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29/30)

외전 1 

새하얀 눈이 수도를 덮쳤다. 4년 만에 내리는 폭설에 교통이 마비되었다. 안쉘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수도에 머물게 된 이후로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새하얀 누군가를 닮은 그것은 수도를 정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다. 안쉘은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행방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정보를 모으는 중이었다.

시간이 흘러 눈이 그치고 겨울이 지나갔다. 눈이 녹고 봄과 함께 5년 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두 사람이 찾아왔다.

*  *  *

“엔저 맥과이어가 살아 있다더군.”

누군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반문하며 혀를 찼다.

“어떻게 살아 있지? 분명 놈은 동쪽 바다에서 죽었을 텐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5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엔저의 소식은 언론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웅이었던 자의 귀환을 모두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어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지금, 그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공개된 엔저의 연인에 관한 소식에 대중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엔저 맥과이어는 과묵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가졌지만 어쨌든 잘생긴 미남이었고 지위, 가문 등 그를 이루는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대통령보다 인기가 많았던 시절, 엔저에게 쏟아지던 맞선 자리는 한때 한슨을 골치 아프게 만들 정도였다. 심지어 레이첼은 맞선 자리를 만들어 달라며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상대방의 엉덩이에 불을 붙여서 쫓아내 버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에게 공개 고백을 받았을 때마저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게 엔저였다. 그 당시에 귀찮게 구는 기자들을 능력으로 날려 버리고 부대로 복귀한 전적도 있었다.

엔저에게 유감이 많은 한 언론사에서는 엔저가 무성애자나 마찬가지고 인간을 상대로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 성애를 가졌다는 허무맹랑한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물론 어떤 논란도 엔저에게 티끌만 한 타격조차 입히지 못했으며 오히려 대중들은 그의 그런 모습에 열광했다. 평생 그에게 연인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 엔저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점차 기정사실이 되던 그때, 기적처럼 그가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동성 연인까지 숨기지 않은 채로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고 다른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했다.

엔저의 연인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파파라치에 의해 암암리에 퍼졌다. 일각에선 엔저 맥과이어 정도나 되는 인물이 몰래 찍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는 허용하겠다고 눈감아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왔다.

논란의 사진에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 찍혔지만 상대방의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엔저의 오른쪽 눈을 가린 검은색의 안대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전부였다. 사진 속이지만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혈색을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손이었다.

엔저는 그런 손길에 눈을 감고 무방비하게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편안한 미소를 띤 아주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과거 일상적으로 보여 주던 냉랭하고 무서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팔자 좋게 연애나 하고 있었다니, 우리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군!”

지금 이 장소에 모여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분기탱천하여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치이익.

그때, 어딘가에 불붙이는 소리가 나더니 담뱃불 하나가 어두운 허공에서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불빛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흉터로 잔뜩 뒤덮여 있었다.

“놈이 애인과 노닥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걸 이용하면 되겠군!”

그는 굉장히 낮고 무거운 분위기의 음성을 가진 사내였다.

“흥,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 분명 시답지 않은 녀석일 테지. 몰래 접근해 납치한 다음 엔저를 꾀어내는 거야. 그리고 본인의 능력으로 사지를 자르게 만든 다음 그 비참한 몰골을 찍어 모두에게 공개하는 거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에 있던 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얼굴도 모르는 놈을 어떻게 찾아가게? 그리고 무쉬, 자네는 지금 현상금이 걸려 있지 않은가.”

무쉬라고 불린 이는 이미 해결책을 갖고 있다는 듯 나른하게 대꾸했다.

“다 방법이 있지……. 우리 쪽 애들 몇 명이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정보를 물어다 줄 거야.”

무쉬는 코웃음을 치다가 문득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난 흉터들을 쓰다듬었다.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녀석의 얼굴도 똑같이 만들어 주고 말겠어.”

그들의 계획은 그렇게 짜이고 있었다.

*  *  *

안쉘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헤리엇은 안쉘이 여전히 2대8 머리와 촌스러운 안경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런 그도 5년 전에 비해 달라진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멍하면서도 곤란한 듯한 미소, 어느 순간에도 동요하거나 반응이 크지 않은 모습까지 여전했다.

“그러니까… 저를 찾아오던 길이었다고요…….”

안쉘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는 것을 겨우 누그러트리며 물었다. 헤리엇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엔저의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엔저는 제복을 입고 머리를 한껏 올렸던 예전과는 달리 검은색 목 티와 청바지를 입고 앞머리를 내린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5년 전보다 더 어려 보였다.

“응.”

“연락을 해 주셨으면… 제가 바로 찾아뵈었을 텐데요.”

안쉘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한참 동안 혼자서 웅얼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헤리엇이 빙그레 웃어 주었지만, 그 미소를 보아도 조금은 억울했다. 헤리엇의 감정 표현이 전보다 더 풍부해진 것 같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말이다.

“살아 계셨다면 언질을 해 주셨어도…….”

안쉘은 헤리엇이 귀찮아서 연락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안쉘이 지레짐작하는 사이 그는 고개를 돌려 엔저의 얼굴에 난 흉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잘생기고 귀여운 후배의 얼굴에 있는 흉터가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보였다.

“망망대해에서 겨우 살아남았을 때… 나는 정신을 잃은 엔저를 껴안고 필사적으로 헤엄쳤어. 겨우겨우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곧 죽을지도 모를 만큼 탈진했었지. 그러다가 운 좋게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나 살아날 수 있었단다. 그마저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4년이 넘게 걸렸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핵폭발을 정면으로 맞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짐작하기 힘든 상태였을 거라고 이해한 안쉘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깊게 따지지 않았다.

다시 두 사람을 마주한 순간, 안쉘은 나잇값도 못 하고 펑펑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두 사람을 찾으면서도 사실 심적으로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말 다행입니다……. 아, 알고 계십니까? 안젤라와 고려인이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들도 정말… 두 분을 뵙고 싶어 합니다.”

안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려인과 안젤라가 도착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온 두 사람은 헤리엇과 엔저를 마주하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특히 고려인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헤리엇을 꽉 껴안았다. 그 모습에 엔저는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들을 막지는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던 거예요?”

안젤라가 울먹거리며 물어 왔다.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도 여전히 헤리엇 앞에서는 어린 모습 그대로였다.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헤리엇의 허리에 한참 동안 매달렸다. 그녀는 목 놓아 울다가 코를 훌쩍이면서 겨우 떨어졌다. 그리고 헤리엇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한지 두 손을 모았다.

“그래도 살아 계셔서 다행이에요. 대장이 죽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안젤라는 헤리엇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코를 훌쩍이다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뒤에는 고려인의 개인 비서가 유모차를 잡고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아이가 칭얼거리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헤리엇도 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모차 안에는 이제 막 두 살 정도 되었을 작은 아기가 울멍울멍한 검은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헤리엇을 보았다. 정확히는 헤리엇의 뒤에 있는 엔저의 얼굴이었다. 아기의 시선이 어디에 향했는지 알아차린 안젤라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애가… 미인을 좋아해요.”

“…….”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니까요. 그 사람만 계속 쳐다봐요.”

한때 잘생긴 엔저 맥과이어의 팬이었던 안젤라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엔저의 실체를 안 순간부터 팬이기를 포기했지만 말이다.

헤리엇은 5년 만에 만난 안젤라가 고려인과 결혼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방금까지만 해도 마냥 어린 작은 여동생 같았던 안젤라가 한껏 성숙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났어요, 대장. 대장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

재회의 감격에 들썩거린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아이 때문에 고려인과 안젤라는 잠시 자리를 떴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헤리엇은 제 어깨를 감싸 안은 엔저의 품에 기댔다.

“안젤라가 정말 많이 컸네.”

“네.”

엔저가 대답함과 동시에 두 사람은 눈을 맞췄다. 5년 동안 쉼 없이 봐 온 것일 텐데도 마치 처음 마주하는 것처럼 열기로 가득했다.

안쉘은 이러다가 두 사람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일이라도 치를까 무서워 얼른 입을 열었다. 지금처럼 눈만 맞추고 있으면 모를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배까지 맞을 가능성도 농후했기에 그 전에 말려야 했다.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이런 미친 짓은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서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아… 어디 머무실 곳은 있으십니까?”

안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자신은 당당히 재선까지 된 대통령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지금 머물 곳이 없다면 최고급 호텔에서 묵게 해 줄 수도 있었다. 예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헤리엇은 안쉘의 제안에도 곤란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제이든이 물려준 집에서 당분간 머물 생각이야.”

“아.”

짧게 탄성을 내뱉은 안쉘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 제이든이 헤리엇에게 넘겨준 재산에는 수도에 있는 그의 저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속자인 헤리엇의 부재로 제이든의 재산을 국가에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런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어떻게든 지켜 냈었다.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던 제이든의 약속이 드디어 실현되는 것이다.

안쉘은 두 사람과 만나고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있었지만, 헤리엇과 엔저는 힘들어 보이는 기색도, 감동한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안쉘은 그게 내심 서운하면서도 어쩐지 두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두 사람이 안쉘을 붙잡고 감동한 표정을 짓거나 울음이라도 터트렸다면 오히려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겠다.

*  *  *

제이든의 저택은 작은 정원이 딸린 3층짜리 집이었다. 지금까지 돌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황폐해 보일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정원만 가꿔 놓아도 멋지게 변할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저택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이 눈에 띄게 많았다는 점이다.

헤리엇은 안쉘이 사람을 고용해 주겠다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나서서 해 주겠다는데 사양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직접 하거나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두 사람에겐 꽤나 귀찮은 일이긴 했다.

정원을 지나 현관을 열자 엔저가 자연스럽게 헤리엇의 무릎 뒤쪽에 팔을 대고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성치 못한 왼쪽 무릎이 핵폭발에 휩쓸린 데다 엔저를 끌어안은 채 힘겹게 헤엄친 탓에 상태가 더 나빠졌다.

헤리엇은 그때만 생각하면 그답지 않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품 안에서 싸늘해지던 체온,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엔저의 얼굴, 점점 약해지던 심장 박동까지.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 없었던 헤리엇이 유일하게 겁에 질렸던 날이었다.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런 아찔한 감각이었다.

“선배. 무릎은 괜찮으십니까?”

“응.”

차가운 물수건을 무릎에 대 주고 있는 엔저의 정수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헤리엇이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새삼스럽지만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다.

헤리엇은 갑자기 끓어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엔저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잡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헤리엇의 행동에도 엔저는 능숙하게 혀를 받아들이며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헤리엇은 그동안 숱하게 만지고 탐했던 엔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격렬하게 혀를 섞었다. 엔저의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헤리엇은 몸의 굴곡이 여실히 느껴지는 그의 목 티가 너무나도 금욕적이면서도 야해 보여 안절부절못했다.

“엔저… 엔저.”

엔저의 커다란 손 또한 능숙하게 헤리엇의 상의를 파고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헤리엇의 상의 단추가 하나둘씩 풀리고 벌어지며 드러나는 새하얀 살결을 한껏 감상했다.

몇 번을 보고 또 보면서 엔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아름다운 예술품을 눈앞에 두어도 이런 전율을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감히 그런 것들과 비교하는 것조차도 실례였다.

새하얗게 드러난 헤리엇의 피부 위에 엔저의 파렴치한 혀가 닿았다.

“…음.”

헤리엇은 엔저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다가 이따금 아프지 않게 제 가슴팍 쪽으로 잡아당겼다. 엔저는 흥분으로 도톰하게 부풀어 딱딱해진 헤리엇의 젖꼭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묘한 감각에 헤리엇이 몸을 움찔하고 떨었지만,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 나가진 않았다. 엔저는 헤리엇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색을 띠는 입술이 열리길 바랐다. 그래서 집요할 정도로 헤리엇의 가슴을 빨고 깨물었다. 이따금 혀로 자극하면서도 반대로 상냥하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엔저는 어느 순간부터 헤리엇이 흥분하면 귓불이 붉게 변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뺨과 목 부근이 마치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붉어졌고 가슴께까지 예쁜 분홍색을 띠곤 했다. 그리고 어깨마저 빨갛게 변했을 즈음에 헤리엇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만큼 흥분한 그는 살짝 넋이 나간 듯 보일 정도였다.

헤리엇은 힘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할 듯한 순한 얼굴을 가졌으면서, 흥분으로 헐떡거리기 시작하면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지금도 엔저의 어깨를 붙잡고 끌어당기는 손등에 힘줄이 잔뜩 돋아났다.

“아… 벌써 이렇게 되다니… 아프지 않니?”

헤리엇은 진한 색의 청바지 안에서 아파 보일 만큼 발기해 있는 엔저의 성기를 한 손으로 감싸고 살살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 얼굴에는 정욕으로 물든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엔저의 것은 언제 만져도 뜨겁고 딱딱했다. 물이 질질 흐르고 있는 모습마저도 너무 야해서 헤리엇은 귀여운 후배의 예쁜 그것을 달래 주고 싶었다.

애무하고 있는 엔저를 떼어 낸 그는 이제 능숙하게 성기를 입에 담고 혀로 핥았다. 엔저는 헤리엇의 입술이 닿는 것만으로도 흥분한 것인지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헤리엇은 입 안 가득 차는 엔저의 성기를 어르듯 손을 움직였다.

입에 물고 있던 것이 곧 울컥하고 정액을 토해 냈다. 엔저는 입 안에 담긴 것을 삼키고 고개를 든 헤리엇의 뺨과 입술에 입술을 맞추고, 그를 일으켜 하의를 벗겨 냈다.

옷이 사라져 휑해진 맨다리를 헤리엇이 자연스럽게 벌리자 엔저가 재빨리 그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벌어진 다리를 엔저의 허리에 감으니 그가 능숙하게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헤리엇은 어린 시절의 어리숙한 엔저를 떠올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역시 지금처럼 성적인 매력이 잔뜩 흐르는 큰 엔저와 함께 몸을 맞대는 것이 더 좋았다.

아래를 잔뜩 헤집다가 멀어져 간 손가락 대신에 엔저의 늠름한 성기가 입구에 맞닿았다. 헤리엇은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곧 느껴질 충격에 대비했다. 몇 년 동안 받아 왔던 감각이지만 매 순간순간 빠듯하게 차오르는 것에는 차마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구멍은 능숙하게 후배를 받아들이고 조였다. 커다란 엔저의 것이 내벽을 채우고 내장이 헤집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헤리엇은 힘겹게 숨을 뱉어 냈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있으니 엔저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선배?”

“으응. 힘드니까… 조금만…….”

밭은 숨을 내뱉으며 헤리엇은 엔저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붉은색 열꽃이 피어난 헤리엇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 젖어 있었다.

일반적인 고통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헤리엇이지만, 쾌락에는 너무나도 약했다. 아래를 가득 채운 짐승 같은 성기에 가만히 숨만 내쉬던 헤리엇이 고개를 들어 엔저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단단하고 두꺼운 피부에 발간 흔적을 남기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핥았다. 엔저의 목은 헤리엇의 잇자국으로 여기저기 엉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 행위는 암묵적인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허리를 붙잡고 서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아! 음…….”

헤리엇은 자신을 집어삼킬 듯 돌진해 오는 엔저의 입술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헤리엇은 팔을 뻗어 그의 목과 뺨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결국, 흥분을 이기지 못한 헤리엇이 먼저 사정하고 엔저가 그 뒤를 따랐다.

“하아… 하아…….”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가만히 누워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헤리엇은 아직도 강도를 잃지 않고 단단하게 서 있는 엔저의 성기를 안쪽에서 느꼈다. 기특하면서도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감정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어서 표출하기가 힘들었다. 복잡한 속내를 그저 엔저의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대신한 헤리엇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돌아왔네…….”

“네.”

땀에 젖은 엔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다가 그의 눈가와 뺨에 길게 나 있는 흉터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지금의 모습도 눈부시도록 예쁘고 귀여웠지만 흉터를 볼 때마다 조금 가슴이 아팠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엔저, 너는 정말 인기가 많더구나. 하긴… 내 눈에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다른 사람에게도 당연히 그렇겠지.”

헤리엇은 벌써 엔저의 귀환에 대해 사람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떠들어 대는 것을 보고 들었다. 엔저는 젊고 인기가 많다. 옛날부터 알고는 있던 사실이지만 5년간 곁에 있으면서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막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사랑스러운 후배의 매력을 다른 이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그것과 독점욕은 별개였다. 헤리엇이 엔저에게 가지는 독점욕은 다른 누구보다도 남달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절대로 너를 나누지 않을 거야. 지금 너의 사랑스러움은 오로지 나만 알고 있어야 해, 귀여운 나의 엔저…….”

헤리엇은 아직도 어떤 수준까지가 정상적인지, 그 선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엔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헤리엇의 어깨를 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네. 오로지 선배만이 저를 가질 수 있어요……. 선배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  *  *

“이 배은망덕한 놈…….”

붉은 눈의 전사, 해군 제1함대장 레이첼 맥과이어의 눈이 번뜩였다. 수많은 해상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그녀는 이제 막 은퇴를 앞둔 노장이었지만 기백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남편인 한슨보다도 공과 사가 뚜렷한 그녀여도 아들에게만큼은 그 수위가 느슨해졌다.

안쉘은 두 사람이 사이좋은 모자지간이 아닐까 예측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보니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으면서 부모에게 연락 한 번 하지도 않고…….”

레이첼은 엔저를 향해 눈을 치켜뜨고 이를 갈았다. 살벌한 모친의 눈빛에도 엔저는 태연한 얼굴로 반박했다.

“연락 드렸는데요.”

아들의 뻔뻔한 대답에 레이첼은 그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겨우 반년 전에 했던 잘 살아 있다는 전화 한 통 말이냐?”

이번엔 레이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쉘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반년 전에 연락을 받으셨다고요?!”

모두의 시선이 빽 하고 소리친 안쉘에게 향했다. 원래였다면 그는 이 정도로 시선이 모이는 것에 부담스러워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도 없는지 얼굴에 잔뜩 황당함이 가득했다.

“저는 금시초문인데요!?”

안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엔저를 노려보고 있던 레이첼의 서늘한 붉은색 눈이 이번엔 안쉘에게로 향했다. 그 빛나는 눈이 자신을 향하자 안쉘은 잠시 멈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레이첼이 부르르 떨며 주먹을 꾹 쥐었다. 금방이라도 한 대 때릴 것만 같았다.

“5년 동안 저희를 끈질기게 피하셨던 각하께서 하실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정반대로 살벌했다.

그랬다. 안쉘은 지난 몇 년간 맥과이어 부부를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두 사람이 지극히 아끼는 외동아들인 엔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무슨 낯으로 마주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안쉘은 엔저와 헤리엇의 결정을 말렸지만 스스로 충분히 말리지는 못했다고 여겼다.

그렇게 엔저가 실종되고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자 안쉘은 맥과이어 부부를 끈질기게 피해 다녔다. 사적으로 연락이 들어오면 오드레를 앞세워 피했고 회의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레이첼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장교들과 함께했다.

물론 그때마다 레이첼은 두 눈을 부릅뜨고 안쉘을 찢어 죽일 듯 노려봤지만 말이다. 나중에 가선 죄책감인지 공포심인지 알 수 없게 될 만큼 안쉘은 레이첼의 붉은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그, 그래도 대령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씀해 주셨다면…….”

잔뜩 겁먹어서 우물거리는 대통령의 모습에 레이첼이 한숨을 쉬며 손짓을 했다. 그냥 거기서 더 말하지 말라는 듯한 모양새에 안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쪽이 상관인지 헷갈릴 정도였지만 안쉘은 이런 것에 반발해 봤자 자신에게 득이 되지 못하리란 걸 잘 알았다. 엔저도 그렇지만 레이첼 또한 성격 나쁘기로는 함대장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몇 번 무시당하니 저도 꽤 열이 받더군요.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각하. 혹시 불만이라도 있으신지……?”

있다고 하면 지금 당장 대통령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들어 올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안쉘은 저도 모르게 기세에 눌려 대답했다.

“없습니다…….”

대통령을 존경하는 보좌관 오드레는 안쉘의 곁에서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안쉘이 지레 겁먹어서 맥과이어 부부를 무시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그들의 입지가 조금 곤란해졌을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장교를 방패막이로 쓴 것 때문에 나쁜 소문까지 돌았으니 말이다. 대통령의 총애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맥과이어 부부는 버려졌다는 내용이었다.

“반년 전에 연락이 왔을 때는 저희도 반신반의했습니다. 혹시 질 나쁜 놈들이 장난을 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고요.”

레이첼이 아무리 아들의 생존 소식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고 해도 전화 한 통만으로 믿을 만큼 머저리는 아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위치를 추적해 파악한 다음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확인했을 때 정말로 질 나쁜 장난이었다면 무너지는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상상만 해도 막막했으니까. 아들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고 믿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었다.

“물론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말끝을 흐리면서 레이첼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헤리엇을 응시했다.

‘설마 그 선배가 눈앞에 있는 저 흐리멍덩한 놈이었을 줄이야…….’

레이첼은 아들이 갑자기 변했던 시점을 기억해 냈다. 늘 이불 속에서 덜덜 떨면서 세상 사람들이 괴물로 보인다고 울먹이던 아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나마 또래의 아이들처럼 굴었다. 겁에 질리지 않았고 악몽을 꾼다며 한밤중에 레이첼의 침실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 변화가 레이첼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리고 그 기점이 아카데미에서 한 선배와 만났을 때임을 알게 되었다. 엔저는 그 선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평범한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고 마치 영웅을 만난 것처럼 굴었다.

그래도 제법 깡은 있는지 헤리엇이라는 자는 레이첼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대부분의 어중간한 녀석들은 레이첼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다.

팔자로 내려간 눈썹, 희미하게 지은 미소, 서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을 마주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정말 깡이 좋은 걸까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옛날부터 선배, 선배 노래를 부르더니 기어코.”

멍하니 레이첼을 바라보고 있던 헤리엇이 그녀의 말에 살짝 반응했다.

“엔저가 제 이야기를 했나요?”

“…….”

흐리멍덩한 초록빛 눈동자에 작은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아들의 사생활인데 이렇게 말하고 다녀도 되나 싶어서 엔저를 힐끔 쳐다보니 그는 그저 평온하게 앉아서 헤리엇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저 흐리멍덩해 보이는 시선은 ‘우리 선배님께서는 감히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사색에 빠져 계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선배가 자네라고 한 적은 없네만.”

레이첼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헤리엇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 레이첼은 자신의 목 부근을 더듬거렸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날카로운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찌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엔저의 선배는 저일 텐데요.”

헤리엇이 의아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만약 이 자리에서 레이첼이 다른 놈팡이가 엔저의 선배라고 말하면, 헤리엇이 아들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레이첼은 이런 걸로 아들의 연인과 거짓말까지 해 가며 기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손을 저었다.

“…만약 자네 이름이 헤리엇 알스터가 맞다면… 맞아. 아들놈이 어릴 때부터 선배, 선배 하면서 노래를 불러 댔지. 선배님의 부하가 되어서 평생 그를 보좌하고 싶다고 말했을 땐 기가 막혀서…….”

수많은 장교를 배출한 맥과이어 가문과 06구역에서 가장 명망 있는 뤼어드치 가문의 결합으로 태어난 게 엔저였다. 그런 제 아들이 그런 머저리 같은 소리를 할 줄은 몰랐기에 기막혀 했던 적은 있었다.

레이첼의 헛웃음 섞인 한탄을 듣자마자 헤리엇의 뺨과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누가 봐도 기뻐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정을 한껏 드러냈다.

“…됐다, 됐어. 시답지 않은 소리나 하고 있자니 못 견디겠군. 저 배은망덕한 아들 새끼 때문에 그동안 맘고생 했던 게 몹시 화가 나.”

레이첼은 자신의 옆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한슨을 돌아봤다.

“이만 가지. 엔저, 너도 복귀하려면 꽤 고생할 거다.”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이며 레이첼이 장교모를 쓰고 헝클어진 제복을 정리했다. 헤리엇은 그녀가 모자를 쓰는 몸짓이 상당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엔저가 장교모를 쓸 때와 똑같은 움직임이었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엔저 자신도 모르게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뇨, 복귀하진 않을 겁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나가려던 그녀가 잠시 멈춰서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봤다. 눈을 가늘게 뜬 것이 엔저의 의중을 가늠하려는 듯 보였다. 한참 동안 엔저와 헤리엇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녀가 먼저 등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내년에 은퇴하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술집이나 열 생각이다. 그때 한번 놀러 오기나 해라.”

성인인 아들의 인생에 굳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그 말을 끝으로 엔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자연계 능력자 부부가 내는 술집이라니……. 술 때문에 분노조절장애가 오는 진상은 없겠군요.”

안쉘이 눈치 없이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레이첼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휑하니 먼저 나가 버린 레이첼의 뒷모습을 보던 한슨도 고개를 돌려 인사하고 서둘러 빠져나갔다.

아들이 연인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기 위해 군에 복귀하지 않는단 말에도 별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해야 할지……. 안쉘은 가운데에 껴서 참으로 난감한 기분에 휩싸였다.

정적에 빠진 집무실 안에서 안쉘은 멍하니 있는 헤리엇에게 말을 걸었다. 한슨이 나가고 계속 문만 멍하니 쳐다보는 게 조금 이상했다.

“왜 그렇게 넋 놓고 계십니까?”

“응? 아, 잘생겨서.”

엔저가 아닌 한슨이 나간 문을 쳐다보는 것이 엔저에게 하는 말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안쉘은 목격했다. 안광을 번뜩이며 문을 노려보는 후레자식을…….

‘아무리 그래도 패륜은 안 됩니다…….’

안쉘은 속으로 빌고 빌었다.

맥과이어 부부가 떠나고 안쉘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대령님, 지금 대령님께서 귀환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건 아십니까?”

조용히 비밀리에 진행해 놓고 마지막에 요란하게 움직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불러 댔으니 숨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었다.

이미 SNS는 물론 포털사이트에 엔저의 이름이 실시간으로 순위에 올라왔다. 이미 몇 명이 엔저를 봤다는 목격담이 퍼지는 중이었다. 목격자들의 입을 단속할 수 있겠지만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퍼지는 손가락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대령님이 살아 돌아와서 유감이 많은 이들이 가득할 테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쉘의 얼굴이 딱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안쉘은 엔저를 보좌하며 그의 무력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 중의 하나였다. 바다에서 무적이라는 인어를 상대로 무패의 신화를 이어 가던 영웅인 그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마찬가지인 잔챙이들에 당할 리 없었다.

거기에 헤리엇은 엔저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대인 능력 최강자였다. 저렇게 순하게 미소 짓는 얼굴 뒤에 주먹이 먼저 나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걱정하고 싶어도 걱정할 거리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정답이었다. 다만 그 뒷수습을 할 게 성가실 뿐.

그동안 안쉘은 레이첼을 최전방에 세워 단테 막심 일당을 소탕해 나갔다. 엔저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부모답게 레이첼과 한슨은 무서운 속도로 폭동을 제압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 년 동안 권력을 잡았던 이들의 끈질김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중추에 있던 놈들은 전부 잡아들였고 지금은 옆에서 기생하며 콩고물이나 얻어먹던 잔챙이들만 남았다.

지금까지도 전부 잡아들이는 데 실패한 안쉘은 잔챙이 중에서도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이들을 몇 명 추려 냈다.

안쉘이 내민 서류에는 시가를 입에 물고 눈을 번득이는 한 사내가 찍힌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듯 그는 덩치가 매우 컸는데, 얼굴의 반 이상이 흉측한 화상을 입은 채였다.

“무쉬 바톤은 20구역에서 거주하다가 01구역으로 이주한 자입니다. 능력이 늦은 나이에 발현되어 대령님과 같은 해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자로 군에 합류한 이후엔 안토니오의 보좌관이었습니다.

보좌관이었을 때의 능력이 아직 녹슨 건 아닌지 알기 쉽게 정리된 서류를 건네주며 간략하지만, 중심적인 내용을 나열했다.

“마지막 결전 당시 안토니오와는 다른 군함을 타고 있었고, 그 군함은 대령님의 어메전트호와 정면으로 충돌해서 가라앉았습니다. 때문에 무쉬는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았죠.”

헤리엇은 그날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바다가 독으로 더럽혀졌고 군함들이 서로 충돌하고 침몰했다. 군함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바다를 뒤덮었다. 인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북쪽 바다는 동쪽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앤을 선두로 한 인어들이 북쪽 바다를 깨끗하게 정화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살아 있는 잔당 중 대령님께 가장 유감이 많은 자가 바로 이놈입니다.”

“흥.”

엔저는 코웃음만 짧게 치고 안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안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익숙하게 자료를 정리해서 오드레에게 넘겨주었다. 대통령을 존경하는 보좌관 오드레는 엔저의 행동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대령님께서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놈들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나 다름없습니다. 물리면 따끔하긴 할 거라고요.”

안쉘이 어렸을 때, 야생 햄스터에게 발가락을 물린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능력이 발현되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 아프기도 하고 무서워서 엉엉 울면서 부모님에게 달려갔었다.

“…아, 대령님. 혹시 이다음에 일정이 있으십니까?”

안쉘의 질문에 반응한 건 엔저가 아닌 헤리엇이었다. 엔저는 듣고 있긴 한 건지 잡지를 읽고 있는 헤리엇에게만 눈동자가 꽂혀 있었고 헤리엇은 언제나 짓는 희미한 미소로 안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이 데이트 약속이라도 한 건가……?’

헤리엇의 뚫을 듯한 시선을 받은 안쉘은 왜인지 모를 긴장감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5년 동안 못 본 사이에 헤리엇이 엔저에게 보이는 집착이 더 강해진 듯했다.

“오래 걸리는 건 아니고 인터뷰를 짧게 진행해 주셨으면 해서요…….”

안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목을 죄고 있던 살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헤리엇은 그저 흥미가 잔뜩 어린 눈으로 안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발간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잡지를 손에 든 채였는데, 펼쳐져 있는 부분은 ‘엔저 맥과이어 특집’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예전에 군부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홍보용으로 국민 영웅이자 대스타 엔저 맥과이어와의 대담이 실린 잡지였다.

안쉘은 저 인터뷰를 할 당시에 자신이 엔저의 보좌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때 엔저는 기자 앞에서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삐딱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엔 당장이라도 능력을 사용해서 주변을 초토화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엔저가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도 대외적인 활동을 했었던 이유에는 헤리엇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테의 세뇌하에 헤리엇이 있었으니, 그걸 무기로 엔저를 이리저리 휘둘렀을 것이다.

엔저는 안쉘이 예상한 바와 같이 ‘싫은데? 내가 왜?’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이제 군인도 은퇴한다고 하는데 군부의 수장으로서 명령할 수도 없었고 강제로 시킬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엔저가 아닌 헤리엇에게 맞아 죽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내가 왜.”

엔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자 옆에 있던 헤리엇이 작게 중얼거렸다.

“인터뷰라니, 정말 재미있을 것 같구나, 엔저…….”

“해야지.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당연히 해야겠지.”

안쉘은 엔저의 태세 전환이 빛보다 빠른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리엇은 그저 읽고 있는 잡지의 한 귀퉁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사실 잡지에 나온 엔저의 기사는 정말 사람들이 이런 걸 궁금해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장황하고 쓸데없는 신상 정보뿐이었다.

그중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군에 입대했는지 따위를 묻는 말도 있었다. 안쉘이 아직까지도 기억할 만큼, 엔저는 인상적인 답변을 했다. 당시 엔저는 “능력자들은 강제 징병인데 무슨 개소리야.”라고 기자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잡지엔 ‘이 한 몸 다 바쳐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입대했다.’라는 개소리가 답변으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인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은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올라갔다.

[A: 존경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한 사람이고, 죽어서도 단 한 사람뿐이다. 그분의 생각은 내가 감히 읽을 수 없을 만큼 고아하시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등등 헤리엇에 관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아마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느낀 것이겠지. 그래도 안쉘로서는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헤리엇은 자신이 중얼거리기 전에 말했던 엔저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곤란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혹시 곤란한 거라면…….”

“아니요, 선배. 정말 하고 싶었습니다. 선배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역시 선배의 선견지명과 미래를 읽는 뛰어난 예측 실력은 제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엔저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사랑스럽습니다, 크윽… 선배. 이렇게 완벽하신데 귀엽기까지 하시다니…….”

어째 염병이 못 본 사이에 더 진화한 것 같다. 꼴값들을 떨고 있네.

안쉘은 자신과 앤의 모습이 저런 꼴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그동안 엔저는 정말 심장이 아픈 듯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후배의 귀여운 재롱을 누구보다도 귀여워하는 헤리엇은 익숙한 광경을 보는 것처럼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도대체… 선배는 못 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저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젠 아예 감격에 벅차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헤리엇은 그저 곤란한 얼굴만 하고 있다가 엔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해 주는 것처럼 무릎을 툭툭 쓸어 먼지를 털어 주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손길에 순한 양이 되어 고분고분 몸을 맡겼다.

안쉘은 한참 동안 두 미친놈의 염병 첨병에 이어 뜨거운 포옹과 열렬한 입맞춤까지 생생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는 이런 모습을 하도 지켜봐 왔기에 익숙했지만 오드레는 아니었다.

오드레는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았다가 끈적하게 서로 안고 입을 맞출 땐 턱이 빠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입이 크게 벌어졌다. 오드레의 넋 나간 모습에 안쉘은 수당을 좀 더 얹어서 휴양지에서 쉬고 올 수 있게 휴가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끝나셨습니까?”

“응.”

주변 사람들의 충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헤리엇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안쉘은 비틀거리는 오드레를 챙기고 엔저와 함께 기자가 기다리고 있는 인터뷰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두 명의 기자가 먼저 와서 엔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태워 버릴 듯한 열정적인 눈빛이었다. 이제 막 20대 초반인 청년들은 어릴 적부터 엔저를 동경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헤리엇은 그 말을 듣고 후후 웃더니 엔저의 턱을 쓰다듬었다.

“네가 이만큼 사랑스럽고 귀여우니 인기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엔저는 사랑스럽지도 귀엽지도 않다고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안쉘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엔저. 네가 내 것이라고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어.”

“안 됩니다! 시기가 시기입니다! 위험해요!”

안쉘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헤리엇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해도 두 사람이 수도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데다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적이 사방에 깔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엔저는 인어들뿐만이 아니라 인간 중에도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가 득실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엔저의 연인이 나타난다는 것은 표적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  *  *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그것도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다시 돌아온 국민 영웅 엔저 맥과이어였다. 한때는 반동분자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지만, 단테의 더러운 계획이 알려지고 명예를 회복한 상태였다. 초반에 사람들은 그를 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그의 선택에 감동했다.

안쉘 대통령이 핵폭발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면서 ‘엔저 맥과이어의 숭고한 희생’이라는 부분에서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어떤 이는 안쉘에 대해 엔저를 사지로 몰아넣은 비정한 대통령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논란이 많았던 엔저 맥과이어가 5년 만에 살아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영웅의 귀환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눈과 귀를 기울였지만, 엔저는 지금까지 뚜렷하게 대외활동을 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부나 군에서도 그의 귀환에 대해 쉬쉬하며 묵묵부답을 유지했기에 모두 답답해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엔저 맥과이어가 어느 신문사를 통해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인터뷰 내용 중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도 있었으니, 단연 엔저의 연인에 관한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엔저는 ‘결혼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같은 무시해도 될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답변했다. 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 중 그 질문에만 가장 길게 대답했으며 인터뷰 내용의 절반 가까이 한 사람에 대한 찬양과 주접으로 이루어졌다. 결론은 엔저 맥과이어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엔저가 말하는 그의 연인은 완벽하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감히 자신이 우러러보기가 죄스러울 정도로 고매하고 우아한 신적인 존재라고 했다.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인 배우를 뻥 차 버린 전적이 있는 엔저의 연인이 얼마나 눈이 부신 미모를 가졌을지 궁금해했다.

‘별이 빛나는 총명한 눈동자가 아니라 흐리멍덩한 멍한 눈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늘 사색에 잠겨 있다기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아닌가…….’

물론 완성된 인터뷰 내용을 읽은 안쉘은 조금 많이 황당해했지만 혼자만으로 생각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고려인은 인터뷰 안의 이 사람은 우리 대장이 아니라며 대령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분개했다.

세계 구석구석까지 엔저와 그의 연인으로 떠들썩한 덕분에 당연하게도 파파라치들이 기승을 부렸다. 엔저가 머무는 저택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들은 엔저의 능력으로 하늘 높이 날아가 풀숲에 처박히기도 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파파라치들의 기척을 잘 알아차리는지 인터뷰가 공개된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인에 대한 단서를 털끝만큼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인지 아니면 엔저가 봐주었던 건지 모르지만 드디어 소문이 무성하기만 한 연인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엔저와 다른 한 사람이 동네에 있는 카페 앞에 서 있었고, 카페 점원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엔저는 가볍게 검은 청바지에 갈색 후드티를 입고 머리를 내린 채였다.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제복을 입은 모습만 봐 왔던 사람들은 그의 편해 보이는 모습에 깜짝 놀라 했다.

엔저의 옆에는 민트색 셔츠에 하얀색 바지를 입은 사람이 함께 서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람이 키가 큰 장신의 남성이라는 점과 그렇게 빼어난 미모는 아니라는 것 때문에 엔저의 연인이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옆모습이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준수했지만, 희대의 미인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공개된 두 사람의 사진에 그런 추측들도 쏙 들어갔다. 전날에 공개된 사진 속의 남자 옆에서 엔저가 따사로운 봄날을 맞은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카페에서 음료를 받아들며 연인을 돌아보는 엔저의 모습은 대중들에게 항상 보여 주었던 냉랭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연인과의 데이트에 가슴이 설레는 사랑에 빠진 사람 그 자체였다. 물론, 이후에 헤리엇이 먹다 남긴 음료의 플라스틱 컵을 조용히 챙기는 엔저의 모습은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헤리엇은 카페 앞에서 입이 떡 벌어지게 놀라는 점원을 구경하며 엔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엔저, 뒤에 쥐새끼가 숨어 있는데.”

그렇게 위협적이진 않지만, 이쪽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쥐새끼였다. 엔저는 음료 주문을 끝내고 뒤돌아 헤리엇의 눈가를 가리는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찍히는 거야?”

“네. 이제 슬슬 보여 주기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소설을 쓰거든요.”

엔저는 자신만의 선배를 사람들 앞에 내놓고 싶지 않았지만 헤리엇을 감히 허구의 존재로 생각하게 놔둘 수도 없었다.

엔저가 그렇게 말한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지 헤리엇은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은 채로 자리에 앉아 음료를 받아들었다. 딱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헤리엇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본 엔저는 무슨 상상을 하는지 감명받은 얼굴로 입을 가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엔저…….”

“네.”

“사탕을 받았단다.”

“…….”

예전에 엔저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그의 커다란 손을 맞잡고 손바닥 위에 사탕 두어 개를 올려 주었다. 누구에게 받은 사탕인가 했더니 길거리에서 홍보차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사탕이었다.

“넌 사탕을 받으면 무척 기쁘다는 얼굴로 눈을 반짝였어. 그게 어찌나 귀여웠던지…….”

엔저는 손안에 든 사탕을 그러쥐고 과거를 회상하며 빙그레 웃음 짓는 헤리엇에게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선배. 너무 기뻐요.”

“…….”

헤리엇이 뿌듯하게 웃었다. 이것이 이번 주말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무슨 소리야, 대장?”

“응?”

“엔저 대령님은… 이제 대령님이 아닌가? 아무튼, 대령은 단걸 싫어하잖아.”

고려인의 말에 헤리엇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니야. 엔저는 단것을 좋아해.”

그때 고려인의 품에 안겨 있던 작은 아기가 통통한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고려인이 능숙하게 아이를 고쳐 안으며 안젤라와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어엿한 부부이긴 하지만 이럴 땐 남매 같았다.

아직도 헤리엇의 눈에는 마냥 어리기만 한 두 사람이었다. 헤리엇의 이름을 받을 뻔했던 아기 엘리엇은 보기보다 활발하고 귀여운 아기였다. 심지어 태어난 지 이제 두 해가 지났을 뿐인데도 말도 제법 잘했다.

“과자 줘. 나 과자 먹어.”

“‘먹어’가 뭐야. ‘먹고 싶어요’지.”

고려인은 본인도 높임말을 지금도 헷갈려 하면서 아이에게는 엄하게 굴었다. 자신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닌지 머쓱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사회생활을 하니까 이게 힘들더라고… 여태까지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 본 적 없이 멋대로 살았잖아? 군도 은퇴하고 회사를 차리니까 예의를 지키는 게 정말 중요하면서도 제일 힘들어…….”

이제야 좀 어른이 된 기분이라면서 코 밑을 쓱쓱 닦는 행동은 그렇게 어른스럽지 않았지만 헤리엇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다른 것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기에게 유아용 과자를 물려 주던 고려인이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 가볍게 떠들었다.

“아무튼, 엔저 대령님은 단거라면 치를 떨 정도로 혐오스러워하던데? 대장은 대령님하고 죽고 못 살면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몰랐던 거야? 나는 우리 스위트 허니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는 게 없다고~.”

헤리엇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부터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 보던 안젤라가 낮게 속삭였다.

“…너 좀 닥쳐 봐.”

그러자 이번엔 고려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젤라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결혼하면서 부부로서 서로를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안젤라는 폭언을 하지 않고, 고려인은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기로 말이다. 따라서 안젤라가 고려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헤리엇 앞에 있으니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도 했다.

“왜 그래, 허니. 갑자기 부끄러워서 그래?”

“…또 맞아서 병원에 입원하고 싶어?”

“흠…….”

어째서 나이가 먹어도 능력은 줄어들지도 않는가. 이제는 안젤라가 때리는 곳이 뼈가 시릴 만큼 아팠다. 그것도 힘 조절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고려인은 부부 싸움을 하는 날엔 밖으로 도망쳐 안젤라의 화가 풀릴 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다.

물론 안젤라도 고려인이 도망칠 곳이라고는 대통령인 안쉘의 두 번째 자택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고려인이어도 판테니엄관에 쉽게 드나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인이 없는 날에도 안쉘의 집에서 머물곤 했다.

대통령이 된 후 안쉘이 새로 지은 저택은 꽤 넓고 아늑한 곳이었다. 특히 그가 연인을 위해 만든 커다란 수조는 작은 수영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엔저가… 단걸 싫어했다고?”

고려인은 헤리엇의 목소리에 이제야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얼핏 들으면 언제나와 똑같은 고저 없이 일정하고 평온한 목소리지만,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어딘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고려인은 혹여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는 게 없어 그는 안젤라에게 입만 벙긋거리며 물었다.

‘나 뭐 잘못 말했어?’

‘그걸 이제 알았냐, 이 등신아!’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쓸모가 없는 남편이 오늘따라 더 쓸모가 없어서 안젤라는 눈빛으로 욕을 하며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억!”

말이 좋아 쿡, 이지 고려인은 제 옆구리가 뜯어져 나간 건 아닌지 손바닥으로 더듬거렸다. 그렇게 정신 차린 후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 보려는 듯 먼 산을 보면서 말했다.

“모를 수도 있지, 대장.”

“…….”

“충분히 모를 수 있는 일이야! 애인 사이라고 다 아는 것도 웃기지 않아? 스토커야 뭐야?”

“…….”

고려인이 말하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엔저라면 헤리엇의 일거수일투족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엄습해 온 것이다. 잘생긴 스토커의 표본을 두고 무슨 소리를 한 것인가.

“스토커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소리지. 대장… 왜 그렇게 눈이 무서워?”

저런 얼굴을 한 헤리엇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세뇌에 빠진 헤리엇이 안쉘을 쥐어 패고 있을 때가 저런 얼굴이었던 것 같다. 고려인은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했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헤리엇은 말투, 행동, 분위기 등 모든 것이 예전과 변함이 없었지만, 어딘가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엔저 맥과이어에 관한 것에서는 눈동자가 살짝 맛이 갔다고 해야 할까.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헤리엇이었지만 고려인은 자신의 본능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이런… 우리가 너무 오래 있었지? 새집인데 이사 준비로 바쁘잖아. 나중에 시간 괜찮으면 연락해 줘, 대장!”

그렇게 소리친 고려인은 아내와 자식을 끌고 도망가 버렸다.

*  *  *

“시시해!”

무쉬는 물고 있던 시가를 두 동강 내며 소리쳤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 불도 꺼지지 않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던지기까지 했다. 누군가 묵묵히 그의 포악질을 견디며 서 있다가 허리를 숙여 무쉬가 던진 시가를 주워 불을 끈 다음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나는 놈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리는데 누구는 시답지 않게 감히 애인하고 시시덕거리면서 놀고 있어!?”

그는 손에 무언가가 잡히는 대로 던지고 소리치며 방방 날뛰었다. 다른 한쪽 손에는 신문이 볼썽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무쉬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진 속 엔저 맥과이어를 당장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 옆방에서 쉬고 있던 부하 한 명을 불러 뺨을 올려붙였다. 화풀이 대상이 된 부하의 입가가 찢어졌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무쉬는 단테의 밑에 있을 때부터 좋은 상관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나쁜 손버릇은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군에서나 용인될 일이다. 불만투성이들이 모인 자경단 안에서는 그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무쉬에게 맞은 부하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그 모습에 무쉬는 잘 걸렸다는 듯 험악한 미소를 지으며 능력을 사용했다.

“아, 아악!”

“내가 많이 죽기는 했지. 이런 피라미도 나를 우습게 알고.”

무쉬는 중력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반경 5m 안에 있는 범위의 중력을 최대 2,000kg까지 조절할 수 있었다. 반경이 짧고 바다에선 크게 활약할 수 없는 탓에 전쟁에서 성과는 별로 없었지만, 능력이 없는 일반인 정도는 손쉽게 터트려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무쉬가 화풀이 상대를 죽이기 위해 능력을 최대로 펼치려는 순간, 갑자기 끼어든 어떤 힘에 가로막혀 버렸다.

“그만! 안 그래도 지금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대체 뭐 하는 거지?”

무쉬의 능력을 가로막은 건 대머리에 콧수염이 특이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계급장이 붙어 있지 않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로 인해 예전 그의 계급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안하무인인 무쉬마저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 한때 제법 고위 계급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무쉬가 던진 시가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재킷 주머니에서 시가잭을 하나 꺼냈다. 그가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방금까지만 해도 중력에 짓눌려 캑캑거리던 부하가 허겁지겁 일어나 인사하고 방에서 나갔다. 능력을 방해받은 무쉬가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여긴 무슨 일인가.”

“재미있는 계획을 짜고 있다고 해서 와 봤네. 그래… 엔저 맥과이어가 살아 있더군.”

단테 막심의 이름을 중심으로 모인 반란군은 처음엔 기존 단테의 지지 기반을 그러모아 강하게 나갈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핵폭발에 대한 진실까지 드러나자 점점 쇠약해졌다.

애초에 엔저 맥과이어는 그들의 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반란군 중에 엔저에게 유감이 없는 이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 놈이 5년 전에 실종되고, 곧 죽었다는 소식이 돌았을 땐 모두가 축배를 들 정도로 기뻐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다시 돌아왔다고 하니 그들의 타깃이 그쪽으로 정해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추측건대 반란군의 수명은 길지 않다. 그렇다면 허무하게 이대로 끝나기 전에 미운 놈에게 엿이라도 한 번 먹여 봐야 하지 않겠는가. 호위가 삼엄한 인어 왕족보다는 일반인인 엔저 맥과이어의 연인을 노리는 쪽이 훨씬 이득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사내의 말에 무쉬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웃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 반쪽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놈의 애인을 납치해서 그놈 눈앞에서 산 채로 포를 떠 줄 생각이다. 아니면 부하 놈들에게 던져 줘 돌려먹는 걸 찍어도 볼만하겠지. 마지막엔 엔저 맥과이어 그놈 사지를 잘라 바닥에서 뒹구는 걸 감상하자고. 그걸 생중계해서 방송하면 되겠지!”

무쉬는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지 마지막에는 목청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놈의 연인 사진도 기사로 공개되었으니 어디 사는지 알게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이지.”

“대통령이 그걸 예상하지 못할까.”

“그게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엔저는 지금 일반인이야. 그 생선 따위와는 경우가 달라.”

*  *  *

헤리엇은 엔저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걸 더 선호했지만,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도 가끔 들으면 색다른 느낌이 들어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평소와 같은 엔저의 목소리에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그런 스스로가 의아한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헤리엇은 이런 자신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꼴사나운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엔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귀여운 후배 앞에서는 완벽하고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선배에 한해서는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후배는 벌써 알아차린 것 같았다.

- 선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응?”

- 목소리에 힘이 없습니다.

헤리엇은 휴대전화에서 얼굴을 떼어 내 검은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알시타가 알려 준 곤란한 듯한 미소뿐이었다.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미세한 균열을 엔저는 대체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살짝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헤리엇은 이미 들킨 데다가, 거짓말하는 법을 몰라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들켰어?”

- 네.

“어떻게 안 거니.”

헤리엇의 물음에 엔저는 제법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 저는 선배에 관해서 모르는 게 없습니다.

헤리엇은 자신만만해하는 엔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귀여워 숨죽여 웃었다.

“음… 이제 알았어. 단것을 싫어했다며, 엔저. 내게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헤리엇은 분명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이건 그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런 느낌이 당혹스러워 입술만 만지작거리며 한마디만 덧붙였다. 자신을 조절할 수 없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서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다른 사람에게 듣는 너의 이야기는 조금… 기분이 좋지 않구나, 엔저…….”

헤리엇의 말이 끝났음에도 휴대전화 너머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엔저?”

선배가 이름을 부르면 3초도 기다리게 하지 않고 대답했던 후배가 지금은 1분이 넘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게 3분이 지났을까. 엔저가 더듬더듬 말문을 텄다.

- 어떤 개자식이…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음.”

엔저가 욕을 한 것 같은데…….

헤리엇이 누구인지 말해 주고자 입을 열려고 했지만, 엔저의 말이 더 빨랐다.

- 안쉘은 겁쟁이니 말했을 리 없고, 주변에 그런 수작질을 할 간 큰 놈이 있던 것도 아니니 용의자가 조금 줄어드는군요. …고려인입니까?

“와… 엔저,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이 새끼를 어떻게 조지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헤리엇은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니?”

-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배, 저는…….

엔저는 드물게도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단것을 싫어하는 게 사실이라 차마 헤리엇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헤리엇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후배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그와는 별개로 속이 점점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낭패였다.

엔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머니 안에 늘 사탕을 준비해 두고 다녔었다. 그리고 온갖 이유를 대며 엔저의 고사리 같은 손에 두 개 정도씩 쥐여 주었다. 사탕 두세 개만 올려놓아도 그의 작은 손에 가득 차는 걸 보는 게 헤리엇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사실은 쓸모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하니 헤리엇은 도통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작게 한숨까지 쉬자 엔저가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선배, 저는……!

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귀여운 후배의 목소리를 끝까지 다 들을 수가 없었다. 헤리엇은 몸을 무겁게 누르는 무형의 힘에 작게 웃으며 정면을 응시했다가 발밑을 내려다봤다. 방심하고 있던 탓에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엔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눈썹을 팔자로 내려 웃는 얼굴 그대로 헤리엇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언제 이만큼 모여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검은색 복면에 기동복을 입은 사내 대여섯 명이 헤리엇을 둘러싸고 있었다.

“…….”

헤리엇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복면을 쓴 이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대장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헤리엇을 찍어 누르는 힘도 눈앞의 사내의 것인 듯 보였다.

중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능력인지, 불편한 다리로는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는 헤리엇의 모습에 그의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이죽거렸다.

“이거 다리병신인가?”

“그놈도 웃기는 놈이군……. 이런 다리병신이 뭐가 좋다고… 그것도 같은 사내자식을.”

잔뜩 주변을 경계하는 침입자들과는 다르게 헤리엇은 태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엔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했으니 어떤 능력을 가졌을지 몰라.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경계해!”

그렇게 소리치긴 했지만 무쉬는 헤리엇을 경계하진 않고 그의 주변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이 굴었다. 안쉘이 말했던 것처럼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헤리엇은 눈만 굴려 침입자들의 인원을 파악하고 출입구까지의 거리, 동선을 계산하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그 순간 헤리엇의 계획과는 다른 변수가 돌연 등장했다.

“엄호해라!”

언제부터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갑자기 군복을 입은 이들이 튀어나와 헤리엇의 앞을 막아섰다. 몸을 짓누르던 힘도 살짝 풀려서 움직이는 게 한결 나아졌다. 보호막을 펼치는 능력자도 함께 투입된 듯싶었다.

헤리엇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침입자들은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헤리엇의 앞을 막아선 군인 중 한 명이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각하께서 이런 일을 염려하시어 저희를 이곳에 경호차 배치하셨습니다. 적이 아니니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

아무래도 안쉘이 제대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몰래 붙여 놓은 모양이었다. 하긴 엔저 맥과이어가 돌아왔는데 아무 조치도 없이 방치하는 게 모양이 더 이상했다. 많은 인원을 배치한 건 아니지만 하나같이 실력 있는 능력자들로 보였다.

그런 것쯤은 저쪽도 예상했는지 침입자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격 대열을 갖추었다. 헤리엇은 군인들을 따라 도와주려고 했지만, 자신을 이끄는 두 명의 군인에게 이끌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호하는 인물이 일반인인 것처럼 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음…….”

헤리엇은 설명하기도 귀찮고 일단 순순하게 그들의 말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군인들을 따라 뒤로 물러나니 납치범들이 초조해지는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잡아!”

다가오려는 침입자들과 그 앞을 막아서는 군인들 간의 대치를 뒤로하고 헤리엇은 자신을 이끄는 두 명의 군인과 함께 빠져나와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차는 헤리엇의 집이 잘 보이는 곳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나흘 전부터 눈에 띄던 차였다. 이들이 타고 있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원군을 불렀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안전해지실 겁니다.”

헤리엇의 표정은 전혀 겁먹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멍해 보이는 표정 때문에 이들은 헤리엇이 겁에 질려 굳은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저들은 왜 나를?”

안쉘, 그러니까 대통령에게 임무를 전달받으며 절대 비밀 엄수를 강조 받았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헤리엇은 피해자였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적인 피해자인 헤리엇에게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운전석에 앉은 군인이 입을 열었다.

“엔저 대령님 때문일 겁니다.”

엔저는 군에 복귀할 예정이 없기에 군인이 아닌데도 안쉘을 비롯한 많은 이는 아직도 그를 대령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순간 헤리엇의 시선이 몽롱하게 변했다. 엔저가 군복을 입은 근사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또 보고 싶긴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엔저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헤리엇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엔저……?”

“예. 놈들이 노리는 건 엔저 대령님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 엔저를…….”

“대령님께 당한 놈들이 분명하죠. 대령님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는 겁니다.”

헤리엇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때 달리고 있던 자동차의 차체 위쪽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지며 천장이 우그러들었다. 순식간에 반쪽이 찌그러진 차는 크게 한 바퀴를 돌며 나뒹굴었다. 헤리엇은 물론 차 안에 있던 다른 두 사람 또한 차 안에서 어찌할 새도 없이 격렬하게 이리저리 부딪혔다.

헤리엇은 좁은 차 안에서 낙법을 해 가며 충격을 최대한으로 줄여 보았지만, 손목이 욱신거리는 게 아무래도 접질린 것 같았다. 그러나 손목에서 오는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헤리엇은 그대로 움직여 찌그러진 문의 손잡이를 잡고 발로 힘껏 찼다.

밖으로 나와 차 안을 살피니 함께 있던 다른 두 사람은 기절해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고꾸라져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다행히도 목숨에 지장은 없어 보였고 미세하게 숨을 내쉬는 것도 확인했다.

기름이 새어 나와 차가 폭발할 것을 우려한 헤리엇이 운전석 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능력자들이 헤리엇의 주변을 에워쌌다.

차를 반파시킨 능력자가 아마도 가장 먼저 나서서 헤리엇을 비웃는 저자인 듯했다. 복면을 쓰고 있어 각각의 얼굴을 구별하긴 어려웠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전에 나섰던 그자와 분위기가 똑같았다.

거기에 집을 침입했던 것보다 두 배 정도 인원이 많은 걸 보니 미리 잠복이라도 한 듯싶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대장 격의 사내는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복면을 벗어 던졌다. 드러난 얼굴의 반이 흉터로 가득했다. 그의 뒤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쉬 님… 얼굴을 보이시면…….”

“흥. 어차피 알아봐 봤자 놈들에겐 뾰족한 방법이 없어!”

이미 헤리엇의 납치가 성공했다고 믿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현재의 군인들은 무능력하고 안쉘 대통령은 한심한 사람이라고 한참 동안 욕설을 내뱉었다.

“고작 여섯 놈 정도로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한심하군…….”

제아무리 헤리엇이라도 나뒹구는 차 안에서 구르면 뺨에 생채기가 나는 것쯤은 막을 수가 없었다. 헤리엇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무쉬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얌전히 굴면 아프게 하진 않겠다! 우리는 엔저 그 친구한테 유감이 아주 많거든.”

헤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저의 친구들이라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는 그는 눈치가 많이 없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분위기를 아예 못 읽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엔저의 친구라고 하기에 적의가 가득하고 공격적이었다. 더해서 헤리엇을 잡아가려는 데다 그를 보호하던 군인들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엔저를 싫어하는 친구들이구나.’

헤리엇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가장 먼저 앞에 있는 무쉬의 명치를 발로 차고 목을 꺾어 죽인 다음, 그의 허리춤에 있는 총을 꺼내 다른 놈들에게 한 발씩 쏴 주리라,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획까지 완성했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일 분도 채 되지 않을 시간에 끝날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면 엔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볼 참이었다.

헤리엇은 오늘따라 자신이 ‘적’으로 판명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려는 이유를 떠올리려다가 포기했다. 연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었고 그게 계속 자신을 속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헤리엇에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살금살금 무쉬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헤리엇은 그가 토해 내듯 내뱉은 말에 멈칫했다.

“길고 긴 악연도 끝이다……! 엔저 맥과이어!”

헤리엇은 엔저의 어린 시절 모습을 기억하긴 하지만 실제로 함께 붙어서 지낸 시간은 최근의 5년뿐이었다. 자신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로 다시 재회할 때까지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물론 엔저가 TV에 나올 때면 추억에 젖긴 했지만 말이다.

혹시라도 보지 못했던 엔저의 10대와 20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입맛이 변한 건 아닐까 싶었다. 그 시절의 연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사랑스러웠겠지. 무척 귀여웠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귀여운데 더 어렸을 때는 생기가 아주 남달랐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헤리엇은 굉장히 억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이 모르는 엔저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느낌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헤리엇은 어찌해야 할까, 머리를 팽팽 굴렸다. 안쉘에게 가서 물어볼까. 하지만 그는 지금 죄책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으로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어서 솔직하게 말해 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건 고려인도 마찬가지였다.

“가여운 엔저. 이렇게 괴롭힘을 받다니…….”

헤리엇이 상상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받아 풀이 죽어 있는 슬픈 엔저의 모습이었다. 엔저는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미움받으면 분명 상처 입을 것이다. 헤리엇의 생각을 안쉘이 알았다면 엔저가 다른 사람들을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겠지만, 그는 현재 이 자리에 없었다.

엔저와 오래된 악연이라면 헤리엇이 모르는 그의 모습을 잔뜩 알고 있을 것이다. 착한 엔저를 괴롭히고 미워하는 이들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지만, 그들 나름대로 자신이 모르는 엔저의 모습을 알려 줄지도 몰랐다. 아까 낮에 고려인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귀고 있으면서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몰랐던 거야?”

헤리엇은 엔저에게 완벽한 연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저 녀석들을 처리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일단 그들 뜻대로 따라가 준 뒤에 설득해서 엔저의 예전 모습들에 대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후를 알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그렇게 헤리엇은 순순히 그들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무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분 나쁘게 웃으며 헤리엇을 끌고 차에 태웠다. 헤리엇의 첫인상은 사람의 경계심을 쉽게 허물어트리는 순한 사람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들은 헤리엇을 따로 포박하진 않았다. 아마 제압한다면 금방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헤리엇이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면 몰살당할 뻔했다는 걸 그들만 모르고 있었다.

헤리엇은 엔저에게 해코지하려는 놈들의 배후를 알아내고 그 애가 더는 상처 입지 않도록 잘 설득하면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를 감히 괴롭힐 심산이라면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결론을 내린 그는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작게 웃었다.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다.

*  *  *

안쉘은 오랜만에 앤과 만났다. 전쟁이 끝난 이후 두 사람은 늘 바빴고 인어이자 왕족인 앤은 육지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이건 안쉘이 어떤 노력을 퍼부어도 해결이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앤은 헤리엇에게 지은 죄가 있다며 항상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다.

그래서일까. 인어는 헤리엇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그리고 안쉘이 가장 싫어하는 개구리 브레든을 꺼내 노래를 부르더니 지금 당장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떼를 썼다. 안쉘은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나중에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앤. 아직 인어를 노리는 테러범을 전부 소탕한 것도 아니니 몸을 사리는 게 어떨까요.”

“알고 있어요, 안쉘. 하지만 우리가 결국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그들도 언젠간 알아줄 거예요. 그때가 되면 당신과 저는 조금 더 자유롭게 함께할 수 있을 겁니다.”

안쉘은 솔직히 앤이 어딘가의 꿈속에서 사는 사람 같았지만 굳이 반박하는 의견을 내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안쉘이 말한다고 화를 내지는 않겠지만 앤은 분명 속으로 상처받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요즈음 서로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도 없었는데 이런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우리, 할 얘기가 따로 있잖아요.”

안쉘이 팔을 뻗어 두 손으로 앤의 뺨을 붙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좋은 분위기도 잠시,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쉘은 모처럼 연인과 함께하는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에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네.”

앤이 신경 쓰지 말라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안쉘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었다.

“무슨 일이죠?”

- 오드레입니다. 각하, 그것이…….

“…….”

오드레는 허튼 일로 안쉘을 귀찮게 하지 않는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고려인이 은퇴하고 처음으로 공채를 통해 보좌관으로 들어온 오드레는 생각보다 철저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 헤리엇 님께서 납치당한 것 같습니다.

“…누가요?”

- 헤리엇 님 말입니다. 엔저 대령님의 연인이신… 그분이요……. 오늘 경호를 위해 배치했던 이들에게 보고를 받았는데, 습격으로 전원 정신을 잃었고, 헤리엇 님은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안쉘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네, 그러니까… 헤리엇 님께서… 납치를…….”

그 납치범들 쪽이 더 걱정인걸…….

헤리엇 걱정보다는 그가 저지를 일에 대한 뒷감당을 더 걱정하는 대통령님이었다.

*  *  *

일단 납치된 건 사실이었기에 안쉘은 엔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평소였다면 다섯 번은 넘게 걸어야 받았을 양반이 이번에는 웬일로 한 번에 받았다.

“대령님. 헤리엇 님께서 납치당하셨습니다.”

- …장소는?

‘…이 인간이 왜 이렇게 화가 났지?’

목소리만 듣고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안쉘이 말을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무쉬를 비롯한 반란군의 거처는 대충 파악했습니다. 모산 쪽에 자리한 폐병원에서 소음이 들린다는 민원이 꾸준히 들어왔다고 합니다.”

안쉘은 엔저의 이상한 반응에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라도 헤리엇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싶었다. 헤리엇이라면 무쉬와 그 일당 정도는 혼자서 너끈히 때려 부수고 당당하게 걸어 나올 무서운 양반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태평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 그리고… 고려인은 어디에 있지?

“고려인이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그렇군. 끊어.

“지원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끊기고 말았다.

안쉘은 헤리엇 앞에서만 발동되는 매너가 자신에게도 좀 적용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앤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헤리엇 님께서 납치를 당하셨다고……. 솔직히 헤리엇 님이 다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 지원군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한 안쉘이 다시 수화기를 들어 오드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에서 대기 중이던 오드레는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바로 출동할 수 있게 소대를 꾸려 주십시오. 엔저 대령님을 보조하며 인질을 구출할 수 있는 인원이면 됩니다.”

- 알겠습니다.

오드레는 유능한 보좌관이라 금방 꾸려서 보낼 것이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전에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인질은 웬만해서는 건들지 말라고 당부해 주십시오.”

- 네? 네… 알겠습니다.

오드레는 솔직히 대통령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명령인지라 알겠다고 대답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안쉘은 우려했던 일이 결국 터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

납치범들이 헤리엇을 끌고 간 곳은 산속에 자리한 폐병원이었다. 예전에는 꽤 큰 정신병동이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에 돌연 문을 닫았고, 이후로 방치되었다시피 하여 폐건물이 된 곳이었다.

산속에 있는 것도 그렇고 폐건물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가진 것 때문에 공포 체험 같은 걸 즐기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외에는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반란군들은 이런 곳을 잘도 찾아내 몇 주 전부터 차지하여 일반인들이 아예 지나다니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숨을 생각이 없는 것인지 소란스럽게 굴기도 해서 동네 주민들의 불만과 민원도 상당했다.

헤리엇은 무쉬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6층 높이의 커다란 병원 건물 곳곳은 검게 물들어 있었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 상당히 어두웠다. 그런 곳 여기저기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름 훈련받은 사람들인지 기척을 잘 숨기고는 있었지만, 살기는 없애지 못한 듯했다.

대충 인원은 백여 명 정도일까. 저들 중에 능력자는 아마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놈을 지하 수술실에 가둬 놔!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진 않으니 대충 쓸모 있는 놈들로 감시 붙여 놓고.”

헤리엇은 자신을 거칠게 미는 무쉬의 손길을 은근슬쩍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피했다.

그는 엔저 맥과이어의 연인을 납치했다는 것에 희열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헤리엇을 망가뜨리고 싶지만, 더 재미있는 것을 위해 참고 있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적임에도 헤리엇을 지하로 끌고 가는 이들의 시선에는 동정이 어렸다.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에 익숙한 헤리엇은 지금 이들과 함께 폐건물의 계단을 내려가는 이 상황이 어딘가 낯익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쾌한 기시감에 헤리엇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헤리엇이냐.”

알시타가 죽고 제이든이 더는 보육원에 찾아오지 않았을 때, 헤리엇을 찾아온 군인들이 한 말이었다. 보육원에 군인들이 찾아온 적은 많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헤리엇을 부른 적이 없었다.

헤리엇은 보육원에서 가장 금전적으로 지원을 많이 하는 후원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대했던 보육원은 뒤에서 쓸모없어진 아이들을 군 연구시설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부유한 후원자가 사라지자마자 보육원에서는 망설임도 없이 헤리엇을 팔아넘겼다. 이것 때문에 제이든은 헤리엇에게 가장 큰 죄책감을 느끼고 항상 미안하다며 엉엉 울곤 했었다.

“아.”

헤리엇은 지하로 내려가 수술실에 도착할 때까지 느껴지는 기시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드디어 알아차리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 공간은 헤리엇이 인체 실험으로 끌려갔던 군 연구소의 분위기와 매우 비슷했다.

퀴퀴한 냄새, 축축하고 여기저기 알 수 없는 것들이 묻어 있고 방 안에 흐르는 서늘한 기운은 물론 수술실 가운데에 수술대가 놓여 있는 점마저 똑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군 연구소는 수술대 위에 피와 고문 도구 같은 것들이 늘어놓아져 있었으나 여긴 그래도 곰팡이만 슬어 있다는 점이었다.

헤리엇은 조용히 수술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서워서 입도 뻥긋 못하는 건가? 조용한 놈이군… 벙어린가?”

“영 입맛이 좋지 않아……. 민간인을 상대로.”

혀를 쯧쯧 차던 이들이 헤리엇을 홀로 두고 수술실 문을 닫았다. 밖에서 걸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어딘가에서 구해 온 자물쇠라도 달고 있는 모양이었다.

헤리엇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밖으로 나가 동태를 살필 예정이었다.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는 수술대 위에 걸터앉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려고 했다.

“선배.”

헤리엇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엔저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어두운 수술실 안에는 자신뿐이었다. 또다시 퀴퀴한 냄새가 콧속 가득 들어왔다.

“선배. 제가 이곳에서의 기억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군 연구소, 그 수술실에서 있었던 일들은 헤리엇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엔저가 말한 대로 지금 헤리엇은 그런 것보다 수술실에서 엔저에게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엔저는 실험받은 날이 제법 강렬했다고 말하는 헤리엇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그런 것 따위는 기억나지 않게끔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뜨거운 손으로 헤리엇의 맨살을 만졌고, 다리를 벌리게 했다. 버겁고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안쪽이 가득 찬 이상한 감각은 쾌감이라기보단 다른 것에 더 가까웠다.

“헤리엇.”

“…음.”

헤리엇은 머릿속에서 그때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수술실에 있는 CCTV는 고작 두 대뿐이다. 사각지대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먼지가 가득한 구석의 소파 위에 앉은 헤리엇이 천천히 바지 버클을 내렸다. 이런 곳에서 엔저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헤리엇의 성기가 빳빳하게 발기되어 있었다.

“하아… 엔저.”

귀두를 엄지로 쓰다듬고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조금 서툴렀다. 헤리엇은 자위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자신의 것보다는 엔저의 것을 만진 적이 더 많았다. 엔저의 것과 차이가 있다 보니 느낌이 달랐다.

“엔저, 엔저…….”

손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밭은 숨이 뜨거워지고 땀 한 방울이 이마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헤리엇은 엔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엔저의 이름을 부르다가 결국 숨을 삼키며 사정했다. 늘어지는 숨을 고르며 헤리엇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엔저가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귀여운 자신의 후배를 보고 싶었다. 절대로 자신의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을 자신만의 연인을 눈에 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설득이고 뭐고 엔저를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헤리엇이 힘이 풀린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 문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렸다.

헤리엇은 손잡이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했다. 이윽고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술실 문이 끼익하며 열렸다. 그새 단정하게 매무새를 정리한 헤리엇이 문에서 조금 떨어져서 들어오려는 사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퀴퀴한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강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냄새를 맡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헤리엇이 엔저를 떠올리며 자위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사내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술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대머리에 이상한 콧수염을 가진 자였다. 그는 무쉬보다도 더 계급이 높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리엇을 직접 이곳으로 데려온 무쉬가 대머리의 뒤에 묵묵히 서 있었다.

무쉬는 얼굴의 흉터를 씰룩거리며 헤리엇을 노려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를 뒤에 대기시킨 대머리는 먼지가 가득한 곳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헤리엇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남자잖아.”

“네.”

“예쁘장하게 생기지도 않고 아담한 것도 아닌데? 이거 가지고 물건이 서겠어?”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기가 막힌다는 투로 소리를 높였다.

“엔저 그놈도 참 별난 식성이야. 그러니까 고자라는 소문이 돌았지……. 이거 내 뒷구멍도 노렸던 거 아니야?”

객관적으로 봤을 때 대머리는 못생긴 축에 속하는 사내였다. 헤리엇은 희미한 이미지이지만 나름 준수한 외모를 가진 편에 속했던지라 그의 부하들은 어설프게 웃으며 동조했다. 그들은 엔저를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머리는 가소롭다는 얼굴로 헤리엇을 품평하듯 이리저리 훑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다 피운 시가를 바닥에 툭 버리면서 무쉬에게 당부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데려온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당연히 있겠지?”

무쉬는 대머리의 말에도 코웃음을 치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연인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헐레벌떡 연락을 취해 올 게 분명해!”

무쉬의 호언장담에도 대머리는 어깨만 으쓱하고 주머니에서 시가 하나를 또 꺼내 입에 물었다. 헤리엇은 무쉬가 반말을 하고 있어도 저 대머리가 결정권자이며 습격자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를 이용해서 엔저를 꾀어내면, 어쩔 생각인가요.”

대머리는 네까짓 게 알아봤자 뭐 어쩔 수 있겠냐는 얼굴로 순순히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

“감히 우리에게 덤빈 놈의 목숨을 아주 잔인하게 끊어 줄 생각이지.”

“흥. 사지를 잘라 몸통만 남긴 다음 전 세계에 웃음거리로 만들어 줄 생각이다. 네 덕분에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어.”

죽일까?

헤리엇은 짧게 고민했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납치를 감행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는데 이들은 엔저에게 유감을 아주 많이 가진 집단인 것 같았다. 더불어 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반정부군이라는 것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이 가진 원한을 정부의 가장 상위에 있는 안쉘이 아니라 착한 엔저에게 향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은 그냥 개인적인 이유로 엔저를 싫어하는 거다.

헤리엇은 엔저가 너무나도 안타깝고 불쌍했다. 이런 못된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괴롭힘을 참아 가며 지냈을 엔저가 가여웠다.

“불쌍한 엔저…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미움받는 사실을 알면 무척 슬퍼할 텐데…….”

헤리엇의 말은 고저도 없고 낮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수술실에 있던 이들 모두가 헤리엇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부터 했다.

“…미친놈인가?”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엔저 맥과이어가 어떤 놈인가. 받은 원한은 천배로 갚아 주는 아주 악독한 놈이었다. 게다가 도움을 받아도 갚기는커녕 도와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면서 등을 돌리는 희대의 사이코패스였다.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며 주변의 시샘을 많이 받긴 했다. 그리고 그 시샘에 경도되어 그에게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하려 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반불구나 폐인이 되어 군을 떠나야만 했다.

“그놈이 네 앞에선 자상한 남자 친구 역할을 해 준 모양이지. 그놈은 말이야……. 악독하기 그지없는 사이코패스라고.”

헤리엇은 별 시답지 않은 트집을 잡는 무쉬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은 엔저를 이해할 생각도, 헤리엇의 말에 설득당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많은 대화를 나눠 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엔저를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놈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해 엔저를 다치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더 들어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이 내려졌다. 그런데 오늘따라 타이밍이 영 맞지 않았다. 헤리엇이 저들을 향해 달려들기 직전, 멀리서 다급하게 달려온 이가 수술실 문을 벌컥 열어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뭐야!”

한참 엔저의 험담을 하고 있던 무쉬가 버럭 화를 냈다. 부하는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와 무쉬에게 보고했다.

“대장님, 그게… 녀석이 쳐들어왔습니다.”

“녀석?”

“엔저 맥과이어, 그놈이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와 있습니다.”

대머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친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돌아 있을 줄이야.”

그들은 설마 엔저가 이 정도로 사랑에 미쳤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인을 납치했다고 혼자서 적의 기지에까지 쳐들어올 줄이야. 연락망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락해 협상하리라 생각했던 그들은 크게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우왕좌왕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대머리가 헤리엇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여긴 인질이 있으니까 우왕좌왕하지 마! 여차하면 이놈을!”

하지만 대머리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헤리엇이 대머리의 목덜미를 붙잡고 명치를 무릎으로 올려 쳤기 때문이다.

“커헉!”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머리가 위액을 토하며 눈깔을 뒤집었다. 헤리엇은 곤란한 미소를 유지하며 양손으로 대머리의 머리를 붙잡고 꺾어 버렸다.

그렇게 대머리는 반항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절명해 버렸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죽어 바닥으로 쓰러지는 시체에 사내들은 한동안 넋을 잃은 채 서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순한 얼굴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을 제압하고 죽인 것이다. 쓰러지는 대머리의 허리춤에서 총을 빼낸 헤리엇은 경악하는 이들에게 총을 한 발씩 쏴 주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무쉬는 실전 경험이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피했다가 능력을 사용했다. 중력이 한순간에 2,000kg을 웃돌며 헤리엇을 공격했다.

그러나 헤리엇은 절름발이인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뒤로 물러나 살짝 숨을 골랐다. 엔저에게 가장 적의가 많아 보이는 저 녀석을 먼저 처리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쿵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기 시작한 콘크리트 바닥을 내려다본 헤리엇은 이곳에선 자신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공간이 제한적이라 잘못해서 저 능력에 걸려 버리면 제아무리 헤리엇이어도 뼈가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다.

무쉬를 향해 총을 한 발 쏘자 그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총알은 그에게 닿기 전에 바닥으로 처박혔지만 헤리엇은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옆으로 크게 두 발자국 움직여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다리가 성한 일반인이 뛰는 것보다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잡아!”

무쉬가 소리쳐 명령했지만, 그곳에서 두 다리가 성한 채 서 있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 절반, 그리고 이미 생을 다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들이 절반이었다.

실제로 헤리엇은 집요하게 적들의 무릎과 허벅지를 겨냥해 쐈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죽였다. 민간인이라기엔 고도로 훈련된 자의 움직임이었다. 심지어 도망가는 헤리엇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 개 같은!”

무쉬는 열 명이 넘는 훈련된 장정을 제압하고 도망쳐 버린 헤리엇의 모습에 약이 잔뜩 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부르르 떨었다. 그는 한참 동안 욕설을 내뱉으며 펄쩍 뛰다가 널브러진 놈들의 품에서 총을 꺼내 달려 나갔다.

무쉬는 늦은 나이에 능력이 발현되어 아카데미에 입학한 케이스였다. 그의 부모는 능력자들이긴 했지만 살상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서 군에서도 밑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늦게라도 발현된 자신의 능력이 살상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당장 전쟁에 나가 적을 물리치고 공로를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엔저와 아카데미 동기였다. 엔저는 무쉬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을 때 능력이 발현되었고 심지어 동기들 사이에서도 어린 축에 속했다.

능력은 두 번 말할 것도 없었다. 지상 최강이라며 아카데미 내에서 떠받들어 주는 건 기본이었다. 졸업 후, 전쟁에서도 최전방에 서서 활약해 국민 사이에서 영웅 소리를 들었다.

TV나 라디오, 신문에서도 그의 이름이 매일같이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엔저 맥과이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인어들의 끄나풀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무쉬는 엔저를 질투했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이 심했다. 그나마 숨기는 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건들지 않았을 뿐이지 하루에도 몇 번씩 엔저를 바다 한가운데에 처박아 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단테 막심 대통령의 눈에 들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무쉬는 단테가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정신조작 능력으로 많은 차별을 받으며 쟁쟁한 능력자들 사이에서 숨죽여 지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단테는 무쉬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바로 알아챘다. 무쉬와 단테가 만난 시기에 단테는 테러 때문에 크게 충격을 받아 잠깐 판테니엄관을 나와 자택에서 휴식하겠다고 공표한 상태였다. 사실 뒤에선 엔저를 대신하는 인재들을 찾고 있었지만 말이다.

단테는 엔저라는 폭탄의 위험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놈이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로 엔저를 이용해 먹었지만 감수해야 할 위험 요소도 상당히 많았다.

무쉬는 그런 엔저의 대항마로 만들 의도로 단테가 선택한 군인 중 한 명이었다. 단테의 정신조작은 그의 정신적으로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조작된 자기 생각을 맹신하게 만든 것이다.

단테가 죽었음에도 무쉬의 세뇌는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작자를 잃은 세뇌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이제는 엔저 맥과이어에 대한 열등감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망가진 것에 대한 증오까지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가며 엔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숨어 다니며 근근이 사는 자신과 반대로 좋은 집에서 멀쩡한 얼굴로 연인과 알콩달콩하게 산다는 사실까지 확인하니 억울했다. 그런 것들이 뭉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엔저… 맥과이어!”

그래서 이번에 그 연인이라는 놈을 이용해 엔저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무산되었다.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했다.

헤리엇을 따라 수술실 밖으로 뛰쳐나간 무쉬의 앞에 커다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올려다보니 증오스러운 엔저가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근접에는 강했지만, 원거리에는 약한 무쉬에게 엔저의 바람 능력은 위협적이었다. 그것마저도 무쉬는 자존심이 상해 욕이 저절로 나왔다. 흙먼지를 가득 머금은 회오리에 닿는 것들이 형체도 남지 않고 바스러졌다.

“감히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네 녀석은 평온하게 살겠다니! 개 같은 자식!”

무쉬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피를 토할 듯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두 놈 다 아주 잔인하게 죽여 주마! 흔적도 없이 납작하게 만들어 주마!”

무쉬의 고함은 휘몰아치는 공기 중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엔저는 능력으로 주변을 초토화로 만든 뒤 남아 있는 반란군들을 모두 제압했다. 몇몇 부하가 엔저의 힘을 눈앞에서 보고 겁에 질렸는지 이미 양손을 들고 항복한 상태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엔저가 드디어 무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내지르는 무쉬에게 물었다.

“네가 누군데.”

“…….”

무쉬의 눈이 잔뜩 부릅떠졌다. 그는 엔저와 동기였고 함께 수업을 들었다. 같은 해에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사관 교육도 같이 마쳤다. 무쉬는 엔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누군지도 몰랐다. 무쉬의 이마에 핏대가 잔뜩 솟았다.

“엔저… 엔저 맥과이어!”

“그래서 네가 누군데, 이 씹새끼야.”

엔저는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지 손을 흔들었다. 이제 너 같은 놈에게 볼일은 없다는 성의 없는 몸짓이었다.

바로 그때, 엔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는 무쉬를 능력으로 날려 버리려고 손을 휘젓던 것을 멈추고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있어 하나만 남은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건 마치 길을 잃고 헤매던 미아가 부모를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무쉬는 갑작스럽게 변한 엔저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뒤에서 온화한 목소리를 들었다.

“엔저는 마음이 여린 아이인데, 너무 심한 욕은 삼가시면 안 될까요?”

뒤에서 들리는 나긋하고 온화한 목소리에 무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헤리엇이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엔저와 눈을 마주쳤다. 무쉬의 뒤에 바짝 선 헤리엇은 엔저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엔저는 급하게 나왔는지 조금 헝클어진 사복 차림이었다. 문득 엔저의 제복 모습이 조금은 그립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가 자신에게 능력을 사용하려는 무쉬의 무릎을 발로 밟았다. 육중한 그의 몸이 바닥을 향해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는 듯했다.

하지만 헤리엇은 무쉬가 숨 고를 틈도 없이 팔꿈치로 목덜미를 찍어 고개 숙이게 만든 다음 무릎으로 관자놀이를 가격해 기절시켰다. 이대로 죽여 버릴까 했지만, 왠지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배,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십니까?”

아무리 헤리엇이 대인 전투에 능하다고 해도 5년 전에 입은 부상으로 그의 왼쪽 무릎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을 엔저는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었다.

“응. 괜찮아.”

“…선배.”

엔저는 머뭇거리며 능력을 회수하고 땅에 착지했다. 그는 살짝 길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헤리엇에게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배후를 캐낼 정도의 놈들은 아닌 것 같아서 처리했는데 안쉘이 곤란하게 되었을까?”

딱히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말투는 조금 미안한 사람처럼 보였다. 눈썹이 팔자로 내려가 있었지만 그건 미안한 것보다는 곤란한 사람 같았다.

“처리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며 선배에게 절을 해야 할 놈입니다. 그것보다 선배… 할 말이 있습니다.”

헤리엇이 고개를 살짝 모로 틀어 갸웃거렸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남들이 보면 저 덩치를 어떻게 아기 고양이로 볼 수 있냐고 분개했을 테지만 이미 헤리엇의 눈에는 콩깍지가 가득 씌어 있는 상태였다.

“왜 그러니?”

“화나셨습니까? 제가 거짓말해서 싫어지신 건 아니죠?”

헤리엇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이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목덜미를 잡고 싶을 정도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제가 거짓말을 했잖아요.”

헤리엇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살짝 붉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엔저는 헤리엇에게 직접적으로 단것을 좋아한다고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저 헤리엇이 준 게 단것일 뿐이었다.

헤리엇은 단것을 가장 좋아했고 자연히 단 음식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래서 엔저에게 주머니에 있는 걸 하나둘씩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싫거나 좋다는 말도 없이 묵묵히 받아서 바스락거리며 입에 넣는 엔저가 너무 귀여워서 주게 된 걸, 단걸 좋아한다고 제멋대로 착각해 버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오해를 풀어 주기엔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해서 허겁지겁 이곳까지 달려온 엔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시무룩하게 자신의 눈치까지 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역시 자신의 후배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역시 이렇게 착하고 순한 아이를 괴롭히는 놈들이 나쁜 것이다.

헤리엇은 그렇게 혼자 납득하며 말없이 엔저의 뺨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의 얼굴에 먼저 키스해 주었다. 풀이 죽어 반성 중이던 엔저는 그저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선배의 입술을 탐했다.

“으… 으으…….”

“살려 줘… 으윽… 너무 아파…….”

물론 반쯤은 날아간 폐건물 공터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만 아니면 더없이 로맨틱한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들의 부상 따위 안중에도 없는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  *  *

안쉘의 얼굴이 떨떠름했다.

“진짜 무쉬네요.”

이놈을 찾으려고 고생했던 지난 5년을 떠올리며 안쉘은 잠시 눈물을 삼켰다. 무쉬는 과격파 반정부군의 대장 격으로 하도 신출귀몰하여 행적을 쫓기가 어려웠다.

거기다가 지하 수술실에 죽어 있는 대머리는 놀랍게도 반정부군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얼마 남지 않은 중추인물들이 대거 죽었으니 이제 곧 반정부군도 뿔뿔이 흩어질 일만 남았다.

아직 완벽하게 전란을 수습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큰 가지들은 쳐냈으니 뿌리가 썩는 일만 기다리면 된다. 남은 잔챙이들은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곧 괴멸할 것이다.

엔저를 따라 뒤늦게 폐가로 진입한 소대는 대통령이 직접 들어서자 놀라서 허둥지둥했다. 헬기까지 타고 상황을 보러온 안쉘은 저 멀리서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사람의 눈이 하트 모양으로 바뀐 듯한 환각이 보일 만큼 엔저를 향한 헤리엇의 시선이 뜨거웠다. 누구도 아닌 저 양반이 저렇게 변하다니 세상은 살고 봐야 한다며 안쉘은 오드레와 함께 다가갔다.

“헤리엇 님, 대령님!”

헤리엇의 시선이 겨우 엔저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안쉘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안쉘의 예상대로 헤리엇은 정말 작은 생채기도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저 괴물 같은 커플과 적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 안쉘은 두 사람을 헬기로 이끌었다.

대통령과 그의 손님만 탈 수 있는 헬기에는 대통령 전용기라는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뜰 때는 주변의 항공이 일시적으로 궤도를 변경하고 길을 터 주는 게 의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안쉘은 어지간해선 육지로 이동하는 걸 선호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용했다.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헬기에 올라탄 안쉘은 예전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자신이 직접 보고를 올렸다. 심지어 엔저는 이제 군인도 아닌데 말이다.

“무쉬는 그동안 철저히 본인을 숨기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대령님께서 나타나자마자 바로 모습을 드러낸 걸 보니 소문이 맞았나 봅니다.”

“소문?”

“대령님은 어린 나이에 이룬 업적이 많으시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사방에 적이 많습니다. 무쉬 이자는 옛날부터 대령님의 험담을 하고 다녔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요. 대령님을 보좌하고 있을 땐 자주 마주치기도 했거든요. 소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걸려들 줄은.”

안쉘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대령님이야 워낙 주변에 관심이 없으셨으니까요…….”

이전부터 무쉬와 일면식이 있던 안쉘이었지만 엔저는 정말로 그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헤리엇 님. 골칫덩이 하나를 눈앞에서 치웠네요.”

안쉘이 냉정하게 말하고 감사의 표시를 했다. 헬기가 착륙하고 경례한 뒤 수행원들과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헤리엇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대통령이 되고 안쉘이 정말 많이 컸네……. 제법 의젓해진 것 같아.”

엔저는 코웃음을 치며 헤리엇의 허리를 붙잡고 부축할 뿐이었다.

*  *  *

다음 날 헤리엇은 안쉘의 보좌관인 오드레를 통해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무쉬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반정부군으로 내란을 일으켰으며 테러를 일삼아 민간인을 휘말리게 하여 상해를 입힌 죄였다. 헤리엇은 하루 만에 그가 누군지 잊었지만, 오드레의 설명을 통해 어제 자신을 납치한 흉터투성이의 사내임을 깨달았다.

전화를 끊은 헤리엇의 옆에는 곤히 잠든 엔저가 누워 있었다. 그는 상의를 탈의한 채여서 아침부터 헤리엇의 눈을 호강시켰다. 엔저가 군을 벗어나 5년간 재활 훈련을 하면서도 근력 운동을 빼먹지 않은 효과가 이렇게 발휘됐다.

“…선배?”

헤리엇이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을 말없이 감상하고만 있자 의문이 들었는지 엔저가 눈을 떴다. 오른쪽 눈을 심하게 다친 탓에 두 개의 루비를 볼 순 없지만 아름다운 붉은빛 하나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헤리엇은 엔저의 옆에 함께 누워 그와 눈을 마주했다.

“네 제복 입은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어.”

“…….”

“정말 너무 멋지고, 근사했지…….”

엔저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군으로 복귀할까요?”

헤리엇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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