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엔저와 헤리엇이 현재 머무는 곳은 0구역인 수도의 중앙에 있는 저택이었다. 3층짜리인 데다 정원이 있고, 차고가 정원만큼이나 넓었다.
방은 손님방까지 전부 합치면 여덟 개, 욕실을 포함한 화장실이 총 세 곳이어서 두 사람이 살기엔 많이 넓은 편이긴 했다. 정원에 자리한 커다란 나무는 저택을 지켜 주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정원 안의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헤리엇은 그곳에서 차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새끼 고양이를 만났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 점박이가 박힌 털의 고양이는 엄청 사납게 굴면서도 헤리엇이 정원에 나와 멍하니 앉아 있으면 소리 없이 다가와 발치에 앉아 야옹야옹하고 울었다.
그 귀여운 모양새에 헤리엇이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으면 이빨을 드러내거나 홀랑 도망을 쳤다. 결국, 헤리엇은 새끼고양이를 만지려던 걸 포기하고 밥만 챙겨 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무릎 위에 올라와 앉았다. 그러나 그때도 헤리엇은 만지지 못했다.
사람보다 더 다루기 힘든 작은 새끼 고양이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헤리엇은 그날 자신에게 안겨 오는 거대한 고양이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고양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칠한 것 같아.”
시무룩한 헤리엇의 모습에 엔저가 대답했다.
“고양이들도 다 성격이 제각각이니까요. 그 녀석의 성격이라고 생각하세요, 선배.:
생각해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헤리엇은 무릎 위에 올라 온 고양이를 가만히 놔두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반복되는 일상 중에 어느 날 안쉘이 저택을 방문했다. 헤리엇이 저택 밖을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안쉘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었다.
“헤리엇 님, 계속 집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으니 밖에 한 번 돌아다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자 멍하니 있던 헤리엇의 입이 열렸다.
“엊그저께 영화를 봤어.”
안쉘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길 바라는 눈빛으로 헤리엇을 쳐다보았다. 그래 봤자 그 모습을 신경 쓸 리 없는 헤리엇이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정말 멋있던데, 안쉘.”
“아, 아아아! 아아악!”
헤리엇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안쉘은 괴성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쪼그려 앉았다. 대통령으로서의 위엄과 체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꼴이었다.
헤리엇은 그가 주저앉은 바람에 흔들리는 찻잔을 재빠르게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안쉘이 비통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 그걸 보셨습니까!?”
“응. 엄청나게 홍보하고 있던데.”
안쉘은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다고 소리 지르며 온몸을 흔들어 댔다. 얼굴이 벌겋게 변하다 못해 거무죽죽하게 된 걸 보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아 보였다.
헤리엇은 가냘프게 떨리는 안쉘의 어깨를 멍하니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역시 엔저가 아니면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게 어려웠다.
“잘생겼던데 왜 그래.”
“그건 배우가 잘생겨서 그런 거고요…….”
안쉘의 얼굴이 끔찍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창백해졌다. 헤리엇은 그제야 안쉘이 이렇게 발버둥 치며 괴로워하는 이유가 엊그제 개봉한 영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해서 본 영화는 놀랍게도 안쉘을 모티브로 한 것이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소년이 부모님의 죽음을 계기로 세계를 구하기 위해 대통령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전반적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액션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심지어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장면도 있어 평이 좋았다.
안쉘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이제 막 성인이 된 남자 배우로 요즘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인기 스타였다. 심지어 앤을 모티브로 나온 캐릭터는 성격이 까칠하고 매서운 인어 여왕으로 인간과 대립하여 싸우는 진취적인 인어로 묘사되었다.
앤의 역할을 맡은 20대 후반의 단발머리 배우는 인어의 푸른색 머리카락을 표현하기 위해 염색을 했다가 머릿결이 엄청 상해 밀어 버리고 푸른색 가발을 쓴 채 연기를 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리고 엔저 맥과이어는 노인으로, 헤리엇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30대 중반의 청년으로 나왔다. 하지만 등장하는 장면이 매우 적어 엑스트라나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 안쉘은 현실과 다르게 자신만만한 야망 있는 남자 주인공이었다. 게다가 운도 따라 단테의 저열한 계획을 우연히 알게 되고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인물로 나왔다. 늙은 권력가의 위험한 야망을 저지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건다. 그렇게 평범했던 소년은 결국 동경하던 대통령이 되었다.
영화를 본 안쉘의 측근들은 ‘…각하의 인지도가 높아졌으니 잘된 것 아닙니까.’라면서 상사의 비명 섞인 울부짖음을 무시했다. 확실히 영화가 개봉된 이틀 사이에 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제 꿈은 얇고 길게 돈이나 벌면서 사는 거였지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전 영화 속 인물만큼 정의롭지도 않고요…….”
헤리엇은 괴로워 보이는 안쉘의 등을 토닥이며 힘내라고 달래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위로랍시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진짜인 것도 있던데. 감독이 사전 조사를 많이 했나 봐.”
“고려인 그 입 싼 놈 짓입니다.”
안쉘은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영화가 나오기까지 안쉘의 의사는 1%도 반영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쉘이 대통령이 된 후 의도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려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언론과 문화예술산업 부문이었다.
단테가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였다. 그는 그것으로 인어를 학살하자는 여론을 쉽게 형성해 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던 안쉘은 그쪽 산업이 하는 일만큼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선택이 지금 자신을 이렇게 수치스럽게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무척 잘생기고 어린 배우라는 것도 수치스러움에 한몫했다. 안쉘도 예민하게 생겼지만 나름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가 고수하는 2대8 머리와 두꺼운 안경은 그의 외적 장점들을 모두 상쇄시켰다.
그 배우가 2대8 머리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영화 속의 안쉘은 실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안쉘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게 괴로웠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젊은 나이임에도 악착같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올라간 그를 많은 이가 위인처럼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안쉘의 측근 중 한 명은 영화관에서 기립 박수까지 치며 눈물을 터트려 안쉘을 두 번 죽였다.
“그래도 엔저가 이렇게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건 좀 아쉽네.”
“아무래도 제가 주인공인데, 엔저 대령님 역에 젊고 잘생긴 미남 배우를 쓰면 주인공의 인상이 약해지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대령님보다 더 잘생긴 배우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고요. 저는 상관없었지만!”
안쉘은 다시 차오르는 수치심에 비명을 지르며 눈물 흘렸다. 헤리엇은 안쉘의 새로운 팬들이 이 모습을 보면 조금 실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별말 하지 않고 멍하니 그 모습만 구경했다.
안쉘이 옆에서 죽어 가는 소리를 하든 말든 창문 너머로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불청객이 찾아왔다.
야옹-, 냐-.
“…응?”
훌쩍훌쩍 울다 말고 안쉘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앞발로 테라스 유리창을 탁탁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헤리엇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안쉘도 헤리엇의 뒤를 졸졸 따랐다.
“고양이입니까?”
“응.”
“헤리엇 님께서는 정말 동물을 좋아하시는군요.”
“좋아. 귀엽잖아. 그리고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
“…….”
헤리엇이 테라스 문을 열어 주자 집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헤리엇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던 고양이는 단숨에 주방에 있는 테이블 위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안쉘이 마시던 커피 잔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리다가 헤리엇을 쳐다보면서 ‘야옹’ 하고 울었다.
그 모습을 본 헤리엇은 부엌 선반에서 고양이 사료 봉지를 꺼내 그릇에 담아 고양이의 앞에 놓아 주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고양이는 사료 그릇에 머리를 처박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는 앉아 있는 헤리엇에게 다가와 무릎 위에서 한참 동안 골골거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왔던 것처럼 테라스를 통해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키우는 아이입니까?”
“아니. 가끔 오기에 밥을 주고 있을 뿐이야.”
헤리엇의 온화한 목소리 덕분에 방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많은 수치심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안쉘은 시간을 확인하고 탄식을 흘렸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헤리엇 님,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시면 제게라도 연락해 주시고…….”
신발을 고쳐 신고 매무새를 정리한 안쉘이 이어 말했다.
“곧 국립묘지 개방일입니다. 제이든에게 인사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돌아오셨을 땐 개방하는 시기가 막 끝난 참이라 인사도 못 하셨으니까요.”
“아… 그래.”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안쉘은 뭔가 불안한지 계속 뒤를 힐끔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대령님께서…….”
“엔저가?”
“뭔가를 헤리엇 님께 해 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어쨌든, 이만 가 보겠습니다.”
“???”
안쉘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윽고 그를 호위하는 여섯 대의 차가 일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제이든의 저택 차고가 커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집 앞 골목길에 검은색 세단들이 줄지어 서 있을 뻔했다.
* * *
안쉘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헤리엇은 그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로 향했다.
제이든의 육신은 차가운 바다 아래에 가라앉았지만, 영혼은 이곳에 묻혔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헤리엇은 당시에 시신 없는 무덤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한 번쯤은 이곳에 다시 와 보고 싶었다.
지금 엔저와 헤리엇이 머무는 제이든의 저택은 한때 그가 알시타와 살기 위해 직접 지은 집이라고 했다. 처음 저택에 들어갔을 때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어 사용할 수 있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알시타가 죽은 이후로 수십 년 동안 드나드는 사람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 제이든, 알시타와 함께 어린 헤리엇이 지낼 뻔했다. 하지만 제이든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헤리엇을 찾았을 땐 이미 보육원에서 실험실로 팔려 간 뒤였다.
그 이후, 제이든은 단테에 대한 복수와 알시타에 대한 그리움으로 버티고 살았노라 말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헤리엇은 제이든의 사고방식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이나마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립묘지 한편에 마련된 제이든의 묘는 나름대로 관리를 잘해 왔는지 주변의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깔끔한 상태였다. 이미 누군가가 왔다 간 듯 제이든이 생전에 좋아했던 하얀색 꽃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들고 온 꽃을 그 옆에 나란히 놓은 헤리엇은 잠깐 서서 5년 전을 떠올렸다. 그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엔저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엔저의 체온이 일시적으로 올라갔다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게 맞닿은 살결에서 느껴졌었다. 계속해서 차가워지는 그의 몸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무자비한 바다가 소중한 사람을 또다시 빼앗아 가려 했다. 헤리엇은 몹시 힘들고 지쳐서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이대로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아 버리면 더 편해지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품 안에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은 사랑스러운 엔저가 안겨 있었다. 헤리엇은 그가 죽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과 젊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헤리엇은 엔저를 품에 안고 쉬지 않고 헤엄쳤다. 원래도 엉망이었던 지느러미 끝이 너덜거리다 못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넓은 바다에 핏물 길을 낼 정도로 움직였다.
“죽으면 안 돼. 엔저… 살고 싶어, 너와 살고 싶어.”
헤리엇은 엔저에게 끊임없이 그렇게 속삭이며 울었다. 그 와중에 엔저가 잠깐씩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찾으면 미소 짓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헤리엇은 제이든, 알시타 혹은 다른 많은 사람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까무룩 기절한 헤리엇은 처음 보는 방 안의 침대 위에서 며칠 만에 눈을 떴다. 그곳은 동쪽 바다에 접해 있는 해변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의 커다란 집의 손님방이었다.
집주인은 머리카락이 희게 센 무뚝뚝해 보이는 노인으로, 그날 새벽에 혼자 해안가를 산책하다가 헤리엇과 엔저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와 치료해 준 것이었다. 그녀는 한 명 있었던 아들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혼자 살고 있었다. 과거에 군의관을 지냈던 경력을 토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사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가 엔저와 헤리엇을 데려와 치료하기 시작한 지 약 일주일 만에 헤리엇이 겨우 눈을 뜨게 되었다. 둘 다 상태가 심각했지만 특히 헤리엇은 사경을 헤맬 정도로 위독했기에 그가 엔저보다 먼저 일어날 줄 몰랐다고 말했다.
핵을 정통으로 맞은 충격으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성인 남성을 끌어안고 헤엄쳤으니 제아무리 헤리엇이여도 멀쩡할 리 없었다. 은퇴한 노령의 군의는 헤리엇의 왼쪽 무릎을 살피며 말해 주었다.
“이 다리는 다신 걸을 수 없을 거요.”
왼쪽 다리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헤리엇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헤리엇보다 사흘 늦게 눈을 뜬 엔저의 상태도 심각했다. 한쪽 눈에 큰 상처를 입고 얼굴의 반을 붕대로 칭칭 감았다. 상처가 낫고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될 때까지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었다.
엔저는 처음에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아직 전란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헤리엇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에 결국 연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늙은 군의관의 집에서 몇 년 동안 신세를 졌다. 몇 번씩 기회를 보아 금전적으로 사례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죽은 제 아들이 생각난다며 몸이 회복되고 나면 가끔 마을 사람들을 돕는 걸로 족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 이후에 상태가 점점 더 호전되고 집 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헤리엇은 1층의 넓은 복도에서 커다란 가족사진을 담은 액자를 발견했다. 무뚝뚝하지만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헤리엇이 사진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 노인이 다가와 설명하듯 중얼거렸다.
“전쟁에서 죽었지. 착했는데 하필이면 능력자였던 거야.”
노인은 슬프거나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평소 그녀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감정이 결여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헤리엇은 그녀의 모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헤리엇과 엔저는 오랜 시간 그녀의 곁에서 일을 도왔다. 그녀는 이 작은 마을의 유일한 의사였기에 이따금 마을 사람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왔었다.
헤리엇과 엔저는 그런 그녀를 도와 산에서 약초를 채집하거나 집 뒤쪽에 있는 텃밭에서 일했다. 밭에는 레몬이나 바질 같은 허브들을 주로 키웠는데, 헤리엇과 엔저가 온 이후에는 구황 작물들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헤리엇은 그녀의 아들을 죽인 것이 본인이라는 사실을, 4년 정도 그녀와 살았을 때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동쪽 바다에서 죽은 군인 중 한 명이 바로 내 아들이야. 멍청한 놈. 괜찮다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하더니.”
그녀의 목소리에는 작은 물기가 섞여 있었다. 그때 헤리엇은 난생처음으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는 여태까지 그날 죽은 이들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죽은 이의 가족과 대면하자 헤리엇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졌고, 가슴이 답답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힘을 주체하지 못한 자신이 죽여 버린 사람들에게도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터였다. 그건 누군가에게 배웠다기보다는 자신과 엔저의 생명을 구해 준 소중한 사람을 통해 자연스럽게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엔저는 혼란스러워하는 헤리엇의 옆에서 말없이 손을 꼭 붙잡아 줄 뿐이었다.
그리고 일 년 뒤인 5년 째 되는 날, 헤리엇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이 저예요.”
헤리엇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항상 짓고 있었던 미소는 사라진 상태였다. 헤리엇의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네가 죽인 게 아니야. 전쟁이 죽인 거지.”
아침으로 빵을 구우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등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쟁이 끝나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많은 사람이 죽었고, 내 아들은 그중에서 운이 없는 축이었던 거지. 네 탓도 그놈 탓도 아니야. 전쟁이 나빴을 뿐이었어. 잔혹하기만 하고.”
전쟁이 끝난 뒤, 이제 능력자들은 강제로 징병 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전쟁 없는 일상을 되찾기 위해, 인어들은 인간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인간과 인어 간에 타협점이 생겼다고 할 만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새로 생긴 30구역에 관한 소식이었다.
전에 인어를 보호하기 위해 안쉘이 새로운 마을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들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밀이었고 숨어 있는 헤리엇과 엔저가 그 진행 상황까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외딴곳에서는 아무리 중요한 소식이라도 전해지는 것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마을 주변 동식물을 돌보며 재활을 이어가던 중 속보로 뜬 뉴스로 해당 소식을 접했다.
- 안쉘 리 대통령, 인어들을 위한 30구역을 개방.
그제야 그들은 안쉘이 정말로 해냈다는 걸 깨달았다. 인어를 위한 마을을 만들고 그곳을 개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지상의 인간들도 인어가 바다에서만 살 수 있는 종족이 아니고 육지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인어도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인어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도 ‘능력’으로 치부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당장 많은 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도 언젠가는 당연하게 여겨지리라.
그날 헤리엇과 엔저는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헤리엇이 노인에게 이제 떠나야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오히려 무덤덤하게 인어 마을을 확인하러 가냐고 물어 왔다. 헤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엔저 맥과이어잖아.”
그녀는 엔저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두 사람이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쉬움 반, 후련함 반을 마음속에 담은 채 두 사람은 5년 동안 지냈던 마을을 뒤로하고 30구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헤리엇은 전쟁이 낳은 비극의 산물을 보고 듣고 마음속으로 느끼고 배웠다. 그는 영화에서 나오는 영웅의 모습이 마냥 거짓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일을 벌이는 건 쉽고 싸움을 거는 것은 편하다고, 하지만 평화를 이루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그 말처럼 종전이라는 건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쉘은 그 일을 해냈다. 전쟁도 끝내고 인어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었으며 인간과 인어가 공존할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시작은 영화처럼 위대하지 않았을지라도 역사는 안쉘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 것이다.
제이든의 묘 앞에 서서 한참을 상념에 빠져 침묵하던 헤리엇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이든. 고마워. 당신이 날 위해 준비해 놓은 것들을 다 봤어.”
제이든이 물려준 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 저택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2층 방에는 먼지로 가득한 어린아이용 침대가 놓여 있었고, 양옆으로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낡은 선물꾸러미들이 있었다. 제이든이 알시타를 위해 지었다지만, 저택 구석구석 어린 헤리엇을 위한 물건들도 가득했다.
그날, 헤리엇은 지금 이 순간 제이든이 살아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주변에는 그에게 아들을 잃었지만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기 손주도 알아보지 못하고 잔혹한 짓을 행했던 미친 늙은이도 있었다. 또 아들의 힘이 두려워 죽음을 위장해 숨기려고 했던 사람도, 평화를 사랑하는 남자를 목숨 걸고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헤리엇은 엔저가 보고 싶었다.
* * *
제이든에게 짧게 작별 인사를 한 헤리엇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엔저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통화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어졌다.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발장에 실내화 대신 엔저의 신발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헤리엇은 빠른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갔다. 1층의 침실 문을 열었지만 그곳에 엔저는 없었고 침실과 이어진 드레스 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헤리엇이 들어오는 소리를 엔저도 들었는지 그가 드레스 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선배.”
“엔저, 내가…….”
하지만 헤리엇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살짝 벌렸다. 그는 드물게 당황하는 표정을 드러내며 엔저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처음 보는 헤리엇의 모습에 엔저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애정이 잔뜩 섞인 빛을 담은 눈동자로 엔저를 보던 헤리엇은 5초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대답했다.
“정말 완벽하구나… 너무 근사하고 멋져.”
정말 놀랍게도 엔저는 장교복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구해 온 건지 시골 마을에 있는 헤리엇을 찾아왔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장교복에 모자까지 아주 완벽했다. 머리를 쓸어 올려 모자를 쓰는 모습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헤리엇은 대체 저 아름다운 모습을 그때 당시엔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이렇게 근사하고 멋진 모습이라니. 엔저의 신체에 딱 맞게 제작되었는지 떡 벌어진 어깨에서부터 골반으로 이어지는 선이 예술 작품 그 이상이었다.
“오… 이건 정말… 엔저, 이건… 너무…….”
헤리엇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허둥지둥하는 꼴을 처음 본 엔저는 한층 더 근사하게 미소 지어 헤리엇의 넋을 더 빼놓았다.
엔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자신이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헤리엇은 손을 들어 목마른 사람처럼 엔저의 입술을 머금고 평소보다 조금 더 격렬하게 혀를 섞었다. 엔저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려 들어오는 헤리엇의 혀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입을 맞추며 서로를 강하게 껴안았다. 빳빳한 제복 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엔저가 헤리엇의 움직임에 맞춰 옷을 벗으려고 했다.
하지만 헤리엇이 단추를 셔츠 단추를 풀려는 손짓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을 더듬어 엔저의 왼쪽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섰구나, 엔저…….”
“네.”
“귀엽기도 하지. 언제부터?”
“선배를 본 순간부터요.”
헤리엇은 발기한 성기 때문에 돌출된 엔저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도 도저히 옷을 벗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엔저는 뭘 입어도 잘생기고 근사했지만 이런 모습은 너무나도 색달라서 낯설었다.
과거에 질리도록 봐 왔을 이 모습을 눈에 새겨 놓지 못한 게 너무나도 아쉬울 정도였다. 헤리엇이 엔저의 입술을 핥았다.
“제복은 어떻게 구했니?”
제복을 민간인이 구하거나 만들어서 입는 건 엄연히 불법 행위였다. 은퇴한 노장들에겐 기념처럼 주어지긴 했지만, 엔저의 제복은 이미 5년 전 늙은 군의관의 뒷마당에서 불타 없어졌을 터다. 작은 마을이긴 해도 혹시나 엔저의 정체가 들통날까 봐 일부러 태워서 없앤 것이다.
“안쉘에게 준비하라 했습니다.”
헤리엇은 그제야 납득했다. 자신들에겐 만만하지만 그래도 대통령인데 누가 국가 원수에게 사소한 불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헤리엇은 안심하고 엔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탄탄한 허벅지를 쓰다듬으니 그의 성기가 불쌍할 정도로 빳빳하게 섰다. 그것이 바지 속에 갇혀 있는 걸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지이익-.
서로의 헐떡이는 숨소리만 들리는 정적 속에서 지퍼 내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적나라했다. 그리고 헤리엇은 불쌍하고 늠름한 엔저의 성기를 밖으로 꺼내 주었다.
엔저의 성기는 굵기도 굵고 크기도 어마어마했지만, 헤리엇은 볼 때마다 이것이 정말 예뻐 죽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헤리엇의 시점에 한해서였다.
손가락으로 단단한 성기를 쓰다듬으며 장교모 속에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흐트러지는 광경을 마음껏 감상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성기를 쓰다듬다가 엔저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혀로 선단을 핥았다. 엔저는 그런 헤리엇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음…….”
“선배, 조금만 더 깊게…….”
엔저의 부탁에 헤리엇은 눈을 감고 성기를 목 안쪽까지 깊게 물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감각이었다. 숨이 막히고 턱이 아팠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엔저가 사정할 때까지 헤리엇은 그의 성기를 입에 물고 혀로 한참 애무했다. 입 안에 차오르는 정액을 삼킨 헤리엇이 고개를 들자 엔저는 답답했는지 장교모를 벗어서 옆에 놔두었다. 깔끔하게 올렸던 머리가 흐트러져서 몇 가닥이 내려와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고 좋아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엔저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헤리엇의 허리를 큰 손으로 지탱하며 천천히 그를 바닥에 눕혔다. 그런 엔저를 보며 헤리엇은 자연스럽게 다리를 벌려 그가 제 가랑이 사이로 들어오게 해 주었다.
“아… 좋아.”
그의 다리 사이에서 편하게 자세를 잡은 엔저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거침없이 헤집었다. 물기가 약간 생기긴 했지만 아직 빡빡한 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살짝 구부렸다.
그러자 헤리엇의 허리가 움찔거리며 공중으로 조금 떠올랐다. 엔저는 헤리엇의 단단한 복근을 한 손으로 누르고, 다른 한쪽 손의 손가락으로 내부 깊이 파고들었다가 천천히 다시 빼냈다.
“선배, 잠시만…….”
아무래도 이대로 넣었다간 헤리엇이 다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리엇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엔저의 제복 입은 모습을 봤을 때부터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안 돼… 이대로 하렴.”
“선배.”
“괜찮으니까, 빨리…….”
애가 타서 재촉하는 헤리엇의 모습은 평소의 우아하고 조용한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 간극이 엔저를 크게 자극했다. 결국 엔저는 손가락으로 거칠게 헤리엇의 안을 몇 번 들쑤시다가 참지 못하고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눈앞의 다리 아래를 끌어당겼다.
헤리엇의 몸이 순식간에 반으로 접혔다. 엉덩이가 위쪽을 보게 되는 상당히 민망한 자세였다. 헤리엇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엔저의 혀가 헤리엇의 구멍 입구에 닿았다.
“헉……!”
헤리엇이 작게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발가락이 움츠러들고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곧이어 헤리엇의 발목에 하얀 비늘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리가 지느러미로 변하는 건 아니지만, 땀과 흥분감으로 종종 다리에 인어 비늘이 돋기도 했다.
엔저는 헤리엇의 엉덩잇살을 붙잡고 양쪽으로 벌려 혀로 입구를 핥고 찌르며 자극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안쪽이 풀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자 이번에는 몸을 세워 헤리엇의 허리를 붙잡고 제 성기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아… 으윽, 뜨거워… 엔저.”
얼굴은 물론 귓가와 어깨, 가슴까지 붉은 꽃으로 물들인 헤리엇의 초록빛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밭은 숨을 내쉬며 엔저의 어깨를 잡고 매달린 헤리엇은 그의 성기가 안쪽 깊은 곳을 계속해서 찌르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그의 성기가 내장을 가르고 들어오는 느낌은 항상 헤리엇을 충족시키면서도 힘겹게 했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것은 너무 크고 단단하지만 내부가 녹을 것같이 뜨거워서 헤리엇은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엔저는 그런 헤리엇이 익숙해지길 언제나 기다려 주었다. 숨을 죽이고 그의 상태를 살피다가 숨결이 안정되었다 싶으면 손을 움직여 헤리엇의 성기를 자극했다. 이내 헤리엇의 복근이 위아래로 고르게 움직였다.
헤리엇은 숨을 몰아쉬다가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가만히 있자 엔저가 헤리엇의 골반을 붙들고 얼굴을 살폈다.
새하얬던 사람의 모든 것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엔저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했다.
허리를 움직여 느리게 성기를 빼낸 엔저는 말없이 숨만 헐떡이는 헤리엇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안으로 조금 더 깊게 삽입했다. 엔저는 그를 위해 느리게 움직인 것이겠지만, 받아들이는 헤리엇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이차는 감각을 선연하게 맛봐야만 했다.
작열하는 흥분감에 그대로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어떤 감각도 헤리엇에게 이토록 강렬한 것은 없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허리를 잡아 고정하고 점점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엔저의 육체가 헤리엇의 위에서 일정하게 움직였다. 머리카락은 더욱 헝클어지고 얼굴에 맺힌 땀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 헤리엇의 가슴에 떨어졌다.
“아… 흐윽. 아… 엔저.”
배가 눌리는 감각에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는 헤리엇의 괴로워하는 얼굴 위로 점차 쾌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헤리엇은 내벽을 자극하는 엔저의 성기에 허리를 비틀었다. 그 순간, 성기가 그가 가장 느끼는 부분을 귀두로 눌렀다가 깊게 안쪽으로 처박으며 긁고 지나갔다. 결국 헤리엇이 참지 못하고 사정하고 말았다.
탈력감에 팔을 늘어트리고 숨만 몰아쉬는 헤리엇은 어째 점점 더 몸이 민감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무기력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엔저는 아직 군복을 갖춰 입은 채였는데, 바지 지퍼만 내린 상태로 삽입하여 흔들어 댄 탓에 헤리엇의 하얀 피부가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옷감에 자극받은 피부가 상처 입은 것처럼 열을 내며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헤리엇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엔저에게 입술을 갖다 댈 뿐이었다.
헤리엇은 엔저가 이성을 잃으면 해 주는 말을 계속 기다렸지만, 아직 그 상태는 아닌지 강하게 허리를 부딪치면서도 그가 원하는 말은 해 주지 않았다.
“아… 음, 엔저… 엔저.”
함께 허리를 움직이면서 엔저를 애타게 부르며 팔을 들어 올렸다. 엔저가 헤리엇의 손을 붙잡으며 몸을 숙이고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쪽쪽거렸다.
“헤리엇…….”
엔저가 그 말을 한 순간 헤리엇은 또다시 사정하고 말았다. 엔저가 쾌감에 헐떡이며 정신없을 때만 불러 주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도 충족되는 쾌감에 허리를 공중에 살짝 띄우고 부들부들 떨었다.
엔저는 그대로 헤리엇의 어깨를 힘껏 붙들고 그의 가장 깊은 안쪽에 사정하며 깃털처럼 가벼운 하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엔저의 손에서 사르륵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이마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나의 인어.”
* * *
안쉘은 다짐했다.
다음 선거 때는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지.
이번에도 재선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대통령씩이나 되어서 재선에 도전해 보지도 않느냐는 국민들의 원성과 측근들의 읍소로 어쩔 수 없이 후보에 등록했고 당선이 되고 말았다. 인어와 관련된 일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한 번 정도 더 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다음에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안쉘은 속으로 한탄하며 안경을 슥슥 닦았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오늘도 정말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네.”
안쉘은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하의원과 악수했다.
‘이 사람도 그 영화를 봤을까…….’
저렇게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사람들에 대해 의심부터 하게 되어 버렸다. 영화로 본 영웅을 직접 보고 감동하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어딘가의 꿈나라에서 온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안쉘은 이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너무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다음엔 정말 재선이고 나발이고 대통령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선거라면 이제 치가 떨렸다. 그런데 과연 그때도 이 사람들이 안쉘을 놓아줄지가 의문이었다.
사람들의 존경 어린 시선에서 겨우 빠져나온 안쉘이 대기하던 차에 올라탔다.
“오전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까?”
운전석에 앉은 오드레에게 물으며 차 안에 구비된 물을 따라 마셨다.
“네. 상의원 회담은 오후 세 시부터 시작입니다.”
시간이 생각보다 넉넉하게 남았다. 이대로 집무실에서 눈을 조금 붙였다 나갈까 하다가 앤을 못 만난 지 벌써 사흘째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앤이 동쪽 바다로 가기로 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 또한 기억했다.
안쉘은 당혹스러워하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바쁘다고는 하나 먼바다로 떠나는 임을 배웅하지도 못했다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무척 서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심해로 들어가 버리면 무전기도 통하지 않아 앤이 먼저 연락해 오지 않으면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앤을 바다로 안 보낼 수도 없었다. 앤이 주기적으로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지속해서 더러워지는 바다의 정화 속도가 눈에 띄게 더디어졌다. 그래서 그는 해마다 몇 번씩 여러 바다를 돌아다니며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치 전설에서나 나오는 바다의 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안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요즘 인간들 사이에 앤을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여차하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안쉘은 뒷좌석에 앉아 두 손을 모아 입술을 가리고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앤은 정말 좋은 연인이고 이해심도 많았다. 가끔 엉뚱한 걸 빼면 모든 걸 안쉘에게 맞춰 주었다.
‘이러다 차이는 건 아닐까……!’
바다로 떠나면 몇 주 동안 연락도 제대로 못 하는데 그걸 홀랑 잊고 혼자 보내다니. 안쉘은 다시 소리 없이 발버둥 치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헤리엇 님 집으로 향해 주시겠습니까. 앤에게 받은 것을 전해 주는 걸 깜박했습니다.”
안쉘의 손바닥에는 작은 브로치가 있었다. 그것은 이제 더는 빛을 내지 못할 만큼 녹슬었지만 분명 헤리엇에게는 특별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달에 앤이 알시타가 머물렀던 동굴에서 우연히 찾은 것이라고 했다. 알시타가 마지막으로 착용했던 브로치는 무언가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영롱하고 아름다운 녹색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다른 부분은 다 녹슬고 상해 있어도 그 보석만큼은 빛이 바래지 않고 아름답게 반짝였다. 누군가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 정신없이 살다 보니 잊고 있었다.
* * *
헤리엇의 집은 수도에서 가장 좋은 입지에 자리해 번화가가 코앞인 곳이었다. 조금만 걸으면 영화관이나 대형 마트는 물론 백화점도 있었다. 해당 지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동네의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지은 3층 저택은 제이든이 고심에 고심을 더해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육중한 철문을 지나 정원을 가로지르던 안쉘은 인상을 팍 찡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염병, 들어가기 싫어지네!’
정원에서 엔저 맥과이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열중해서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라니!”
울부짖듯 소리치는 모습이 광기 그 자체였다. 왜 저런 염병을 떨고 있나 슬쩍 고개를 빼고 살펴보니 헤리엇의 무릎 위에 전에 보았던 고양이가 올라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헤리엇은 광기 어린 엔저를 보고 작게 웃다가 다시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을 응시했다.
저러면 눈부실 텐데.
“사색에 빠져 있는 모습도 이렇게 아름다우시다니… 선배. 사색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눈부십니다! 아아, 어떤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시는 겁니까?”
‘그냥 넋 놓고 있는 것 같은데…….’
지나가던 똥개가 봐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안쉘은 짜증이 나서 그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브로치만 얼른 전해 주고 가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멍하니 있던 헤리엇이 입을 열었다.
“엔저.”
“네, 선배.”
키우는 충견도 저렇게 빠르게 대답하진 못할 거다.
심장이라도 아픈지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릎까지 털썩 꿇고 꼴값을 떠는 엔저를 오랜만에 보니 옆에서 봐 주기가 힘들었다.
“이제 슬슬 선배에서 졸업하면 좋겠는데…….”
“…….”
“…….”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도 좋단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엔저의 얼굴을 보는 헤리엇은 맑은 하늘 아래에서 날씨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는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짓지 않았다.
.
.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받을 수 있을까.
누군가 그 아이를 맹목적으로 사랑해 줄 수 있을까?
배워야만 감정을 아는 그 아이에게 내가 없어도 환하게 웃는 법을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화상으로 짓무른 피부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흉측하게 타 버린 그는 지금 바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바다를 집어삼킬 정도의 화기에서 겨우 살아남은 그의 남은 인생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것도 곧 끝날 테지만.
알시타는 헤리엇이 감정이 결여된 아이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아들의 능력이 무섭기도 했다. 제 감정을 모르는 아이는 선악의 기준을 모른 채 아버지인 단테에게 좋을 대로 이용당할지도 몰랐다.
그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헤리엇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
‘헤리엇… 부디… 그 아이의 행복을…….’
알시타는 앤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 자신의 영혼을 새기려는 것처럼.
헤리엇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제 가슴팍을 더듬거려 브로치를 꺼내 앤에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화상으로 짓무른 손은 브로치를 꺼내다가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앤은 그때 슬픔에 가득 차 눈을 감고 있어 그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알시타는 눈을 감았다. 그제야 밤낮으로 그를 괴롭혔던 고통 속에서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제발 헤리엇이 행복하길 빌었다. 그리고 자신 없이도 제이든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안. 그건 잘 안 됐어…….’
눈을 감고 천천히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알시타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알시타, 행복하대.’
그 소리에 알시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극성인 놈을 만나서 아주 행복해 죽겠대, 알시타.’
화상으로 짓물렀던 손이 깨끗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와 가자. 보고 싶었어, 알시타.’
알시타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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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제 손에 들린 브로치를 한 번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옆에 서 있는 사내의 손을 잡았다. 검은 머리의 사내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고 두 사람이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