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평화의 시작 (22/30)

21. 평화의 시작 

헤리엇의 몽롱한 시선이 바다 저편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로 주변은 고요했다. 잔잔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헤리엇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얹어졌다.

“바닷바람이 찹니다, 선배.”

“엔저.”

헤리엇이 제 어깨에 놓인 담요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이런 식의 호의는 알시타가 죽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항상 무덤덤하고 무심한 헤리엇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었다. 왠지 모르게 간지러운 느낌이 든 헤리엇은 작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네.”

그렇게 말하는 후배의 왼쪽 뺨에 생긴 작은 상처가 보여 가슴이 아팠다. 여린 후배가 혹시나 아프진 않을까 걱정된 헤리엇은 엔저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훑었다.

앤이 있었다면 그의 능력으로 이따위 상처는 없애 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헤리엇의 손길을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받아들이던 엔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헤리엇은 그런 엔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작은 아기 고양이 시절의 엔저도 매우 귀여웠지만, 자신보다 훌쩍 커 버린 후배는 다른 의미로 너무나 사랑스러워 숨이 뜨거워졌다.

“이건…….”

한참 동안 엔저와 질척하게 시선을 나누던 헤리엇은 문득 그가 들고 있던 무전기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상 방송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레이첼의 함대가 한참을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던 두 함대 사이를 습격해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전투를 중단하라고 말하며 이제부터 공격을 하려는 이는 폭동으로 간주하고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모습에 어느 정도 선거 결과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었고 직접 결과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여태 아들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는 레이첼 덕분에 무전기로 지상 방송에 연결해야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뒤쪽에서 군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좋은 생각이네.”

헤리엇은 엔저가 똑똑한 것에 왜 자신이 뿌듯한 기분이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곧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엔저가 덮어 준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무전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단조롭지만 흥분으로 가득한 아나운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번 대선에 커다란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이십여 년간 독재를 펼쳐온 단테 막심을 물리치고 젊은 후보 안쉘 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심지어 안쉘 리 후보자는 개표가 끝나자마자 전투기로 판테니엄관에 돌진했다고 하던데요. 이제 막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 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단테 막심 전 대통령이 저지른 행위 때문에 판이 뒤집혔다고 볼 수 있겠죠. 그가 인어는 물론 인간을 상대로도 생체 실험을 감행했다는 사실에 수많은 국민이 분노에 차 거리로 나왔습니다. 심지어 엘리키스호 사건마저도 단테 막심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아들마저 권력을 위해 무참하게 죽인 그의 죗값을 어떻게 처리할지 세간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또다시 속보입니다. 안쉘 리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내린 명령이 인어와의 휴전이라고 합니다. 인어를 공격하는 집단이나 개인이 있을 시 폭동으로 간주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보였는데요. 이제 단테 막심이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금하군요.

치지직-.

임시로 맞춘 주파수라 그런지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는 금방 사그라지고 말았다.

집중해서 듣고 있던 헤리엇은 끊어진 무전에 고개를 들어 올려 엔저를 바라봤다. 엔저의 바람대로, 어쩌면 인생 전부를 내놨을지도 모르는 대담한 계획대로 되었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듯한 안쉘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면 엔저는 국민 영웅이라는 명예로운 자리에서 끌어 내려져 정부에 불만만 가진 반란 종자가 되어 군법으로 처리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적어도 곱게는 죽지 못했겠지.

엔저는 온갖 위험 요소들을 감수하고 확률이 0에 가까웠던 안쉘을 기어이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엔저의 눈동자에는 어떤 희열도 흥분도 없었다.

루비를 닮은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는 눈앞에 있는 헤리엇만을 향했다.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는 하얀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엔저는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행동을 감행했다.

허락도 없이 헤리엇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여 작게 벌어져 있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목 깊은 곳에서부터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인내하며 끈질기게 추격하고 덫을 놓은 결과 드디어 그의 신을 붙잡았다.

“이제 선배는 제 것입니다.”

*  *  *

안쉘의 부상 정도는 심각했다. 왼쪽 어깨가 탈골되고 허벅지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가 생겼다. 게다가 전투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터져 버린 고막은 지상으로 추락할 때 받은 충격이 더해져 달팽이관까지 손상되어 버렸다. 어쩌면 오른쪽 귀로는 제대로 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꾀죄죄한 몰골로 병실에 누워 있던 안쉘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헤리엇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 헤리엇의 뒤에는 언제나 붉은색 눈동자를 형형하게 치켜뜬 엔저가 배경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도착한 고려인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니?”

헤리엇이 평소와 같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 위에 과일바구니와 꽃다발을 내려놨다. 비정상적인 놈들 사이에서도 가장 비정상인 헤리엇이 유일하게 병문안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고려인과 엔저는 당연히 빈손이었다. 게다가 양심도 없는 두 사람은 오히려 헤리엇이 사 온 과일바구니를 뒤지고 있었다. 엔저는 선배를 먹이겠다는 이유로, 고려인은 자신이 먹을 생각으로 말이다.

너무나 그들다운 행동이라 안쉘은 트집 잡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게 헤리엇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생각보다 멀쩡합니다.”

다행히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당분간 움직임을 자제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그에 따라 안쉘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판테니엄관에 공식적으로 입성을 하지 못했다.

“안젤라는 가족들과 만나고 온다고 했어.”

“그렇군요.”

“앤을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앤은 괜찮습니까?”

안쉘이 마지막으로 본 앤의 모습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 독으로 엉망이 된 것이었다. 안쉘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헤리엇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성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헤리엇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크게 다치진 않았는데 나름 좀 바쁜 모양이야.”

대통령이 된 안쉘이 종전을 선포했고, 인어들과 회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어들도 대표자들 정해 물 밖으로 나와야 했다.

아마도 그 대표자는 앤이 될 터이니 인어들의 의견을 수렴하느라 바쁠 것이다. 사실은 앤의 아버지이자 검은 용암이라는 이름의 인어가 인어들의 왕이었지만, 그는 심해 깊은 곳에서 나올 만큼 기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전해 왔다.

언젠가 앤이 아버지, 검은 용암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검은 용암이 눈을 감기 전까지 바다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다짐을 약속했다면서 그가 씁쓸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안쉘도 앤이 인어들의 왕이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실실 웃으며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앤에게는 조금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갑자기 분위기가 죽었어?”

고려인이 뒤에서 과일을 까먹고 있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몰래 숨겨 온 샴페인을 꺼내 보였다.

“우리가 이긴 거 맞지? 안쉘 중위님은 대통령이 됐고 단테는 이제 추락할 일만 남았다고! 지금 축배를 들어도 모자란데 분위기가 이렇게 우중충해서야 되겠어?”

군 의료원 내에선 어떤 사유를 막론하고 개인이 알코올음료를 소지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범죄 현장에 안쉘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곧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못 마십니다.”

“그럼 그냥 건배만 해 줘요. 주인공은 중위님이잖아요.”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아직 고려인에겐 그저 그런 중위님인가 싶었다. 잔만이라도 받으라며 엔저와 헤리엇에게 종이컵을 돌리는 고려인을 생각 없이 구경하던 안쉘은 문득 모골이 송연해졌다.

헤리엇이 술에 취해 깡패들을 주먹으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던 장면이 떠오른 탓이었다. 심지어 저 양반은 술이 굉장히 약했다.

안쉘은 창백한 얼굴로 조용히 손을 뻗어 방방 날뛰고 있는 고려인에게서 샴페인을 빼앗았다. 헤리엇이 취해 버리면 이곳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고려인은 안쉘이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재미없다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엔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늙은이는?”

“아, 자택 구금 상태입니다.”

반사적으로 깍듯한 말투가 나와 버렸다.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학습된 버릇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통령까지 되었는데 한 대 정도는 엔저를 쥐어박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끔 악마가 옆에서 속살거렸지만 금방 사라져 버렸다.

지금 당장은 현실감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대통령이라 해도 엔저 맥과이어를 건드리면 멀쩡한 꼴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직감이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테 막심이 20년간 지켜온 자리를 엔저에 의해 내려오게 되지 않았던가. 안쉘은 자신의 말년에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상상으로 안쉘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 헤리엇은 멍하니 미소 짓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이든은 어디에 있어?”

허허실실 웃고 있던 안쉘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병원 환자 이름 중에 제이든이 없어서…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딱딱하게 굳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쉘이 고개를 들었다. 헤리엇에게 이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해 줄 마음의 준비가 아직 덜 되었는데…….

“헤리엇에게 전해 줘… 나와 알시타는 널 버리고 간 게 아니라고.”

제이든 올던은 죽었다. 안쉘을 지키다가 가슴이 뚫려서 그대로 바다 아래에 수장되고 말았다. 그는 산산조각 난 군함과 함께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알시타와 같은 곳에서 같은 방법으로.

“헤리엇님… 그는…….”

안쉘의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의 반응에 헤리엇은 제이든이 이제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는… 돌아올 수 없지만, 결코 헤리엇 님의 곁을 떠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절대, 절대 아니라고. 알시타 님도 제이든도…….”

그가 평생을 사랑했던 알시타의 곁으로 가 버린 건데도 자신의 곁을 떠난 게 아니라는 말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시타에게 가고 싶어 했던 제이든과 헤리엇의 곁에 있고 싶었다던 제이든.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헤리엇은 그저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며칠 후, 인어들의 대표가 참석하여 평화 회담 협정에 따라 종전에 합의했다. 인간 대통령 안쉘 리와 인어 왕족 앤의 서명이 종전합의서에 공고하게 박혔다. 그렇게 어느 한쪽이 파멸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전쟁이 드디어 종착지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종전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전쟁의 원인은 전부 인간 쪽에 있으며 인간은 잔악한 가해자였고 인어는 이유 없이 고통받은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이 된 안쉘이 국가 기밀로 숨겨져 있던 엘리키스호의 공식 영상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국민들은 엘리키스호에서 벌어진 참혹한 진실을 믿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는 침몰해 가는 배를 끌어 올리기 위해 노래 부르던 인어들의 모습과 배 위로 무수히 많이 떨어지는 미사일들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엘리키스호를 침몰시키고 인간을 구하려던 인어들을 죽이는 광경은 대통령인 단테 막심이 은폐하려 했던 끔찍한 진실이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안쉘의 보좌관으로 직업을 바꾼 고려인의 능력이었다. 고려인이 단테가 숨겨 놓은 자료를 모두 찾아 온 것이다. 그 자료를 훑어보던 안쉘은 소름이 돋았다.

귀엽고 천진한 얼굴로 웃는 고려인의 뒷모습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단테는 이 청년을 적으로 둔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오후엔 조촐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조문객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무시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한때 탈영병이자 반란군의 오명이 씌워졌던 엔저 맥과이어 대령을 선두로 안쉘 리 대통령과 인어 왕족 앤이 자리를 지켰다. 물론 헤리엇과 안젤라도 함께했다.

알시타와 함께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그를 따르며 제이든을 도왔던 열두 명의 특전사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들은 알시타에 이어 제이든마저 바다에 빼앗기고 말았다.

제이든 올던 평화위원장의 시신은 바닷속에서 폭발해 버린 군함 때문에 찾을 수 없었기에 빈 관이 땅속에 묻혔다. 그 모든 것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헤리엇은 멍하니 장례식을 쳐다보다가 하늘을 쳐다봤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어둡고 먹구름이 몰려왔다.

‘제이든은 이런 날씨를 싫어하는데…….’

사람들의 눈길을 익숙하게 받으며 헤리엇이 대표로 국화꽃을 관 위에 던졌다. 헤리엇은 법적으로 제이든의 양아들이 아니었지만, 그가 생전에 남겨 놓은 유서와 뜻을 받들어 전 재산을 물려받았다.

흙으로 덮이는 빈 관을 멍하니 쳐다보는 헤리엇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의 눈동자에 동정이 서렸다. 그건 헤리엇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눈빛이었다. 보육원에 막 들어왔을 시기에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보였던 것이었고 그를 연구소로 데려가던 어떤 군인의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익숙하지만 헤리엇이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그날 밤 헤리엇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곁을 엔저가 묵묵히 지켰다.

“기분이… 이상해, 엔저. 이건 대체 뭘까?”

헤리엇은 말없이 손에 깍지를 끼고 부드럽게 자신을 이끄는 엔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음 날,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 포장된 연두부를 그릇에 넣으려다 말고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려 낭패를 봤다. 연두부를 먹는 자신을 목격한 제이든이 엉엉 울었던 게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원래도 소식하던 헤리엇이지만, 그날은 음식을 거의 남기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고 엔저의 집에 머무는 헤리엇을 찾아온 안젤라가 말했다. 

“원래 다 그래요.”

그녀는 국민 영웅인 엔저 맥과이어의 집을 구경하며 발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원래 소중한 사람을 잃으면 밤잠도 설치고 식욕도 없고 그래요. 매일 생각나고 슬프고 울컥하고.”

헤리엇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얼추 비슷한 증상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못 자던 잠도 잤고 어느 정도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됐다.

의사에게 하듯 자신의 증상을 솔직히 나열하던 그는 왠지 멍한 안젤라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안젤라?”

“아… 죄송해요, 대장. 아니 이제 대장이 아니지… 그래도 대장이 익숙하니까 대장이라고 부를래요.”

헤리엇은 단테의 실험 피해자였기에 제대하여 이제 군인이 아닌 일반인이 되었다. 그는 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다는 안쉘을 보며 곤란한 듯 작게 웃었다.

“연금은 주니?”

“…국가에서 피해 보상금을 지불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안쉘이 살짝 뜸을 들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헤리엇 님께서는 이제 재산도 많으시잖아요.”

그런 관계로 이제 시골 마을의 군사기지에는 아무도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안젤라 또한 전쟁을 피하고자 시골 마을에 간 것이었으니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포된다면 제대하겠다면서 들떠 했다. 안젤라가 태어난 시기에 전쟁이 시작되어 그녀는 평화로운 일상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젤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점점 무뎌지는 거랬어요. 제가 정말 좋아했던 친구는 첫 출전에 크게 다쳐 결국 그해 죽어 버렸어요. 전 너무 슬퍼서 매일같이 엉엉 울고 끼니도 거르면서 폐인처럼 지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잠도 자고 먹기도 잘 먹게 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가끔 너무 슬프고 마음이 괴로울 때가 있지만 언젠가 괜찮아질 거예요.”

콧잔등이 잔뜩 일그러진 그녀는 웃는 것 같이 울고 있었다. 항상 천진하게 웃고 다니는, 덧니가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헤리엇보다 더 많은 걸 알고 경험해 온 어른이었다.

헤리엇은 이어지는 안젤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최대한 많이 기억해 두려고 애썼다. 이렇게 그는 상실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던 헤리엇의 얼굴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안젤라, 네가 알려 주는 이 감정들은 너무 슬프고 괴롭구나.”

헤리엇이 우는 걸 처음 본 안젤라는 아름다운 진주를 떨어트리는 전설 속의 인어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헤리엇은 그 뒤로 눈물을 더 흘리진 않았지만, 넋을 놓은 것 같이 멍하니 있다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안젤라는 결국 안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의 직통전화를 사적인 용무로 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안젤라가 유일했다.

자신이 더 큰 일 난 것처럼 우왕좌왕하던 안젤라가 돌아간 다음에도 헤리엇은 멍하니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밥 한 공기를 모두 비웠다.

*  *  *

안쉘의 2대8 머리가 돌아왔다. 심지어 더 촌스러워졌다. 보좌관이 되어 최근 안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고려인마저 경악하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 소리쳤다.

“대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웩, 각하 미쳤어?”

차라리 그전에 봤던 꾀죄죄한 몰골이 나았다. 그것도 못 볼 꼴이긴 했지만, 저 흉측하고 촌스러운 머리보단 나았다.

안쉘은 그저 헛기침만 하고 고려인의 말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 머리가 마음에 들었고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상관인데도 반말을 내뱉는 고려인의 말투에 대해 지적할까 말까 고민하며 안쉘은 걸음을 옮겼다.

“나름 전담 미용사분께서 해 주신 스타일입니다.”

고려인은 그래서 저 머리가 평소보다 더 촌스러워 보이는 거냐며 비아냥거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지금껏 정상적으로 내린 안쉘의 머리를 더 많이 봐 왔던 탓에 다른 이들보다도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다.

헤어스타일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뀌어 보일 수가 있구나, 감탄마저 나왔다.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안쉘은 나름 준수하고 예민해 보이는 외모를 가졌다. 평범하다고 생각하면 평범하겠지만 그렇다고 못생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두꺼운 안경과 2대8 머리는 요즘 젊은이인 고려인이 봤을 때 사람들의 시각을 테러하고 다니는 테러범일 뿐이었다.

안쉘은 저 멀리에서 부하들을 대동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엔저 맥과이어를 발견했다. 그의 새로운 보좌관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가여운 보좌관의 얼굴은 아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알지, 알지…….’

안쉘은 멈춰 서서 그의 곁에 있는 신임 보좌관을 동정했다. 엔저는 그의 전설적인 무용담에 걸맞게 첫인상은 무척 매섭고 날카로운 편이다. 물론 첫인상보다 더 독하고 못된 놈이라는 사실은 하루 이틀만 같이 다녀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쉘은 이윽고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엔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안쉘을 보고 잠시 멈칫한 엔저가 매우 놀랍게도 장교모를 벗고 인사했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지위를 깨달았던 안쉘은 자연스럽게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다 당황했다. 그는 이제 운전석에 앉아 운전해 주는 보좌관이 아니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 안쉘은 엔저의 뒤를 따라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어서 조수석에는 고려인이 탔고 운전석에는 엔저의 새 보좌관이 앉았다.

“…….”

운전석에 앉은 새 보좌관을 관찰하는 안쉘의 눈빛이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솔직히 오늘 오전 각료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도 현실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야 찬물이 뿌려지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엔저 맥과이어가 안쉘 리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행동 하나가 안쉘의 현실을 단번에 일깨웠다. 저절로 속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령님.”

엔저에게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테는?”

만약 여기서 엔저가 자신에게 존댓말을 썼다면 안쉘은 겁에 질려 달리는 차 밖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 휴… 하고 한숨을 쉰 안쉘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저택에 구금 중입니다. 늙은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비교적 얌전히 지낸다고 합니다.”

엔저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웃었다. 안쉘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델타 막심도 저택에 구금 중입니다. 이자는 직접적으로 단테의 계획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서 직위만 해임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갈 뿐, 군법 회의에 이송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범죄 행위에 관한 사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지 아닌지는…….”

수첩에 빼곡히 적은 정보들을 읽던 안쉘은 묘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옆에 앉은 엔저는 물론 고려인과 엔저의 새 보좌관까지도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엔저에게 보고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능숙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지만 적어도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보일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평생 남의 밑에서만 지냈지 누군가의 위에 군림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민망했다.

안쉘이 참고 있던 헛기침을 내뱉으며 수첩을 닫았다.

“직접 만나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안쉘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가 부드럽게 섰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경례했다. 엔저 맥과이어와 안쉘 리가 타고 있는 만큼 따로 신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게 마주 경례하고 안으로 들어간 안쉘의 눈앞에 수도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해 보이는 저택이 보였다. 이십여 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재물을 모은 사람의 저택, 단테가 소유한 사유지였다.

한때는 무서울 것 없는 권력자에서 지금은 범죄자가 된 단테 막심의 저택은 서늘한 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관리를 잘 받았을 아름다운 정원에는 그새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정원을 빼곡하게 뒤덮었다. 하지만 단테가 저택의 인테리어와 내부 설계, 시공까지 직접 관여하며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인 만큼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우아한 멋이 흘렀다.

안쉘은 설마 자신이 이곳을 대통령이 되어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지금도 잘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직도 단테 막심은 대통령이고 자신은 부모를 잃은 불쌍한 국민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몇십 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낸 끝에야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 살인마에게 죗값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굳어서 벌벌 떨며 질질 짜던 안쉘 리가 지금은 당당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고 있었다.

저택 내부에서 나온 군인 한 명이 안쉘에게 정중하게 경례한 후 그들을 이끌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안쉘이 가장 직급이 높았으니 당연한 격식이었지만 여전히 어색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엔저가 받아 왔던 것들이었으니까.

저택은 총 4층짜리 건물이었고 단테가 현재 위치한 곳은 3층 가장 끝에 있는 서재라고 했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값비싼 카펫이 흙과 먼지로 더럽혀지고 군화에 짓밟혔다.

안쉘은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고 전신이 떨려 오는 이유가 희열로 인한 흥분인지 아니면 격렬한 분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엘리키스호에 탑승하던 부모의 마지막 뒷모습만이 아른아른하게 떠올랐다.

“도착했습니다.”

총을 든 군인이 군더더기 없는 행동과 딱딱한 어조로 말을 끝내며 서재의 문을 열어 주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단테 막심의 모습이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만 살짝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자약한 얼굴은 온 국민을 분노로 들끓게 만든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 뻔뻔한 얼굴에 안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릴 뻔했다. 안쉘의 앞을 막아선 엔저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표정 관리도 못 한 채 흉한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엔저가 얼굴에 보이는 동요를 가라앉힐 수 있게끔 배려해 준 것 같아 귓가가 화끈거려왔다.

“꼴좋군, 단테.”

엔저가 먼저 서재로 들어가고, 다른 일행이 뒤따라 들어가며 문이 닫혔다. 안쉘은 안경을 벗고 닦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계속 심호흡을 했다.

힐끗 살펴본 방 안은 일반적인 서재의 모습과 비슷했다. 책장이 방 안 가장자리를 둘러 가득 채워져 있었고 한편에는 책상과 단테가 앉아 있는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업무를 했을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이 작은 사진 액자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 방 먹었어. 버러지들 주제에 제법 애썼더구나.”

단테는 서재에 침입한 이들이 누군지 확인하고는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 웃음을 터트렸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낯이 익었다. 분명히 이 장소는 처음인데 가증스럽게 평온한 미소를 짓는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니 단테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저자는 처음 만났을 때도 저렇게 웃으며 사람들의 경계를 허물어트렸다. 위험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신경을 누그러트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낯익음은…….

“한 방 같은 소리 하네. 앞으로 뒈질 일만 남은 건 너지. 기분이 어때, 늙은이. 진창으로 추락해가는 기분이.”

엔저가 이죽거리면서 천천히 단테 쪽으로 이동했다. 군화를 질질 끌고 느긋하게 걸으면서 입으로는 저열한 욕설을 내뱉었다. 잘생긴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붉은색 눈동자만큼은 형형하게 빛이 났다.

“정말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게냐.”

귀여운 재롱을 떠는 손주를 앞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단테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잔뜩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엔저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쳤다.

한동안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줌보를 터트렸을지도 모르는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윽고 단테가 먼저 흡족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깨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너희들은 이기지 못했다. 평생 나를 이기지 못할 게다. 이미 내 계획은 완벽하게 끝났기 때문이지.”

결국 안쉘이 단테의 태평한 말에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젊은 대통령을 본 단테의 얼굴이 처음으로 불쾌한 듯 찌푸려졌다. 마치 무지렁이 따위가 감히 끼어들어서 기분이 나쁜 듯한 눈초리였다.

“아뇨. 당신의 야망은 끝났습니다! 우린 인어와 평화협정을 맺고 당신이 저지른 끔찍한 전쟁을 끝낼 겁니다! 단테 막심, 이 추악한 늙은이! 당신 손에 죽은 사람들에게 사죄해! 당신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안쉘은 눈앞이 붉어지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아직 이성까지 잃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뜨겁고 심장이 아팠지만, 한편으론 빠르게 식어 갔기 때문이다. 안쉘이 비틀거리자 뒤에 서 있던 고려인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고려인의 차가운 손길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안쉘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며 몸에 힘을 줘 똑바로 섰다. 방금까지 이성을 잃고 비명 지르듯이 소리쳤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차분함을 되찾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던 안쉘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엔저와 단테의 눈동자와 차례로 마주했다.

“친아들을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가는 괴물 같은 짓도 이제 끝입니다.”

말을 끝마칠 때쯤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안쉘은 흥분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자신은 단테에게 승리했고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엔저의 도움을 크게 받았지만 안쉘은 이제 보좌관 조무래기가 아니었다.

단테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알시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것은 아들을 죽인 죄책감이 아닌 거슬려서 겨우 치워 버렸더니 다시 나타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놈을 죽였는데 뭐 어쨌단 거지.”

“…….”

“제 자식도 지키지 못한 그런 무능력한 자식 따위 필요 없다! 녀석은 그렇게 죽어 마땅했어!”

쾅!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늙은이가 어디서 그런 기백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테이블이 크게 흔들려 놓여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떨어진 찻잔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단테 막심, 당신은 죄 없는 인어들을 학살한 살인범으로!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영원히 역사 속에 기록될 겁니다!”

소리치는 안쉘을 쳐다보는 단테의 부릅뜬 눈에 실핏줄이 잔뜩 터졌다.

“애송이 따위가 뭘 안다고 지껄여! 인어들에게 죄가 없다고? 감히 그딴 소리를 해!”

상기된 얼굴로 소리치던 단테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안쉘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안쉘은 침착하고 재빠르게 능력을 사용해 자신 앞에 이능력 결계를 펼쳤다. 방탄유리보다 튼튼한 결계는 고작 힘없는 늙은이 따위에게 뚫릴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도! 내 목숨보다 아꼈던 손주도 모두 인어 놈들의 손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 감히 내 앞에서 인어 따위에게 죄가 없다고 말해!”

단테의 부인이자 알시타의 모친인 그녀는 알시타가 어렸을 때 요절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사망원인은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세간에선 단테가 부인과 함께 크루즈를 타고 가다가 부인의 등을 밀어 바다에 빠트린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리고 알시타의 아들이자 단테의 손주 역시 어린 나이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만 전해졌다.

안쉘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워 평화를 사랑하는 인어들을 모함하고 학살한 단테의 망상에 미친 듯이 화가 났다. 결계를 치우고 저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꽂아 줘야겠다고 다짐하고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 전에 안쉘을 밀치고 엔저가 먼저 달려들었다.

엔저는 단테가 하는 헛소리가 전부 끝나기도 전에 눈동자를 번뜩이며 단테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늙은이를 가차 없이 넘어트렸다. 쓰러진 늙은이에게 주먹을 휘두르다가 다리로 걷어차는 모습은 가까이 다가가기 무서울 정도로 살벌했다.

잠시 후, 안쉘이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엔저의 허리를 붙잡아 최대한 힘껏 당겼다. 그리고 단테의 앞에 이능력 결계를 펼쳤다. 설마 저런 늙은이를 구하려고 능력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안쉘은 멍하니 넋을 놓고 구경하는 고려인과 엔저의 보좌관에게 버럭 소리쳤다.

“뭐 합니까! 같이 와서 말려요!”

“아, 아…….”

“꼭 말려야 해? 그냥 죽여!”

고려인이 잔뜩 충혈된 눈동자로 소리쳤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단테가 벌인 참극의 피해자들이었다. 엔저의 새 보좌관 역시 단테의 손에 가족을 잃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단테는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다.

하지만 엔저에게 전 대통령을 폭행해 죽였다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안쉘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이 엔저의 양팔과 다리에 매달리고 나서야 엔저가 멈추었다. 움직임을 방해받은 엔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진 단테의 머리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렀다. 다행히도 죽진 않았는지 고꾸라진 등이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기절한 것인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는 건지 침묵을 지키는 등이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안쉘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령님, 진정하세요! 대령님께서 단테를 죽이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그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쉘보다 더 냉정하고 침착하게 서 있던 사람이 마치 눈이 뒤집힌 것처럼 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엔저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흩트릴 만큼 분노할 만한 게 무엇이 있었지? 단테가 방금 뭐라고 얘기했었지?

“사랑하는 여자도! 내 목숨보다 아꼈던 손주도…….”

안쉘은 이 문장의 어디에서도 엔저가 울컥할 만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대령님! 엔저 대령님. 단테는 죽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령님께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쉘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결계를 아슬아슬한 눈으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안쉘은 자신의 이능력 결계 정도는 쉽게 부술 만한 능력이 있는 엔저의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잠깐.’

그때 안쉘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망치로 한 대 친 것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엔저는 단 한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격렬한 감정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래, 딱 한 가지 있었다.

한참 실랑이하던 엔저는 겨우 이성을 되찾았는지 자신에게 매달린 이들에게 말했다.

“놔.”

“…….”

“…….”

“…….”

세 사람이 고개를 저어 가며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모습에 몸에서 힘을 뺀 엔저가 재차 중얼거렸다.

“정신 차렸으니까 놔.”

이래도 놓지 않는다면 능력을 이용해 던져 버릴 사람이었기에 세 사람이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떨어졌다. 안쉘은 꼴사납게 고꾸라진 단테의 뒷모습을 보며 서재 문을 열어 밖에서 대기 중인 군인들을 불렀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저택을 철저하게 봉쇄해 주십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각 맞춰 경례하는 군인의 계급을 확인한 안쉘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의 계급이 엔저보다도 높은 대장이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겨우 막았다.

안쉘은 저택에서 나와 판테니엄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엔저에게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대령님.”

“…….”

“대령님께서 나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도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나셨던 겁니까.”

안쉘은 단테가 말한 것과 엔저가 눈이 뒤집힐 만큼 분노하게 된 것의 연관성을 찾지 못해서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하지만 엔저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안쉘이 입을 떼려는 순간 라디오 방송이 틀어졌다. 때마침 뉴스특보가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단테 막심의 사형 날짜가 정해졌다는 특보였다. 고려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엔저 대신 대답했다.

“사형시킬 놈은 맞잖아. 어차피 더 이야기해 봤자 속 터지는 소리밖에 못 들을 텐데 더 살려 둬서 뭐 할 건데. 이러다 단테의 잔챙이들이 반란이라도 터트리면 곤란해. 공식적으로 빨리 멱을 따 버려야 한다고.”

고려인이 하는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안쉘은 무언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는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단테의 온화한 미소와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계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고 지내던 엔저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단테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안쉘은 엔저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 반드시 누군가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힐끗 본 단테의 서재 책상 위에 있는 액자사진 속 어린아이의 초록빛 눈동자…….

“…대령님. 제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요… 혹시… 혹시, 단테 막심과…….”

불현듯이 스친 생각에 안쉘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해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털었다. 이윽고 시선을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엔저와 눈이 마주쳤다.

삐리릭-.

때맞춰 엔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군에서 지급한 휴대전화였다. 엔저는 심각한 표정으로 발신인을 한참 노려보더니 통화버튼을 눌렀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발신인은 엔저가 자신의 저택을 감시하도록 배치한 엔저 부대의 군인이었다. 엔저의 저택을 감시하는 이유는 당연히 안에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지금 거기엔 그의 소중한 헤리엇 알스터가 지내는 중이니까.

“무슨 일이지?”

- 안녕, 엔저.

“히익…….”

안쉘은 차라리 공포 영화를 보는 게 덜 무서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서 들리는 헤리엇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인자했다. 아마 표정도 안쉘이 생각하는 대로 온화하기 짝이 없겠지. 눈썹 끝이 내려가고 곤란한 듯한 옅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안쉘은 헤리엇이 그 온화한 얼굴로 주먹질을 하는 무서운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지금 휴대전화를 빼앗긴 군인을 어떻게 만들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물론 사랑하는 후배의 부하이니 힘 조절을 했겠지만 맞은 이는 죽을 만큼 아플 것이다.

고려인도 소름이 돋았는지 턱과 목 부근에 닭살이 오돌토돌 올라온 게 보였다. 지금 이 공간에서 태평한 건 오로지 엔저뿐이었다.

“선배. 식사는 하셨습니까?”

최근 소식하는 것도 모자라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 헤리엇을 위해 엔저는 늘 자극적이지 않은 고열량 고단백의 식사를 매번 챙기고 있었다. 헤리엇은 자신의 식사를 챙기는 엔저의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안쉘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 맛있게 먹었어. 집 앞에 있는 사람들이 나가는 걸 막아서 조금 손을 써 두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분명 엔저가 고심하며 선별한 이들이었겠지만 아마도 헤리엇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아무리 방심하면 안 된다고 해도 절름발이인 헤리엇은 시각적으로 조금 약한 사람처럼 보였다. 안쉘마저 초반엔 헤리엇을 지켜 줘야 할 상대로 인식했을 만큼.

- 조금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것뿐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밖에 나오시려는 겁니까, 선배?”

엔저의 정중한 물음에 헤리엇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말속에는 엔저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잠시 볼 일이 생겨서 밖으로 나왔단다.

“어떤 볼일이십니까?”

- 일어나서 밥을 먹고… 씻고 TV를 틀었는데 단테의 사형 일정이 정해졌다는 특보가 떴어. 그래서 생각했어.

헤리엇의 말은 높낮이가 없이 평화로워서 마치 집 앞을 산책하러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듯한 투였다.

하지만 안쉘은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 단테를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고.

단테의 저택을 지키는 군인들은 모두 대장급의 능력자들이었다. 한 명도 상대하기 버거울 만큼 강한데 그런 이들이 살벌하게 경계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철저하게 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나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헤리엇을 그들이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 오면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 혹시 곤란하니?

물론 곤란했다. 안쉘은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엔저의 표정에 입을 열지 못했다. 헤리엇이 하는 일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엔저의 눈이 확고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쉘은 말문이 막혔다.

“원하는 바를 이루세요. 모든 건 선배가 원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나의… 헤리엇.”

통화를 마무리하는 감미로운 엔저의 목소리는 마치 사랑 고백을 하는 것처럼 나긋나긋했다. 안쉘은 상황에 맞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 차리고 다급하게 운전석에 앉아 있는 보좌관에게 소리쳤다.

“차 돌려요!”

“네?”

“차 돌려서 다시 단테의 저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돌아가면 늦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서 가서 말려야 한다.

“천천히 가.”

“아니요! 빨리 서둘러요!”

서로 다른 내용의 명령에 보좌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엔저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그들이 타고 있던 차가 두둥실 떠올랐다. 엔저가 능력을 사용해서 허공에 차를 들어 올린 것이다.

안쉘이 답답한 기분에 소리쳤다.

“헤리엇 님께서 무사히 단테의 저택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분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

“아무리 인체실험 피해자라고는 해도 헤리엇 님께서 직접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

“단테를 죽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오로지 선배뿐이다.”

“그게… 무슨…….”

“어쩌면 그게 단테에게 가장 무자비한 벌이 될 수도 있겠군.”

그리고는 엔저가 능력을 사용해 단테의 저택을 향해 아주 느릿한 속도로 날아갔다. 이윽고 차가 멈춰 바닥에 착지하자 안쉘은 차 안에서 튀어나와 비틀거리다가 전봇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  *  *

“너를 닮았네.”

제이든이 헤리엇과 알시타의 반짝거리는 금발을 번갈아 보며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알시타는 어딘가 아픈 표정으로 웃었다. 헤리엇은 알시타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읽던 책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제이든은 그런 헤리엇의 반응에 울컥했는지 왁, 하고 소리쳤다.

“지금 보니까 안 닮았네!”

“제이든… 애한테 무슨 짓이야?”

“애가 애 같아야 애처럼 대해 주지. 꼬맹아, 과자 먹을래?”

당시의 제이든은 알시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헤리엇의 눈에 잘 보여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걸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한 번씩 불퉁하게 굴고는 했다.

헤리엇은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팔을 내렸다. 헤리엇의 신체가 바닥에 박힌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는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으며 쓰러진 군인을 넘어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갔다.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뒹구는 이들의 부상이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헤리엇은 단테가 지내는 방을 빠르게 찾아냈다. 붉은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면서 걷는 모습이 마치 집 앞에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유유자적했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경첩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헤리엇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소파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단테는 적의 없이 빠르게 다가온 헤리엇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는 가까이 다가오는 헤리엇을 쳐다봤다.

헤리엇은 기절시킨 군인에게 빼앗은 권총을 들고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다가왔다. 미소 짓는 얼굴은 온화하기 짝이 없었지만, 손에 들린 권총은 그렇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헤리엇이 평소와 다름없는 여상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단테의 푸른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단테는 목에 경추보호대를 대고 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그는 푹신한 고가의 소파에 앉아 고개를 살짝 비틀어 헤리엇을 노려보고 있었다. 엔저 맥과이어와 안쉘 리가 잔뜩 긁어 놓고 갔는데 이 쓰레기는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불쾌한 눈초리였다.

헤리엇은 빙그레 웃으며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갔다.

“네놈은…….”

절뚝거리며 단테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헤리엇이 자신의 상의를 들어 올려 탄탄한 복부를 드러냈다. 그의 복부는 흉측한 흉터가 마치 띠를 두르듯 빙 둘러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어느 부분은 피부색이 달랐다.

헤리엇 알스터가 과거 자신이 행한 실험의 실험체인 걸 이미 알고 있는 단테는 그 모습에도 코웃음을 쳤다.

“복수라도 하려고 찾아온 게냐. 너 따위 잔챙이가 여기까지 와서 설치다니 나도 이만 죽을 때가 됐나 보군.”

헤리엇은 복수라는 말에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여태껏 자신이 실험체로 당한 것에 화나지 않았다. 아프긴 하지만 참을 만했고 지금도 그랬다. 거기다가 엔저가 자신의 인어 모습을 좋아하는 게 눈에 보여 실험당했던 과거 따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내 왔다.

헤리엇이 눈을 내리깔자 그의 하얗게 바랜 속눈썹이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할아버지.”

헤리엇이 눈을 휘어 웃었다. 알시타는 즐거운 일이 생기면 이렇게 웃으라고 가르쳐 줬다.

비웃음을 짓고 있던 단테 막심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굳은 건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헤리엇의 한마디에 온몸이 굳어 고장 난 장난감 같은 몰골이 되었다.

단테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 앞에 놓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추레한 늙은이가 드디어 헤리엇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초록빛을 되찾은 눈동자는 단테 막심이 잘 아는 색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 설마, 설마……!”

“알시타는 내게 뭐가 그렇게 미안했던 걸까.”

헤리엇과 똑같은 금발을 가진 알시타 막심은 헤리엇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픈 표정으로 웃으면서 입양을 해 아들로 들인 다음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고 사랑을 주겠다고 했었다.

제이든이 헤리엇을 보며 알시타와 닮았다고 말할 때마다 그는 무척이나 씁쓸한 얼굴을 했다. 수십 년간 알시타의 곁에 있었던 제이든도 모르는 알시타의 계획은 오로지 헤리엇만이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켜 왔던 단테가 알게 된 진실에 울부짖었다. 그는 아들을 버릴 정도로 손주를 사랑했다. 그리고 결국은 손주를 기리기 위해 인간성도 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헤리엇이 말하고 있는 건…….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헤리엇의 복부에 가득한 흉터들. 단테가 보고받은 실험들. 그리고…….

단테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늙은이는 피눈물을 흘리며 괴성을 질렀고 그 모습에 헤리엇은 고개를 살짝 비틀어 작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것에 절망한다는 게…….

자신이 내린 명령으로 헤리엇이 실험당했다는 사실에 늙은이는 흉하게 울고 있었다. 헤리엇을 이용해 인어들을 잔인하게 죽이려고 했던 그는 흡사 짐승처럼 기어 다니다가 헤리엇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러나 헤리엇은 손에 쥐고 있던 총을 장전했다. 이 방법이 단테에게 가장 끔찍한 형벌이 될 것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그 말이 정답인 것 같았다.

“이해할 수가 없네…….”

탕-!

*  *  *

“헤… 헤리엇, 헤리엇 님께서… 어떻게… 그런…….”

입으로는 있는 힘껏 부정해 보았지만, 순서대로 하나하나 아귀가 맞아 가는 퍼즐에 안쉘은 오금이 저렸다.

알시타는 헤리엇의 후원자이자 후견인이었다. 보육원에 있는 헤리엇에게 모든 계획이 성공해 바다를 횡단하고 돌아오면 그를 입양하겠다고 했었다. 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안해하고 슬퍼하며 알려 주겠다고 했었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이 단테 막심에게서 아들을 지키기 위한 알시타의 계획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만약 알시타의 아들이 죽은 게 아니라면, 아들이 권력에 의해 이용당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알시타가 사용한 방법이 ‘그런’ 것이라면…….

“헤, 헤리, 헤리엇 님께서… 단테의 손… 자란 말씀이십니까.”

안쉘은 생각을 이어갈수록 저 밑에서부터 역겨움이 올라와 헛구역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수석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려인 또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그렇다면… 헤리엇 님께서는… 그, 그런 비인간적인 짓을 할아버지에게… 당하고 능력을 잃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앤에게 알시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엔저는 그 ‘사실’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엔저가 들고 있던 파일을 넘겨받은 안쉘은 그 안에 적혀 있는 믿을 수 없는 진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

새소리가 음울하게 울리는 단테의 저택 정원에 서 있는 세 사람 사이에는 침통함으로 가득한 정적이 흘렀다.

정말로 단테 막심이 헤리엇의 조부이고 알시타가 친부라면…….

“너무… 너무 끔찍합니다. 헤리엇 님의, 인생이… 너무…….”

그때 저택 현관 앞에서 기절해 있던 군인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현관이 마찰음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온통 하얀색으로 물든 사람이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절뚝이며 걷는 자세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들고 있던 권총을 정원 구석에 던져 버린 헤리엇이 자신을 기다리는 엔저를 발견하고 눈꼬리를 휘어 활짝 미소 지었다. 그는 엔저의 옆에서 토악질을 하는 안쉘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빛내며 쳐다보고 있는 엔저에게 팔을 뻗었다.

“이리 온, 엔저.”

*  *  *

헤리엇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새하얗기만 한 그가 유일하게 색이 입혀지는 시간이었다. 헤리엇의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엔저의 손길이 닿는 곳곳에 꽃이 피어나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어루만지는 손은 목덜미와 가슴, 옆구리를 거쳐 골반과 엉덩이,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의도를 가지고 닿아 오는 손바닥이 뜨거워서 익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체온보다 몇 배는 뜨거운 것 같은 엔저의 손바닥에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양손을 이용해 선배를 마음껏 희롱하던 후배는 한쪽 종아리를 잡고 들어 올려 입술을 갖다 댔다. 숭배하는 신을 앞에 둔 충실한 신자처럼 엔저는 헤리엇의 종아리를 지나 발목, 복사뼈까지 놓치지 않고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헤리엇은 왠지 모르게 덥고 숨이 가빠져 어지러운 시선을 들어 주변을 훑어보았다.

엔저가 지내는 고층의 아파트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또 숨 막히도록 폐쇄적이었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진 아파트는 세상의 모든 편리한 기술은 넣어 놓은 것 같았지만 헤리엇이 사용하기엔 너무나도 어려웠다.

기술 발전과는 거리가 먼 시골 마을이 더 익숙한 그는 버튼만 몇 번 톡톡 누르면 끝인 이 편리함이 익숙하지 않았다.

“…아.”

하지만 그런 낯선 환경에 대한 불편함을 감소하더라도 헤리엇은 이곳이 지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집안 곳곳에서 엔저가 살았던 흔적들을 하나하나 발견해 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헤리엇은 자신의 발바닥에도 입술을 대려는 엔저를 잡아끌어 목에 손을 두르고 입을 맞췄다. 한참 동안 방 안에는 질척이는 소리가 울렸다.

사락거리는 헤리엇의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과 이마가 언뜻 보였다. 엔저는 주체할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에 헤리엇의 붉은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선배, 다리를 벌려 주세요.”

헤리엇은 엔저가 말하는 대로 두 다리를 활짝 벌려 주었다. 체모마저 희게 새어 버린 탓인지 헤리엇의 나신은 그야말로 하얀 도자기 같았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엔저의 손자국만 아니었다면 조금만 건드려도 깨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그런 헤리엇을 어루만지는 엔저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힘이 넘쳤다. 마치 몇 날 며칠을 떼써서 얻어 낸 장난감을 앞에 둔 어린아이 같았다.

이윽고 엔저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헤리엇의 엉덩이를 붙잡고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보기 좋은 근육이 존재하긴 했지만 마른 편인 헤리엇의 신체에서 유일하게 살집이 있는 곳 중 하나였다.

엔저는 큰 손으로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드러나는 붉은색 입구를 감상했다. 엔저에겐 그곳이 하얀 눈 속에 숨어 있는 분홍색 꽃처럼 보였다. 이내 그곳을 혀로 핥으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헤리엇은 엔저의 손가락이 지나치게 뜨겁고 커서 조금 벅찬 것 같이 느껴졌다. 그가 조금이라도 고통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면 아픔으로 온몸을 뒤틀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단순한 육체적 고통과는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안쪽을 들쑤시는 손길에서 알 수 있는 뜨겁고 간지러운 감각은 도통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헤리엇이 입을 벌리고 할딱거리자 엔저가 고개를 숙여 벌어진 입술에 혀를 집어넣었다. 깊게 들어간 혀가 입 안에서 분탕질 치는 움직임이 무척 야했다.

아래쪽을 들쑤시는 찌걱거리는 소리도 귓가에 들려왔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귓불이 잔뜩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하얀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헤리엇의 귀가 온통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엔저가 하는 짓이 싫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항상 벅차고 힘겨웠다.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움찔거리는 입구에 아플 정도로 빳빳하게 선 엔저의 성기가 닿자마자 안으로 짓쳐 들어왔다.

눈을 감은 헤리엇의 눈썹이 고통으로 찌푸려졌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고 숨을 헐떡이며 힘겨워하는 헤리엇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응시하던 엔저의 눈가가 점점 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헤리엇…….”

“아.”

늘 깍듯하게 존대를 해 오던 엔저가 흥분감에 못 이겨 반말을 내뱉을 때마다 헤리엇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발가락 끝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복부가 흥분으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성기에서는 맑은 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을 감고 쾌감을 견디던 헤리엇의 눈가마저도 붉게 변했다.

“흐윽… 아… 엔저.”

“…헤리엇, 아름다운… 나만의…….”

엔저는 헤리엇을 드디어 손에 넣고 자신의 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앞뒤로 허리를 움직이면서 그의 안을 들쑤시고 파헤치는 그 순간에도.

“선배… 선배.”

“흐윽… 아… 엔저… 이건 너무… 너무.”

견디기 힘든 감각에 몸이 덜컥거렸다. 엔저가 주는 감각은 지금까지 그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해 본 것들이었다. 이런 건 배운 적이 없었다.

헤리엇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멍하니 누워 숨을 고르며 엔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기만 했다. 누구도 알려 주지 않는 감각을 밀어 넣고 헤리엇을 지배하는 건 세상에 오로지 엔저뿐이었다.

뜨겁고 질척한 내부를 들쑤시던 성기가 어느 한 곳을 쭉 긁고 지나가는 느낌에 헤리엇은 눈을 질끈 감고 눈앞의 사내를 끌어안고 버텨 냈다. 자신도 모르게 침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헤리엇의 입가에서 침이 흐르는 더러운 몰골인데도 엔저는 그곳에 더 흥분하는 모양인지 허릿짓이 격해졌다. 내벽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성기가 끝도 없이 진입했다. 빠져나갔다가 더 깊게 짓쳐 들어오는 성기의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는 헤리엇의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헤리엇, 선배… 계속 이러고 싶었습니다. 선배를, 끌어안고… 이 방에 가두고, 영원히…….”

“으음… 아.”

절정으로 향해 가는 엔저의 눈앞에 헤리엇의 등이 아른거렸다. 그때의 그는 지금보다도 훨씬 작고 가녀린 어깨를 가졌고 엔저는 그보다도 훨씬 작았다. 자신은 헤리엇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다짐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의 옆에 설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감히 주장하지 못했다.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가고 어떤 일에도 화낼 줄 모르는 하얀 인어를 지킬 힘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런 자신이 그를 지배하고 가둘 방법 또한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엔저는 몇십 년을 인내하고 기다렸다. 그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날 만을 고대하며 힘을 길렀다. 권력, 재물, 명예. 그 모든 것들을 오로지 헤리엇을 위해 악착같이 모았다. 넓은 수조 안에 하얀 인어를 넣고 자신만이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게요, 선배… 선배, 약속 기억해요?”

“흐윽…….”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헤리엇은 엔저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짓이겨 들어오는 커다란 성기에 목이 멨는지 숨을 들이마셨다. 엔저의 허릿짓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끈질기고 더 거칠었다.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차오르는 느낌에 견딜 수가 없었다.

“배가… 배가…….”

“선배…….”

헤리엇은 이렇게 뜨겁고 커다란 감각을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버텨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이 지옥의 불길에서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견뎌 냈었는데…….

“견딜 수가 없어… 엔저… 엔저.”

헤리엇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엔저는 더 흉포하게 날뛰었다.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고 살결이 부딪히는 부분이 미끄러웠다. 더운 숨을 내뱉는 헤리엇의 입술에서 입김이 나올 것만 같았다. 뜨겁고 야한 향기가 방 안에 진동했다.

결국 헤리엇이 더는 참지 못하고 먼저 파정하자 엔저는 헤리엇의 가장 깊은 곳에 성기를 집어넣고 분출했다. 엔저에게 잡혀 있는 몸이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파드득거렸다.

“선배, 약속… 기억하십니까.”

“으응…….”

“저는 약속 다 지켰어요.”

엔저는 피로감에 눈을 감은 헤리엇의 귓가에 속삭였다. 헤리엇은 약속을 지켰다고 애처롭게 중얼거리는 엔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얼핏 잠에 빠졌다.

헤리엇은 요즘 들어 꿈을 자주 꿨다. 꿈에서 과거의 많은 장면이 나왔다. 가끔 제이든이 나오기도 했고 알시타도 나왔다.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어릴 때의 자신도 있었다. 꿈에서 알시타와 제이든은 뜨거운 코코아를 타 주며 웃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울면서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내용이 달랐다. 어렸을 때의 자신은 맞았지만 아주 어렸을 적의 모습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청소년의 모습을 한 자신이었다. 손에 붉은색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짚은 자신의 뒤로 보육원이 아닌 아카데미가 보였다.

‘선배.’

그리고 자신의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어린 엔저가 등장했다. 어린 시절의 엔저는 키가 작은 게 큰 고민인, 아주 작고 귀엽고 소중한 아이였다. 헤리엇이 속으로 몰래 ‘루비’라고 부르는 아이는 루비를 닮은 붉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제가 전쟁을 끝내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그러니까, 선배.’

‘…….’

‘저를 부관으로 삼아 주세요.’

군인이 아닐지라도.

헤리엇의 꿈이 동물학자였던 그때처럼, 만약 전쟁이 끝나고 그 꿈을 이루게 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허락해 달라고 어린 시절의 엔저가 애원했다.

‘그래.’

‘약속입니다.’

어릴 때의 약속 따위에 뭐 그리 큰 의미가 있어서.

“후후후…….”

헤리엇이 눈을 감은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땀으로 젖은 몸을 닦던 엔저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눈가를 덮는 하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얼굴을 살폈다. 그는 섬세하고 연약한 공예품을 만지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후후… 하하…….”

헤리엇이 소리 내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헤리엇의 모습에 엔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참을 놀란 얼굴로 엔저가 헤리엇의 곁을 지켰다.

그동안 헤리엇은 계속 소리 내 웃었다. 꿈속에서 무슨 재미있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일까 질투심이 솟은 엔저는 살짝 힘을 주어 헤리엇의 뺨과 귀를 쓰다듬었다.

“선배.”

“…….”

웃음소리가 잦아든 헤리엇을 다시 한번 불러 봤다.

“헤리엇 선배.”

“…….”

헤리엇의 눈이 드디어 뜨였다. 뿌연 안개에 가려진 듯한 하얀색 눈동자가 아닌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초록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고개를 들어 엔저와 눈을 마주한 헤리엇이 입을 열었다. 아직 잠에 취해 있는 채였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하게 엔저를 향했다.

“사랑스러운, 내… 루비.”

*  *  *

단테 대통령의 사형 집행 소식으로 언론이 떠들썩했다.

그의 죄질이 나빠 공개적으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전(前)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위해 비공개로 진행한다는 결정이 뉴스와 신문에 발표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판테니엄관의 공식적인 입장일 뿐이지 실상은 조금 달랐다. 헤리엇이 쏜 총을 맞고 죽은 단테 막심을 다시 사형시킬 수도 없고 헤리엇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소름 돋는 건 말이야… 단테는 곱게 죽지 못했다는 거야. 그 표정 봤어? 난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니까…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아.”

고려인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사후 처리를 위해 저택으로 들어가 살펴본 현장은 생각보다 참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신은 사지가 뒤틀린 데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뜬 채 동공이 풀려 있었고 얼굴엔 주름이 잔뜩 져 있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총을 겨우 한 발만 쏘고, 맞은 곳이 치명상도 아니야. 사인은 과다출혈이라고… 그러면 대장은 단테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걸 계속 지켜봤다는 소리잖아.”

친할아버지인데.

고려인은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그 이상으로 깊게 파고들었다간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라고 직감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쉘은 입을 다물고 고려인에게서 건네받은 기밀 자료를 받아 금고에 넣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 일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깊게 파고들지 맙시다.”

이제 전부 끝났다. 인어들과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단테를 따르던 잔챙이들이 모여서 반란 조직을 만들긴 했지만 예상하고 준비했던지라 진압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또한 엔저 맥과이어 대령이 나서서 여기저기 숨은 잔챙이들을 차례로 매장해 버렸고 몇몇은 군법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다.

막다른 골목에 서 있던 반란 조직은 점차 사기도 떨어지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며 와해되기 시작했다. 항복하는 자들이 절반이 넘어가고 아무도 모르게 해체되는 세력도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대통령으로서의 일상도 조금은 진정되어 갔다. 그는 시간이 나면 안젤라와 산책을 하거나 식사를 함께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그녀가 퍼스트레이디가 될지도 모른다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안쉘과 안젤라는 연인으로 발전할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계는 남매와 비슷했다.

오늘도 안젤라와 점심을 함께한 안쉘은 회의장으로 향하는 오후 일정을 확인하며 리언의 소식을 들었다.

한때 안젤라와 연인이 되기 직전까지 갔던 그는 동물과 평화를 사랑한다던 소심한 사내. 그는 단테의 명령으로 헤리엇을 배신하고 헤리엇의 세뇌를 일깨우기도 했다. 단테 일당이 구속될 때 함께 잡혀 군 재판소로 이동해 지금은 구치소에 구금 중이었다.

사형판결을 받지는 않겠지만 다시 군으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에게는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안쉘은 씁쓸하게 웃으며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려인에게 종이를 넘겨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헤실헤실 풀려 있더니 갑자기 왜 그럽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리언 그 자식은 말이야… 위선자야.”

“그렇다고 죽을죄를 지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잖아요.”

고려인이 안쉘의 말에 펄쩍 뛰었다.

“죽을죄가 아니긴! 그놈 때문에 대장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잊었어!?”

“헤리엇 님은 리언이 아니더라도 단테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 그건 당신이 제게 말해 준 사실이 아닙니까. 헤리엇 님에게 세뇌를 풀 의지가 없었다고.”

고려인은 리언의 이야기로 짜증이 나는지 귀를 털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안쉘이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무슨 활활 타오르는 청춘들이냐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려인이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청춘은 그쪽이겠지.”

고려인의 말대로 때마침 판테니엄관 정문에 검은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안쉘의 앞에 내려선 손님은 인어 앤이었다.

안쉘이 보내 준 고용인은 명령대로 극진하게 모셨는지 앤의 상태가 평소보다도 좋아 보였다. 안쉘은 검은색 슈트를 입은 앤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하늘하늘하고 격식 없는 차림새를 고수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제대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긴 푸른색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하나로 묶은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보였다.

이전에 종전에 협의하기 위해 한 번 만나기는 했지만 서로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앤을 대통령의 손님으로 초대한 것이라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안쉘은 눈을 휘어 미소 짓고 있는 앤의 눈길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약속 지켰습니다.”

“네.”

“감사했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앤이 고개를 저어 안쉘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안쉘이 입을 달싹이는 걸 보며 앤이 말을 이었다.

“모두 툴툴이 씨가 해 낸 업적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앤이 없었다면…….”

안쉘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속삭이던 앤의 목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 머리가 차가워지고 이성이 되돌아왔다. 물론 눈앞에서 증명해 보일 순 없겠지만 안쉘은 뚜렷하게 도움을 받았다.

손님을 세워 놓고 횡설수설하는 안쉘을 끈기 있게 기다리던 앤이 눈을 내리깔았다.

“마지막으로 염치없지만…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될까요, 안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앤과 눈을 마주했다. 언제나 따뜻하기만 한 푸른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 나왔다.

아니, 사실은 앤의 미소 한구석에는 항상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났음에도 앤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무슨 일입니까.”

괜스레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안쉘. 우리 인어들은 차가운 바닷속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가진 능력 덕분에 살 수 있는 것이고 우리들 역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종족입니다.”

앤이 손을 뻗어 안쉘과 손을 마주 잡았다. 느껴지는 감촉은 서늘했지만, 분명히 온기가 있었다. 안쉘은 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도… 따뜻한 곳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물속에 있으면 좋기는 하지만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어요. 헤리엇이 물 밖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안쉘은 헤리엇을 떠올렸다. 인조 인어인 그는 물속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만 물 밖으로 나와 생활하는 걸 더 좋아했다. 지금까지 헤리엇이 인간이었던 과거 때문에 물 밖이 더 익숙해서 그런 것이라고만 여겼다.

골똘히 생각하던 안쉘은 앤과 단둘이 판테니엄관으로 들어가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고개를 들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앤을 힐끗 쳐다보는 안쉘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그는 아직 헤리엇과 엔저, 단테 등 해결해야 할 남은 일들만으로도 머리가 욱신거릴 만큼 아팠다. 여기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더 있다고 하면 뇌가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 왜… 인어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어지는 앤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청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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