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고려인의 고백
대통령이 된 안쉘의 일정은 일분일초 단위로 계획됐다.
그 바쁜 와중에도 인어들과 관련된 안건에 대한 언쟁이 이어지고 인간들끼리 분열해서 싸우는 꼴을 끝도 없이 봐야 했다. 겨우 진정되나 싶었던 안건이 다시 상정되는 일도 부지기수라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다가 군부에서 단테 막심의 사상에 심취한 이들을 솎아 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다 과로사로 죽는 건 아닐까. 관이라도 미리 짜야 하나 생각할 때쯤 혼란한 정국이 조금은 진정될 만한 일이 생겼다.
국민 영웅인 엔저 맥과이어 부대가 현재의 평화 정책에 반기를 들고 대규모로 농성을 하던 능력자 백오십여 명을 산 채로 바다에 빠트려 버린 사건이었다. 과격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바람에 주변 시민들의 안전을 인질로 삼는 질 나쁜 놈들이었다.
그런데 엔저 맥과이어가 손가락 한 번 까닥해 사람을 수장하자 대부분이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물론 한 번씩 사고를 치는 잔챙이들이 있긴 했다.
덕분에 숨통이 트인 안쉘은 집무실에 앉아 오래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안쉘의 곁에 그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던 고려인이 다가와 앉았다. 드디어 함께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정산 좀 해 볼까?”
안쉘은 맞은편에 앉아 헤실헤실 웃고 있는 고려인을 힐끔 쳐다봤다.
“무슨 정산이요?”
“어허…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각하. 지금 대통령 됐다고 나 몰라라 하는 거야?”
안쉘은 오랜만에 듣는 고려인의 개소리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안쉘은 이 미친놈이 무슨 기이한 짓을 저지를까 걱정부터 앞섰다. 단테 정권 아래에서도 괴짜로 유명했던 녀석인지라 혹여나 그 괴짜 짓을 자신에게도 할까 싶어 안쉘은 조심스러웠다.
고려인은 키가 작고 귀여운 인상과 반대로 능력만큼은 세계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해커였다. 적으로 돌리면 골치 아픈 능력인 것은 물론 지금 군에서 이용하는 군함 메인 시스템의 80%가 고려인이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연봉이 부족하십니까?”
“돈 이야기가 아니야. 돈은 나도 많아!”
뜬구름 잡는 듯한 고려인의 화법에 안쉘은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헤리엇과 잡은 저녁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고려인은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고 지껄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볼에 홍조가 돌며 우물거리는 모양새가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단테를 공격한 건 내 개인적인 원한이지만 지금 각하를 도와주는 건 정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렇지요?”
“…그렇죠.”
급기야는 그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고려인이 마치 비밀이라도 속삭이려는 것처럼 안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안쉘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재빠르게 엉덩이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뭐라고요?”
“못 들었어? 도와 달라니까.”
“…….”
“안젤라한테 고백할 거니까 도와 달라고요, 각하.”
“…….”
파란이었다.
* * *
헤리엇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카페에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검은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은 그는 제복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존재감이 희미한 탓에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한 시민 같기도 했다. 게다가 테이블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지팡이를 놓은 헤리엇을 사람들은 철저히 약자로 구분했다.
카페 주인은 헤리엇에게 직접 음료를 가져다주었고 주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편한 좌석을 양보해 주기도 했다. 헤리엇은 그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할 따름이었다.
저 무해해 보이는 양반이 사실 인간병기에 가깝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헤리엇 님.”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헤리엇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장. 또 단거 먹고 있었네. 내가 당뇨 조심하자고 했지?”
헤리엇이 마시고 있던 음료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려진 아이스 코코아였다. 그는 고려인이 잔소리를 시작할 조짐이 보이자 곤란한 미소만 지으며 앉기를 권했다.
툴툴거리던 고려인은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계산대 쪽으로 쌩하니 걸어갔다. 그래도 나름 자신의 위치는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 대통령을 음료 심부름꾼으로 쓰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잠시 후, 고려인이 음료 두 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본인 것은 이곳에서 가장 값이 비싼 생과일주스였고 안쉘의 것은 이곳에서 값이 가장 싼 에스프레소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헤리엇과의 사적인 자리를 갖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안쉘은 너무나도 바빴고 엔저는 겨우 손에 들어온 인어를 밖으로 꺼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제이든의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다. 단테의 저택 앞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헤리엇은 곧바로 엔저의 품에 안긴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었다.
“응. 너희도 잘 지내고 있었나 보네.”
안쉘은 그가 자신이 알시타의 친자식이고 단테의 손주인 걸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단테의 세뇌를 풀 수 있었음에도 조용히 순응하기만 했던 헤리엇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상이 들었다.
헤리엇이 굳이 입을 열지도 않았고 자신이 그것을 굳이 물을 만한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안쉘은 주제넘다는 걸 알면서도 헤리엇의 인생을 동정했다.
“네. 이발도 하셨나 보네요.”
“엔저가…….”
하긴 엔저 맥과이어의 그 징그러운 집착으로 헤리엇의 머리카락을 다른 사람이 만지게 내버려 둘 리 없다.
과거에 헤리엇의 사진을 혀로 핥던 엔저를 떠올리며 안쉘은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마시더니 카페 주인이 앉아 쉬고 있는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잔 얻어 왔다.
카페 주인은 그제야 안쉘이 누구인지 알아채고 꽥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곧 조용해졌다. 하긴, 2대8 헤어스타일에 눈이 더 작아 보이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은색 정장을 입은 안쉘의 모습에서 긴장감을 느끼기란 엔저가 멀쩡해지기보다 더 어려운 노릇일지도 모른다.
물 한 컵을 얻어서 돌아오는 안쉘을 보면서 고려인이 헤리엇에게 귓속말을 했다.
“각하는 마음에 든 모양인데 나는 저 스타일리스트놈을 잘라서 지옥 입구에 처넣어야 한다고 생각해.”
대통령 전담 스타일리스트의 존재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설마 저 몰골이 더 대단해질 줄은 헤리엇도 예상하지 못했다. 말투는 심드렁하지만, 말속에 숨어 있는 신랄한 내용에 헤리엇은 작게 웃으며 얼음을 넣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물이 든 컵에 에스프레소를 넣고 한 모금 마신 안쉘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대령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부모님 댁에 들렀다가 온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거야.”
“네. 레스토랑 예약 시간까지 한참 남았으니 천천히 오시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안쉘은 헤리엇의 희미한 옆모습을 응시했다.
“곧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응. 엔저가 이제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거든.”
안쉘은 엔저가 군에 남아 있길 바랐지만, 그는 제 선배와 함께 떠나고 싶어 했다. 이것만을 위해 여태껏 달려왔던 엔저를 알기에 안쉘도 더는 그를 잡지 못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헤리엇이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는 지난밤 엔저가 했던 말을 떠올려 봤다. 잠에서 아직 다 깨어나지 않아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일어나니 엔저가 다급하게 어깨를 껴안아 왔다.
“선배… 저는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잠결에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헤리엇은 그저 엔저의 떨리는 어깨를 마주 감싸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엔저의 손아귀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토록 격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엔저는 처음이었던 헤리엇은 눈을 굴리며 그의 등과 허리를 쓰다듬기만 했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기로 했어.”
몇 년 동안 지내 왔던 시골 마을로 돌아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곳은 단테에 의해 쑥대밭이 된 지 오래였다. 아쉽긴 하지만 딱히 돌아가야 할 이유는 없었기에 말끔하게 단념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엔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동물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헤리엇을 따라 귀향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사실 헤리엇은 엔저와 함께라면 쓰레기장 한복판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화려한 생활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달칵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헤리엇이 안쉘을 쳐다봤다. 안쉘은 헤리엇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렸다. 고려인이 빨대를 쪽쪽 거리며 음료를 다 마실 때까지 침묵하던 안쉘이 겨우 입을 열었다.
“헤리엇 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데?”
“그,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실 때는… 불편함이 없으신 겁니까?”
질문하는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헤리엇은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별로…….”
“그렇죠. 인어라고 해도… 항상 바다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무슨 고민을 그렇게 골몰히 하는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안쉘이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헤리엇 또한 떠오른 의문을 길게 가지는 성격이 아닌지라 금세 잊어버리고 멍하니 있을 뿐이어서 테이블 위엔 저절로 침묵이 감돌았다.
컵 안에 조금 들어가 있던 과일마저 모두 해치워 버린 고려인이 두 사람을 힐끔힐끔 번갈아 쳐다보더니 가벼운 투로 입을 열었다.
“심각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우리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잖아?”
그의 말에 안쉘은 생각하던 것도 멈추고 흠칫 몸을 떨었고 헤리엇은 고려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려인을 돌아보는 헤리엇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기대감에 차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알고 지낸 부하 중 고려인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던 헤리엇의 말을 떠올리니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흠흠. 대장. 내가 이번에 고백을 하려고 하는데.”
고려인의 충격적인 말에도 헤리엇은 놀라는 기색 없이 웃기만 했다.
“누구에게?”
그래, 아무리 헤리엇이어도 그 상대가 누군지는 짐작할 수 없겠지.
“누구긴. 우리 스위트 허니지.”
스위트 허니라는 단어만 나오면 주먹부터 나가는 사람을 한 명 떠올렸다. 고백에 성공하려면 그 호칭부터 고쳐야 할 텐데…….
사실 안쉘은 헤리엇을 만나기 전에 그냥 이번 생에는 포기하고 다음 생을 노려 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진지하게 충고하다가 고려인에게 손가락을 물렸다. 방심하고 있다가 손가락이 콱 물린 안쉘이 경악스러운 마음에 꽥하고 비명을 질렀고 집무실 밖에 있던 경호원들과 수행원들이 몰려왔었다.
하얀 이를 잔뜩 드러내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고려인은 아무 생각 없는 천진한 청년 같았지만 너무나도 아끼는 여동생을 노리는 놈팡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안쉘이 보기엔 고려인이라는 사람은 진지함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매사에 가벼웠고 그가 하는 감정표현 자체도 깃털처럼 날아다녔다. 안젤라를 스위트 마이 허니로 장난스럽게 부르는 모습에서도 진정성은 발톱의 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안쉘은 마냥 그를 응원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안젤라에게 집적거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고백하겠다며 설치고 다닐 줄은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안쉘은 굉장히 심란했지만 의외로 헤리엇은 굉장히 흥미로워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헤리엇은 새로운 관찰의 표본을 보는 표정으로 고려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에게 사랑은 늘 새롭고 배워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리언 그 눈엣가시 같은 놈이 사라졌는데 나한테 조금이라도 기회가 온 것 아냐?”
고려인이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안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그 기회는 어떻게 잡을 생각입니까?”
안쉘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썼다.
“고백할 거야.”
꿀꺽
“그리고요?”
“고백하려면 데이트 신청이 필요하지.”
“흠… 그래서요?”
“데이트 신청을 넣어 보려고.”
안쉘은 쓴맛을 참을 수가 없어 물 한잔을 다시 떠 오고 말았다. 커피가 너무 써서 그대로는 먹을 수가 없었다.
물을 더 넣으니 아까보다 먹을 만해졌다. 목이 타는 느낌에 물을 섞은 에스프레소를 단번에 들이켠 안쉘의 얼굴은 카페에 들어오기 전보다도 더 피곤한 낯빛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내실 예정입니까?”
“아직 못 했는데… 지금 보낼 생각이야. 같이 멘트나 생각해 줄래?”
[널 위해 건담을 만들었어. 같이 타고 산책하러 갈래? 마이 스위트 허니.]
고려인이 보여 준 휴대전화 화면에는 아직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인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화면을 본 안쉘은 기가 막혀 오는 기분에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건담이라뇨. 표절로 논란 만들기 싫으면 로봇으로 정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안쉘이 고개를 숙여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지만 도와 달라고 말했던 고려인은 메시지를 그냥 발신하고 말았다. 이럴 거면 도와 달라는 말이나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를 뻔한 안쉘은 가까스로 심호흡해 마음을 진정시켰다.
자신은 올해로 서른세 살이 넘었고 고려인은 나이가 열 살 가까이 어린 한창때의 젊은이였다. 심호흡을 하며 참자고 중얼거리던 안쉘은 헤리엇의 눈빛이 묘하게 살아 있는 걸 발견했다. 뺨에 홍조까지 일어서 생기가 살아난 헤리엇은 이 상황을 무척 즐기는 것 같았다.
고려인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들고 끙끙대더니 잠시 후 작게 소리쳤다.
“안젤라가 답장했어!”
[ㅗ]
놀랍지도 않은 내용의 답장이었지만 안쉘은 조금 참혹해 보이는 고려인의 연애사에 잠시 연민의 눈물을 마음속으로 흘렸다가 거두었다. 사실 안쉘도 동정이었고 한 번도 연애 따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누구를 동정할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니까요.”
“아니야. 마이 스위트 허니는 수줍음이 많아서 그래.”
“…….”
3인용 소파를 번쩍 들어 그에게 던져 버린 안젤라의 과거 모습을 떠올린 안쉘은 그건 잘못된 생각인 것 같다고 정정해 줄까 말까 고민하다 포기했다.
“대장. 어쩌지?”
“음…….”
댁은 뭔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안젤라도 선약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물론 그 뒤에 안쉘은 바쁘단 핑계로 슬그머니 발을 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묘하게 장단이 맞는 헤리엇과 고려인아 안쉘의 바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헤리엇은 지금 학구열이 넘치는 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불러 줄게.”
안 돼!
안젤라는 헤리엇을 좋아했다. 이성으로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무척 따르고 좋아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니 헤리엇이 불러내면 무슨 일이든 제쳐 두고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안쉘은 그를 말리려고 해 봤지만 헤리엇의 손아귀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아 낼 순 없었다. 오히려 처참히 깨져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불러서, 그다음엔 어떻게 고백할까! 맙소사, 대장! 나 너무 떨려!”
고려인이 흥분에 못 이겨 펄펄 날뛰며 소리쳤다. 그 모습과는 반대로 차분하게 앉아 있는 헤리엇은 고려인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엔저의 집에 머물면서 TV를 봤는데 아주 좋은 참고가 될 거야.”
“뭔데요?”
“양초와 꽃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고백하는 거야.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장소일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았어.”
안쉘은 헤리엇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경악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체 집구석에서 무슨 막장 드라마를 봤던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당장 말리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짓을 하면 아끼는 동생과 고려인의 핑크빛 미래는 수억 분의 일의 성공 확률이 될 것이다. 안젤라를 생각하면 그게 좋겠지만, 그렇다고 그 행동을 말리지 않자니 고려인이 조금 불쌍했다.
그런데 말리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짝, 짝, 짝, 손뼉 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와 있던 것인지 엔저 맥과이어가 감명받은 얼굴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박수를 보내던 엔저가 입을 열었다.
“너무, 너무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선배. 선배는 어떻게… 모르는 것도 없으시면서 연애에 대해서까지 척척 아시는군요. 저는 선배님의 계획에 감복하여…….”
망했다, 망했어.
안쉘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본인만이라도 제정신을 차리자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 구성원에 그게 쉬운 일인가. 결국 자신이 이 모양 이 꼴로 고생하는 모습을 아주 조금은 예상했었다.
안쉘은 노래방에 틀어박혀 고려인의 노래를 듣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 돌아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탬버린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이건… 이 문화는 대체…….”
고려인이 마이크를 들고 뒤를 돌아보며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우리 구역 사람들이 예전부터 자주 찾는 곳이야. 내가 노래를 부르면 박자에 맞춰 잘 흔들어 달라고요.”
짤랑짤랑.
안쉘은 잠시 멈춘 탬버린을 다시 흔들며 노래 부를 준비를 하는 고려인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맞은편에 앉은 헤리엇이 흥미롭게 눈동자를 반짝이며 탬버린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옆에 앉아 쳐다보는 엔저가 있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선배는 대체 못 하시는 게 뭡니까? 유머 감각도 넘치시고 연애는 물론 음악까지… 저 같은 사람은 감히 선배의 범접할 수 없는 재능에 따라가지도 못할 겁니다…….”
오늘따라 저놈의 염병이 더 심해진 느낌이다. 안쉘은 두 사람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탬버린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그런데 대체 자신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안쉘은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해져 눈을 감고 싶었다.
“그것보다 여기는 대체 왜 온 겁니까?”
“안젤라에게 고백하기 전에 분위기 있는 노래를 불러 주려고 했지.”
[당신이 좋아 짱 좋아, 뽕 맞은 것처럼 좋아.]
노래 제목부터가 글러 먹은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저런 걸 찾아왔는지 멱살이라도 잡아서 물어봐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고려인은 반주에 맞춰 신나게 흥얼거리다가 노래가 시작되자 마이크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멜로디가 몇 마디 더 이어지기도 전에 가까스로 노래를 꺼 버린 안쉘은 손으로 제 귀를 더듬거렸다. 분위기는커녕 노래로 사람을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제아무리 헤리엇이라도 이건 버틸 수 없었는지 힐끔 쳐다본 그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허망하게 웃으면서 딱 한 마디 말만 남겼다.
“…참 개성 있는 노래를 하는구나.”
헤리엇의 고막을 챙기던 엔저의 시선이 고려인을 향했다.
‘넌 이제 뒤졌어.’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안쉘은 고려인에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매장당하고 싶지 않으면 계획 중인 이벤트에서 노래는 빼라고 진지하게 조언했다. 결국 입술을 쭉 내민 고려인이 마이크를 헤리엇 쪽으로 던졌다.
“전에 회식 갔을 때도 부대 놈들이 죽어라 마이크를 빼앗았는데, 지금도 별반 다를 거 없네.”
같은 부대라는 이유로 고려인과 노래방까지 함께했을 군인들이 불쌍해졌다. 차라리 판테니엄관에서 업무를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헤리엇이 미소 띤 얼굴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안쉘은 고려인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헤리엇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래 부르시게요?”
“응.”
헤리엇이 망설임 없이 숫자를 누르자 빠르게 전주가 흘러나왔다. 안쉘은 굉장히 익숙하게 들리는 멜로디에 이번엔 다른 의미로 경악하고 말았다.
‘군가가 여기서 왜 나와.’
아니, 다른 건 몰라도 노래방에 군가가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헤리엇이 아는 대중가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판이었다.
그래도 방금까지 고막을 터트릴 만큼 최악인 고려인의 노래를 들어서인지 헤리엇의 노래 실력은 평범하게 느껴졌다. 선곡이 평범하지 않아서 그렇지 조금은 귀를 기울일 만한 솜씨였다.
그리고 정말 보고 싶지 않았지만 헤리엇의 옆에서 거의 기절 직전까지 다다른 엔저를 목격했다. 엔저는 마치 세상의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승천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는 헤리엇이 노래를 끝마친 후에도 한참 동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쉘은 무심코 발기해 있는 엔저의 아랫도리에 시선을 줘 버렸다. 끔찍하게도.
최대한 그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는 안쉘을 헤리엇이 쳐다보고 있었다. 헤리엇은 안쉘의 고개가 왜 저렇게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날 정도로 뻣뻣하게 움직이는지 의문을 가지며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이번엔 헤리엇이 시선을 돌려 엔저를 바라보았다. 이미 헤리엇을 쳐다보고 있던 그가 곧바로 눈동자를 마주해 왔다. 그의 볼록하게 솟은 아랫도리를 본 헤리엇이 마치 비밀이야기를 하듯 엔저의 귓가에 속삭였다.
“엔저, 섰어.”
“네. 섰습니다.”
‘미친놈들아, 마이크 켜져 있습니다.’
안쉘은 입 밖으로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목숨이 아까워 최대한 참았다.
다행히 어느 정도는 사람의 탈을 쓴 덕분일까 두 사람은 그대로 붙어먹지 않았다. 그게 매우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말이다. 엔저는 이미 하늘 같은 선배의 노래를 들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는지 배부른 사자처럼 의자에 등을 대고 기대서 헤리엇을 살펴보기만 할 뿐이었다.
평범한 보통 사람인 안쉘은 지금 이 상황이 죽을 맛이었지만 고려인은 이제 이다음에 무엇으로 안젤라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안쉘은 진지하게 집으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곳에 세 사람을 남겨 두고 가기엔 뒷수습이 너무나도 두려워 그러지도 못했다.
* * *
“어때?”
일행을 길 한복판에 잠시 기다리게 하고 다시 나타난 고려인은 제법 고급스러운 태가 나는 양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이전에 주문해 놓은 것인지 맞춤 양복이었다. 하지만 양복이 잘 어울린다고 하기엔 고려인은 커다란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신장이 작은 편에 속하는 그는 본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로 인해 갖춰 입어도 조각이 맞지 않는 어색한 느낌이었다.
“…아버지 양복 훔쳐 입은 고등학생 같습니다.”
물론 고려인은 안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꽃집으로 향했다. 꽃집에서 점점 크기가 커져 가는 꽃다발을 보며 안쉘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들고 있던 장미꽃다발은 어디 가고 그냥 들고 있기만 해도 이목이 쏠릴 것 같은 아주 커다란 꽃다발이 하나 완성되고 있었다.
꽃다발이 크면 클수록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를 보는 안쉘은 기분이 착잡해졌다. 게다가 옆에서 염병을 떨고 있는 두 사람 때문에 더 피곤해졌다.
엔저는 가판대 위에 있는 흰색의 장미를 들고 헤리엇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헤리엇의 하얀 머리카락과 하얀색 장미가 동화되어 경계선이 희미해 보였다. 그 모습을 눈에 새길 정도로 쳐다보던 엔저는 감탄하며 헤리엇의 외모를 찬양했다.
“선배. 보십시오. 꽃 따위로는 선배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 미친놈이…….’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으로 골라 놓고 말하는 꼬락서니가 코미디를 보는 것보다도 더 웃겼다. 하지만 헤리엇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역시 같잖은 수작질도 받아 주는 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안쉘은 자기 얼굴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고려인의 모습에 안젤라는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일분일초라도 빨리 고려인이 차이길 속으로 기도했다.
“…헤리엇 님께서도 안젤라를 귀여워하시지 않습니까.”
신이 난 채로 흥얼거리며 꽃다발을 들고 앞장서 가는 고려인의 뒷모습에 시선을 준 안쉘이 물었다. 헤리엇은 귀여운 아이의 재롱잔치를 보는 것 같은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안젤라는 무척 귀엽지.”
“그러면 이번 고려인의 계획은 막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고려인이라는 인물은 성정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능력도 출중했고 나름 기백도 갖췄으며 깡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며 결국 단테에게 한 방 먹이기까지 했다. 능력을 사방에서 인정받아 대통령 보좌관의 자리에도 올랐다.
안쉘이 고려인과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된 건 그가 생각보다 더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기계광이긴 하지만 만드는 작품 하나하나가 전부 편리하고 유용한 것들이었다. 물론 심심하다고 무시무시한 물건이나 어이없는 것들도 만들어 내지만 그의 능력은 얕잡아 볼 것이 못 되었다.
이렇게 여러 장점이 가득한 인물이지만 안쉘이 봤을 때 고려인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마치 장난처럼 안젤라에게 고백하겠다고 설치고 다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연애를 가볍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젤라는 좋아했던 리언에게 배신당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리언과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발전해 가는 단계일 뿐이었는데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을 보면 안젤라는 가벼운 연애를 하지 않을 성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추구하는 연애 성향이 달랐다. 그래서 안쉘이 봤을 때 안젤라에게 고려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안쉘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본 헤리엇이 곤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고려인은 안젤라를 좋아하는걸.”
“그게 정말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전제하고 좋아하는 감정이 맞는 겁니까.”
안쉘이 고려인이 가진 감정에 대해 왈가왈부해 봤자 헤리엇은 잘 모르는 듯했다. 그는 그저 유한 미소만 지은 채 입술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늘 미지의 것이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연속이었다. 지금에야 엔저를 만나 사랑을 깨달아 가고 배우는 중이라지만 헤리엇이 이제 겨우 알 수 있는 건 엔저가 보여 준 방법들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리엇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알시타를 위해 목숨을 불사르려고 했던 제이든이나 자신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겠다던 알시타를 이해하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언젠간 자신이 죽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은 엔저를 어떻게 할까.
헤리엇은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잔뜩 신나 있는 고려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젤라가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 고려인이 계속 그 방문을 두드렸는걸.”
“…….”
그건 안쉘도 듣지 못한 일화였다. 당시에는 할 일도, 신경 쓸 일도 많아서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저 안젤라가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보고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안쉘의 앞에 섰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헤리엇은 자신의 부하였던 두 명의 어린 군인들을 제법 유심히 관찰했던 모양이다.
“아주 끈질기게… 안젤라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그 앞에 서 있었어. 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려인이에게 안젤라가 무척 특별했던 게 아닐까.”
고려인은 단테의 공방에서 가축처럼 자라서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일을 아주 싫어했다. 성미도 급하고 불같은 그는 단테에게 행하는 복수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도 아깝다며 자잘하게 단테를 엿 먹이고 다녔었다.
그런 그를 많은 사람이 괴짜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 그가 안젤라의 방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광경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과거를 회상하던 헤리엇이 엔저와 마주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내리깐 헤리엇의 희게 바랜 속눈썹 안쪽으로 금빛이 반짝거렸다. 안쉘은 그 작은 변화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안젤라가 문을 열어 주었습니까?”
이야기에 그새 빠져든 안쉘을 보며 작게 웃은 헤리엇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할 때,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안쉘은 물론 엔저와 고려인의 고개도 빠르게 돌아갔다.
“테러?”
안쉘이 대통령이 되고 단테의 사상을 옹호하는 잔재 단체 중에 과격시위를 일삼는 이들이 이따금 다른 구역에서 테러를 자행한다는 보고는 받았었다. 그러나 수도에서는 처음 있는 테러였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오는 곳을 향해 뛰던 안쉘은 그 뒤에 두 번 정도 이어지는 땅 울림에 몇 번이고 발을 헛디딜 뻔했다.
“넌 돌아가.”
엔저가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던 안쉘을 돌아보며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대통령이 다칠 것을 대비하여 말했을 테지만 안쉘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이능력 결계는 도주하는 범죄자들을 잡아낼 때 유용하게 쓰였다. 물론 그것도 상위의 능력자를 만나면 무용지물이긴 했다. 그러나 그건 안쉘의 능력치에서 아주 드문 경우였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될 터였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엔저는 두 번은 권하지 않았다. 저 뒤쪽에서는 고려인이 힘겹게 뛰어오고 있었다. 상체를 전부 가리는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뒤뚱거리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안쉘은 자신보다 고려인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살짝 고민했다.
“고려인.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요.”
“잠깐… 혼자 두지 마!”
고려인이 뒤에서 소리를 지르든 말든 안쉘은 빠르게 달리는 엔저와 헤리엇의 뒤를 따랐다. 늘 생각하는 건데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차지한 사람들은 달리기도 빠른 것일까?
안쉘은 두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서 달렸지만 거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엔저는 그렇다 쳐도 절름발이인 헤리엇의 속도를 쫓아갈 수가 없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 안쉘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결국 두 사람보다 한참 뒤에 현장에 도착한 안쉘은 눈앞의 광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테러범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제압하고 있는 조그만 체구의 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갈색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서 땋고 노란색 티셔츠에 멜빵바지를 입은 그녀는 도로에 박혀 있던 가로등을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저 체구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새삼 신기했다.
“안젤라?”
“안쉘 중위님?”
놀란 탓인지 안쉘의 옛날 호칭을 외친 안젤라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밑에는 테러범 두 명이 쓰러져 정신을 잃은 채였다. 검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나무와 움푹 파인 바닥을 보니 이곳에서 몇 차례 폭발이 일어난 게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길은 약속 장소인 공원으로 향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마 안젤라는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길을 걷다가 휘말린 듯 보였다.
“조심하세요.”
안젤라의 주변으로 이능력 결계가 펼쳐졌다. 동시에 유리관같이 생긴 결계 위로 한차례 공격이 퍼부어졌다. 저런 잔챙이들의 공격이 안젤라의 능력에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겠지만 안젤라가 공격받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순간 강풍이 불어닥쳤다. 헤리엇과 나름 오붓한 데이트를 기대했던 엔저가 눈을 부릅뜨고 테러범들을 하늘 위로 높이 날려 버리고 있었다. 테러는 즉결사살이 가능하긴 하지만 엔저가 움직일 때마다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안쉘은 테러범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 순 없었다.
엔저의 등장에 차를 타고 도주하던 테러범들의 차 앞쪽 범퍼가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결국 차에서 내린 이들이 각각 무기를 하나씩 꺼내 들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능력자는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인어들은 살인마다! 제정신 아닌 인어들과 화합하면 결국 죄 없는 시민들만 피를 보게 될 거야! 단테 막심 대통령의 이상은 우리들의 소망이기도 했어!”
소리 지르며 권총을 든 테러범들을 쳐다보는 안쉘의 낯빛이 좋지 못했다. 그들은 과거 단테에게 세뇌당했던 자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엔저는 그들의 외침에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마도 헤리엇만 없었다면 신랄하게 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안쉘은 양손을 들어 결계를 펼친 상태로 주변을 돌아봤다. 폭발 때문에 도망쳤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대통령인 안쉘이 테러 현장에 있으니 곧 군에 비상경보가 울려 부대 하나가 출동할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안쉘은 작게 한숨을 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현 정부에 시위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이 다니는 길목에 폭탄을 설치하고 터트리다니… 개소리는 이제 좀 작작 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현행 제도에 불만이 있으시다면 댁도…….”
두두두두-.
안쉘은 위쪽에서 들리는 프로펠러 소리에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호기 있게 테러범들을 상대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왠지 얼이 빠진 몰골이 되었다. 테러범들을 구경하는 헤리엇을 챙기던 엔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돌아가라고 했던 건데.”
세상의 수도이자 중심인 0구역은 다른 구역보다도 훨씬 크고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수도의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프로펠러 소리가 수도 전역을 감싸고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군용 전투기가 마치 비를 가득 담은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처럼 수도의 하늘을 빡빡하게 채웠다. 하늘에는 전투기는 물론 거대한 비행선과 군용 헬리콥터도 있었는데 살짝 열린 틈 사이로 동그랗고 기다란 총구멍이 보였다.
안쉘은 저게 요즘 군에서 개발 중인 능력자용 살상 무기임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모두 안쉘을 제외한 모두에게 향하고 있었다.
- 각하의 안전을 확인했다. 용의자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면 발포하겠다.
“이제 안쉘을 때리면 큰일 나겠는데?”
헤리엇은 자신을 챙기는 엔저의 귓가에 속삭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엔저는 그런 선배의 농담에 한참 동안 배꼽이 빠지도록 웃더니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함께 목소리를 낮추었다.
“몰래 때리면 됩니다.”
“…….”
“제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안쉘이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
* * *
최소 인원을 남겨 두고 물러난 부대를 정리하던 안쉘은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머리가 약간 헝클어진 것 말고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네.”
안젤라는 우물쭈물 시간을 들이더니 불쑥 물어왔다.
“그런데 오늘 다들 만나고 계셨던 거예요?”
“아, 네…….”
“저도 불러 주시지 그랬어요. 이 멤버면 저도 좀 그리웠는데.”
배시시 웃으며 머쓱한 듯 말하는 안젤라의 눈동자가 그리움으로 젖어 들었다. 시골에 있었을 땐 생각 없이 웃고 떠들며 농땡이를 부리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을 따라 밭일을 도와주러 가기도 했다.
나중에 엔저와 안쉘이 합류했을 때도 처음에는 좀 긴장했지만 제법 잘 어울려 지냈다고 생각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리언이 같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때가 그리운 건 사실이었다.
안젤라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뒤에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거대한 꽃다발을 든 채 불편한 양복을 입고 땀에 잔뜩 젖은 고려인이 서 있었다.
그가 땀에 젖어 있는 모습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고려인은 움직이는 걸 싫어하고 고된 일은 얄밉게도 쏙쏙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렇기 때문에 몸 쓰는 일에는 굉장히 서툴러서 대부분 로봇이 일상생활을 돕는 편이었다. 최근에 그가 발명한 기계 중에 옷을 입혀 주는 기계가 있을 정도였다.
고려인은 땀에 젖어 빨갛게 물든 얼굴로 안젤라를 발견했다. 그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꼴불견인 걸 알았는지 한 손으로 힘겹게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나, 나도 데려가 달라니까…….”
당황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게 이 일대를 부대가 통제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 꽤 오래 발이 묶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려인만 보면 으르렁거리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던 안젤라는 댕기 머리가 쭈뼛 서는 환각이 보일 만큼 놀라면서 안쉘의 뒤에 숨었다.
“안젤라.”
“고려인이 왜 여기 있어요?”
“그야… 우리랑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
안젤라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고려인을 향했다. 고려인은 새빨간 얼굴을 겨우 정리하고 입술을 우물우물 씹었다. 패기 있게 고백할 거라고 장담하더니 역시 전부 허세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안쉘은 안젤라가 옛날처럼 고려인에게 막말을 내뱉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화가 났다기 보단 앞에 있는 고려인이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안쉘, 이리 와.”
그 광경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구경 중이던 헤리엇이 안쉘을 불렀다. 안쉘은 두 사람을 두고 가도 되는지 안절부절못하면서 고민하다가 헤리엇과 엔저의 곁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안쉘이라는 벽이 사라지자 안젤라가 놀란 토끼가 되어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고려인은 그런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안젤라.”
“뭐야?”
“왜 물러나?”
“내, 내가 언제 물러났다고…….”
고려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 안젤라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쉘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고려인에게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고 생각보다 고려인이 진지하다는 사실에 놀라는 중이었다.
“고려인이 언제부터 안젤라를 저렇게 좋아했던 겁니까?”
“응? 아… 첫눈에 반했다고 했어.”
“…….”
전에 노엘에게 듣기론 고려인은 이십여 년 동안 단테의 공방에서 가축처럼 사육당했고 그 기간 동안 제대로 햇볕을 쬔 적이 없었다고 했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난 것도 그를 공방에서 꺼내 준 군인들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짐승처럼 길러졌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 공방에 갇힌 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고려인의 능력이 제법 뛰어난 편이어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의복도 챙겨 주지 않고 화장실도 분리되지 않은 방에 감금당하다시피 살아온 인간 이하의 삶이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의 그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사고방식도 짐승과 비슷해서 굉장히 예민하고 상처 입은 야생동물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구속이 풀리자마자 엔저에게 덤벼드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분노할 곳을 잘 찾아야지 이 짐승 새끼야.”
물론 엔저는 신랄하게 욕을 내뱉으며 고려인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 뒤에 서열정리가 끝났는지 고려인은 엔저에게 두 번 다시 덤벼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 교육을 받고 말을 배우며 자신이 처했던 상황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배웠다. 수치심과 분노도 함께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이십 년 동안 가축처럼 길러졌다는 사실에 수치를 가졌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단테에 대한 분노를 많이 토로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엔저의 명령에 따라 헤리엇이 있는 시골로 발령받았다. 엔저 부대의 군인인 사실을 숨기고 시골 마을에 간 고려인은 안젤라를 만났다.
“설마 첫눈에 반했을 줄은…….”
“려인이가 장난은 좋아하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잖아.”
본인 입으로도 농담은 해도 거짓말은 안 한다고 했으니까.
안쉘은 빨개진 얼굴로 꽃다발을 앞으로 내밀고 스피커가 필요 없을 만큼 큰 소리로 고백하는 고려인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어린 학생들이 서로 부끄러워하며 고백하는 풋풋한 느낌을 받았다.
파란 꽃과 빨간 꽃으로 만든 하트 무대도 없고 기껏 준비한 고가의 스피커도 없으며 감미로운 노래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휘파람을 불면서 두 사람을 향해 장난질을 치는 군인들이나 있을 뿐이었다. 어디 세상일이 제 뜻대로 돌아간 적이 있을까.
“안젤라! 좋아한다니까!”
“시끄러워! 좀 닥쳐!”
고려인은 생애 처음으로 하는 고백은 이렇게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
머리끝까지 빨개진 안젤라는 고려인의 턱을 주먹으로 치고 멀리 도망갔다. 안젤라의 능력이면 고려인의 머리통 따위 수박 깨지듯 깨져야 정상이겠지만 고려인은 몸을 휘청거리면서 뒤로 자빠진 것 말고는 멀쩡해 보였다.
저 멀리 도망가는 안젤라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고려인을 쳐다보던 안쉘은 인자한 미소로 방관하고 있는 헤리엇에게 물었다.
“그래서… 헤리엇 님. 안젤라가 고려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습니까?”
헤리엇은 안쉘이 말한 게 테러 때문에 멈추었던 이야기의 연장선임을 금방 깨달았다. 그는 정말로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건… 당사자들끼리만 알고 있지 않을까.”
“…….”
“나도 매일 찾아가 보진 않았으니까…….”
“그렇습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려인이가 안 보이긴 했어. 매일 안젤라의 방문 앞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그러질 않더라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젤라가 방문을 열고 나왔는데, 그때마다 려인이가 옆에 있었던 것 같아.”
안쉘이 헤리엇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숨을 쉬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법으로 군 내부에서 연애하는 걸 막아야겠습니다. 저는 안젤라가 저런 놈과 사귀는 걸 두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안쉘의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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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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