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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권리 양도 (3/24)

3장. 권리 양도

그날은 날씨가 어땠더라. 비가 왔나, 눈이 내렸나. 뭐 어찌 됐건 별로 좋지 않은 날씨였던 건 확실하다. 대낮부터 하늘이 어두컴컴했으니까.

뇌사 판정을 받았던 누나가, 영영 ‘우리’ 곁을 떠났던 날. 아버지는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우셨고, 어머니는 넝마가 된 입술을 더 세게 씹으셨다. 나는…….

“…잘 가.”

영안실로 떠나는 누나를 보내며 읊조렸다. 너무 늦은 인사였다. 장례식이 시작되고 이틀 동안 조문객을 받고, 어깨를 두드리는 손들의 무게에 쓰러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줬다.

- 네가 잘 해야지. 너희 어머니 아버지 심정이 어떻겠니.

- 연하 몫만큼 네가 효도해야 해.

누나는 스물넷에 병상에서 삶을 마감했다. 사실상 열네 살에 마감했대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누나의 잃어버린 십 년은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은 그 십 년을 제가 다 집어 삼킨 것 마냥 쑥덕거렸다. 생각 없는 어떤 친척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제라도 가서 다행이지 않냐’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다 소주병에 머리가 깨졌다. 나는 그때 너무 지쳤었고 아버지를 말릴 힘도 없었다.

사실은 무서워서 말리지 못했다. 아버지를 말렸다가, 또 다시 ‘내 딸 잡아먹은 새끼’라는 원색적인 욕을 먹을까봐.

- 서하야. 누나 손 잡아야지.

- 싫어. 나 누나 싫다고.

그때 누나는 막 교복을 입기 시작한 어린애였다. 나는 그때 누나가 너무 미웠다. 다 누나만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누나가 하자고 하는 건 다 싫다고 뿌리치고 싶었다. 그때도 그랬다. 후회하는 건,

- 서하야!

신호등 앞에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누나는 나를 구하려다 트럭에 치였다. 도로에 피가 낭자했다. 누나가 밀쳐져 넘어지는 바람에 생긴 무릎의 상처는 아프지도 않았다.

피, 도로, 피, 도로, 피……. 그리고 누나.

10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누나는 뇌사판정을 받았다. 원래도 집 안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방치 당하던 나는, 그 후로 완벽한 유령이 됐다. 혼자 씻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서 잠들고…….

- 사과해.

- …누나, 미안해. 내가 미안해.

- 더 크게 사과해!

병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건 5년쯤 지났을 때였다. 아버지는 마치 자기가 누나인 것처럼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사과했다. 아버지는 나를 더러운 병균 대하듯 내게 손가락도 대려 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차라리 흠씬 맞고 싶었다. 피가 날 때까지 맞고 싶었다. 누나 대신 내가 저 병상에 눕고 싶었다. 누나 대신 내가 그 도로 위에…….

- 연하야…….

곡소리가 고막을 찢고 뇌 언저리로 꽂혀 든다. 결국 누나는 깨어나지 못했다. 담배 연기가 흩어지고 바닥에 떨어진 재가, 누나가 타버리고 남은 재 같았다.

- 서하야.

- …선배.

- 이리와.

누나를 재로 만들었던 그 비참한 날. 장례식에 부른 적도 없는 사람이 왔다. 김산이었다. 그는 나를 아주 안쓰럽게 여기며 안아 주었다. 나는 그때에서야 내가 울고 있단 걸 깨달았다. 내가 자위용 반찬으로 폄하했던 남자가 날 위로했다. 그 뒤로 난 그를 퍽 의지했다. 집안은 파탄 났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그런 내 곁에 김산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같이 영화를 보다가,

- 형은 남자끼리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 돼. 그거 ‘정상’ 아니잖아.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영화였던가. 그때 나는 마주 웃으며 속으로 단념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내 어떤 것도 채워주지 못하는 남자였다. 아주 짧은 첫사랑이었다.

***

개씨발, 말했다. 결국 말했다, 미친놈.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고 생각했던 것보다 쫄린다. 김산은 이해하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멍청한 표정을 했다.

- 서하야, 그게…….

- 게이라고요. 동성애자.

반쪽짜리 진실이나마 전하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김산이 입술을 달싹일 때, 그에 의해 다치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서하가 먼저 방어했다.

- 때릴 거면, 때려도 되는데. 무슨 말이든 할 거면, 그대로 돌아서 나가세요.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

오히려 제가 더 뻔뻔하게 굴었다. 그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익숙하니까. 그냥 가버려. 나한테 상처주지 말고. 그가 저를 버려도 상처받지 말자. 사람 사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자. 김산을 내보내고 나니 찾아온 건 정적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천지가 개벽하는 일도 없었다. 별 거 아닌 일이었나. 적어도 의리가 있으면, 아웃팅은 안 하겠지. 또 혼자였다. 홀로 남은 집안은 이제 쓸쓸하게 느껴질 구석조차 없었다.

죽도록 피곤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수마가 몰려왔다. 그날은, 누나 꿈을 꿨다. 당연하게도 행복한 꿈은 아니었다.

***

수업 준비는커녕 밥 한 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학교로 향했다. 지독하게 늦잠을 잤다. 휴강 때리고 싶다. 근데 그건 또 통학하는 학생들한테 할 짓이 아니다. 하려면 적어도 세 시간 전에는 공지를 했어야 한다.

서하는 셔츠 위에 넥타이를 대충 둘렀다가 차 안에 던져뒀다. 넥타이 맬 시간도 없었다. 이미 5분이나 지각했다. 15분 지각은 곧 무통보 휴강이다. 그래선 안 됐다. 계단을 뛰어오르느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강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서하가 쏟아내듯 사과했다. 저들끼리 소란스레 떠들고 있던 수강생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땀방울이 낯바닥을 타고 흘렀다. 한겨울에 땀이 날 정도로 뛰었다. 망할 학교. 택시가 건물 앞에 내려주긴 했지만 거기서부터 강의실까지의 거리가 더럽게 멀게 느껴졌다.

“오늘은 출석 안 부르고 시작하겠습니다. 지각해서 미안해요.”

서하는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하고 급하게 노트북을 연결했다. 학생들은 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강사의 15분 지각으로 인한 자동휴강 기회가 사라진 걸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알만 했다.

다음 과정은 더 신속했다. 어차피 수업용 프레젠테이션이야 주차별로 방학 때 다 만들어 두었으니까. 서하는 프로그램을 켜두고 지난주에 이어 수업을 진행했다. 마이크에 닿는 숨결은 아까보다 많이 진정된 후였다.

“오늘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을 들을 때면 스크린을 응시하거나, 가지고 온 노트북을 보곤 했다. 그중에서도 유일하다시피 제게 쏟아지는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이 부재했다. 대사를 읊듯 도판을 설명하며 훑은 수강생들 중에 강제혁이 없었다. 미묘한 기분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안악 3호분은 묘주 부부의 초상이 있어 중요합니다.”

왜 없지. 어디 갔지. 서하는 조금 초조해졌다.

“묘주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대학생이 교양수업 쯤 결석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가 제 수업에 오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아픈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러고 보니 몇 학년일까 궁금해졌다. 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크게 묘주가 왕이라는 설과, 동수라는 남자란 설이 있습니다.”

서하가 화면을 한 장 넘겼다. 묘주가 왕으로 추측되는 이유가 나열된 페이지였다.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고개를 떨어트리는 몇 남학생이 보였다. 그 후로 강의 중간중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각생이 있었지만 그중에도 강제혁의 얼굴은 없었다. 오늘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나왔는데. 지각할까 바쁜 와중에도 그 생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쉬는 시간은 15분 줄게요. 다들 화장실 다녀오시고 정각까지 들어오세요.”

목이 말라진 서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좀 촉박했다. 인문대 1층의 카페로 향하는데, 빠르게 걷다 커다란 몸에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

“잘 보고 다녀야죠.”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익숙했다. 목소리만 들었는데 한낮의 계단 위였음에도 옷이 전부 벗겨진 것만 같았다. 정면에 보이는 울대가 한 차례 움직였다.

“왜… 지각을 합니까.”

“죄송합니다.”

괜히 볼멘소리가 나갔다. 강제혁은 예의 있는 학생의 목소리와 낯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색해서 미칠 것 같다. 서하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선생님은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커피를 마시려고.”

“제가 사왔으니까 같이 가요.”

퍽 친한 체를 하며 커피를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강사의 총애를 받는 모범생 같았다. 저만 긴장한 것 같다. 오늘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입가가 자꾸 말랐다. 커피를 봤기 때문인지 아님 그를 만났기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목이 탔다.

“오늘 출석체크 안 한다고 했다면서요.”

“…그랬죠.”

“그래서 좀 늦어 봤어요.”

강의실로 향하는 동안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갔다. 건네받은 커피가 너무 차가워서 손끝이 시렸다. 시린 손을 꾹 쥔 서하가 강제혁을 흘낏 쳐다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길 두어 번 반복했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

살갑게 묻는 그의 목소리가 괜히 낯설다. 다그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자신 같았다. 강제혁은 마지막 만남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새삼 그가 얄궂게 느껴졌다. 작게 한숨을 쉰 서하가 강제혁의 질문에 답했다.

“잘 보냈습니다. 강제혁 씨는,”

“별로요. 누구 덕분에.”

차갑게 떨어지는 말이 어쩐지 심기가 불편한 듯 느껴져서, 서하는 잠시 고민했다.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어째서? 쉬는 시간은 10분이 남아있었다. 대화를 시도해볼까. 하지만 여긴 학교였다. 마침 화장실 근처가 한산했다.

그때, 강제혁이 갑자기 서하의 손목을 잡고 화장실 안으로 향했다. 만류할 새가 없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텅 빈 화장실 안에 두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급히 울렸다. 칸막이 문이 전부 열려 있었고, 가장 끝 칸으로 도달한 강제혁이 서하를 짐짝 밀어 넣듯 안으로 쑤셔 박았다.

“아!”

“쉿, 조용히 해야지.”

웃는 얼굴이 좀 전과 달리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판이한 태도에 서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셔츠 너머로 타일의 찬 기운이 스몄다. 한겨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추웠다.

“넥타이도 안 하고.”

“…….”

“누구더러 빨아 달라고 가슴팍을 풀어 헤치고 다녀.”

낮게 일갈하며 몸을 접붙여 오는 강제혁을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서하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숨을 달싹였다. 9분은 남았을까. 이런 와중에도 남은 시간을 셈하는 스스로가 이중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자신도 없으면서 자극에는 쉽사리 무너지는 꼴이 우스웠다.

“대답 안 해요?”

“늦게 일어났어요. 그래서,”

“그래서 빨아 달라고 젖꼭지 내밀고 다닌 거예요?”

“그게 아니라,”

단추 두 개였다. 고작 두 개. 그것도 급해서 채울 정신이 없었던 것뿐이고. 서하의 목덜미에 강제혁의 이가 먼저 닿았다.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더 야릇했다. 잘근, 씹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만큼 강한 치악력이 서하의 정신을 앗아갔다. 고통은 서하를 여는 열쇠나 다름없었다.

“흐읏…!”

“대답은,”

“아, 잠시만…!”

“너무 늦는 거 싫다고 했잖아.”

바지를 내리는 강제혁의 손이 거칠었다. 그보다 더 거친 손짓으로 드러난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길에 발끝이 곱아 들었다. 당장이라도 삽입 당할 것 같은 착각에 서하가 단 신음을 뱉었다.

“나랑 할 겁니까?”

뭘 말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근데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섹스, 플레이, DS, 연애……. 그중에 어떤 건데요? 묻고 싶었다. 그는 연애란 말은 꺼낸 적 없는 데도, 이상하게.

인정해야 했다. 강제혁이 제 협소한 인간관계에 발을 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아니, 애초에 이미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은 실수였다 할지라도 그 다음, 또 그 다음……. 그를 제 집에 들이고 플레이 파트너가 되기로 한 시점에서 강제혁은 서하의 벽 안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 나한테 달라고. 이서하 씨에 관련된 모든 권리.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 강제혁은 이제 서하로부터 명분을 얻고자 했다. 플레이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타인에게 버림받는 것이 싫어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던 서하였지만, 김산을 곁에 두었듯 강제혁도 받아들이고 말았다. 견고하게 쌓아올렸다고 착각했던 벽은 지붕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늘에서 똑 떨어진 것처럼 불현 듯 서하의 일상을 침범한 그를 쫓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허망해졌다. 당신은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벌써 당신이 무거운데. 남들처럼 가볍게 여기자고 몇 번이나 되뇄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성공적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고개만 끄덕여.”

강제혁은 그저 서하를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서하를 갈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대로 느껴지는 눈이었다. 조급한 듯 명령같이 떨어진 말에 서하가 머뭇거리다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가 필요했다. 그것 말곤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머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강제혁이 입술을 겹쳐 왔다.

“읍…….”

포상처럼 밀어 넣어진 혀에 호흡도 질문도 전부 가로막혔다. 입안을 들쑤시는 혀의 움직임이 사뭇 거칠었다. 입천장을 긁다시피 핥고 혀를 빠는 행위에 끙끙거리는 신음이 터졌다. 그의 혀가 서하의 입속을 전부 잡아먹을 듯 삼키고 훑었다. 서하가 척척한 상념은 잊고 강제혁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안겨 벌벌 떨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낸 강제혁이 마른 입구에 매끄럽고 단단한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

“으읏!”

“오늘 수업이 좀 재밌어질 것 같아서, 출석도 안 부른다는데 왔어요. 잘했죠?”

로터였다. 로터를 깊이 삽입하기 위해 내벽을 쑤시는 손가락의 요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하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마주친 눈빛이 음험했다. 전신을 발가벗겨 훑는 듯한 강렬한 시선이었다.

“선생이면 제자가 잘 했을 땐 칭찬을 해줘야지.”

“흣, 으……. 잘, 잘 했어요.”

손가락이 빠져나간 자리가 몹시 허전했다. 무선로터인지, 입구에 걸리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단 말은…….

“나도 오늘 당신을 칭찬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

리모컨을 흔드는 손의 움직임이 경쾌했다. 그걸 응시하는 서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

매끈한 바닥에 발이 닿을 때마다 정장바지와 속옷 아래 감춰진 구멍이 움찔댔다. 이물감은 불편함이 느껴지는 정도였다. 미리 조명을 꺼둔 강의실 안은 딱 제가 켜두고 간 프로젝터 빛만으로 어둠을 해소하고 있었다. 앉을까, 설까. 서하는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슬쩍 닦으며 고민했다. 강단에 서서 강의를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앉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릴지도 몰랐다.

학생들을 지나쳐 걷다보니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노트북이 올려진 책상 앞에서 멎었다. 최대한 조심해서 의자 위에 앉았음에도 순간 극점에 비벼진 로터 탓에 허리가 살짝 뒤틀렸다. 서하는 비틀린 호흡을 목 안으로 삼키고 마이크를 쥐었다. 이 순간에도 저를 샅샅이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하 역시 멀지 않은 자리에서 절 내려다보는 강제혁을 응시했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업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은 생각보다 더 쉽게 중반부로 접어들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강제혁의 리모컨 쥔 손은 미동조차 없었다. 서하는 안도의 한숨인지, 아쉬움이 담긴 한숨인지 모를 것을 짧게 내쉬며 수업에 몰입했다. 전부 고개를 끄덕인 제 죄요, 복이다. 솔직히 긴장됐지만 한편으로 미치게 좋았다. 아래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버티려면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

뒤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본처럼 잇던 말이 뚝 끊어졌다. 입구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런 저를 강제혁이 즐거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수업 중에 학생에게 뒤를 능욕 당하는 제 상황이 몹시 수치스러웠다. 그렇다고 싫은 게 아니라 더 낯 뜨거웠다. 여유롭게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하가 최대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종료하고 다른 폴더를 열었다. 아무래도 30분 정도 수업을 이르게 끝내야 할 것 같았다.

“끝으로 짧은 영상 하나 보고 수업……. 마치겠습니다.”

서하가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 와중에 진동이 더 거세졌다. 벌이라도 주는 것처럼 자비 없는 강도였다. 엉덩이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흐르는 영상의 소리 탓에 묻힐 수 있었다. 헛숨을 들이켠 서하가 다급히 커피가 든 플라스틱 컵을 쥐었다.

“하아…….”

어두우니까, 게다가 영상을 틀어주었으니 제게 향하는 시선은 오로지 강제혁의 것뿐일 터였다. 갑자기 진동 소리가 하나 더 들렸다. 이번엔 밖으로 티가 날 만큼 큰 소리여서, 서하가 몹시 당황했다. 노트북의 볼륨을 높이고 눈을 돌리자 그게 제 안에서 난 소리가 아니라 휴대폰에서 난 소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얼마나 혼나려고 요령을 피워.」

짧은 메시지는 강제혁의 것이었다. 재빨리 영상을 튼 것을 질책하는 뉘앙스였다. 서하는 불규칙적으로 진동하는 로터에 얕은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물었다. 휴대폰의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책상 밑으로 자지 꺼내서 만져 봐.」

이미 반응이 오기 시작한 아래를 드러내라는 명령이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로터가 내벽을 두드리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더 세게 하면 여기까지 들릴 것 같은데.」

계속해서 도착하는 메시지는 분명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의 과연 말이 옳았다. 여기서 더 강도가 세지면 바깥까지 소리가 울릴 것이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서하가 떨리는 손으로 바지 지퍼를 내리고 벌어진 틈으로 반쯤 선 성기를 꺼냈다. 지퍼의 오돌토돌한 쇠 부분에 성기가 긁히는 느낌이 쓰라려 무척 자극적이었다. 학생들은 스크린을 보거나 졸고 있거나 했다. 그중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 하나였다. 제가 성기를 꺼낸 것을 알아챈 듯, 진동의 세기가 급감했다. 그가 제 은밀한 행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읏…….”

신음소리는 지극히 작아서 저 말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무치게 수치스러웠다.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인생이 아작 날 것이다. 차차 젖어가는 성기를 어루만지는 동안 서하는 입술을 수차례 깨물었다. 로터가 주는 자극은 너무 미약했다. 영상은 후반부에 달해 있었다. 내용상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배경음악이 크게 울렸다. 일순, 진동이 거세졌다.

“헉…!”

서하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선액이 손바닥을 흠뻑 적셔들었다. 성기를 쓰다듬는 손이 덜덜 떨렸다.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컵에 싸.」

학생들이 영상에 몰입한 사이, 서하가 책상 위의 커피가 든 플라스틱 컵을 집어 들었다. 하는 수 없었다. 바지를 적실 수도, 책상 아래 사정할 수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시킨 일이다.

“……!”

얼마 안 있어 반쯤 마신 커피 안에 정액이 사출됐다. 떨리는 몸을 티내지 않으려 최대한 무표정한 낯으로 가장해야 했다. 사정과 동시에 진동이 멎었다. 리모컨의 주인이 제 모든 반응을 주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자리에서 제 상태가 보인다는 생각에 서하는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하…….”

사정을 하고나자 뿌옇게 흐려졌던 감각이 점점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강의 중에 강사 신분으로 사정을 했다. 그것도 뒤를 자극 당하면서. 삽시간에 발끝이 곱아 드는 수치가 몰려왔다. 보다 확실한 감각이었다. 서하의 낯짝이 빨갛게 절여지는 순간에도 강제혁의 시선은 떠날 줄 몰랐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서하는 물기가 느껴지지 않게 가능한 건조한 투로 마이크를 잡았다. 갈무리를 마친 성기는 바지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서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노트북을 정리하는 척 숨을 졸였다. 수업이 빨리 끝난 것에 만족한 학생들이 우르르 나가는 소리가 멍한 머리에 웅웅거리는 기괴한 소리로 들려왔다.

“귀엽네, 진짜.”

자리에 그대로 앉은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열심히 제 주문대로 꼼지락대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오늘 출석체크를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알려준 동기가 저보다 먼저 도망간 게 다행이었다. 바지 안이 답답했다. 동기가 왜 일어나지 않느냐고 채근했다면 퍽 곤란했을 것이다. 강제혁은 서하의 책상 아래를 상상하며 심각하게 흥분했다.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

수업이 끝나고 텅 빈 강의실엔 강제혁과 서하 둘 뿐이었다. 서하는 차마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지만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발걸음이 제 옆에서 멎었을 때,

“바지는 안 젖었어요?”

산뜻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부쉈다. 서하는 떨리는 눈으로 강제혁의 발끝만 보며 중얼거렸다.

“…네.”

“잘했네.”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농밀했다.

“아, 흐아…!”

애널 안에 머물고 있던 로터가 극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하는 터지는 신음을 참지 못하고 헛숨을 터트렸다. 고개가 꺾이며 저를 내려다보는 강제혁과 시선이 교차했다. 음습하고 새까만 눈동자가 저를 집어 삼킬 듯 응시하고 있었다. 서하가 저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동시에 저를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하는 강제혁의 청바지를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단단한 복근에 얼굴을 묻었다.

“그, 만. 제발…!”

“아니지.”

“흐, 으읏…….”

머리채를 잡아 단단히 발기한 앞섶에 문대는 행위에 서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군가 들어올지 모르는 강의실이었다. 이 다음 수업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있다면 누군가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안 빨고 뭐합니까.”

“아!”

진동이 더욱 거세졌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해야 빨리 끝내지.”

낮게 속삭이는 말에 서하가 다급히 강제혁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를 깊숙이 끌어안으며 모니터에 강제혁의 하반신이 가려지기를 빌었다. 속옷 밖으로 꺼내놓은 성기는 우람하고 흉흉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검붉은 귀두를 한입 물자 혀 위에 침이 가득 고였다. 서하는 제 머리채를 당기는 손길에 저항 없이 입을 더 크게 벌리고 성기를 야금야금 물었다. 셔츠에 정장바지까지 차려입은 채 목구멍을 열어 남자의 살 기둥을 삼키는 제 모습이 살색 만연한 포르노보다 더 음란하게 느껴졌다.

“흡, 큭…!”

입천장을 긁어내리며 예고도 없이 깊이 처박는 몸짓에 서하가 몸을 들썩였다. 아래에선 로터가 무자비하게 진동하고 위에선 성기가 제 숨구멍을 차단하다시피 박혀온다. 눈물이 속절없이 맺혔다 떨어졌다. 생리적인 고통 탓에 나는 눈물이었다. 허벅다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음모에 비벼지는 코끝이 간지러웠다. 강제혁의 성기가 콱콱 박혀드는 동안 입안이 뭉개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얼마나 입을 내어줬을까, 짓씹듯 신음을 뱉은 강제혁이 발작하듯 떠는 서하의 몸에서 성기를 물렸다.

“…눈 감아.”

기침이 터지는 것을 억지로 삼키고 강제혁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얼굴에 뿌려지는 정액의 끈끈하고 뜨거운 감촉이 소름끼치도록 음란했다. 이윽고 뺨에 문대지는 성기에 파르르 떨리는 눈을 열자, 강제혁이 당연한 수순인양 서하의 입술에 아직 단단한 성기를 옮겨주었다.

“깨끗이 해야지.”

“흐읍…….”

서하는 정액이 묻은 얼굴로 혀를 내밀어 젖은 성기를 핥고, 정액이 흘러나온 구멍을 샅샅이 훑었다. 철저히 도구처럼 쓰인 와중에도 제 성기는 줏대 없이 발기한 채였다. 그의 사정과 동시에 로터의 진동이 멎어드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서하를 마주한 강제혁이 낮게 물었다.

“좆물 맛이 어때요.”

눈가에 웃음을 머금은 강제혁을 올려다보던 서하가 달아오른 낯으로 중얼거렸다.

“맛있어요…….”

희고 불투명한 탁액으로 얼굴을 적신 서하가 부은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은 장관이라 할 법했다. 가히 전율이 이는 광경이었다. 강제혁은 사정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성기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낮게 신음했다. 그런 강제혁에게 서하가 붉은 입술을 벌려 보이며 속삭였다.

“더 먹고, 싶어요. 더 주세요…….”

이런 얼굴과 목소리를 하는 주제에, 방금까지 단단하고 깔끔한 어투로 수업을 마친 서하가 퍽 야하게 느껴졌다. 발동만 걸리면 제가 바라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야해진다. 그 괴리감이 말할 수 없이 음란했다. 수업 시간 내내 강제혁이 리모컨에 몇 번이나 손을 댔다 뗐는지는 서하가 알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다. 구멍 안에 로터를 비집어 넣어놓고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야했는지. 강제혁은 서하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귓가를 문질러주었다.

“여기서 먹고 싶어?”

그래도 이성이 남아있긴 한 건지 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귀엽기도 하지.

“주인님 집으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에 열기가 치밀었다. 온전히 넘겨받은 권리가 다시금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강제혁이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사정을 한 것보다 더 진한 쾌감이었다.

***

“아, 흐읏, 응…….”

현관에 들이닥치는 동시에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입안을 침범하는 혀가 거칠고 야만스러웠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강제혁은 얄궂게도 로터를 몇 번이나 작동시켰다. 서하는 걷다 서길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코트와 노트북이 든 서류가방으로 아래를 가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로터를 빼길 원했지만 강제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항할 방법도 없었다. 아무리 권리를 넘겼대도 세이프워드는 유효했다. 그러니 서하가 힘들면 중지를 세워 멈출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껏 유린당하고 싶었다.

“…보여줘야지.”

엉덩이를 주물러 벌리는 말에 목적어는 없었지만, 서하는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틈을 벌려 한 발자국 떨어져주는 강제혁을 보며 서하가 바지를 내렸다. 손이 자꾸 떨려서 몇 번이나 엇나갔다. 속옷까지 내리고 뒤돌아 벽을 짚고 서서 손을 뻗어 엉덩이 사이를 벌려 보였다.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웠지만 복근에 비벼지는 성기는 프리컴을 줄줄 흘리는 채였다.

“뱉어요.”

서하가 손가락을 입구에 밀어 넣으려 하자 손목이 덥석 잡혔다.

“손으로 꺼내라고 한 적 없어. 뱉으라고 했지.”

다시금 정정해주는 말에 서하가 입술을 떨었다. 그의 뜻이 분명했다. 결국 서하가 손으로 엉덩잇살을 벌려 잡고 아래에 힘을 줬다. 천천히 밀려나오는 로터의 느낌이 선명해 등골이 다 오싹했다. 남의 현관에서 이런 짓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변태 같았다.

“읏, 하아…….”

얼마 후 로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현관 복도를 울렸다. 서하의 귓가가 붉게 물들었다. 강제혁이 수치도 모르고 오물거리는 서하의 붉은 입구를 엄지로 쑤셨다.

“아!”

로터보다 약간 굵은 엄지는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생김새였다. 서하가 내벽을 후벼 파는 손가락에 끙끙거리는 신음을 뱉었다.

“흑, 아, 학…….”

“힘 빼야 좆을 물려주지.”

“흐읏, 으…….”

방금 전까지 강의실에서 입으로 그의 것을 물었고, 좆물을 먹고 싶다고 애걸했다. 그 생각이 다시금 뇌리에 스치자 수치심에 눈물이 고였다. 순식간에 손가락이 뽑혀 나가고 내장이 딸려 나가는 착각이 들었다. 서하의 허리가 비참하게 뒤틀렸다.

“흐윽!”

이윽고 입구에 선단이 닿기 무섭게 굵은 좆이 삽입됐다. 서하가 눈을 크게 뜨고 잘게 신음했다. 단번에 중반부까지 삽입된 성기가 구멍을 무리하게 벌리고 들었다. 처음엔 그의 것을 삼키는 게 그토록 힘겨웠는데, 몸이 적응하는 게 느껴져 일순 두려워졌다.

“후, 조이지 마.”

“아, 학, 읏, 아아…….”

골반을 잡은 강제혁의 손이 본능적으로 자꾸만 도망치려는 서하를 옭아맸다. 엉덩이 골 사이에 음모가 닿는 순간까지 서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삽입되는 성기가 너무 길고 두꺼웠다. 몽둥이에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벽을 긁는 손끝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흐윽, 흐…….”

“먹고 싶다는 좆물 먹으려면 참아야지.”

“아, 학, 아읏, 아…….”

“응? 감사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왜 울어.”

퍽, 살짝 물리기 무섭게 좀 더 깊게 삽입된 성기에 서하가 눈물을 떨궜다. 척추까지 꿰뚫린 듯한 쾌감과 통증에 사지가 벌벌 떨렸다. 강제혁의 손이 서하의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단추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너도 안 입고 셔츠를, 입으면, 젖꼭지를 내놓고 다니는 거랑 뭐가 달라.”

“하아, 악, 읏, 아으, 읏…….”

젖꼭지를 잡아당기고 문지르는 손길이 거칠었다. 그런 와중에도 콱콱 박혀드는 성기 탓에 몸이 자꾸 벽으로 밀렸다. 도망갈 곳도 없는 곳에서 서하는 제 뒤를 무자비하게 헤집는 성기에 신음하며 엉덩이를 쳐드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싸면 오늘 잠 못 자요. 내가 안 재울 거니까.”

“흐으, 응, 아, 아아, 하윽…!”

경고하듯 속삭이는 말이 너무 다정해서 서하는 저도 모르게 정액을 분출하고 말았다. 물론 지독하게 전립선을 집중적으로 문지르는 추삽질 탓이 더 크긴 했다. 오는 길 내내 로터와 상황에 자극 당한 데도 이유가 있었고.

“흐, 으…….”

서하의 성기에서 터진 탁액이 현관의 대리석 벽을 더럽혔다. 강제혁의 성기는 아직 사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채였다. 서하가 본능적인 두려움에 뒤를 돌아봤을 때, 강제혁이 음산한 눈으로 서하의 시선을 삼켰다.

“준비한 게 많은데, 오늘 다 써보죠. 시간도 많은데.”

명령을 어긴 섭에게 하는 말치곤 퍽 친절한 어투였다. 혼몽한 정신으로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은 기니까,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약 삼십분 후엔 후회하고 말았지만.

***

물기 없이 씨근거리는 아래가 홧홧했다. 순식간에 뽑혀나간 성기는 흉흉한 채로 애먼 곳에 비벼지고 있었다. 뜨끈하고 촉촉한 기둥이 허벅지 근처에 닿는 것만으로 자극적인지라 사정을 마친 예민한 몸을 다시 달아오르게 했다. 서하는 현관에서부터 다리가 풀린 저를 덜렁 안아 침실로 향하는 무표정한 낯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단단하게 다물어진 턱 끝이 심오했다. 묘한 기대감이 배꼽 아래부터 슬금슬금 기어 올라온다. 준비한 게 많다고 했으니 오늘 잠을 자는 것은 그른 게 확실했다. 달뜬 몸이 채 식기 전에 침대에 눕혀진 서하가 눈을 깜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

소유욕이 절절 끓어 넘치는 두 눈을 마주하자 시선이 박힌 곳부터 결박당하는 것 같았다. 준비한 물건이 많다고 했으니 오늘도 엉망으로 괴롭혀 질 것이다.

“엎드려서 자세 취해.”

구속구를 든 강제혁이 나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자세가 어떤 자세를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성기가 공기 중에 꺼떡이고 있었기 때문에 삽입을 원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하가 짧은 망설임 끝에 몸을 뒤집고 엉덩이를 쳐든 후 양손으로 볼기를 벌려 구멍을 드러냈다. 조금 젖은 입구가 얕게 빠끔거렸다. 얼마 안 있어 허벅지에 밴드가 채워졌다. 다리가 오므라드는 걸 막기 위한 장치였다.

“아…….”

잠시 서하를 내려다보던 강제혁이 침실 옆 베란다에서 모터가 달린 기계 같은 것을 들고 나왔다. 엎드린 자세에선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서하는 열심히 눈을 굴렸다. 긴 쇠막대가 달린 모터의 정체를 제대로 고민해보기도 전에, 의자 위에 기계를 올린 강제혁이 서랍에서 실리콘 딜도를 꺼내 쇠막대에 끼우는 모습이 다리 사이로 보였다.

‘저게 뭐야.’

강제혁이 기계의 콘센트를 꼽고 전원을 켜니, 딜도가 꼽힌 막대가 전후로 피스톤질 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하는 그제야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오소소 돋는 소름에 몸이 움찔 떨렸다. 엉덩이를 벌려 잡았던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뭘 그렇게 떨어요.”

“흐읏…….”

“내가 무서워?”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가 사뭇 음산하게 들렸다. 단순히 모조 성기를 삽입하는 것과는 달랐다. 아무리 사람이 기계적으로 피스톤질을 한대도 그건 사람이지만, 저건 진짜 기계였다. 그럼에도 서하는 세이프워드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공포심보다 기대감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좆물 먹을 노력을 안 했으니 이걸로 구멍 좀 축이고.”

“아…!”

달아오른 피부에 비해 차디찬 젤이 엉덩이 골 사이로 흘러내렸다. 별 거 아닌 접촉에도 긴장이 심해서인지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메말랐던 입구가 질척하게 젖어들었다. 이윽고 딜도의 귀두 부분이 입구에 닿았다. 엉덩이를 벌리고 있던 손은 어느새 시트자락을 쥐고 있었다. 어차피 움직일 수 있는 건 겨우 손뿐이었으니까.

“구멍 벌려서 물어야지.”

“흣!”

불시에 손가락이 밀려들어와 구멍 안을 헤집었다. 반틈 벌어진 곳에 딜도의 선단이 밀려 들어왔고 그 다음은 쉬웠다. 찌걱, 젖은 울림이 한차례 났고 강제혁의 것보다 훨씬 작은 실리콘 좆이 어렵지 않게 서하의 뒤로 전부 삽입되었다.

“아, 아아…….”

안타까운 신음이 터지고 허벅지 안쪽이 바쁘게 떨렸다. 매트리스 아래로 고정된 밴드는 서하의 허벅지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고, 무슨 짓을 해도 기계 앞을 떠날 수 없게끔 서하를 그 자리에 묶어두었다. 오로지 강제혁만이 서하를 저 해괴한 물건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엉덩이를 주무르는 악력이 거센 탓에 벌겋게 손자국이 남았다. 서하를 만족스레 내려다보던 강제혁이 일언반구도 없이 기계의 전원을 올렸다.

“하으…!”

천천한 속도로 피스톤질을 시작한 딜도가 내벽을 핥듯 빠져나갔다. 끝까지 빠졌나싶을 쯤, 그것과 똑같은 속도로 다시금 안으로 들이닥쳤다. 소름끼치도록 규칙적인 피스톤질이 이어지는 동안 강제혁은 야금야금 모조 성기를 삼키는 서하의 구멍을 관망했다. 물기가 배어 눅눅해진 구멍 틈으로 빨간 속살이 언뜻 비치는 광경이 야스러웠다.

“흣…….”

“아직도 무서워?”

“으, 아, 아뇨…….”

푸욱, 찌걱, 푸욱, 찌걱. 일정한 속도와 세기로 애널을 들쑤시고 빠져나가는 기계의 움직임에 적응한 서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만 하면 많이 봐준 것 같은데.”

“흣, 흐으…. 아읏!”

느리게 치고 빠지던 기계의 세기를 단번에 몇 단계 상승시킨 강제혁이 서하의 얼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서하는 갑작스레 속도가 빨라진 기계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엉덩이를 떨어야 했다. 강제혁이 자리를 옮기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다.

“아, 아으, 윽…….”

푹, 찌걱, 푹, 찌걱. 안으로 콱 박히던 것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다시 내벽을 들쑤셨다. 아무렇게나 쑤셔지는 느낌에 서하의 성기에서 맑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느끼는 부분에서 조금 모자란 곳이긴 했지만 충분히 자극적인 삽입이 계속해서 빠르게 이어졌다.

“입 벌려봐.”

서하는 제 안을 쑤시는 것에 정신이 팔려 강제혁의 성기가 입술에 닿은 것도 모르고 끙끙거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뜨거운 선단이 뺨에 비벼지는 느낌에 서하가 급히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기둥부터 쓸듯 핥아 입안에 넣고 혀를 움직여댔다.

“흐으, 아…….”

“더 깊게 삼켜.”

머리채를 잡은 손이 거칠었다. 제 입을 구멍삼아 성기를 거세게 처박는 강제혁의 움직임에 뒤를 쑤시는 딜도 쪽으로 몸이 살짝 물려졌다. 터지지 못한 신음이 서하의 목 안에서 부서졌다. 지잉지잉, 모터에서 나는 거친 소음과 젖은 구멍들에서 나는 마찰음이 귓가에 가득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윽….”

서하의 콧잔등에 음모가 거칠게 비벼졌다. 입술은 너덜거리는 느낌이 날 정도였고, 턱은 빠질 듯 아팠다. 목구멍은 아예 꽉 가로막혔다. 그 커다란 게 끝까지 들어오니 딱 죽을 것 같았다. 공기가 부족해진 서하가 숨을 갈구하기 전에, 손이 먼저 반사적으로 강제혁의 허벅지를 짚었다. 목구멍 안쪽까지 깊게 삽입된 성기가 도무지 빠져나갈 기미를 안 보였다. 서하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터졌을 때, 강제혁이 낮게 신음하며 정액을 터트렸다. 꿀렁대는 성기와 함께 끈적하고 탁한 액체가 식도 안으로 수차례 밀려들었다. 서하가 헛구역질을 하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느리게 빠져나가는 성기가 의도한 듯 서하의 입천장을 긁었다.

“후으, 큽…. 아…….”

“감사 인사는.”

“가, 감사합, 흐으…. 니다…….”

타액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성기가 서하의 젖은 뺨에 비벼졌다. 시끄러운 소음을 내는 기계는 여전히 서하의 아래를 쑤시고 있었다.

“이서하 씨는 잘 못 참는 편이니까, 내가 오늘은 마음껏 싸게 해줄게요.”

흥분감 서린 목소리가 다정스레 귓가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사정방지 링이나 요도플러그가 없었다. 만약 딜도가 강제혁의 것만큼 컸다면 서하는 지금쯤 사정을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이런, 모자랐나.”

서하의 아랫도리를 확인한 강제혁이 그런 서하의 상황을 눈치챈 듯 희미하게 웃었다. 서하는 부어터진 입술을 핥아 축이며 반쯤 뜬 눈으로 고개를 틀어 강제혁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딜도가 뽑혀져 나갔고 기계 소리가 멎었다.

“흐읏, 흐…….”

구멍이 빠끔 벌어졌다 천천히 오므라드는 사이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났고, 딱 그의 것만큼 큰 인조 성기가 기계에 끼워졌다. 속칭 ‘괴물 딜도’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새삼 강제혁의 무식한 성기 크기가 상기되는 순간이었다. 서하는 발끝을 옹송그리며 몸에 힘을 뺐다. 까만 색 모조 성기가 구멍을 더 넓게 벌리며 안으로 밀려들었다. 반쯤 밀려들기 무섭게 기계가 작동됐다.

“아, 흐으!”

서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처음부터 빠른 속도였다. 보다 짧은 주기로 푹푹 내벽을 거덜 낼 것처럼 들쑤시는 작태에 점차 성감이 고조됐다. 반만 삽입되었는데도 딱 죽을 것 같았다. 발기된 성기가 아플 지경으로 단단해졌다. 눈가가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쾌감이 전신으로 번졌다. 좀 더, 더. 서하가 엉덩이를 내미는 모습을 보던 강제혁이 그 순간 기계의 전원을 내렸다.

“하윽…!”

딱 아쉬운 만큼 서하가 울음 같은 신음을 뱉었다.

“흐읏, 왜, 왜…….”

“재밌으니까.”

“싫, 싫어……. 제발, 멈추지 말아요…….”

“그게 다야?”

울며 비는 서하에게 강제혁이 물었다. 그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묻는 그에게 바라는 말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하가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원하는 지점까지 딱 한 발자국 남았는데, 안이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더, 더 박아주세요. 구멍 안에, 쑤셔, 주세요…….”

“어떻게?”

“망가질 때까지…….”

눈물 섞인 간청은 자기 파괴적인 수준에 달해 있었다. 강제혁의 입꼬리가 비틀린 채 올라갔다. 묘한 미소였다.

“아윽!”

잠시 동안 서하가 우는 모습을 찬찬히 감상하던 강제혁이 예고 없이 전원을 키고 스위치를 끝까지 올렸다. 단번에 안을 두들겨 패듯 후려갈기는 거대한 딜도에 서하가 엉덩이를 내밀던 것도 멈추고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해일처럼 몰려드는 쾌감이 혼을 쏙 빼놓았다.

“아읏, 흐, 아, 어떡, 어떡해…….”

눈물이 줄줄 흐르고 사지가 덜덜 떨렸다. 끝 모르고 상승하는 쾌감을 견디지 못한 서하가 무력하게 다리를 벌린 채 사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기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좀 더 깊게 안으로 박혀드는 딜도가 매서웠다.

“아, 아, 하윽, 아, 흐읏!”

짜악, 짝, 사정과 동시에 엉덩이를 후려갈기는 손바닥에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고,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짧지만 폭풍 같았던 스팽의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사정이 끝났음에도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예민해진 내벽에 딜도가 박히고 빠지는 느낌만 분명했다.

“그만, 제발, 아, 그만…!”

“망가질 때까지 박아달라면서.”

“하으, 윽…! 아! 흐윽!”

이미 가버린 하반신 안쪽에서 뭔가 다시금 차오르는 듯했다. 푹, 푹, 푹 규칙적으로 거세게 안을 덮치듯 때리는 딜도로 인해 서하가 실금하듯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그만 멈춰달라고 빌었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만하고 싶어?”

“흐으, 으…….”

눈물 탓에 앞이 흐릿했다. 강제혁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차도록 가까워질 때까지 서하는 알지 못한 채 신음을 흘렸다. 기계는 서하의 상태를 알 수 없으니 여전히 푹푹 안을 쑤셔대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구멍이 잔뜩 헤집어져 성기에선 알 수 없는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머리가 뜨거워서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입가에 타액이 흐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망가질 때까지 쑤셔 달라더니, 왜 갑자기 싫어졌어.”

그제야 서하는 그게 강제혁이 바라던 대답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느새 화풀이 당하듯 짓뭉개진 젖꼭지가 퉁퉁 부어올랐다.

“흐으, 으, 주인님, 주인님 걸로… 망가뜨려주세요…….”

“어디를?”

“제, 제 구멍…….”

푹푹, 기계의 움직임은 한결같았다. 부어오른 서하의 입술에 쪽 하고 강제혁의 입술이 마주 닿았다. 이윽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기계가 작동을 멈췄다. 그리고 딜도가 뽑혀 나간 자리에 불기둥 같은 성기가 콱 하고 박혀들었다. 더 이상 흥분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제 안을 들쑤시는 뜨끈한 자지에 서하가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고 말았다.

“아!”

“다 풀어놨더니, 힘 안 빼?”

“하으으…….”

퐁퐁 눈물이 솟아났다. 샘이라도 터진 것 같다. 엉덩이를 때리는 손에 서하가 다시금 다리를 떨었다. 강제혁의 성기가 나고 드는 느낌이 선명했다. 무참히 안을 문대고 박던 모조 성기가 우습게, 핏줄이 팽팽히 선 생좆의 느낌이 서하를 다시금 달궈놓았다.

“읏, 학, 아아…….”

“좋아서 정신 못 차리지.”

폭력적인 추삽질은 불규칙해서 더 자극적이었다. 어깨며 등짝이 강제혁의 잇자국으로 가득해졌다. 거칠게 살을 빨며 제 흔적을 새겨 넣는 탐욕스러운 주인의 성미에 서하가 낮게 신음하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좆물 먹여달라고, 읏, 우물우물, 잘도 씹네.”

씹어뱉듯 일갈하는 말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네, 흐으, 맞, 맞아요. 먹여주세요…. 아, 흐으…….”

“잔뜩, 싸줄 테니까……. 흘리지 말고, 다 삼켜.”

“네, 흐읏…….”

기계와 비교도 안 되게 거친 움직임으로 서하의 안에 콱 성기를 박은 강제혁이 가장 깊은 곳에 사정했다. 완전히 끝까지 삽입된 성기로 인해 제 둔부에 닿은 주인의 복근 아래가 움찔움찔 거리는 울림, 그리고 제 내벽 안에 든 주인의 성기가 사정하며 꿀렁거리는 움직임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아…….”

서하의 아래는 엉망진창이었다. 천천히 빠져나가는 성기 탓에 구멍 안쪽이 공기에 노출되다시피 했다. 벌어진 구멍에서 희뿌연 씨물이 울컥울컥 흐르는 감촉이 생생했다. 그가 흘리지 말고 다 먹으라고 말했음에도 사정한 양이 많아 다 삼키지 못했다. 다리를 옥죄던 밴드가 풀리기 무섭게 침대에 고꾸라진 채 숨을 할딱이는 서하의 앞에 강제혁이 채찍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 잠 못 잔다고 했잖아.”

“흐으…….”

“넣어준 것도 다 흘리고……. 많이 혼나고 싶은가 보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서하가 얕게 떨었다. 강제혁의 뒤쪽으로 까만 상자가 보였다. 포장이 덜 풀린 것을 보아하니 새로 산 것이 분명했다. 서하는 저를 일으키는 손에도 그저 가쁜 숨을 뱉었다. 이제 막 저녁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 남은 밤이 길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고, 서하의 손가락은 가지런히 접힌 채였다.

***

눈 오는 새벽, 하얗게 질린 가파른 턱 끝이 얕게 떨리던 모습. 김산은 지금보다 어리고 여렸던 서하를 떠올렸다. 깨끗한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이 제 마음에 간 금 같았다. 물방울이 뺨을 가로지르고 추락하듯 떨어져 내렸다. 눈물방울이 아니라 빗방울인가 의심스러울 만큼 고요하고 무심한 낯이었다. 잘게 떠는 입술과 턱 끝이 아니었다면 맹세컨대 서하가 우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 서하야.

누나를 두 번씩이나 잃은 서하의 아픔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끌어다 안았다. 돌이켜보니 고요하던 낯에 담긴 것은 슬픔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련함, 억울함, 미련,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

나는 너에 대해 뭘 알고 있었을까.

- 형, 저 게이예요.

장담컨대, 나는 너를 한 치도 몰랐다.

***

다리 사이에 경련이 일었다. 벌려진 다리 틈으로 무심하게 손을 밀어 넣고 구멍을 쑤시는 강제혁의 낯이 서하의 눈동자에 담겼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제게 그런 제안을 한 걸까. 생각해보니 묻지 못했다. 서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강제혁은 흘러나온 정액을 훔쳐 다시 서하의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가 들렸다.

“저기, 흣…….”

“왜.”

“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하, 위기감이 없네.”

젖꼭지를 아프게 꼬집는 손길에 서하가 짧은 신음을 토했다. 구멍 안으로 정액을 전부 다 밀어 넣은 강제혁이 푸른빛의 보석이 달린 애널 플러그를 마개마냥 삽입했다. 방금 전 보았던 검은색 상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하는 그저 멍한 머리로 숨을 할딱였다. 그가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 순간만큼은 그 손길에 몸을 맡겨야 했다.

“흐으…….”

얇은 가죽줄이 엉덩이를 스쳤다. 채찍인 것 같은데, 엉망이 된 몸으로도 매질은 기대가 된다.

“사정은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자세 흐트러지면 아까 그 기계에 박아놓고 내일까지 안 풀어줄 거야.”

강제혁이 낮게 속삭이는 말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토해낼 것이 없는 성기가 욱신거렸지만, 자세를 단단히 다지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맨살을 후려갈기는 채찍의 따끔한 통증에 서하가 몸을 떨었다. 등골이 오싹한 쾌감이었다.

***

시계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소리가 신경줄을 얇게 저미는 듯했다. 그날 그렇게 서하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 김산은 밤길을 그저 걸어야 했다. 목적지 없이,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그저 걸었다. 깊은 새벽, 엷은 싸라기눈이 내렸다. 3월인데 아직도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이 떠올랐고, 후회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안다고 자부했다.

“하…….”

내 주변엔 없을 것이라 당당히 외치고 다닌 것이 우습게, 제가 늘 곁에 두고 살던 서하가 바로 동성애자였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라 배웠고, 그래서 안 되는 것이라 여겼다.

“미치겠네…….”

김산은 자신의 무지가 역겹고, 그 옆에서 상처 받았을 서하가 안쓰러웠다.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저는 서하를 수차례 도려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과 변명하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발걸음을 돌려보았지만 진눈깨비가 볼품없이 쌓인 길에 제 발자국이 난도질되듯 남아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 때릴 거면, 때려도 되는데. 무슨 말이든 할 거면, 그대로 돌아서 나가세요.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

그 말. 나는 서하에게 후회하지 않을 말을 할 수 있을까? 서하가 마지막으로 붙인 그 말 때문에 돌아선 걸음 역시 멈췄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며칠 째. 김산은 서하의 연락처를 휴대폰 화면에 띄워놓고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었다. 정돈되지 못한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멋없이 흘러내렸다. 눈이 아파진 탓에 안경을 벗어내 책상 위에 올려뒀다. 아직까지 적당한 말들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솔직한 말로 제 주변에 동성애자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할 말을 고르기 이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 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서하와 멀어지긴 싫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등신 같은 새끼…….”

자조적인 욕설이 떨어졌다. 우려 놓은 차는 물색없이 식어만 갔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기어코 거슬렸던 김산이 그대로 시계를 부수듯 집어던졌다. 호흡이 거칠게 터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싫었고, 끝까지 제게 말하지 않았던 서하가 원망스러웠다. 왜? 대체 왜?

- …선배.

하얗게 웃는 얼굴, 무심한 듯 사랑스러운 눈. 제가 아껴마지 않았던……. 그리고 김산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하일까. 헛된 희망 속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지만 화면 위에 떠오른 것은 어머니였다. 김산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큰 아들, 요즘 왜 이리 연락이 없을까?]

“죄송해요. 바빠서 연락 못 드렸어요.”

[아니, 이번에 선 자리 들어왔는데 그래도 네가 먼저 장가 가야지 싶어서. 너 지금 만나는 사람 있니?]

어쩐지 의욕이 없었다. 혜인과 헤어졌고 저는 결혼을 하고 싶었으니 어머니의 물음에 아니란 대답을 해야 하는데.

“저 바빠서 당분간 결혼 생각 없어요.”

김산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생전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한 반응이었다.

[많이 피곤한가보다. 그럼 강이한테 물어볼게. 얼른 자.]

“네, 쉬세요.”

평범한 삶. 평범한 가정. 제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보단 서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게 더 궁금했다. 전화가 끊기자 정적이 찾아왔다. 여기 저기 흩뿌려진 부서진 시계 파편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주인의 심정을 닮은 모습이었다.

***

마지막으로 제게 했던 ‘나중에 연락할게’라는 말이 무색하게, 혜인과는 학교에서 마주쳤다. 일이 있어 연구소 건물에 들렀는데, 혜인이 마침 연구실에서 나왔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상황도 아니었다. 너른 복도에 정적이 찾아왔다.

“어우…….”

“…….”

혜인의 입에서 먼저 어색한 탄식이 흘렀다. 불편함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표정과 달리 혜인의 낯은 반짝거렸다. 천년의 시름을 내려놓은 것만 같은 안색이었다.

“출장 잘 다녀왔어요?”

김산이 먼저 담백한 인사를 건넸다. 원망도 뭣도 없었다.

“어. 잘 지냈어?”

“그럼요.”

“커피… 마실래? 사줄게.”

저를 보던 혜인이 머리를 긁으며 손으로 학관 카페를 가리켰다. 김산도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음료를 시키고 한적한 테라스로 나왔다. 혜인은 아마 출장을 가장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얼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제가 헤어져줬기 때문일까. 김산의 입에서 실없는 미소가 나왔다.

“얼굴 좋네요.”

김산이 먼저 칭찬의 말을 건네자 혜인이 커피를 꿀꺽 삼키곤 시원스레 답했다.

“응, 아버지한테 독신 선언했거든. 선물 잔뜩 안겨주면서 나 결혼하면 이런 거 다 남의 아빠한테 줘야 된다니까 눈이 흔들리더라고.”

“…….”

“진작 돈으로 회유할 것을…….”

그 말에 김산도 웃었다. 나쁘지 않은 반응에 혜인이 김산의 얼굴을 훑다 머쓱한 듯 물었다.

“넌 얼굴이 왜 그래?”

“…별로예요?”

“상했어, 오래된 귤처럼…….”

적나라한 평가에 김산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진지한 혜인의 얼굴은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이상한가. 하기야 서하의 일로 며칠 밤잠을 설쳤다.

“얼굴 안 좋은 이유가 나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그새 여자 만났냐?”

“…누나.”

“탓하는 거 아니야. 고마워서 그래. 이젠 제발 다른 사람 좀 만나주라. 나 미안해서 너 못 보겠어.”

무심한 사람이다. 김산은 그런 혜인의 얼굴을 보며 조금 웃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라 좋아했으니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고민이 좀 있어서요.”

“뭔데?”

아예 고민 상담이라도 해줄 모양인지 혜인이 보다 적극적으로 물었다. 김산은 망설였다. 서하에 대한 것을 상담하고 싶은데, 얼핏 듣기로 그런 문제는 남에게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랬으니 10년을 본 제게도 일언반구 말이 없었겠지. 약간의 배신감, 그리고 서운함이 차올랐다.

“아니면 너 그새 나 말고 또 누구한테 차였니?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겠어. 나랑 이렇게 커피 마시면서 고민 타령 하는 거 보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얼굴이 썩었다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 말에 김산이 도리질을 쳤다. 결혼을 생각했던 전 애인이 저런 말을 꺼내는 것도 해괴하다. 하지만 맺고 끊음이 철두철미한 혜인이라면 그럴 법하긴 했다. 이미 저에 대한 마음 정리는 안 본 사이 끝내놓았을 것이 뻔했다. 저도 마음정리는 끝났고. 참 가볍기도 하다.

“그럼 뭐, 서하?”

까만 삼백안이 기기묘묘하게도 정답을 내놓았다. 여기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김산이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혜인이 샷 추가를 네 번한 지옥의 아메리카노를 원샷했다. 커피를 맥주처럼 마시는 건 여전하다.

“너 원래 이서하한테 예민하잖아.”

“내가요?”

“옛날부터 그랬는데, 뭘 새삼스레.”

“그건 그냥 동생 같으니까…….”

“다른 후배들은 동생 안 같았어? 그리고 네 동생들 내가 다 아는데 누가 이서하 같아. 김강, 김바다, 김초원, 김하늘. 죄다 지같이 우락부락하구만.”

우다다 말을 쏟아내는 혜인의 따짐에 김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혜인으로부터 제가 서하와 관련해서 예민하게 굴었던 굵직굵직한 사건 몇 가지를 프레젠테이션 하듯 듣고 나자 2시간이 흘렀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김산은 제가 부숴버린 시계가 떠올랐다. 남의 입으로 듣는 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희한했다. 내가 그랬나. 왜 그랬지. 그런 자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변명도 존재했다. 서하는 소중한 동생이니까. 아프고 힘든 서하를 제가 다독여주었으니까. 마음으로 키운 동생, 뭐 그런 거.

하지만 그런 긴밀한 사안까지 혜인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서하의 가정사는 저만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으니까. 졸린 지 말이 많아지는 혜인에게 핫한 이슈인양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과 그에 따른 적합한 반응에 대해서도 물었다. 술이 아니라 커피에 취한 것만 같은 혜인이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냥 안아줘야지. 믿고 싶은 사람이라 털어 놓은 건데, 안 믿어 주면 어떡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안아줘야지. 동이 트기 직전에 집에 도착한 김산은 휴대폰에 올려만 두었던 연락처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시간이 이르긴 했지만 지금 당장 서하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잠결에 흘리는 목소리라도 괜찮았다. 서하의 커밍아웃에만 집중한 김산은 서하에게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과, 그게 그 학생일지 모른단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강제혁은 붉은색 저온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저것도 그 검은색 상자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금 딜도가 삽입되고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푹푹 고저 없이 안을 들쑤시는 모조 성기에 서하는 이제 참을 힘도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아, 으윽, 흑, 아, 아…!”

그의 말대로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엉덩이가 새빨개질 때까지 매를 맞고, 삽입 당하고, 목구멍이 들쑤셔지고, 그와 기계에 번갈아 뒤를 뚫렸다. 앞에선 이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강제혁은 기어코 서하의 중지 손가락이 올라가기를 원하는 건지 좀처럼 서하를 놔주질 않았다. 물론 서하의 손가락은 얌전히 옹송그려진 채였다.

“잘 버티네.”

“하, 아으, 윽, 읏…….”

강제혁은 이게 다 서하의 연락이 늦었기 때문이라며 죄송하다고 빌라고 달콤하게 말했다. 서하는 계속해서 용서를 구했고, 마지막으로 젖꼭지와 성기에 저온초로 촛농플레이를 마치고 나서야 기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죽을 것 같아.’

사지가 벌벌 떨리고 정신이 흐릿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쾌감의 여운에 바들바들 떠는 저를 강제혁이 깨끗이 씻겨 놓았다. 체력도 좋다. 결국 동이 틀 때까지 플레이를 한 셈이 되었다. 침대에 퍼지듯 누워 기절하기 직전에 서하는 마지막 정신력을 끌어 모아, 저를 안고 누운 강제혁에게 물었다.

“물어볼 거, 있다고 했…잖아요.”

“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왠지 울컥하는 이상한 느낌에 서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엉망진창이 되고 싶다, 생각만 했는데 실은 이런 케어도 원하고 있었나. 강제혁을 만난 후로 제 새로운 면면을 발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제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목이 죄 갈라져 괴성에 가까운 소음이 나왔다. 하지만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왜…….”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한 거냐고. 저야 그가 처음이고 이런 상황을 내도록 바라왔으니, 감정적인 고민을 제치면 횡재했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닐 텐데. 서하의 입에서 뒷말이 나오기 전에 눈가에 강제혁의 입술이 닿았다. 거칠고 과격했던 섹스에 비하면 깃털 같은 접촉이었다.

“갖고 싶어서.”

제대로 나가지 않은 질문이었음에도, 떨어진 대답은 제 질문을 간파한 듯했다.

“왜요…?”

왜 갖고 싶어졌느냔 물음이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까맣고 달콤했다. 서하는 알고 싶었다. 그가 저에 대한 권리를 갖고자 하는 이유를.

“왜냐하면…….”

느리게 말을 잇는 목소리에 안달이 날 지경이 되었다. 서하의 표정이 조금 간절해졌다. 갈증이 난 사람처럼. 왜냐하면 다음은 뭘까, 초조함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강제혁이 설핏 웃었다. 그리고 그때,

“이 새벽에 전화가 오네.”

강제혁이 눈썹 사이를 좁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하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서하는 중요한 답을 들을 순간을 놓친 게 아쉬웠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김산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서하는 그저 당혹스러웠다. 김산과의 마지막 만남이 잠시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용한 새벽. 진동 소리가 이어지는 짧은 시간 동안, 강제혁은 서하를 응시했고 서하는 그 시선을 채 받아내지 못했다. 기묘한 감각이 일었다. 엉덩이를 쥐는 손이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받고 싶어?”

“읏…….”

곧은 시선이 닿는 지점이 뜨겁다. 서하는 짧은 숨을 뱉어내며 입술을 물었다. 받고 싶으냐고 묻는 말의 진의를 모르겠다. 분명 질문을 던졌던 건 제 쪽이었는데,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로 주객이 전도되었다.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은 ‘김산 선배’라는 건조한 나열이다. 그가 서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강제혁은 몰랐다. 게다가 강제혁을 만나기 전까지 김산을 상상 속 주인으로 망상해왔다는 것도. 당장 기절할 것처럼 피곤한 와중에, 저를 잡아먹을 듯 훑는 강제혁과 끊겼다 하면 다시 걸려오는 전화가 맹렬했다.

“계속 오는데, 이 시간에 전화할 정도면 되게 친한가 보지.”

“그게, 아!”

상흔이 남은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이 거칠었다. 변명을 내놓아야 할까, 아니면 그냥 받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강제혁의 의중이 궁금했지만 한편으론 전화를 건 김산의 의중 역시 궁금했다. 커밍아웃한 제게 연락이 없던 며칠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이 시간에 전화를 건 걸까. 플레이의 여운으로 곤한 서하에겐 급하게 몰아치는 상황이 몹시 버거웠다.

“전원 끄기 전까진 계속 올 것 같은데.”

“…….”

“받고 싶어요?”

그렇게 묻는 강제혁은 제가 전화를 받지 않길 원하는 것 같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물음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받고 싶었다. 대단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었지만, 걸려온 전화를 받아서 오후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을 생각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지 모르는데, 오래 통화를 했다간 강제혁이 뭔가 눈치 챌 게 뻔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서하를 본 강제혁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그래도…….”

반발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강제혁의 말을 가로막고 말았다.

“내가 이서하 씨한테 말했던 거 잊어버렸나 봐요.”

화를 눌러 참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히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가 뭐라고 말했더라. 서하가 곱씹는 사이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강제혁이 씹어뱉듯 읊조렸다.

“이서하 씨에 대한 권리, 나한테 다 달라고 했을 텐데.”

“아윽!”

“하다못해 전화 한 통 받는 것도 내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주기로 한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부어서 닿기만 해도 쓰라린 구멍을 쑤셔 벌리는 손엔 자비심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서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통증으로 인한 것이었다. 안을 헤집는 와중에도 강제혁의 곧은 시선은 서하의 입술에 꽂혀 있었다. 보송보송해졌던 몸에 다시금 열이 오르는 듯했다.

“허락, 허락해 주세요…….”

김산의 정체를 모르는 강제혁에겐 이것이 바라는 대답이었던 듯했다. 서하가 강제혁의 것이 되었다는 걸 인지하게끔 만들 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는 내 것이라, 선배의 전화 한 통도 내 허락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다. 뭐, 그런 거. 별안간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나도 미쳤지.’

으름장을 놓는 강제혁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다니.

서하의 입술에서 바라던 청이 나온 것을 확인한 강제혁이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3분 줄게요.”

“…감사합니다.”

카레야, 뭐야. 서하가 속으론 불경한 생각을 하며 쉬어빠진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리를 떠볼까 몸을 움직였는데 강제혁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의 뜻대로 누운 채 얌전히 전화를 받아야 했다. 벌써 몇 통째 걸려온 건지 꼭 통화를 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여보세요.”

[서하야.]

“네, 선배.”

[자고 있었어? 감기 걸렸어? 목소리가 왜 그래.]

전화를 받자마자 쏟아지는 걱정에 뭔가 가슴께가 찌르르했다. 이런 식으로 제 걱정을 해준 이는 김산 밖에 없었다. 서하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아무래도 김산의 음성이 컸다. 전화는 이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강제혁의 시선이 지나치게 따가웠다.

“안 잤어요. 급한 거 아니면,”

[왜 안 잤어. 나 때문이야…?]

그 대목에선 좀 웃을 뻔했다. 당신 생각 한 점 없이 어린 남자 품에 안겨서 밤새 울었다고 하면 뭐라고 반응할까. 그의 착각이 대단하다. 서하가 계획한 대로 전화를 끊고자 입을 뗐다.

“아니에요. 이제 잘 거라……. 일어나면 연락, 읏…….”

[왜 그래? 어디 아파?]

갑자기 왜……. 감정 변화 없는 얼굴로 구멍을 쑤시고 드는 강제혁 탓에 신음이 터졌다. 쓰라리고 따가웠다. 더 말해봐. 입모양으로 속삭이는 게 이상하게 야했다. 서하가 기어코 진득한 신음을 터트리기 전에 전화를 갈무리했다.

“일어나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꼭 연락해.]

전화가 끊겼다. 이마가 마주 닿고 눈물 고인 눈으로 강제혁을 쳐다보자 이번엔 입술이 닿았다.

“재우기 싫어졌는데.”

“아으…….”

입술이 닿은 채로 중얼거리다, 끝에는 혀를 내어 느리게 핥는다. 입술 주름을 샅샅이 핥는 혀에 참지 못한 서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빨간 구멍으로 혀가 뱀처럼 기어 들어간다. 벌써 몇 번째 키스인지 모르겠다. 서하가 제 입안을 헤집는 혀에 목 안으로 신음을 삼키며 까무룩 기절했다. 강제혁은 저를 재우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지만, 체력의 한계였다. 결국 중요한 질문도, 그에 대한 대답도 전부 흩어지고 만 밤이었다.

***

끊어진 전화는 짧았지만 기묘했다. 김산은 엉망인 서하의 목소리에 걱정만 한 움큼이었다. 당장이라도 서하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아픈 와중에 혼자 있을 서하가 걱정됐다. 하지만 이제 잘 거라고 했으니 찾아가서 초인종을 누르기도 그랬다. 비밀번호는 죽어도 알려주지 않는 서하였다.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묘한 자신감이었다. 얼마 전까지 이서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신감도 금세 꺼졌다. 그렇게 생각했던 게 우습게도 서하가 게이란 것도 모르지 않았나.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노선을 변경했다.

“오후에 죽이라도 쒀서 가야겠다.”

그럼 서하가 잠에서 깼을 때 바로 대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 서하가 누군가의 품에 이미 안긴 채 잠들었다는 사실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

서하는 잠에서 깨자마자 강제혁이 주는 물을 한 컵 다 마셨고, 옷을 걸쳐 입으며 끙끙 앓았다.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곤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집에 가야 한다고 허락을 구했다. 강제혁은 그게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는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승차감 좋은 차의 보조석에 앉아 집까지 향하는 동안 서하는 또 기절하듯 수면을 취했다. 강제혁의 옆자리에서 잠드는 일이 점차 익숙해진다. 도착했을 때쯤엔 하늘이 다시 어둑해진 상태였다.

“데리고 살고 싶네.”

내도록 말이 없던 강제혁이 차의 시동을 끄며 중얼거렸다. 서하는 잠결에 들은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도착하면…….”

내려간 차창 너머로 인사말을 전하려는데, 뭐라고 해야 할 지 조금 어려웠다. 도착하면 연락하세요? 명령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또 그의 연락을 기다리기만 하는 건 싫었다. 서하가 말을 고르는 사이 강제혁이 손을 까딱 움직였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이었다.

서하가 얼굴을 가까이 하자 불시에 입술이 닿았다. 아, 또다. 마주 닿은 입술에 서하가 빠끔 한숨을 틔웠다. 벌어진 입안으로 혀가 드나드는 사이 서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주차장이라도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건데, 이것도 야외 플레이인가. 수치심과 긴장감, 그리고 미약한 쾌감이 뒤섞여 엉덩이 안쪽이 꽉 조여들었다.

“연락할 테니까, 기다려.”

“…네.”

내리깔린 서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씹어 삼킬 듯 눈에 담은 강제혁이 빠르게 차를 몰고 사라졌다. 서하는 붉어진 뺨을 마구잡이로 쓸었다. 아무래도 발정 난 것 같다. 어제 그렇게 해대고도 기운이 덜 빠졌나. 야외 플레이는 서하의 마음 속 취향표에서 더 선명한 파랑색이 되었다. 키스만으로 설 뻔했다.

“대답 못 들었네.”

아쉬움이 일었다. 분위기에 휘말리듯 권리 운운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이 서하를 낯간지럽게 했다. 관계가 끝날지 모른다는 걱정이 스며들 틈도 없이 그에게 곁을 내주고 말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역시 김산이었다.

“…네, 선배.”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연락이 없어서……. 어디야?]

“집이죠. 어디서 만날까요?”

서하는 단조롭게 말했다. 기대심은 최대한 버렸다. 분위기 상으론 폭언을 하진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방어책이 필요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제 집이 있는 7층을 누르기까지도 김산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어디냐는 그의 물음이 새삼 희한하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승강기 안이라 전화가 끊겼나. 갑자기 말이 없는 그로 인해 서하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통화 시간은 흐르는 채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하는 띵동 소리와 함께 김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지금 너희 집 앞이야. 올라오면 돼.]

그 말에 서하의 입이 조가비마냥 꾹 다물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에 서있던 김산과 눈이 마주쳤다. 편한 차림의 김산이 미묘한 낯으로 서하를 내려다 봤다.

“거짓말을 다 하고……. 서운하네.”

김산은 서운하다고 말했지만 목소리엔 어쩐지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이 쳐졌다. 화가 난 김산을 마주하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가 한 발자국 멀어지자 김산은 두 발자국 다가왔다. 어느새 김산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서하를 밖으로 끌어내고 현관 앞에 세웠다.

“문 열어.”

짓이겨진 낮은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서하가 마른침을 삼키고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뒤에 선 남자의 얼굴은 마치 처음 보는 것 마냥 굳어 있었다.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싶을 즈음 등이 떠밀렸다. 제 집에 들어가는 것인데 마치 벼랑에 떨어지는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

김산은 서하의 얼굴을 보자마자 치솟는 미묘한 열기에 침음했다. 강의할 때만 입는 양복 차림이 어딘가 모르게 흐트러져 있었다. 서하가 외박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단서였다. 몇 시간째 현관 앞에서 기다린 제가 우습게, 집이라고 거짓말을 한 서하가 야속했다.

처음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렀을 땐, 아직 자고 있겠거니 했었다. 내려가서 기다릴까, 하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혹시나 싶어 눌러본 비밀번호가 맞아 들어간 게 불행이었을까. 아니면 다행이었을까. 들어선 집 안은 고요했다. 냉기가 도는 것이 적어도 잠시 나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식탁 위에 죽이 담긴 통을 내려놓은 김산이 서하가 없는 집을 가만히 살폈다. 제대로 본 적 없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서하가 이사를 했을 쯤엔 제가 바빴고, 이사한 집의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않기에 조금 서운했었다. 적당히 깔끔하고 적당히 지저분한 주방에서 김산은 차를 우려 마셨다.

“어딜 간 거야.”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 전화를 걸었다. 전화 속 서하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현관을 나서며 어디냐고 묻는 말에 집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땐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실은, 서하를 기다리는 사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차분해지니 그때 그 우산의 주인과 남학생이 떠올랐다. 서하가 동성애자라는 고백을 했기 때문에 남학생의 존재가 더욱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김산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지금 그 남학생과 있는 걸까.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서하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억측은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막상 잔뜩 부은 입술로 제 앞에 선 서하를 보자 울컥 분노가 일었다. 잠시 멍해졌던 정신을 차려보니 서하의 집 안이었다.

김산은 서하의 뒷모습이 처연하게도, 안쓰럽게도 느껴졌다. 목덜미에 새겨진 피멍이 언뜻 보이자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듯했다.

“집에… 들어오셨던 거예요?”

주방에 놓인 죽 봉투를 발견한 서하가 물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대답은 내놓지 않았다. 그대로 서하를 끌어다 당겨 안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안으려던 게 아닌데.

“뭐하는,”

“서하야.”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닌데. 원래는 제대로 안아주고, 미안하다고, 그동안 형이 무심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선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윽!”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손에 서하가 신음을 터트렸다. 어딘가 아픈 모양이었다.

“그동안 못 알아줘서 미안해.”

“…!”

“형이 무심했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준비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서하가 몸부림을 멈췄다. 안은 팔을 더 깊숙이 당겼다. 이상하게도 김산은 만족스러웠다. 제 가슴께에 닿는 서하의 어깻죽지가 단단했다. 그리고 준비하지 않은 말이 터지듯 쏟아졌다.

“근데, 그 새끼는 만나지 말자.”

하지만 의지는 확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서하를 그 무뢰배 같은 놈의 손에 맡겨둘 수 없었다. 서하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는 애였으니까. 월권이라도 좋았다. 잘못된 길로 가려는 서하를 바로잡을 권리 정도는 제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김산의 갑작스런 포옹에 서하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예상치 못한 접촉보다 더 서하를 놀라게 한 것은 김산의 입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그 새끼는 만나지 말자’라니. 서하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김산을 쳐다봤다. 마주친 시선이 뜨거웠다. 제 눈알을 죄 태워버릴 것 같은 온도였다. 제 허리를 감싸 안은 김산의 팔에도 힘이 가득 들어있었다.

“잠깐만요, 읏…!”

“안 놔줘.”

벗어나야 하는데 주박이라도 걸린 것 마냥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김산이 말하는 ‘그 새끼’가 누군지는 자명했다. 강제혁이 절 끌고 가는 모습을 봤으니까. 그리고 연락이 안 됐었고, 수상한 흔적을 달고 나타난 저에게 연애 여부를 물었었다. 제가 게이라고 선언한 것과 그것을 연결 지은 게 틀림없었다.

서하의 눈동자가 혼란스레 흔들리는 사이 김산은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서하의 허리를 옥죄던 팔에 힘이 빠졌다. 제 품에서 씩씩대는 서하를 보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 틈을 타 서하가 김산의 품에서 벗어났다. 정확하게 물을 필요성이 있었다.

“선배, 그게 대체…….”

“…….”

“대체 무슨 소리예요.”

마주 선 둘 사이의 간격은 멀지 않았다. 김산은 서하가 빠져나간 품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고 어쩐지 더운 느낌이 들었다. 서하에게서 열이 나나. 김산은 허전한 팔을 주무르듯 쓸어봤지만 묘한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이 든 건 코끝에 맴도는 향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서하에게서 나던 것과 다른 샴푸 향기. 그게 김산의 기분을 뒤틀리게 했다.

“…선배.”

“그때 그놈이, 네 섹스 파트너인지 뭔지 아니야?”

“…….”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자 김산은 더 화가 났다. 목덜미의 피멍이 선명히 보이니 더 그랬다. 옷을 벗기면 더 심각한 상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분기가 치솟았다. 서하 몸에 상처를 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답 못 하지.”

“…그게,”

백 번 양보해서 서하의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그가 게이란 걸 받아들인 마당에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진 성관계에 대해서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 남자가 우악스레 서하를 끌고 가는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월등한 덩치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하 역시 평균보다 큰 키에 백면서생치고 운동을 즐기니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상처는 아니었다. 게다가 며칠 전 보았던 손목의 멍 자국……. 숨이 턱 막히는 분노였다.

서하는 서하대로 학생과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김산에게 탄로 나자 부끄럽고 창피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김산은 저를 탓하는 걸까. 제가 부끄러워서? 하기야 20대 초반에 불과할 학생에게 그런 짓을 했다니 아마 지금쯤 김산의 눈에 비친 저는 파렴치한 게이일지도 몰랐다. 강제혁을 ‘그 새끼’, ‘그 놈’으로 칭하는 걸 보면 강제혁을 탓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기분이 좆같아졌다.

마주친 눈이 서로 다른 감정으로 일렁였다. 김산은 제가 그놈을 낮잡아 불러 서하가 화가 난 거라 착각했고, 서하는 김산이 저를 경멸스럽게 보는 것이라 오해했다. 한참 동안 대치하던 끝에 김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 새끼랑 만나지 말라니까 화나?”

“선배가 뭔데요.”

“뭐?”

“선배가 뭔데 만나라, 만나지 말라 해요?”

서하는 온당한 질문을 던졌다. 그건 김산이 참견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 김산이 서하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갑작스레 면전에 다가온 낯이 노기로 번들거렸다. 우악스런 손이 서하의 셔츠를 잡아 뜯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산의 시야에 엉망진창이 된 서하의 상체가 가득 찼다. 잇자국, 피멍, 붉은 자국, 닿기만 해도 쓰라릴 것 같은 부어터진 젖꼭지.

“뭐 하는…!”

“바지 벗어.”

“선배!”

갑자기 김산의 손에 웃통을 노출하게 된 서하가 소리쳤다. 하지만 반쯤 이성을 잃은 김산은 서하가 저를 부르는 것조차 모르고 그의 바지를 뜯듯 벗겨냈다. 서하의 상처 난 육신을 마주한 김산에겐 제대로 확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왜 이러는,”

“가만히 안 있어?”

아무리 친한 선후배 사이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문제는 제게 지금 그를 말릴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밤 강제혁의 아래에서 난잡하게 구른 덕분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서하의 몸이 김산의 손에 의해 돌려 세워졌다.

“그 씨발새끼가 그런 거야…?”

무력하게 반라가 된 서하가 부들부들 떨었다. 수치심에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서하의 기분과 관계없이 김산은 총천연색이 된 서하의 둔부를 보고 눈앞이 아찔했다. 차마 속옷까지 벗기진 못 했지만 드러난 부분만 봐도 이어진 참상을 알 수 있었다. 새하얬을 피부는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빨갛다 못해 보랏빛인 엉덩이의 윗부분은 섹스의 흔적이 남은 수준이 아닌 물감을 칠했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한 모양새였다.

“하…….”

“…….”

이건 폭력이다. 서하가, 그 어린놈에게 폭행을 당했다. 거기까지 닿자 김산은 휴대폰을 찾았다. 흔적이 남아있을 때,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뭐 하는 거예요, 대체!”

112를 화면에 띄우는 김산을 본 서하가 휴대폰을 뺏어 집어 던졌다. 옷을 추켜올릴 새도 없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뭐라고요?”

“서하야. 이거… 폭력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자 부들부들 떠는 서하가 보였다. 김산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서하를 냅다 끌어안았다. 김산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김산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던 서하가 입을 열었다.

“놔요.”

“서하야.”

그제야 제가 그런 일을 겪고 온 서하를 함부로 대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다급히 옷을 입혀주려는데, 서하가 김산의 손을 후려치곤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순간 들어온 나체는 김산의 기분을 이상하게 했지만, 그건 그저 상처가 끔찍해서라고 여겼다.

“…형이 갑자기 그런 건 미안해. 근데,”

“나가요.”

“서하야.”

“나가라고요, 제발!”

새빨갛게 달아오른 낯엔 눈물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김산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없는 서하의 손이 김산의 등을 현관 쪽으로 밀었다.

“내 앞에서 꺼져요.”

문이 닫히고 자물쇠 걸리는 소리가 났다. 김산은 한참이나 서하의 집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

김산의 손이 닿았던 곳이 죄 화끈거렸다. 머리 끝까지 이는 수치심에…….

“설 뻔 했네.”

에어컨 필터 청소가 안 됐는데, 틀고 싶었다. 아주 강렬하게. 강제혁에게 고환이 텅 비도록 쭉쭉 뽑히지 않았다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발기했을 것이다. 화가 잔뜩 나서 저를 억지로 벗기고 잡아먹을 듯 시선을 쏟는 김산은 너무 자극적이었다.

“아, 쪽팔려…….”

정수기에서 찬 물을 따라낸 서하가 소파에 앉았다. 습관대로 털썩 주저앉았는데 악 소리 나게 아파서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얼굴을 쓸어내렸는데, 열 오른 낯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망했다는 생각이 번졌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다니. 그 정돈가…….

침실에 있는 전신거울에 상흔을 비춰 본 서하가 조금 수긍했다. 김산 성격에 제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합의라곤 상상하기 어려운 상처긴 했다. 그런데 이런 게 취향인 사람도 있는 것을 어쩌나.

“…전화 왔네.”

진동 소리에 거실로 나오자 강제혁의 이름이 뜬 액정이 깜빡거렸다. 그러고 보니 도착하면 연락한다고 했었다. 서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김산과 그 지랄을 하는 사이 전화가 왔다면, JH Kang의 이니셜을 아는 김산이 바로 그 전화를 받았을 것이고 개싸움이 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김산에게 변명을 해야 하는 저도 곤란해지고, 남에게 몸을 보인 것으로 화가 날 강제혁이 이보다 더 과격한 플레이를 할 수도 있었다. 그건 한계치 이상의 일이었다. 기어코 엿을 날릴 지도 모를 만큼.

“여보세요.”

[내 전화 받을 때 그렇게 받지 마세요.]

딴 생각에 전화를 들고 멍 때리다 급하게 전화를 받자 일갈하듯 꾸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하는 조금 오싹해지는 등골에 혀로 입술을 축이며 죄송하단 말을 뱉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은.]

“어떻게… 받아야 할 지 알려주세요.”

[주인님이라고 불러야지.]

“그럼 바깥에선,”

[지금 이서하 씨 바깥 아닌 거 내가 다 아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땐 알아서 해도 되고.]

적당히 야릇하고, 적당히 단호한 목소리. 서하는 일순 불안정했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보이지도 않는 강제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네, 그럴게요.”

[이제 뭐 할 거예요?]

묻는 말이 퍽 다정했다. 무섭게 몰아붙이던 남자와 거리가 느껴졌다. 서하는 조금 미묘한 기분에 볼을 긁었다.

“이제… 논문 좀 읽다 잘 겁니다.”

요 근래 공부가 심히 부족했다. 개강하기 직전부터 강제혁과 만나 플레이하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숨소리만 오고가다, 강제혁 쪽에서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나한텐 안 물어봐요?]

“아, 주인님은… 뭐 하실 거예요?”

주인님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육성으로 맨 정신에 내뱉기에는 아무래도 수치스럽다. 그 단어를 발음하는 제 목소리가 괜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운동 좀 하고, 이서하 씨 사줄 만 한 건 없는지 인터넷 쇼핑몰도 좀 둘러보고 그럴 거예요.]

“또 뭐 사시게요?”

[도구는 SM의 꽃이잖아요.]

그는 아마도 도구에 확고한 철학이 있는 듯했다. 서하는 괜히 침을 꼴깍 삼키며 찬 물을 찾았다. 일상적인 수준의 대화였음에도 어쩐지 민망했다.

[갖고 싶은 건 따로 없어요?]

“제가 살게요.”

불현듯 그가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서하가 급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소비 스케일이 과했다. 돈이 많다곤 해도 그가 사용한 물건들을 생각하니 좀 걱정이 되는 수준이라.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한다 쳐도 한계가 있지 않나. 그렇다고 어머니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그런 걸 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돈 없을까봐 걱정해요?]

웃음기 어린 음성에 서하가 입술을 사려 물었다. 안 되는 건가.

[걱정해주니 고마운데.]

“학생이잖아요.”

[겸업하고 있어요.]

겸업? 서하는 강제혁이 취업을 한 상태인가 고민했다. 종종 막 학기 같은 경우는 회사를 다니며 학교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의 스케줄에 대해서도 모르고 몇 학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볼 게 많았다. 그러는 사이 강제혁의 정체가 밝혀졌다.

[학생이랑, 건물주. 할머니가 남기신 재산이 좀 많아서요.]

아, 건물주……. 부럽네. 서하가 이를 꽉 깨물었다. 치아 부딪히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잘난 얼굴에, 저조차 올려다봐야 하는 키에, 완벽에 가까운 근육질 몸매에, 건물주? 서하는 제가 주인을 잘 만났다는 생각보다 먼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데…….]

“네. 많아요.”

느린 말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안달 나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하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강제혁과의 전화 통화에 몰입했다. 그리고 제법 긴 통화시간 동안 알아낸 것은, 그가 체육교육과 학생이란 것과 2학년 1학기에 재학 중이란 사소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아리나 대외활동도 안 하고, 딱히 몸담은 단체도 없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30분 남짓한 전화 통화는 불안하던 서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강제혁에게도 김산에 대한 걸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전화로 전하기엔 민감한 소재였다. 그리고 가능한 김산과 강제혁이 만날 일이 없게끔 제가 주의하면 될 일이었다. 참 안일한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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