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마지막 임무
고려인은 요즘 사는 게 매우 즐거웠다.
단테의 노예에서 대통령 보좌관의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살맛 나는 인생이었다. 월급도 부족하지 않고 연금이 보장된 삶, 얼마나 멋지고 안정적인가.
“이래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해. 암…….”
고려인은 스스로 생각해도 엔저 맥과이어를 비롯해 대통령이 된 안쉘까지 금으로 된 동아줄을 잘 잡았다고 자부하며 판테니엄관에 들어섰다.
헤실헤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니 직장마저도 향기 나는 꽃밭으로 보였다. 사실 고려인이 아침부터 이렇게 기분이 좋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 중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이를 판테니엄관 정원에 들어서면서 발견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마이 걸프렌드! 뭐해?”
“…사람들 있는 데서 그렇게 말하지 좀 마!”
오늘도 안쉘과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것인지 안젤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소리쳤다. 주근깨 가득한 뺨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저 시골구석에 있을 때부터 묘하게 어울려 잘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보다 먼저 안쉘과 식사 약속을 잡았을 줄은 몰랐다.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고려인은 18구역의 아량이 넓은 남자였기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뭐야… 기분 나쁘게…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어?”
신랄하게 말하는 안젤라의 곁에 착 달라붙은 고려인이 능글맞게 웃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제발 좀 닥쳐.”
“어젯밤에 우리가 나눈 뜨거운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녹음했는데 들려줄까?”
안젤라는 결국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고려인의 명치를 때리고 도망쳤다. 고려인은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뿌듯하게 웃었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비실비실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좋은 스트레이트였다. 명치를 지나 척추까지 후들거리는 느낌이 드는 게, 안젤라가 능력을 사용하면 아마 뼈째로 가루가 되어 바스러질 게 분명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 가며 고려인이 대통령 집무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크는 현대인이라면 갖춰야 하는 기본 소양이지만 고려인은 부러 무시하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아주 중요한 보고가 있습니다. 글쎄 안젤라가 어젯밤에 내 고백을… 각하?”
저 인간은 오늘 왜 저러고 있나.
고려인은 집무실에 사람이 들어왔는데 고개도 돌려 보지 않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안쉘의 상태를 눈으로 훑었다. 신이 나서 수다를 떨고 싶었는데 받아 줄 사람의 안색이 너무나도 좋지 않아 보였기에 차마 가볍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안쉘은 밤이라도 새운 사람처럼 초췌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하고 눈 밑으로 드리운 검은 그림자가 매우 짙었다. 항상 칼같이 나눴던 2대8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데?”
“…….”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정말 이곳에서 밤을 새운 듯 그의 옷이 어제 입었던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맛이 가 있지… 여보세요, 각하. 정신 차려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얼이 빠진 거야?”
그것도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대답을 기다려 봐도 안쉘은 아무런 대답 없이 심각한 얼굴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수도에 반란 분자라도 들어왔어?”
말을 하는 중에도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단테의 잔당이 이곳저곳에서 테러를 일으키긴 했지만, 최근 그들의 동태를 봤을 때 움직인다는 소식도 없었다. 막시무스가 있는 지역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사람을 파견했으니 크게 걱정할 일도 없었다.
그럼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그 뒤로도 계속 말이 없다가 고려인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때쯤 가까스로 안쉘이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엔저 대령님께선 지금 어디라고 합니까?”
진지하게 묻는 안쉘의 말에 고려인이 찝찝한 표정으로 수첩을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쉘의 기세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격식을 차린 말투로 줄줄 수첩 안의 내용을 줄줄 읽었다.
“각하께서 보내신 21구역 왕복 티켓의 돌아오는 항공편 날짜는 나흘 뒤입니다.”
고려인은 대답을 듣고도 나아지지 않는 안쉘의 얼굴빛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대령님께 연락해 급히 귀환 요청을 할까요?”
그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통령 집무실이 벌컥 열렸다. 왜 노크도 할 줄 모르는 사람만 집무실을 방문하는지 신경 쓸 새도 없이 안쉘이 벌떡 일어나 방문객을 맞이했다.
“대령님.”
때맞춰 나타난 엔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장교모를 고쳐 쓰면서 집무실을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 헤리엇도 따라 들어왔는데 군복을 차려입은 엔저와 달리 제법 편한 복장이었다.
헤리엇은 심각한 분위기가 흐르는 내부를 천천히 훑어보면서 안쉘과 고려인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은 개뿔.’
고려인은 수첩을 닫고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장은 저 마이페이스가 장점이고 좋기는 한데 가끔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르는 게 흠이었다.
그리고 헤리엇과 알콩달콩 느긋한 여행을 즐기려고 했던 엔저 맥과이어가 저런 살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고려인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엔저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평소라면 눈치를 봤을 안쉘은 인내심 따위 멀리 보내 버린 사람처럼 급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들어 올렸다.
“대령님. 이것 좀 봐주십시오.”
고려인은 흘깃 본 서류 안에 있는 ‘초대 대통령과 인어들의 협약’이라는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왜 저렇게 심각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곧 엔저의 곁에 서서 헤리엇과 함께 서류를 읽어 보던 고려인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에 몸을 떨었다.
‘이거 내가 봐도 되는 거 맞아?’
일급 기밀, 아니 그보다 더 은밀한 내용이었다. 정말로 인간이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하는 게 괴로울 정도로 끔찍했다. 이 정도면 거짓말이 틀림없다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엔저 역시 이 정도까지 생각하진 못했는지 안 그래도 찌푸린 눈살이 더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헤리엇이야 처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얼굴의 소유자라 고려인과 눈이 마주치고도 인자하게 웃어 줄 뿐이었다.
그의 인자한 미소에 누군가를 떠올린 고려인은 다시 한번 몸을 움찔 떨었다. 단테 막심도 저렇게 온화한 표정으로 사람 뒤통수를 치는 게 특기였다.
“마침 다 모여 있었네. 우리도 할 말이 있었거든.”
헤리엇은 고려인과 눈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막시무스의 저택이 불타는 바람에 서류들도 함께 잿더미가 되어 버렸지만, 다행히 내용은 전부 외워 두었다. 다만 구두로 설명을 듣고 이해하기엔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고려인은 안쉘에게 보고해야 하는 헤리엇이 왜 자신을 보고 이야기하는지 처음엔 어리둥절하게 듣다가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래서 지금 계획대로 핵의 버튼을 눌러 버린 것 같아.”
“…….”
아… 인생… 짧은 행복이었다.
고려인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아름다웠다. 햇볕이 들어오는 정원은 액자 속의 그림처럼 굉장히 화사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인간 만사 새옹지마라더니. 자신이 태어난 18구역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던 구절을 중얼거리며 고려인은 인생의 철학에 대해 탄식했다.
안쉘에게 자랑하려던 좋은 일은 바로 고려인이 어젯밤에 겪은 경사였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걸었던 전화를 안젤라가 받아 주었다. 설마 진짜로 받을 줄은 몰랐기에 고려인은 안젤라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횡설수설하며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렸다.
그것을 다 들어 주고 있던 안젤라는 실소했지만, 고려인은 어쨌든 그녀가 웃어 주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부풀었다. 안젤라의 웃음소리에 용기를 낸 고려인은 ‘좋아해.’ 하고 또다시 고백해 버리고 말았다. 꽃도 노래도 없이 아주 멋없는 전화 고백이었다.
고려인이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탁탁 때린 것과 달리 안젤라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나도… 아마.
”…….“
- 리언이 일도 있고… 바로 대답해 줄 수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아마.
고려인은 그날 밤 행복 지수가 하늘을 찌르는 바람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네가 조사하고 있었다며.”
“…그거, 확실해요?”
“막시무스의 입에서 나온 거니 확실할 거야.”
“…그 늙은이마저 떠벌린 걸 보면… 이미 막아 내긴 늦었단 소리네.”
고려인이 절망스럽게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안쉘은 인어들의 과거와 초대 대통령의 악행에 대한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라 그들의 대화를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고려인의 모습에 의아함을 표출했다.
“무슨 말입니까?”
“중위님. 내가 여태껏 뭘 조사했는지 기억해?”
로봇을 타고 있던 충격적인 첫 만남을 제외하고 그가 일관되게 해 왔던 말이 하나 불쑥 떠올랐다.
“핵… 말씀이십니까.”
장난처럼 말하고 가볍게 지나쳤던 주제였지만 고려인은 분명 엔저의 명령으로 핵을 조사했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었다.
“맞아… 핵을 조사하고 있었지. 그런데 찾지를 못해서… 아직 미완성이거나 저지했다고 생각했어.”
고려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안쉘의 재촉에도 고려인은 앳된 얼굴을 잔뜩 굳힌 채 말을 더 이어 가지 못했다. 안쉘은 이미 수용할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이상 무언가 새로운 충격적인 사실이 머릿속에 들어오면 머리가 펑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려인은 그런 희망을 짓밟으려는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입술을 뗐다.
“인어를 몰살할 수 있는 핵 버튼을 눌러 버렸다는 거야. 에너지를 모으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잘도 놀아났네… 어쩐지 그 늙은이, 죽을 때까지 기고만장하더라니.”
자조적으로 웃던 고려인의 얼굴은 단테 막심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와 표정이 같았다. 요즘 앳된 표정으로 돌아와 나이에 맞게 행동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또다시 악의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무슨 말입니까… 그게.”
안쉘은 인어가 몰살당할 수도 있다는 고려인의 말에 낯빛을 바꿔 진지한 투로 재촉했다. 고려인은 이제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단테가 인어에게만 반응하는 핵을 실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어. 대령님은 그때 내게 은밀하게 조사를 시켰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인어들만 죽일 수 있는 핵 따위가 있을 리 없다고 손 털어 버렸거든.”
‘설마 막시무스 그 비열한 늙은이가 아날로그식으로 남겨 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고려인이 억지로 웃으려고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보았지만 이내 실패했다.
“그러면 바다가, 인어들이…….”
“맞아. 분명 해저 기지에 설치해 뒀을 테니 지금 찾아봤자 막는 건 무리야. 펑 터지는 순간 인어들은 죽고 바다는 다시 방사능 천지가 될걸. 그러면 인류도 머지않아 다 뒈져 버리겠지.”
그게 사실일 리 없다고 말도 안 된다고 안쉘은 손사래를 치고 싶었지만, 점점 더 어두워지는 고려인의 표정에 지금의 상황을 뼈저리게 느꼈다. 인어들은 초대 대통령의 결계 때문에 몇 명의 상위능력을 가진 인어들을 제외하고는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한다.
“…앤에게, 앤에게 연락해야…….”
인어 몇 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안쉘은 더듬거리며 주머니 속의 무전기를 꺼냈다. 이것은 바다에 사는 앤과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단테 막심은 죽어서도 개새끼였다. 한때나마 친손자에게 살해당한 걸 조금이라도 안타까워했던 자신이 머저리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단테 막심은 대체 뭘 위해서.”
그때 묵묵히 안쉘과 고려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헤리엇이 입을 열었다.
“차였다고 하더라.”
“…….”
“…….”
“인어한테 뻥, 차였다고.”
이런 순간에도 농담이라니. 진담이면 열 받는 말이 될 것이고 농담이라면 헛웃음도 안 나오는 재미없는 말이었다.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있나.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안쉘은 갑자기 어깨를 떨며 웃는 미친 듯한 엔저의 행동에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인어들이 다 죽고 세계가 멸망하게 생겼는데도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엔저가 잔뜩 감명받은 얼굴로 속삭였다.
“선배님께서는… 이런 순간에도 재치를 잃지 않으시는군요.”
“그러니?”
헤리엇의 표정이 뿌듯함으로 차올랐다.
“네. 배꼽이 빠졌습니다.”
…저 염병할 놈의 배꼽도 이제 질릴 때가 되었건만 헤리엇은 이번에도 처음 듣는 사람처럼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엔저의 군복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엔저의 배꼽 근처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이런… 엔저, 배꼽이 빠지면 안 되는데.”
“그럼 선배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
“…….”
두 사람은 어느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버렸는지 서로의 눈동자를 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안쉘과 고려인은 순간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망각하고 짜증이 나는지 눈을 잔뜩 찌푸리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저 지랄은 밖에 나가서 해 줬으면 좋겠지만 당장 내일 죽더라도 안쉘은 두 사람이 여전히 무서웠다.
헤리엇이 이제는 엔저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불쌍하게도… 걱정하지 말렴, 엔저.”
“네.”
“…….”
“…….”
헤리엇에게는 미안하지만 안쉘과 고려인의 눈에 엔저는 전혀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고려인이 퀭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안쉘이 직접 마련해 준 고려인의 연구실은 판테니엄관 지하에 있었는데, 헤리엇은 아직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었다. 연구실을 구경한 안젤라의 말에 따르면 군의 정보통신 담당 기관에서 이용하는 슈퍼컴퓨터보다도 훨씬 성능이 뛰어나고 커다란 기기들이 연구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이틀 내내 박혀 있던 고려인은 나오자마자 물 한잔을 마시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런 곳에 숨겨 놨으니 나나 제이든이 찾지 못했지. 우리가 그 귀신보다 독한 늙은이한테 보기 좋게 놀아났어.”
고려인이 들고 온 노트북을 펼치고 키보드를 두드리니 허공에 3D 화면이 떴다.
“동쪽 바다 심해에 해저 기지가 있는데… 동쪽 인어들을 몰살하고 단테가 독자적으로 지은 것이라고 해… 3년 전 그곳에 있는 기기들이 수명을 다해서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기지라고 알려졌어…….”
고려인이 손을 몇 번 휘젓자 화면에 그래프가 떠올랐다. 그래프의 수치는 동쪽 바다의 어느 한 부분을 향해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작동 버튼을 눌렀다고 바로 핵이 발사되는 건 아니라는 거야. 해저 기지에서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하게 만들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해킹을 염려해서인지 메인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자체적인 해류 에너지로 모으는 중인 거지.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리긴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숨을 크게 내쉬며 머뭇거렸다. 이틀 내내 조사하며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해도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뚜렷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야. 단테 이 개 같은 쓰레기가 계획한 일이라 취소 코드가 없거든. 그 자식은 아예 기지를 설계할 때부터 되돌릴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진짜 사이코 같은 새끼라는 거지.”
말은 격하게 하지만 말하는 도중에도 고려인은 헤리엇을 힐끔거렸다. 어쨌든 단테와 혈육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욕하면서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헤리엇은 그 부분에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이틀 사이에 더 해쓱해진 낯빛의 안쉘과는 반대로 혈색이 좋은 게 걱정 없이 잘 지낸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나 늘 그렇듯 새하얗고 희미한 포커페이스를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저 표정이 깨질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내가 백번 천번을 해킹한다고 해도 이미 눌러 버린 버튼을 되돌릴 수가 없으니 직접 해저 기지로 들어가는 방법밖에는 없어. 그런데…….”
“인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습니까.”
안쉘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는 이틀 전부터 당장 바다로 뛰어 들어가 앤을 안전한 곳에 끌고 오는 상상을 몇 번이고 했다.
하지만 북쪽 바다 왕족 중에서도 특출하게 뛰어난 몇 명을 제외한 다른 인어들은 지상을 통해도 다른 구역의 바다로 들어가지 못한다. 안쉘이 아는 앤은 그런 동족들을 버리고 자신만 살고자 지상으로 피신할 이가 아니었다.
“이미 에너지가 모이고 있어서 불가능에 가까워. 인간과는 다른 인어 특유의 생체 파장에 맞춰 개발한 거라 만약 인어들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온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서… 펑 터지고 말걸. 가루도 남지 않고 죽을 거야.”
“그럼…….”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고려인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 * *
헤리엇이 엔저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건 없니?”
그 말에 엔저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저도 선배와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
그렇게 아닌 밤중에 헤리엇은 부엌 테이블에 엔저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전에 안쉘과 술을 마시고 왔던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선배와 같이 해 보지 못한 걸 안쉘이 했다는 것에 질투를 느낀 듯했다.
헤리엇은 질투심 많은 후배가 너무나도 귀여워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술은 많이 마셔 봤니?”
“아니요.”
“아니야?”
“네. 별로 마셔 본 적 없습니다.”
헤리엇은 엔저가 술을 많이 마셔 본 적 없었다는 게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하며 술병으로 가득한 찬장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 중 6구역의 대표적인 술인 보드카였다. 도수가 높고 목 넘김이 좋아 애주가들이 자주 찾지만, 독주이기 때문에 초보자에겐 제법 어려울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요전번의 경험으로 자신의 주량이 세지 않다는 걸 깨달은 헤리엇은 조용히 보드카를 내려놓고 다른 술병으로 손을 옮겨 갔다.
한참을 뒤적거리며 찾아낸 술은 도수가 낮고 스파클링이 들어 있는, 가볍게 마시기 좋은 것이었다.
“선배. 단테와 선배가 혈연관계라고 언질을 준 사람, 혹시 앤이었습니까?”
“어떻게 알았니?”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요즘 선배 앞에 나타나지 않는 점이나, 지상에 오래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확신했어요.”
엔저가 빈 술잔에 술잔을 따르며 대답했다. 헤리엇이 아마 진실을 몰랐다면 단테가 어떻게 사형당하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앤은 단테를 편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진심으로 인간을 용서하고 헤리엇의 행복을 빌었지만 그렇다고 단테를 용서하기엔 죄 없는 많은 인어가 학살당했다. 그래서 앤은 자신이 바라는 최고의 복수에 헤리엇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리엇은 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약간의 언질을 주긴 했으나, 직접적으로 과거를 떠올린 건 헤리엇이었다.
사실 헤리엇은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해도 앤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행동은 최종적으로 자신이 결정한 일이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헤리엇의 모습에 엔저도 더는 묻지 않았다. 헤리엇은 엔저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그의 잔에 따라 주며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테가 죽는 순간까지 절망했던 건 사실이니 앤의 복수도 이제 끝이 났겠지. 그의 성격에 복수라는 감정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헤리엇이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술을 겨우 두 모금 마셨는데도 벌써 그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앤과 안쉘은 좋은 동반자가 될 거야. 두 사람은 닮은 듯 닮지 않았으니까… 후후, 질투 나지 않니, 엔저?”
헤리엇은 술에 취했는지 점차 눈에 욕망의 빛이 서렸다. 이윽고 엔저의 뺨을 감쌌다. 엔저는 그저 헤리엇이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뺨을 붙잡는 모습을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헤리엇이 다급한 몸짓으로 일어나 엔저의 뺨과 턱을 붙잡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드문 편이었기에 엔저는 자신의 입술을 벌려 들어오려는 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시에 선배의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안쉘이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질투의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안쉘 이 개새끼를 사람들 몰래 죽여 버려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엔저는 성급하게 헤리엇의 상의를 벗기고 테이블 위에 그를 눕혔다. 알코올이 들어간 헤리엇은 왠지 모르게 몽롱한 표정이었고, 뺨엔 붉은 기가 가득했다. 벌써부터 헤리엇의 하얀 피부 곳곳에는 꽃 같은 붉은 점이 피어나고 있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목과 쇄골에 입술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목 부근이 새빨개질 때까지 한참을 쪽쪽 빨았다.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체를 일으킨 엔저가 헤리엇의 두 다리를 벌리고 그사이에 몸을 끼워 넣었다.
엔저는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성기로 옷에 감싸인 도톰한 엉덩이를 짓눌렀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몸을 떨다가 신음을 흘렸다.
헤리엇은 엔저의 목과 가슴, 복근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속삭였다.
“취했니?”
“…네.”
사실 엔저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술을 즐겨 마시진 않아도 고작 두 잔으로 취하기엔 그의 핏속에 흐르는 레이첼의 DNA가 너무나도 강했다. 레이첼 맥과이어는 군부에서도 유명한 애주가라 50도가 넘는 보드카를 매일 자기 전에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게 인생의 낙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사람의 아들이며 유일하게 대작까지 하는 엔저가 스파클링 와인 두 잔에 취하는 게 더 이상했다. 다만 같은 양을 마신 헤리엇이 해롱거리며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후후 귀여워라… 고작 이런 걸로 취하다니.”
오히려 자신이 취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헤리엇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엔저를 향해 팔을 뻗으며 허우적거렸다. 금방이라도 세계가 파멸해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은 두 사람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헤리엇은 점점 가까워지는 엔저의 얼굴에 빤히 쳐다보다가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새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헤리엇의 입 안은 비교적 체온이 낮은 피부와 달리 무척 뜨겁고 열정적으로 달라붙어 왔다. 안쪽까지 삼켜 버릴 것처럼 혀를 넣고 목구멍 깊숙하게 박아 넣은 엔저는 끈질기게 움직였다. 숨쉬기가 벅찬지 헤리엇이 헐떡였다. 잠시 입을 뗀 엔저는 하의를 모두 벗어 던지고 헤리엇의 허벅지와 복부에 뜨겁게 발기한 그것을 문질렀다.
알코올 기운 때문인지 헤리엇의 심장이 유난히 크게 쿵쾅거리는 게 느껴졌다. 엔저는 그것마저도 감미로운 음악처럼 느껴져서 벌거벗은 헤리엇의 가슴에 귀를 대고 눈을 감았다.
“…네가 반말하는 것도 기분 좋았어, 엔저.”
“…그렇습니까.”
“귀여운 나의 엔저.”
헤리엇은 그날, 수조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 자신이 세뇌한 사람이 엔저 맥과이어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또한 헤리엇이 살아 있는 한 엔저는 절대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까지 완벽했다.
엔저는 잡고 있던 헤리엇의 다리를 모아 재빠르게 하의를 벗겨 냈다. 그리고 뜨거운 성기가 헤리엇의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의 맨살을 짓눌렀다. 이윽고 성기 끝에서 나온 질척한 액이 하체를 더럽혔다.
엔저는 헤리엇을 어떻게 하면 더욱 더럽힐 수 있는지 매번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같이 굴었다. 헤리엇의 허벅지에 한 번 사정한 엔저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급하게 손을 움직였다.
곧이어 엔저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정액을 훑어 잔뜩 묻히고 엉덩이 사이를 간질였다. 헤리엇은 신음을 삼키며 거칠게 짓쳐 들어오는 손가락을 느꼈다.
“음… 아.”
“…헤리엇.”
속살을 벌리고 내장을 짓누르는 긴 손가락을 버티던 헤리엇이 고개를 젖혀 눈을 크게 뜨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감각에 둔한 헤리엇이지만 항상 이 순간만큼은 저도 모르게 힘이 바짝 들어갈 정도로 작은 자극도 크게 느껴졌다.
익숙해져야 할 감각이 이상하게 갈수록 낯설게 느껴졌다. 헤리엇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내부를 들쑤시는 엔저의 손가락을 버텨 냈다. 신음을 삼키던 헤리엇은 손가락 세 개가 들어오자 엔저의 어깨에 매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은밀한 곳을 풀어 주는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내부를 희롱하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가고 뒤이어 묵직한 것이 내장을 치고 들어왔다.
“…윽.”
헤리엇은 실험당할 때도 잘 내지 않았던 힘겨운 신음을 흘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괴로워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배 속을 가득 채우는 엔저의 묵직하고 단단한 성기가 어떤 한 부분을 자극하며 지나갈 땐 저도 모르게 발끝이 곱아들었다. 점점 거칠어져 가는 행위에 위장 안에 들어 있는 알코올이 역류할 것만 같아 헤리엇은 헛구역질을 하면서 혀를 내밀고 숨을 헐떡였다.
“아… 으음… 엔저… 괴로워.”
“괴로워요? 괴롭기만 해요, 선배?”
“배가…….”
잔 근육으로 촘촘하게 이루어진 마른 아랫배가 굵은 성기 모양으로 살짝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헤리엇은 눈가에 눈물방울을 잔뜩 매달고 제 아래를 응시하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평소 단정하기만 하던 헤리엇의 얼굴이 살짝 몽롱해졌다. 호흡이 벅찬지 혀를 살짝 빼고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이리저리 비트는 헤리엇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엔저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어깨를 붙잡고 위쪽으로 밀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해 놓고 허리를 더 거세게 움직였다. 내벽을 자극하며 들어온 성기는 미끈거리는 느낌과 뜨거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뜨거운 액이 내부에 쏟아졌다.
헤리엇은 몸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퍼지는 감각에 스스륵 눈을 감았다. 헤리엇의 양어깨를 억누르며 목과 귓가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던 엔저는 고양된 흥분감을 느끼며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자… 그럼.”
새하얀 몸뚱이에 엔저가 수놓은 붉은빛으로 겹겹이 퍼진 꽃들이 새겨졌다. 사르륵사르륵 피부를 간지럽히는 엔저의 머리카락에 헤리엇은 몇 번이고 몸을 움찔거리며 허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그럴 때마다 엔저는 강제로 헤리엇의 머리카락에 손을 올려 강하게 그러쥐고 몸을 똑바로 세우게 했다. 아프진 않았지만 묘하게 강압적인 손길이라 헤리엇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헤리엇의 허리를 붙잡고 짐승처럼 허리를 움직이던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유독 새하얀 손가락이 뱀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손은 엔저의 목덜미와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몸 안에 단단히 박힌 엔저의 묵직한 성기는 한 번 사정했어도 그 단단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내장 깊은 안쪽까지 들어오려는 듯한 빠듯한 감각에 헤리엇은 입도 다물지 못하고 침 흘리며 쾌감을 견뎠다.
서로가 처음이었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의 몸을 가장 잘 알았다. 눈감은 채로도 엔저의 성기에서 정액을 내뿜을 수 있게 움직이는 헤리엇과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 같아도 엔저가 헤리엇이 느끼는 곳만 시원하게 긁어 주는 것까지 두 사람은 찰떡처럼 어울렸다.
물론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헤리엇과 엔저는 격렬하게 입술을 부딪치며 눈을 감고 혀를 섞었다. 헤리엇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엔저의 얼굴을 뚫어져라 구경했다.
“아직도… 단단한 것 같은데, 엔저…….”
“네.”
두 번이나 헤리엇의 뜨거운 내부에 사정했는데도 모자랐는지 아직도 단단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그것을 느낀 헤리엇은 작게 웃으며 엔저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뒤로 밀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자세는 반전되어 엔저가 아래에 깔리고 헤리엇이 그 위에 앉아 있는 모양이 되었다.
“가엾게도… 이렇게 흥분해선… 아.”
엔저의 다리 사이에 앉은 헤리엇은 자신의 체중이 더해져 더 깊게 들어오는 성기에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더 들어올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성기는 너무 크고 단단했다. 거기에 뜨겁기까지 해서 내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과 쾌감이 공존했다.
엔저의 위로 쓰러진 헤리엇은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자신의 몸뚱이에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나 움직임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손을 더듬어 엔저의 가슴에 올려 지탱해 상체를 들어 올리려 애썼다. 부르르 떨리는 팔뚝이 제법 가냘파 보이기까지 했다.
대인 전투에서는 엔저도 당해 낼 수 없는 강한 사람이 몸을 떨면서 몇 번이고 헛손질하는 모습이 엔저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꼬챙이에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헤리엇이 날카로운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꺾었다.
“으… 읏…….”
숨을 헐떡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헤리엇은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엉덩이가 잡힌 채로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힘을 간신히 버티며 쓰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굵은 기둥이 아직도 좁은 내벽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성기의 열기에 그대로 불타서 내장이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웠다. 성기가 길어지기라도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헤리엇은 거의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흐윽… 아… 아읏, 엔저… 엔저.”
엔저의 골반에 걸쳐진 양다리가 맥없이 흔들렸다. 허리를 쓰다듬고 둔부를 강하게 쥐는 엔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성을 잃은 헤리엇이 엔저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러댔다.
“읏… 흐윽… 엔저…….”
“기분 좋아요? 선배.”
엔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건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거칠었다. 흥분으로 가득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귀에서 소름이 돋는 느낌에 귀를 문지르고 싶었지만, 헤리엇은 속수무책으로 엔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기만 했다. 한계치를 넘나드는 쾌락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까맣게 죽기를 반복했다.
어릴 적 키가 작았던, 나의 작은 고양이.
아카데미 정원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숨을 죽이고 다가와 곁에 있어 주던 나의 작은 ‘루비’
“아, 엔저… 사랑해. 네가, 너뿐이야… 나만의 아름다운 엔저…….”
정신없이 말하는 고백에 엔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허리를 강하게 쳐올려 성기를 가장 안쪽까지 박은 상태에서 사정했다.
그와 동시에 잔뜩 긴장했던 근육이 이완되면서 힘이 빠진 헤리엇의 온몸이 축 늘어졌다. 엔저는 그런 헤리엇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고 자신의 위에서 쉴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리모컨을 조작해 블라인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바깥에 화려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헤리엇은 고층 아파트의 야경은 계속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아름다웠지… 바다는.”
헤리엇이 엔저의 품에 안긴 채로 속삭였다.
“네.”
엔저는 고저 없이 내뱉는 의미심장한 선배의 말에도 착실히 대답했다. 헤리엇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엔저의 목과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이대로 멸망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곳이야.”
엔저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심장 부근에 귀를 가져다 댄 헤리엇은 문득 후배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과 달리 헤리엇이 더 달라붙어 올수록 요동쳤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헤리엇은 작게 미소 지으며 엔저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제 겨우 너와 함께할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세상이 멸망해 버린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지 않니?”
헤리엇의 말은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라고 해도 옳다고 생각하는 엔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선배 말씀이 다 옳습니다.”
* * *
헤리엇이 가진 삶의 방향성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자.’라는 느낌이다.
명령에는 충실히 따랐고 해야 할 일이라면 마땅히 몸을 던졌다. 그렇기에 동쪽 바다에서의 섬멸 작전에도 고분고분히 따랐고 무자비한 생체실험에도 분노하지 않았으며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단테의 세뇌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결정도 헤리엇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만 할 일이고 그 ‘누군가’가 자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다만 그의 선택에 주변인들이 괴로워한다는 게 문제였다. 헤리엇은 생선 가시라도 잘못 삼킨 듯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선 안쉘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는 헤리엇과 엔저가 지척에 다가와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엔저 대령님 부대 소속으로 복귀되셨습니다. 그리고 2계급 특진하여 원사로 진급하셨습니다.”
무념무상처럼 보여도 연금을 제법 좋아하는 헤리엇은 중사였을 때보다 올랐을 금액이 만족스러운 듯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다만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그 사실이 기꺼운 건 헤리엇뿐이라는 점이었다.
“…헤리엇 님.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으로서 대의를 위해 나서는 헤리엇에게 감사하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리는 안쉘의 모습에 헤리엇은 희미하게 미소를 흘렸다.
안쉘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약했다. 그리고 인정보다 실리를 중요시하는 것에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사람에 무르고 좋게 말하자면 신념이 올곧은 사람이기도 했다.
나흘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의견이 각하된 지금 지체할 시간이 없을 텐데도 그는 머뭇거릴 뿐이었다.
“헤리엇 님께서는 피해자이십니다.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것은 물론… 끔찍한 실험대상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헤리엇은 안쉘의 말에도 눈썹만 살짝 휘어 팔자로 만들어 미소 지었다.
“능력자들은 심해에선 힘을 쓰지 못하고 인어들은 폭탄이 있는 곳에 갈 수 없다고 했잖아. 어차피 나밖에 할 수 없다면 하는 게 옳지 않겠니.”
일정한 수심 이하에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인어뿐이었다. 그 정도면 잠수복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인간 능력자들의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기도 했다.
수적으로 인간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음에도 인어들이 이십여 년을 넘게 버텨 온 저력의 근원이 이것에 있었다.
동쪽 해저 기지, 인어들을 보낼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그곳에 접근이 가능한 존재는 헤리엇이었다. 인조 인어인 그는 바닷속에서도 능력을 쓸 수도 있으며 바다 결계에 영향을 받지도 않고 생체 파장이 인어보다는 인간에 가까워 동쪽 바다 해저 기지로의 진입이 가능했다.
현재 군 실험에 의해 살아남은 인조 인어는 헤리엇 한 명뿐이었으니 다른 곳에서 찾을 방법도 없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안쉘이 괴로운 듯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그의 보좌관인 고려인은 죄책감으로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다고 전해 왔다. 해저 기지에 숨어 있는 핵의 에너지 파동을 발견했을 때 이곳에 접근해서 폭발을 막을 수 있는 건 헤리엇뿐이라고 말한 사람이 고려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그것만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한참을 침묵하다가 고려인은 겨우 입을 뗐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려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도 대장이 가기 싫다고 하면 욕할 사람은 없어.”
“말이 쉬워 폭발을 저지한다는 거지, 핵을 정통으로 맞게 될 겁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자여도 방사능을 그냥 맞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겁니다. 가면 죽을 거예요, 헤리엇 님.”
이 정도면 겁을 주는 건지 아니면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헤리엇은 한 가지만 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안쉘은 속으로 헤리엇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인류를 위해, 대의를 위해 헤리엇 한 명이 희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단테 막심이 이십여 년 동안 긴 시간을 들여 만든 핵을 인조 인어 한 명이 막을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죽으러 가라고 명령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아닌 헤리엇 님께 희생해 달라고 감히 누가 그러겠습니까.”
만약 자신이었다면 인어든 인간이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다 죽어 버리자고 거부하거나 비관하며 모두를 저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리엇은 마치 가벼운 임무를 받은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여상하게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고,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 너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렴.”
“…….”
안쉘은 헤리엇과 대화할수록 정말로 그가 이번 임무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헤리엇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는 작게 미소 띤 얼굴로 짧은 고민 후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역시 혼자 힘으로는 벅찰 것 같네…….”
그리고 자신의 뒤에 배경처럼 서 있는 엔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네가 도와주겠니, 엔저?”
불쑥 튀어나온 헤리엇의 말에 안쉘이 펄쩍 뛰었다. 그가 옆에서 경악하든 말든 엔저는 가볍게 대답했다.
“네, 선배.”
“대령님!”
비명을 지르며 한 걸음 다가온 안쉘이 기어코 못에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쳤다.
“두 분을 이렇게 보낼 순 없습니다!”
엔저는 맥과이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고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군인의 대장이었다. 오명을 쓰고 버려질 뻔한 엔저 맥과이어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국민들이 사랑하는 영웅담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는 국민 영웅이었다. 어린 군인들은 엔저를 본받아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그가 만약 죽어 버린다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엔저는 그런 사실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앞에 있는 새하얀 인어에게만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한 주변 상황과는 달리 너무나도 평온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오히려 소름 끼쳤다.
“그렇다면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제 능력도 아예 무용지물은 아닐 텐데요!”
안쉘도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마찬가지로 능력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배에서 바닷속에 이능력 결계를 펼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능력자 중 한 명이었다. 빈말이라도 아예 쓸모없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해도 그게 어이없는 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안쉘 리는 이제 엔저의 보좌관이 아니며 지상을 대표하는 인간들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 대한 무게가 예전에 비하면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안쉘의 어깨 위에는 인어와 인간의 존망이 달려 있었다. 이제 그의 인생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너는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엔저가 코웃음을 치며 안쉘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멱살을 잡았다. 끌어당기는 힘에 안쉘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대통령을 경호하는 이들이 그 모습에 애매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대통령을 물리적인 위협에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타인이 끼어들기에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쉘은 5년 동안 엔저를 보좌했던 보좌관이었다. 물론 그 관계가 지금에 이르러 뒤집혔다고는 하지만 일단 본인이 자연스럽게 엔저를 상사처럼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호원들이 끼어들어 말리거나 엔저를 공격할 수도 없었다.
“전쟁을 끝내고 그 개 같은 위선자랑 짝짜꿍 손뼉이나 치면서 놀기나 해.”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 엔저는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헤리엇은 잔뜩 화가 난 엔저의 모습에 곤란한 듯 작게 웃었다.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나 보네…….’
엔저는 앤이 헤리엇에게 한 짓이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감히 하늘 같은 선배를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던 적도 있었다.
알시타가 죽기 직전, 앤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는지 헤리엇이 자세히 말해 주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헤리엇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은 그도 알았겠지만 정확하게는 짐작만 한 일이었으므로.
불쾌해하는 엔저와 다르게 헤리엇은 앤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엔저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인어들을 묶어 둔 결계를 깨고 싶은 것 아니었나? 그렇다면 지금부터 빠르게 움직여야지, 안쉘 리. 내가 머저리 같은 널 이 자리까지 올려 앉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
“전쟁을 완전히 끝내.”
엔저의 목적은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도 오로지 단 하나였다.
“대령님.”
엔저가 안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엔저와 안쉘이 가깝게 서 있는 모습에 헤리엇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지만 두 사람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고 헤리엇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인 걸 본 사람도 역시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끝내고 정리까지 다 해서, 내가 군을 벗어날 수 있게 해 놓으란 말이야. 알겠어?”
군에서 은퇴하는 순간 엔저는 완벽하게 자유의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한 엔저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 물어볼 것도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것인지 엔저는 아무 미련 없이 안쉘의 멱살을 놓고 헤리엇에게 다가갔다. 잠시 휘청거린 안쉘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새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꼿꼿하게 서서 옆에 있는 보좌관에게서 엔저의 장교모를 건네받았다. 대통령이 직접 대령의 수발을 드는 모양새가 익숙하지 않은 보좌관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안쉘에게 장교모를 넘겨주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시리라 믿겠습니다, 대령님.”
건네받은 장교모를 엔저에게 돌려주며 비장하게 말한 안쉘이 헤리엇을 돌아보았다.
“헤리엇 님. 만약 기회가 된다면 인간을 대표해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헤리엇은 자신이 딱히 희생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안쉘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엔저의 멱살잡이로 엉망이 된 안쉘의 옷을 손수 정리해 주며 말했다.
“두 사람의 유대감은 참 멋있네… 그렇지, 안쉘?”
뭐지. 지금 등골이 서늘해졌는데.
분명 진지하고 감동적인 순간 아니었나. 분위기가 바뀐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온갖 폼을 다 잡고 비극적인 영화의 주인공처럼 비틀거리던 안쉘은 소름이 돋았다. 헤리엇은 여전히 온화한 눈빛으로 안쉘의 가슴팍과 옷깃을 손바닥으로 탈탈 털어 주었다.
“5년이 긴 시간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정말 부러워서 억울하기까지 해. 부디 몸조심하길 바랄게.”
탁탁.
안쉘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린 헤리엇이 싱긋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런 헤리엇의 뒤로 엔저가 뚫어 버릴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안쉘을 쳐다봤다.
둘 사이에 뭣도 아닌 자신이 왜 끼어들어 버린 건지 안쉘은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이 배에 올라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배웅한 안쉘이 곁에 있던 보좌관에게 물었다.
“고려인은 뭐 하고 있습니까?”
“아직 연구실에 계십니다.”
나지막한 한숨을 쉰 안쉘에게 보좌관이 덧붙였다.
“인어 대표가 곧 판테니엄관에 도착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상의원, 하의원을 포함한 국회의원, 구역위원장, 군 장교들을 강제 소환한 비상소집이 열립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집무실을 나서서 손목시계를 확인한 안쉘은 출발하는 배 위의 엔저와 헤리엇,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지금 가겠습니다. 앤에게 연락을 넣어 주시겠습니까?”
“네.”
안쉘은 제발 신이 이번에도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길 기도했다.
배의 갑판 위에서 엔저와 함께 있던 헤리엇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아직도 우뚝 서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안쉘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 헤리엇을 기다리던 엔저는 새하얀 뒤통수에 시선을 좇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
“응?”
“그 머저리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응?”
자신이 말한 게 아니라 들은 게 맞는 건지 헷갈린 헤리엇이 의아한 목소리를 흘렸다. 오히려 가까운 건 5년간의 유대를 가진 엔저가 아니었나.
하지만 귀여운 후배는 고개를 살짝 틀어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선배가 놈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앞에서 너무 그런 내색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헤리엇이 흔들리는 배에서 도통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엔저가 손목을 잡고 지탱하며 볼멘소리를 냈다. 헤리엇은 자신이 질투로 구부러트린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 반대인 줄 알았어.”
“뭐가요?”
“네가… 안쉘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어.”
헤리엇의 말에 엔저는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헤리엇을 비웃는 건 아니고 속으로 안쉘을 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용해 먹기 쉬운 녀석이죠.”
“…재미있기는 하지.”
헤리엇은 문득 이렇게 쉽게 질투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생소해서 낯설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엔저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배가 출발하고 육지에서 점점 멀어졌다. 광활한 바다는 항상 헤리엇이 가진 무언가를 하나씩 빼앗아 갔다.
* * *
안쉘은 앤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외형을 가졌지만, 눈치도 없고 말투도 이상했던 인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인어는 전쟁을 멈추고 싶다며 언제나 자신들을 도와주었다.
“앤!”
자동차 문이 열리자마자 쌩하고 튀어 나간 안쉘은 저 멀리서 걸어가는 푸른 머리카락의 사내를 소리쳐 불렀다. 투명해 보이는 물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장신의 사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등을 돌려 안쉘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안쉘에게 걸음을 옮겼다. 안쉘은 저도 모르게 앤의 품에 안기려고 하다가 문득 주변에서 보는 시선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앤이 다가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안쉘을 부축하며 물었다.
“안쉘, 왜 이렇게 급하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안쉘은 가쁜 호흡을 고르다 그의 체향을 느꼈다. 앤의 몸에서는 항상 바다 냄새가 났다. 청량하고 푸른, 아름다운 바다를 연상케 하는 냄새였다.
다짜고짜 던진 안쉘의 질문에 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없어요. 그러는 당신은 괜찮나요, 툴툴이 씨?”
“…그 툴툴이 씨는 지금 바다에서 토끼 같은 자식을 낳고 잘 살 테니 그만 부르시고요.”
안쉘은 이런 순간에도 자신을 툴툴이라고 부르는 앤의 장난을 냉정하게 자르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앤… 다 알았습니다. 과거에 인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바다의 의미가 당신들에게 어떤 뜻인지 전부 알았습니다.”
“…….”
앤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푸른색이 선명한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그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벌렸다.
“툴툴이 씨가 죄책감을 느끼고 슬퍼할 줄 알았다면 말하지 말 걸 그랬어요.”
“아니요.”
안쉘이 간절한 얼굴로 앤의 손목을 붙들었다. 죄책감은 마음속에 잘 숨겨 놨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을 속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선에서 모두 끝낼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할게요… 네, 노력할 테니까, 그러니까… 앤.”
“…….”
“반드시 자유를 되찾아 오겠습니다. 인어도 인간도 더는 바다를 두고 싸우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기호 2번, 안쉘 리. 다툼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비웃음을 잔뜩 샀던 촌스러운 포스터 안의 모습 그대로인 안쉘의 눈동자에는 굳은 심지가 드러나 있었다. 지금쯤 동쪽 바다 위에 있을… 어쩌면 인류의 존망을 앞에 두고 목숨을 건 두 사람처럼 안쉘은 지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판테니엄관에 모여 있는 거물들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안쉘의 반짝이는 모습에 앤이 미소를 흘렸다. 자신은 헤리엇을 이용해 복수를 성공시킨 아주 저열하고 비겁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는데 안쉘은 올곧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앤이 바다를 담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안쉘은 왠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인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눈부신 보석이 될 줄 알았어요. 당신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에요, 안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런 사람이에요.”
안쉘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앤의 뺨을 쓰다듬었다. 신장 차이가 있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앤의 푸른색 눈동자에 보석처럼 물기가 맺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울고 있지 않지만 앤의 얼굴은 무척 슬퍼 보였다. 안쉘은 무의식적으로 앤의 뺨과 눈가에 입을 맞췄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면… 제게 바다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앤?”
“…….”
“바다에서의 기억은 너무나도 잔혹했던 것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을 잃고, 인어들을 학살하고, 전쟁했던 증오스러웠던 기억뿐입니다. 하지만 앤… 당신이 다시 내게 바다를 알려 준다면, 분명 저 드넓은 바다가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앤은 대답하지 않고 팔을 뻗어 안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쉘은 앤의 슬픔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가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깊게 파고들어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앤에게도 숨기고 싶은 슬픔이 있듯이 안쉘에게도 알려 주고 싶지 않은 진실들이 있었다.
안쉘은 앤을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다가 문득 앤의 가슴이 무척 넓고 단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이 예뻐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인간형의 앤은 키가 크고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두 사람이 판테니엄관 앞에서 들어가지도 않고 끌어안고 있는 걸 연구실에서 나와 퀭한 시선으로 보고 있던 고려인이 기가 막힌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진짜 이러다 둘이 싸움이라도 하면 다시 전쟁인 거 아니야?”
* * *
해군사령부 제1함대장인 레이첼 맥과이어는 엔저에게 물려 준 붉은색 눈동자를 무시무시하게 번뜩이며 안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햇병아리 대통령에게 정중하게 경례하며 예의를 차렸다.
“무탈하십니까, 각하.”
“네…….”
오히려 그녀의 기백에 뒤로 밀린 건 안쉘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계급대로였다면 엔저의 뒤에서 감히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을 사람이었단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레이첼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늙은 장교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안쉘의 계급이 중위였고 엔저의 보좌관이었던 것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이들이 엔저 맥과이어라는 줄을 잘 잡은 덕분에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된 허수아비로 안쉘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제 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비상소집과 엔저가 안쉘의 곁에 없는 것을 보고 무언가 예측한 레이첼의 눈동자가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공적인 일에서만큼은 혈연관계여도 냉정했지만, 사적으로는 하나뿐인 외동아들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레이첼과 한슨 사이에서 태어난 엔저는 곱디고운 도련님으로서 사랑받으며 자라 왔고 지금도 변함은 없었다.
“대령님께서는… 동쪽 바다로 가셨습니다.”
안쉘은 짧게 대답하고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레이첼은 알아들은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역시 맥과이어 가문이 가진 정보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그렇군요.”
그녀는 마지막까지 덧붙이는 말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역시 피는 속일 것이 못 되는지 모자(母子)는 닮은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대통령 권한으로 발동되는 비상소집은 이십여 년 전에 단 한 번 단테에 의해 열렸던 적이 있었다. 엘리키스호가 폭발에 휘말려 바다 아래로 침몰한 직후 열린 회의였다.
그때 단테는 인어들과의 전면전쟁을 주제로 회의를 개최했고 많은 공방이 오갔었다. 인어들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던 의원들도 상당했다.
그땐 능력자들이 강제 징집되던 시기가 아니었던지라 군보다는 의원들과 위원장들의 입김이 더 강했다. 그러나 그 회의 결과에 따라 인간은 인어와 전쟁을 시작했고 이십여 년 동안 치열하게 바다를 침범했다.
대통령이 된 후 안쉘은 가장 먼저 대통령 권한으로 종전을 선포했지만, 그 직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리고 많은 이들과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지금 안쉘이 발동한 소집은 전쟁이 종전되었음에 따라 바다에서 인어들을 자유롭게 해 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전 대통령인 단테의 정책에서 완전히 반대로 가는 중이었다.
이곳 회의장에 모인 대다수가 햇병아리 대통령을 무시했고 몇몇은 관심이 없었고, 또 다른 소수의 인원은 안쉘을 지지하고 있었다.
안쉘은 계속 손에 땀이 차올라 곤혹스러웠다. 긴장하면 입이 굳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머저리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바다를 알려 주기로 했던 앤이 지켜보고 있었다.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값비싼 정장에 쓱쓱 닦으며 안쉘이 지정석에 앉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안쉘을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착석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안쉘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적의, 호의, 무관심, 세상의 모든 시선이 이곳에 앉으니 전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안쉘은 부디 엔저와 헤리엇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바랐다. 그들이 살아 돌아왔을 때, 전부 끝났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바다는 이제 자유를 되찾았고 두 사람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제이든의 무덤 앞에서 당신이 살려 준 이 목숨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한탄하고 싶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왔다고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고 싶었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 *
“여기서부턴 두 분만 가셔야 합니다.”
작은 군함이 갑자기 멈춰서고 갑판 위에서 헤리엇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엔저에게 군인 세 명이 갑판으로 올라와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인 엔저를 봤을 텐데도 할 말이 있는 듯 살짝 머뭇거렸다.
“저… 대령님.”
“???”
세 사람은 매우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제 막 성인이 된 듯싶었다. 능력자인지 옷깃에 달린 배지가 붉은색이었다.
이제 막 아카데미의 사관 교육과정을 졸업한 앳된 청년은 헤리엇보다 계급이 높았다. 청년은 엔저뿐만이 아니라 장교급이 아닌 헤리엇에게도 깍듯이 대했다.
“저는 대령님을 존경해 군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부디 무사 귀환하시리라 믿겠습니다.”
헤리엇은 청년의 그림자에서 엔저를 찾았다. 그리고 엔저의 어린 시절을 지나 막 성인이 되었을 앳된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억울해졌다.
엔저는 감동을 자아낼 법한 청년의 말에도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한 번 까딱이고 헤리엇과 함께 두둥실 떠올랐다.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든 게 딱 일몰이 다가온 것 같았다. 이제 곧 해가 지고 별이 뜰 것이다. 헤리엇은 엔저의 두 손을 붙잡고 점점 멀어지는 배를 응시하며 말했다.
“한마디 해 주지 그랬니?”
“뭐를요?”
“너를 존경한다고 하던데… 후후, 귀엽기도 하지.”
배는 이제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기분이 좋은지 헤리엇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엔저는 헤리엇의 모든 걸 사랑하고 좋아했는데 그중에서 이 모습이 가장 좋았다.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은 과거에 자신이 한창 작았을 때 헤리엇이 늘 보여 주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헤리엇도 고작 열네 살로 어린 티가 가득했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그 미소만큼은 똑같았다. 헤리엇은 그때부터 다시 만난 지금까지도 쭉 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작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멋있어져서 후배도 생겼잖니. 그때의 넌 정말 사랑스러웠는데…….”
엔저는 헤리엇의 말이라면 죽어도 옳다 여겼지만, 지금의 말은 믿지 않았다.
헤리엇은 아카데미를 떠날 때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해 뒤돌아봐 주지 않았다. 군부에 이용만 당하다 유배당하듯이 시골에 좌천되면서도, 귀여운 꼬마 정도로 떠올렸겠지. 세뇌를 걸어 사랑해 보라고 속삭였던 헤리엇에게 어린 꼬마는 고작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엔저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선배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만약 그대로 단테에게 개죽음을 당했어도 아무렇지 않게 눈을 감을 사람이 헤리엇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발전한 엔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엔저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리엇은 주홍빛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수평선을 응시할 뿐이었다. 지금의 동쪽 바다는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 헤리엇은 자신이 만들어 낸 비극을 눈앞에 두고 말간 눈으로 한참을 응시했다.
“너는 죽는 게 아무렇지도 않니, 엔저?”
헤리엇은 솔직히 죽음이라는 것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실험을 당할 땐 조금 아프긴 했지만, 고통은 헤리엇을 두렵게 하진 않았다.
뜬금없는 질문에도 엔저는 대답하지 않고 이어질 헤리엇의 다음 말을 묵묵히 기다렸다. 헤리엇은 하늘을 한 번 봤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물어 가는 저녁해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느새 주황빛에 그가 물들어 갔다.
“날 원망하니?”
헤리엇이 속삭이며 묻는 말에 엔저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제가 선배를 왜요?”
“죽을 수도 있는데 굳이 널 데려왔잖아.”
헤리엇의 초록색 눈동자를 담은 눈이 아주 잠깐 휘면서 엔저를 향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데려온 헤리엇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헤리엇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엔저는 자신의 팔뚝과 손목을 붙잡은 헤리엇의 손가락 마디를 하나하나 전부 눈으로 훑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헤리엇은 손아귀에 힘을 풀고 엔저의 뺨과 목을 쓰다듬었다.
그를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는 늘 그렇듯 온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엔저는 알 수 있었다. 오로지 헤리엇에게만 시선을 주던 엔저만이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작은 변화였다.
“나는 알시타가 아니야.”
헤리엇은 생각했다.
알시타가 틀렸다고.
그의 가치관과 평화를 부정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었다. 헤리엇은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나였다면… 내가 알시타… 아버지였다면 목숨을 걸고 바다를 횡단하는 그날 제이든이 거부해도 억지로 데려왔을 거야.”
제이든은 알시타를 오래도록 짝사랑했지만 이미 부인과 아이가 있는 알시타는 친구의 마음을 모른 척했다. 그러나 가족을 잃고 마음이 흔들렸는지 알시타는 결국 제이든의 사랑을 받아 주었다. 알시타도 제이든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헤리엇에게 사랑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한 알시타는 어린 헤리엇이 궁금해할 정도로 제이든을 사랑했다. 그러나 알시타는 결국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제이든을 두고, 죽어 버렸다.
“아니면… 제이든을 죽이고 떠났을 거야.”
헤리엇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치 그들의 아래에서 잔잔하게 어두워져 가는 바닷물 같았다.
그리고 이건 헤리엇이 마음속 깊이 계속 숨겨 두었던 진심이었다. 본인이 하는 사랑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엔저의 아파트에 머물 때 수없이 많은 드라마와 로맨스 영화를 찾아봤다.
TV 속 화면에 나오는 사랑은 사람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갈망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표현되었다. 희생적이지만 아름답게 그려 놓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랑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이 죽더라도 상대의 행복을 비는 것일까.
헤리엇은 자신이 감정을 배워 나가는 중이고 많은 것을 포용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만은 죽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뻔했기에 제 생각을 숨기기로 했다.
이해할 순 없지만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을 나눠 주는 건 가능했다. 만약에 지금 헤리엇이 이곳에 오는 걸 결정하지 않았다면 숨어서 나오지 않았을 감정들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이상하고 비틀린 미소가 지어졌다.
엔저마저도 처음 보는 그의 미소였다. 무서울 정도로 기괴한 웃음이었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건 광활한 바다 위의 엔저 맥과이어 한 명뿐이었다.
“안 돼… 오, 엔저, 나는 안 돼… 너를 두고 죽는다니… 꿈도 꿀 수 없어.”
멀리서 본 두 사람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헤리엇은 팔을 뻗어 엔저의 뺨을 붙잡고 이어 말했다.
“내가 죽는다면… 너도 죽어야 해.”
“…….”
“내가 살 수 없다면 너도 살 수 없어. 내가 죽을 때 너도 함께 죽어야 하는 거야.”
만약 자신이 죽고 엔저에게 건 세뇌가 풀린다면……?
예전에는 세뇌가 풀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풀리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세뇌가 풀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가정하면, 헤리엇은 상상만으로도 엔저 맥과이어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만약에 엔저가 동쪽 바다까지 헤리엇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는 차라리 인류가 멸망하는 쪽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엔저는 결국 헤리엇을 따랐다. 세상의 하늘과 바다는 이렇게 아름다운 채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엔저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헤리엇이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엔저… 만약 네가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어 줄게.”
헤리엇이 속삭일 때마다 더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광증에 가까운 그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엔저가 이윽고 눈물을 흘렸다. 엔저는 감격에 벅차올라 눈물을 흘리며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저는 계속… 계속 그 말만을 기다렸어요, 선배…….”
예술품을 대하는 것처럼 아껴 주는 것보다도 지금 헤리엇이 해 준 말이 엔저에게 더욱 만족감을 선사했다. 엔저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고백을 들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헤리엇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처럼 굴었다.
“저를 집어삼켜 주세요.”
어두운 바다 위에서 두 사람은 격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저녁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밤하늘에 별들이 가득한, 풍경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오로지 두 사람에게만 만족스러운 사랑이었다.
헤리엇은 이런 사랑을 원했다.
곧 헤리엇이 양팔로 엔저의 허리를 껴안고 천천히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곧이어 태풍이 불어닥치기라도 한 듯 거대한 폭발음이 수면 위로 터져 나왔다. 집채만 한 파도가 수면 위에서 요동쳤다.
마침내 새하얀 인어가 루비를 집어삼켜 버렸다.
* * *
- 치지직…….
어디선가 기계음이 들렸다.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온 헤리엇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검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헤리엇이 엔저의 몸을 껴안고 바닷속으로 들어와 해저 기지 내에 있는 핵에너지에 충격을 가한 뒤 그 파장이 동쪽 바다 이상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힘을 쓴 것까지였다.
그 이후는 제아무리 헤리엇이라고 해도 강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흐릿한 시야를 되찾기 위해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던 헤리엇은 이곳이 아직도 바다 한가운데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수면 위에 있다기엔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아래에서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며 지탱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하루를 꼬박 새운 회의에서 드디어…….
- 길고 길었던 전쟁의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바다 위에서 인어들을 가두던 결계를 회수하고… 육지에 인어 마을을 만들 것이라는 대통령의 명령에…….
엔저가 챙겨온 무전기가 바다 위에서 치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무전 상태가 좋진 않았다. 곧 끊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무전기에서 소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헤리엇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지느러미의 새하얀 비늘 몇 개는 떨어져 덜렁거렸고 등에 나 있는 커다란 상처 때문에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엔저…….”
그는 문득 자신이 타고 있는 ‘무언가’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감은 엔저가 망망대해에서 헤리엇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대.”
엔저에게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헤리엇은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말 없는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네, 엔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니 엔저의 잘생긴 얼굴에 흉터가 생겨 있었다. 그것도 오른쪽 눈가에 길게 상처가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헤리엇이 손을 들어 상처를 쓸어 주다가 문득 의아함을 느껴 그의 가슴팍에 조용히 귀를 가져다 대었다. 헤리엇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천천히 눈을 감고 엔저를 껴안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바다에 감싸였다.
루비를 삼킨 인어.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