께 뜨거운 물에 몸을 녹여내듯 씻어내자 한층 개운했다. 서하가 세운 오늘 하루에 대한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 기상 후 샤워

- 간단한 청소 및 정리(*오늘은 꼭 해야 함)

- 집 앞 카페에서 프린트 해 둔 논문 읽기

- 마트에서 장보기

- 비축용 카레 만들기

일단 청소와 정리는 미뤄두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샤워가 길어진 탓에 더 늦게 나섰다간 카페가 만석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카페는 한산했다. 서하는 제가 청소를 하지 않고 나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찬물 샤워를 못 했기 때문에, 식도라도 적시고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평소처럼 5샷 추가였다. 자주 오는 카페였기에 사장도 이젠 놀라지 않았다. 아침을 못 먹었으므로 베이글도 시켰다. 꾸덕한 크림치즈를 발라 한입 깨물자 긴장감이 풀어지며 어깨에 힘이 빠졌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작이었다.

서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프린트 해 온 논문을 읽어 나갔다. 잘 쓰지 않는 안경이 거치적거렸지만 텍스트를 읽을 땐 안경을 착용하는 편이 편했다. 석사 시절만 해도 눈이 좋았는데.

‘대학원 와서 인생 조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접시와 유리컵을 비웠다. 잠시 후엔 포만감에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홍차를 한 잔 더 시키고 휴대폰을 꺼내 뉴스기사를 훑었다. 시선을 끄는 내용은 몇 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강제혁 생각이 났다.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연락에 집착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의외네.’

권리 운운하기에 본격적인 구속이 시작되는 건가 내심 기대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휴대폰이 울렸다. 서하는 액정에 뜬 강제혁의 이름에 침을 꿀꺽 삼켰다. 감시당하는 것 같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주인님 소리를 낼 뻔 했지만 제가 있는 곳이 카페란 걸 다시 상기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밖인가 보네.]

“아, 네……. 집 앞 카페예요.”

[혼자?]

“네. 커피 마시면서 할 게 좀 있어서요.”

굳이 논문 읽는다는 말은 안 했다. 생략해도 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는지,

[할 게 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추궁했다. 아마 그는 집 안인 것 같았다.

“논문 좀 읽으려고요. 집에서는 잘 안 읽혀서요.”

[…뭘 마셔요? 또 에스프레소?]

음성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서하는 괜히 손을 꼼지락대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혼나는 것 같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 해서요. 지금은 다 마셔서, 홍차 마시고 있습니다. 따뜻한 걸로요.”

샷을 다섯 개나 추가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학원 사람들을 제외하면 다들 경악하는 샷 수였으니까. 그럴 바엔 정제된 카페인을 알약으로 먹으라던 박사 선배의 말이 잠깐 떠올랐다. 거기까진 가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엔 뭘 할 건데요?]

“마트에서 장 보고, 카레 만들려고요.”

[카레.]

“네. 과립형 가루 매운맛으로 사서요. 그리고 우유 넣으면 맛있어요.”

꽤 일상적인 대화였다. 서하는 괜히 어색해서 주절주절 시답잖은 레시피를 읊었다. 분명 평범한 대화임에도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감에 눈이 데구룩 굴렀다. 한참 뒤에 강제혁이 지나가는 말처럼 명령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연락해요.]

“매일요?”

[나한테 다 보고하면 좋고.]

“그럼… 뭘 하든 다 허락 받아야 하나요?”

거기까지? 서하는 조금 고민했다. 정신적 지배를 원하는 돔 중엔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같이 살지 않는 이상 거기까진 어려울 텐데. 게다가 저도 제 생활이 있고……. 당황한 게 느껴졌는지, 강제혁이 웃었다.

[아니,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으니까.]

“아…….”

[일상 통제도 가능하면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서하는 강제혁이 신기했다. 늘 강압적인 것 같아도, 타협할 줄도 알고 제법 합리적이기도 하다. 그 경계가 흐려진 경우를 간접적으로 봐왔기 때문에, 선을 넘을 듯 넘지 않는 강제혁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말고 다른 돔을 만날 수 있긴 한 건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강제혁이 서하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DS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와 언제까지 만날 수 있을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니 그와의 관계도 먼지처럼 흩어질 수 있다. 누가 먼저 끝을 말할까. 확실한 건 제 입에선 나오지 못할 말이란 사실이었다.

“강제혁 씨는, 뭐 하세요?”

서하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물어봐도 되나, 싶었지만 순간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다. 서하는 괜히 간질간질한 손바닥을 청바지 위로 문댔다. 땀이 살짝 묻어 나왔다.

[이서하 씨랑 전화.]

“아, 그럼 전화 끝나면…….”

[얼굴 보려고요.]

“네?”

그리고 뒷덜미를 쓰다듬듯 꽉 조이는 커다란 손에 서하가 헛숨을 삼켰다. 익숙해진 온도. 손톱을 세워 패인 곳을 긁는 손길이 은밀하고 야릇했다.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직접 왔어요.”

“흐…….”

“언제 이렇게 야해졌어.”

낮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서하의 낯이 훅 달아올랐다. 그와의 끝에 대한 상념은 날아가고 간밤에 꾼 꿈이 생각났다. 거칠게 제 안을 쑤시던 두 개의 성기가 떠오른 서하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긴 강제혁은 제 집을 알고 있으니 집 앞 카페 창가에 앉은 자신을 발견할 만도 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일어나요.”

강제혁의 말에 서하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덜미를 조여오던 손이 스르륵 떨어졌고, 서하는 그걸 꽤 아쉽다고 생각했다.

“종이 쪼가리 챙기고.”

논문이 인쇄된 종이가 흐트러져 있었다. 서하가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챙겼다.

“이제 장 보러 갈까.”

“…네?”

그냥 올라가고 싶다. 강제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열기가 감돌았다. 아무래도 찬물에 세수라도 좀 해야겠다.

“저, 화장실 좀…….”

“잘 됐네. 이거 넣고 오세요.”

강제혁이 손을 뻗어 주머니에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묵직하게 삽입된 물건이 뭔지 알 법했다. 서하가 떨리는 눈으로 강제혁을 쳐다봤다. 설마,

“그거 하고 나오면 바로 장 보러 가요.”

웃는 얼굴이 몹시 매력적이었지만 동시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가 짜릿한 오한을 느끼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카디건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은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며 서하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절그럭 거리는 괴괴한 소리를 냈다. 카페 화장실의 금빛 조명이 서하의 열띤 낯을 비추었다. 화장실은 1인용으로 만들어져 바깥 문 하나만 잠그면 되는 구조였다.

차라리 칸막이가 있었다면 좋았을 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음란한 짓을 해야 한다는 게 몹시 수치스러웠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진정한 서하가 세면대 앞에 선 채로 주머니에 든 것을 꺼냈다.

“아, 이거…….”

쇠구슬, 언젠가 한 번 썼던 것 같은데. 밝은 곳에서 보니 사이즈가 제법 컸다. 세 개는 좀 과한 것 같긴 한데. 세척을 위해 흐르는 물에 쇠구슬을 굴리고 심호흡을 했다. 서하는 바지며 속옷을 한 번에 내리고 마른 구멍을 손끝으로 살짝 매만져보았다. 윤활액이 없어서 빠듯할 것 같은데. 한 손으론 세면대를 짚고 다른 손을 돌려 메마른 비부에 차가운 쇠구슬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윽…….”

로터보다 살짝 큰 쇠구슬이 단단히 다물린 애널을 짓이기며 안으로 삽입되었다. 이물감이 대단했지만, 서하는 주어진 적도 없는 제한 시간을 홀로 걸어놓고 빠르게 구슬을 구멍 안에 담았다. 강제혁이 넣어줬다면 더 쉬웠겠지만 그는 문 밖에서 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분명 구슬을 넣고 장을 보러 가자고 했으니 이보다 깊게 들어가야 탈이 없을 터였다.

“하…….”

서하는 손가락이 두 마디 이상 푹 잠길 때까지 삽입을 마치고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거울 안에는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사내가 눈썹을 찌푸리고 호흡하고 있었다.

“…….”

최대한 멀쩡한 낯을 가장하고 아랫도리를 추스렸다. 세수까지 마치니 홍조도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강제혁의 너른 등이 보였다. 긴장감이 풀어지는 듯한 기묘한 착각이 일었다.

“…저 이제 다 끝났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뒤돌아보지 않는 강제혁의 곁에 선 서하가 조용히 말했다. 눈 마주쳐도 되나. 왜 이쪽을 안 보지.

“같이 가주세요, 주인님…….”

서하가 아주 작고 낮은 소리로 강제혁의 귓가에만 들리게끔 청했다. 그가 대답이 없기에 큰 맘 먹고 목소리를 낸 것인데 돌아보는 시선이 차디찼다. 이거 아닌가. 고민하는 사이, 손이 덥석 잡혔다.

“아…….”

“다음부턴 목줄이라도 채워서 나오고 싶은데.”

“그건,”

“산책하는 건 어때요. 사람 없는 공원에서 개목줄 차고.”

빠르게 걸어 나가며 뱉는 말에는 고저가 없었지만 흥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갑작스레 급하게 걷게 된 서하가 입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묵직한 쇠구슬이 몸 안에서 비벼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걸음이 좀 느려졌으면 좋겠는데 원체 강제혁의 보폭이 큰 탓에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헉, 흐으…….”

“왜 자꾸 야하게 울어.”

그렇게 마트 앞까지 질질 끌려와버렸다. 숨을 달싹이는 서하의 어깨를 쥔 강제혁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서하는 제 뒤에 선 강제혁이 낮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꿈에서도 이런 목소리로 제 뒤에 서 물건을 밀어 넣었었지. 돌겠네.

“장 보려고 했던 거 여기에 담아요. 내가 들 테니까.”

서하가 슬슬 고조되는 성감에 발끝을 오므리는 사이 강제혁이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들었다.

“…네.”

더 깊게 삽입이 된 건지, 머리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서하의 인생에서 무채색의 하나였던 장보기 일과가 새빨갛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

손 안에 감기는 피부가 단단하고 매끄러웠다. 흡사 살로 만든 도자기를 만지는 것 같은 감촉이었다. 멍이 든 피부에 혀를 대고 다정히 애무했다. 움찔움찔 떨리는 것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다친 부분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선배, 아, 흐으…….”

“아프게 하지 않을게.”

다짐하듯 속삭였다. 나는 달라. 나는 너를, 아끼니까. 길고 곧은 다리를 천천히 벌려 제 옆구리에 끼우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춰 주었다. 부드러운 엉덩이를 조심스레 주무르자 그것만으로 숨이 차올랐다.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에 입술을 부비고 혀로 핥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눈물 젖은 눈이 비쳤다. 잘게 키스하며 뺨을 쓰다듬었다.

“아…….”

안타까운 신음은 제 입 속으로 전부 삼켰다. 그러고도 부족해 서하의 입안을 핥고 빨았다. 상처 난 몸을 정성스레 애무하고 소중히 입 맞췄다. 닿는 곳마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선배, 이제, 흐, 넣어주세요…….”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우는 서하의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파도, 괜찮아요.”

갖다 대기 무섭게 성기 끄트머리부터 집어 삼키는 구멍에 짧은 신음이 터졌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눈앞이 어두워져 눈을 깜빡이니 천장이 보였다. 발기한 성기가 속옷 아래에서 갑갑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

벌써 몇 번째 꾸는 꿈인지 모르겠다. 김산이 약간 초췌해진 얼굴을 쓸어 내렸다. 서하의 몸에 가득했던 순흔과 잇자국, 멍자국을 본 날부터 이런 꿈을 꿨다. 처음엔 다친 서하를 위로해주는 꿈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하의 몸에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혀를 내어 핥을 때마다 서하의 울음 섞인 신음소리가 커져갔다. 그러자 참을 수 없어져 점점 더 깊은 곳에 손을 댔다. 오늘은 기어코 성기를 밀어 넣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친 새끼…….”

김산이 끊은 지 오래 되어 서랍에 처박아 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기계적으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켜자 막 잠에서 깨 멍한 머리가 어지럽게 돌았다.

“전화… 해볼까.”

솔직히 그날 그렇게 쫓겨난 이후로 찾아가고 싶었던 마음을 몇 번이고 억눌렀다. 서하도 놀랐을 것이다. 아마도 서하가 유일하게 믿는 게 저일 텐데, 나쁜 일을 당하고 온 피해자에게 가해자와 다를 것 없이 강압적으로 굴었으니까. 그 탓에 자괴감이 느껴져 김산은 발길을 매번 돌렸다.

나도 게이였나, 자조적인 웃음이 번졌다. 제 주변에 동성애자는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가장 가까운 서하가 게이였고 저는 그를 대상으로 파렴치한 꿈을 꾸는 당사자가 되었다. 우습고 비참했다. 혜인과 결혼을 하려 했던 제가 역겨웠다. 그리고 십 년을 봐온 아끼는 후배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더러운 꿈을 꾼 게 미안하고…….

“더럽게 복잡하네.”

지금 제 감정이 그랬다. 그럼에도 가장 우선적인 생각은 분명했다.

“보고 싶어…….”

김산이 고개를 숙인 채 읊조렸다. 진심으로 서하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보러 가도 되는 걸까. 저더러 나가 달라고 화를 내던 서하의 모습이 두 눈에 선연했다. 덜어낼 길 없는 고뇌 속에,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출근 준비를 마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

김산은 결국 졌다. 자숙하려 했지만, 서하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때 제가 너무 흥분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하의 집으로 향했다. 후회할 행동이긴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뭐라도 사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차를 세워두고 서하의 집 앞 마트로 들어섰다. 대형마트 안은 저녁시간이라는 걸 입증하듯 인산인해였다.

“사람 진짜 많네.”

그리고 그 시간, 서하는 강제혁이 뒤에서 지켜보는 동안 구멍 안에 든 구슬이 빠지지 않게끔 조여 가며 장바구니를 채우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엉덩이를 만지는 손이 거칠어 발기할 뻔한 걸 몇 번이고 참아냈다.

“아, 흐…….”

“소리 내면 안 되지.”

카레 가루, 우유, 버터, 양파…….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처음 온 마트라 잘 몰라서 그러는 건지, 동선을 꼬아 움직이는 강제혁 탓에 마트 안을 의미 없이 돌아야 했다.

“흐, 이제 다 샀어요.”

“콘돔은?”

잘 끼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저를 수치스럽게 하고자 묻는 말일 게 뻔했다. 콘돔을 사러 마트를 누빌 정신이 없었다. 다급해진 서하가 계산대 쪽으로 눈짓하며 강제혁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저가 안달 난 만큼 강제혁도 급박해져야 수월하리라. 근처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서하가 한 걸음 다가서며 강제혁에게 속삭였다.

“그냥, 안에 싸주세요…….”

“아양만 늘어서는…….”

“흐으…….”

“싫다고 울 때까지 싸줄 테니까 전부 삼켜야 해요.”

이죽거리는 어투였지만 흥분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허리를 감싸듯 안은 탓에 서하의 성기가 강제혁의 허벅지에 비벼졌다. 위험했다. 결국 급히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김산이 보고 말았다. 멀어서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는데 분명히 서하였다. 다행이라면 대화 소리를 못 들었다는 것 정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키 큰 남자에게 끌려가는 서하의 모습에 김산의 눈앞이 새카매졌다. 그리고 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완연한 분노였다.

그는 뒤늦게 서하를 쫓아보았지만 갑작스레 더 많아지는 쇼핑객들 탓에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김산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 둘이 갈 곳이라고 해봤자 서하의 집일 게 틀림없었다. 놓쳐도 상관없었다. 결국 잡을 테니까.

***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서하의 무릎이 꿇려졌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관에서는 이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아…….”

“예쁠 것 같아서 샀는데, 잘 어울리네.”

목덜미에 채워진 가죽줄은 개목걸이처럼 보였다. 달칵 소리가 나고 얼마간 목젖을 희롱하던 손이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카페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산책을 했어도 좋았을 것 같았다. 다음에 하자고 할까.

그를 만나고부터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보다 일순간의 쾌감이 폭풍처럼 달아 판단력이 흐려져만 간다. 어쩌면 강제혁을 믿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보다 어린 남자에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건 그가 완벽한 돔이기 때문일까. 괜히 닿지도 않은 뒤가 움찔거렸다. 구슬은 반쯤 밀려나와 있었다. 무게감이 컸던 탓이었다. 달콤한 공포가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저릿하게 했다.

“읏…….”

서하가 강제혁의 다리춤에 고개를 비볐다. ‘혼내주세요’의 의미를 담은 몸짓이었다. 물론 입은 열지 않았다. 그가 제게 목줄을 채운 이상 인간의 언어는 허락된 게 아니란 뜻이었으니까.

“발정이라도 난 거야?”

“흐으…….”

“어디 가서, 교미라도 시켜줘야 할까.”

발정 난 고양이를 대하는 것처럼 강제혁이 서하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반쯤 밀려나온 구슬이 압박감을 선사하는 와중에, 둔부에 충격이 가해지자 서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멀티플이라도 하려는 생각일까. 강제혁이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다리를 벌리고 억지로 성기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자 눈앞이 아찔했다. 그건 또 그거대로 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위험도가 클 테니, 상상에 그쳐야 했다. 목줄이 채워진 것만으로 아래가 지근거렸다.

“오늘 저녁은 내가 만들게요. 고양이가 카레를 만들 수는 없으니까.”

개목걸이를 채워두고 고양이 취급하는 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목걸이를 차는 고양이도 더러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걸음을 옮기는 강제혁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무표정한 낯이 서하를 내려다 봤다.

“왜 안 따라올까.”

“…….”

“네 발로 기어 와.”

그의 말에 서하가 무릎걸음으로 네 발 짐승마냥 움직였다. 수치심이 얼굴을 달궜다. 목덜미에 채워진 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표식처럼 느껴졌다. 어느덧 강제혁보다 앞서 네 발로 기고 있었다. 그때 서하의 뒤에선 강제혁이 치켜 올려진 서하의 엉덩이 사이를 발바닥으로 느릿하게 밟았다.

“읏!”

구슬이 들어있는 내벽에 충격이 가해져, 짙은 둔통이 찾아왔다. 서하는 무너지는 팔을 감당하지 못하고 엉덩이만 쳐든 채 헛숨을 삼켰다.

“서하야.”

“흐으…읏.”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마치 동물의 것을 부르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이 와중에도 제 엉덩이 사이를 꾹꾹 밟는 발은 거침이 없었다.

“좋으면, 야옹하고 울어야지.”

“하윽…….”

흥분한 성기가 면바지 안에서 제멋대로 크기를 부풀리고 있었다. 서하가 제 회음부를 자극하는 발바닥에 신음하며 야옹, 하고 울어 보였다. 인위적인 소리라 더 수치스러웠다. 차라리 홀딱 벗겨 희롱해 주었으면 싶은데, 인간 옷은 입혀두고 이러니 배덕감이 짙어졌다. 아니, 전라였어도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이쯤 되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하는 남의 집에서 능숙하게 카레를 만드는 강제혁을 올려다보았다. 왜냐면 제게 허락된 장소가 식탁 아래였기 때문이다. 전화로 레시피를 간단히 설명한 게 통한 건지, 평소 제가 먹는 레시피대로 만들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양파를 얇게 썰어 달군 웍에 캐러멜라이징하고, 물과 카레 가루, 후추, 버터를 넣어 진하게 끓여내다 우유로 농도를 맞추는 것이었다.

카레가 만들어지는 동안 방치된 서하가 무릎을 꿇은 자세를 유지하며 발뒤꿈치로 엉덩이 사이를 자극했다. 풀어지는 서하의 눈가를 발견한 강제혁이 얕게 웃었다. 들켰나. 섭이 돔의 허락 없이 스스로를 자극하면 혼날 게 분명하지만 방치가 서러운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절실했다.

“우리 야옹이가 심심한 것 같은데.”

“…야옹.”

“우유라도 줄까.”

우유는 흔히 정액에 비유되니, 당장 섹스를 하거나 펠라티오를 시킬지 모른다는 기대심이 일었다. 서하가 어설픈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혀를 내밀어 보였다. 뭐가 됐든, 강제혁을 자극시켜야 했으니까.

“천천히 먹어.”

평소 반찬 그릇으로나 쓰는 오목한 접시에 우유가 따라지고 바닥에 놓여졌다. 서하는 일련의 동작을 물 흐르듯 마친 강제혁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게 아닌데.

“다 마실 때까지 안 만져줘.”

차라리 뺨을 치지. 아쉬움에 대놓고 입술을 씹으며 내키지 않는 몸을 내려 접시에 얼굴을 박았다. 그런데 막상 바닥에 얼굴을 숙이고 짐승마냥 혀를 내어 우유를 핥아 마시니, 비참함과 수치심이 한 번에 밀려들었다. 지식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대학 강단에 서 학생을 가르치는 제가 제자의 발아래 엎드려 금수마냥 접시를 핥는다는 게…….

“다 마셨어?”

“흐…….”

다정한 목소리가 더 얄궂었다. 어느새 가스레인지의 불을 끈 강제혁이 서하의 뒤로 와 바지 위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이 바지 비싼 거예요?”

갑작스럽게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은 존댓말에 서하가 고개를 돌려 눈을 깜빡였다. 강제혁은 주방용 가위를 들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내가 사줄 테니까, 나중에 버려요. 아님 이러고 싶을 때마다 입던지.”

가위가 바지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서하의 구멍 위로, 무언가의 출입을 위한 구멍이 다시금 만들어 지는 순간이었다. 바지의 가격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가위가 천을 잘라내는 건조한 소음이 귓가를 어지럽히는 동안 점차로 공기 중에 노출되는 가장 은밀한 곳에 아랫배가 절로 묵직해졌다.

“하윽…!”

차가운 금속성의 무언가가 이미 쇠구슬이 든 안을 헤집고 삽입되고 있었다. 그리고 강제혁이 손을 뗐을 때쯤 정신을 차린 서하의 눈에, 제 다리 사이로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였다. 전에 본 적 있는 꼬리가 달린 애널 플러그였다. 한층 더 고양이에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

김산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하의 집 앞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지난 십 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지난번의 일을 통해 현관문의 패스워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서하가 제게 실망할 게 두려워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텅 빈 복도에 던졌다. 분노와 배신감과 후회가 뇌를 잠식했다. 서하가, 그 모양 그 꼴이 될 때까지 모른 자신이 역겹고 좆같았다. 동생만큼 아낀다고 생각한 후배였는데 알고 보니 서하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하지만 김산은 서하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서하는 안 그래 보여도 겁이 많은 애다. 사람을 싫어해서 밀어내는 게 아니라, 나중에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워서 애초에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다. 아마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도 남자와 사귀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 10년 간 어떤 전조도 없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동성애자들의 삶을 전부 알지는 못했지만, 경직된 사회에서 그들에 대한 취급이 나쁘단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 바르디 바른 서하가, 성애에 대한 갈망을 참기 힘들어져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고도 관계를 저버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김산의 머릿속에서 서하는 변변찮은 연애 경험 하나 없이 몰배려한 상대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불쌍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하도 외로웠겠지. 폭행을 당하고도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할 만큼.

김산은 서하를 그렇게 만든데 제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다. 서하가 결핍으로 가득한 생애를 살아왔음을 모르지 않는데.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봤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애가 몸이 그 지경이 되도록 폭행을 당하고, 섹스 파트너를 운운하며 가해자를 변호했다. 김산에게 있어 강제혁은-아니 JH.Kang은- 순진한 서하를 속인 사기꾼이며 끔찍한 강간범이었다. 섹스의 s자도 모를 서하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그걸 섹스라고 가르친 게 분명했다.

김산은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강제혁의 멱살을 잡고 쌍욕을 퍼붓고 싶었다. 학교에서 퇴학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서하가 제일 먼저 단두대에 오를 것이다. 소문이란 그런 것이니까. 파렴치한이란 별칭은 학생을 꼬드긴 강사의 몫이 될 것이다. 이제 막 박사과정을 밟는 애였다.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김산은 눈을 내리 감았다. 저 역시 한 점 깨끗하지 못했다. 서하에게 욕정을 느꼈다. 그걸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꿈을 꾸고도 차마 끝까지 시인할 수 없었던 것을, 김산은 서하의 집 앞에서 홀로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되는 걸지 무서웠다.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은데. 지켜야 하는 것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로 바뀌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들을 지키자면 서하를 잃어야 했다.

잃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해일마냥 덮쳐왔다.

서하가 당한 폭력을 공론화 시키고 싶다는 정의감은 단지 정의감 뿐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것을 근거로 서하에게서 그 좆같은 새끼를 떼어놓고 싶은 것이다.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으면서.

- 선배…….

올려다보는 눈, 젖은 눈, 사랑스러운 눈. 감정을 복기할수록 기가 찼다. 결혼을 하려고 했다. 제가.

- 축하드려요.

그때 서하는 웃고 있었나?

- 제가 선배한테 섹스 상대까지 읊어야 해요?

경멸의 기운이 지배적이었던 눈동자가 스쳤다.

- 형, 저 게이예요.

그때는,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 내 앞에서 꺼져요.

결정적으로 그 말이 김산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현관문은 장애물도 아니었다. 서하가 뱉은 거절의 말. 그게 주문이 되어 김산을 현관 안으로 들어설 수 없게끔 만들었다.

‘비겁한 새끼.’

끝까지 안에 들어서지 못한 건 오로지 제 탓이었다. 게다가, 서하가 다른 놈과 뒹구는 걸 보게 되는 게 무서웠다. 거친 숨은 진즉에 가라앉아 있었다. 짙은 탈력감이 김산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아직까진 심증에 불과했다. 그걸 확신하는 건, 서하의 입을 통한 것이어야만 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모양 없이 뒤얽혔다.

결과적으로 김산은 저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한 이유가 뭐든, 생애 가장 초라한 날이었다.

***

완전히 탈진했다. 가쁜 숨이 어지러이 퍼져 차디찬 바닥에 습기를 더했다. 서하는 방금 전까지 했던 플레이를 복습하듯 회상했다. 꼬리가 삽입된 채, 소파에 앉은 강제혁의 허벅지 위에 엎드려 엉덩이를 맞았다.

- 고양이들은 엉덩이 두드려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 아, 흐윽…….

- 어떤 고양이가 이런 음란한 소리를 내지?

단단한 손바닥이 엉덩이를 후려칠 때마다 안에 든 것이 둔탁한 통증을 선사했다. 서하는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떨어지는 스팽에 기쁘게 신음했다. 옆구리에 느껴지는 강제혁의 단단한 성기를 손으로 쥐려다 버릇이 없다고, 허벅지 뒤쪽을 케인으로 맞았다. 멍이 들었을 게 분명했지만 너무 좋아서 고통에 신음하며 울었다.

나중엔 뜨끈뜨끈해진 플러그를 뽑아내고 구슬을 담은 채로 성기를 삽입했다. 무식하게 느껴질 만큼 굵고 긴 성기가 뱀마냥 서하의 몸을 꿰뚫었다.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진하고 깊은 통증과 쾌락이 서하를 무너뜨렸다. 중간에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닥에 엎드려 추삽질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곤 눈앞이 몇 번이고 캄캄해졌다 하얗게 번지기를 반복했다. 욕설 몇 마디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저를 향한 것은 아니었고 흥분을 못 이겨 터진 것인 듯했다. 몽롱한 와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친 비속어에 속절없이 흥분했다. 가장 답이 없는 사람은 저였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또 박고 싶어지는데.”

절정의 감상을 되새기는 와중에 강제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 하나 꼼짝 할 수 없어 서하가 숨을 몰아쉬었다. 또 박아 달라고 말하면 야하고 좋겠지만 피로가 누적되어 당장은 무리였다. 그만큼 오늘의 강제혁은 심히 거칠었다. 내벽이 얼얼했다. 정액을 먹여주겠노라 선언했던 대로 콘돔도 없이 입이며 안에 질펀하게 씨물을 뿌려댔다.

강제혁이 가까이 옴과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있던 무언가를 툭 치는 소리가 들렸다. 데굴, 정액에 젖은 쇠구슬이 서하의 눈앞까지 굴러왔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이질적이었다. 쇠구슬은 거의 두 시간에 가깝게 서하의 몸 안에 품어진 덕에 뜨끈했다.

“후……. 더는 못, 움직여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는데.”

“내일 먹을게요…….”

“그래요, 카레는 묵어야 더 맛있지.”

그건 그래. 허리를 일으켜 안는 강제혁의 손에 서하가 끙 소리를 냈다. 주륵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정액이 상처를 스쳐 몹시 따가웠다.

“읏!”

“그런 소리 내는 거, 지금 상황에서 이서하 씨한테 좋은 일은 아닐 걸요.”

“하아…….”

강제혁의 성기는 식을 기미가 안 보였다. 어린 게 좋긴 좋구나. 서하는 메마른 입술이 버석거리는 것에 한숨을 내쉬며 흠칫흠칫 떨었다. 결국 또 욕실에서 강제혁의 손에 의해 세척당하는 동안 정액을 빼낸다는 명목으로 애널을 농락당했다. 그렇게 흥분한 강제혁의 성기를 목구멍 깊이 빠느라 숨도 막혔다. 어쩐지 목줄을 풀어내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더라. 기나긴 플레이를 끝낸 강제혁에게선 포식한 맹수 같은 분위기가 풍겨났다.

“자고 가요.”

서하는 저를 침대에 내려놓는 손길이 어쩐지 아쉬워,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강제혁의 소매를 붙잡았다.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가 입고 온 옷을 다시 입었기 때문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지 않길 바란 제 안의 숨겨진 심보가 터져 나왔다.

“…갈 줄 알았어요?”

의외라는 눈으로 한참을 보던 강제혁이 웃으며 물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옷 입으시길래…….”

“그럼 벗을까.”

그건 아니었다. 서하가 고개를 붕붕 젓자 강제혁이 웃었다. 어쩐지 민망해져 얼굴이 화끈했다.

“잠옷,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무거나 편한 거 달라고 하고 싶은데, 맞을지 모르겠어서.”

“…….”

“3XL 사이즈 있어요?”

당연히 없었다. 이불도 아니고. 서하는 저와 얼추 10cm 이상 차이날 것 같은 강제혁의 키를 보며 고민했다. 진짜 190cm 넘는 것 같은데. 3XL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에서 입는 옷들은 크게 입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목이 늘어나거나 김칫국물 자국이 남은 것들이라 망설여졌다. 건물주한테 그런 옷을 제 옷이라고 입히기가 몹시 수치스러웠다. 이런 수치는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출복 상태로 올라오라고 하는 것도 좀 그런데……. 크고 멀쩡한 옷이 두어 벌 있긴 했지만, 그건 김산이 입던 것이었다. 그건 입히기가 싫었다. 사실 그 옷에 코를 묻고 자위를 한 적이 있어서……. 아무리 제가 답이 없는 변태라도 양심에 찔렸다.

서하가 망설이는 사이 강제혁이 훌렁 옷을 벗는 게 보였다. 말리기도 전에 속옷 한 장만 남긴 강제혁이 침대 위로 올라와 서하를 끌어안고 누웠다.

“원래는 가려고 했어요.”

“아…….”

“충동적으로 온 거고, 얼굴만 보려고 했는데 얼굴 보니까 괴롭히고 싶어져서.”

제법 달콤한 말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지만, 서하에겐 그랬다. 한참 서하를 끌어안고 목덜미를 덧그리던 강제혁이 잠들기 직전인 서하에게 물었다.

“내 이름 새긴 걸로 하나 제작할까요.”

“뭘요…?”

“목걸이.”

돔이라면 제 섭에게 소유욕을 느끼기 마련이니 이상한 발언도 아니었다. 서하는 제 목덜미를 틀어쥐는 강한 압박에 밭은 숨을 뱉었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목덜미를 그러쥐고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내려다보는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흡을 차단당한 짧은 순간, 아래가 움찔대며 발끝이 곱아들었다.

“이서하 씨는 숨도 내가 허락해야 쉴 수 있어요.”

“흐윽…….”

그의 짙고 까만 욕망은 노골적으로 서하를 집어 삼키고자 했다.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들었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호흡조차 허락 받길 바라는 주인의 말에 복종한다는 의미였다. 몸의 떨림이 격렬해지기 직전 기도를 압박하던 손에 힘이 풀어졌다.

“크흑……. 하, 으읍…!”

산소가 부족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전부 앗아갈 것처럼 혀뿌리를 당기고 입천장을 긁는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 미끈한 타액이 입술을 적셨다. 피로가 해일처럼 덮쳐왔다. 서하는 흐릿해지는 머리로 생각했다. 브레스 컨트롤, 파란색. 존나 호…….

***

아침은 지난 저녁에 만든 카레를 데워 먹었다. 강제혁은 음식 솜씨가 있는 편인 듯했다. 아니, 아주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함께 양치를 하며 강제혁으로부터 오늘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하는 몸이 불편해 침대에 누운 채 그를 배웅했다. 복학을 했으니 바쁠 것이다. 먼 기억 속 저도 그랬다.

“연락하면 받아요. 늦지 않게.”

“…네.”

“신호 세 번 이상 가면 그때마다 스팽 10대씩 추가할 거예요.”

달콤하고도 살벌한 말이었다. 그리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하는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시야엔 천장의 네모난 전등뿐이었다. 성적인 쾌감을 만족스럽게 느끼면 숙면이 가능하다. 서하는 꿈조차 꾸지 않고 기절하듯 잠든 지난밤을 떠올리다 배꼽 아래가 간질간질해져 간밤에 강제혁이 베고 잤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원래 제가 안고 자는 베개이니 그를 의식한 행동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옅게 밴 강제혁의 향기가 콧속으로 스몄다.

“향수 좋은 거 쓰나보네.”

저는 향수 따위 뿌리지 않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향기를 맡고 있자니 어쩐지 관심이 생겼다. 나도 뿌려볼까. 킁킁. 조금 변태처럼 느껴져 코를 뗐다. 그러자 김산에 대한 생각이 났다.

연락이 없으니 먼저 연락하기도 뭐하고. 결혼이란 게 쉽게 엎어질 수 있긴 했지만, 연인들은 곧잘 헤어졌다 만나곤 했으니 지금쯤 혜인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을 수도 있었다. 난잡한 게이 후배 따위 관심도 없겠지. 씁쓸했지만, 제가 어찌할 도리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람 사이 관계란 게 그렇다. 김산이 제게 유의미한 인물이긴 했지만, 싫다고 간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 둘 재주는 없었다.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지난 밤 플레이의 늦은 후희를 즐기고 싶었다.

***

분명히 연락한다던 강제혁은 저녁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바쁜가. 서하는 틈틈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카레로 저녁까지 해치우고, 책을 읽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오늘은 청소해야지, 다짐했지만 묘하게 손이 가질 않았다. 빨래를 처리하고 심하게 지저분한 책상 위를 제외한 곳을 대충 청소했다. 그러고도 휴대폰은 잠잠했다.

“잠옷이나 좀 살까.”

제 집에 강제혁이 입을 만한 옷을 비치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종종 자고 갈 텐데. 서하는 쇼핑 어플리케이션을 켜서 3XL 사이즈의 잠옷 대용 이지웨어를 찾았다. 그가 직접 언급한 사이즈니 맞을 것이다. 두꺼운 흉통에 너른 어깨를 생각하면 이불마냥 큰 옷이 적합하지 싶었다. 김산이 입던 옷은 굳이 버리진 않았다. 자고 갈 수도 있고. 제가 또 그를 재울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생필품도 좀 봐야겠다.”

이렇게 된 김에 섬유 유연제며 두루마리 휴지 같은 것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배송은 전부 내일이나 내일모레 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완벽히 일과를 마치고 씻고 자리에 다시 누울 때까지 서하의 휴대폰은 잠잠했다.

목구멍이 탁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이 일었다. 먼저 연락해도 되나. 고민하는 사이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잠들기 바로 직전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휴대폰 알림음에 눈을 번쩍 뜨고 화면을 키자 도착한 것은,

「얼굴 좀 보여줘. 만나고 싶어.」

김산의 메시지였다. 메시지가 뜬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러운 문자였고 단박에 거절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서하는 지난번의 만남이 떠올랐지만 그건 잊기로 했다. 알겠다는 답신을 보내기가 무섭게 집 앞 카페에서 보자는 답장이 왔다. 부쩍 제게 집착하는 김산의 태도가 불편했지만, 매몰차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얼굴 안 볼 사이도 아니고. 둘 중 한 명이 이민 가는 게 아닌 이상 쉽게 잘라질 관계도 아니었다. 공적으로도 얽힐 여지가 다분하기도 하고.

입고 나갈 옷을 주워 올린 서하가 흠칫하고 굳었다. 구멍이 난 바지가 손 안에서 ‘입고 가려고?’라는 신호를 보냈다. 피로에 허옇게 질려있던 서하의 뺨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무의식적으로 집은 것인데 구멍 사이로 드나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가위질이 된 바지는 버리는 게 옳았지만, 어째선지 버리기가 그랬다. 나중에 또 쓸 일이 있을 수도 있고……. 구석에 던져진 터라 빨래와 청소를 할 때도 찾지 못 했던 듯했다.

‘쪽팔려.’

지난밤의 흔적이 완연한 그것을 빈 세탁바구니에 던져놓은 서하가 입을 옷을 찾기 위해 서랍을 뒤적였다. 다행히 같은 디자인의 검은 바지가 있었다. 쇼핑은 귀찮으니까, 마음에 드는 옷을 찾으면 여러 장 사는 습관 덕이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 보였기에 서하는 스웨터 위에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카페까지 가는 길은 짧은 거리지만, 바람이 차 코 끝이 시렸다. 카페 안으로 들어선 서하는 어렵지 않게 김산을 찾을 수 있었다. 제가 자주 앉는 창가 자리에 있었으니까.

“선배, 얼굴이 왜 그 꼴이에요?”

얼굴 좀 보여 달라는 말이 우습게, 서하는 김산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연실색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게 어디서 주먹질이라도 하고 온 사람마냥 엉망진창이었다. 입가는 찢어져 있고, 광대뼈에는 보랏빛 멍이 들어있는 데다 붓기가 아직 안 빠진 것이 맞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새였다. 이런 덴 빠삭하지.

“…별 거 아니야.”

“싸웠어요?”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인물이 아닌데, 난장판이 된 얼굴이 몹시 아파 보였다. 걱정 어린 서하의 얼굴을 마주한 김산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형 걱정도 하고, 기특하네.”

“그럼 걱정 안 하게 생겼어요?”

면상 다 조져 놨는데. 서하는 이 마당에 실없는 소리를 뱉는 김산을 노려보았다.

“어쩌다 그랬는데요?”

“질문 많네.”

“참나.”

대답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더 묻기도 어려웠다. 어색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감돌았다. 서하는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음료를 마셨다. 김산은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상처가 난 입가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제 엉덩이와 허벅지가 더 처참할 테지만.

“…서하야.”

“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초조함이 옮는 것 같았다. 서하는 갈증을 느끼며 음료를 한 모금 더 빨아 당겼다.

“…아니야.”

분명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서하는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물론 서하는 매는 언제든 환영이었지만-, 김산이 기어코 저를 잘라내겠다고 말할 거라면 최대한 빨리 해주길 바랐다. 게이인 저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이제 형 동생으로도 그만 봤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선배.”

“응.”

“저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동성애자가 커밍아웃을 하면 쫓겨나거나 뺨을 맞기도 한다는데, 저야 쫓겨날 집도 없었으니 그에게 뺨 정도는 맞아줄 용의가 있었다. 물론,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해야겠지만.

“서하야.”

“네.”

“미안해. 너를… 외롭게 해서.”

떨어진 말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서하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분명 모국어에 짧은 문장인데도, 고어로 된 한문 사료를 해석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가까이 있었으면서 네가, 그런 성향인 줄도 모르고…….”

그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단순히 동성애자의 성향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피학 음란증 성향을 말하는 건지. 김산의 눈앞에 맞아서 엉망이 된 몸을 보였던 적이 있기에 더 헷갈렸다. 서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동안 김산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응시하며 고해성사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형한테 말해줄 순 없었던 거야?”

미약한 원망이 서린 목소리에 서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다. 뭐가 되었든 내가 당신한테 그걸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까? 나는 너무 무서웠는데.

“나한테 의지하는 널 보면서, 자만했었어.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회한이 묻어나는 눈빛은 차마 서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찻잔에 비친 서하의 얼굴을 볼 뿐이었다. 김산은 작은 수면에 비친 서하의 낯을 보며 고백했다.

“네 과거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그래서 더 그렇게 생각했었나봐.”

“선배.”

“나는 네가, 누나에 대한 기억 때문에 여자를 안 만나는 거라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서하가 김산의 말을 대번에 잘라냈다. 날카로운 듯했지만 떨림이 완연한 음성이었다.

“착각했어. 서하야. 형이 무지해서, 그땐 그렇게 밖에 생각 못 했어.”

“선배…….”

“네 과거를 토대로 너를 판단해서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어. 서하야, 그런데…….”

서하는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김산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김산은 그런 서하를 바로 보지 못한 채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애는 만나지 말자.”

애라기엔 다소 어폐가 있지만, 김산의 눈에 스물세 살 먹은 강제혁은 애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말에 서하가 김산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에 김산도 서하의 눈을 마주해야만 했다. 허공에서 부딪힌 시선이 어지러이 얽혔다.

“그 애는, 그 애는 아니야.”

“선배.”

“월권인 거 알아. 그런데, 그거 아니야. 서하야. 형 말 한 번만 들어. 제발.”

“선배, 강제혁 만났죠.”

끝없이 말을 뱉어내던 김산의 입술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서하는 그제야 김산의 상처가 누구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

아무것도 닿지 않은 손바닥이 괜히 간질거렸다. 손에 감기던 머리카락의 감촉이나, 따끈하게 달아오른 맨 엉덩이, 물려주는 족족 삼키는 아래, 아파서 울면서도 그게 좋아서 얕게 미소 짓던 입가까지. 어느 하나 쉽게 잊히질 않았다. 초보라더니 사람 집어삼키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강제혁은 서하를 만난 뒤로 다른 섭에 대한 건 일절 떠올릴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인상을 깊게 남긴 섭도 처음이었다. 그러니 홀린 것처럼 답지 않은 제안을 내놓은 것이겠지만. 강제혁은 서하의 현관을 나서며 다시금 그를 데리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시간 좀 내주겠습니까.”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 복도 한쪽에 서 있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강제혁은 저보다 약간 작지만 체격이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애초 저보다 큰 사람도 흔치않다. 그는 객관적으로 호감형인 외모였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뾰족했다.

“누구시죠.”

“서하 아는 형이에요. 이름은 김산이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며 저를 훑는 시선에 강제혁도 인상을 찌푸렸다. 대외적으로 가장한 선한 낯으로 대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김산이라면, 제가 서하를 한참 예뻐하던 순간에 전화를 건 서하의 선배놈이었다. 강제혁의 기분이 삽시간에 불쾌해졌다.

“그러시군요.”

“…….”

“제 이름은 강제혁입니다.”

JH.Kang. 우산 손잡이에 새겨져 있던 이니셜과 같았다. 김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전부 이놈이었다. 겨우 진정시킨 화가 다시금 끓어오르는 것을 겨우 주저 앉혔다.

“서하 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시간 좀 내주시죠.”

그 말은 강제혁에게 있어 상당히 거슬리는 말이었다. 서하의 공적인 부분을 존중하지만, 어쨌건 제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같은 타인의 말은 반갑게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입씨름할 필요가 있나. 강제혁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타세요. 여기서 떠들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래요.”

살벌한 분위기의 두 남자가 승강기 안에 섰다. 꽤 넓은 편인 아파트 엘리베이터인데 순식간에 좁아졌다. 그 순간 침대에 누워있던 서하는 모를 상황이었다.

***

카페에 자리를 잡은 둘은 커피 값 지불의 문제로 한 차례 신경전을 치렀다. 김산은 이 어린놈의 자존심을 죽이고자 카드를 내밀며 가장 비싼 것을 시켜주겠다 입을 놀렸고, 강제혁은 그런 김산을 비웃으며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다행인 점은 애초에 강제혁이 돈으로 사람의 기를 죽이겠다는 심리를 이해 못 하는 타입이기에 언쟁까진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겨우 그런 걸로 우월감을 느끼고자 한다면 한 수 정도는 접어줄 의향이 있었다.

김산은 강제혁의 커피 값까지 계산하고 조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테이블에 착석했다. 제 학교 교수인 줄도 모르고 다리를 꼬고 앉는 모양새가 열 받았지만 그런 것까지 따지고 싶진 않았다. 커피가 나오고 서로를 스캔하던 시선이 맞물렸다.

“할 얘기 있으면 먼저 하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김산이 자존심을 세운답시고 제일 비싼 것을 시켜주었으니, 이름은 몰랐지만 생김새로 보아 고급 원두를 갈아 내린 드립 커피일 터였다. 강제혁이 잔을 손에 쥐고 관심 없단 태도로 김산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세요.”

“서하와 사귀는 사이예요?”

김산은 밤새 고민하던 첫 질문을 던졌다. 나름대로 고르고 고른 말이었다. 물론 서하는 섹스 파트너라고 했지만, 강제혁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으면 했다. 아니, 차라리 그 편이 낫나. 서하의 몸을 그 모양 그 꼴로 만들어 놓고 뻔뻔하게 연인 사이라고 하면 더 화가 날 것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당장 주먹을 날려도 시원치 않았기에, 김산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남몰래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런 시시한 관계가 아니죠.”

“…무슨?”

그 말은 김산의 예상 답안에 없던 것이었다. 섹스 파트너일 뿐이라고 하거나, 서하가 일방적으로 절 좋아하는 관계라고 할 줄 알았다. 사실은. 그러지 않고서야 서하가 그런 몰골이 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연인 사이가 시시한 거면 대체 둘은 어떤 사이란 말일까.

“이서하 씨에 대해 뭘 얼마나 알아요?”

강제혁의 물음에 김산의 얼굴이 대놓고 구겨졌다. 그건 제 자존심을 짓뭉개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저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저보다 한참은 어릴 놈에게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곤 생각지도 못 했는데, 결국 화를 참지 못한 김산도 이죽거리며 되물었다.

“본인은 서하를 잘 안다고 생각하나 보네요? 뭘 안다고 자신합니까? 섹스 취향? 그게 이서하야?”

분노가 점차 짙어져, 짓씹듯 말을 뱉는 목소리가 짐승의 우짖음처럼 들렸다. 그 말에 강제혁 역시 턱을 세게 다물었다. 제 얘기를 좀처럼 털어놓지 않는 서하가 불만스레 느껴지던 차였기에, 더욱 그랬다. 서하를 다 안다고 자부하는 남자가 아니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문 강제혁을 본 김산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서하한테서 떨어져. 너는 서하를 존중하지 않잖아. 그냥 갖고 놀려고 순진한 애 농락하는 거야.”

“갖고 놀아? 재밌는 얘기를 하네.”

“재미?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서하한테서 떨어지라고.”

“사람이 하는 말이어야 말 같이 들리지. 그쪽이 뭔데 참견이야?”

“뭐? 이 새끼가.”

“추하고 재밌네.”

예의라곤 집어치운 일갈이 연이어 오고 갔다. 그 다음은 뻔했다. 강제혁의 멱살을 당긴 김산이 카페를 박차고 나가 주먹을 날렸고, 강제혁도 지지 않고 김산을 두들겨 팼다. 길바닥에 피가 튀도록 싸움질을 한 두 성인 남자는 주변 신고로 인해 경찰서에 가야 했다. 모두 서하가 빨래를 하고 책을 읽고 간단히 청소를 하던 시간의 일이었다.

***

카페에서 이야기하기엔 다소 부적절한 대화 내용에, 두 사람은 인적 없는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하의 집이 가까웠지만 김산은 지금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서하 역시 권하지 않았다.

밤길을 걷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벤치에 앉은 채 인상을 구긴 서하가 유독 추워 보였다. 김산은 자판기에서 뜨거운 캔 커피를 사서 차게 굳은 서하의 손에 쥐어주었다. 잠깐 스친 손끝이 저릿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말을 잇기가 어려워 차가운 음료를 들이켜 목부터 축였다. 음료가 주는 청량감으로도 쉬이 씻겨내려 가지 않는 불안이 김산을 괴롭게 했다.

“강제혁 만난 거 맞아.”

“왜요?”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고개를 쳐들고 저를 바라보는 서하의 눈빛이 얄궂으면서 안쓰러웠다. 김산은 폭력을 애정이라 믿는 서하가 가여웠다.

“어쩌다 마주쳤어.”

“그게…….”

말이 되냐고 묻는 것 같은 뉘앙스에 김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서하야.”

“…네.”

“형은 네가 걱정돼.”

대외적으로 비춰지는 서하는 심지가 굳고 만사에 무심한 남자였지만, 김산이 아는 한 어딘가 무른 구석이 있었다. 멀쩡한 허우대로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었으니 그런 쪽으로는 더욱더 맹탕일 게 뻔했다. 강제혁이란 놈도 아마 그런 점을 파고 든 거겠지. 게다가 서하는 경험이 전무하니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 가지고 서하를 구슬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산이 캔을 구기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

“걔는 너 안 좋아해.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못 그래!”

김산은 아예 단정 지어 말했다. 틀린 명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걔 안 좋아해!’

김산의 말을 들은 서하는 속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진짜 안 좋아하나? 안 좋아한다고 생각한 주제에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일단은 자꾸 월권을 행사하는 김산에게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생각은 미뤄두었다.

김산은 제 말을 듣는 서하의 표정이 미묘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형은 네가 그런 잘못된 관계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선배…….”

“도와줄게. 외로운 게 문제면 형이 곁에 있어 줄 수 있어.”

김산은 수도 없이 고민하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수정을 거듭했던 문장을 내놓았다. 적합한 문장인지에 대한 평가 기준은 제 욕심이 들어 있진 않은 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마음은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했다. 뭐든 서하가 다치지 않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돼요?”

제게 되묻는 서하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무슨 의미일까. 요즘의 서하는 너무 어려웠다.

“안 그러셔도 돼요. 다친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그냥… 취향이라고 생각하세요.”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김산은 아연실색해서 서하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서하야.”

“선배가 걱정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알지. 내가 왜 몰라. 그런데,”

답답해하는 서하보다 제가 더 답답했다. 김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개자식이 대체 서하를 어떻게 홀린 건지, 화가 치밀었다.

“선배 요즘 이상해요.”

깔끔하게 떨어지는 선언에 김산의 낯이 허물어졌다.

“…그래. 나 이상해.”

서하의 말이 옳았다. 이상했다. 그런 꿈을 꿔서? 아니면 서하의 상처를 봐서? 이젠 서하를 위해 서하를 설득하는 건지, 제 혼란한 감정을 다독이기 위해 이러는 것인지 분간키도 어려웠다.

“대체 왜 이러세요. 저한테…….”

“네가 걱정되니까!”

감정 서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가 서하를 걱정하는 것에 있어선 다른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서하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제 예상이 옳았는지, 서하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때 아닌 비둘기 우는 소리가 음산히 들려왔다. 추위에 곱은 서하의 손을 김산이 두 손으로 쥐어 감쌌다. 따뜻했던 커피는 식은 지 오래였다.

“서하야.”

“…네.”

단정한 말씨가 가슴에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 기분이 이상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안에 고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이지만 문득 뱉고 싶었다.

“…말씀하세요.”

재촉하는 서하의 눈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터지고 말았다.

“좋아해.”

제 고백을 들은 서하의 낯은 무감했다. 제가 들은 것이 무엇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무엇보다 그 말을 뱉은 김산 역시, 제가 뱉은 말의 정체를 깨닫는 데 한참이 걸렸다. 느린 속도로, 크게 뜨이는 서하의 눈동자에 제 얼굴이 담겨있었다. 일렁이는 눈망울에 비친 낯이 흐릿했다.

“서하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서하의 팔을 잡아채고자 했으나 늦었다. 김산은 제 손 앞에서 흩어진 서하의 손가락에 주먹을 그러쥐었다. 달려가 붙잡을까도 했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미 그놈이 서하에게 각인된 것이다.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이를 어미라 믿는 아기오리처럼.

첫 감정의 포문을 연 것은 그 개자식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제게 폭력을 휘두르던 순간 가슴이 싸늘해진 이유는, 서하가 이런 폭력에 노출되기까지 제가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좋아해. 제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낯간지러운 말이 족쇄처럼 제 발을 옭아맸다. 저 역시 황망했다. 친동생보다 아끼는 후배에게 결코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었으니까.

***

반쯤 열린 창으로 칼날 같은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서늘함을 넘어 시린 추위에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지금의 열기는 성적 흥분이 아니라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정당한 권리를 침해당한 불쾌한 기분이 전신을 휩쓸었다. 이런 종류의 불쾌감은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강제혁은 불 꺼진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쯤 김산은 서하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짜증이 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김산은 서하에게서 저를 떼어내고 싶어 했다. 그 눈이 뭘 말하는지 모를 남자는 없을 것이다. 까만 눈동자에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진한 애정에 구역질이 나고 열이 올랐다.

플레이 파트너나 DS를 맺은 관계라도, 그 상대보다 우선하는 바닐라적 연애 관계가 있는 경우는 없지 않아 있었다. 강제혁은 여태까지 돔섭 관계와 연인을 분리하는 사람들을 완벽히 이해해왔다. 복종과 지배, 피학과 가학이 없는 오로지 감정으로 얽힌 관계를 따로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이들은 대개 제 연인에게 SM 파트너의 존재를 숨겼지만 들키는 일도 더러 있었다. 저 역시 그런 상황에 놓일 때가 왕왕 있었다. 강제혁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들이 저로 인해 파탄이 나건, 사이가 더 돈독해지건 제가 알 바가 아니었다. 끽해야 플레이를 위한 파트너였으니까.

하지만 서하는 달랐다. 서하에게 연애관과 DS관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저는 그런 것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 대한 권리를 전부 달라고 했던 건 바로 그런 의미였다. 비겁할 수 있지만, 확실하게 도망칠 곳을 차단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단순히 DS를 맺자는 걸 넘어선 더 농도 짙은 제안. 그 말에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서하는 종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과 다름이 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그런 서하에게 김산이라는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서하가 저와 섹스 하는 사이라는 건 확실히 아는 듯했다.

- 본인은 서하를 잘 안다고 생각하나 보네요? 뭘 안다고 자신합니까? 섹스 취향? 그게 이서하야?

열 받아 내지른 것치곤 제법 유효한 타격이었다. 그래도 강제혁에게 있어 치명타까지는 아니었다. 섹스 취향이란 게 곧 그 사람의 근본을 투영한 게 아니던가. 제가 이서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알아내면 그 뿐이다.

- 난 10년이나 서하 옆에 있었어.

김산이 주먹을 휘두르고 일갈하듯 던진 말에 강제혁은 코웃음을 쳤었다. 그리 긴 세월동안 서하의 곁을 지키며 그 몸에 생채기 한 번 내본 적 없는 놈이 뭐가 무섭겠냔 말이다. 오늘 새벽까지도 서하는 제 품에 안겨 잠들었다. 그런 제 비웃음에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꼴이 알기 쉬워 강제혁은 또 웃었다. 그리고 다음부턴 맞아주지 않았다. 맞아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소란에 경찰이 당도했지만, 쌍방이 그저 단순한 다툼이라고 대답하니 경찰 측에서도 더 말하지 않고 둘을 돌려보내 주었다. 촌극이 따로 없었다.

- 병원 다녀와서 서하를 만나러 갈 거야. 내가 서하 설득할 거고, 너는 그 동안 걔한테 연락하지 마. 서하 마음 돌릴 수 있어. 앞날 창창한 학생이 어머니한테 7살이나 많은 강사랑 연애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것도 남자끼리.

다짐을 하는 건지, 경고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경멸인 지. 꼴같잖은 말에 강제혁은 혀를 찼다. 가만 보니 호모포비아였다. 호모포비아인 게이가 더러 있으니 뭐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 발언은 아주 우스웠다. 이미 죽은 어머니가 제게 무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살아 계셨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저를 애 취급하는 놈이 짜증스러웠지만, 그가 서하를 설득한다는 말엔 흥미가 일었다. 이서하가 당신 말을 들을까?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 해 보든가.

- 뭐?

- 이서하, 설득해 보라고.

강제혁은 꽤 자신했다. 서하는 결국 제게 올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하의 몸에 저를 새겨 넣기엔 결코 짧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물론 그렇게 김산을 보내두고, 제법 초조한 기분으로 서하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가 연락하겠다고 했던 사실이 신경 쓰였지만, 공정한 결과를 위해 조금 미뤘다. 제 참견 없는 서하의 온전한 결정을 기다리기 위해 먼저 전화를 걸지 않은 것이다.

하늘이 어둑해지자 빛이 없어진 실내가 깜깜했다. 휴대폰은 울리지 않고 있었다. 강제혁은 치솟는 짜증과 불안을 애써 눌렀다. 그럼에도 제게 올 것이란 자신감은 여전했다. 시간이 자꾸 지나고 있긴 했지만.

얼마 안 있어 배터리가 떨어질 쯤, 부서진 휴대폰 액정이 밝게 빛났다. 전화가 걸려왔다. 서하에게서. 내도록 굳어있던 강제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름 세 글자가 반짝거리는 게 만족스러웠다. 잠시 그 반짝거림을 감상하던 강제혁이 휴대폰을 들었다.

[강제혁 씨, 지금 어디예요?]

떨리는 목소리가 제 위치를 묻고 있었다. 예쁘기도 하지.

“어디면 어떡할 건데요?”

강제혁이 다정하게 물었다. 문득 당장 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가려고요.]

얕게 떨리는 서하의 음성이 강제혁의 단전 아래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유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지금은 서하가 제 곁으로 오고자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

폐부를 찌르는 칼바람에도 걸음은 쉬이 느려지질 않았다. 서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건 장밋빛 고백을 들은 사람의 낯색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귀신을 본 사람에 더 가까웠다. 단순히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겪은 것보다 더 심각했다. 대로변에 다다르자 그제야 발이 멈췄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고이고 손발이 차게 식어갔다.

- 좋아해.

낮은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리자 모골이 송연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문득 손에 쥐고 있던 캔 커피의 온도가 느껴졌다. 서하는 부정 탄 물건을 버리듯 그것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대체…….”

허옇게 질린 서하의 낯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미친 새끼. 그 다음은 욕설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산이 저를 쫓아오지 않은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하는 대로변에 홀로 남겨져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 씨발…….”

서하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김산이 저를 좋아한다고 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열기를 가득 담아 그렇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물론 지난 10년간 서하가 김산의 꿈을 꾼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꿈은 없었다. 꿈에서 서하는 김산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뺨을 맞고, 거친 삽입을 당했다. 최근 강제혁과의 3p 꿈에서 끝까지 다정했던 김산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내용이 그랬다. 그게 서하가 바라는 김산의 모습이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하는 꿈속에서조차 김산에게 그런 달콤한 마음을 바라지 않았다.

실은 누구에게도 바란 적 없었다. 그저 저를 한계까지 몰아 붙여줄, 속박하고 괴롭혀 줄 주인을 원했을 뿐이다. 한때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갖기도 했지만, 그건 현실에 부딪혀 희뿌옇게 스러졌다. 애초에 평범한 애정보다 더 짙고 쓴 감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서하는 그런 인간이니까. 단언컨대 그 긴 시간동안 서하를 스쳐 지나갔던 숱한 소망 중에서, 김산과 ‘좋아해’같은 닭살 돋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없었다. 김산 뿐만이 아니었다. 누구와도 그런 일을 하고 싶단 상상은 해본 일이 없었다.

그건 좀, 역겨운 일이었다. 그런 지극히 감성적인 말들은, 지나고 나면 후회만 남길 뿐이다. 서하가 아주 어린 시절 받았던 손길과 애정을 지금에 와 순수하게 그리워하지 않는 것처럼. 강제혁에게도 그런 생각은 갖고 싶지 않았다. 감정으로 점철된 말들은 결국 저를 힘들게 할 뿐이다.

“개 같아…….”

김산은 제게 그런 말을 해선 안 됐다. 서하가 그와의 유대를 지키고자, 끝까지 내뱉지 않았던 그 엇비슷한 감정을 김산은 함부로 꺼내 놓고야 말았다. 결혼이 엎어지고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좋아한다는 좆같은 말을 하다니, 생각할수록 실소만 나왔다.

서하의 바른 입매가 우그러졌다. 처참했다. 처참한 기분만큼 육체적으로도 비참해지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서하가 다소 거친 움직임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의심할 것도 없이 강제혁이었다. 그는 저를 갖고 싶어 할망정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쩐지 가슴께가 서늘해졌지만 그게 서하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

지옥문마냥 새카만 현관을 목전에 둔 서하가 낮게 침음했다. 충동적인 감정으로 제게 폭탄 고백을 한 김산을 마음속으로 질책해놓고, 저 역시 충동적으로 강제혁에게 전화를 걸었음을 이제야 인지했기 때문이다. 상당히 늦은 깨달음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아주 늦진 않았다. 현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머리를 좀 식힌 후에 전화로 양해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나중에 호되게 혼이 나더라도, 그건 그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제혁의 체벌쯤이야 서하에겐 좋았으면 좋았지, 나쁠 일도 아니었고. 급하게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다고, 아직 어린 학생인 강제혁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의 문제를 변명으로 내놓으면 된다.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쉬이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돌아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이성과 아무렇게나 무너지고 싶은 감성이 마구잡이로 충돌했다. 그렇게 이성과 감성이 서로 몸집을 불리며 한사코 지지 않으려 하는 까닭에, 서하는 그 현관문 앞에서 30분이란 시간을 허투루 날렸다.

“…이러지 말자.”

자꾸만 안으로 들어서려는 자신을 나무라며 서하가 뒤돌아섰을 때, 거짓말처럼 현관문이 열렸다. 철컥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수갑이 채워지는 소리와 흡사하게 들렸다.

“어딜 가려고.”

울림이 깊은 음성이 서하의 발목을 잡아챘다. 돌아보기 무섭다. 느리게 옷감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강제혁이 억지로 절 돌려 세우면 차라리 낫겠는데, 저와 달리 너무 여유로웠다. 드러난 뒷목을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강제혁 씨.”

지금이라도 가야 한다고 말할까.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이름만 부르자 느린 한숨이 들려왔다. 가야한다는 말을 하려면 얼굴을 봐야 하는데, 얼굴까지 보면 차마 그런 말을 못할 것 같다. 서하는 강제혁 앞에서 삽시간에 무너지는 제 이성을 책망했다. 인내심이라곤 좆도 없다.

“얼굴 보여줘야지.”

어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야단을 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동시에 스치는 메시지가 있었다.

「얼굴 좀 보여줘.」

온점까지 단정히 찍혀있던 문자. 김산의 메시지에 서하는 얼굴을 보여주려 만남에 응했다. 그러니 강제혁의 말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단순히 선후배 사이인 김산과 저보다 더 진한 관계이니까. 플레이와 일상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플레이 파트너를 넘어서 그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하지 않았던가. 숨 쉬는 것까지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던 그 말은 DS보다도 더 진득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 권리를 달라고 했다. 그건 DS보다 더한 관계가 맞았다.

“표정이 안 좋네.”

“…….”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예요?”

뺨을 당겨 쥐는 강제혁의 손바닥이 건조하고 부드러웠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못하게끔 윽박을 지르고 매질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서하의 바람과 달리 강제혁은 다소 뭉근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에게 감화되는 자신이 우스웠다.

“뺨이 다 얼었잖아요.”

내려다보는 시선이 저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서, 서하는 함부로 마주하기가 힘겨웠다. 가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미 돌아가기로 결론을 내려놓고,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강제혁은 거칠게 잡아당기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으면서 그저 서하의 뺨을 덥히고 있었다. 그 손이 제 입에서 나올 가겠단 말을 가로 막는 것만 같았다.

“…나한테 온다며.”

메마른 눈이 묻는 것은 서하가 전화로 전했던 말이었다. 제가 먼저 그에게 어디냐고 물었고, 어디면 어쩔 거냐는 낮은 되물음에 그렇게 답했었다.

- 제가… 가려고요.

발이 멋대로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강제혁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걸렸다. 서하는 속내를 읽힌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주인 앞에선 부끄러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까만 철문이 서하를 집어 삼켰다.

***

들어오기 전엔 지옥문 같다고 생각했던 현관인데, 들어서기가 무섭게 포근한 훈기가 스몄다. 보일러를 얼마나 튼 건지, 서하는 그제야 제 몸이 차게 얼어 있었음을 통감했다. 한데 오랫동안 서 있던 탓에 몸이 좀 따뜻해지자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색스러운 분위기가 될 것이라 여겼건만 강제혁은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차라도 좀 줄까.”

“…네.”

덩달아 긴장이 풀린 서하가 소파에 무너지듯 몸을 맡겼다. 차. 문득 유자차가 떠올랐지만 애써 지웠다. 김산이 유자청을 좀 더 달라고 했었는데. 이 와중에도 김산 생각이 나긴 나는 것이 10년 세월의 위력인가 싶었다.

“그래서, 왜 왔어요?”

서하가 멍하니 원목 테이블의 끄트머리를 응시하는데, 탁 소리와 함께 찻잔이 주어지고 질문이 떨어졌다. 지금이라도 돌아간다고 할까. 입술을 열기 직전까지 서하는 끝없이 고민했다.

“…저,”

“내 얼굴 왜 이런지 안 물어봐요?”

결국 돌아가야겠다고 말을 꺼내려던 때, 생각지 못한 공격이 들어왔다. 조금 더 밝은 곳에서 본 강제혁의 얼굴엔 분명히 생채기가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김산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이었으나, 어쨌건 싸움의 증거론 충분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극심한 고뇌가 스쳤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가 바라는 걱정을 내놓을까. 그러면 편할 것이다. 다만 김산이 그와 다툼을 했다고 제게 고했으니, 싸움의 당사자인 강제혁이 김산과 저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었다. 최소한 공적인 관계는. 그러니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저를 살피는 눈이 뜨겁다. 그리고 서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강제혁은 연락을 받기 전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 그가 먼저 제게 연락을 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죄송해요.”

“뭐가?”

서하의 입에서 튀어나간 사죄의 말에 사유를 묻는 말이 돌아왔다. 단출한 그 물음은 실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하는 고심했다. 무엇을 사죄해야 할까. 너무 많았다. 그의 얼굴이 그렇게 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 상처에 대해 먼저 묻지 않은 것? 결국 잘못은 하나였다. 그에게 저에 대한 권리를 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놓고, 김산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

“얼굴, 다치게 한 거요.”

하지만 서하는 표면적인 답만 내놓았다. 김산이 제게 고백을 한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을 테니 강제혁은 거기까진 모를 것이다. 그저, 극성맞은 아는 형 정도로 생각해주길 서하는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서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다행히 강제혁 역시 따져 묻진 않았다.

“얼굴만 다친 것 같아요?”

“다른 곳도 다쳤어요?”

김산이 드디어 미쳤나. 어린애를 때려? 강제혁은 어린애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김산과 비교하면 13살이나 어렸다. 그건 김산이 군대에 있을 적에 강제혁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단 뜻이다. 서하가 덜컥 걱정이 일어 크게 묻자, 강제혁이 문득 윽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배를 감싸 안았다. 김산이 발로 차기라도 한 걸까. 맞는 거라곤 관심도 없는 인간들이 왜 치고 박고 싸워서는! 서하가 울컥해 강제혁에게 다가앉으며 물었다.

“어딜 어떻게 다쳤는데요.”

“볼래요?”

강제혁이 서하의 손을 끌어다 제 배에 갖다 대곤 작게 웃었다. 단단한 복근의 굴곡이 매만져졌지만, 웃음으로 보아 아픈 게 아니었다. 놀림 당한 것에 괜히 자존심이 상한 서하가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일순 훅 당겨진 손목 탓에 순식간에 강제혁의 품안으로 몸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잠시만…….”

“싫으면 엿 날려요.”

또 그놈의 엿 타령……. 허리를 깊게 끌어안으며 속삭이는 강제혁의 말에 서하는 괜히 코끝이 간질거렸다. 손가락이 얌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한 강제혁이 서하를 제 무릎 위로 앉혀 깊이 안았다. 이런 낯간지러운 스킨십을 할 사람으론 안 보였는데.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엉덩이 아래에서 무언가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열기가 도는 분위기에 서하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혼나려고 왔잖아.”

“읏…….”

자세 탓에 시선이 딱 맞물렸다. 그가 내려다보는 것이 익숙했는데, 묘하게 아래에 있는 눈이 기이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서하 씨 만나기 전엔 몰랐는데, 내가 거짓말 치는 걸 싫어하네…….”

“…….”

“어떻게 생각해요.”

거짓말 치는 거 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괜히 반박하고 싶었지만, 엉덩이를 쥐는 손이 좋아 서하는 일부러 더 입을 꾹 다물었다.

“전에는 누가 나한테 거짓말 치든 말든 관심 없었거든요.”

강제혁의 부가설명에 서하가 눈을 굴렸다. 엄연히 따지자면 저는 거짓말을 친 게 아니었다. 구태여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근데, 말 안 했으니까 거짓말 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더 싫은 것 같아요.”

모호한 표현이지만 서하의 양심을 제법 대차게 찌르는 말이었다. 강제혁은 시종일관 의아한 화법을 썼다. 호오의 감정을 이제 막 깨달아 가는 사람 같았다.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정면으로 들어온 질문은 마치 곧게 날아든 창 같았다. 전쟁 중이었다면, 가슴에 박혔을 것이다.

“대답해 봐요.”

이쯤 되면 답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잘못 대답했다간 덫에 걸리는 것이다. 서하는 최대한 그 덫을 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김산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김산도 저도 방금 안 것인데, 강제혁이 알 리가 없었다. 김산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생판 남인 강제혁에게 제 감정을 고백했을 리도 없을 것이고. 게다가 제 입으로 뱉어 기정사실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며칠만 지나면 김산 스스로 착각이었노라 정정할 것이란 희망마저 있었다. 그러니 더욱더 그런 사실을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응?”

채근하는 입술이 매혹적으로 움직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오늘 싸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고? 그건 정말 끔찍한 대답이었다. 서하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니면, 제가 10년간 그 사람에게 짝사랑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자위용 반찬으로 썼다고? 그건 더 끔찍했다. 제 권리를 앗아간 남자가 그 사실을 알고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을까.

“대답하기 싫어?”

“…….”

입술과 입술이 가까웠다. 부드럽고 단호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그가 얄궂었다. 서하는 제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어져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울고 싶어 이곳에 온 것인데, 이런 식으로 울고 싶진 않았다. 감정적인 부분으로는 울고 싶어도 쉬이 울음이 나지 않는 게 제 형편이라, 육체적으로 고통 받아 울음을 터트려 해소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를 괴롭혀 몰아붙이던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속을 알 수 없는 심판자만 있는 상황이 몹시 야속했다. 결국 서하는 대답 대신 고혹적인 그 입술에 제 것을 포갰다. 혈기왕성한 어린 주인의 몸이 달아오르기를 바라며.

그리고 다행히도, 그 얕은 수가 먹혀들었다.

“읏!”

“하……. 네가 지금 나랑 놀자는 거지.”

머리채를 거머쥐는 손과 낮은 한숨소리가 전율을 불러 일으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움츠러들거나 공포감, 불쾌감 따위를 느꼈을 상황에서 서하는 순식간에 발기할 만큼 흥분했다.

“혼내주세요, 주인님…….”

고전적인 멘트로 불을 지펴주었다. 어느 순간 마주친 눈은 광기와 색욕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대답은 미룰 수 있었다.

***

슬금슬금 추위가 물러가고, 어느덧 4월 중순이었다. 시간은 시름과 상관없이 흘렀고 어느 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봄이 오고 있었다. 오다가다 마주칠 법도 한데, 일부러 피해 다니는 건지 김산은 보이질 않았고 서하는 덕분에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중간고사 싫다…….”

당면한 문제를 제외한다면.

“레포트 좆 된다. 나 네 개 밀렸어.”

“과방에서 밤 샐래? 나도 시험 공부해야 돼.”

“돌았냐. 거기 지금 복학한 남선배들한테 점거 당함. 쓰레기 냄새 나.”

제 옆을 지나가며 걸걸한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 역시 저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벚꽃이 하나 둘 봉오리를 터트릴 조짐을 보일 무렵, 그 꽃말이 중간고사라는 명언이 빛을 발할 시기였다. 학생들은 중간고사로 대체 리포트며, 시험을 치룰 것을 걱정한다면 서하는 채점을 하는 게 싫어 골이 나 있었다.

벌써부터 싫다. 악필 속에서 정답 찾기. 조교 시절에도 무던히 하던 것이지만, 제겐 그런 귀찮은 일을 처리해 줄 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복학하고 21학점을 수강 중인 의외의 모범생 강제혁과도 만나기가 어려웠다. 제 쪽에서 먼저 피해 주기 싫다고 강력히 부탁해 만남을 미룬 것이긴 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마지막으로 진하게 플레이를 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에스프레소 도피오요. 아메리카노도 한 잔 주세요. 헤이즐넛 시럽 넣어서.”

“4700원입니다.”

“캐리어에 담아 주세요.”

학내 카페에서 간단히 커피를 시킨 서하가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오늘은 월요일도 아니었지만, 어쨌건 서하는 학교에 와야 했다. 서하가 오늘 향하는 장소는 김산을 마주칠 위험도가 높은 곳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선배님께서 부르시는데.

“들어오세요.”

똑똑똑, 여상한 노크소리와 대답이었다. 서하가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자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사람이 보였다.

“선배.”

“아, 왔어?”

오늘 서하를 학교로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우혜인이었다. 서하의 학부 시절 학과 선배이자, 김산의 전 약혼자. 애초 혜인과 서하는 나이차가 제법 났기 때문에 같은 학생의 입장으로 학교를 다닌 일은 없었다. 서하가 신입생이던 시절, 혜인이 학과 사무실에서 조교로 근무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축이었다. 그때 서하는 매 학기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고, 그런 서하에게 서류적인 부분을 고지하던 게 혜인이었다.

“커피 사왔어요. 헤이즐넛.”

“뭘 그런 걸 사 와. 여기 차 많다.”

“찻잎 모으세요?”

“내가 안 모아도 남들이 사다 주니 많지. 거기 앉아.”

안경을 쓴 혜인의 얼굴이 피로해 보였다. 교수 되면 좀 편한가 했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다. 서하는 혜인이 권한 자리에 앉아, 제가 가져온 커피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다소 산만하게 울려 퍼지고, 한 십 분쯤 지났을까. 기지개를 켠 혜인이 서하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구실 안은 꿉꿉한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환기 좀 하고 살아요.”

“창문 열고 오든가.”

“…안 답답하세요?”

“익숙해지면 별 생각 안 들어. 추우니까 창문 열면 죽는다.”

그 말에 서하가 꼼지락 거리던 손을 얌전히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익숙해지려고 노력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질문이 날아들었다.

“너 요즘 김산이랑 연락 안 해?”

서하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리다 테이블 위로 박혔다. 질문에는 의도가 있기 마련인데, 혜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더욱 그랬다. 그 뒤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서하조차 알 지 못했다. 혜인이 제가 김산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도 모르겠고.

“왜 물어 보세요?”

기껏해야 이런 대답밖에는 떠오르질 않았다. 서하의 되물음에 혜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하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싸웠냐?”

말끝에서 느껴지는 아주 한심하다는 뉘앙스가 서하를 아프게 찔렀다. 겨우 그런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와 김산 사이의 문제를 혜인에게 털어놓기도 이상했다. 선배의 전 남자친구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문장으로 떠올려 보니 더욱 개 같았다.

“아니에요. 애들도 아니고 뭘 싸워요.”

“그래? 요즘 김산 하고 다니는 꼴이 영 거지같아서 물어봤어.”

“선배한테 차여서 그런 거겠죠.”

“…알고 있네? 죽어줘야겠다.”

걸렸다. 서하는 노련하게 답을 끌어낸 혜인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게다가 원치 않는 정보도 얻었다. 김산의 현재 상태 말이다. 책잡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혜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구라야. 안 죽여. 나 때문에 그러고 다니는 거면, 걔가 나랑 밥을 먹겠냐? 오늘 점심도 같이 먹었는데.”

“그럼 다시 사귀세요.”

“안 해. 걔 너무 늙었어.”

혜인은 농담하듯 이죽댔다. 이쯤 되니 답답해졌다. 혜인이 저를 부른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본심을 드러내지 않으니 영 어려웠다. 친했던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 더 친해질 생각도 없는데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려니 무척 불편했다.

“왜 부르셨어요? 오라고 하셨잖아요.”

결국 서하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얼굴 보려고.”

“갑자기요?”

“왜, 싫어?”

근래 들어 제 얼굴 찾는 이가 부쩍 많아진 것 같아 서하는 기분이 묘했다.

“그럼 보여 드렸으니까 갈래요.”

“너네 싸운 거 아니면 김산 보고 가. 나 때문에 너희 사이 좆 된 것 같아서 괜히 기분 더럽단 말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말도 안 하고 네 김산 건드려서 빡쳤니? 맛도 안 봤어. 걱정하지 마.”

혜인이 또 다시 농담을 던졌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 그런 걸 알기에 서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따지자면 혜인의 탓은 아니었지만, 혜인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긴 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혜인이 자책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이렇게 혜인과 마주 앉아 있으니 괜히 김산과의 일이 더 선명히 떠올랐다. 덮어두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싶었는데, 더군다나 김산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으니 서하가 할 일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문득 얼굴을 보고 싶은 날이 있긴 했다. 함께 한 세월이 세월인지라. 유자청도 날이 따뜻해질수록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 더 눈에 밟혔고. 기왕이면 김산이 그때 일은 착각이었노라 선언하고 다시 웃는 얼굴로 다가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얄궂어서.

그리고 문이 덜컥 열렸다.

“왜 자꾸 바쁜 사람을 불러요?”

“왔네.”

조금 마른 듯한 김산이 연구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혜인보다 서하를 먼저 본 김산이 대놓고 딱딱하게 굳었다. 서하 역시 갑작스러운 만남에 얼이 빠져 시선을 피하지 못했고.

“둘이 얘기 좀 나눠. 나 임 교수님이 부르신다.”

“누나! 갑자기 이게 무슨,”

“시끄러워. 입은 서하 앞에서 털어라. 너 능률 떨어져서 더 못 봐주겠어.”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혜인이 먼저 선수를 치고 문 밖을 나섰다. 꿉꿉한 종이냄새와 커피향이 가득한 연구실 안에 어정쩡한 자세의 두 사람이 덩그러니 남고 말았다. 거의 한 달만의 만남이었다.

***

시계 초침 소리가 정적을 초 단위로 깨부수며 요란히 제 할일을 하고 있었다. 가보겠다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김산의 상한 낯을 마주하자 서하는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차라리 그가 아무렇지 않게 제 앞에 앉아 잘 지냈냐는 둥 시답잖은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다면 한 결 나았을 텐데.

“…….”

“…….”

그때 그 눈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니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결국 정적을 참지 못한 서하가 먼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가져온 것이라곤 커피 두 잔이 전부니 도로 들고 갈 것도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잠깐만.”

상투적인 인사를 뱉고 스쳐 지나가려던 때, 딱딱한 움직임으로 서하의 팔목을 쥐는 손이 있었다. 보나마나 김산의 것이었다. 얕게 떨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스치자 서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만…….”

애걸하듯 떨어진 음성은 김산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시간만 보낸 건 제가 아니라 김산이었다. 그때 그 시간에 멈춰있는 김산으로 인해, 서하도 덩달아 그 공원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껴야 했다.

“…놔 줘요.”

“서하야.”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너를 좋아하니까. 대답을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김산의 마음이 일시적인 혼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 깊게 와닿았다. 혜인의 말대로 김산의 얼굴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제 기대처럼 순간적 착각이었다면 이렇게 망가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 때문에 얼굴이 상한 거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애절하게 저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서하에겐 낯선 감정을 품은 채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왜?

“저 가봐야 돼요.”

“강제혁한테 가려고?”

날카롭게 묻는 김산의 말에 서하는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바람 난 애인을 책망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기가 막혔다.

“집에 갈 거예요”

“…가지마.”

언뜻 유약하게 들리는 부탁에 차곡차곡 쌓였던 적개심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서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우습고 이상했다.

“나중에 얘기해요.”

손을 비틀어 빼내자 우려했던 것과 달리 쉽게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억지로 잡아채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김산은 그럴 기력조차 없는 듯했다. 아니면 나중에 얘기하자는 제 말에 수긍했던지.

서하가 빠르게 문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와 꽃향기가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자 현실감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시간만 흐르고 변한 게 없었다. 붙잡혔던 손목이 욱신거렸다. 서하가 무의미하길 바라는 만큼, 유의미했던 만남이었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 휴대폰이 작게 울렸다. 강제혁의 연락일 것이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하가 멈춰선 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목소리를 듣고 나면 혼란한 마음이 진정되겠지, 기대감을 품었다.

[지금 바빠요?]

“…아니요.”

바쁘지도 않고, 진정되지도 않았다. 서하로선 심각한 문제였다.

[그럼 나 좀 만날까.]

위로가 되는 건 저 간결하고 강력한 제안 정도였다.

***

텅 빈 연구실에 쓸쓸히 선 김산이 까칠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차마 꺼내지 못한 것이었다.

“…보고 싶었어.”

말을 뱉고 나니 뒷맛이 몹시 썼다. 독한 담배라도 피운 것 같다는 착각이 일 만큼.

그리고 약 삼십 분 후…….

“뱨걔섀퍠쌔~.”

“그만 좀 해요…….”

김산은 쾌쾌한 연구실 안에서 한껏 조롱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결혼을 결심했던 전 애인에게. 아무리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해도 야멸차게 자신을 내다 버린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혜인은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것처럼 저를 놀리고 있었다.

임 교수가 불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모양인지, 혜인은 서하가 나가고 10초도 안 되어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약 20분이 지나도록 저를 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너희 진짜 뭐하냐?”

그러게요. 조롱의 연장선인지 순수한 질문인지 알 수 없는 말에 김산이 대답을 삼켰다. 누나나 형이 없던 탓에 연상인 혜인에게 이성적 매력을 느꼈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친누나같이 굴고 있다. 그때 그렇게 상담을 한 후 혜인과는 연구소에서 주구장창 만나야했다. 그러다보니,

- 표정 풀어. 일 안 할래?

- 뭘요.

- 너 나 진지하게 좋아한 거였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잊어라.

- 누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 안 좋아해요. 정 떨어졌어요.

- 미안해. 소년의 순정을 건드려서…….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일 하자.

이런 농담을 주고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저렇게 저를 조롱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게 됐다. 첫사랑도 아니었고 피차 서로를 도피처와 인생 설계 동업자 정도로 생각했으니 울고불고 할 것도 없었다.

새삼 혜인과 결혼할 것 같다고 서하에게 설레발 떤 게 수치스러워졌다. 바깥에 사귄다고 알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학교의 전설처럼 회자될 뻔 했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놀리는 혜인이 웃기고 기막혔다. 그냥 나가고 싶은데, 같이 하는 프로젝트를 미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니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여버렸다.

“이서하 표정 볼 만 하던데.”

“서하 봤어요?”

“이 새끼 봐라. 너 나 좋아는 했니?”

그 말에 김산은 목구멍이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저도 모르겠다. 하나 방패막이로 쓸 수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누나가 차놓고 왜 자꾸 그래요.”

“교수님.”

“교수님이 차놓고…….”

“좀 늙어 보이네. 선배님으로 정정하자.”

“우리 과 선배도 아니잖아요.”

“인생 선배.”

할 말 없게 하는 데는 아주 뛰어난 재주를 가진 혜인이 김산의 말을 죄다 끊어 먹었다.

“복도에 서 있었는데 난 보지도 못하고 가버리더라.”

“…….”

“약간, 못 볼 거 본 얼굴이긴 했어.”

놀리는 건지, 아니면 솔직하게 사실만을 전달하는 건지. 뭐가 됐건 김산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일은 손에 잡히질 않고, 서하의 얼굴이 보고 싶다. 그런 김산을 빤히 보던 혜인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나 편견 없는 거 알잖아. 그냥 털어 놔. 너 걔 좋아하지.”

“…티 나요?”

“응, 씨발놈아.”

말하다 열이라도 받은 건지, 혜인이 욕설을 뱉었다. 김산은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혜인과 사귀는 게 아니었다. 제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개새끼 같았다.

“누나, 우리 사귈 때도…….”

“아, 그만하자. 그거 이제부터 언금이야.”

“언금이 뭐예요.”

“언급 금지.”

사귈 때도 티가 났냐고, 혹시 결혼을 엎은 이유에 서하가 있느냐고, 제가 그때도 서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으냐고 묻고 싶었는데 차단당했다. 모르겠다. 요즘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제 감정의 시작과 계기를 알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흐릿했다. 분명한 건 서하가 보고 싶다는 사실 정도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 새끼를 만나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묻고 싶은 것도 태산 같았는데 묻지도 못 했다.

“너희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주접이야?”

“…그렇게 간단한 문제 아닌 거 알잖아요.”

“염병을 하네. 어려워서 숨은 어떻게 쉬나 몰라.”

“…….”

“내가 답답해서 그래. 인정해라. 너 걔 좋아하는 거 티나. 괜히 너희 사이에 낀 것 같아서 기분 구려. 이젠 아니지만.”

김산도 혜인이 계면쩍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혜인의 잘못은 없었다. 모든 게 제 실책이었다. 지난 시간동안, 김산은 제 섣부른 고백을 통렬히 후회했다. 서하 역시 제게 실망했겠지. 타이밍이 그랬다. 제 결혼이 엎어지고, 서하가 커밍아웃을 하고……. 제가 생각해도 쓰레기 같았다. 그런 주제에 서하를 보고 싶어 하는 스스로가 역겨워질 참이었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은 얼굴로 말만?”

“괜찮아야 돼요.”

주문 같은 말이었다. 그런 김산을 혜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알려주지 않으니 알 수 없고, 알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 김산과 저 사이의 거리감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권한이 없으니 도와줄 기회가 없다.

“얘기 해주면 안 돼?”

“…서하 프라이버시가 있어서요.”

“서하가 너 안 본대?”

“나중에 연락 준대요.”

그저 저 미욱한 남자를 그저 관망할 따름이었다. 혜인 역시 찝찝한 기분은 나아지질 않았다.

“폼 재지 마. 좋아하면 질척대. 바짓가랑이라도 잡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이번엔 진짜로 간다. 임 교수 만나러 갈 시간이야. 알아서 문단속하고 나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을 던진 혜인이 쿨하고 멋지게 연구실 문을 나섰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웬 남자와 서있는 서하의 모습이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협소한 서하의 인간관계를 아는 지인으로서 굉장히 의아한 장면이었다.

***

살면서 무엇 하나 먼저 원해본 적이 없어서, 저는 물욕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욕심이 없는 것 같다는 평도 제법 들었다. 기본적인 것들이 결여된 환경에서 뭘 더 바랄 여유 따윈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밥을 먹어야 장난감을 바라지. 하지만 무엇도 원망하지 않았다. 완벽한 삶이 있을까? 있다한들, 처음부터 제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바라봤자 비참할 뿐이었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비참하지 않을지언정 삶은 절로 무미건조해졌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 혀처럼, 시체의 몸처럼.

- 그렇게 살면 재밌어?

이따금 날아드는 비아냥은, 어차피 제 본질을 모르고 던지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주변의 말엔 구태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재미없는 인생은 아니었다. 성적인 충동을 느꼈고, 해소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그나마 흥미를 느끼는 그 행위도, 결국 남들이 손가락질하기 좋다는 문제를 가졌다. 남을 짓밟고 상처 입히고 울리는 것.

그래도 강제혁은 떳떳했다. 그래주길 바라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시간에, 그것도 철저히 허용되는 만큼만 했으니까. 여태껏 그 규칙을 어긴 적은 없었다. 그 규칙은 오로지 편리를 위해 세운 것이었다.

- 공과 사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망설이는 서하를 꼬드길 때도 그런 말을 했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겠다고. 그 말을 할 때만 해도 강제혁은 자신 있었다.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부서졌다. 자꾸만 목이 말랐다. 생전 처음 느낀 욕심이었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희롱하는 동안, 그로 인한 희열은 느꼈어도 소유욕만큼은 예외였다. 애초에 사람이 가지고 싶었던 적도 없었고.

그래서 서하의 존재가 이례적이었다. 어리숙해 보였던, 호텔 방 문 앞의 창백한 남자. 하얀 뒷목을 한입에 삼키고 싶었다. 일시적인 충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만질수록 괴이한 갈증이 일었다. 남들 눈에 떳떳하지 못한 성생활과 일상을 철저히 구분하기 위해 세워놨던 규칙도 뭉개버릴 만큼.

“강제혁. 수업 끝나면 잔디밭에서 술이나 한 잔 고?”

“생각 없어.”

“연애도 안 하고, 술도 안 처마시고 이 새끼 졸라 재미없게 살아.”

강제혁은 핀잔을 주는 동기의 말에 대꾸 없이 피상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을 때, 자줏빛 목련꽃 아래로 걸어 나오는 서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는 꽃나무 아래가 아닌 것 같았지만, 멀리서 그를 보는 강제혁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붉은 꽃잎이 탐욕스레 벌어져 흰 속을 드러내고 혓바닥마냥, 남근 마냥 꽃술을 내밀고 서하를 탐하는 것만 같다. 우습게도 자연물에 마저 화가 치민다. 세상 모든 것이 서하를 탐내는 것 같다. 그 가운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초연히 서 있는 남자가 얄궂다. 그러고 보니 서하가 나온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학교에 올 일이 없을 텐데, 당신은 왜 여기 와놓고 내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심기가 불편해졌다. 여긴 눈엣가시 같은 김산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

“나 간다.”

“어디 가?”

“도서관. 따라오지 마.”

“안 따라가, 개새끼야.”

서운함이 느껴지는 말에 대꾸 없이 무리를 보내고 강제혁은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가 가고 얼마 안 가 서하가 전화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보지도 않고 받는 게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 바빠요?”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게 느껴졌다.

[아니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바라는 대답을 준다.

“그럼 나 좀 만날까.”

거부할 수 없는 걸 알면서, 질문을 주고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군다. 당신도 나를 목말라 하면 좋겠다. 문득 든 욕심이 낯간지러웠다. 영상통화도 아닌데 고개를 먼저 끄덕이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어느새 서하의 뒤였다.

“대답을 해야지.”

“아.”

“고개만 끄덕이면 어떡해요.”

휴대폰을 쥔 서하의 손을 가로채며 강제혁이 물었다. 저를 보고도 펴지지 않는 미묘한 표정이 따끔했다. 낯선 욕심이 자꾸만 몸집을 부풀린다.

***

“하, 아흐으…….”

벨트에 묶인 손이 안타까운 움직임으로 벽을 긁는다. 강제혁이 서하의 무릎을 꿇리고 손목을 결박해 희롱하는 이곳은 엄연히 캠퍼스 안이었다. 사람이 올 일이 없는 폐기숙사 뒤이긴 했지만. 어쨌건 인적이 드문 곳이라곤 해도 누군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흥분시키는 모양인지, 평소보다 더 빠르게 달아오르는 몸이 손에 부드럽게 감겼다. 수치도 모르고.

“아파요…….”

“아픈 거 좋아하잖아.”

“흐, 아, 좋아…….”

망가진 신음이 젖은 입술을 타고 터진다. 갈증이 일어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자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키스에 응해온다. 강제혁은 제 혀를 사탕마냥 빨고 핥는 서하의 셔츠를 헤치고 젖꼭지를 아프게 문질렀다.

“아!”

“쉿,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어?”

머리채만 잡아도 흥분하는 야한 몸을 가지고, 눈가가 다 짓물러 도리질을 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성향을 깨닫게 된 계기에 대해 묻자, 별 거 없다고 그냥 옛날부터 혼나고 맞는 거 좋아했다는 제법 평범한 대답을 내놓은 그였다. 과거사야 강제혁에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만 듣고도 만족했지만, 최근의 일은 달랐다. 저를 만나기 전후의 일에 대해선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아니, 전부 알고 싶었다. 가령, 김산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김산과 그 후로 어떻게 된 건지.

“숨기는 게 많으면 피곤할 텐데.”

“아흐으, 주인님, 제발…….”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학생인 제게 주인님이라 부르며 엉덩이를 들썩인다. 뭔가 물을 거란 낌새를 채면, 늘 이렇게 저를 달구며 대답을 피한다. 연상이라 노련하다고 해야 할 지, 괘씸하다고 해야 할 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쉽게 넘어가줄 생각이 없었다. 꼬투리 잡기 좋은 실수를 저질렀지 않나.

“오늘 많이 혼나야 하잖아.”

“아…….”

“학교에 왔으면서, 왜 연락을 안 했을까.”

“자, 잘못……. 아, 흐으…….”

“…우리 집으로 갈까요?”

강제혁은 유치하게 ‘우리’라는 말을 썼다. 그럼 왠지 그를 데리고 사는 집처럼 느껴져서. 강제혁은 서하의 뺨을 쥐며 인정했다. 서하를 좋아한다. 남들이 주고받는 낯간지러운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없었는데, 서하를 갖게 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좋다. 좋아한다는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단숨에 그의 전부를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씩 포석을 까는 중이었다. 서하는 그런 강제혁의 새카만 속내는 털끝만치도 모른 채 빨간 뺨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1권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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