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Fuck you? Fuck me.
3월이라곤 했지만 날씨는 여전히 매서웠다. 봄은 아무래도 중간고사가 닥쳐야 올 것만 같았다. 서하는 롱 패딩을 입을 수 없는 제 처지를 한탄했다. 김밥처럼 돌돌 말린 학생들 사이에서 코트를 입은 서하는 강사보다는 멋 부리는 신입생의 모습에 가까웠다. 제 딴에는 강사로서 품위를 지킨다고 그렇게 입은 것이었지만, 어려 보이는 얼굴이 강사보단 학생 같았기 때문이다.
‘얼겠네.’
정장에 코트는 아무래도 춥다. 돈 좀 더 주고 비싼 것을 살 걸 그랬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연차라도 쌓이면 좀 편하게 입어보겠는데.
조금 서두른 탓에 서하는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르게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내 카페에 앉아 마지막으로 만들어 둔 프레젠테이션을 점검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제대로 된 강의는 처음이니 긴장이 그대로 태도로 드러날 터였다. 서하는 괜히 목소리도 가다듬어 보고, 프레젠테이션의 애니메이션이 꼬인 것은 없는 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 정도면 됐나.”
“좋아 보이는데.”
“으악!”
예상치 못한 음성에 서하가 비명을 내질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강제혁이었다. 꽤 오래 전부터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강제혁의 자세는 아주 안정적으로 보였다.
“뭐, 뭡니까?”
바로 뒤 테이블에 누가 앉는 줄도 모르고 수업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강제혁이 아니라 누구였어도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하는 벌겋게 달아오르는 제 얼굴을 숨기고 싶어 고개를 돌리며 말로만 따졌다. 하지만 강제혁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습관처럼 ‘그’ 장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자동반사에 가까웠다. 귓바퀴가 뜨거웠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야한 거 보다 들킨 사람도 아니고.”
“기척도 안 하는 건 어디서 배운 예의입니까?”
“예의?”
놀란 가슴을 숨기려다보니,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어조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꺼내놓고 보니 어쩐지, 제가 그에게 써선 안 되는 말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는 학교고 저는 그를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던가. 지금은 플레이 중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흰 패딩에 검은 후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강제혁의 모습은 너무나 학생다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하는 뭔가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따지고 들기 어려워 입술만 달싹이는데.
“교수님.”
서하는 강제혁이 저를 부르는 지도 모르고 방금 뱉은 예의 관련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도 저렇게 불려본 적 없고, 뭣보다 교수를 자처하기엔 짬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외국이야 박사가 교수보다 되기 어려운 것이라, 교수라는 호칭을 대단히 보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달랐다. 박사를 달아도 교수가 못 되는 판인 것을. 게다가 서하는 박사 과정을 휴학한 채였으니 더욱 그랬다. 그러니 강제혁이 저리 깍듯이 불러도 저를 부르는 줄 모르는 것이다.
“듣고 있나. 수업 전에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네?”
큰 손바닥이 서하의 눈앞에 휘휘 저어졌다. 시간 좀 내달라는 다음의 말을 알아듣기 무섭게 강제혁이 답답하다는 듯 서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툭 튀어나온 서하의 손목뼈를 쓰다듬는 움직임이 어쩐지 야릇했다.
“시간 좀 내라고.”
수업 전까지는 약 20여 분이 남아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서하는 이쯤에서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다던 강제혁의 말과 지금의 태도가 너무나 달랐다. 플레이 파트너 사이의 지배관계는 플레이를 하는 순간에만 유효한 거니까,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강제혁 씨. 여기 학교입니다. 적당히 하세요.”
그렇게 말한 서하는, 단호하게 말한 주제에 잠시 아차 했다. 아무래도 싸가지가 결여되었단 평을 듣는 제 말투가 그대로 나간 것 같다. 심지어 강제혁은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성적인 상태의 서하가 판단하기엔 아예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공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 서하는 서둘러 강제혁의 손에서 제 손목을 돌려 빼내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럼 수업 시간에 봅시다.”
***
“출석 부르겠습니다.”
조금 소란했던 강의실에 서하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렸다. 2주차 강의이기에 지난주보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꽤 머쓱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리고 그 시선 중에는 강제혁의 것도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의 시선이 어째 저를 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플레이 파트너라면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플레이 중이 아니었잖아. 난 잘못 없어.’
서하가 순서대로 수강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제법 긴 시간동안, 강제혁의 시선은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고, 적당히 하라고 말한 것은 저인데, 끈덕지게 달라붙는 시선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연결해 둔 노트북 앞에 앉아 슬라이드를 넘겨가며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강제혁은 스크린이 아닌 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의 인물을 보면, 남성기를 유독 크게 묘사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건…….”
지극히 학술적인 설명이었음에도 어쩐지 강제혁이 떠올라 정신이 산만해졌다. 그가 저를 자꾸 쳐다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 때마다 그와 눈이 마주쳤으니 아마도 계속 쳐다보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 서하는 강제혁의 시선을 받아내지 않기 위해 강의에 매진했고, 그 탓에 강의는 약속했던 쉬는 시간마저 없이 2시간 30분이 되도록 이어졌다. 쉬지 않고 말한 탓에 목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다음 주 교재는 블랙보드에 올려준 파일로 인쇄해오면 됩니다.”
서하가 마무리 멘트를 하며 다시 한 번 수강생들을 둘러보았다. 강의실에 수면제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몇몇은 도망간 것 같았다. 1학년이 많이 듣는 수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강제혁 역시 자리에 없었다.
‘언제 나간 거지.’
서하가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이어서 말했다.
“다음 주에 봅시다.”
“감사합니다.”
몇몇 학생이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뱉었다. 서하가 노트북 전원을 끄고 가방을 정리하는 동안 우르르 학생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USB까지 가방의 작은 주머니에 넣고 구둣발을 떼자 빈 강의실엔 고요함만 남아있었다. 스크린 수업을 하느라 불을 꺼놓은 채였는데 스크린마저 꺼졌으니 강의실은 어둠뿐이었다. 약간 무섬증이 인 서하가 서둘러 강의실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데, 문가에서 누군가 서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
순식간에 남자의 품안에 갇힌 서하가 눈꺼풀을 연신 깜빡였다. 절 덮친 괴한이 누군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교수님.”
“강제혁 씨…?”
“우리 수업 끝났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서하는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쩌면 예상했던 상대였는지도 몰랐다. 워낙에 거한이었으니 그만한 이가 흔치는 않을 터였다. 서하가 강제혁의 정체를 깨닫고 잠시 안심하는 동안, 강제혁이 서하의 목덜미를 아프게 긁듯 누르며 속삭였다.
“이래도 내 말 안 들을 거예요?”
“읏…….”
“응? 대답해봐.”
그의 목소리는 유혹적이었고, 그가 주는 약한 통증도 서하가 환영할 만한 것이었지만, 여긴 아직 학교였다.
“강제혁 씨, 여기 학교…….”
“선물도 가져왔는데, 이렇게 매몰차면 서운하지.”
“잠시만,”
앞으로 20분 정도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테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해놓고 이러는 강제혁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모순적으로 자꾸 기대감이 들었다. 미쳐가는 것만 같다.
“들킬까봐 무서워?”
연신 문가를 힐끗 거리는 서하를 보며 강제혁이 물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야, 서하도 강제혁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여긴 엄연히 밀실이었다. 온전히 둘만 있는 공간에서 이서하는 강제혁을 마음껏 밀어낼 수 없었다. 마치 공식처럼. 그 밤에 각인이라도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제정신으로 그와 플레이를 한 순간부터일까.
“…네. 무서워요.”
기껏해야, 들키는 것이 무섭냐고 묻는 강제혁에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순한 플레이 파트너일 뿐인데, 그가 주는 속박이 달다. 뿌리치기 어려울 만큼.
‘하고 싶다.’
삿된 충동이 서하의 이성을 망가트렸다. 그의 밑에서 신음하고 싶다. 매섭게 떨어지는 매를 맞고 싶다.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 서하의 가지런한 대답에 강제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답하는 서하의 모습이 예쁘게 보였기 때문이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저 곱상한 낯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강제혁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이런 아마추어 같은 짓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자꾸만 탐심이 들었다. 선을 그은 주제에 단둘이 있게 되자 기대감을 내비치는 낯이 귀엽게도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벌을 주고 싶었다.
“어디가 좋을까.”
“…으읏.”
“직접 골라 봐요.”
셔츠 위로 젖꼭지를 문질러 꼬집으며 묻자 서하가 허리를 비틀었다. 짓궂은 장난을 치는 강제혁의 큰 손을 매달리듯 부여잡은 서하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장소와 행위가 주는 은밀함과 쾌감이 서하를 자꾸 흐트러트렸다.
“화장실로 가자고 하면 울 것 같고.”
“흐으…….”
“내 집으로 갈래요?”
정말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서하는 단순한 플레이 파트너였고, 강제혁은 제 집에 누군가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러고 싶었다. 무엇보다 호텔까지 갈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제 집은 학교에서 가까우니 이 열기를 식히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일지도 몰랐다.
“내 집으로 가자고.”
생각을 마친 강제혁이 서하를 내려다 봤을 때, 서하는 강제혁의 제안에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야한 남자였다. 그가 플레이가 처음이라고 했음에도 사실 강제혁은 쉽게 믿지 못했다. 서하가 통증을 쾌감으로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조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질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때리는 족족 좋다고 울어대는 서하는, 강제혁에게 있어 기대하지 않은 의외의 소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게 보이는 태도가 영 물렁하기에 맹탕인 줄 알았더니, 날도 세울 줄 알았다. 보면 볼수록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
“김 선생. 여기 있었어요? 같이 저녁 먹으러 갑시다.”
“아, 선생님.”
인문대 건물 앞에서 서하를 기다리던 김산의 앞에 연배가 있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이제 막 조교수가 된 김산의 직속선배 신성호였다. 수업을 막 마친 모양인지, 그는 아주 피곤해 보였다. 멋없이 튀어나온 배를 두들기며 얼른 밥을 먹으러 가자 보채는 그의 말에 김산이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서하가 수업을 마칠 때가 되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었다. 금요일 밤의 일에 대해 사과할 겸 저녁이나 먹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건지.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에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누구랑 먹습니까? 애인? 하긴 김 선생도 결혼할 때 되었지.”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서하와 먹을 생각이기 때문에 웃으며 고개부터 저었다.
“아니요. 제 후배가 이번에 출강을 나와서요.”
“후배? 우리 후배가 또 오나요?”
“아, 제 동아리 후뱁니다. 이서하라고, 이번에 한국미술의 이해 수업 맡았다고 해서요.”
“아, 그 교양 수업.”
얼른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김산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서하가 나오지 않는지 눈짓으로 살폈다. 하지만 신성호는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친구랑 셋이 먹어도 좋을 텐데.”
“하하, 나중에 제가 따로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눈치도 더럽게 없다. 김산이 겨우 신성호를 보내놓고 다 마신 테이크아웃 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얘는 왜 이렇게 안 나와. 수업 꽉 채워 하면 학생들 싫어하는데.’
나이에 안 맞게 고지식한 서하의 수업이 어떨지 예상이 되는지라, 김산은 실없이 웃었다. 귀여운 새끼. 아무래도 강의실 앞에서 기다려야겠다. 미리 물어볼 걸 싶었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수강신청 버튼을 누르고 강의명에 ‘한국 미술의 이해’를 검색하자 강사 이름에 ‘이서하’라고 쓰여 있는 텍스트가 떴다. 그 옆에는 강의실의 호수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눈을 들었을 때,
“…서하?”
김산은 덩치 큰 남학생의 손에 이끌리듯 잡혀 뒷문으로 나가는 서하의 옆모습을 보고 말았다. 멀리서 봐도 얼굴이 빨간 것이 안색이 나빴다. 대체 누구기에 서하를 저렇게 개 끌듯, 아니 함부로 끌고 가냐는 말이다. 어쩐지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유야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새가 없었다. 김산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
인문대가 정문과 가깝고, 강제혁의 집도 정문과 가깝기에 망정이었다. 서하나 강제혁이나 흥분이 지나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둘 다 급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고, 보폭이 큰 덕에 생각보다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겨울이라, 저녁 6시면 금방 어두워지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불을 켜지 않은 오피스텔 내부가 어두컴컴했다. 학생이 혼자 사는 방치곤 지나치게 넓고 쾌적했다. 자취방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내부에 서하는 조금 의아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불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둘 사이의 좁은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숨 막혀.’
산소가 부족한 것 같았다. 서하는 제 손목을 다시금 강하게 움켜쥐는 강제혁의 손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고 아래를 응시했다. 청바지 안에 수납된 강제혁의 성기가 그 모양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걸어온 건지 당황스러운 크기였다. 그리고 강제혁이 서하의 머리채를 잡아 쥐곤 아래로 내리 눌렀다.
“옷 벗으면서 꺼내서 핥아.”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하가 코트를 벗었고, 그 후 바로 강제혁의 바지버클을 풀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라는 둥 그를 밀어냈던 게 우스워졌다. 그의 것을 핥고 싶어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코트 다음으로 재킷이 떨어지고 나선 청바지의 지퍼가 내려갔고, 급히 넥타이를 풀어내며 혀로 속옷 틈의 단단한 살을 핥기 시작했다. 뜨겁고 짙은 향에 서하가 얕은 신음을 흘렸다. 흰 눈가가 붉게 젖어갔다.
강제혁은 외투만 벗어둔 채 그 모든 모습을 그저 관망하고 있었다. 서하는 강제혁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뻗어 속옷 안에서 부푼 채 끝이 조금 젖은 그의 성기를 끄집어냈다. 거근이 서하의 눈앞에서 두둑한 무게감을 자랑했다. 셔츠를 벗으며 강제혁의 성기를 입에 넣고 빨자, 턱이 저릴 지경이었다. 모조 성기 따위보다 훨씬 자극적인 맛이었다. 서하의 머리 위에서 강제혁의 낮은 신음이 터져 흘렀다. 입천장의 요철이 성기를 긁듯 조였고, 촉촉하고 말랑한 혀로 기둥의 아랫부분을 감싼 채 핥았다. 제대로 빨아본 적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솜씨였는지 강제혁도 한숨을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
“후……. 더 깊게 삼켜야지.”
뒤통수를 쥐는 손바닥의 감촉에 서하가 목구멍을 최대한 열고 강제혁의 성기를 버겁게 삼켰다. 한입 한입 성기를 입안에 밀어 넣다 보니 숨이 턱 막힐 쯤, 코끝에 음모의 끝이 닿았다. 다시 봐도 말도 안 되게 길고 큰 성기가 숨통을 틀어막았다. 목구멍이 가득 차는 외설적인 느낌이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서하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툭 터졌다. 조금 버거웠다. 하지만 강제혁은 그런 서하의 머뭇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서하의 머리를 눌러 아직 남은 성기의 말단 부분까지 입안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흐…!”
형편없이 망가진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입이 막힌 탓에 그마저 뭉개지고 말았다. 그 이후의 강제혁은 가차 없었다. 서하의 머리채를 잡고 마구잡이로 발기한 것을 박아댔다. 서하는 그런 취급에 도리어 흥분하며 뻐근하게 일어선 제 바지춤을 짚었다. 제 것도 꺼내서 만지고 싶었다. 아니, 엉덩이를 벌리고 뭐라도 쑤셔 넣고 싶었다.
도구처럼 입을 내어주고도 서하는 틈이 나면 혀를 움직여 강제혁의 커다란 성기를 핥고 애무했다. 서하의 입안이며 목구멍이 죄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강제혁이 신음을 꾹 눌러 터트리며 말했다.
“읏, 입 벌리고 혀 내밀어.”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민 서하의 얼굴 위로 정액이 거침없이 뿌려졌다. 강제혁은 그 장면을 눈에 담으며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 왜 이렇게 갖고 싶지. 이상하게. 젖은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삼켜야지.”
“흐…….”
“빨아서 깨끗이 해. 넣어줄 테니까.”
제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던 서하가 그 말에 입안에 떨어진 정액을 삼켰다. 강제혁은 거부감 하나 없이 제 성기를 빨아 깨끗이 하는 서하의 모습이 예쁘게 보이기도, 능숙해 보이기도 해서 돌연 화가 났다. 그는 곱상하게 생긴 낯에 묻은 정액 몇 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쳐 주었다. 서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곧 열렸다. 무릎을 꿇고 발기한 성기를 꾹꾹 누르며 참는 모습이 퍽 예뻤다.
“이서하 씨 나한테 혼나기 싫어서 말 잘 듣는 것 같은데, 옷 벗으란 말은 제대로 안 들렸나 봐요. 바지가 그대론데.”
“아.”
서하가 아차 싶었는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빳빳한 정장 바지가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 좀 많이, 맞아야겠네.”
아직 낫지 않은 엉덩이의 상흔이 떠올랐지만 기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쯤 되니 서하도 제 한계를 알고 싶어졌다. 어차피 며칠은 일이나 약속이 없을 테니 오늘 한 번 쯤 엉망이 되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
분명히 정문을 빠져나가는 것은 봤는데, 그 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김산은 방금 전까지 보였던 서하와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옷차림으로 봐서 서하를 끌고 가던 남자는 학생이 분명했다. 학생과 질의응답을 해봤자 강의실에서 해도 될 일이었고, 쉬는 시간이 빠듯하다면 교내 카페에 가도 될 일이었다. 아니 학교 밖의 카페에 갈 수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서하가 끌려가다시피 하던 모습이 이상했다.
김산은 서하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어보기까지 했지만, 배터리가 나간 건지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성만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김산은 괜히 걱정이 일었다. 강사와 학생이 싸우는 일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니, 제 걱정이 마냥 허무맹랑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서하는 말투가 곱지 않아서, 학부 시절부터 자잘한 트러블이 많았다. 서하도 남자고, 덩치가 작은 편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그 남학생이 워낙 거한이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더구나 강사와 학생은 미묘한 갑을관계니까. 서하는 처음으로 출강을 나온 풋내기였고.
「서하야, 이따 얼굴 좀 보자. 연락하면 형이 집으로 갈게.」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 문자를 보내놓는 것 정도였다.
***
“지난번에 보니까 손버릇이 나쁘더라고요.”
“아, 아읏…….”
“그래서 사 봤는데, 마음에 들어요?”
아무래도 지난번에, 스스로 사정방지 링을 풀었던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서하는 목과 손목을 칼처럼 채우는 고문기구 같은 결박도구로 인해, 운신의 자유를 빼앗긴 제 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선 채로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고정된 기구에 죄인처럼 칼을 찬 모습이기에 보이는 거라곤 제 발등 정도뿐이었다. 대체 이런 게 왜 집에 있나 싶었지만, 강제혁의 활동이력을 봤을 땐 더 어마어마한 게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행여나 다리가 오므라들까 방지하기 위함인지 기다란 검은 봉에 족갑이 달려있는 형태의 물건이 서하의 발 사이를 넓게 벌리게끔 했다. 대체 얘는 뭐하는 인간이기에 이런 가구에 가까운 결박도구를 사서 집에 두는 걸까. 경외심까지 들 정도였다.
“왜 대답이 없어.”
“읏!”
거칠게 엉덩이를 후려갈기는 손바닥에 정신을 차렸을 땐, 철제로 된 정조대가 제 성기를 압박하듯 채워진 채였다. 작정했구나. 서하는 등골에 소름이 이는 것을 느끼며 제 자세를 조정하는 강제혁의 손길대로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도구 사용은 처음이어서, 중세 전쟁 포로라도 된 기분이었다.
“자, 잘못 했어요…….”
이렇게 있으니 보이는 거라곤 판판한 흰 벽뿐이었다. 제 뒤에서 강제혁이 뭘 하는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서하가 자꾸만 떨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에 강제혁이 전신거울을 가져다 서하의 눈앞에 대령했다. 서하가 헉하고 헛숨을 집어 삼켰다. 제 뒤의 상황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정액이 묻어있는 제 얼굴만큼은 확실하게 보였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수치심이 밀려왔다. 서하의 귀 끝이 속절없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면 불안할 것 같아서 배려해주는 거예요.”
이런 배려는, 안 해줘도 괜찮은데. 너무 창피해서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딱딱한 손잡이 같은 것이 서하의 엉덩이 부근을 덧그리다 벌어진 골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쑤셔 줄까.”
서하가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강제혁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메마른 구멍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읏…….”
무덤덤하게 내부를 들쑤시고 문지르던 손가락이 가차 없이 뽑혀 나갔다. 그리고 서하가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강제혁이 손가락 두 개로 마른 구멍을 짓이기듯 열고 쑤셔 박았다. 흡사 섹스를 하듯 손가락으로 추삽질을 해대는 탓에 서하가 아랫입술을 당겨 씹었다. 거울에 언뜻 비치는 강제혁의 무표정한 옆모습은 깎아 만든 듯한 미형이었다. 수학문제라도 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제 아래를 쑤시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곧 손가락이 뽑혀 나갔다. 내벽이 딸려 나갈듯 거친 손놀림에 입구가 쓰라렸다.
“아윽!”
그리고 아직 상흔이 사라지지 않은 엉덩이에 예고도 없이 매가 떨어졌다. 후려치는 소리나 감촉이 아무래도 가죽패들 같았다. 넙적하고 단단한 가죽이 서하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강제혁이 후려치는 강도가 셌기 때문에, 생각보다 통증이 더 심했다. 넓게 퍼지는 통증에 서하가 잠시 멍해진 사이, 가시 돋친 목소리가 서하의 귓전을 때렸다.
“숫자 안 세?”
“아읏, 하, 하나.”
“얼마나 맞고 싶어서 이래.”
그 후에 거친 타격음이 이어졌다. 패들은 굉장히 아픈 도구였다. 더군다나 케인으로 맞은 상처가 낫기 전이니 더욱 그랬다.
남한테 맞으니 더 좋았다. 서하의 희고 통통한 엉덩이는 죽죽 그어진 상처에 더해 패들의 모양대로 벌겋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터질 것 같았다. 강제혁은 어떤 말도, 다른 행위도 없이 오로지 서하의 엉덩이를 두들겨 패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살 터지는 소리가 조용한 오피스텔 내부에 우레처럼 크게 울렸다.
“서, 서른아홉…….”
숫자를 세는 서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주먹은 통증을 참느라 꽉 쥔 탓에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욱신거렸다. 벌어진 다리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매질의 강도는 절묘했다. 더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치고 올라올 쯤엔 강도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중간중간 강제혁이 어르듯 속도를 줄였기에 참을 만하단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는 서하의 한계를 미묘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패들로 이 정도까지 맞아본 적은 없었다. 아니 기껏해야 제가 때리는 정도였으니 스무 대 안팎이 최대치였다.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고도 경험이 전무한 것이 조금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저보다 어린 학생에게 처음으로 매질을 당하고 있지 않나. 물론 정확히 따지자면 세 번째긴 했다.
“집중 안 해?”
“악!”
여태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풀 스윙에 서하가 악 소리를 내질렀다. 피가 배어 나오지 않을까. 어쩐지 척척하게 느껴지는 가죽이, 제 땀으로 젖은 것인지 피로 젖은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케인으로 인해 생긴 상처도 터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매가 닿은 피부가 온통 쓰라렸다. 몸 주인이 매를 얻어맞는 와중에도 착실히 부피를 부풀린 성기는 정조대 안에 갇혀 욱신거리는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이렇게 심하게 맞아도 너는 행복하구나. 서하는 제 줏대 없는 물건에 조금 야속한 심경을 느꼈다.
“엉덩이만 맞는 게 영 심심한가 보네.”
“아, 아니, 아윽…….”
강제혁이 별안간 서하의 멍든 엉덩잇살을 잡아 벌렸다. 매끈한 구멍이 공기 중에 드러나고, 서하는 거기에 닿는 가죽패들에 몸을 움찔 떨어야 했다. 맞아본 적 없는 곳이라 두려웠다. 무엇보다 예민한 부위였기에, 그리고 잘못되면 병원에 가야 한다. 그건 곤란했다. 게다가 떡 주무르듯 멍든 엉덩이를 아무렇게나 만져대는 게 너무 아팠다. 날카로운 통증이 꼬리뼈를 타고 올라가 정수리에 꽂히는 듯했다. 아픔에 식은땀이 등 위로 송골송골 솟는 듯했다.
강제혁은 겁을 먹어 벌벌 떠는 서하의 모습을 만족스러운 듯 감상하고 있었다. 등줄기를 훑는 맵시 좋은 손가락이 성감을 고조시켰다. 이윽고 패들의 손잡이 부분이 구멍을 짓이기듯 문질러 대는 느낌이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서하는 포박된 짐승마냥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여기가 부어터져봐야, 정신 차릴 것 같은데.”
“읏, 자, 잘못 했어요…….”
“골라 봐요. 내 좆에 박혀서 터지고 싶은지, 아니면 맞아서 터지고 싶은지.”
웃음기가 스민 강제혁의 목소리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서하는 거울 속의 울어서 젖은 낯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그럼에도 저는 골라야 했다.
“좆에…….”
“똑바로 말해야지. 주먹에? 주먹을 넣어 줄까?”
농담이 아닌 듯 쥐어진 주먹이 툭 하고 입구에 닿았다. 그라면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하는 처음으로 제 몸을 꿰뚫고 유린했던 남자를 기억했다. 거울 속 저를 보고 선 남자는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고통을 참느라 깨물어 죄다 터진 입술이 벌벌 떨렸다.
“울지 말고, 거울 똑바로 보고.”
강압적인 명령이 떨어졌다. 서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거울 속 붉어진 저의 낯선 얼굴을 마주했다. 거울 속의 사내는 낯설고도 익숙했다. 울어서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찢어진 입술은 모진 고문을 받은 듯도 했고, 격렬한 섹스를 하는 중 같기도 했다. 서하는 느리게 제 구멍에 닿는 축축하고 두툼한 남성의 선단에 떨며 다 터진 입술을 열었다.
“주인님 좆에, 좆에 박히고 싶, 흐, 구멍이… 터질 때까지, 박아주세요…….”
저보다 한참 어린, 그것도 제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천박한 부탁을 하는 제 모습이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눈물이 정처 없이 떨어져 내렸다. 서하는 수치심에 아래가 지끈거렸다. 단박에 허리가 잡혔고, 두꺼운 살 기둥이 서하의 뒤를 가르고 밀려들어왔다. 신음조차 터지지 않을 강한 압박감과 통증에 서하가 입을 벌리고 고개를 꺾었다.
“후, 왜 이렇게, 조여.”
“아, 아아…….”
“좋아서 침이나 흘리고.”
턱 끝에서 타액이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웃는 목소리가 선명해 눈물이 또 떨어졌다. 성기가 푹푹 소리를 내며 내벽을 문지르고 쑤셔댔다. 추삽질을 할 때마다 강제혁의 장골이 서하의 터진 엉덩이를 재차 때렸다. 구슬이 삽입되었던 지난번 플레이와 달리 그의 성기만이 자리했음에도 다 삼키는 게 괴로울 정도였다. 결코 무언가 삽입되어서는 안 될 부분까지 짓이기는 살몽둥이가 잔인했다.
서하는 통증과 쾌감에 몸부림을 치고 싶었지만, 구속구가 워낙 강력하기에 그럴 도리가 없어 울었다. 안을 얻어맞는 것만 같았다. 몸속을 가르고 드나드는 살덩이가 잘 깎은 몽둥이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수치스러운 건 남자에게 꿰뚫리며 좋아서 우는 제 얼굴이 바로 앞에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 으응, 흐으, 아…!”
“정신 못 차리지, 힘 안 빼?”
“악!”
젖꼭지를 짓이기는 손길이 무자비했다. 서하가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본 강제혁이 사정없이 성기를 처박다 이내 뽑아냈다. 순식간에 빠져나간 굵은 것에 서하가 눈을 크게 떴다. 화끈거리는 엉덩이에 미묘한 온도의 체액이 흩뿌려지는 감각이 야릇했다.
“하……. 이서하 씨 모르죠. 지금 당신 엉덩이가 얼마나 야하고 예쁜지.”
“하악, 아, 읏…….”
“상처 위에 피멍이 들어서 빨갛고 진한데, 하얀 정액이 잔뜩 묻었어. 구멍은 벌름거리고.”
숨소리가 섞인 색기 어린 목소리가 서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광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반쯤 남은 사정액을 입구에 대고 분출한 강제혁이 다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 잔 울음을 흘리던 서하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예고 없이 삽입된 물건은 여전히 크고 흉흉했다.
“흣, 힘들어요, 제발…….”
더듬더듬 부탁하는 말을 해봤지만 강제혁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뒤가 심하게 아려왔다.
“적어도, 침대에서…….”
“…침대에서? 더 말해 봐.”
“흐, 침대에서… 박아 주세요…….”
강제혁이 원하는 게 있다면 그런 말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서하의 예상은 옳았다. 강제혁이 성기를 뽑아내고 서하를 결박하고 있던 물건들을 전부 풀어주었다. 서하의 손목이 볼품없이 덜덜 떨렸다. 쉬고 싶었다. 하지만 제 파트너는 그럴 생각이 아닌 듯했다.
서하의 무너지는 몸을 덜렁 든 강제혁이 그대로 서하를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그리고 서하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서하의 허벅지를 벌리고 빳빳이 선 성기로 정액에 젖은 안을 꿰뚫었다.
“아으, 흐…….”
“침대에서, 박히고 싶다면서요.”
“아, 아읏…! 흐윽…….”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왜 울어.”
강제혁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서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서하는 시트에 닿는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그리고 그 와중에 자극받은 성기가 터질 것 같아서, 까맣게 번지는 시야에 눈물만 흘리느라 그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서하는 강제혁의 기세에 밀려 차마 싸고 싶다고 빌지 못했고, 강제혁은 그런 서하를 알고도 제가 다시 한 번 사정할 때까지 정조대를 풀어주지 않았다.
“하아, 아, 읏, 으응…….”
플레이가 끝나기 직전에야 서하의 정조대를 풀어준 강제혁은, 서하의 성기에서 정액이 흐르듯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짧은 고민을 했다. 이걸 영영 채워두고 싶다는, 플레이 파트너 치고는 주제 넘는 생각이었다.
***
서하가 새벽녘이 되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제 젖꼭지를 희롱하는 강제혁이었다. 엉덩이는 욱신거리고 허리 아래는 묵직했다. 몸이 제 것 같지가 않았다. 강제혁의 낯에서 음욕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플레이 중에 깬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몇 시예요…?”
말을 꺼낸 당사자의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 와중에도 젖꼭지를 만지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뭐하는 겁니까, 지금.”
“교수님의 젖꼭지를 괴롭히고 있었는데요.”
지극히 학생다운 말투이나 그 내용은 음란함이 지나쳤다. 서하의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교수 아니라니까요.”
“선생님의 젖꼭지를,”
“그만 말해요.”
“그만 말해야 할 건 이서하 씨 같은데. 목이 다 상했잖아요.”
목젖을 둥글리는 손끝이 어쩐지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서하는 제가 작성했던 표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브레스 컨트롤……. 적어도 빨간색은 아니었던 것 같다.
* 브레스 컨트롤 : 섭의 목을 졸라 호흡을 차단하는 플레이.
“다음엔 상체를 위주로 괴롭혀 볼까 생각 중이에요.”
“…….”
“그렇다고 구멍을 안 쑤셔준다는 건 아니니까 실망하지 말고.”
“실망이라니,”
“그런 표정이던데.”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평소 성격대로 대꾸하고 싶었지만 목이 너무 아팠다. 서하는 그런 핑계를 대며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다듬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흠, 그때… 말한 건 뭐였어요.”
“문자로 얘기할까, 목이 너무 상했는데. 몇 번 쑤시지도 않았는데 왜 그래요. 울기나 하고.”
“괜찮아요. 어쨌든, 그, 뭐 산다고 그랬잖아요.”
“아.”
도구에 대한 것이었다. 설마 오늘 쓴 것들이 샀다던 그 물건인가. 수업 전에 치대기에 밖에서 쓸 만한 걸 산 줄 알았는데. 저것들은 아무리 봐도 실내에서 써야 마땅한 물건들이었다. 강제혁의 침묵이 길어지자 서하의 눈꺼풀이 조금 조금 감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보여줄게요.”
대답하는 이의 목소리가 낮아서 그런가, 자꾸만 잠이 왔다. 서하는 이 날, 폭면을 취했다.
***
쏟아지는 햇살이 눈꺼풀 위로 번졌다. 축 가라앉은 몸은 물에 젖은 솜 같기도 했다. 서하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보려다 이내 포기했다. 몸 상태는 망가진 장난감에 가까웠다. 그리고 특정부위가 말도 못하게 욱신거려서, 비로소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여기 어디야…….”
그러고 보니 제 집이 아니었다. 강제혁의 집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중간에 새벽에 깨서 뭐라 대화도 나눈 것 같았다.
‘별 짓을 다 했네.’
서하는 남의 집에서 잠을 잔 게 영 어색했다. 물론 피 말리던 석사 시절에, 학교에서도 여러 차례 수면을 취했지만 남의 집에선……. 김산의 집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동아리 회식 후에 막차가 끊겼을 때였다.
- 자고 가.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봤던 것 같다. 서하는 어린 시절에도 친구 집에 한 번 묵어 본 적이 없었다. 친구라 할 만한 존재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김산은 그런 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고 가라고 했었다. 괜찮다고, 그냥 동방에서 자도 된다고 다급히 고개를 저었는데.
- 혼나고 싶지. 그만 까불고 따라와.
스읍, 겁주는 소리를 내며 묻는 말에 서하는 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손에 이끌려 자취방 문턱을 넘었고 그의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그가 건네준 검은색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의 침대 끄트머리에 누웠다. 그땐 너무 심장이 뛰어서 토할 뻔 했다.
술은 애초에 깼고, 조금 품이 남는 그의 옷에서 나는 체향에 잠은커녕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바닥에서 자겠다고 우기기를 백 번은 우긴 것 같은데, 김산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며 으름장을 놓는 탓에 그 사달이 났었다. 침대 끝에 떨어질 듯 누워서 등을 돌린 서하를, 김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 당겼다.
- 그러다 떨어질라.
단단한 손바닥이 뜨끈하게 제 허리를 감쌌다. 바디필로우라도 된 것처럼 김산에게 안겼던 그날, 서하는 단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그 후로 김산의 집에서 몇 번 더 묵을 일이 생기면서 서하는 그와 함께 잠드는 것에 점차 적응하게 됐다. 이제 그가 결혼하고 나면, 그럴 일은 영영 없을 테지만.
“엄청 잘 자던데.”
“아…….”
상념을 깨부수듯 서하의 볼이 쿡 찔러졌다. 지난 밤 서하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든 주인공이었다.
“…몇 시예요?”
“1시.”
더럽게 오래 잤다. 평소 기상시간은 못 해도 8시인데. 서하가 쉬이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잠시 방치하고 상체부터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상체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서하의 흰 피부 위에는 울혈이 가득했다. 강제혁은 그 모든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옷 좀 가져다줄래요?”
“옷 입고 싶어서?”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자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어쨌든 그저 단순 플레이 파트너인데 집에서 잠이 든 것까지는 좀 너무 간 것 같아서, 서하는 빠르게 사과했다. 강제혁은 알 수 없는 얼굴로 서하의 드러난 피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옷을 달라는 뜻으로 손부터 뻗었는데 손목이 잡혔다.
“…?”
“엉덩이 몇 대만 맞고 갈래요?”
심각한 얼굴에 비해 가벼운 어투였다. 서하는 강제혁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더 맞았다간 제 구실을 못할 지경일 것 같은데. 고민하는 사이 강제혁은 아무렇지 않게 서하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후였다.
“아니면, 허벅지 안쪽?”
“…아침부터,”
“아침 아니라 낮이에요.”
강제혁의 목소리가 진득했다. 어린 게 확실히 기운은 좋구나. 서하는 느리게 제 안쪽 살을 쓰다듬는 강제혁의 손에 얕게 신음을 흘렸다. 몹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동시에 두려운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쉬고 싶었다.
“…너무 피곤해서 안 되겠어요.”
그 말에 서하의 몸을 더듬거리던 손이 멎었다. 서하는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있는 강제혁을 두고 몸을 틀었다.
왜 저럴까. 서하는 묵직하게 꺼지는 다리를 겨우 침대 아래로 내렸다. 깔끔하게 개어진 옷 더미가 보였다. 순서대로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넥타이는 손에 들었다. 서하가 힘겹게 현관까지 걸어 구두를 신는 동안에도 강제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서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하가 마지막으로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었을 때, 강제혁이 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이서하 씨.”
“…호칭 조심합시다.”
단둘이긴 했지만, 지금은 플레이 중이 아니었다.
“여긴 강의실이 아니잖아요.”
“지금은 플레이 중이 아니고요.”
“열 받네, 진짜.”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엔 짜증이 서려 있었다. 서하는 어깨를 으쓱하곤 돌아서 문 밖으로 나섰다. 그가 자꾸 헷갈리게 하니 저도 휘말리는 것 같았다. 그 판판한 등을 강제혁이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
하려던 말을 통째로 무시당했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어젯밤 내내 제 품에서 울며 용서를 빌던 남자였다. 그래놓고 아침이 되자 멀끔한 낯으로 저를 밀어내는 모습이 굉장히 괘씸했다.
“바른 말만 하는데.”
서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자신은 플레이 파트너에 불과하고, 플레이 중이 아닐 땐 그를 구속할 자격은 없다. 오로지 서하가 허락할 때만 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런 관계를 지향했다. DS는 귀찮았고, 연애는 더 싫었다.
그럼에도 뭔가 달랐다. 여태 고수해온 원칙이 깨어지는 느낌. 이상하네. 고작 플레이 파트넌데, 왜 이렇게 화가 나지. 고민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알면서 모르는 체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
“피곤해 죽겠다, 진짜.”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도착한 집에선 익숙한 냄새가 났다. 대충 입은 옷을 다시 벗어야 하는데 그럴 정신이 없었다. 엉덩이는 온통 욱신거렸고, 구멍은 여전히 쓰라렸다. 약이나 한 번 더 바를까. 벗어서 확인도 해야 되는데.
그러고 보니 플레이 후에 제 몸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 했다. 단추가 두 개쯤 풀어진 셔츠는 벗으려면 쉽게 벗어질 텐데, 너무 피곤해서 그마저 귀찮았다. 서하는 어쩌면 강제혁이 다음부터 연락을 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플레이 파트너라는 건 그런 거니까.
강제혁 정도라면 굳이 제가 아니라도 그를 만족시켜줄 섭은 많을 터였다. 보기 드문 거구에 깎아 만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성별 상관없이 어필이 가능할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플레이 실력도 대단했다. 단번에 분위기를 사로잡는 낮은 목소리나 플레이 할 때의 위압감, 매질의 강약 조절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성기 쪽은 더욱 그랬다. 그런 크기는 흔치 않지.
“아, 휴대폰…….”
서하는 그제야 제 휴대폰의 전원이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조용하더라. 근데 정말이지, 1cm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저절로 휴대폰이 움직여서 충전기에 꽂혔으면 좋겠다. 아니, 아예 배터리를 충전할 필요가 없어지면 좋겠다.
‘이과 왜 일 안 하냐. 나는 문과니까 괜찮아. 유용하게 쓸게. 나는 돈 많이 못 벌잖아.’
두서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서하의 눈이 피곤에 차차 감기려 했다. 그리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굴까. 택배일까? 관리사무소. 소독. 가스 점검. 생각하면 할수록 문을 열어줘야만 하는 예시들이 떠올랐다.
“…나갑니다.”
서하는 움직이기 싫은 몸을 겨우 움직여 현관까지 걸었다. 기운이 없었다. 축축 처지는 몸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서하야.”
“선배가 왜 여기에,”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김산이었다. 화가 잔뜩 난 말투였다. 서하는 갑작스런 김산의 방문에 어쩔 줄 몰랐다. 피곤하다고……. 타이밍의 신이란 게 있다면 저를 매우 미워하는 게 틀림없다.
“배터리가 나갔어요. 뭐 급한 일 있어요?”
“배터리가 나갔으면 충전을, 너 외박했어? 어제 입었던 옷이잖아.”
어떻게 안대……. 말을 잇던 김산이 마치 연인의 외도를 알아낸 남자마냥, 혹은 업어 키운 막내를 훈계하는 큰형마냥 따지듯 물었다. 서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친한 선배라도 좀 그랬다. 그리고 어제 본 적도 없는데 어제의 제 옷차림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왠지 오싹해졌다.
“들어와서 얘기해요.”
무엇보다 그가 서있는 곳은 현관 밖이었다. 옆집 사람이 외출하며 열린 문틈으로 저를 한 번 쳐다보는 게 보였다. 쪽팔려, 진짜.
서하가 한 발자국 비켜서자마자 김산은 큰 몸을 욱여넣듯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주 화가 나 보였다. 서하는 어이가 없었다. 분기탱천한 그의 발걸음이 매우 짜증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외박했냐고 물었잖아.”
“무슨 상관이에요, 대체?”
서하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어이가 없어 언성을 높였다.
“무슨 상관?”
“선배가 제,”
애인이라도 되느냐고 하려다 적합한 단어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지독한 이성애자였다. 서하가 마음을 더 키워 나가지 못한 원인. 그를 그저 자위의 대상으로 폄하했던 원인. 그는 동성애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곧 결혼할 사람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런 오명을 덧씌운 제가 우스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김산이 만약 제가 방금 한 생각을 알았더라면, 나아가서 제가 10년 동안 그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알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서하가 멈췄던 말을 빠르게 이었다.
“제 친형이라도 돼요? 친형도 서른 살 동생 외박엔 상관 안 해요. 그게 정상이고.”
“이서하, 너…….”
“선배 동생들한테도 이래요? 욕 드시려고.”
“네가 걔네랑 같아?”
이상하게 김산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서하가 본 대로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어제 그 장면을 목격한 후부터 서하가 걱정돼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겼을 까봐.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일순 들긴 했지만 금세 지웠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하는 제가 아는 한 가장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그래서 예뻐했고.
“형 실망하게 할래?”
“…대체 왜 실망을 하냐고요.”
서하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억울함과 함께 한숨이 스민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건 김산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외박한 거 맞아요. 근데, 저는 외박하면 안 돼요?”
“뭐?”
“선배는 저한테 말하고 외박해요? 저한테 허락받고 섹스하고, 연애해요? 결혼한다는 그 사람은 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서하야. 그건,”
주객이 전도되었다. 서하가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너무 과하게 반응했다. 감정이 터져버린 탓이다. 서하에겐 변명을 하려는 김산도 우습게 느껴졌다. 다 어이가 없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대체 왜. 서하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고팠다. 어제부터 피우질 못했다. 골이 아픈 게 금단증상 같았다.
“형은 그냥, 걱정돼서 그랬어.”
“걱정을 왜 해요. 제가 세 살배기도 아니고.”
“그리고 내 애인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그의 입으로 애인 얘기를 듣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차라리 청첩장을 받고 말지. 서하가 손을 내저으며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예 김산을 지나쳐 베란다로 향했다. 담배를 지금 당장 피워야 속이 좀 시원해질 것 같았다. 피곤해서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서하가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가치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제가 담배를 피우는 사이 김산이 집에서 나갔으면 좋겠다. 아마 그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단추를 몇 개 더 풀고 답답한 목덜미를 거칠게 매만졌다. 성질이 뻗쳐 죽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 연애해?”
“하…….”
열린 베란다 문틈으로 김산이 물었다. 서하는 정말로 어이가 없어졌다. 지난 10년간 제가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끔씩 주변인들이 짚어내긴 했지만, 김산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제가 외박을 하고 온 것에 연애 여부를 묻고 귀찮게 구는 것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꾹 눌러 삼켰다. 제가 연애를 하도 안 해서 그런가 보다. 그래서 저러나 보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연애를 한다고 홧김에 뱉어볼까 했지만 소개라도 시켜달라면 데려올 사람이 없었다. 문득 강제혁이 떠올랐지만 스스로도 웃겨서 고개를 저었다. 서하는 담배연기를 뱉어내는 척 느리게 숨을 내쉬다 고르고 고른 말을 뱉었다.
“연애는 무슨, 그런 거 안 해요.”
“…좀 서운해서 그랬어. 그런 것 같다.”
그런 것 같다는 또 뭐야.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연기와 함께 서하의 입가로 새어 나왔다. 찢어진 입가가 아팠다. 서하가 담배를 마저 빨아 태우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입안이 텁텁했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자 김산이 아예 서하의 가까이에 섰다. 그리고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서하를 보고 물었다.
“어제 그 학생은 뭐야?”
“학생이요?”
서하는 김산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학생?
“어제 인문대 앞에서, 너 밥이나 사주려고 기다리는데……. 어떤 키 큰 학생이 널 끌고 가더라고. 학생 맞지? 체대생 같던데.”
“아.”
강제혁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서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충격 받았다. 그를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보다. 그걸 지금 깨달았다. 갑자기 창피해졌다. 물론 그를 마냥 학생으로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긴 했다. 사적인 문제가 있었으니까.
“…학생 맞아요.”
“싸움이라도 난 건가 싶었어. 그래서 따라갔는데.”
“따라왔다고요?”
서하는 숨이 턱 막혔다. 김산이 좀, 너무…….
“그래.”
너무, 지나쳤다. 그리고 당당했다. 일반적인 선후배 관계가 이 정도까지 가도 되나. 좀 친한 형 동생 사이라면 그래도 되는 건가. 서하는 제 비좁은 인간관계에 탄식했다. 간접적인 예시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아는 관계 안에선 이와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었다. 여러모로 비통한 일이었다.
담배냄새가 바람을 타고 집 안으로 다시 고여 들었다. 서하는 춥고 피곤했다. 김산은 장승마냥 버티고 서있었다. 돌아갈 생각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것 같았다.
“…….”
“…….”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길게 둘 사이를 가로질러 불었다.
‘추워.’
맞부딪히는 시선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고, 꾹꾹 눌러진 분노는 갈 곳을 잃은 듯했다. 서하는 김산의 지나친 참견을 어떻게든 순화해서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김산은 서하의 행동에 화가 난 이유를 찾기보다 서하에게서 해명을 듣고자 했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결국 서하의 입에서 제가 바라는 해명이 나오지 않을 거라 판단한 김산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건 멍이야?”
“멍이요?”
“이 날씨에 모기 물렸다는 소리는 하지 마.”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던 서하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덥고 짜증이 나서, 아무 생각 없이 풀어 젖힌 셔츠의 윗부분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강제혁이 남겼을 게 분명한 자국도.
“…멍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일 것이다. 이것도 멍이라고 하면 멍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서하의 말끝이 조금 떨렸다. 그 떨림을 귀신같이 알아챈 김산이 짓씹듯 일갈했다.
“거짓말 하지 마. 너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피로한 낯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면 어쩔 것이고 거짓말이 아니면 또 어쩔 텐가. 서하는 담배를 비벼 끄고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누적된 피로감이 서하의 뒤통수를 쳤고 순식간에 오한이 몰려왔다. 혼자 있고 싶었다.
“…하, 진짜. 그만 좀 해요. 짜증나게.”
“뭐?”
피곤한 몸에 니코틴이 뒤늦게 퍼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몸에 힘이 죽죽 빠졌다. 뭐라 화를 낼 여력도 없었다. 서하가 차갑게 식은 손끝으로 김산의 몸을 밀어냈다.
“이서하!”
“좀 가요, 제발. 선배고 뭐고 진짜 다 부숴버리고 싶으니까.”
서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창백하게 질렸을 게 뻔한 낯이 떠올랐지만, 다른 걸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서하는 김산을 집에서 몰아내는 데에만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서하의 힘이 김산을 밀어낼 정도는 되지 않았다. 김산은 여전히 서하의 해명에 납득하지 못한 상태였고, 서하에게서 답을 듣고 싶어 했다. 서하의 체온이 지나치게 낮은 걸 눈치 챈 김산이 그대로 서하를 받아 안았다.
“서하야, 너 왜 그래.”
“좀 가요…….”
“아픈 거야? 손이 왜 이렇게 차!”
“하…….”
메마른 서하의 입술이 김산의 목덜미에 무감하게 내려앉았다. 그건 명백히 어떤 성적인 의도가 담긴 접촉이 아니었다. 아픈 사람이 기운이 없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탓에 발생한 마찰이었다.
김산은 그런 서하를 고쳐 안았다. 접촉한 부분부터 피어오르는 기이한 열기와, 제 눈에 보이는 서하의 얼룩덜룩한 목덜미가 동시에 저를 혼란하게 했다. 김산이 이상한 충동에 휩싸여 있는 사이 서하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서하야, 침대에 누울까? 형한테 기대 봐.”
“아읏…….”
서하를 지탱하려던 김산의 손이 우연히 둔부를 스쳤다. 찌르르한 통증에 서하가 입술을 깨물고 몸을 움츠렸다. 정신이 번쩍 드는 통증이었다. 그리고 김산의 앞에서 강제혁이 남긴 상처를 통해 이런 느낌을 받는 게 몹시 수치스러웠다. 서하가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해 세우며 김산을 힘주어 밀어냈다. 이번엔 쉽게 물러나졌다.
“선배, 저 이제 괜찮으니까… 그냥 가세요.”
“아픈 사람을 어떻게 두고 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갑자기 담배를 너무 피웠더니 뽕 왔나 봐요. 짜증내서 죄송해요. 어지러워서 그랬어요.”
서하는 최대한 단정한 어투로 조곤조곤 제 상태를 전했다. 김산은 몇 차례 서하를 돌아봤지만, 서하가 기를 쓰고 배웅하는 탓에 결국 현관을 나서야 했다.
“가세요.”
“…일단 쉬어. 형이 연락할게.”
“…저 잘 거예요.”
현관의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 동상마냥 서 있던 서하가 느린 걸음으로 침대로 향했다. 베개에 얼굴을 박다시피 하고 눈을 감았다. 생채기가 주는 통증의 여운을 길게 느끼며 잠들고 싶었다.
***
“목말라…….”
서하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신체리듬 다 꼬이게 생겼다. 서하는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아 넣으며 짧게 신음했다. 시계를 하나쯤 살까 싶기도 했지만 째깍거리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요즘은 무소음 시계도 있다던데. 하나 사볼까. 생필품은 비는 게 뭐가 있었지.
서하는 머릿속으로 주방이며 화장실에서 부족했던 게 있었나 잠시 헤아려 보았다. 아, 칫솔. 칫솔을 새로 사야 한다. 그리고……. 고민하는 사이 휴대폰의 전원이 켜졌다. 서하가 쇼핑 어플리케이션을 찾아 열려고 휴대폰을 들었을 때, 지잉 하고 진동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꺼진 사이 도착한 연락들이었다.
김산, 김산, 김산, 강제혁. 김산의 연락은 서하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어제부터 보낸 모양이었다.
「서하야, 너 지금 어디야? 메시지 보면 전화해.」
「일어났어? 집에 들어간 거야?」
문자 두 개. 그리고,
「화내서 미안하다. 형이 경솔했어. 너한테도 사생활이…」
다음은 메신저였다. 눌러서 읽으면 뒷내용이 보일 테지만 굳이 누르지 않았다.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에 비해 강제혁의 메시지는 단출했다.
「재갈은 어떤 모양이 좋아요?」
서하가 본론만 담고 있는 그 원색적인 글자들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친한 형으로서든, 좋은 선배로서든 뭐든 감정이 잔뜩 섞인 질척한 메시지보다, 이 건조하고 새빨간 연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서하한테 필요한 건 애인이 아니라 주인이니까.
「보기가 있어요?」
혹시 해서 물어봤다. 객관식인 편이 좋으니까. 강제혁의 답장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도착했다. 11시였으니 아주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서하가 물을 한 컵 마시고 온 후였다.
친절히 상품 사진까지 첨부한 메시지에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좀 씻을까. 그러고 보니 아직 외출복 차림이었다. 불편해서 어떻게 잤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서하가 휴대폰을 방치한 채 구겨진 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냉수와 온수 사이에서 적정 온도를 찾느라 벗은 몸에 한기가 들었다. 서하는 아예 온수 방향으로 수도를 틀어놓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조금 있으면 용암이 되겠지.
“하…….”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엉덩이가 따끔거렸다. 저릿한 통증에 눈가가 떨렸다. 거울에 언뜻 비춰봤을 땐 멍이 심하게 들어있었다. 보라색으로 변한 엉덩이가 기이했다. 당분간 스팽은 못하지 싶었다. 낫는데 최소 일주일은 더 걸릴 것 같았다.
물이 지나치게 뜨거워져서 악소리가 절로 나왔다. 서하가 수도꼭지의 방향을 조절했다. 뜨거운 물이 닿은 부분이 익은 것 같았다. 적정한 온도를 찾고 나자 김산 생각이 났다. 어떤 의미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늘 저를 막내 대하듯 했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과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제일 합당했다.
“이제 와서 무슨…….”
곧 결혼도 할 인간이, 후배 나부랭이한테 관심이 지나쳤다. 이 정도야 제 선에서 끊어낼 수 있는 일이었으니 괜찮았다. 어찌어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휴대폰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제혁에게 답장을 해야 했다. 서랍에서 잠옷을 꺼내 걸쳐 입은 서하가 물기가 덜 마른 손으로 휴대폰을 집었다. 고민 끝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에 대한 답장은 서하가 다시 잠들기 전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다.
***
며칠을 누워 지냈는지 모르겠다. 서하는 이따금 걸려오는 김산의 전화를 무시하며 요양하다시피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이프워드가 필요할 것 같았다. 강제혁이 쓰는 도구들의 수준이, 가볍게 플레이를 할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운을 떼는 게 좋을까.
* 세이프워드 : 플레이 중에 섭이 돔의 행위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외치는 플레이 중단 신호
고민하는 사이 금요일이 되었다. 운동 좀 해야 되는데. 서하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덤벨을 손에 들고 거실로 나왔다. 먹을 건 좀 있나.
서하는 무감하게 덤벨을 들어 올리며 팔운동을 좀 하다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제혁에게 재갈 종류를 고르는 메시지를 보낸 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먼저 보내자니 또 괜히 채근하는 것 같아서 영 내키지 않았다. 일단은 저도 요양을 할 필요가 있긴 했고.
“…….”
문제는 상처가 생각보다 빨리 나아서, 그리고 그가 보내준 재갈의 사진이 자꾸 떠올라서 몸이 근질근질 하다는 것이었다. 회복력 장난 아니다. 그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플레이 중이 아님에도 일상조차 지배당하는 것 같다. 강제혁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이쯤 했으면 먼저 연락해도 되지 않을까. 바쁘지 않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바빠요?”
신호가 몇 번 갔고 강제혁이 늦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그래도 전화를 받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 것을 감안해 그에게 바쁘냐고 먼저 물었다.
[어디예요?]
“집, 인데요.”
대뜸 어디냐 묻는 말에 얼결에 실토했다. 감출 것도 아니었지만.
[…빨리도 연락하네.]
“지금 바빠요?”
[바쁘면 안 받았죠.]
어쨌건 제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해 재차 물은 것인데,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서하는 휴대폰을 고쳐 잡으며 덤벨을 소파에 내려놨다. 그거 좀 들었다고 팔 근육이 당겨왔다. 이서하 많이 죽었다.
[왜 전화 했어요?]
“음……. 답장이 없어서요.”
[지금 물고 싶어서?]
간접적이되 직설적인 말이었다. 서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체 뭘 물고 싶으냐고 묻는 걸까. 지난 메시지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목적어로는 재갈이 합당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음습한 목소리에 서하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가 묻는 것이, 입에 좆을 물고 싶으냐는 아니면 아래에 좆을 물고 싶으냐는 질문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서하는 가만 마른 침을 삼키고 느리게 대답했다.
“물고 싶어요, 지금.”
[뭘 물고 싶은데.]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야릇했다. 제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 서하는 입술이 바짝 바짝 말랐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주지 않을 거야, 하는 것 같아서. 서하는 플레이 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을 플레이의 연장선처럼 느꼈다. 그가 제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하는 수화기 너머의 포식자에게 얌전히 제 목덜미를 내놓았다.
“…주인님 좆을, 물고 싶어요.”
제법 간절한 청이었다. 말하고 보니 더 창피했다. 짧은 침묵 후에 기다리던 대답이 떨어졌다.
[1시간 줄 테니까 내 집으로 와요.]
그건 대답의 탈을 쓴 명령이었다. 칼날처럼 딱 떨어지는 말에 서하가 낮게 신음했다. 발끝이 오므라들 만큼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
양친은 사이가 나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 속 모든 순간에 다툼이 있었으니까. 직접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쉬운 환경은 아니었다. 자신의 핏줄이란 생각보다 증오하는 이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더 짙었는지, 애정은 한 톨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혼은 당연한 수순처럼 이어졌고 강제혁은 자연스레 조모의 손에 맡겨졌다.
다정한 분은 아니었다. 어렸던 강제혁은 그런 조모에게마저 버려지는 게 무서워서, 조모가 절 버릴 이유를 만들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상장을 가져다 드렸던 날, 조모는 처음으로 웃어주셨다.
- 잘했다.
얕게 올라가던 입꼬리에 강제혁은 그와 똑 닮은 각도로 웃어 보였다. 그날 밤, 강제혁은 쿵쿵 세게 뛰는 심장 탓에 잠이 들 수 없었다. 그 뒤로 열심히 공부했고, 늘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노력은 통했다. 조모는 그런 손자를 퍽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애정은 바라지 않았다.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구태여 바라지 않았다. 모범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틀 안에 가뒀다. 열세 살의 어느 날,
- …가 죽었다는구나.
누굴까.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 몰랐다.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같이 슬퍼해야 하나. 강제혁은 메마른 조모의 눈을 보았다가 다시 바닥을 응시했다. 이름 모를 이의 장례식장에 도착한 강제혁은 그제야 죽은 이가 제 모친임을 깨달았다.
검은 줄이 사선으로 쳐진 영정사진 속에는 저와 닮은 얼굴이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있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웃는 구나. 딸의 영정사진 앞에 선 조모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혁도 울지 않았다.
부친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혼한 상태였으니, 굳이 올 필요는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 후 3년의 시간동안 조모의 몸은 천천히 쇠약해져갔다. 홀로 남을 제가 안쓰러웠던 건지, 돌아가시기 전엔 유산마저 손자에게 물려주셨다. 강제혁의 부친이자, 조모에겐 사위였던 남자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상속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커다란 저택에 홀로 남은 강제혁은, 발인을 마치고 나서야 아주 조금 울 수 있었다. 우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지만 눈물이 났다. 저를 아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날이었다. 그날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해가 유난히 길었던 하지(夏至)였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탓에 눈물은 금세 말랐다. 가뭄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
일반적인 섹스에는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다. 또래보다 키가 컸고, 운동을 했기 때문에 덩치는 갈수록 더 커졌다. 유전적인 덕도 있었겠지.
제법 잘난 외모 덕분인지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강제혁이 원한 적은 없었어도 사람들은 꽃을 찾는 벌과 나비처럼 자연스레 그 곁으로 모여 들었다. 편리한 일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속이야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연초면, 항상 제 가정상황을 알게 된 담임선생이 저를 불러내 상담을 하곤 했지만 착한 낯으로 모범적인 대답을 내놓으면 금세 해결되곤 했다. 착하다. 떨어지는 칭찬들이 우스웠다. 당신이 뭔데? 그에 대한 답은 없었다.
으레 청소년 시기를 거치는 인간이 그렇듯, 언제 어디서나 욕구는 들끓었고 성적인 충동은 수시로 일었다.
- 야, 좋은 거 보여줄게. 우리 집으로 와. 오늘 비어!
친구들은 강제혁에게 숨 쉬듯 AV를 들이댔고, 별 희한한 음란물을 가져다 보여주기도 했다. 동조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그 단순한 성행위에 강제혁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 나는 섹스가 싫은가봐.
당시 사귀게 되었던 친구와의 섹스를 목전에 두고, 강제혁이 뱉은 말이었다.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전희 속에서 어떤 열기도 느끼지 못했다. 무감각했다. 그 친구는 강제혁의 말에 서러움을 느꼈던 모양인지, 화를 냈고 이어서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어서 새빨갛게 물든 눈가가 강제혁의 시야에 닿았다.
- …울지 마.
우는 사람에겐 위로를 해줘야 한다. 달래줘야 한다. 강제혁은 배웠던 대로 울지 말라고 말했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을 했다. 더 울어. 잘못했다고 빌어 봐.
소름끼치는 생각이었다. 강제혁은 제 껍질뿐인 위로에 엉엉 울며 매달리는 그 애를 밀어내고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울리고 싶다. 아프게 하고 싶었다. 하얀 살결이 붉게 물드는 게 보고 싶었다. 두려움에 제게 감히 매달릴 수도 없을 만큼.
결국 그날, 강제혁은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옷도 벗지 않고 샤워기 아래 섰다. 찬물을 아무리 맞아도 생전 처음 치솟은 열기는 쉬이 식질 않았다. 언뜻 떠오른 사내의 흐린 얼굴과 몸이 제 성욕을 부채질했다. 모르는 남자였다. 아니 언젠가 본 적 있는 남자일지도 몰랐다. 그는 제 또래인 것 같기도, 아니 연상인 것 같기도 했다. 상상 속에서 강제혁은 그 소년의 옷을 벗기고 희고 단단한 어깨를 깨물어 상처를 냈다. 그리고 그의 하얀 엉덩이가 새빨갛게 터지도록 매질을 했다.
- 아…….
그런 상상을 하고서야 강제혁은 겨우 파정할 수 있었다. 스스로 규정했던 이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자위를 하며 남자를 떠올린 것도, 폭력적인 행위로 흥분을 느끼는 것도 ‘이상적인’ 일은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제가 미쳤나 싶었지만 점차 그런 스스로를 인정하게 됐다.
‘나는 이런 인간이야.’
그 뒤론 어렵지 않았다. 아예 작정하고 그런 쪽으로 찾아보니 저와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고맙게도 맞는 걸 즐기고, 울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상상 속 남자와 같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은 좋은 대체재가 되어 주었다. 생각보다 더 편리했다. 어렸던 강제혁은 제 자신이 비정상적이라고 느꼈지만, 결국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나누는 것에 지쳤다.
- 제혁이는 못하는 게 없네. 뭐가 되고 싶어?
- …선생님이요.
충동적인 대답이었다. 상상 속 소년 때문일까. 담임은 꽤 만족스러워했다. 학교에선 우수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으니 누구도 강제혁의 비행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조모의 저택은 내버려 둔 채, 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중 하나인 번화가의 오피스텔에 머물렀다. 돈은 썩어 넘치게 많았다. 다만 저택에서 나온 이유는, 그저 이런 제 뒤틀린 일면을 조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분이었지만, 그 분의 유골함이 있는 곳에서 망가질 수는 없었다. 그 분이 저를 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음에도 더 이상 그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더욱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인연을 맺는 것은 버거워서, 가벼운 관계를 지향했다. 매달리는 사람은 늘 있었지만, 끊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 바닥이 그랬다.
그래서 강제혁은 그날도 가벼운 마음으로 파트너를 물색했다. 호텔로 불러내 가볍게 플레이를 할 생각이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정신적으로 피곤한 날이었다.
- 하…….
콘돔을 잊어서 사올 겸 편의점에 들렀다 왔는데, 작지 않은 키의 남자가 호텔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낮은 한숨이 초조해보였다. 다소 하얀 피부가 호텔 조명 아래에 빛나듯 반짝거렸다. 뒷목이 곧고 단단해 보였다. 제가 뒤에 설 때까지도 눈치 채지 못하는 점이 우습게도 퍽 귀엽게 느껴졌다.
- 안 들어가요?
그렇게 물었더니 대놓고 굳는 게 더 웃겼다. 호텔 방문을 넘어서 조명을 켜자 굳은 낯이 더 잘 보였다. 시원스레 곧게 뻗은 콧날이나, 하얀 이마 같은 게 잘 깎아 만든 인형 같았다. 문득 아주 오래 전에, 처음으로 자위를 했던 날 상상했던 미형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초보 같았다. 그리고 어쨌더라. 금세 못하겠다고 울며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해 조금 흐린 정신으로 지난 일을 떠올리던 강제혁이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 너머로 예의 그 잘 만든 얼굴이 떠 있었다. 강제혁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시계를 확인하니 58분이 지나 있었다. 1시간 안에 오라던 말을 지키려던 건지, 꽤 빠듯했지만 어쨌든 약속시간 안에는 도착했다. 물론 그것도 제가 문을 열어줄 때의 일이겠지만.
강제혁은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 빗장을 건 채 문을 열어 보였다. 작은 틈을 두고 서하가 서 있었다.
“…한 시간 안에 왔어요.”
“2분 남았는데.”
“들여보내 주세요.”
성질이 보통이 아닌 사람이 그걸 꾹꾹 참아가며 제게 부탁하는 게 귀여웠다. 강제혁은 자꾸 웃음이 번지려는 것을 눌러 참으며 서하의 눈을 응시했다. 강의실에선 딱딱한 말투로 수업이나 진행했으면서, 얼마나 지났다고 좆을 물려 달라고 청하는지.
“여기서 핥아 볼래요?”
열린 문틈으로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하얀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물고 싶다면서.”
“그건,”
“손가락 하나도 못 물면서 좆을 물겠다고.”
뭐라 항변하려는 건지 달싹거리던 입술이 잠시 침묵 끝에 뻗어진 손가락에 닿았다. 고개를 움직여 손가락을 머금은 서하가 혀를 움직여 마디를 핥기 시작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혀가 손가락의 요철을 감싸고 핥아대는 감촉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억울한지 울 것 같은 얼굴도 그랬다. 강제혁이 손가락을 더 깊숙이 서하의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 큽…….”
갑작스러운 삽입에 토기가 인 서하가 몸을 들썩거렸다. 강제혁이 느리게 입천장을 긁고 혀뿌리를 문지르자 타액이 입술 틈으로 흘러 내렸다. 졸지에 현관 밖에서 입안을 희롱 당하던 서하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수치심에 아랫배가 조여드는 듯했다. 얼마간 내벽을 유린하던 손가락이 서하의 입안에서 느리게 뽑혀 나갔다. 그리고 빗장을 풀기 위해 문이 잠시 닫힌 사이, 서하는 발기한 채로 강제혁의 집 앞에 서서 잠시 서 있어야만 했다.
“…….”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겁 같았다. 이대로 문이 열리지 않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이 열렸고, 서하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강제혁의 손이 먼저 서하를 안으로 끌어 당겼다. 까만 현관이 서하를 집어 삼켰다. 단둘뿐인 실내에서 서하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어야 했다.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잘 빠는데, 1시간은 넘겨 버렸네요.”
“흐으, 읏.”
“내일 걸어 나갈 생각은 접어야겠는데.”
“아…….”
엉덩이를 벌려 잡는 손이 단호했다. 서하는 강제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스스로 옷을 벗었다. 강제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서하가 옷 벗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티 테이블 위에 재갈이며 매 같은 것들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었다. 서하가 직접 고른 물건들이었다.
나체로 거실에 서있던 서하가 강제혁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칭찬하듯 귀 끝을 문질러 주었다. 반쯤 선 성기에서 조금 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제혁이 발을 움직여 서하의 성기를 밟듯 꾹 눌렀다.
“아윽…….”
“영 버릇이 없네.”
낮은 목소리가 꿰뚫듯 서하를 질책했다. 그러기도 잠시,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한층 차분한 어투로 무장한 강제혁이 입을 뗐다.
“오늘은 재갈을 물 거니까, 시작 전에 세이프워드가 될 만한 수신호를 정할게요.”
“…네.”
서하도 언급하고 싶었던 문제이기에 빠르게 답했다. 그래, 재갈을 물면 세이프워드를 정해도 말로 못 뱉겠구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숙련자라 그런가 생각이 깊네. 서하가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 서하를 보던 강제혁이 뒤이어 말했다.
“세이프워드는 분위기 깨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못 하겠으면 가운데 손가락만 펴세요.”
“네?”
“fuck you, 손가락 욕. 몰라요?”
친절히 중지를 펴 보이며 제게 엿을 먹이는 강제혁의 이질적인 모습에 서하가 굳었다. 생각지 못했던 안전어의 형태였다.
‘존나 오랜만에 욕먹는다.’
서하가 다시 한 번 그의 중지를 쳐다보았다. 헛웃음이 터지는 기상천외한 세이프워드였다.
***
벗은 몸에 닿는 공기가 유난히 찼다. 서하는 무심하게 제 다리 사이를 밟아대는 발에 흥분하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벌어진 다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재갈을 집어 드는 손은 단단하고 잘생긴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데 못난 곳이 없다.
‘신기하네.’
재갈은 강제혁이 보내준 사진 중 가장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어쩌면 가장 음란한 쓰임을 가진 생김새였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스테인리스에 가죽 띠가 이어져 있는 형태였는데, 뚫린 공간으로 입안에 손가락 정도는 밀어 넣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딜도 형태의 재갈도 좋았지만 벌어진 입안으로 무언가 넣어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상상에 고른 것이었다.
“입 벌려.”
“…….”
강제혁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서하가 아, 하는 모양으로 입술을 벌리니 재갈이 물려졌고 자의로 입을 닫을 수 없는 모습이 됐다. 서하의 기대를 파악한 듯, 강제혁의 손가락이 벌려진 입술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입천장을 느리게 긁는 손길에 서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타액으로 젖은 손끝이 입안을 빠져나가면서 확인하듯 젖꼭지를 짓뭉갰고, 억지로 벌어진 입술 새로 듣기에 이상한 신음이 터졌다.
“조금만 만져줘도 발정이 나서는.”
“하…….”
“먼저 좆 물려달란 소리를 뱉질 않나.”
서하는 강제혁이 먼저 유도해놓고 저렇게 날조를 하니 좀 억울해졌다. 그리고 서하의 시선이 강제혁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선 것 같은데. 차마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 끝에서 흘러 내렸다.
“침을 다 흘리네.”
웃음기 느껴지는 목소리에 서하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붉게 물들었다. 조금 억울한 감은 있었다. 입이 벌어진 탓에 흐른 것인데. 물론 변명은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서하의 목에 목줄이 채워졌다. 가죽으로 된 검은 색 목줄이었다. 가운데에는 방울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탓에 움직일 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허리 숙이고 엉덩이 내밀어.”
단호한 어투에 그의 뜻대로 엉덩이를 내밀자 확인하듯 둔부를 주물럭거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윤활제도 없이 둥근 플러그가 삽입되었다. 서하의 입에서 막힌 신음이 다시 한 번 터졌다. 물기 한 점 없는 내벽에, 차가운 플러그가 쑤시고 들어서 마찰이 과했다. 그래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삽입된 플러그엔 동물꼬리 같은 형태의 털이 달려 있는 듯했다. 다리 사이에 떨어지는 느낌이 길고 부드럽고, 간지러웠다.
“이제 따라와야지.”
“…!”
팽팽하게 당겨지는 목줄에 순간 숨이 막혀 왔다. 강제혁은 그런 서하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줄을 쥔 채로 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명령하진 않았지만, 서하는 네 발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짐승마냥 엎드려 기어가자 공기 중에 노출된 엉덩이 사이로 꼬리가 흔들거렸다. 수치심에 성기가 꺼떡였다. 투명한 프리컴이 뚝뚝 떨어져 거실 바닥에 닿았다. 침실에 도착했을 때, 서하의 앞에 반려동물용 밥그릇이 놓여졌다.
“급하게 오느라 목마를 것 같아서.”
웃으며 와인을 따라주는 손에 서하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릇이 아무리 깨끗한 상태라고 해도, 수치스러운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는 강제혁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물론 음란서적의 삽화보다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 밑에서 개처럼 엎드려 재갈 틈으로 혀를 내미는 제 모습은 비참하고 참담했다.
“…….”
말없이 쳐다보는 강제혁의 눈빛이 서늘했다. 서하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로 어떻게든 술을 많이 머금어 보려 혀를 움직였다. 혀와 입술이 와인에 절여지듯 했지만 핥아 마시기엔 양이 많았다.
“하아…….”
“준 건 다 마셔야지.”
“흐…….”
불분명한 발음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버거워서 눈물이 났다. 게다가 몸이 숙여진 채로 술을 마시니 머리에 열이 더 쉽게 오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쳐들고 붉어진 낯으로 호소하듯 눈물을 흘리자, 잠시 눈썹을 찌푸린 강제혁이 조금 급하게 서하의 뺨을 거머쥐었다.
“……!”
와인으로 범벅이 된 입술에 강제혁의 입술이 와 닿았다. 고리 안으로 혀가 드나들며 입술과 혓바닥에 고인 와인을 모조리 핥아 삼켜주었다. 삽입을 닮은 키스에 헐떡이는 사이 목줄이 당겨졌고 강제혁의 두꺼운 팔에 허리가 붙들렸다.
“이서하 씨가 나한테 엿 먹으라고 할 때까지 해보죠. 오늘.”
“아!”
젖꼭지를 꼬집는 손길이 거칠었다. 자세가 바뀌었음을 인지하기가 무섭게 바로 침대 위에 엎드려 눕혀졌다. 침대에 연결된 구속구가 서하의 손과 발에 채워지고 배 아래에는 엉덩이를 쳐들게 만드는 쿠션 같은 것이 끼워졌다. 꼬리가 달린 엉덩이가 천장을 바라보게끔 타의에 의해 치솟았고,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끽해야 손가락 정도였다. 서하는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입이 벌려진 상태에선 그마저 쉽지 않았다. 개새끼도 아니고 침을 질질 흘리는 꼴이 수치스러웠다.
“멍이 아직 덜 빠졌네.”
“…!”
말은 그렇게 한 주제에 스팽을 접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예상처럼 묵직한 타격감이 이어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술기운은 진즉에 달아났다.
“아크릴로 만든 케인인데, 제법 아플 거예요.”
“허윽…!”
다 나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덜 빠진 멍 때문에 얼룩덜룩한 엉덩이 위로 매질이 이어졌다. 안에 든 플러그가 좀 더 깊게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한 매가 살갗에 떨어질 때마다 서하의 몸이 발작하듯 들썩였다. 입이 막혔으니 숫자를 세는 것은 무리였다.
“으…!”
뭉개진 발음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발가락이 자꾸만 곱아 들었다. 몸이 떨리는 탓에 목줄에 달린 방울이 연신 딸랑거렸다. 속으로 숫자 세기를 포기하고 주먹을 꾹 쥐고 매타작을 견뎠다.
“하아, 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식하지 못한 사이 서하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고, 베갯잇은 타액으로 젖어 온통 축축했다. 덜덜 떨리는 엉덩이에 다정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물론 서하에겐 끔찍하고도 달콤한 통증이었다.
“너무 잘 참아서 괘씸할 정돈데.”
“하아…….”
뒤이어 천천히 뽑혀나간 플러그가 바닥에 떨어졌고, 강제혁의 긴 손가락이 내벽을 꾹꾹 누르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손가락의 요철이 전부 느껴질 만큼 생생한 삽입에 서하의 아래가 터질 듯 부풀었다.
“쑤셔 주기만 해도 질질 싸는데, 뭘 넣어서 막는 편이 적절하겠어요.”
그 말과 함께 요도 부근에 차갑고 소름끼치는 것이 닿았다. 한 번도 뭔가를 넣어본 적이 없던 곳이라 등골이 다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서하는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인 재갈 탓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이프워드를 내밀기엔 아직 약했다.
눈물이 방울져 흘렀고, 이미 축축하게 젖은 뺨을 다시금 적셨다. 뺨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서하는 고개를 연신 저으며 말이 아닌 소리로 호소했지만, 냉정한 주인은 말없이 요도 플러그를 삽입할 뿐이었다.
“아, 아아…….”
기다란 막대가 끝까지 삽입된 후에, 좀 더 볼록한 마개 부분이 구멍에 닿았다. 부서지는 호흡 사이로 강제혁의 손가락이 몇 번 입안을 드나들었고, 타액에 젖은 손가락이 젖꼭지를 몇 번 문질렀다. 작은 방울이 달린 클램프가 젖꼭지를 꼬집듯 깨물었다. 쾌점과 통점을 넘나드는 감각에 서하의 정신이 혼몽해질 무렵, 꼬리가 뽑혀나간 구멍에 질척한 젤이 뿌려졌다.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서하의 몸이 기대감에 벌벌 떨렸고, 그걸 눈치 챈 강제혁이 손가락 두 개를 한 번에 꿰뚫듯 쑤셔 넣었다. 젤로 인해 삽입이 순탄했다. 손가락이 구멍 안을 헤집는 질척한 소음이 이어졌다.
“보기 좋네.”
“하, 아…….”
“지금 이서하 씨 모습이 어떤지 알아요? 나체로 묶여서 재갈 물고, 젖꼭지엔 클램프 달고… 좆 구멍도 막혀서는. 이젠 뒤로 손가락까지 쪽쪽 빠네.”
단조로운 평가에 순간 보일 리 없는 제 모습이 제 3자가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 자연스레 펼쳐졌다. 수치심에 서하의 몸이 떨렸다.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단순한 삽입이 안타까워진 서하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맹세컨대 의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이윽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내벽을 거칠게 쑤시고 들었고 손가락이 뽑혀 나가기 무섭게 지나치게 굵은 성기가 한 번에 쑤셔 박혔다.
“아…!”
더 터질 것도 없다 생각했던 울음이 다시 터졌다. 단번에 깊게 밀어 넣어진 살 기둥이 내부를 저미듯 눌러 박혔다. 서하의 멍 든 볼기에 강제혁의 장골과 거친 음모가 닿았다. 두껍고 긴 물건이 달아오른 내부를 짓이겼고, 서하는 작살에 꿰뚫린 것 마냥 잘게 떨었다. 전보다 수월해진 삽입에 뱃속이 지끈거렸다. 타액과 눈물에 고운 얼굴이 엉망이었다.
“물려 달라던 좆을, 후……. 물려 줬는데, 감사 인사가… 없으니, 영 심심하네요.”
끊어지는 호흡과 날카로운 목소리가 서하의 귓전에 환청처럼 들려왔다. 서하는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정신을 못 차리네, 아주.”
“하아, 학, 아! 아아……. 흐읏, 흡…. 으응…!”
강제혁이 답답한 듯 재갈을 풀어주었지만, 서하의 입술은 제 구실을 못 하는 것 마냥 벌어져 있었다. 원래 그런 모양이었던 것처럼. 엉망진창이 된 신음만 모양 없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삽입되었던 성기가 느리게 뒤로 물러나자, 그만큼 빈 공간이 생겼다. 서하의 엉덩이가 그 틈을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위로 올라붙어 성기를 다시 삼켰다.
“뭐 하는 짓이야?”
“하으, 윽……. 빼, 빼지 마세요…….”
얼마 만에 사람의 말을 뱉는 것인지. 서하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울면서 빌듯 애원하는데, 그럴수록 강제혁은 성기를 뒤로 물릴 따름이었다. 그만큼 서하의 엉덩이가 높게 들렸다. 그래봤자 족쇄에 묶인 탓에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깊게 박혔던 성기가 귀두만을 남겨둔 채 밖으로 물러났고 서하는 안타까움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넣어 주세요, 쑤, 셔 주세요……. 제발, 흐윽…….”
구멍이 귀두를 문 채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강제혁이 그런 서하의 반응을 즐기듯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제발…. 제발, 주인님…….”
“천박하네요, 선생님.”
정신이 번쩍 드는 호칭이었다. 이건 반칙이었다. 서하는 수치심에 눈을 꾹 감고 온몸을 덜덜 떨었다. 가르치는 학생의 성기를 물겠다고, 엉덩이를 쳐들고 애원하는 제 처지가 다시금 제 3자가 보는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주인님 말고, 강제혁 씨라고 불러 봐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낮고 달았다. 서하에겐 그 명령을 거절할 여력이 없었다. 수치심에 물든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울음 섞인 간청이 떨어졌다.
“강, 제혁 씨……. 제발, 좆 물려주세요. 쑤셔, 서… 하으읏!”
“선생님, 학생 좆이 먹고 싶어요?”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보다 수치스러운 호칭이었다. 서하는 강제혁의 좆이 먹고 싶어서, 엉덩이를 흔들며 간청했다.
“흐, 아, 제발, 으응, 먹고 싶어요, 먹여주세요…….”
“강사가 돼서, 학생 좆이 먹고 싶으냐고 물었잖아.”
“먹고 싶어요, 흐으, 학생 좆 박아주세요…….”
거칠게 푹 삽입된 성기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빠지기가 무섭게 다시 박혀 들었다. 아래에 못질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둔기가 내벽을 헤집고 극점을 문지르고 비벼댔다.
“아, 아아, 흣! 아윽!”
“좋아서 정신 못 차리지, 응?”
“좋아, 좋아요. 흐으윽……. 응, 읏…….”
방울 흔들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세 개나 되는 방울이 연신 다른 박자로 흔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철벅거리는 추삽질 소리와 함께 빈 공간을 메우기엔 충분했다. 서하는 강제혁이 왼쪽 다리의 족쇄를 푸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구멍 안에 성기가 있고 없고만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사고가 흐려졌다. 부족한 만큼 삼키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 거리는 것만이 서하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왼쪽 다리가 강제혁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 위에 걸쳐지고 배 아래에 있던 쿠션은 바닥에 떨어진 건지 뭔지 사라진지 오래였다. 시트에 문대진 탓에 클램프가 볼품없이 떨어졌고, 젖꼭지는 퉁퉁 부은 채로 아무렇게나 비벼졌다. 다리가 들린 채 옆으로 삽입 당하자 눌리는 지점이 달라졌고, 서하의 입에선 비명 같은 신음이 터졌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 하으, 헉, 아흐, 아, 학, 응……. 읏!”
입을 강제로 벌리는 재갈이 없어도 입술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고, 신음과 타액이 한데 섞여 아무렇게나 흩뿌려졌다. 피스톤질이 이어지는 대로 서하의 몸은 흔들렸고, 강제혁이 뒤로 물러난 채 잠시 움직임을 멈추면 서하의 엉덩이가 더 걸신들린 것 마냥 움직였다.
“이서하 씨는, 여기를 영영 막아놔야겠어요. 좆 무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데, 나 없을 때 무슨 짓 하고 다닐지……. 생각할수록 열 받네. 씨발.”
“흐, 으읏……. 그러니까, 아, 아아, 강제혁 씨 좆, 흐으, 물려주세요. 빼지 말고, 학, 아아…!”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니 더욱더 현실과 플레이의 벽이 무너진 것 같았다. 플레이 파트너의 범위에 있는게 맞나? 그가 제 진짜 주인님처럼 느껴졌다. 멍한 머리에 착각이 진하게 스쳤지만, 아무래도 좋으니 그저 지금은 난잡하게 뒹굴고 싶었다.
강제혁이 서하의 구멍 부근을 문지르던 손가락에 힘을 줬다. 이미 꿰뚫린 곳에 손가락이 더 밀려들어갔다. 한계까지 벌어진 애널에 서하가 숨을 한 움큼 집어 삼켰다.
“아, 하악…….”
“왜요, 읏, 하나 더,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아프, 아파요…….”
“아픈 거 좋아하잖아.”
손가락 두 개가 더 밀려들었다. 서하는 까맣게 번지는 시야에 어쩌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자의를 갖고 움직이는 손가락과 주인의 허릿짓대로 움직이는 성기가 안을 깜깜하게 쑤셔 박았다. 서하의 입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흐트러진 신음과 탄성뿐이었다.
한참 거친 추삽질이 이어졌고, 끝내 강제혁이 서하의 안에 파정했을 때, 서하는 풀린 눈으로 몸만 벌벌 떨었다. 성기가 몸에서 빠져 나가기 무섭게 희고 끈끈한 정액이 서하의 벌어진 구멍 사이로 흘렀다. 서하는 사정하게 해달라고 빌 힘조차 남지 않아 경련할 따름이었다. 그 몸을 내려다보던 강제혁이, 서하의 성기에서 반쯤 밀려나온 요도 플러그를 뽑아주었다. 보다 자유로워진 성기에선 정액과 묽은 애액이 힘없이 섞여 흘렀다. 서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엿은 희미해지는 머릿속에서만 날렸다. 씨발, 너무 좋았다.
***
또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무거운 물건이 짓누르는 것처럼,
“으…….”
어둠 속에서 부은 눈을 겨우 뜬 서하가 무겁게 가라앉은 제 몸에 탄식했다. 그리고 옆을 보았을 때, 제가 강제혁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무거운 것은 지난번과 같았지만 지난번과 다른 이유였다. 족히 90kg는 넘을 것 같은 덩치가 서하의 몸을 짓누르듯 안고 있었다.
“강, 제혁 씨…….”
이름을 불러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잘생긴 이마를 아픈 모양새로 구긴 그는 깊게 잠든 것 같았다. 어둠 속에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갈증이 이는데, 일어날 기력도 방법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갈증을 버려둔 서하가 잠든 강제혁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잘생겼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보기 드문 미남이다. 남자다운 콧대나, 이마선, 단단한 턱선까지 흠잡을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분명히 제가 취향표에 뽀뽀나 키스는 싫다고 표시했는데, 강제혁이 제 입술을 빨고 혀를 밀어 넣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엿을 날렸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굳이 싫다고 표시한 데는 그냥, 첫 키스에 로망이 좀 있기 때문이었다. 서하는 별 의미 없이 제 입술을 한 번 훔치고 강제혁의 입술에도 손을 댔다. 정말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 나이 먹고 첫 키스 뺏겼다고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우스웠다. 그리고 그때 강제혁의 입술이 열렸다.
“…왜요, 목말라서?”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손가락에 닿는 입김이나, 울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강제혁이 눈을 뜰 때까지도 서하는 제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두컴컴한 방, 잠들기 전까지 섹스를 나눈 침대 위에서, 혀를 섞고 살을 섞었던 상대와 같이 누워 서로를 바라보는 게.
“물 가져다줄까요.”
“…네.”
제 대답에 몸을 일으키는 강제혁을 두고 서하는 여전히 눈을 깜빡거렸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강제혁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서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산이었다.
***
“산아.”
제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엔 피곤함이 담겨 있었다. 무거운 피로감이 공기마저 짓누르는 것 같았다. 김산은 제 앞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짧은 단발머리에 곧은 이목구비, 제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결혼할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잘 웃는 사람이 아니니 그건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말이 떨어지기 전까진.
“내가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말해요.”
“나는 결혼은 아닌 것 같아.”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싶었다. 메마른 눈가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차분한 말투로 조금 차갑게, 제 생각을 전하는 연인을 김산은 가만히 기다렸다. 충격이라면 충격이었고, 예상한 바라면 예상한 대로였다.
그리고 혜인과 저의 첫 시작을 생각하자, 저만의 설레발이었을 수 있겠다는 냉정한 판단이 들었다. 그 즈음 혜인은 결혼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 키워놓은 딸이 교수직까지 거머쥐고도 결혼을 하지 않는 게 그 댁 양친의 시름인 듯했다. 혜인과는 종종 만나 술잔을 기울였기 때문에 타의에 의해 맞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맞선도 지쳐. 나이가 있으니 쭉정이 같은 늙은이들만 나오고. 내가 많이 늙었나?
- 누나가 뭘 늙어요.
저도 마침 결혼을 할 나이긴 했다. 꽤 많은 여성들을 만났고 길거나 짧은 교제기간을 거쳤지만 항상 민숭민숭하게 끝이 났다. 서른 줄에 들어서는 연애보다 직업적 성취에 정신이 쏠려 한동안 수절하고 지내기도 했다. 이젠 여유가 생겼으니 저도 가정을 이룰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 나랑 연애할래? 내 방패 좀 되어줘.
- 진지하게요?
- …진지해야 하나?
- 나이가 있잖아요. 어린 애들도 아니고. 저도 누나 좋아요.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와중에 혜인이 뜬금없이 제게 수작을 걸어왔다. 혜인은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외려 생각하면 할수록 성격도 맞고 말도 잘 통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결혼은 이런 사람이랑 해야 할 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그런 제 대답에 혜인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두 사람은 교수진 막내라인으로 매우 바빴기 때문에 주로 학교에서 만나곤 했지만, 김산은 점점 혜인이 좋아졌다. 정말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하지만 혜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다림도 잠시,
“결혼이 아닌 거예요, 아니면 내가 아닌 거예요?”
억울함이 담긴 질문이 저도 모르게 쏟아지듯 튀어 나왔다. 김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혜인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실수했다. 난 진지하게 너 못 만나겠어. 너 요즘 하는 거 보니 조만간 프러포즈 준비할 것 같아서 이쯤에서 얘기하는 거야.”
김산이 홀로 생각하는 사이, 정리를 마친 혜인이 매섭게 이별을 고했다.
“…뭐라고요?”
“부담스러워. 솔직히. 나는 결혼은 아닌 것 같아. 아버지 성화에 내가 너 도피처로 삼았던 것 같아. 사과할게. 무릎이라도 꿇을까? 그러면 받아줄래?”
혜인은 아주 골치 아픈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김산이 입술을 꾹 깨물고 배려 없는 사과에 화를 냈다.
“도피처라고요?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만나면 만날수록 누나가 편하고 좋았어요. 그래서 결혼까지 생각한 게, 그게 잘못이에요? 누나도 나도 어리지 않잖아요.”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겠어? 미안하다. 나 너랑 결혼 못 해. 너는 잘못한 거 없어. 헤어져 주라.”
“내가 싫다고 한다고 안 헤어질 수는 있어요?”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결혼을 위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허상이었다. 김산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혜인이 뭔가 잘 안 풀릴 때의 버릇대로 혀를 찼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정적이 길어지기 전에 혜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나중에 연락할게.”
김산은 홀로 남겨졌다. 혜인의 생각을 헤아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술을 몇 병이나 마셨을까. 째깍거리는 시계소리만 들려왔다. 혜인의 생각을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림잡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김산은 문득 외로워졌다. 쓸쓸하다. 드디어 백년해로할 파트너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딱 적합했다. 애인을 자처해놓고 혜인의 생각 하나 알지 못했으니까. 갑자기 서하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
진동음을 내며 울리는 휴대폰은 넙적한 화면에 김산의 이름을 띄운 채였다. 서하는 고민했다. 김산의 전화가 꺼려지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저 멀리 주방에서 얼음을 꺼내 담는 것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강제혁이 얼음물을 가져오려는 모양이었다. 빨리 받을까. 결정을 내리자마자 서하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네, 선배.”
[서하야.]
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서하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터졌다. 요즘 왜 이래. 대체.
“술 드셨어요?”
[응, 좀…….]
“시간이 몇 신데…….”
서하가 타박하듯 언성을 조금 높이자 수화기 너머로 실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 집으로 올래?]
“지금요?”
[응, 우리 서하 보고 싶네.]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고, 서하에게도 이젠 무의미한 말이었다. 저런 말에 설레어 하던 것도 다 옛날 일이다. 어차피 김산은 어그러진 욕망의 대상일 뿐이지 않았나. 순수한 애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 김산에게는 끝끝내 풀리지 않던 성욕조차 느낄 일이 없었다. 그건 강제혁이 말끔하게 해소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강제혁이 아니라도, 이제 그런 상대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일이었다. 결심하는 게 어려워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고개가 저어졌다. 다른 사람을 만날 수는 있을까. 아무래도 강제혁으로 인해 눈이 너무 높아졌다.
“저 지금 졸리거든요.”
[…서하야, 형 차였어.]
그 말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서하의 손이 멈칫했다.
[너도 아는 사람이라,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선배.”
[서하야. 형 어떡하지. 누나가 결혼하기 싫다고, 헤어져 달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제가 대체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 걸까. 김산이 이러는 건 처음 봤다. 이렇게 나약해진 건. 나약해진 그를 보고 싶지 않다가도, 선후배로 유대를 쌓았던 그 긴 시간이 발목을 잡아서. 제가 가장 나약해졌던 순간에 어깨를 빌려주었던 김산이 떠올라서.
“일단 기다려요. 제가 갈 테니까,”
한숨 소리가 들리는 휴대폰을 차마 끊지 못한 채로 서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다른 손목이 붙들렸다.
“가긴 어딜 간다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한 강제혁이었다. 서하가 강하게 제 손목을 그러쥐는 아귀힘에 눈썹을 찌푸리며 빠르게 말했다.
“어디 좀 다녀오게요.”
“다녀온다는 말은, 다시 오기는 한단 말입니까.”
말끝이 딱딱했다.
“그건,”
“플레이도 안 끝났는데 벌써 가면 섭섭하지.”
얼음이 가득 든 컵을 흔드는 손이 음산했다. 플레이라면 아까 끝난 줄 알았는데. 짓씹듯 말하는 강제혁의 눈동자가 짙고 까맣다. 음영 진 얼굴이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서하야?]
“읏…….”
침대 시트에 툭 떨어진 휴대폰에서 김산이 서하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하를 응시하던 강제혁이 손목을 놓아주며 다른 곳으로 손을 옮겼다. 맞아서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이 차갑고 단호했다. 서하의 입에서 잔 신음이 터졌다. 어느새 얼음 하나를 쥔 강제혁이 서하의 부은 엉덩이에 반쯤 녹은 얼음을 둥글렸다.
“흐읏…!”
행여나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어갈까 다급해진 서하가 제 입을 막았지만 소리가 터지는 걸 막지 못했다. 감각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감촉이었다. 골을 타고 발갛게 부은 구멍에 밀어 넣어질듯 문대어지는 얼음에 서하가 끊어지는 신음을 터트렸다. 강제혁의 목덜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얼음이 녹아서 흐른 물이 허벅지 뒤로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지금부터 이서하 씨 따먹을 건데, 그 소리 생중계하기 싫으면 알아서 통화 종료하세요.”
“아읏, 강제혁 씨. 잠깐…!”
“들려주고 싶으면 그냥 하고.”
플레이 파트너일 뿐인데. 플레이 중이라도 싫다고 엿을 날리면 될 일인데. 그러기가 어려웠다. 단 둘만 있는 공간에서 그를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강제혁 씨, 우리 아까 플레이 끝났,”
“플레이 끝났다고 누가 그랬어요?”
“흣….”
“나랑 있는 순간엔 나한테 집중해. 원하는 만큼 망가뜨려 줄 테니까. 부족하잖아.”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분노와 단호함이 잔뜩 서려있었다. 서하의 욕망을 꿰뚫어 본, 달콤하고 오싹한 제안이었다. 서하는 제 엉덩이를 아프게 주무르는 손길에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단둘이 남은 공간이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서하가 간청하듯 말했다.
“진짜, 잠깐만… 다녀올게요.”
“하…….”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이 굳어지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서하는 저보다 한참 어린 학생의 눈치를 보는 스스로가 순간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이 순간 강제혁은 학생이 아닌 주인이니 마냥 쪽팔릴 일도 아니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풀렸다. 강제혁이 먼저 서하를 당겨 품에 안듯 가뒀다. 좁은 틈 사이로 시선이 교차했다.
“다녀오면 얼마나 맞을래요.”
“주인님 화 풀리실 때까지…….”
아무래도 그와 단둘이 있을 땐 플레이가 기본전제로 깔리는 모양이다. 서하는 그게 그가 원하는 대답일 것 같아서 고분고분 읊었다.
“차로 데려다 줄게요. 그리고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단순 플레이 파트너 사이가 맞는 걸까. 이젠 그가 단순한 플레이 파트너가 맞는지 생각하는 것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를 주인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서하의 묵은 욕망을 충족시켜주었으니까. 서하는 복잡한 눈으로 차키를 집어 드는 강제혁을 바라보았다. 커뮤니티에서 남들의 눈으로 보았던 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이 밤에 편하게 가게 됐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 서하는 강제혁과의 관계에 대해 고찰할 만큼은 여유롭지 못했다.
***
서하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동아리에서 김산을 만난 뒤 1년 쯤 흘렀을 때였다. 어린 시절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졌던 누나가 결국 숨을 거뒀다. 저를 빼고 모두가 울었다.
- 나가서 살아라. 가족이란 생각 말고 자립하렴. 네 몫의 유산은 미리 주마.
서하는 그 길로 집에서 완벽히 도려내졌다.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선명해지자 버티는 게 힘겨웠다. 그런 서하를 다독여준 게 김산이라서, 그에겐 미묘한 부채감이 있었다. 사람이 좋아서 그런 거겠지만, 위로를 받았던 건 사실이니까.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서하에게, 강제혁이 핸들을 꺾으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 누굽니까?”
“…전부터 생각한 건데,”
“말하세요.”
“보통 단순한 플레이 파트너한테 이렇게까지 하나요?”
줄곧 궁금했던 점이었다. 강제혁은 훌륭한 운전자답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고, 서하는 그런 강제혁에게 시선을 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강제혁이 얇은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안 그러죠.”
“근데 왜…….”
정지 신호에 맞춰 차가 잠시 멈췄다.
“글쎄, 왜 그럴까.”
“강제혁 씨는 경험 많으니까 잘 알잖아요.”
“타박하는 거예요?”
“아니요.”
떨어지는 말이 흠결 없이 깔끔했다. 강제혁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서하 씨한테 이러는 이유가 궁금해요?”
“네.”
“그럼 성향을…, 알게 된 계기에 대해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
“이서하 씨는 얘기해 줄 거예요?”
“듣고 싶으면요.”
얼마나 대단한 거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서하는 조금 목이 탄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그 얼음물을 받아 마셨어야 했다. 갈증이 자꾸만 일었다. 내리는 비 탓에 목마름이 좀 더 진하게 느껴졌다.
“모범적인 삶에 대한 강박관념이 좀 있었어요.”
“네.”
“근데 일반적인 섹스는 영 관심이 안 가더라고. 처음 섹스를 할 뻔한 날이었나, 도저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아서 상대한테 양해를 구했어요. 섹스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 애가 울더라고요. 근데 우는 모습이 꼴렸어요. 웃긴 건 그 애가 아니라도 누구든, 내 앞에서 울고 아파하고 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예상치 못한 과거였다. 아니, 굳이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하가 강제혁의 옆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와서 찬물 맞으면서 정신 차리자고 몇 번 더 생각하고. 근데 안 가라앉는 거야. 되는 대로 가상의 인물을 떠올려서 원하는 만큼 때리고, 엉망으로 울게 만드는 상상을 했어요.”
“…….”
“…성공적으로 사정했고.”
“…….”
“근데 그때 그 가상의 인물이랑 이서하 씨가 좀 닮아서.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네요.”
“저랑요?”
“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잘 생각해봐요.”
“그거 쌍팔년도 작업멘트잖아요.”
“그때 안 태어나서 몰라요.”
의미 없는 농담이 이어졌다. 서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닌 게 아니라, 듣는 것만으로 조금 발기했다.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내비게이션에 뜬 김산의 주소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차 안에서 그의 물건을 입에 물고야 말았을 것이다.
“이서하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아…….”
“매 맞으면서 싸고 싶어 하는 거.”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유혹적으로 들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듣는 서하에겐 아니었다.
“말해주기로 했잖아.”
어느새 주차를 마친 강제혁이 서하의 목덜미를 긁듯 쥐었다. 열기에 숨이 가빠왔다. 서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힘을 발휘해 차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새로 차디찬 빗방울이 뺨으로 쏟아지듯 툭 떨어졌다.
“…다녀와서, 말해 줄게요.”
별 거 없지만, 여기서 말했다간 또 한 바탕 거사를 치를 것 같았다. 그런 제 말에 대답 대신인 것처럼 강제혁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닿았던 부분이 뜨거웠다.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푼 서하가 차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킨 때였다.
“우산, 가져가세요. 되는 대로 빨리 오고.”
서하는 강제혁이 무심히 건넨 우산을 받아 들었다. 눈이 마주쳤고, 이번엔 강제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다른 곳을 보던 시선은 김산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서하의 뒷모습에 다시금 꽂혔다. 서하는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등 언저리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강제혁의 시선을 알아챌 수 없었다.
***
김산의 오피스텔 비밀번호야 뻔했다. 어머니 생신. 효심이 흘러넘친다. 서하가 아무리 생각해도 보안이 엉망인 네 자리 숫자를 꾹꾹 눌렀고, 성공적으로 집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선배, 저 왔어요.”
비라고 해봤자 몇 방울 맞지 않은 우산이었지만 일단 털어서 옆에 세워 두었다. 적당히 정리된 현관이 서하를 맞이했다. 그리고 뒤이어 술 냄새가 코끝을 강타했다. 지독한 향이었다.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대체…….”
서하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코를 집어 냄새를 막았다. 술 냄새가 역하게 느껴질 정도니 심각한 건 확실했다. 좀 더 안으로 들어서니 김산이 식탁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선배, 사람 불러 놓고 자요?”
“으음…….”
“내가 못 살아. 서른여섯이나 먹어놓고 애인한테 차였다고 술을, 으……. 선배가 이팔청춘이에요?”
서하가 짜증을 있는 대로 내며 엎질러진 소주병을 들어 다시 세워 놓았다. 지독한 술 냄새의 원인이 이거였나 보다.
“서하 왔네…….”
“술 귀신 붙었어요? 감당할 만큼 마셔야지.”
개밥그릇에 와인을 받아 핥아 마신 처지에 할 말은 아니긴 했다. 서하는 괜히 혼자 머쓱해져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고 가.”
“괜찮은가 보려고 온 거예요. 저 다시 가야 돼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 놓고 또 어딜 가려고 그래. 번거롭게.”
“물이나 드세요.”
“…고마워.”
찬물을 가져다주니 꿀떡꿀떡 잘도 마신다. 서하는 걱정했던 것보단 멀쩡한 김산의 모습에 현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산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더 마음이 급해졌다.
“밑에 차 있어요. 기사님 기다리셔서 다시 가야 돼요.”
“형이 돈 줄게. 그냥 가시라고 해.”
“뭘 돈을 줘요. 괜찮아요.”
“이서하.”
꾸중하듯 낮게 부르는 목소리였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단한 위력을 가진 주문이었는데,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예전엔 그가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 꼼짝없이 그의 뜻대로 움직였던 것 같은데.
“내일 얘기해요. 술 깨고.”
“형 서운하다, 정말.”
“서운은 무슨. 선배, 연애 처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혜인 누나야.”
“뭐라고요?”
대충대충 대답하던 서하가 언성을 높였다. 생각지 못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우혜인 선배요?”
“응.”
“둘이 사귀었다고요? 미친…….”
서하는 스물 몇 살의 어느 날, 혜인이 술병으로 김산의 머리통을 깬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혜인은 김산에게 ‘더럽게 재수 없는 새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둘이 연애를 한다니. 게다가 자신이 김산의 결혼소식을 듣고 얼마나 추태를 보였던가. 그게 결국 혜인 때문이었다니. 아니, 명확히 따지자면 혜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혼은 두 사람의 결정이니까 혜인 때문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어, 언제부터…….”
“반년도 안 됐어.”
“그런데 결혼하려고 했다고요?”
“응……. 근데, 이제 모르겠다.”
김산은 보기 드물게 침울해 보였다. 서하는 김산과 우혜인을 나란히 세워놓고 상상해보다 얼굴을 찌푸렸다. 그 선배가 결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서하가 아는 한 혜인은 지독한 독신주의자였다. 그런 혜인이 김산과? 죽이 맞아서 자주 만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의외였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강제혁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서하는 현관으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잡아 눌렀다.
“나한텐 이제 너밖에 없어. 서하야.”
투정 같은 말이었지만, 잔인한 말이기도 했다. 만약 김산이 이 이야기를 한 달만 더 빨리 뱉었어도 어마어마한 족쇄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김산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무의미한 말이겠지만. 서하는 차게 굳는 기분을 애써 다독였다.
“닭살 돋아요.”
“너무 하네…….”
“저 내일 가볼 데 있어서, 오늘은 가야 돼요.”
말을 뱉는 목소리가 자꾸만 가라앉았다. 벌써 가느냐고 중얼대는 김산을 뒤로 하고 서하가 신발을 구겨 신었다. 우산을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서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도 않고 추락하듯 뛰어내려왔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김산이 무감하게 뱉었던 말이 자꾸 뇌리에 울렸다.
- 나한텐 이제 너밖에 없어. 서하야.
축 쳐진 목소리.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씨발, 진짜.”
계단의 은빛 난간을 후려차고 싶었지만, 이웃집에 민폐일 터였다. 서하는 난간에 우습게 비춰진 제 얼굴을 노려봤다. 일렁거리는 것이 모양이 이상해 마치 외계인 같았다.
평범한 짝사랑이었다면, 10년이나 묵어버린 마음이 쉽게 끊어지지 않았을 터다. 성욕을 바탕으로 한 마음이었으니, 그 성욕이 충족된 지금 김산에게 휘둘릴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뒷맛이 쓴 것을 보면, 마냥 성욕 때문은 아니었나.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다. 나이만 처먹었지, 아는 게 없다.
“더럽게 재수 없는 새끼.”
그 옛날 혜인의 말을 제가 그대로 읊었다. 하지만 저를 더러 하는 말인지, 김산을 더러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요 근래 술에 취해 제게 질척거리는 김산에게 일말의 기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남자란 게 참 단순해서 지가 관심 없는 대상한테는 저러지도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아서……. 김산이 은연중에 나를 좋아했던 건 아닐까, 하는 망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쓴 것은,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알아서 제발 좀 잘 살아요.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서하는 비상구 계단에 기대어 서서, 김산이 있을 위층을 바라보고 타박하듯 외쳤다. 떨어지는 음절마다 말로 다 못할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최소한 감정적인 부분에서 남의 뜻대로 휘둘리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적어도 서하의 생각은 그랬다.
정말 적어도, 서하는 그랬다.
***
오피스텔의 입구를 바라보는 강제혁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초조함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벌레처럼 기어올라 몹시 불쾌했다. 서하가 엘리베이터를 탄 후에 6층에서 센서 등이 켜졌으니, 예의 그 전화는 6층에 사는 사람에게서 걸려온 것일 터였다. 이 밤에, 그것도 그런 와중에 만나러 가는 대상은 한정적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사적으로 친밀한 사이겠지.
“별로 기분 좋지는 않네.”
플레이를 시작하려던 중이었으니,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플레이가 사전에 협의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서하가 의문의 남자와 통화하는 중이란 걸 안 순간, 마른 목을 축여주기 위해 따랐던 얼음물은 다른 용도로 바뀌었다. 퉁퉁 부은 아래에 얼음을 좀 쑤셔줄까. 저와 있는 자리에서 다른 놈과 통화를 하는 모습이 유쾌하진 않았다. 제게 원래 이런 소유욕이 있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따지자면 서하 한정이었다. 이 바닥에서 나름 구를 만큼 굴렀다고 생각한 강제혁에게 서하는 흥미로운 상대였다. 미형의 남자는 SM플레이가 처음인 주제에, 탁월한 마조히스트였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마조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도 실제로는 아닌 경우가 많았다. 입으로는 변태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주제에, 막상 플레이에 들어가면 생각한 것과 다르다며 꽁무니를 빼는 경우도 여럿이었다. 게다가 강제혁은 특정한 상대를 원한 적이 없었다. 꽤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했다고 생각해도, 늘 귀찮게 들러붙기에 직접 떼어낸 인물들도 있었다. 질척거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고작 플레이 한 번에 저를 주인이라 부르고, 속박해주길 원하는 사람들은 강제혁이 원하는 섭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나 벌려주고 아무에게나 구속되길 원하는 이들은 재미가 없었으니까.
서하는 여태껏 만났던 어떤 섭보다도 돔 앞에서 철저히 무너질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 밤 그렇게 제 밑에서 눈물을 흩뿌리며 신음하던 남자가 언질 하나 없이 사라졌다. 그가 처음으로 플레이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처음으로 울려준 제게 매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우연히 강의실에서 만난 남자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밌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지향하는 대로 플레이 파트너를 제안한 건데.
“…문, 안 열어줍니까.”
작게 열린 차창 틈으로 서하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어느새 오피스텔에서 나와 차 앞까지 당도한 모양이었다. 우산은 어디다 갖다 팔아먹은 건지, 비를 맞아 축축해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고작 1분도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강제혁은 차문을 열어주고 차게 젖은 서하에게 차량에 비치되어 있던 수건을 건넸다.
“고마워요.”
“별걸 다.”
서하는 동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차분해 보이기도 했다. 강제혁은 그런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으로선 서하에게 저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상대가 있다는 게 불쾌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가 서하에게 가진 흥미에 비해, 서하가 제게 가진 흥미는 미약한 듯했으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강제혁은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부족하다면, 시간을 두고 제 것으로 만들면 될 일이다. 우산에 대한 언급은 따로 하지 않았다. 아끼는 거긴 했지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꼬투리를 잡을 좋은 소재가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많이 기다렸는데.”
“아…….”
그 말에 서하는 잠시 망설였다. 강제혁이 다소 무감한 어조로 중얼거렸기에, 플레이의 주인으로서 입을 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저를 기다린 사람으로서 한 말인지 가늠키가 어려웠다. 전자라면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해야 했고, 후자라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제게 집중하라고 일갈하던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서 입을 떼야 했다.
“대답을 고르는 것 같은데.”
“…….”
“간단하게 생각해요.”
강압적인 어조가 아니라 어르는 말투였다. 강제혁은 간단하게 생각하라고 했지만 서하는 그게 더 어려웠다. 멍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간단하게…….’
서하는 어느새 김산에 대한 생각을 잊고 그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간단하게. 입속말로 되뇌는 서하의 옆모습을 강제혁이 느리게 감상했다.
“어려운가 보네.”
“쉽진 않아요.”
“박사가 고졸도 아는 걸 모르면 써요?”
“아직 박사 안 땄어요.”
“그럼 선생이 학생이 아는 걸 모르면,”
“그럴 수도 있죠.”
이야기가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인식하지 못한 사이, 강제혁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소리가 났다. 바보 취급당한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퍽 상했다. 서하는 되는 대로 툭 말을 뱉었다.
“미, 안합니다.”
“정답.”
이젠 아예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서하는 대체 뭐가 강제혁의 기분을 그렇게 좋게 만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뱉은 말이 왜 정답인지도.
“내 집으로 갈 거예요.”
“…네.”
“이서하 씨한테 마저 받을 게 있으니까요.”
왜 그리로 가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강제혁은 즐거운 듯 뒷얘기를 덧붙였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시동 걸리는 소리가 조금 거칠게 나고 차가 곧 움직였다.
뒤늦게 우산과 장대비를 목격한 김산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지만, 그가 본 것은 택시가 아닌 검은 차였다. 차가 워낙 빠르게 움직인 탓에 차창 너머 서하의 표정은 확인하지 못했다.
“택시라더니.”
의미 없이 뱉어진 말 후엔 이상하게 가슴께가 저릿했다. 무슨 기분인지 모를 일이었다.
***
차는 부드럽게 주행했고 언제 켜진지 모를 히터가 서하의 젖은 몸을 후끈하게 덥혀주었다.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졌다. 플레이를 하기도 했고, 시간도 시간인 탓이었다. 차가 멈추고 시동이 꺼졌을 때, 서하가 잠에서 깨어났다.
“으…….”
“잘 자더라고요.”
무례한 일이었다. 엄연히 사람이 운전을 해주고 있는데 조수석에서 잠이 들었다. 강제혁도 저만큼 피곤했음 피곤했지, 덜 피곤할 리 없었을 텐데. 그래도 어린 게 좋은 건지 그는 아주 멀쩡해보였다.
“미안합니다. 실례했네요.”
“이번엔 빠르네.”
사과를 말한 모양이었다. 서하는 민망해져 괜히 제 손가락을 꾹 눌렀다.
“꼬투리 잡을 게 많네요.”
“아!”
의식하지 못한 사이 고간을 강하게 움켜쥐는 손에 서하의 신음이 터졌다. 강제혁은 어느새 지배자의 낯을 하고 있었다. 서하는 그 오싹한 변화에 입술을 떨었다. 대체 기준이 뭔지 알 수가 없네.
“죄송해요…….”
아랫사람에게 건네던 사과는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어투로 정정되었다.
“죄송한 걸 아는 사람이 아래는 왜 세워.”
“흐으…….”
당연히 직접적인 저 자극 탓이었다. 주무른 쪽에서 왜 발기하느냐고 탓하는 게 어이없었다. 바지 속으로 들어온 손이 짓뭉개듯 옷 안의 성기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서하는 주차장에서 강제혁에게 성기를 붙들려 끙끙대는 제 상황에 또 발정했다. 구제불능이었다.
“이서하 씨 나한테 잘못을 너무 많이 해서 큰일 났네.”
“아윽, 흣…….”
“매 맞고 싶어서 안달 났어요?”
매는 충분히 맞았다. 지금도 엉덩이가 욱신거리는 것을 꾹 참고 있지 않나. 서하는 망설임 없이 제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는 손을 막지도 못하고 할딱였다. 잠에서 깨기가 무섭게 그에게 주물러지는 게 소름끼치게 자극적이었다. 드러난 젖꼭지는 여전히 부어있고, 군데군데 강제혁이 남겨둔 잇자국이 있었다. 그 흔적을 만족스레 훑던 강제혁이 서랍에서 에그를 꺼냈다. 대체 저런 게 왜 차 안에 있는 거야……. 서하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지금부터 구멍에 이거 넣고 내 집까지 올라갈 건데, 중간에 사정하면 내일은 밖에서 벌려야 될 거예요.”
오싹한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정말 그렇게 될까 기대감이 서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해요. 바지 안 벗고.”
초조하게 입술을 씹던 서하가 스스로 바지와 속옷을 벗어 내렸다. 차 안이라 조금 어색한 움직임이었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일이 시켜야 되나.”
“…죄송합니다.”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서하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가 에그를 넣기 쉽도록 자세를 튼 채 오금에 손을 넣어 다리를 벌려 잡았다. 훤히 노출된 국부를 짙은 눈으로 훑던 강제혁이 에그에 젤을 덕지덕지 짜서 서하의 밑에 들이밀었다. 다 크다 못해 서른 줄에 접어든 남자가 차량 안에서 몸을 접고 뒷구멍으로 제법 굵기가 되는 성인용품을 받고 있으니, 자칫 우스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제혁의 눈에는 색욕만 어려 있었다.
“허윽…….”
압박감에 서하가 신음을 터트리자 강제혁의 눈꼬리가 만족스레 휘었다. 오늘따라 많이 웃는 것 같았다. 반면에 서하의 눈에선 눈물이 툭 떨어졌다. 감정적인 이유로 우는 건 아니었고,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조여 봐.”
“흣…….”
손가락까지 꾹 밀어 넣은 강제혁이 내벽을 두드리며 말했고, 서하는 화답하듯 아래를 꽉 조였다. 손가락이 물리는 느낌을 만족할 때까지 즐긴 강제혁이 넣었던 것을 느리게 빼냈다. 서하가 이물감과 약한 쾌감 그리고 뒤를 울리는 통증으로 덜덜 떨었다. 강제혁은 그런 서하의 옷을 손수 입혀주고, 단추까지 채워주었다. 남이 보면 아주 멀쩡하다고 생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정신 차리고.”
“흣…….”
서하가 이물감을 잊기 위해 애를 쓰는 사이 차에서 내린 강제혁이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어찌나 친절하신지, 서하는 땅에 발을 내리면서 신음을 꾹 참았다. 뱃속에 든 에그는 꽤 무게감이 있었다. 묵직한 느낌에 안에 추라도 든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걸을 때마다 아래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강제혁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에서 걷고 있었다. 서하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발을 내딛으며 호흡을 얕게 뱉었다. 강제혁이 카드를 찍자 유리문이 열렸고 엘리베이터가 곧 도착했다.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잘 걷네.”
“…….”
“상은 뭐로 줄까요.”
여상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대화라기엔 강제혁만 말하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생전 이토록 느린 엘리베이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는 부은 엉덩이를 꾹꾹 누르는 강제혁을 원망스레 보지 않기 위해 바닥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에그의 전원이 켜졌다.
“흣, 아…!”
안쪽에서 울리는 진동에 입술이 벌벌 떨렸다. 내벽을 자극하는 진동음이 바깥까지도 번질 정도였다. 서하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엘리베이터엔 CCTV도 있었고, 너무 늦은 혹은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누군가 탈 확률도 있었다.
“아, 제발, 읏, 멈춰 주세요, 흐윽…!”
“그건 이서하 씨가 부탁한다고 될 일이 아닌데.”
“아읏, 주인님…….”
발가락이 자꾸만 곱아들고 허리가 꺾였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겨우 띵 소리가 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고개를 틀자 현관문이 보였다. 서하는 팽팽하게 발기한 제 물건을 누가 볼까 덜덜 떨며 강제혁의 집 문 앞까지 어렵게 걸었다. 진동하는 뒤가 울렸다.
“열, 어 주세요.”
“흠.”
“제발…….”
어디든 비비고 싶었다. 묵직한 에그가 구멍의 입구를 벌리고 바깥으로 밀려 나온 것만 같았다. 강제혁은 키패드를 누르지 않고 서하의 뒤에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서하가 현관을 짚고 서 빌었다.
“뭐든, 뭐든 할 테니까.”
서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실은 둥근 에그에 어정쩡하게 자극 당한 내벽이 근지러웠다. 뭐든 다 하겠다고 했지만 반대로 강제혁이 뭐든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소리가 났다.
“들어가면 옷 벗고 구멍 벌리세요. 현관부터 박아 줄 테니까.”
키패드가 빠르게 눌리고 현관이 열리는 순간 서하의 귓가에 쏟아진 말이었다. 서하는 말에 색깔이 있다면 방금 그것은 아주 빨간 색깔일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만큼 원색적인 목소리와 단어였다.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하가 강제혁의 말대로 옷을 벗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무거웠다. 실제로 두들겨 맞기는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하는 강제혁이 말한 대로 현관에서부터 옷을 벗고 그의 성기를 물었다. 에그를 넣은 채 삽입 당하니 정말 안쪽을 무언가로 얻어맞은 것처럼 고통스럽고 또 자극적이었다. 구슬을 넣었을 때와 비슷했지만, 에그는 안에서 진동했기 때문에 더욱 외설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찬 바닥에 아무렇게나 문질러졌던 뺨이 조금 따끔거렸다. 답지 않게 급했던 건지, 강제혁은 현관에서 기어코 삽입만으로 한 발을 뽑아놓고 구둣주걱으로 허벅지 뒤를 때려댔다. 울컥울컥 구멍에서 터져 나온 정액이 하반신을 적셨던 감각이 선연했다. 그리고는 좆을 빨게 해주겠다며 네 발로 기어서 침실에 도착하게 했다. 또 목이 마르지 않으냐며 얼음물을 가져와서 뒤에 쑤셔 넣고 입에도 넣고…….
“으으…….”
결과적으로 서하는 감기에 걸렸다. 어제 장대비를 1분이나마 맞았고, 그 상태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강제혁에게 마구잡이로 범해지고, 뒤로 얼음까지 먹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제혁, 이 무식한 새끼……. 울컥하는 맘에 욕설이 목구멍을 치고 나왔다가, 어째선지 치아에 부딪혀 안으로 삼켜졌다.
“이, 씨발…….”
한참 뒤 나온 건 주어 없는 욕설 하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제혁을 만난 뒤로 몸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 머리도 엉망이다. 못해도 대여섯 살은 어린 남자애인데, 이상하게 그를 낮잡아 비하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과 사의 경계가 자꾸 허물어진다. 침대 위에서 저를 지배하는 남자를 학생으로 보기는 글렀다. 게다가 제가 원한 것이니 원망할 대상도 없었다. 서하는 여러 가지로 착잡했다.
“일어났어요?”
하지만 문가에서 들리는 여유로운 목소리에는 살짝 열이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참 상쾌하게 들렸다. 혓바닥에 새싹이라도 틔운 것 같았다.
“아픕니다…….”
“응, 감기 걸렸더라고.”
차갑게 적신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주는 손에 서하가 얕은 한숨을 뱉었다. 열 받은 것도 잠시, 뜨거운 이마를 감싸는 냉기에 감사함까지 느껴졌다.
“물은.”
“마실래요…….”
강제혁이 묻는 말에 서하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끙끙댔다. 목이 너무 말랐다. 이제 텄다. 그는 반말을 쓰고 저는 존대를 한다. 플레이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괜히 플레이 중인 것 같은 착각에 또 아랫배가 찌릿하게 울렸다. 강제혁은 저 혼자 사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솔직히 진이 빠진 것에 비해 사정 횟수가 많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 반응이 올 수밖에.
“입 벌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세 음절에 서하가 잠시 움찔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벌렸다. 빨대라도 물려주려나 싶었을 때 자세를 낮춘 강제혁에 의해 입술이 마주 닿았고 입안으로 물과 혀가 동시에 들어왔다.
“읍…….”
천천히 물을 삼키고 나자 차가웠던 낯선 혀가 제 혀를 얽어 들었다. 입안이 다시금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쑤시듯 핥고 빠는 혀 놀림에 호흡을 이어갈 틈조차 없었다. 신종 브레스 컨트롤인가. 서하는 산소 부족으로 멍해지는 머리로 어떻게든 숨을 쉬려 몸을 바르작거렸다. 두 번째 키스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코로 숨 쉬어야지.”
느리게 혀를 빼낸 강제혁이 서하의 코를 꼬집으며 충고했다. 숨을 가다듬은 서하가 미약한 반항을 담아 물었다.
“키스……. 빨간색이었는데요…….”
분명히 플레이 취향 체크 표에 그렇게 표시했었다. 물론 강제혁은 원래 빨강이었다 파랑이 됐대나, 그런 비슷한 말을 했지만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싫어?”
“…….”
“싫으면 엿 먹여 보든가.”
물론 그 말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반쯤 발기한 것을 주무르는 손길이 꽤나 강압적이었기 때문이다. 키스 때문에 발기한 것인지, 상황 탓인지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어쨌건 제 중지는 펴지지 않았다. 견딜 수 있는 문제에서 세이프워드를 남발하고 싶진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
「JH. Kang」
흑단으로 된 검은 우산의 손잡이엔 금빛 글씨로 누군가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물건을 함부로 쓰는 서하가 이런 좋은 우산을 들고 다닐 리도 없었고, 제가 아는 한 처음 보는 이니셜이다.
서하는 인간관계가 지극히 협소하고 친구 하나 쉽게 사귀질 못했다. 동아리는 어떤 생각으로 들어온 건지 싶을 만큼 친목에도 관심이 없었다. 선후배 할 거 없이 이서하랑은 친해지기 힘들다고 툴툴대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누구나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런 와중에 서하가 유일하게 따르는 건 김산이었다. 그건 김산으로 하여금 굉장히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남동생은 이미 넷이나 있는데, 동생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서하는 옆에 끼다시피 하고 살았다. 혼자 사는 게 안타까워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꼭 시간을 내서 만났다. 서하도 제 간섭을 싫어하지 않아서, 손 안 타는 길고양이를 길들인 것 마냥 미묘한 희열도 있었다. 사내놈이 사랑스럽다고 여겨지긴 처음이었으니까.
“대체 누구지…….”
그런 서하한테 제가 모르는 지인이 생겼다. 미주알고주알 전부 고해바치진 않아도, 특별히 새로운 일이 있을 때면 제게 말해주곤 했는데, 기억 속에 이런 이름은 없었다. 강 씨는 몇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JH는 없었다. 게다가 분명히 서하는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는데, 타고 떠난 차는 검은색 마세라티였다. 고급스러운 우산과 외제차. 대체 누굴까.
“설마.”
문득 서하를 개처럼 끌고 가던 남자가 떠올랐다. 분명 학생 같았는데. 끽해야 20대 초중반일 학생에게 그런 돈이 있을까. 물론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놈과 사라진 그날, 서하는 외박을 했다.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잔뜩 달고 지친 얼굴로…….
“말도 안 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김산이 실소했다. 그럴 리 없었다. 서하는, 그런 애가 아니니까.
김산은 제가 아는 정상의 범주에서 서하가 벗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동성끼리 연애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김산의 세상에선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물론 그들을 핍박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제 주변만큼은 아니길 바라는 이기적이고 구시대적인 발상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김산을 바로 잡아줄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런 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김산에겐 그랬다. 때때로 서하가 사랑스럽다고 느끼고 볼을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그것과 다른 문제였다. 김산은 그 학생과 서하의 뒷모습을 바라봤던 순간을 떠올리며 기분 나쁜 불쾌감을 애써 지우려 노력했다.
서하에게 우산을 보여주면 좀 더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학생과는 수업 후의 질의응답을 한 것뿐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성과 연애를 시작했다는 올바른 대답을.
***
서하는 결국 또 집에 가지 못했다. 강제혁이 사정 안 시켜준 게 억울했냐는 물음을 던지기에 대답을 못 한 게 문제였다.
- 대답을 못 하네.
그래서 그만 싸고 싶다고 매달릴 때까지 또 전립선 마사지를 당했다. 억지로 손목을 결박한 채 아래를 쑤셔 주니 얻어맞지 않았음에도 사정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더 맞을 데가 없는 것도 이유였다. 그냥 누르기만 해도 멍든 곳이 찌를 듯 아팠으니 애무가 곧 스팽킹이 되었다.
- 입 벌려.
그 말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분명히 싫다고 표시한 행위였음에도 서하의 손가락은 얌전히 굽혀진 채였다. 강제혁은 서하의 입술을 쪽쪽 빨고 입안에 혀를 몇 번이나 밀어 넣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돌기가 달린 손가락용 콘돔 탓에 서하는 체액이 더 남지 않을 때까지 탈수를 당했다. 고환을 탈수기에 돌려도 이만큼 뽑아낼 순 없을 것 같았다. 텅 빈 부랄. 제 상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였다.
“플레이 하기 전에 좀 물어보고 하면 안 돼요?”
서하가 쉬어빠진 목소리로 불만사항을 토로했다. 물론 가엾어 보일 뿐 위협적이진 못했다. 강제혁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뭘 물어봐.”
“지금도 플레이 중인 거 아닌데 자꾸 반말하고,”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을 잘라버리는 것에 서하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노예근성 있나 봐, 나. 강제혁이 짙은 눈썹을 좁히며 저를 빤히 보니 말대꾸도 튀어 나오질 않았다. 부어터진 입술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벌어지질 않았다.
“플레이 파트너 하자고 했던 거 취소하고 싶어졌어요.”
이제 만나지 말자는 건가. 서하는 쿵 내려앉는 심장에 눈을 크게 떴다. 성향을 깨닫고 10년 만에 찾은 파트너였다. 이대로 다른 돔을 찾을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고, 솔직히 무서웠다. 세상에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데. 강제혁은 제가 직간접적으로 아는 모든 돔 중 가장 매너 있는 돔이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아는 돔은 강제혁 뿐이었지만. 게다가 그와의 관계도 관계라고, 깨어질 걸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왜, 왜요?”
떨리는 목소리가 숨겨지지 않았다. 고통과 피지배를 통해 느끼는 쾌감은 이미 맛 봐버린 이상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데! 서하가 제 과거를 돌아봤다.
자꾸 버릇없게 굴어서 그런 건가. 하지만 그건 버릇이 없다 있다의 문제가 아닌데. 저와 강제혁이 엄연히 공적으로 강사와 학생 사이인 이상, 선을 그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끈덕지게 구는 그를 밀어냈던 거고. 근데 이상하게 관계가 끊길지 모른다니 그런 당연한 생각마저 해선 안 되는 것이었나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그가 주는 쾌감을 잃기 싫었다. 그건 서하가 계속 바라 왔던 거니까.
“음…….”
차게 식은 서하의 손을 제 손바닥으로 말아 쥔 강제혁이 초조해하는 서하의 눈빛을 즐겼다. 아마 제 말을 오해하는 것 같은 모양새인데,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손바닥이 축축한 것이 꽤나 당황한 듯했다.
“왤까.”
“플레이 중에 섭으로 대하는 건 좋, 좋은데요. 우리 학교에서도 만나야 하는데, 공사 구분을 해야…….”
“좋아?”
플레이와 일상을 넘나드는 그의 위험한 태도가 서하의 일상에 혼동을 야기한다. 플레이 파트너일 뿐임에도 그가 제 주인이 된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되니까. 서하는 강제혁을 만나지 못하는 날이면, 이후에 그에게 더 잘 맞기 위해 홀로 약을 발라 상처를 치료하곤 했다. 예전에 스스로 스팽으로 자위를 하던 때는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때는 통증의 여운을 느끼느라 상처를 방치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제가 그를 위한 일을 한다는 사실에 멍해졌다. 그가 제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아서. 하지만 엄연히 강제혁은 제 주인이 아니었다. 그런 자각이 들면 조금 허망해졌다.
멍든 엉덩이를 꽉 쥐는 손에 서하의 입술 새로 신음이 터졌다. 아으……. 듣기 좋은 소리에 강제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서하의 입으로 좋다는 말을 들으니 제 기분도 덩달아 좋아져서.
“학교에선 나도 주의할게요.”
“읏…….”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꾹꾹 울혈이 진 부분을 누르는 손길이 악랄하고 음란했다. 의도적인 스킨십이었다. 즐겁게 서하를 괴롭히던 강제혁이 조금 고민했다. 이 남자가 갖고 싶어졌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어려웠다. 제 곁에 두고 싶어졌고, 저만 보게 하고 싶어졌다. 계속 제 집에 붙잡아 두고 싶었고, 플레이 중이 아니더라도 그를 통제하고 싶어졌다. DS 관계, 나아가서 하우스 슬레이브라도 좋을 것 같았다.
‘미쳐가나.’
거기까지 생각한 강제혁이 서하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 내 집에 두고,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게 해서…….
“…….”
하지만 서하의 의사를 알 수 없었다. 싫다고 하면 곤란한데. 서하가 제게서 도망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제 안색을 살피면서도 쉽사리 눈을 맞추지 못하는 흰 낯이, 속된 말로 지나치게 꼴렸다. 언제 이렇게 좋아졌지. 야밤에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고 가는 것을 붙잡았던 순간부터였나, 아님 강의실에서 다시 만났던 날부터? 아니면 그 호텔에서 망설이던 등을 눈에 담았던 순간부터였나.
“이서하 씨를 내가 가지고 싶어졌어요.”
“…….”
강제혁은 솔직한 요구사항을 전했다. 네가 갖고 싶어졌으니 내게 달라고. 허공에서 달아오른 시선이 마주쳤다.
“나한테 달라고. 이서하 씨에 관련된 모든 권리.”
그는 DS를 맺자는 말을 보다 직설적으로 전했다. 사실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
부르튼 입술이 느리게 벌어지고 흰 연기가 뿌옇게 흘러 나왔다. 붉게 혈색이 도는 입술 사이로 흰 담배가 몇 차례 더 드나들었다. 담배를 태우는 동작이 느릿했다. 생각이 많아서 더욱 그랬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가에, 우두커니 선 서하가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성향을 깨달았던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속박 당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 감정을 통제하고 육신을 지배해줄 사람을 원했다. 그 손에 제 몸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길 바랐다.
- 나한테 달라고. 이서하 씨에 관련된 모든 권리.
그 말이 다시금 떠오르자 니코틴에 취한 다리가 휘청거렸다. 꼭 강제혁이 아니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한 번 쯤 듣고 싶었던 야릇하고 강력한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대답은 쉽지 않았다. 베란다 난간을 잡은 서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저 가볍게 그러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 일이다. 말이 DS지 사실상 바닐라 언어로 따지면 연애 한 번 하자는 소리였으니까. 아니, 그것보단 무거운가.
*바닐라 : 가학/피학 성향자가 아닌 일반인
어쨌건 문제는 서하가 한 번도 DS를 맺어본 적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다. 어차피 일반적인 관계로 채워질 욕망이 아니었고, 이런 성향을 접을 만큼 좋아한 사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간관계 맺는 것도 피곤해 하는 제가 그런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적극적일 리 없었다.
솔직한 말로 무서웠다. 버림받는 건 지긋지긋했다. 누군가에게 버려질 여지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서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나이 먹고 연애 한 번 못 해본 이유는 고작 그거였다. 버려지는 게 무서워서. 하물며 저를 낳은 양친에게서도 버려졌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저를 버리지 않을 거란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김산처럼 스며든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중했다. 강제혁도 그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서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보다 스스로에게 질렸다. 언제까지 이런 자잘한 생각에 발목을 잡혀야 하는지. 전부 그만두고 싶다. 애새끼도 아니고.
“하…….”
한숨과 함께 퍼져나간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제 고민도 입 밖으로 뱉었을 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희석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제 주인 같다는 생각을 했던 밤들이 무색해지게 막상 그런 제안을 받으니 두려워졌다.
- 당장 대답 못 하겠어요?
- …그게.
- 왜 대답을 못할까. 싫어서? 아님 내가 믿음이 안 가서?
- …….
웃음기 어린 목소리는 연하의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확신을 담고 있었다. 애초에 강제혁을 마냥 어리게 본 적도 없었지만. 그랬다면 이런 관계도 되지 못했겠지. 왜 관계를 맺었을까. 뒤늦은 후회가 서하를 잠식했다.
애초에 그 밤에 충동적으로 쪽지를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강제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플레이 실력이 아주 별로인 사람을 만났다면, 서하는 다시 홀로 자위하던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차라리 강제혁이 별로였다면 쉬웠을 텐데.
- 내 손에 질질 싼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내가 싫다는 말은 뱉어도 못 믿겠고.
- …….
그쯤에선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 입술을 꾹 짓누르며 속삭이는 말에 눈을 피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내가 믿음이 안 가요? 못 맡기겠어? 정말 망가뜨리기라도 할까봐?
- 그런 게, 읏…….
음험하게 물으며 손을 내려 다시금 엉덩이를 꽉 쥐는 손에 서하의 신음이 번지듯 흘렀다. 더 쥐어짜질 것도 없으면서 미약한 쾌감에 숨을 집어 삼켰다. 엉덩잇살을 벌려 잡고 공기 중에 드러난 은밀한 곳을 느리게 훑는 손이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입술이 닿을 듯 말듯 가까웠다.
- …너무 느린 대답은 싫어요.
뼈까지 발라먹을 듯 쳐다보던 끝에 입술에 쪽 하고 내려앉은 뽀뽀는 간질간질할 지경이었다. 우악스레 엉덩이를 쥐고 있던 손도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강제혁은 멍한 상태인 서하를 집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서하는 괜히 저릿한 입술을 문질렀다. 독사 같은 인간. 닿은 곳부터 마비가 시작됐다면 움직일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남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저에 대한 권리를 주면, 그는 저를 버리지 않는다 맹세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 맹세가 유효할까? 진정 서하를 괴롭히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
결국 서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고된 플레이 후에 퍼질러 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터였다.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미치겠네.”
강제혁이었다. 대답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 서하는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도 고민이 해소되진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제혁은 가볍게 그런 제안을 한 게 분명했다. 강사를 따먹는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걸지도. 그런 그에게 저를 버리지 않을 거냐고 물을 자신은 없었다. 그건 너무 무거운 질문이다.
‘차라리 익숙해지자. 남들처럼. 역할놀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인간관계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서하가 애써 그렇게 합리화를 마쳤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간단하게. 하나도 안 간단하지만.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서하가 급하게 찬물을 들이켰다. 식도를 적시는 찬물이 몹시 반가운 게 아마 목이 말랐던 것 같다. 애써 강제혁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고 덤벨을 만지작거리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해 버렸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샤워기 아래 맡겨두고 거품을 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대답을 재촉하는 강제혁일까. 초조해진 서하가 젖은 손을 채 갈무리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서둘러 집어 들었다. 거품이 묻은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은 김산이었다.
“…여보세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점에 서하는 조금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리고 젖은 채로 급히 전화를 받은 게 살짝 후회됐다.
[서하야, 지금 형 만날 수 있어?]
나직한 음성은 어쩐지 다급하게 들렸다. 할 얘기라도 있나. 아니라도 일주일에 두어 번은 만났으니 이상한 전화는 아니었다.
“지금 씻고 있어요.”
아마 목소리가 울릴 테니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형이 집으로 갈까?]
거울에 뿌연 김이 낀 탓에 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서하는 물에 젖은 손을 뻗어 확인해보려다 손을 내렸다. 확인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김산이 혜인과 결혼에 실패한 대도 결국 그는 여성과 결혼을 할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집 앞 카페에서 봬요.”
어쩐지 김산을 집에 들이는 게 꺼려져 약속장소를 바꿔 잡았다. 군말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서하는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서둘러서 젖은 몸을 마저 씻고 나오자 거울 앞에는 무심한 낯의 제가 있었다. 서하는 몇 번이고 웃는 얼굴을 연습해야했다. 김산의 앞에서 웃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
늦은 저녁의 카페 안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김산은 휴대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혜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마침 혜인이 출장을 떠난 덕에 학교에서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결혼까지 고려했던 연애가 어이없이 끝났다. 하기야 지금 보고 있는 번호는 서하의 것이긴 했다. 애초에 이 카페에 와서 서하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 더 이동할 것도 없었다. 괜찮다고 하면 바로 서하의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카페에서 보자니 앉은 자리를 벗어날 이유가 사라졌다.
테이블 위 아메리카노는 거반 비워진 채였다. 전화를 건 뒤로 30분 쯤 흘렀으니 서하가 나올 때가 된 듯했다. 아무래도 한 잔 더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카운터로 향했다. 서하도 늘 마시는 것으로 시켜주는 게 좋을까. 고민을 마친 김산이 카운터에 선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카모마일차 따뜻한 거 하나랑, 에스프레소…….”
“제 거 시키는 거예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주문을 가로막았다. 서하였다. 머리카락이 아직 젖은 채인 게, 말리지 않고 나온 게 분명했다. 조명 아래 뺨이 유독 희었다.
“응, 에스프레소로 시키려는데.”
“에스프레소는 아메리카노로 바꿔 주세요. 샷 세 개 추가해서. 아이스로요.”
어깨 너머로 카드를 내미는 서하의 손을 김산이 덥석 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버릇없이.”
“읏…….”
평범한 악력으로 쥐었을 뿐인데 서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입술 새로 터진 앓는 소리는 아파서 나온 게 분명했다.
“이 카드로 계산해주세요.”
서둘러 계산을 마친 김산이 고개를 돌렸을 때, 서하는 제 가방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채였다. 김산은 서하가 어정쩡하게 앉은 모양새를 희한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디 아파?”
“아니에요.”
“손 줘 봐. 얼른.”
서하는 갑작스러운 김산의 요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가락만 움찔댔다. 강제혁이 쥐었던 손목에 멍 자국이 좀 남았다. 김산의 악력으로 다시 쥔다면 또 아플 만큼. 옷은 목까지 가리는 폴라 티셔츠를 입었기에 눈으론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산이 제 손목을 확인하면 분명 소매를 걷을 터였다. 그러니 내어줘서는 안 됐다.
“이서하. 왜 자꾸 말을 안 듣지.”
김산의 저런 말투가 서하를 옥죄었다. 이게 서하가 김산에게 묶이게 된 시발점이었고, 계기였다. 강제혁을 만난 후로는 효력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완벽히 무효한 건 아니었다. 찌꺼기 같이 남은 마음이 있긴 했나보다. 다 큰 성인으로서 인정할 건 해야 했다. 시간이 좀 더 걸릴 만한 일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김산이 서하의 손목을 물건 마냥 가져가 살폈다.
“멍들었잖아.”
“…네.”
“어쩌다 그랬어?”
“어쩌다… 그랬어요.”
“장난해?”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긴 했다. 그럼에도 장난일 리가 있나. 그에게 섹스하다 이렇게 됐노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좀 다쳤나 봐요.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데요?”
“서하야.”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곤 본론을 캐묻자 김산이 답지 않게 제 이름을 불러놓고 입술을 꾹 물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끽해야 혜인 선배랑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잠시 뒤 아르바이트생이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 주었고, 서하는 괜히 저가 더 목이 말라져 급히 잔을 들었다. 그런 뒤에야 김산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너 요즘 연애하는 거 알아.”
단정하는 말에 서하가 겨우 입에 물었던 아메리카노를 뿜었다. 조금 처참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어서 당황한 탓이다.
“진짜 거짓말 못 하네.”
“윽, 큽……. 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요.”
김산이 티슈로 튄 커피를 훔쳐 주며 나직하게 답했다. 억울한 마음에 서하가 따져 물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곧장 나오진 않았다. 그때 그 문제는 대충 넘어간 줄 알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웠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대체 뭘? 서하는 이미 끝난 이야긴 줄 알았던 연애 어쩌구를 생각하느라 김산이 제 집에 들이닥쳤던 때를 떠올려야 했다. 연애를 한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서하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날아온 질문은 꽤 직격타였다.
“이게 네 애인이야?”
김산이 내민 것은 검은 우산이었다. 우산이 애인이냐는 물음에 서하는 몹시 당황했다. 이 양반이 미쳤나. 제가 아무리 외로워도 우산을 가지고 자위를 할 리가 있냐는 눈빛을 대놓고 쏘아 보냈다. 물론 김산은 그것까진 몰랐다.
“아니라고?”
“당연하죠. 선배, 미쳤어요?”
“발뺌을 다 하네.”
김산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느니 말도 안 되는 말을 쏟아놓는 통에 서하의 낯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우산이 제 애인이냐니.
“그 얘기하려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너 요즘 나한테 숨기는 거 있는 거 다 알아.”
“제가 뭘,”
없진 않았다. 그래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서하를 본 김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하야. 형은 그냥 네가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라는 거야. 사귀는 여성분이 있으면 말해도 돼. 우리 사이에 왜 그런 걸 숨겨?”
“…….”
“형은 그냥 요즘 들어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많아진 게… 서운해서 그래.”
워낙에 친밀한 사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김산이 한 말엔 숨겨진 함정이 있었다. 서하가 이성애자일 거라는 지독한 확신. 서하에겐 잔인한 일이면서 동시에 다행인 일이었다.
“…없어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결국 그렇게 김산이 바라는 이상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서하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가장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김산의 표정이 대놓고 차게 식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하가 해줄 것은 없었다. 조금 답답했을 뿐. 김산과 한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실소가 나올 판국이었다.
창밖은 어두컴컴했고, 카페 안은 조용했다. 테이블 위엔 정적이 흘렀고, 얼음 녹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마침 손님도 없어 더욱 조용했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던 끝에 눈을 굴리던 서하가 불현듯 우산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제야 좀 이성적인 생각이 되기 시작했다. 방금 전 김산의 질문은 우산의 주인을 묻는 말이었다. 까만 우산은 너무 흔해서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조명 아래 금빛으로 반짝이는 이니셜을 보고나니 숨이 콱 멎어 들었다.
강제혁이 우산을 빌려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강제혁이 우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기억하지 못했다. 이런 미친. 점점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 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낯색을 잡아낸 김산이 으름장을 놓았다. 사냥꾼을 닮은 뉘앙스였다.
“이 우산 대체 누구 거야?”
이제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서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김산은 저 우산과 제 목덜미에 난자했던 키스마크를 연결 짓고 있었다. 더 나아가선 강제혁까지.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은 서하의 손가락이 절로 곱아 들었다.
“서하야, 형이 이렇게까지 물어봐야 해?”
“…….”
“이거 누구냐고.”
아예 이니셜이 있는 부분을 들이대며 묻는 말에 서하가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이미 어느 정도 특정을 지어놓고 묻는 말은 취조와 다를 게 없었다. 김산은 어쩌면 다 알고도 저를 채근하는 것일지 몰랐다. 문득 울컥, 강제혁의 이름을 대고 싶어졌다. 그 우산 주인이랑 잤다고. 선배가 생각하는 게 맞다고. 연애는 아니어도 섹스를 했고, 어쩌면 통상적인 연인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은 걸지도 모른다고 쏟아내고 싶었다.
이건 충동적인 감정이었다. 서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 털어놓고 싶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이런 기분이 든 건 난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제 성향에 대해 누구한테도 발설하지 못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김산이 과연 제 비밀을 알고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봐줄까. 그는 지독한 헤테로이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가 가장 신뢰하는 후배가 변태에 게이라니. 제가 그를 상대로 자위했다는 것을 알면 아마 욕설을 뱉을지도 모른다. 주먹을 날릴 수도 있다.
“…친구 거예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조금 웃겼다. 맞는 게 무서운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맞는 걸 두려워 할 리가 없다. 10년 만에 김산한테 드디어 맞아보네, 하고 웃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하는 오늘 스스로를 맘껏 비웃고 싶었다. 그를 믿었지만 동시에 믿지 못했다. 어쩌면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더 털어놓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믿으니까, 그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그게 서하가 지난 10년간 술에 몇 번이나 취하고도 김산에게 홧김에나마 고백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친구가 빌려준 거라고요.”
“내가 너 친구 없는 거 몰라? 널 10년을 봤는데? 동기들이랑도 데면데면하게 구는 게.”
“새로 사귀었어요.”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김산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서하는 제 집에 택시를 타고 왔다 말했고, 검은 마세라티를 타고 떠난 걸 제가 봤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우산을 일컬어 친구의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김산은 고민했다. 제게 자꾸만 무언가를 숨기는 서하를 더 다그쳐도 될 지 확신이 사라졌다. 서하가 제게 벽을 세운 게 불쾌했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끝까지 우산 주인의 정체를 숨기니 그 벽이 과연 허물어지긴 하는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너 사귀는 여성분 없고, 그 우산은 친구가 빌려준 거고, 키스마크는 뭐 벌레에 물린 거고?”
김산은 서하의 말을 정리해 읊조렸다. 제가 바라는 그나마 이상적인 대답이었다.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이게 차선이었다. 서하는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리고 그대로 읊어 내렸다.
“…사귀는 사람 없는 거 맞고, 우산은 친구가 빌려준 거고, 키스마크는 키스마크 맞고요.”
“이서하, 너…….”
기가 막힌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는 김산에게 서하가 노기를 숨기지 않고 쏘아붙였다.
“제가 선배한테 섹스 상대까지 읊어야 해요?”
“이서하!”
“몇 번을 말해야 해요? 저 서른이에요. 선배 이러는 거 정상 아니라고요.”
그에게 정상 비정상을 논하는 제가 조금 우습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제가 변태인 것과 별개로 그의 행동은 지나친 게 확실하니까. 하지만 서하의 예상보다 더 지독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너 그럼 사귀지도 않는 사람이랑 잤다는 거야?”
별 개좆같은……. 지금이 구한말이냐? 서하의 낯이 대차게 구겨졌다. 그에게 이런 구석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지금은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 저 갈게요. 먼저 연락하지 마세요.”
“이서하! 형이 너 걱정돼서 이러는 거 몰라?”
“선배 걱정이나 하세요. 이럴 시간 있으면 혜인 선배한테나 가시고요.”
서하가 씹어뱉듯 말을 떨어뜨려놓고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시차를 두고 한 번 더 들렸다. 따라붙는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김산이 따라 나왔음이 자명했다. 서하는 굳이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제발 가라.’
화가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뚜벅뚜벅 걷는 서하의 발에 노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열이 뻗쳐 죽을 것 같았다. 끝까지 저를 따라 걷는 발자국 소리가 불을 지폈다. 할 말이 남았으면 멈춰 세우든가, 아니면 저를 한 대 치든가 할 것이지, 끝까지 쫓아오는 게 신물이 났다. 결국 엘리베이터 앞까지 당도해서야 눈이 마주쳤다.
“어린애도 아니고 쫓아온다고 해결될 일이에요? 이게?”
“재워 줘. 오늘 추워.”
“장난해요?”
서하가 뭐라 더 말을 할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김산이 층 버튼을 먼저 눌렀다. 원나잇이라니.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는 서하가 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대로 보내기 싫었다. 김산도 김산 나름대로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밖에 추워. 나 감기 걸리면 너 걱정할 거잖아.”
그 말에 서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번에 잘라내기에는 유대관계가 너무 깊었다. 유일하게 선 안으로 발을 들이도록 허용한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다.
***
서하가 유자청을 덜어 뜨겁게 차를 우려내는 동안 집안에 훈기가 감돌았다. 보일러를 켜놓은 덕이다. 저도 몸이 좋지 않던 차였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서하는 절대 김산을 위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얼마 안 있어 간단히 샤워를 마친 김산이 욕실 밖으로 나왔다. 차는 딱 먹기 좋은 온도로 식은 상태였다.
“그거 유자차야?”
서하가 말없이 찻잔을 꾹 내밀었다. 기분 좋게 웃어 보인 김산이 찻잔을 받아 들었다. 겨울이면 서하는 늘 유자청을 담그곤 했다. 하얗고 곧은 손가락이 유자를 빡빡 씻어서 칼로 저미고 설탕에 절이는 모습을 몇 번이나 구경한 적이 있어 이게 시판 유자청이 아니란 것 정돈 알았다. 김산은 제 집에 남은 이서하표 유자청을 떠올리다 거의 동났다는 걸 떠올렸다.
“그때 준 거, 나 거의 다 먹었는데.”
“더 달라고 그러는 거죠.”
“응.”
뻔뻔한 요구에 서하가 혀를 찼다. 알고 지낸 세월이 십 년이었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김산이 다시금 입을 뗐다.
“아깐 형이 좀 심했어.”
“네.”
“미안하다.”
각 잡고 사과까지 내놓으니 서하도 더는 뭐라 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럴 줄 알고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거였는데.
“그래도 형이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란 건 알아 줬으면 좋겠어.”
“…알겠어요.”
무의미한 말다툼은 서하 쪽에서도 고사하고 싶었다. 찻잔이 점차 비워지고 바닥엔 채 먹지 못한 유자 껍질이 남았다. 다 씹어 먹자니 텁텁하고, 안 먹자니 아깝다. 말없이 찻잔만 응시하는 사이 김산이 서하의 손을 잡아 쥐었다.
“형이 너 아끼는 거,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해.”
“…낯부끄럽게 왜 이래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줬음 좋겠어.”
전에 없이 진중한 김산의 목소리는, 묘한 걱정과 떨림을 담고 있었다. 바깥에서 다그치던 목소리와는 결이 달랐다. 이래서 집으로 들이지 않았던 건데. 단둘뿐인 공간에서 저런 목소리로 말하는 김산에게는 카페에서처럼 냉정하게 구는 게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남학생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 제발. 서하가 낮게 탄식했다.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그가 두렵다.
“형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네가 그렇게 끌려가던 장면이 납득이 안 돼.”
날숨이 파르르 떨렸다. 어쩌면 김산은 마음속으로 이미 강제혁과 제 관계를 정의 내린 후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자꾸 피하고 거짓말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서하는 머릿속으로 수 없이 고민했다.
강제혁이 정말 원나잇 상대였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냥 스쳐간 인연이고,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김산에게도 거짓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침 그가 제게 좀 더 깊은 관계를 제안했고, 저 역시 그것에 대해 고민하던 상황이기에 더욱 답 하는 게 어려워졌다. 조금 더 충동적으로 변할까. 말을 할까. 그래서 김산이 저를 규탄한다면? 그 생각을 하자 벌어졌던 입술이 조가비마냥 오므라들었다.
“형 못 믿어서 그래?”
그 질문에 서하가 때에 안 맞게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 왜 대답을 못할까. 내가 싫어서? 아님 내가 믿음이 안 가서?
강제혁의 목소리가 떠오른 탓이다. 요즘 제게 믿음을 갈구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김산을 믿을 것인가, 강제혁을 믿을 것인가. 얼결에 종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처한 무교인의 처지가 되었다.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자기를 믿으라고, 엉덩이를 흠씬 때려놓고 속삭이던 남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전화하고 싶다.’
서하는 문득 떠오른 그의 얼굴이 좀 보고 싶어졌다. 그와 동시에 휴대폰에 닿은 손끝이 움찔댔다. 김산을 앞에 놓고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스스로가 별안간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불투명하니 제 시야를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벗겨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간단하게…….
“…형.”
“응, 서하야.”
늘 선을 그으며 선배라고 호명하던 그를 형이라 불러보았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생전 처음 뱉는 고백이었다.
“저 게이예요.”
반쪽짜리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