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 오브 본디지(River of Bondage) 1권
지은이 해로운
※ 이 책은 (주)엠스토리허브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엄금합니다.
1장. 그 밤
숨이 뚝뚝 끊긴다.
‘생전 처음 하는 플레이여서’라는 거창한 이유가 붙었음에도,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맞아서 부어터진 엉덩이가 벌벌 떨렸다. 다리 사이에서 거친 소음을 내며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바이브레이터가 주는 통증과 쾌감이 온몸에 선연했다.
- 너무 좋아하니까, 벌주는 맛이 없잖아.
- 하으…….
낮은 목소리가 귓전에 꽂혀 들었다. 재갈 탓에 타액이 턱 끝으로 뚝뚝 흘렀다. 속박된 사지가 쾌감에 절어 자꾸만 움찔댔다. 너무 좋아서 입꼬리에도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돌아버릴 것 같다. 아니, 돌아도 좋았다.
***
살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것이 있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혼자라는 것. 예를 들면, 화장실에서 휴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라든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굣길에 참지 못하고 바지에 지렸을 때가 있겠다. 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경우는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하가 그 격언을 더더욱 통렬히 체감하게 된 날은,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한 서른 살 생일이었다.
“강…제혁.”
첫 출강, 인생 첫 강의에서, 지난 밤 제 엉덩이를 흠씬 때려주었던 파트너를 학생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네.”
그리고 저를 보고 놀란 듯 크게 뜨였던 눈이 이내 느물느물 웃음기를 담고 제 부름에 답했을 때.
서하는 까맣게 꺼져가는 눈앞을 다잡으며 간신히 나머지 출석을 부르기 위해 입을 뗐다. 단언컨대 짧지 않은 삼십 년 평생 이런 스케일의 위기는 없었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
- 서하야.
- 형 결혼할 것 같다.
제가 그토록 좋아하던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쏟아내던 말이 다시금 떠오르자, 서하는 치를 떨었다. 결혼. 언제고 그의 입에서 나올지 모른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후, 담배 말려…….”
서하가 담배를 한 가치 입에 물고, 형편없어진 제 기분대로 발을 굴렀다. 편의점의 볼품없는 테이블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그 충격에 이미 비어버린 맥주 캔들이 엎질러졌다. 미지근한 맥주 몇 방울이 테이블 위로 흩뿌려졌다. 잔향이 구리고 또 구렸다. 그렇게 좋아한 건 아니었다. 따지자면 반찬 정도……. 그래도 결혼이라니.
“…….”
더 울컥하는 것은 제가 그 말에,
- 축하드려요.
했다는 것이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던 축하 인사가 다시금 입안에서 까끌하게 맴돌았다.
- …형 연애 중이셨구나, 몰랐어요.
- 응, 얼마 안 됐어.
어울리지도 않게 수줍게 웃던 그 얼굴이 서하의 자괴감을 한층 강화시켰다. 저는 그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어 시선마저 피했다. 그리곤 답지도 않게 주절주절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결국 그에 지루해진 김산이 먼저 귀가 의사를 밝혔을 때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냥 죽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딱히 좋아했던 건 아니다. 다만, 그가 제… 음습하고 비뚤어진 욕망을 채워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게……. 그게 아닌가. 좋아했나. 짧지 않은 10년 사이에 좋아하는 마음까지 갔나. 서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연기가 공중으로 허망히도 퍼졌다.
서하가 김산을 처음 만난 곳은, 멋모르던 시절 들어갔던 대학 동아리의 환영회였다. 으레 대학 신입생이 그렇듯 저는 드물게 들떠있었다. 그랬으니 어울리지도 않게 동아리에 가입하고 그런 자리에까지 참석했겠지.
어린 나이라 그랬던가.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행동이었다. 거기서 만난 김산은 누가 봐도 멀끔하고 단정한 외모로 동아리에서 가장 큰 장신이었으며, 언뜻 자상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굳이 명명하자면 9시 뉴스 데스크에서 볼 법한 멀끔한 느낌이었다.
- 네가 서하구나. 안녕.
김산이 먼저 제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에게 처음부터 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정하고 멋진 선배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그에겐 묘한 점이 있었다.
- 가만있어. 움직이지 말고. 혼나고 싶어?
- 말 안 듣지.
- 이서하.
그는 명령하듯 말 하는 게 익숙해 보였고, 그게 예상치 못하게 서하를 자극시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그저, 그가 첫째로 태어나 동생들을 많이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인 듯했다. 자그마치 5형제의 장남이니 그럴 만도 했다. 서하는 알 수 없는 세계였지만.
- 착하네.
포상처럼 주어지던 달콤한 쓰다듬은 뭔가 서하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했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서하는 제 희한한 성벽을 완벽히 이해한 상태였다.
서하는 명령 받고, 복종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강력한 주인으로부터 구속당하고 매를 맞고 싶다는 상상을 해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하는 늘 벌을 받고 싶어 했고 누군가로부터 통제당하고 싶어 했다. 다만 그래줄 사람이 없었을 뿐.
홀로 남은 조용한 밤이면 늘 생각했다. 맞고 싶고, 괴롭힘 당하고 싶다. 능욕 당하고 싶다. 제 안에 내재된 강한 열망은 아주 오래되고 짙은 것이었다. 다만 이런 제 성향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게 무서웠다.
게이에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제가 몸담은 학계는 보수적이었고, 평생 동안 배운 것이라곤 이것밖에는 없었다. 기댈 곳이 없으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밥줄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홀로 망상했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어떻게든 개척해냈다. 이후의 과정에서 김산을 재료로 썼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그에게 마음을 주었을 지도 몰랐다. 장장 10년이었다. 그를 만나고 지금까지. 길기도 길다. 어쩌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하지만 상상 속의 주인은 이제 없다. 그는 곧 결혼을 할 테니까.
그리고 지금이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널브러져 홀로 맥주를 비우고 또 비우고, 줄담배를 피우는 것이.
서하는 당장 이틀 뒤가 제 첫 강의 날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쁘게도 살았다. 대학교, 군대, 그리고 다시 대학교. 대학원 석사 진학. 석사 졸업. 또 대학원 박사 진학. 금전적인 이유도 이유였고, 스트레이트로 달려온 인생이 너무 지쳐 남은 박사 과정은 휴학해버렸다. 주변에서도 좀 쉬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조금 쉬다가, 교수님으로부터 교양 수업 강의를 나가보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뭐, 마침 김산도 학교에서 근무 중이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김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개강 준비로 바쁘다더니 술을 사준다고 불러내기에 조금 기대했는데, 결혼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하에겐 이 순간 그저 이 우울하고 서글픈 기분을 풀 곳이 필요했다. 알코올에 절은 뇌가 다른 것을 잊게 했다.
서하는 만취한 채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휴대폰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진즉 가입해뒀지만 한 번도 제대로 활동한 적 없었던 BDSM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발정난 사람들 존나 많다.”
토요일 밤이라 그런가. 난잡하게 파트너를 구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서하는 유독 눈에 띄는 닉네임을 찾아냈다. 욕구가 끓어올라 도저히 참기 힘들 때 눈으로 둘러보았던 커뮤니티에서, 3년 전부터 보였던 회원이었다. 자질구레한 신상정보는 없었지만, 구구절절 빻은 취향을 늘어놓는 돔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존재였다.
“…….”
그는 대체로 즉흥적으로 상대를 구하고 딱히 DS도 맺지 않는 것 같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와 같은 사람이 더 적합했다. 서하는 10년,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의 결단력을 쏟아 부어 그에게 쪽지를 보냈다.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느냐고. 그리고 답장이 오기 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잠실 A호텔 2407호」
술이 깨고 나면 후회할 게 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성에 지고 싶지 않았다. 서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택시에 올라 A호텔의 이름을 말하곤, 도착하기 직전까지 그가 올렸던 글을 탐독했다. 열 오른 머리가 채 식기 전에 호텔의 정문이 보였다. 내일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수도 있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생각일랑 잊고 싶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텔 방 문 앞에 서자 쉽사리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아직 돌이킬 수 있을 때. 알코올 기운이 조금씩 가시기 무섭게 이성이 고개를 쳐들고 발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정신이 든 서하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 지나치게 용감했다. 이럴 필요까진 없었다. 늘 그랬듯 혼자서…….
“안 들어가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하는 숨을 내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어깻죽지에 닿는 남자의 체온이 서하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듯했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남자의 두꺼운 팔이 서하를 스쳐 카드키를 찍었다. 호텔 방의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크게 울렸다.
서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다고 말하고 도망치자 결심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제 뒤에 선 남자를 밀치고 나가려 하는데,
“쪽지.”
“…….”
“맞잖아. 일단 들어가요.”
어떻게 방 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등을 미는 커다란 손바닥에 밀려 얼떨결에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희고 넓은 호텔침대와 검은 원목으로 된 티 테이블이 가장 먼저 보였다. 유리창 밖은 건물들이 쏟아내는 빛으로 환했다. 불규칙한 호흡으로 숨이 자꾸만 번졌다.
보기 드문 장신의 남자는 김산보다도 훨씬 커보였다. 저 역시 작은 키가 아닌데 고개를 쳐들고 봐야만 했다. 190은 가뿐히 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잘 빠진 재규어처럼 탄탄하고 두꺼운 몸선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뒷머리 탓에 뒷덜미에 돋은 머리칼이 거칠어 보였다. 살짝 보이는 이마도 잘 생겼다. 어느 누가 봐도 잘났다고 생각할 법한 얼굴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여유로워 보였고 언뜻 어려보이기까지 했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어찌할 바를 몰라 남자가 테이블 위에 검은 봉투를 내려놓을 때까지, 서하는 현관에서 돌처럼 굳어있어야만 했다.
“처음 맞죠? 활동 기록이 없어서.”
휴대폰을 든 채로 묻는 말에 서하가 대답을 골랐다. 그는 제가 보낸 쪽지 계정으로 활동 기록을 살펴본 듯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BDSM 커뮤니티를 발견한 건 대학시절이니 소위 눈팅만 9년째다. 피학 성향이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알았다. 매 맞는 게 기대됐고, 통제 당하는 게 좋았다. 일련의 사건 후 혼자 살게 되면서, 빈 시간이면 갖은 상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남의 플레이를 인터넷으로 보고 공부하며 스스로 구멍을 확장하고, 결박하고, 닿는 곳까지 매질했다.
하지만 언제나 부족했다. 서하에겐 현실의 주인님이 필요했다. 제가 더는 못 하겠다고 도리질을 칠 때까지 괴롭혀줄 주인님이. 김산은 그저 상상 속 인물일 뿐이었다. 해서 늘…….
서하의 침묵이 길어지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오늘 나랑 플레이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습니다.”
서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생각의 끝에서 충동적으로 대답을 내뱉으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하고 싶다.’
뭣보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오싹했다. 처음 겪는 실존하는 감각이 서하를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했다. 문 앞까지 와서도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절실해졌다. 어차피 하루였고, 단 한 번이다. 오래된 이 욕망을 한 번이라도 해소하고 싶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초보가 감당하기엔 조금 하드한 플레이를 선호해요.”
“…….”
“어설프게 조금 혼나는 거 좋아하는 정도로는, 시작도 안 하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단단한 턱이 짓이기듯 다물려졌다. 그가 경고하듯 읊조리는 말이 서하를 조금씩 마비시켰다. 저를 샅샅이 훑는 시선이 진득했다. 다리가 오들오들 떨렸다.
그가 말하는 하드한 플레이는 뭘까. 플레이에 앞서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는 사실은 마치 교과서처럼 서하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안전어도 정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서하는 그가 저에게 가할 고통과 속박이 기대된 나머지, 상상만으로도 흥분하는 중이었다. 피멍이 들 때까지 때려도 좋고, 뒤가 다 헐 때까지 물건을 집어넣어도 좋다. 저를 완전히 못 쓰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위험한 충동이 자꾸만 엄습했다.
“할 수… 있어요.”
뇌가 절절 끓는 것만 같았다. 덜덜 떨리는 서하의 손끝에 시선을 주었던 남자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첨언했다.
“나도 심하게 더럽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것까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싫어하는 쪽에 가깝지. 그리고 처음인 것 같으니까, 그걸 감안해서 간단한 것부터 해보죠. 그냥 돌아가긴 아쉽잖아.”
여상한 말투와 함께 어깨를 짓누르는 손에 서하의 무릎이 꺾이며 한순간에 바닥에 꿇려졌다. 무릎에 닿는 딱딱한 마루가 사실적으로 와 닿았다. 절 내려다보는 시선에 다리가 자꾸만 후들거렸던 차니, 오히려 잘 되었다. 한결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그가 흡족해 하는 것 같아서.
여유롭게 의자에 자리한 남자가 서하를 응시하며 다음 명령을 내렸다.
“옷 벗고 가까이 와.”
낮은 목소리가 서하를 유혹하는 것처럼 울렸다. 남자의 말에 서하가 머뭇거리던 손을 들어 옷을 하나 둘 벗기 시작했다. 금세 벗은 가슴이 드러나고, 양말과 속옷 한 장 만을 남겨둔 채로 알몸이 되었다.
‘미칠 것 같아.’
실내이지만 여러 겹 입고 있던 옷을 벗었기 때문에 한기가 들었다. 양말과 속옷마저 벗어내자 수치심이 더욱 진득하게 일었다. 모양 없이 부드럽게 자리했던 유두가 조금 단단해졌다. 그 순간에도 남자는 여유롭게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서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리 와서 핥아.”
서하는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아니 그것보단 빠르게 남자의 가랑이 사이를 향해 움직였다. 결코 밝지 않은 조명 아래, 술기운으로 붉어진 피부가 남자의 시야에 가득 찰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단단하고 두꺼운 허벅지 사이에 서하가 완전히 자리했을 때, 남자가 드디어 떨리는 서하의 턱을 쥐었다. 입술에 닿을 때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손가락이 서하의 입술 안을 비집고 들어오자 보다 낮은 온도로 느껴졌다. 배려 없이 난폭하게 제 입안을 휘젓는 손가락에도 서하의 물건은 가쁘게 반응하고 있었다. 생애 첫 플레이였다. 상상 속에서 그리고 또 그리던.
“그럼 얼마나 잘 빠는지 볼까.”
처음인 걸 감안한다면서, 제가 잘 빨길 기대하는 남자의 발언이 모순적이었다. 아마 잘 빨지 못하면 벌을 준다는 뜻이겠지. 말 뿐인데도 성적인 자극이 일어 오금이 저렸다. 피부가 다 오싹했다.
서하의 떨리는 손에 의해 남자의 바지 지퍼가 지익 소리를 내며 내려가고, 곧이어 눈앞에 반쯤 선 거근이 놓여졌다. 너무 커서 얼핏 비현실적이란 생각마저 들 만큼 거대했다. 동양인이라고 볼 수 있나? 서하의 숨이 가파르게 떨렸다.
미세하게 떨리던 얇은 입술이 벌어지고, 뜨끈한 열기를 뿜어내는 남자의 성기를 끝에서부터 느리게 물었다. 제대로 발기하기 전임에도 입안에 가득 차는 무게감에 서하의 눈꼬리에 물방울이 맺혔다. 빠듯하게 목구멍까지 밀려드는 성기를 좀 더 잘 물기 위해서, 서하는 무던히도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남자가 서하의 머리채를 잡아 남근을 푹 밀어 넣었을 때, 입안에 고인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플레이의 시작이었다.
***
어떤 정신으로 오리엔테이션을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입안에 감도는 남자의 정액 맛과, 맞아서 붓기가 빠지지 않은 엉덩이가 주는 시큰함이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서하는 필사의 노력으로 무너지는 평정심을 다잡으며 앞으로의 강의 일정을 열심히 읊어댔다. 여기까지 평정을 가장하는 것도 어쩌면 기나긴 대학원 생활의 덕택이다. 마침내 준비한 오리엔테이션 멘트가 끝났다.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다음 주에 보자는 말을 꺼내려 하는데,
“질문 있는데, 수업 끝나고 여쭤 봐도 되나요?”
번쩍 손을 들고 묻는 말의 주인이 그였다. 서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가능하면, 모르는 척이 최선이었다.
“지금 물어보세요. 학생이 궁금한 게 수업에 관련된 거라면 다른 학생들도 알아야죠.”
개강 첫 주라 자리가 많이 비어있긴 했지만, 서하는 태연한 척 강제혁의 말에 대답했다. 이렇게 본명을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입이 썼다.
“아뇨, 제 개인적인 질문이라.”
개인적인 질문이라는 말에 서하의 굳은 얼굴이 움찔했다. 개인적인 질문.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학생이 교수한테 개인적인 질문을 하려면야, 뭐 자기 시간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질문을 하려는 남자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서하가 침묵하는 사이, 학생들의 표정에 답답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다 끝난 수업이 점점 길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코너에 몰린 서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수업 여기까지 하고, 개인적으로 질문 있는 학생들은 잠시 남으세요.”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서 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고, 금세 강의실 안이 텅 비었다. 빠르기도 하지. 강의실이 비기 무섭게,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서하를 쳐다보던 강제혁이 입술을 열었다.
“반갑네요.”
“대체 무슨 말인지.”
계단형 강의실인지라 내려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서하가 괜히 단추를 여미며 노트북이 든 가방을 갈무리했다. 마주 보지 않아도 시선에 섞인 뜻이 그대로 느껴졌다. 서하가 가방을 든 채 빠르게 계단을 올라 강제혁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문이 하필 저 뒤에 있어서 그를 지나치지 않고 가려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강의실을 왜 이따위로 만든 거야.’
서하가 짜증섞인 생각을 하며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자. 계속 모른 척하면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서하의 착각이었다.
“내가… 먼저 가도 된다고 한 적 없을 텐데.”
싸늘한 듯 다정한 듯,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서하의 발목을 붙잡아 묶었다.
“이서하.”
“…….”
“또 맞고 싶어?”
예상치 못하게 이름을 불리자 숨이 턱 막혔다. 순간 서하는 그 밤에 맞은 엉덩이가 화끈거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뺨을 올려붙인대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텐데.
“당신 맞는 거 좋아하잖아.”
“…대체 뭘 착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강제혁 학생, 예의를 지키세요.”
서하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날카롭게 일갈했다. 말끝이 떨린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이쯤에서 물러서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나. 하룻밤 일탈일 뿐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내가 왜?”
“…뭐?”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성큼 다가선 강제혁이 서하의 눈앞에 가득 찼다.
“아……!”
예고 없이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눈동자에 서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직 붓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엉덩이가 너무 아프고,
“내가 왜… 당신한테 존대를 해야 해?”
“아읏…….”
“말해 봐.”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부딪힌 시선이 어지러이 얽혀 들었다. 커다란 강의실은 족히 100명을 수용할 만큼 넓었음에도 숨이 막힐 만큼 좁게 느껴졌다. 무표정을 가장했던 서하의 얼굴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저를 구속했던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가득하고, 맞아서 부은 엉덩이에 통증이 가해지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서하의 손가락이 강제혁의 소매를 그러쥐었다. 경직되어 있던 서하의 얼굴근육에 힘이 풀리자 강제혁의 낯에도 만족스러움이 가득 찼다.
“가만히 있어. 쑤시고 싶어지니까.”
빈 강의실이라고는 해도, 앞으로 두 시간 정도는 아무도 안 들어올 예정이라고 해도, 누군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음 수업이 예정된 학생이 조금 이르게 강의실로 들어선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자꾸만 치미는 불안감 탓에 서하가 문 쪽을 바라보며 움찔대자,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배려 없이 살덩이를 벌려 당겼다.
“아윽…….”
“말도 안 하고 도망가 버려서 얼마나 아쉬웠는데.”
“잠시, 만…….”
자꾸만 목소리가 떨렸다. 아프고 쓰라리고, 좋아서 아래가 점점 묵직해지고 있었다. 강렬하고 달콤했던 생애 첫 플레이가 자꾸만 떠올라서 손끝이 덜덜 떨렸다. 서하는 터지는 신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아릿한 통증이 또 자극적이었다. 진퇴양난이다. 또 맞고 싶어서.
“또 도망가려고?”
귓전에 대고 거칠게 묻는 목소리에 서하가 도리질을 쳤다. 그 밤의 기억이 선연했다. 옷 위로 구멍부근을 쑤시듯 만지는 긴 손가락에 여기가 어딘지조차 잊을 듯했다. 달뜬 숨이 강제혁의 목덜미에 퍼졌다. 결국 자꾸만 무너지는 다리와 커다란 손에 붙들린 둔부 탓에, 서하는 강제혁의 어깨에 반쯤 기댄 자세가 되었다. 제 역할을 못하는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이쯤 되면 주저앉지 못해 간신히 서 있는 상태였다.
“안, 안 갈게요.”
“못 믿겠는데.”
“안 도망가요. 흣, 놔 주세요…….”
끈덕지게 비부를 쓰다듬는 손길에 서하는 강사로서의 자존심도 잊고 빌듯 속삭였다. 평소라면, 그리고 그의 앞이 아니었다면 하지 못할 말이었다. 서하는 항상 이렇게 누군가에게 빌고 싶었다. 허락받고 싶고, 통제당하고 싶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쉬움이 먼저 번지는 것에 입술을 사려 무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서하의 시야에 웃음기 어린 그림 같은 낯이 가득 찼다.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던 것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눈물 맺힌 눈가를 쓰다듬는 손길에 서하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에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 제 상처 난 엉덩이를 가차 없이 틀어쥐던 손이기에 더욱 그랬다.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은 몰랐는데,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밝게 묻는 목소리는 남대생 특유의 시원시원함이 묻어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밤이나 방금 전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뭣보다 존대를 하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밥 싫으면 커피도 좋고. 차도 좋고.”
서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얼빠진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반쯤 섰던 성기가 우습게, 제 눈앞의 그는 완연한 학생의 모습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강제혁의 앞에서 스스로가 무너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무섭게 서하의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불에 댄 듯 홧홧한 낯을 숨길 방법이 없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우리 할 얘기 많은 것 같은데.”
저보다 몇 만 배는 여유로워 보이는 강제혁의 말을 거절할 도리도 없었다.
***
“아메리카노 드실 거예요?”
“아니, 에스프레소…….”
“레몬차 하나랑, 에스프레소 하나 주세요.”
얼결에 학교 근처 카페까지 따라오고야 말았다. 서하는 자연스럽게 주문과 계산을 마치는 강제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제가 학생에게 계산을 미루고 말았다는 중차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잠깐. 왜 계산을 합니까?”
“제가 그쪽 끌고 온 거잖아요.”
엄연히 연상이고 또 강의를 할 선생인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서하 안의 꼰대가 핏발을 세우고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 외치고 있었다.
“그런 표정하지 말고.”
“무슨,”
“콱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평이한 목소리와 달리 갈증마저 느껴지는 짙은 눈빛이 서하의 입술 끝에 따라 붙었다.
“밝은 데서 보니까 입이 더 작은 것 같아요.”
단순히 입이 작다는 평이었지만 서하는 그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실제로 제 입은 평범한 크기였고, 입이 작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제 입이 작아 보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마, 입안을 말하는 것일 테다. 강제혁이 바라보는 이 입술로 무슨 일을 했는지 잊을 수 없었다. 입안을 가득 메우던 성기의 부피감이 선명히 떠올랐다.
‘좁아.’
성기를 쑤셔 박으며 읊조리던 감상이 다시금 귓전에 울렸다. 그 밤, 제 입안을 가득 메웠던 거근을 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제가 남자의 성기를 여러 번 물어봤다면 이 정도 도발에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을 텐데. 이쯤 되면 홍조가 도는 게 병이래도 믿겠다. 메뉴가 메뉴였기 때문에 자리에 앉기까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마침 손님도 없었고.
“테라스로 가서 앉아요.”
배려하는 듯했지만 분명한 명령의 어투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서하는 저항하지 못하고 강제혁의 말대로 테라스로 향했다. 과연 아무도 없었다. 2층이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대화를 엿들을 걱정도 없었다.
“왜 도망갔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알 것 같기도 하고.”
서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강제혁을 뒤로 하고, 제 앞의 작은 커피 잔을 들어 입가로 옮겼다.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저도 입장을 밝혀야 했고.
서하는 최대한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애쓰며 쓴 커피를 들이마셨다. 혀 안에 감기는 원두의 고소한 풍미가 들쭉날쭉한 심경을 조금 차분하게 다독여주었다. 플레이는 만족스럽다 못해 지금 생각해도 뇌가 저릿할 만큼 좋았지만, 여기는 제 일터였고, 그 밤의 주인은 제 학생이 되었다. 서하가 잠시 숨을 멈추고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날은 내가 좀 충동적이었습니다.”
“충동.”
제 말에서 중요한 단어를 추출하듯 되짚는 강제혁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하가 한숨 호흡을 삼키고 뒷말을 이었다.
“네, 알고 있겠지만 플레이는 그날이 생전 처음이었고요. 성향을, 자각한 것은 오래 됐습니다.”
“그런 것치고 잘 벌어지던데.”
뭘 뜻하는지 모르기 어려운 노골적인 단어선택에 서하의 낯이 고장 난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건, 기구로…….”
“혼자서? 혼자서 뭘로 어떻게 쑤셨는데.”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어투가 고막을 저미듯 쑤시고 들어왔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게다가 제가 왜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하나. 꼭 질문이 들어왔다고 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세상엔 노코멘트라는 답도 있었으니까. 단둘이지만 오픈된 공간에 있으니 자극에 약한 서하라도 이성이 좀 더 강하게 작용했다.
“이런 얘기 그만두죠. 아까는 내가 휘말렸지만, 나는 강제혁 학생 가르칠 강사고 본인은 내 수업을 수강할 학생입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뭐 하지만, 그날 일은 덮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싫다고 하면.”
“이봐요.”
“싫은 걸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건가. 그럼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그날 싫었습니까? 싫었으면 싫었다고 대답해요.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그 말에 서하의 입술이 한일자로 꾹 다물렸다. 싫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이 관계를 종식시킬 수 있는데.
“아니잖아요.”
“…….”
“섣부른 거짓말 할 생각은 관둬요. 그날 당신이 싸지른 정액만 해도 생수병 하나는 채웠을 것 같은데.”
“강제혁 씨!”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서하는 벌건 대낮에 제 은밀한 사생활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게 몹시 창피스러웠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30년을 살며 생전 처음 겪는 수모였다.
“마시게 할 걸 그랬나.”
짧게 떨어지는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하가 발끈하던 것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싫지 않았다. 싫기는, 좋아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자꾸만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자신이 싫었지만, 강제혁의 찍어 누르는 듯한 말투와 고고한 낯이 서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밤의 기억이 서하를 옥죄고 있었다.
“플레이는 처음이라고 했고, 난 좋았고. 그쪽도 만족했고 따로 파트너도 없고.”
서하는 강제혁이 늘어놓는 사실들에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함에 꽉 쥐어진 서하의 손바닥 안에는 식은땀만 하염없이 고이고 있었다.
“교수님이라고 불러 드려요?”
“…그냥 선생님이라고 하세요.”
호칭정리가 필요해 보이기에 대외적인 관계를 생각해 대답했다.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질문이 나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회 발표보다 떨리고 긴장된다.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진이 빠졌다. 서하가 전의를 상실해가는 동안 강제혁은 그런 서하를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선생님이란 말이 입에 붙지 않는 건지 호칭 없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뭐, 어쨌든. 왜 그동안 플레이 안 했어요? 성향을 안 지 오래되었다면서.”
“…이런 이야기 할 필요 없잖아요.”
“왜요, 나는 이서하 씨 또 따먹고 싶은데. 그러려면 알아야지.”
선생님이란 호칭을 알려 주었음에도 직격으로 꽂히는 본명이 싫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따먹는다는 저급한 단어에도 흥분감이 밀려왔다. 미친 새끼. 스스로를 꾸짖어도 자극적인 긴장감은 쉬이 떨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0년간 정립해 온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상당히 꼰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저 어리디 어린 놈이 제게 함부로 대하는 게 싫지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이따위 수작질에 넘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게 다 그 밤의 기억 때문이다. 서하가 속으로 자신을 힐난했다.
“어지간히 맞는 거 좋아하고, 묶이는 것도 좋아하고.”
“…바깥에서 그런,”
“아무도 안 들어요. 호들갑 떨지 말아요.”
“…….”
“뭐든 넣어주면 탐욕스럽게 잘 삼키는 구멍도 가지고 있고. 그것도 위 아래로 두 개나.”
내리 꽂히는 시선에 발가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피부가 씨근거렸다. 그의 노골적인 품평만으로도 기대감을 느끼고 말았다. 꽉 쥐어진 주먹 탓에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강제혁은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뒷말을 이었다.
“여태 플레이 안 한 걸 보면 용기도 없고, 충격을 받아야 그럴 용기도 갖는 것 같은데 그럴 일 살면서 많지도 않을 테고. 좋은 몸인데, 아깝잖아요.”
“강제혁 씨.”
“나랑 해요.”
“예?”
서하는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바보처럼 되물었다. 되묻는 거 싫다고 왜 같은 말 두 번씩 하게 하느냐고 후배들을 말로 두들겨 패고 다니던 서하의 과거와 대비되는 현장이었다. 성향과 별개로 공적으론 칼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30년간 쌓아올린 제 성격조차 그 밤을 아는 강제혁 앞에선 무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거창하게 DS 맺자는 말 하는 거 아니고, 플레이 파트너가 되자는 거죠.”
“플레이…….”
“평소랑 다를 거 없이 생활하는 거예요. 대신 서로 의사가 합치할 때, 만나서 그 밤처럼 즐기자는 거죠.”
*DS : domination/submission. 지배와 복종. SM플레이와 관계없이 돔이 지배자로서 섭의 일상까지 구속할 수 있는 절대적인 계약 관계.
*플레이파트너 : SM플레이 시에만 유효한 일시적 파트너 관계.
서하는 강제혁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단칼에 거절해야한다는 이성의 부르짖음이 있었지만,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제 욕구를 해소할 방법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다 절대적이고 진지한 DS관계가 아닌, 섹스 파트너와 같은 플레이 파트너를 제안하는 말이 더욱 감미롭게 느껴졌다.
강제혁과 플레이하기 전, 홀로 욕정을 삼키며 김산의 이름을 부르던 때였다면 이런 제안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플레이의 달콤함을 알지 못했고, 또 두려움이 더 컸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게 달라진 상태였다. 서하는 알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에 기어코 발을 들였고, 거기서 생전 처음 겪는 쾌락을 맛봤다.
그건 너무 달고 진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물론 완벽히 적합한 말은 아니었지만 막상 입에 대니 끊을 수가 없었다. 김산은 결혼을 할 것이고 저는 상상 속 주인마저 잃었다. 어차피 숨기지 못할 성향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채울 수 없는 욕구라면……. 그리고 이미 강제혁과는 플레이를 해버렸고 그걸 물릴 수도 없었다.
“공과 사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요.”
양아치처럼 반말을 지껄이던 강제혁이 사무적인 말투로 선을 그어주었다. 그 말이 또 서하를 흔들리게 했다. 그만큼 저를 만족시켜줄 돔을 또 만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때처럼 살 수 있을까? 스스로를 매질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이성과 육욕이 팽팽히 충돌하고 있었다. 그는 제가 가르쳐야 할 학생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사생활은 꼭 지켜줄게요.”
서하는 그 말이 믿고 싶어졌다. 어느새 차게 식은 서하의 손을 크고 뜨거운 강제혁의 손이 덮어 잡았다. 다물린 손가락을 풀고 벌겋게 부은 손바닥을 느리게 문지르는 엄지가 기묘하고도 야릇했다.
“고개 한 번만 끄덕여. 싫다고 울 때까지 괴롭혀 줄 테니까.”
결박하듯 손목을 그러쥐는 손길에 서하의 턱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
‘이서하, 미친 새끼. 정신 나간 새끼. 거기서 고개를 왜 끄덕여!’
서하는 제 방 구석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자괴감에 절어 있었다. 얼결에 휴대폰 번호까지 교환했다. 물론 그나 저나 알려면 강의계획서라든지, 출석부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행위는 징그럽게 유의미한 것이었다. 제가 스스로 그에게 목줄을 건넨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른단 생각에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시간표를 요구하기에 서하는 스케줄표까지 건네주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아주 여러 가지 한다. 그의 말대로 DS도 아닌 단순 플레이파트너인데 너무 간 건 아닌지. 이런 관계를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어디까지가 적당한 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이었으니까.
“씨발, 그냥 죽자. 뒈져 버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학생이랑. 미친놈아. 기어코 서하가 이마를 찧었다. 둔탁한 통증과 함께 골이 울렸다. 고개를 끄덕인 후에 나눴던 대화가 어지러운 뇌리를 스쳤다.
- 약은 발랐어요?
때린 당사자가 그런 것을 물으니 우스울 판국이었지만, 실제로 플레이가 끝난 후 뻗은 제 몸에 약을 발라준 것도 강제혁이었다. 그땐 이름이라곤 한 글자도 몰랐지만. 그 물음에 저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래. 마데카솔이요, 하고 멍청하게 대답했더랬다.
- 새살이 솔솔 돋는다고…….
멍한 머리로 얼간이처럼 광고 문구까지 읊었다. 피식 웃던 강제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괴로워진 서하가 몇 번 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다. 하지만 그런다고 제가 강의실에서 흥분했던 사실이나, 카페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좀 죽고 싶어졌을 뿐.
“약이나 바르자.”
그의 말대로라면 조만간 또 플레이를 할 것이다. 그때를 위해 상처를 치료할 필요성이 있긴 했다. 서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플레이파트너가 된 것을 후회하며 머리를 박다가, 또 그와의 플레이를 준비하며 약을 찾는 제 이중적인 행동에 치를 떨었다. 답도 없는 변태새끼. 왜 살아? 산소 아깝게.
서하가 스스로를 한껏 비웃고 있을 때,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설마 강제혁인가. 당장 오늘 만나자고 하는 건가? 그래도 되나? 혼란스러웠지만 거절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렇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휴대폰을 들었는데,
「오늘 수업은 어땠어? 형이 저녁 살 게. 30분 뒤에 보자.」
메시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김산이었다. 그도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그리고 저를 퍽 아끼니 이상할 것 없는 연락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어질 만남에 설렜을 텐데, 서하는 이상하게 가라앉는 제 기분을 그대로 느끼며 휴대폰의 타자를 두드렸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저는 그런 그의 상황에 적잖이 영향을 받고 있었으니까.
「오리엔테이션은 원래 별 거 없는 거 아시잖아요. 저 오늘 좀 피곤해서 안 될 것 같아요.」
「그래도 나와. 차로 데리러 갈 테니까.」
그의 제안에도 역시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거절을 해도 무시하니 어찌하랴. 제가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도착한 답장에 서하는 한숨을 내쉬며 바지를 집어 들었다. 편한 옷 입고 나가야지. 마음 같아서야 결혼을 앞둔 그를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간의 관계가 있어서 쉬이 잘라낼 수 없었다. 그는 좋은 선배이니까.
「천천히 오세요.」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
“바쁘지도 않아요? 왜 자꾸 불러내고 그래요. 사람 귀찮게.”
심사가 비뚤어진 나머지 서하도 괜히 말이 밉게 나가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다. 김산은 분명 바쁠 것이다. 바빠야 했다. 강의도 하고, 일도 하고, 결혼 준비도 해야 했으니까.
‘생각할수록 좆같네.’
그런데도 저를 불러내서 저녁을 먹이겠다는 심보가 고약하게만 느껴졌다. 좋은 선배 노릇을 하는 그로서야 어쩌면 당연한 부름이었을 텐데도.
김산에게 이서하는 10년째 인연을 이어온 귀여운 후배고, 그 후배가 첫 강의를 했다니 밥을 사주고 싶었을 수 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하는 김산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저녁도 안 챙겨 먹을 거 뻔히 아는데, 선배가 후배 밥 좀 사주면 안 되나.”
서하가 툴툴대며 말해도 김산은 그저 그를 귀엽게 보는 듯했다. 그런 김산을 외면하며 서하는 말없이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익숙한 승차감, 그만큼 이 자리에 많이 앉았다는 뜻이었다.
“안 바빠요, 진짜?”
“뭘 바빠. 평소랑 똑같지.”
“왜, 그. 결혼 준비하려면 바쁘잖아요. 다 그러던데.”
서하는 기어코 자신의 입에서 결혼이란 단어를 꺼내게 하는 그가 밉살스러웠다. 김산이야 서하가 그 말을 꺼내기 싫어할 거란 추측도 못할 테지만.
“아직 멀었어. 결혼 할 것 같다 그랬지, 결혼 한다 그런 적 없잖아.”
전방을 주시하며 매끄럽게 운전하는 김산의 대답에 서하는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결혼할 것 같은 거랑 결혼한다는 거랑 뭐가 그렇게 다른데? 서하에게는 똑같은 말이었다.
“그게 그거죠.”
“뭘 모른다니까. 어휴, 꼬맹이.”
“저 서른 살이거든요?”
“나보다 작고 어리잖아.”
“허,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 꼬맹이잔치네.”
삼십 세 성인 남성을 꼬맹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있다. 김산이나 강제혁이 큰 거지 결코 제가 작은 게 아니었다. 재작년에 한 건강검진 때 178cm가 나왔으니 그래도 한국남자 평균보단 크지 않나. 그 생각을 하니 또 강제혁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더럽게 크던데. 농구선수야, 뭐야.’
그는 선수보단 모델이 어울리는 외양이었지만, 몸이 너무 커서 모델은 또 어울리질 않았다. 그 몸을 생각하니 열이 오르는 느낌에 서하가 차창을 조금 열어 찬바람을 맞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제 몸이 달아올랐다는 반증이었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아무거나는 호프집에나 있는 메뉴고.”
“으, 선배야말로 진짜 아저씨 같아요.”
“그럼, 서른여섯이 아저씨지. 나 언제 이렇게 나이 먹었대?”
“저 내릴래요. 안녕히 계세요.”
“가만히 안 있어?”
이거였다. 찍어 누르는 듯한 목소리. 그야 장난처럼 하는 말이겠지만, 서하에게 김산 같은 남자는 너무 위험했다. 서하는 그런 취향인 주제에 면역이 없었으니까. 대들 듯 그에게 툭툭 말을 뱉다보면 끝에 가서는 그가 저를 꾸짖거나, 으름장을 놓거나 하는데 그게 서하를 무던히도 자극했다. 야속하다.
“막창 먹자. 형이 구워줄게.”
그러고는 또 다정하게, 제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삼아 얼러대곤 했다. 서하는 언제나와 같은 이 대화 속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 엉덩이 힘 빼고 벌려. 더 쑤셔줄 테니까.
초콜릿을 맛본 후엔, 희미한 단맛은 다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맹물의 맛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세월이 무서워 김산의 으름장도 여전히 유효하긴 했다.
“…네.”
서하는 기억 속 강제혁의 명령에 대한 대답인지, 옆자리의 김산의 제안에 대한 대답인지 모를 것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플레이를 하고 그 남자와 플레이 파트너가 되기까지 했다.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게 바뀌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
“그래서 강의는 어땠어?”
“오리엔테이션이 강의예요? 그냥 뭐 중간고사 기말고사 날짜 얘기나 하고, 확정된 휴강날짜 미리 알려주고, 성적 어떻게 줄 건지나 얘기했죠.”
“그래도 학생들 앞엔 처음 서는 거였잖아. 안 떨렸어?”
떨리긴 떨렸다. 다른 의미로 떨려서 그랬지. 첫 강의란 생각은 할 새도 없이 심장이 떨렸다.
“…별로요.”
“잘 생긴 교수 왔다고 정원 터지는 거 아니야?”
“교수는 무슨 교수래요, 시간강사 나부랭인데.”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면 교수지. 뭘 그렇게까지 따지고 들어. 애들이 아냐?”
“그리고 핵심교양이라 놀 생각 가득한 1학년이 대부분이에요. 정원은 저 아니었어도 터졌을 걸요. 강의 이름부터 만만해 보이는 수업인데.”
막창을 구워 먹으며 시답잖은 대화가 오고갔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양수업 중에서도 제일 만만해 보이는 이름이었다. 한국 미술의 이해. 뻔한 강의였다. 정원 60명인 수업으로, 그중 40명은 1학년이었다.
강제혁은 2학년이었다. 군대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좀 짧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짧은 것도 아니었지만.
‘제대하자마자 복학한 건가. 부지런하네.’
서하는 눈앞에 김산을 두고도 강제혁 생각을 하는 자신을 자각하지 못했다. 서하의 얼굴을 빤히 보던 김산이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기분 좋아 보여서 좋네.”
“저요?”
“응. 거울이라도 보여줄까? 생기가 돌아.”
별로 좋은 일 같은 거 없는데. 서하는 잘 구워진 막창 한 조각을 콩가루에 찍어 입에 밀어 넣었다. 조각이 큰 탓에 입이 좀 크게 벌어졌고, 겨우 아문 입가가 따끔거렸다. 찢어진 줄도 몰랐는데 입을 크게 벌리니 상처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강제혁도 입 어쩌구 하는 소리를 했던 걸까? 서하가 새삼스럽게 당황했다.
“으…….”
“데었어?”
“아뇨.”
“찢어졌네. 쌈밥이라도 먹었어?”
제 턱을 쥐고 걱정하듯 묻는 김산의 말에 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입이 찢어지도록 밀어 넣은 게 있긴 했다. 다만 그걸 김산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좆 빠느라 그랬다고 하기엔, 좀.
“식탐도 별로 없는 애가 뭘 그렇게 찢어지도록 쑤셔 넣었어.”
타박하는 말이 제법 수치스러웠다. 모두 강제혁 때문이었다. 서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컵을 들이켰다. 테이블 위에서 까만 액정을 자랑하는 휴대폰이 눈에 들었다. 강제혁과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으니 곧 연락이 올지도 몰랐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도 기대가 되는 것을 누르기 어려웠다. 웃기는 일이었다.
***
걱정과 달리 강제혁은 금요일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서하는 조금 맥이 빠져서, 혹시 하는 마음에 그를 만난 SM커뮤니티도 둘러봤지만, 그날 이후로 강제혁의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플레이 파트너는 보통 1:1인가?”
서하는 문득 궁금해졌지만, 그보다 강제혁의 활동이 없다는 사실에 어째선지 안도감을 느꼈다. 플레이 파트너는 원래 그런 건가. 섹스 파트너 한 번 만들어 본 적 없는 서하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어쩌면 강제혁은 그 사이 더 마음에 드는 섭을 만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커뮤니티가 아니어도 상대를 구할 방법은 많았다.
‘그만 생각하자.’
다시금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은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다. 강제혁이 다른 파트너를 만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그로 인해 제게 흥미를 잃는다면 저는 또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이다. 서하에게 이 비밀을 공유한 사람은 하나로 족했다. 다른 이와 또 플레이를 할 만큼의 용기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없었다. 서하는 책상에 앉아 월요일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더는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휴대폰이 울렸다. 서하는 늘 그렇듯 광고인가, 싶어 심드렁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아니면 김산이겠지. 빈약한 인간관계가 빛을 발한다.
「성향 안지는 오래됐다 그랬으니까, 취향 정도는 알겠네요? 이걸로 체크해서 보내세요.」
글자의 나열을 빤히 응시하던 서하가 뒤늦게 깜짝 놀라 자세를 가다듬었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강제혁이었다. 방금 전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우스워졌다. 그리고 묘하게 들뜨기 시작하는 자신이 좀 창피했다. 전부 플레이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이미지파일은 표 형식으로 된 설문지 같았다.
‘별 희한한 게 다 있네.’
표의 좌측 상단에는 선호하는 것은 파랑색, 해보고 싶은 것은 노란색, 할 수 없는 것은 빨간색으로 칠하라는 표시가 있었다. 그리고 소프트한 것에서 하드한 것까지 순차적으로 각각의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간 상상 속에서 플레이를 해보며 수없이 체크해보았던 표와 비슷하게 보였다. 그마저도 부질없어져 관둔 지 좀 되었지만, 실물로 존재하는 표를 보자 긴장이 됐다. 더군다나 보여줄 상대가 있다는 게…….
“…그나저나 놀랐네.”
그래, 연락이 오긴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도, 연락이 없다고 기분이 가라앉았던 것도, 이 짧은 메시지 하나로 전부 다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어쨌든 이건 제 플레이 파트너에게 고지하는 리퀘스트 같은 거니까, 이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쩌면 제 명운이 달린 일일지도 몰랐다.
“일단 위에서부터…….”
서하가 강의 준비는 제쳐 두고 표를 훑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큼은 제 강의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강제혁을 지워야 했다. 침대 위에서 저를 엉망으로 만들어줄 주인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간 김산으로 상상했던 상상 속 주인의 얼굴을 강제혁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또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 있으니 오히려 쉬웠다.
그는 김산보다 체격이 좀 더 크고, 장골이 단단하고, 아마도 성기가 더 크고……. 거기까지 생각한 서하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입가가 다 찢어지도록 목구멍에 성기가 처박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구멍이 덩달아 씨근거리는 듯했다. 한계까지 다리를 벌리고 구슬을 몸에 집어넣은 채 남근을 받았던 일도 떠올랐다. 이제는 다 나은 볼기가 간질거렸다. 더 맞고 싶었다. 울 때까지…….
“미치겠네.”
표를 보고 있자 한 주간 받은 스트레스와 쌓인 정욕을 그를 통해 해소하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강제혁에게 대뜸 지금 만나자고 연락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강사로서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제 학생이니까.
그게 조금 더 배덕감을 느끼게 했지만, 어쨌건 삼십 년간 쌓아올린 이서하라는 인격이 그걸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뭣보다 그냥 단순 플레이 파트너니까, 당장 만나자고 하는 것도 그렇고.
‘아닌가. 오히려 더 쉽게 연락할 수 있는 건가.’
일단은 이것부터 작성해야 했다. 서하는 애써 들끓는 욕구를 달래며, 액정 위에 뜬 표에 파란색 펜으로 선호하는 플레이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서하는 거진 파란색으로 칠해진 표를 보고 약간 자살하고 싶어졌다. 아예 취미가 없는 삭발이라든지, 스캇, 블러드, 니들 같은 플레이를 빼고는 거의 다… 해보고 싶었다. 공개조교라든지 야외플레이라든지, 강제플이라든지. 사람 없는 공중화장실에서 강제로 따먹히고 싶다는 생각. 물론 플레이라는 한정 하에 말이다.
“나 진짜 변태새끼인가 봐. 미치겠네.”
서하가 찬물에 세수를 마치고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쏘아붙이듯 한탄했다. 연락을 해볼까. 저걸 체크하라고 보내줬으니 그대로 전송하면서 지금 시간이 되느냐 물어도 될 일이었다. 당장 다음 주에 그가 제 수업에 들어올 테지만, 그래도. 아니면 수강정정을 부탁해볼까. 그때 잠잠하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물기를 마저 닦아내며 무감각하게 전화를 받았는데,
[답장이 왜 이렇게 느려요?]
강제혁이었다. 서하가 물기 젖은 입술을 깨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보내려고 했는데,”
[했는데.]
“…잘못했어요.”
엄하게까지 느껴지는 반말에 저도 모르게 존대가 튀어 나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화가 올 줄은 몰랐는데,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왜 먼저 연락 안 했어요?]
한참의 침묵 끝에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하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며 대답을 골랐다.
“연락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서요.”
[이서하 씨 꼴릴 때 연락하면 되죠. 아님 그동안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벌리고 다녔나.]
서하는 더 이상 강제혁이 될 대로 부르는 호칭에 관여치 않기로 했다. 학교에서나 선생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였으니까. 저야 원체 존대가 편했고. 어쨌든 강제혁의 음란한 질문에는 나름대로 단정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이기도 했다.
“안 그랬어요.”
[확인시켜줄 수 있어요?]
“네?”
뭘……. 존대와 반말이 공존하는 그의 말투에 지금이 플레이 중인 건지, 아니면 그저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중인건지 혼란스러워졌다. 그 사이 또 귓구멍에 꽂히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구멍, 벌려서 확인시켜줄 수 있느냐고.]
“…지금요?”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하네.]
“어떻게…….”
입 밖으로 튀어나간 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서하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줏대 없이 발기하기 시작하는 제 성기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나대지 좀 마. 이 미친 좆아.
[혼자 살죠? 메시지로 체크한 표랑, 집 주소랑 비밀번호 남겨놔요. 침대 위에서 구멍 벌리고 대기하고 있어요. 들어가자마자 확인하고, 때리고 쑤셔줄 테니까.]
“아…….”
[조금이라도 사정했다간 재미없을 줄 알아요.]
듣는 것만으로도 상상이 절로 되고 다리가 조금씩 떨렸다. 혼자 사는 집이기에 그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마침 씻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맞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범해지고 싶었다.
“…그럴게요.”
제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화가 끊겼고, 서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메시지를 보내놓고 바쁘게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그가 언제 도착할지 몰라 조급해졌다. 플레이 파트너가 되고 첫 플레이였고 처음으로 떨어진 명령이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행하고 싶었다.
***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그리고 더 신경 써서 샤워를 마친 서하가 아직 식지 않은 몸으로 침대를 쳐다봤다. 메시지로 비밀번호까지 보내놓은 건 플레이 파트너치고 과한 처사였나, 싶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의 말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번호야 나중에 바꾸면 될 일이다.
제가 보내놓은 메시지는 읽음 표시가 뜬 지 오래였다. 강제혁이 언제 도착할 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하는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구멍을 벌리고 대기하고 있으란 말.
침대에 엎드리기 전, 서하는 협탁 서랍 안에서 제가 자위할 때 쓰던 젤을 꺼내 집었다. 플레이가 목전이었다. 곧 이 밤에 저를 유린할 주인이 도착할 거란 생각에 손이 자꾸만 떨렸다.
‘긴장된다.’
서하는 젤을 듬뿍 짜서 손바닥과 손가락을 흥건하게 적시고, 굳게 다물린 비부를 문질러 이완시켰다. 그가 오기 전에 구멍을 충분히 늘려놔야 한다는 생각에 침대의 헤드를 잡고 손을 뒤로 돌려 하나씩 밀어 넣었다. 일주일가량은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버거웠다. 그래도 그간 홀로 자위한 전력이 있기에 얼마 안 있어 어렵지 않게 손가락 세 개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으응…….”
조금 더 강압적인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평소 사용하는 딜도도 꺼내 입에 물었다. 한 손으로 뒤를 쑤시며 다른 손으로 입안에 모조 성기를 밀어 넣는 서하의 모습은 요란하리만치 야했다. 본인은 모를 일이었지만.
“우읍, 흐…….”
어디쯤 오고 있을까. 턱 아래로 흐르는 타액에 눈시울을 붉히며 서하가 엉덩이를 높이 쳐들었다. 부족하다. 한 번 맛봤던 플레이의 경험이 자꾸만 떠올라 모든 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쿨쩍 젖은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아래를 드나들고, 목구멍으로 딜도를 조였다. 숨이 막혔다. 곧 도착할 주인을 위해 삽입당할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다 뜨거웠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고의 시간 끝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저 끝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서하의 등줄기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철컥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큰 보폭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서하는 입안 가득 물고 있던 딜도를 뱉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려 보이며, 꺼떡이는 제 성기가 사정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가 사정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흠 잡히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명령을 완수하고 싶었다.
“흐으…….”
말없이 짐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는 소리가 서하의 귓가에 스쳤다. 죽을 것 같았다. 말이 없으니 더 무서웠다. 아마도 강제혁일 테지만, 그래도 말이 없으니 두려웠다. 혹시 모른다. 제 집 주소와 비밀번호를 그가 다른 돔에게 넘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순간 불안해진 서하가 조금 고개를 돌려 침입자를 쳐다보려하자 눈앞에 안대가 씌워졌다. 순식간에 차단당한 시야에 두려움이 가중됐다.
“강제혁 씨?”
“…….”
“맞아요…?”
떨리는 서하의 목소리에도 침입자는 대답이 없었다. 엉덩이를 벌려 잡았던 손에 힘이 빠져 미끄러지고 있었다. 발기한 성기에 가느다란 압박감이 들었다. 사정방지 링 같았다. 오르가즘 컨트롤도 좋다고 표시했기 때문일까. 그의 허락이 아니면 사정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문득 두려워졌다. 저 남자는 강제혁이 맞긴 한 걸까. 조용한 가운데 뒤가 다물리는 질척하고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서하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덜 다물린 애널에 무언가 차갑고 굵은 것이 밀려 들어왔다.
“아…!”
손이 자유로웠기에 안대를 벗으려면 벗을 수도 있었지만, 서하는 그저 베갯잇을 입에 물고 신음을 눌러 참았다. 애널 플러그인가, 생각할 쯤 엉덩이 위로 가느다란 매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응, 으읏, 윽!”
침대에 누군가 앉은 것처럼 약간의 출렁임이 있었고,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은 모양인지 떨어지는 매의 간격이 일정했다.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타격으로 보아 케인 같았다.
“하, 아으…!”
스무 대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아파서 발끝이 다 오므라들고 성기에서 탁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얀 침대 시트가 타액과 체액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볼기가 화끈거리고 따가워서 울음이 자꾸 터졌다. 누가 제 엉덩이를 이렇게 망가뜨리는 건지 분간이 어려웠다. 강제혁이 분명할 테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서하를 흥분하게 했다.
‘쌀 것 같아…….’
어쩌면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이렇게 엉덩이를 맞다보면 누군가 또 성기를 입안에 물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플러그를 뽑아내고 성기를 짓쳐 넣을지도 몰랐다. 서하의 상상이 끝없이 광활하게 번지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숫자를 안 세. 재갈을 물린 것도 아닌데.”
“하으읏…….”
“물려줘?”
상상은 상상이었다. 안대가 거둬지고 시야가 확보되자 차게 굳은 강제혁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차가운 눈매가 서하를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매를 맞을 땐 숫자를 셌어야 했는데. 아픔에 터진 눈물방울이 턱 끝까지 흘러내렸다.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가만 쳐다보다 눈썹을 찌푸리고, 서하의 머리채를 잡아 제 앞섶에 갖다 댔다. 그리곤 반쯤 부푼 커다란 성기를 꺼내 서하의 얼굴에 치대 주었고, 서하는 거리낌 없이 입을 크게 벌렸다.
“하아, 읍…….”
뜨끈한 살덩이가 축축하게 젖은 입안으로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맞아서 부은 엉덩이 사이엔 플러그가 꽂혀 있었고, 입안엔 남자의 성기가 가득했다. 서하가 바라 마지않던 순간이었다.
“하, 허으, 윽…….”
사정방지 링이 서하의 성기를 묵직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선 강제혁의 성기보다 조금 작은 바이브레이터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애널 플러그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뒤에서 진동하는 기다란 물건에 정신이 흐릿해졌다. 마구잡이로 벌어진 아래에 서하가 가쁜 숨을 터트렸다. 눈물이 자꾸만 방울져 볼품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존나 좋다…….’
서하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성기를 처박던 강제혁이 얼굴에 정액을 흩뿌린 탓에 뺨이며 입술이 온통 끈적거렸다. 술기운 한 점 없이 플레이에 임하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리고 서하는 다짐했다. 앞으론 술 먹지 말아야지. 통증이며 쾌감이 더 선명하고 강렬했다.
“딴 생각 하지 마.”
“윽!”
케인에 맞아서 멍이 오를 지경인 엉덩이를, 커다란 손바닥이 가차 없이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고, 온몸이 저릿한 통증과 함께 오싹하게 이는 쾌감이 서하의 허리를 기어코 무너지게 했다. 다리 사이에서 웅웅거리는 바이브레이터가 모양 없이 떨어져 침대 시트에 나뒹굴었다.
“하…. 날 열 받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 모습에 강제혁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좆됐다.’
서하는 지금이 플레이 중이란 사실을 상기하고 기대감과 두려움에 떨었다. 딴 생각을 한 것으로 모자라 잘 물고 있으라고 물려준 바이브레이터까지 떨어뜨렸으니, 이미 맞아서 터진 엉덩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지금은 용서를 빌어야 했다.
“잘못, 잘못했어요. 흐으…….”
“말이면 다야?”
“제발…….”
더 때려줘. 뒷말은 당연히 삼켜야 했다. 서하는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엉덩이를 쳐들고 구멍을 연신 움찔댔다. 강제혁이 제 아래에 달린 흉기를 쑤셔 박아주었으면 싶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서하가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쳐다보려 했다.
그리고 그때, 강제혁의 손에 들린 쇠구슬과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나는 저것은 분명 지난주에도 제 뒤에 출입했던 물건이었다.
“자세 똑바로 해.”
“흣…….”
귀찮은 듯 엉덩이를 올려붙이며 명령하는 강제혁의 말에, 서하가 숨을 죽이고 허리를 낮춘 채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이윽고 차가운 쇠구슬이 뜨겁게 익은 입구에 닿았고, 마음의 준비를 위해 서하가 숨을 집어 삼키는 순간 구멍을 열고 안으로 밀려들었다.
“읏…!”
둥그런 부피와 쇠의 무게감이 겹쳐져 압박감이 대단했다. 헛숨이 터져 나가는 와중에 구슬은 벌써 두 개째 서하의 애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혼자서 삽입자위를 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맞아서 터진 엉덩이를 쓰다듬는 손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제 체온이 심각하게 높은 것 같았다.
“잘 먹네.”
“흐으, 응…….”
“이번엔 마음대로 뱉지 말아요. 그딴 걸로 나 열 받게 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읏, 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두꺼운 혀가 귓구멍을 찔렀다. 제 등에 붙은 강제혁의 맨가슴이 단단했다. 굴곡이 느껴지는 육체는 보이지도 않는데 절로 성감을 고조시켰다.
“이렇게 잘 삼킬 거, 왜 먼저 연락을 안 해.”
“흣, 죄송해요…….”
흥분과 기대에 절은 서하에겐 강제혁의 말을 해석할 여력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용서를 빌뿐. 구슬은 입구에서 아슬아슬하게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맞아서 터진 엉덩이는 연신 씨근거렸다.
‘존나 좋아, 씨발….’
아무 것도 모르겠고 그저 아무렇게나 범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더 깊게 밀어 넣어주길 바랄 즈음, 두꺼운 성기가 예고도 없이 짓쳐들어오며 구슬을 안으로 콱 박아 넣었다. 넓히기 위한 용도로 쓴 게 분명한 바이브레이터보다 더 두꺼운 거근이 서하의 뱃속을 가득 채웠다. 뱃속이 꿰뚫리는 듯 극심한 압박감에 절로 팔다리가 곱아들었다. 적응은커녕 숨쉬기가 버거워 헉헉 대는 서하를 강제혁이 그대로 안아 일으켜 앉혔다.
“으윽…!”
두터운 강제혁의 허벅지를 지지대 삼아 다리를 벌려 앉은 서하가 안타까운 신음을 연신 터트렸다. 장기가 꽉 차도록 삽입된 거근이나 배려 없이 비벼지는 상처가 서하를 미치게 했다. 고통이 극심한 나머지 제혁의 팔뚝을 부여잡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그럼에도 두려운 것은 분명히 있을 음모가 닿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다 들어오지도 않은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었다.
“후, 씨발…….”
“하아, 학, 아…!”
짓씹듯 뱉어지는 강제혁의 욕설에 서하의 성기가 꺼떡였다. 목덜미를 씹는 치아의 느낌이 소름끼치도록 좋았다. 호칭을 따로 정한 적은 없었지만, 이 순간 서하는 강제혁의 도구나 다름없는 자신의 처지를 만끽하며 입술을 열었다. 강제혁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만 움직일 수 있으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주, 주인님, 아으으, 제발…….”
“하, 제발 뭐.”
강제혁은 그런 서하의 호칭이 마음에 드는 건지 뒷말을 추궁할 뿐이었다.
“사정하게 해 주세요…….”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끈덕지게 강제혁의 성기를 빨아 삼키고 있었다. 그 자극 때문에 링에 압박되어 검붉게 변한 성기가 괴사될 것만 같았다.
“아, 악, 허윽…!”
그러거나 말거나, 서하의 오금을 잡아 위로 당긴 강제혁이 성난 야생마처럼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콱콱 틀어박히는 성기는 위험한 흉기나 다름없었다. 서하가 히익하고 겁먹은 신음을 내질렀다.
“마, 망가져요. 주인님, 아, 하윽…!”
“안 망가져.”
“아, 아윽, 으, 흐, 아!”
차갑게 일갈하는 그가 오싹했다. 서하의 눈에서 두려움으로 인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강제혁이 이내 서하를 아예 엎어놓고 박기 시작했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소음이 셀 수 없이 이어지고 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한 서하가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링을 빼내고야 말았다. 그와 동시에 강제혁이 성기를 거칠게 박아 넣었고, 서하의 성기에서도 탁액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조여드는 구멍에 강제혁이 잇새로 욕설을 뱉으며 서하의 안에 파정했다. 고꾸라진 채 전신을 움찔대는 서하의 구멍에서 진득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네가 오늘 아주 죽고 싶지.”
“흐윽…….”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죄송, 해요. 흣…….”
시트에 떨어진 링을 손에 들고 흔들어 보이는 강제혁의 모습에 서하가 몸을 떨었다. 이미 엉덩이는 피가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구멍은, 부족했지만…….
“가슴 내밀고 다리 벌려.”
“…….”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경고하듯 으름장을 놓는 강제혁의 명령에 서하는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서하의 하얗고 단단한 허벅지가 넓게 벌려졌다. 그의 말대로 맞을 곳이 많기는 했다. 그리고 매보다 먼저 두꺼운 딜도를 드는 강제혁이 보였다. 그 역시 서하가 바라던 바였다.
***
“읏, 따가워…….”
퉁퉁 부은 젖꼭지며, 화끈거리다 못해 얼얼한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까지. 서하는 만족스럽지만 불만족스럽기도 했다. 여운에 취해 그저 잠들고 싶은데, 후처리를 해야 한다며 강제혁이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안에 싸지른 정액을 굵은 손가락으로 긁어내고 상처 부위에 연고를 발라주는 강제혁은 아무리 봐도 플레이 때 보았던 모습과 격차가 너무 컸다. 그 밤에도 분명 뒤처리를 해주긴 했지만 맨정신으로 마주하자 더 낯간지러웠다.
“가만히 좀 있어요. 덧나면 더 오래 가요.”
“괜찮은데…….”
“어디 또 따가운 데는 없어요?”
생각보다 더 다정하네. 아마 그때는 제가 뒤늦게 더 취기가 오른 탓에, 이런 과정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강제혁은 이런 행위가 아주 익숙해보였다. 살이 쓸린 곳은 전부 약을 발라준 탓에 겨우 씻은 몸이 다시 끈적해졌다.
“갑자기 어떻게 왔어요?”
“먼저 연락 안 하길래, 금요일 밤이라도 한가할 것 같아서.”
서하가 새삼 궁금했던 것을 물었더니 팩트폭력이 날아왔다. 사실이었으나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바쁜 사람입니다.”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조금 화가 나서 기분 나쁜 걸 티내며 바쁘다고 강조해보았지만, 강제혁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바빴으면 거절했겠지.”
“왜 자꾸 반말해요.”
“존대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러고.”
아니, 그건 아닌데. 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플레이 중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존대를 하는 게 도리에 맞았다.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서하가 의아해하는 사이 강제혁이 연고의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플레이는 어땠어요?”
아예 존대로 물어오는 질문에 서하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어땠냐니.
“조, 좋았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체크해준 표 보고 참고해서 한 건데. 다음엔 야외에서 할까요?”
“읏…….”
케인 자국이 선명하게 난 엉덩이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야릇했다. 야외 플레이에 파란색 표시를 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강제혁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던 서하가 입술을 씹다 겨우 질문을 내놓았다.
“강제혁 씨는 표 작성해서 나한테 안 줍니까?”
아주 의외라는 강제혁의 표정에 서하가 눈을 내리 깔았다. 눈을 마주치는 게 영 민망했다. 하지만 저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중이었다. 너만 알면 땡이야? 하는 마음.
“알고 싶어요?”
“서로 좋아야죠.”
“이서하 씨랑 거의 같아요. 이서하 씨 노란색이 나한텐 파란색이라는 것 정도.”
연하한테, 그것도 제가 가르칠 학생에게 저런 식으로 불리는 건 꼰대 이서하에게 기분이 나쁠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사실 꼰대가 아니었나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하지만 사람을 바꿔 이름 모를 학생이 제게 하대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좆같아졌다. 꼰대 맞는 것 같다.
“취향이 맞으니 아주 다행이죠.”
“그, 그렇네요.”
“이서하 씨 빨간색이 파란색인 것도 있어요. 나도 원래는 빨간색이었는데.”
그 말에 서하가 눈을 크게 떴다. 파란색이면 즐긴다는 건데, 원래 빨간색이었다가 파란색이 되었다니 대체 뭘까. 무엇보다 지나치게 하드한 건 무서웠다. 제가 노란색이라고 체크한 것도 그에겐 파란색이라니, 그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 같아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뽀뽀. 키스 뭐 이런 거.”
“네?”
“하면 안 되나.”
표 하단에 존재하던 단어들이었다. SM 플레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한 것들. 서하는 그것들에 단호하게 빨간색 형을 선고했었다. 자꾸 웃어 보이는 강제혁의 얼굴에 서하가 시선을 피했다.
‘왜 자꾸 웃어. 정 들게.’
서하가 경계심을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강제혁은 그런 서하를 가만히 보다 툭 가볍게 말했다.
“싫음 말고요.”
“아니…….”
강제혁은 아예 턱을 괴고 심드렁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었다.
‘이만 가줬으면 좋겠는데.’
서하는 더 말을 잇기가 어려워 시트만 내려다보았다. 강제혁도 말이 없었다. 차라도 대접해야 하나. 어색한 침묵이 꽤 긴 시간 이어졌다. 서하는 강제혁과 첫 플레이를 했던 그 밤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그때는 제가 기절했고 일어나자마자 도망쳤으니 사후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앞으로 자주 연락할 것 같은데 어쩌지.”
문득 들려온 조금 난처한 듯한 강제혁의 목소리에 서하가 움찔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말이 더 빠르게 튀어나왔다.
“하세요.”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할 것을 걱정했던 것과는 판이한 대답이었다. 자주 연락해주었으면 좋겠다.
“너무 바쁠 때 말고…….”
그런 스스로가 조금 창피하게 느껴진 서하가 말을 덧붙였다. 30년 만의 욕구를 해소시켜준 상대가 아니던가.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이서하 씨도 연락하세요. 너무 바쁠 때 말고.”
화답하듯 나온 강제혁의 대답에 뭔가 영 민망해졌다. 아마 아직은 낯선 행위 때문인 듯했다. 플레이가 끝났다는 걸 아는데도 그가 하는 말은 어떤 힘을 가진 것처럼 서하를 구속했다.
그리고 서하가 걱정했던 것이 우습게, 강제혁은 연락하라는 저 말을 끝으로 3분도 되지 않아 집 밖으로 나갔다. 교수님과 중국에 답사를 다녀왔을 적에 사 둔 보이차라도 꺼내야 되나 걱정하던 차였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맞은 곳과 별개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를 부른다.
‘비밀번호 바꿔야 하나.’
하지만 그것도 어쩐지 귀찮아졌다.
“피곤해…….”
지나치게 노곤한 느낌에 서하가 그대로 침대에 파묻혀 눈을 감았다. 강의 준비는 내일 하면 될 일이다. 너무 피곤했다. 그도 그럴게, 두 시간 동안 꽤 체력이 소모되는 일을 하지 않았던가. 혼자 할 때는 해봤자 스무 대 안팎의 매질과 짧은 삽입자위를 했으니,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피곤할 수밖에. 제 안을 거칠게 쑤시던 강제혁의 낯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렇게 잠든 지 20분 정도 되었을 때, 현관문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서하를 깨웠다. 이 밤에 대체 어떤 새끼야……. 짜증이 잔뜩 서린 얼굴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서하가 현관으로 향하다 허전한 아랫도리에 헛숨을 삼켰다. 알몸이었다. 서하는 부랴부랴 헐렁한 티셔츠와 편한 바지를 걸쳤다. 무릎이 늘어난 바지가 우스웠다. 속옷은 굳이 입지 않았다. 그것까지 걸치기엔 엉덩이가 너무 따가웠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그 사이 초인종은 세 번 가량 더 울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라고 말을 하면서도 내심 강제혁이 다시 온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막차가 끊겼을 테니 학생인 그라면 자고 갈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면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터였다. 제가 가르쳐주었으니까. 그리고 현관 앞에 서 있는 건 김산이었다.
“선배?”
“…서하야.”
술기운이 진하게 어린 목소리가 서하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저릿한 느낌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건 서하가 지난 십 년 동안 상상하던 어느 한 장면이기도 했으니까. 술에 취한 김산이, 저를 찾아와 낮게 이름을 부르는 장면.
플레이의 여운으로 조금 흐트러졌던 정신을 바로잡은 서하가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선배 술 마셨어요?”
이건 꿈이 아니었다. 엉덩이에 남은 진한 통증이 현실임을 자각시켜주고 있었다. 서하가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제 앞에 선 김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리고 김산이 아직 밖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서하가 겨우 옆으로 비켜섰다.
“일단 들어오세요. 밖에 추운데.”
“미안.”
숨을 뱉을 때마다 술냄새가 진하게 번진다. 말술에 술고래로 알려진 그가 저렇게 될 정도로 술을 마셨으니 분명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긴 것이리라. 서하는 찜찜한 마음을 한편에 접어 두고 김산을 뒤로 한 채 먼저 주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차 대접은 강제혁 대신 김산이 받을 모양이었다.
“찬물 드려요?”
“응. 고마워.”
김산은 소파에 걸터앉아 넥타이를 풀어 젖히고 있었다. 답답한 모양이다. 서하가 정수기에서 얼음물을 받아다 김산의 앞에 내려놓았다. 탁 하는 소리가 조금 크게 울렸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요? 으, 냄새.”
“이서하, 또 까불지.”
무슨 술을 저렇게 무식하게 마셔. 서하는 그의 낮은 꾸중에도 예전 같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플레이 직후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씻고 자요. 제 방에서,”
손가락으로 코를 막은 서하가 김산을 침실로 보내려다 잠시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 강제혁과 진득하게 플레이를 했던 곳이다. 너무 피곤한 탓에 시트를 갈지도 못해서 축축한 부분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김산을 재울 수는 없었다.
“…자면 침대에 냄새 밸 것 같으니까 거실에서 주무세요.”
“뭐?”
졸지에 냄새나는 쓰레기 취급을 당한 김산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원래 서하는 말투에서 싸가지가 다소 결여되었을지언정 선배한테 깍듯한 인간이기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꼰대라 그런지 윗사람한테 잘 하기도 했고. 어쨌든 평소와 뭔가 다른 서하의 태도에 김산도 놀라고 만 것이다. 다른 후배들 같았다면야, 먼저 말하기도 전에 소파에 자리를 잡았을 테지만, 어쩐지 술기운이 오르니 반발심도 생기고. 김산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서하의 손목을 덥석 잡고 물었다.
“너 내가 더러워?”
“선배, 저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겨우 그 정도 사이밖에 안 됐어?”
바깥에 있다 왔음에도 집안에 있던 저보다 더 뜨거운 김산의 체온이 서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반쯤 풀린 김산의 눈을 도저히 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서하야.”
자극이 덜하다 해도 그가 저를 이렇게 부르면, 저항하는 게 너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형 서운하려고 해.”
얼굴은 가깝고 어두운 눈동자는 저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고, 낮은 목소리는 저를 짓누르는 듯하다. 설상가상 플레이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 괜히 더 그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만 같다.
“이서하. 대답해야지.”
김산이 큰 손으로 서하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척추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선배….”
서하가 김산을 부르며 입술을 얕게 떠는 사이,
“우욱…….”
김산이 바닥에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말릴 새도 없는 순간의 일이었다.
***
“아오, 씨발…….”
아닌 밤중에 청소에 빨래까지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니 서하의 입에서 욕설이 터지는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좌절할 새도 없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하는 재빨리 김산의 옷을 벗겨 욕조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구토가 묻은 옷을 차마 제 세탁기에 넣을 수 없어 대야를 꺼냈다. 이 밤에 손빨래라니. 심지어 걸레질도 해야 했다.
“죽을 것 같아…….”
설상가상 허리는 휘어질 것 같고, 엉덩이며 젖꼭지가 엉망진창이다. 목욕 의자에라도 앉고 싶은데, 엉덩이가 아파서 차마 앉지도 못하겠다. 그런 제 사정도 모르고 김산은 욕조 안에서 팬티만 입은 채로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 빚은 꼭 받아낼 것이다.
“…진상이지, 저게.”
서하가 김산을 노려보며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셔츠와 바지를 쥐어짰다. 야밤에 세탁기를 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토사물 묻은 옷가지를 방치하기는 더 싫었다. 제가 아무리 더럽게 살아도 이건 아니다. 겨우겨우 서하가 거실 걸레질까지 마치고 허리를 일으켰을 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선배, 일어났어요?”
샤워기를 틀어놓은 김산이 드라마 남주인공마냥 뜨거운 물을 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와중에 팬티까지 벗은 게 기가 찼다. 서하는 그토록 친하게 지냈음에도 생전 처음 본 김산의 성기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모양 좋게 잘빠진 성기가 술기운 탓인지 반쯤 서있었다. 설상가상 물에 흠뻑 젖은 김산은 전에 없이 섹시했다.
“씨, 씻고 나오세요.”
“같이 씻어.”
김산이 술 취한 이 답지 않은 단정한 발음으로 서하를 붙잡았다. 서하는 이 순간 제가 김산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색기 없이 담백한 제안에도 심장이 벌벌 떨리지 않는가.
- 형 결혼할 것 같다.
그런 서하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다시금 귓전에 울렸다. 접어야 할 마음이었다. 진지하게 짝사랑했다면 또 모를까. 그는 곧 결혼을 할 테고, 저는 제 취향을 접으면서까지 그에게 매달릴 만큼 절실하지도 않았다.
“뭘 같이 씻어요. 다 큰 성인이.”
“다 큰 성인인 내가 너랑 같이 씻고 싶어서 그러는데.”
피식 웃는 모습이 취한 게 분명했다. 농담 한 번 좆같이 하네. 서하는 김산이 저러다 자빠질까 무서워 나가지도 못하고 뒤돈 채로 서 있기로 했다.
“서하야.”
“왜요.”
“너 요즘 왜 이렇게 차가워?”
서하는 김산의 투정에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강제혁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서하는 김산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새삼 놀란 것은 오히려 서하였다. 지난 10년 간 서하는 김산을 반찬 삼았기 때문에, 그리고 유일하게 친밀한 사람이라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먼저 연락해 그를 만나곤 했던 것이다. 김산이 서하의 이런 변화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잠시 서하의 대답을 기다리던 김산이 젖은 낯으로 서하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 순간에도 서하는 그의 성기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채였다. 아무리 변태라도 양심이 있지. 사실은 계속 보다보면 강제혁의 것과 크기를 비교하게 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었다.
“형이 결혼할 것 같다고 해서 그래?”
“무슨 소리예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결혼을 할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에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서 충동적으로 강제혁을 만났다. 그리고 일회성이었던 만남은 플레이 파트너가 됨으로써 지속성을 띠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를 생각할 시간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형 결혼하는 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서하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내놓은 말에, 이번에는 김산의 심기가 상했다. 저 예쁜 입에서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 무척 거슬렸다. 서하는 모르겠지만, 김산은 서하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멀끔하니 잘빠진 곱상한 얼굴로 아무 것에도 관심 없는 듯 구는 주제에, 제가 뭐라 말을 하면 곧잘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런 서하를 귀여워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서하가, 저와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저 나가볼게요. 씻고 거실에서 주무세요. 잠옷이랑 이부자리 준비해드릴게요.”
서하는 김산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서하가 나가면서, 찬바람이 시차를 두고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김산은 일순 서운한 마음이 든 것인지, 아니면 찬바람 탓에 몸이 추위를 느낀 것인지 알 수 없어져 샤워기의 온도를 올렸다. 뜨거운 물이 정수리부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심란해진 서하는 결국 잠을 설쳤다. 다행인 것은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자꾸 갈증이 일어 물이나 한 잔 떠먹으려고 거실로 나온 서하의 눈에 잘 개켜진 이불더미가 보였다. 김산은 언제 일어난 것인지, 거실 테이블 위에 작은 쪽지만 남겨두고 사라진 채였다. 서하가 결코 예쁘지 않은 모양새로 찢어진 종이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서하야, 어제 미안했어. 형 오늘 가족모임이어서 인사도 못 하고 간다. 이걸로 밥 챙겨 먹어.」
오만 원짜리 한 장이 쪽지와 함께 놓여있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오밤중에 빨래한 인건비치고 큰 건지 아니면 적은 건지. 한숨이 픽 새어 나왔다.
“잠이나 더 자야지.”
일어난 김에 시트도 좀 갈고 탈취제도 뿌렸다. 막상 제 잠자리는 피곤해서 대충 뭉개 잔 것이 뒤늦게 후회됐다. 폭신하고 시원한 이불 속에 누운 서하가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필요한 수면시간은 전부 채워진 건지 눈만 감으면 어제의 자극적인 플레이와, 이상했던 김산이 동시에 떠올랐다. 둘 중 하나만 떠오르면 그나마 낫겠는데 무의식은 제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뭐 이래.
“아, 짜증나…….”
한참 뒹굴 거리던 서하는 김산이 어제 왜 술을 마셨는지에 대해 추론하기까지 이르렀다. 물어봤어야 했는데. 어제 분위기가 영 이상해서 그마저 안 됐다. 메시지라도 보내볼까. 김산에겐 받아낼 빚이 있었으니 제 기분대로 연락해도 될 것 같았다. 결심을 마친 서하가 휴대폰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강제혁의 메시지였다.
‘언제 보낸 거야.’
바로 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갖고 싶은 도구 없어요? 쇼핑할 건데 참고하려고.」
「아직 자나.」
「아침 먹고 자요.」
이것도 명령 같은 건가. 이상하게… 귀여운데. 서하는 메시지를 가만 쳐다보다 홀린 것처럼 일어나 시리얼을 우유에 말았다. 그리곤 확인이라도 받듯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전송했다.
「시리얼 먹으려고요. 무슨 도구요?」
서하가 잘 말아진 시리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기도 전에 답장이 도착했다.
「무슨 도구겠어요. 이서하 씨한테 삽입할 거, 아니면 이서하 씨 엉덩이 때려줄 거지.」
요새 애들 타자 빠르네. 서하는 조금 노인 같은 생각을 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강제혁이 저와의 플레이에 쓸 도구를 사려는 중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근데 웬만한 건 다 우리 집에 있을 것 같은데…….’
버는 족족 SM용품에 탕진했던 대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얼마 벌지도 못 했는데. 대학원생 연봉은 60만원이라는 농담이 있지 않나. 여하튼 그것 때문에 아르바이트에 조교 일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쥐꼬리만한 돈이라, 기본적인 아이템이라고 할 만한 것밖에 못 갖추긴 했다. 원체 비싸야지. 더군다나 도구라는 게 혼자선 쓰기 힘든 것도 많았다.
“얜 나이도 어린 게 돈도 많은가 보네.”
서하가 시리얼이 녹아 달콤해진 우유를 마시며 답장을 고민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사려고.
「강제혁 씨 좋은 걸로 사세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서하가 설거지를 마쳤을 무렵, 강제혁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그 말 후회하지 말아요.」
후회 좀 해보면 좋겠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학교에서 강제혁을 만난 서하는 토요일에 그 메시지에 코웃음을 쳤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