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대통령 안쉘(4권) (21/30)

20. 대통령 안쉘 

콰아앙!

군함과 군함이 정면으로 충돌한 탓에 거대한 소음이 북쪽 바다를 울렸다. 수면이 진동하고 여기저기서 파도가 크게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오던 군함들도 인어를 공격하기 시작한 단테의 군함을 향해 포를 돌렸다.

군함끼리 뒤엉키며 서로를 향해 폭격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미사일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로 폭약이 터지고 그만큼 바다가 더러워져 갔다.

하늘을 나는 능력자들, 군함 갑판 위에서 이능을 사용하는 능력자들, 빠르게 날아와 연신 미사일을 쏘는 전투기, 마지막으로 최전방에서 바람을 사용하는 엔저 맥과이어까지. 북쪽 바다에는 그야말로 세계의 종말이 찾아온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엔저가 손을 뻗을 때마다 바다에 내리꽂히는 토네이도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거대하고 사나웠다.

“대령님! 인어들도 말려들 겁니다!”

엔저의 능력은 범위를 조절하기 힘들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려들기에 십상이었다.

“칫.”

그가 혀를 차며 능력을 거두고 갑판 위로 착지했다. 그 순간 엔저의 머리 위로 미사일이 날아왔지만, 엔저에게 닿지는 않았다.

“대령님!”

바닷물에 잔뜩 젖은 반이 어느새 엔저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개표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선거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원래 하루가 꼬박 걸리던 개표는 10년 전 단테가 온갖 예산을 쏟아부어 전자식으로 바뀐 후, 시간이 단축되었다. 오래 끌어 봤자 4시간, 아니면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이제 서로를 바라보며 어느 한쪽이 울고 웃는 광경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인간과 인어가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느냐 둘 중 하나가 없어지느냐의 역사적인 기로에 서 있었다.

“안쉘은?”

그때, 엉켜 있는 군함들 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용오름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주변의 아군, 적군 구분할 것 없이 걸리는 모든 것을 감싸 바다 아래로 끌고 들어갔다.

현재 지상 인간 중에 그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바람의 이능을 가진 엔저가 저것과 비슷한 토네이도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저건 바람이 아닌 오로지 물을 이용한 것이었다. 아무리 엔저라도 바람을 이용해 바닷물을 저만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엔저가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유빙이 산산조각이 나며 엔저 부대의 검은 함대 한 척이 순식간에 바다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저런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인어들이긴 하지만 지금 인어들은 모두 앤의 뜻에 따라 인간을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인어가 아니라면 남은 건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인조 인어.

바다를 지배할 욕심에 젖은 인간들의 끔찍한 실험 결과물.

“단테…….”

엔저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이를 갈며 허공으로 떠올라 잡을 새도 없이 군함에서 멀어졌다.

“대령님!”

뒤에서 반과 노엘이 애타게 불렀지만, 엔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이런.”

헤리엇은 곤란하다는 듯 작게 미소 지으며 군함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완전한 인어의 모습이었는데, 안쉘의 군함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헤리엇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음.”

헤리엇은 자신의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인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상대방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짧게 침묵하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입을 다문 헤리엇을 위해 상대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헤리엇.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이름은 렘입니다.”

“오, 그래요. 렘.”

헤리엇의 앞에는 놀랍게도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낸 렘이 있었다. 그는 헤리엇보다 조금 불안정해 보이지만 탁한 회색 머리카락에 미세한 푸른빛을 띤 인어 그 자체였다.

웃고 있는 그의 주변으로 거대한 용오름이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다가 추락했다. 그것을 따라서 군함 파편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다가 곧이어 렘의 뒤에 군함 선체가 떨어졌다. 그로 인해 파도가 렘과 헤리엇을 덮쳤으나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뭘 그렇게 놀라시나요?”

그리고 렘이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헤리엇에게 능력을 써서 공격을 퍼부었다. 헤리엇의 뜻대로 움직이던 바다가 두 인조 인어 사이에서 요동치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연구원들은 헤리엇이 불량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살아선 안 되는 실험에서 살아남은 데다가 심지어 인어와의 융합율 100%를 보여 주며 부작용 하나 없이 눈을 떴다. 그 말은 0.000001%의 확률로 실험에 성공할 수도 있고 다른 성공작이 나올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헤리엇은 설마 그들이 자신 이후로 20년 동안 실험을 계속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또 다른 성공작을 만들어 냈을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렘의 공격은 마치 헤리엇과 힘겨루기를 하려는 것처럼 날카롭고 어딘가 위태로웠다. 아마 실험으로 신체가 안정되기도 전에 급하게 전투에 파견된 듯싶었다.

“소용없는 짓은 하지 마세요, 헤리엇! 당신에 대한 데이터는 전부 다 봤어!”

렘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바닷속에서 요동치는 회오리는 점점 거대해졌고 주변에 있던 군함들이 하나둘씩 빙글빙글 돌며 소용돌이 가운데로 빨려들어 갔다. 거대한 군함들을 집어삼키려는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렘이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내며 황홀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렘은 원래 아주 보잘것없는 전기 이능을 가진 군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진급도 한 번 못 해 봤다. 능력자이지만 일반인보다 약한 체력 때문에 여기저기 치이고 다녔었다.

그런 그에게 운이 좋게도 이런 막대한 힘이 굴러들어 왔다. 자신은 바닷속에서 누구보다도 강했다. 누구도 감히 자신에게 버러지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선택받았고 그에 따른 권력과 명예를 약속받았다. 대통령 단테 막심은 렘에게 죽을 때까지 써도 모자라지 않을 재물을 약속했다.

이만 명 중에 일,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도 더 희박한 확률로 렘은 선택받았고 살아남았다. 헤리엇과는 다르게 실험 중에 마취까지 받은 렘은 자신이 받은 끔찍한 실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갑자기 주어진 거대한 힘에 취해 있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헤리엇을 비웃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최강은 나야! 내가 최강이다! 이제 내가… 내가!”

- 국민 영웅 엔저 맥과이어가 또다시 지상에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연호합니다. 그는 영웅이에요. 국민들은 그를 사랑합니다.

이제부터 렘은 영웅이 될 것이고 이 개 같은 북쪽 바다만 점령하면 단테는 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줄 것이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렘의 욕심만큼이나 계속 커지기 시작해 결국에는 아군 군함 두 척까지 집어삼키고 말았다.

대의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렘은 자신의 힘에 취해 황홀한 표정으로 헤리엇을 비웃었다.

“그, 머저리 같은 엔저 맥과이어와…….”

바다를 지배하는 힘, 인어 따위가 아닌 인간이 가져야 하는 거대한 바다의 에너지를 헤리엇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렘은 못내 불만스러웠었다. 최강의 인조 인어라는 수식어를 공유하기에는 렘은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았다.

“당신을 죽이고 내가 바다를 지배하겠어.”

“음.”

렘이 폭주하듯 쉴 새 없이 공격하는 것에 반해 헤리엇의 대응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받아치지도 공격하지도 않고 그저 그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경험치나 인어로서의 능력 자체로 따지면 조금 더 우세할 것이 분명한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헤리엇을 보고 렘은 눈을 찌푸렸다. 새하얀 헤리엇의 지느러미 색과는 달리 렘의 지느러미 색은 점점 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렘 본인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렘의 능력으로 헤리엇의 양팔이 강하게 결박되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큰 압박감에 헤리엇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이 정도로 최강의 인조 인어라며 연구원들이 벌벌 떨었던 건가?

렘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의 헤리엇은 김이 샐 정도로 나약해 보였다.

“…시간 낭비만 했군.”

헤리엇의 몸을 터트릴 작정으로 조금 더 집중해서 능력을 사용했다. 바다가 그의 명령에 가여운 인조 인어를 터트리기 위해 움직였다.

“……?”

그러나 그 공격이 갑자기 사라졌다. 원래라면 헤리엇의 눈, 코, 입, 신체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 냈어야 하는데, 헤리엇의 모습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까만 연기로 뒤덮인 수면 위와는 달리 투명할 정도로 맑고 깨끗한 바다 안에서 헤리엇은 그저 작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새하얀 꼬리지느러미를 살랑거리면서 수면 아래에 떠 있는 헤리엇의 얼굴에 조금 다른 형태의 미소가 어렸다. 그건 헤리엇이 늘 짓던 미소가 아니었다.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웃는 것이 아닌 가소로운 것을 보는 듯한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뭐… 뭐야…….”

렘이 헤리엇을 다시 공격하기 위해 이번엔 양팔을 뻗어서 더욱 집중했다. 그러나 그 공격 역시 헤리엇에게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 슬슬 시작될 텐데…….”

헤리엇이 수면 위를 관찰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푸른색 안개를 담은 듯한 눈동자를 담은 눈이 가늘게 휘었다. 바닷속에서 살랑거리는 푸른색 머리카락이 이상하게도 이질적이었다.

렘은 영문을 몰라 하며 헤리엇을 직접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가 헤리엇의 목과 팔을 붙잡은 순간,

“나도 그건 조금 많이 아팠거든.”

헤리엇이 처음 출전하던 날.

세뇌 키워드로 인어 섬멸을 명령받고 헬기에서 떨어져 동쪽 바다에서 처음 능력을 쓰게 된 그날,

헤리엇은 폭주하는 바람에 인어, 인간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이고 아무것도 살려 보내지 못했다.

그래. 살려 보내지 ‘못했다’.

“제법 아팠거든. 듣지 못했나 보구나. 가엽게도…….”

헤리엇은 마치 렘이 이 이후 어떻게 될 것인지 아는 것처럼 자신의 목과 팔에 닿은 렘의 양팔을 잡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곧 익숙해질 테니까.”

헤리엇이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와 눈썹을 내리고 옅게 미소를 지었고 렘과 심해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인어들은 수압에 영향받지 않는다. 바다는 그가 사랑하는 인어들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못한다. 그건 아무리 만들어졌다고 해도 렘과 헤리엇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 렘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겠지만.

“내가 그러했듯, 너도 아마 익숙해질 거야. 음… 한 5년 정도?”

“무슨… 소리야.”

렘이 불길한 느낌을 감지하고 헤리엇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육체적 조건이 확연하게 다른 탓에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해 보았지만 헤리엇에게 닿기도 전에 또 사라져 버렸다.

“…어? 아… 아파. 아아아악!”

헤리엇의 미소 지은 얼굴이 심해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순간, 렘은 점차 다가오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조금 아프지? 나도 그랬어. 하지만 그렇다고 위에서 능력을 마구잡이로 쓰면 좀 곤란하거든. 나의 귀여운 후배가 다칠지도 몰라.”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용오름이 위로 올라왔지만, 심해에서 생겨난 그것들은 바다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팔뚝에 핏줄이 솟을 정도로 힘을 준 헤리엇이 렘의 몸을 더 깊은 심해로 밀었다. 렘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저 비명만 질러 댔다.

조금? 조금? 이게 조금 아프다고?

렘은 어마어마한 고통에 입에서 피거품을 내뱉고 눈을 까뒤집으며 전신이 경련했다. 이 고통은 사람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간의 육체로 인어의 힘을 감당하기 때문인지 혹은 억지로 인어와 육체를 융합한 죗값인지 인어의 능력을 사용한 만큼 거대하게 밀려오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헤리엇도 한순간이나마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니 일반적인 고통 수준을 가진 사람이라면 제정신으로 견디는 건 불가능했다.

“아아아악!”

피거품이 바닷물과 섞이며 바닷속에서 흩어졌다. 가죽이 뜯기고, 소금이 뿌려지고, 그 위에 독충들이 기어 다니고, 다시 가죽이 벗겨지고, 다시 근육이 뜯기고, 생으로 벗겨지고, 마지막에는 천천히 달궈진 불 위에 노출되는 듯한 고통이었다.

이제 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제, 제발… 커억… 제…….”

혀가 꼬이고 전신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렸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육체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비틀리기 시작했다.

헤리엇은 방금까지 기세등등하게 웃던 렘을 떠올리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렘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줄 만한 헤리엇에게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하지만 렘의 눈물은 바닷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르륵-.

다시 피거품을 내뱉은 렘이 어깨가 탈골될 정도로 몸부림치다가 애원했다.

“제발… 죽… 죽여 주세요. 제발… 허억… 이… 이걸…….”

버틸 재간 따위 없었다. 5년은커녕 10분도 버티지 못하겠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런데 헤리엇 알스터는 이걸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5년 정도만 버티면 ‘익숙해진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설마… 지금도 인어의 힘을 쓰면 헤리엇 알스터도…….

“…괴… 괴물.”

렘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해에서 흐릿한 하얀 인어를 보며 덜덜 떨었다.

“이… 괴물, 괴… 괴물…….”

어쩌자고 이런 괴물에게 덤빈 거지?

이건, 사람이 아니었다.

거대한 짐승 앞에 놓인 아주 작은 쥐새끼처럼 렘의 몸이 잔뜩 떨렸다.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렘에게 헤리엇은 자비를 베풀었다.

전신을 비틀며 몸부림치던 육체가 바르르 떨리더니 툭, 하고 힘이 빠졌다. 그의 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더 깊은 심해로 가라앉는 렘의 모습이 어둠 속에 갇혔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의 죽음을 알아주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팠지…….”

아련하게 그때를 회상하던 헤리엇이 빠르게 헤엄쳐 지금도 전투가 이어지는 수면 위로 올라갔다. 바다에 들어간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하늘을 횡단하여 슬슬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주홍빛으로 물든 바다는 지금의 상황에 맞지 않게 아름다웠다.

“선배!”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며 다급하게 부르는 사랑스러운 후배의 모습 또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엔저…….”

수면 위로 떠 오른 헤리엇의 뒤로 안쉘이 탄 군함이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폭발해 불타오르더니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터진 듯한 폭발은 쾅! 쾅! 하고 연달아 이어졌다.

*  *  *

비상 사이렌 소리가 함 내에 울려 퍼졌다. 심지어 날아온 미사일 폭발의 여파로 나머지 동력실마저 반파되고 통제실에 있는 화면도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가라앉을 일만 남은 함선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A-11 잠수함부터 대기하세요!”

콰광!

군함을 향한 폭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안쉘이 탄 군함에만 집중 포격을 하는 모양새가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알 것만 같아 저절로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탈출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군인들이 머뭇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인어가 있어도.”

지금까지 아무리 좋지 않은 상황에도 인어가 있는 바닷속으로 잠수함을 띄운다는 상상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이 겪어온 경험에서 맨몸으로 인어와 바다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성적으로는 이제 인어들은 자신의 적이 아니라고 인식하면서도 이제까지 습관화된 본능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하니 안쉘의 지시에도 우왕좌왕하며 주춤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이제, 바다는… 괜찮습니다…….”

이 모든 비극은 인간들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려 바다를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안쉘은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인어는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쿵. 쿵.

현재 이 군함에 설치된 잠수함은 총 30대. 그중에서 사람을 싣고 탈출 가능한 것은 고작 20대 안팎이었다. 나머지는 폭격에 부서졌거나 산소 탱크가 모자라서 나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 대당 약 오십 명 정도의 인원이 수용 가능하니 지금부터 서둘러 움직이면 전원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쉘이 탈출을 독려하는 사이 바깥에서 검은 안개가 하늘 위로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안쉘의 군함을 지키기 위해 대신 끼어들어 미사일 폭격을 받은 다른 군함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빠르게 탈출해서 운이 좋으면 살아남겠지만 그러기엔 가라앉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가라앉는 군함 곁에 수십의 인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어들은 폭격에 부서진 군함의 잔해를 치우며 안에서 인간들을 구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구조하는 그들 또한 간간이 터지는 폭발의 영향으로 모습이 엉망이 되어 갔다. 어떤 인어는 머리에서 피를 흘렸고 다른 한 인어는 한쪽 팔이 날아갔다. 그들이 흘리는 피가 바다 위에 덧없이 퍼져 나갔다.

군함에서 흐르는 검은 기름이 독처럼 퍼져 투명한 바다를 더럽히자 구조에 나서지 않는 다른 인어들이 정화에 나섰다. 그 가운데에는 유독 빛나는 아름다운 인어가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인어들은 그를 왕자라고 불렀다.

그의 누이인 라임이 말하길, 앤은 바다에 사는 누구보다도 강하지만 단 한 번도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당신이 바다의 왕이 되어서라도 전쟁을 끝내길 바란다면…….’

“제이든. 당신도 어서 잠수함으로 탈출하세요.”

부러진 갈비뼈가 꽤 아픈지 제이든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너는?”

“저는…….”

안쉘은 함내 지도를 떠올렸다. 지금 이 군함은 아래에서부터 바닷물이 빠르게 흘러 들어와 침수되는 중이었다.

“…하늘로 탈출하겠습니다.”

안쉘이 타기로 한 전투기가 있는 곳은 지하 2층. 지금부터 뛰어 내려간다고 해도 걸리는 시간은 약 7분, 지상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데만 대략 10분 정도였다.

점점 바닷속으로 수몰되는 군함이 점점 기울고 있기 때문에 갑판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긴박한 순간에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친 제이든이 근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군.”

“왜 따라오십니까?”

“우리의 소중한 대통령 각하를 경호 한 명 없이 혼자 보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코웃음을 치는 제이든의 낯빛이 자신만만한 말투와는 정반대로 상당히 창백했다. 잠수함으로 보내 탈출시키고 싶었지만, 그의 의지가 꽤 확고해 보이는 데다 실랑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쿵!

군함 내부가 다시 한번 더 흔들렸다. 창문을 통해 확인하니 헤리엇과 다른 인어가 수면 위에서 대치 중이었다. 쿵 소리를 내며 충격이 올 때마다 거대한 군함이 한 번 가라앉았다가 다시 수면 위로 뜨기를 반복했다.

“저 인어는…….”

“…또 다른 성공작인가 보군.”

바다가 갈라지고 두 인어의 주변으로 용오름이 튀어 올랐다. 거기에 점점 커지는 소용돌이가 닥치는 대로 군함들을 집어삼켰다.

그로 인해 미사일을 퍼붓던 두 척의 군함이 서로 부딪히며 연쇄적으로 폭발해 불타올랐다. 아마 이제 곧 안쉘이 탄 군함마저 휩쓸릴 것이 뻔했다.

“그런 실험을… 또…….”

단테 막심이 후원하는 군 연구소에서 본 실험의 실체를 떠올렸다. 그건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악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살아 있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실험체들은 끔찍한 실험을 앞두고 공포에 질리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신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유일무이하게 단 한 사람만이 아주 덤덤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었다. 아름다운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감정 표현이 서툴고 감각에 무딘 그 소년은 지옥에서 살아남았고 결국 지금 안쉘의 눈앞에 존재했다.

“저긴 헤리엇에게 맡기고 어서 가자고.”

그렇게 말하는 제이든은 당장에라도 헤리엇 쪽으로 가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헤리엇이 다른 인조 인어에게 붙잡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제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네.”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다.”

“…….”

그는 부러진 갈비뼈 부근을 손으로 압박하며 달렸다. 그 옆에서 달리던 안쉘은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는 자신의 막중한 임무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하 2층에 도착하니 그곳은 이미 무릎까지 바닷물이 차올라 있었다. 차단벽으로 인해 예상보다 침수 속도가 느린 듯했다. 하지만 한 번 더 충격을 받으면 부서질 수도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발목에서 무언가가 짜릿짜릿한 느낌이 드는 게 수장보다는 감전사를 당할 것 같았다.

“잘난 것도 없고 머리는 촌스럽지, 대체 그딴 안경은 어디서 사 오는지 모르겠지만.”

“…제이든.”

‘지금 칭찬하는 겁니까, 욕하는 겁니까.’

안쉘은 20년 동안 고수해 온 자신의 2대8 머리와 안경을 비난하는 제이든을 곱지 않은 눈으로 노려봤다.

“세상은 어쩌면 너 같은 놈을 지도자로 원하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말고.”

제이든이 갑자기 사납게 웃으며 안쉘을 뒤로 밀쳤다. 첨벙 하고 바닷물에 넘어진 안쉘은 지금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을 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사람은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면서 안쉘과 제이든을 번갈아 노려봤다. 제이든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으며 유들유들한 투로 말했다.

“옛날 생각나는군. 아카데미에서는 넌 한 번도 대인 전투에서 내게 이기지 못했잖아.”

제이든의 앞에는 온몸에 타박상을 입은 채 안토니오가 희게 바랜 눈동자를 번뜩이며 서 있었다.

“그때는 알시타 앞에서 꼴사납게 나뒹굴었는데… 지금은 어쩌려나, 토니.”

“닥쳐… 닥쳐, 넌… 여전히 잘못됐어. 낯짝 두껍고 뻔뻔하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녀석… 네가… 네가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선배는, 알시타 선배는…….”

안토니오의 희번덕이는 눈동자를 보고 안쉘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눈동자가 이전의 헤리엇과 같이 희게 바래져 있었다.

“눈동자가…….”

“이 나이 먹고 대인 전투라니…….”

제이든이 안쉘에게 고갯짓하며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에 안쉘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이 군함은 곧 가라앉아요! 저 혼자 탈출하면 제이든 당신은!”

안쉘은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에서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자신은 제이든을 버리고 가야 했다.

안토니오는 실력만으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었고 그를 한 번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안쉘은 그의 무력을 잘 알고 있었다. 10분도 채 안 남은 이 상황에서 안토니오를 짧은 시간 내에 제압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럴 때 헤리엇이라도 있어 줬다면 모를까 두 사람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심지어 이곳은 물에 잠겼다. 제이든의 능력은 발화, 크게 따지자면 불 계열 능력자였다. 이런 곳에서 그의 능력이 온전히 발휘될 수 있을 리 없고, 안토니오의 능력은 장소의 영향력을 덜 받는다. 여러모로 제이든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제이든!”

무시무시한 기세로 코앞까지 달려온 안토니오의 주먹이 제이든을 향했다. 간신히 고개를 숙여 피한 제이든의 머리 위로 무쇠 같은 주먹이 돌풍처럼 들이닥쳤다. 제대로 맞았다면 머리가 날아갈 정도의 풍압이었다.

쾅!

안토니오의 주먹에 군함이 단단한 벽이 움푹 팼고 그 안에서 바닷물이 쪼르륵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무식한 새끼가.”

군함을 부숴 버릴 것처럼 움직이는 안토니오를 보며 제이든이 혀를 쯧쯧 찼다. 세뇌로 머릿속이 흐리멍덩하게 변했어도 안토니오의 눈동자 안에는 분노, 질투, 열등감 등등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알시타의 곁에 있는 제이든을 부러워했다.

“…나는 확실히 알시타를 말리지 못했지. 아니, 오히려 도와주고 싶어서 뜻을 함께했다.”

사실 제이든은 몇 번이나 알시타를 말리고 싶었다.

‘네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는 게 좋겠어.’

뭔가 꺼림칙하다고, 단테 막심은 어딘가 이상하고 위험한 사람 같다는 말이 제이든의 입 안에서 맴돌았었다.

하지만 바닷가에 나와 있는 인어들을 멀리서 구경하고 그들의 노랫소리를 감상하며 평화를 말하는 알시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인어들은 경계를 벗어나지 못할까?”

그렇게 말하는 알시타를 쳐다보느라 그가 한 질문을 알아듣지 못했었다. 제이든의 대답을 기다렸던 건 아닌 듯 알시타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인어족을 처음 발견한 건 초대 대통령인데, 인어를 인간과 동등한 종족으로 인정해 주는 대가로 어떤 것을 받았다고 하나 봐.”

“야사 같은 거 아니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이 믿는 이상향을 위해 직진하는 곧게 뻗은 뒷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인어는 평화를 사랑하고 있어. 봐 봐, 제이든. 지상에서 나올 수 있는데도 바다에서 살잖아. 분명 인어들도 춥고 어두운 바닷속이 마냥 좋은 건 아닐 거야. 그들도 지상에서 인간과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허무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알시타의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문득 제이든이 왜 인어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니 알시타가 킥킥 웃으며 속삭였다.

“비밀인데, 아버지가.”

“단테가?”

알시타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이미 정치가인 단테 막심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이름을 내뱉었다. 제이든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당황했지만 알시타의 눈은 이미 가늘게 찢어졌다. 남의 아버지를 이름으로 막 부르는 무뢰한을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에 제이든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잘못했다고 외쳤다.

“과거에 인어들을 만났다고 하셨어. 아버지는 매우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런 아버지를 도와준 게 인어들이래.”

“흐음.”

‘그 양반 하는 꼴을 보면 인어를 귀하게 대접해 주는 게 아니라 전쟁이라도 터트릴 것 같던데…….’

하지만 제이든은 알시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고 늘 그래 왔듯이 그가 꿈꾸는 이상향을 응원해 줬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렸고 알시타가 꿈꾸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바다는 인어들을…….”

제이든은 그날을 사랑했다. 늘 바라 왔다. 알시타가 말하는 찬란한 날들을 함께 꿈꿨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나날이 박살 나자 죽고 싶었다. 알시타의 부고를 들은 날, 제이든은 그가 잠든 바다에 자신의 몸도 누이고 싶었다. 헛된 망상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알시타를 빼앗아 간 세상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제이든이 보기에 안토니오는 알시타가 뜻한 바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알시타의 등만 바라봤지만, 보답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렇게 단테에게 세뇌되어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반격으로 안토니오의 허벅지를 발로 찬 제이든이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아카데미 졸업 후, 안토니오는 군부에 들어가 장교로 복무했고, 제이든은 알시타를 따라 정치계에 몸을 담았다.

그러므로 솔직히 제이든이 운동을 꾸준히 했다고 해도, 지금은 군인인 안토니오가 대인 전투력으로 따지자면 훨씬 위였다.

“어서 가!”

아직도 어정쩡하게 서서 도망가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얼간이같이 구는 안쉘을 보며 제이든이 버럭 화를 냈다. 안쉘은 울컥했지만 애써 밝은 얼굴로 제이든에게 소리쳤다.

“5분. 기다리겠습니다. 제발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 제이든!”

그대로 뒤돌아 달려가는 안쉘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이든은 제게 달려드는 안토니오의 어깨를 발로 밟아 허공을 갈랐다가 바닥에 착지하며 신음을 흘렸다. 나이도 나이인데 성치 않은 상태로 움직이려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자신만 바라보며 공격하는 안토니오를 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아카데미 시절 안토니오는 전 학년 공동 대인 전투 수업에서 늘 제이든에게 덤볐었다. 제이든은 안토니오의 마음이 누구에게로 향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공연히 괘씸한 마음이 들어 늘 조금 과하게 밟아 주곤 했다. 

‘허황된 꿈에 갇힌 괴짜 같은 녀석.’

평화위원회를 만들 때까지도 알시타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그랬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은 알고 있었다. 평화와 공존을 꿈꾸고 싸움을 원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렇기에 알시타의 등을 쫓기 시작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의 허황된 꿈을 응원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의 괴짜 같은 방식에 감탄했다.

모두가 알시타의 평화를 사랑했다. 그리고 안토니오 역시 그런 알시타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알시타의 뜻을 잃어버렸다.

“지금 네 꼴을 봐! 눈 귀를 막는다고 알시타의 다짐이 들리지 않을 것 같아?!”

제이든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안토니오의 턱을 무릎으로 갈겼다. 안토니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손을 뻗어 눈앞에 있는 발목을 붙잡았다.

성난 짐승이 우는 듯,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토니오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 그의 희게 바랜 눈동자에 안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헉… 윽…….”

등을 돌려 달아나는 안쉘을 보면서 안토니오는 귀에 이명이 들리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북쪽 바다 인어들을 모조리 죽여라. 네게서 알시타를 빼앗아 간 제이든 올던도 함께.”

안토니오에게 단테가 세뇌한 명령은 총 세 가지였다. 단테가 고용한 용병들과 군인들을 이끌고 북쪽 바다로 쳐들어가 인어들을 학살하고 방해하는 평화위원장 제이든 올던을 죽인다. 그리고…….

“안쉘, 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라.”

침을 흘리며 중얼거리던 안토니오는 붙잡은 제이든의 발목을 힘 있게 쥐고 벽으로 던져 버렸다.

쾅!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힌 제이든이 토한 피가 바닷물에 섞였다. 무릎까지 왔었던 바닷물이 어느새 허리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제이든의 금색 눈동자에 도망가는 안쉘을 안토니오가 성난 목소리로 외치며 따라가는 것이 보였다.

제이든은 부러진 갈비뼈가 아예 어긋나 폐를 찌르는 감각에 숨이 막힌 듯 헉헉거리다가 또 피를 토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일어섰다.

“죽고 싶어.”

“네가 없는 삶은 허무하고 외로워.”

“왜 나를 두고 간 거야, 알시타…….”

“나는…….”

푹-.

무언가 깊게 파고드는 소리에 안쉘이 멈췄다. 그건 고기를 깊게 쑤시는 소리와 비슷해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군가의 넓은 등이 보였고 그 등을 무자비하게 관통한 손이 튀어나와 있었다. 등을 뚫고 나온 손은 피에 젖어서 무척 억세 보였다.

“제… 제이든.”

“가…….”

“당신… 제이든!”

제이든은 제 가슴을 관통한 안토니오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안토니오를 봤다. 희게 바랜 눈동자가 점점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제이든의 가슴에 향하는 순간 완전히 연갈색으로 돌아왔다. 안토니오는 눈앞의 현실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쉘은 울 것처럼 비명을 터트렸지만 제이든은 사실 지금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예전부터 죽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알시타가 없는 세상에서 단 1초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알시타의 아름다운 이상향을 폄하하고 결국엔 망가트려 버린 이곳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것이 싫었다.

죽어 버리자고 생각도 하고 준비도 했지만 제이든은 그럴 수 없었다. 억울하게 죽어 버린 알시타의 명예를 되찾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눈감을 순 없었다. 명예롭게 죽고 싶었다.

그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힘내서 버텨 봤다고 저승에서 알시타에게 변명할 수 있어야 했다.

“…가서, 대통령이 돼라… 지금까지 억울하게 죽은 많은 이들의 염원을…….”

제이든은 피를 토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토니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몸을 관통한 그의 팔을 마지막 힘을 짜내어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헤리엇에게…….”

“제이든.”

“널 버리고 간 게 아니라고… 알시타도 나도, 한 번도 널 버린 적이 없었다고 전해 줘.”

“제이든!”

안쉘은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피를 흘리며 마지막이 가까워진 제이든을 두고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수 없었으므로.

제이든은 멀어져 가는 안쉘의 발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안토니오. 알시타를 만나면 적어도 사과할 기회 정도는 주라고 말해 줄 테니까.”

어릴 적의 헤리엇이 떠올랐다. 감정도 없고 뭘 해도 인형같이 눈만 흘기던 어린 소년. 알시타의 곁에서 달콤한 코코아를 마시던 아이.

알시타가 헤리엇을 입양하자고 말한 날, 제이든은 백화점에서 어린 소년의 옷과 장난감을 잔뜩 사 왔었다.

“우리가 알려 주자.”

알려 주고 싶었다.

주고 싶었다.

계속 보고 싶었다.

“알시타에게 가서 함께 사과하자고.”

놓쳐 버렸던 아이의 성장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모습을 쭉 지켜 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 주고 싶었다.

성인이 된 헤리엇의 모습이 제이든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내 제이든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어마어마한 화기가 몰아닥쳤다. 그의 주변으로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증기가 함내를 장악했다.

가슴을 관통한 안토니오의 팔뚝부터 그의 몸이 단번에 타올라 잿더미로 변하는 동시에 화기를 이기지 못한 군함 시스템들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다.

“젠장! 빌어먹을! 이 씨발!”

안쉘이 비명처럼 소리 지르며 관리실 문을 열어 해치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관리실 내부를 위로 향하게 했다. 안쉘이 전투기에 탑승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화면에 노이즈와 함께 고려인의 얼굴이 비췄다.

- 왜 이렇게 늦었어!? 지금 당장 출진할 수 있게 조정해 줄 테니까… 중위님, 당신 괜찮아?

“흐윽… 흐윽, 윽. 흑…….”

안쉘은 솟아오르는 절망감에 고려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버에 손을 올려 당겼다. 고려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있는 무언가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안쉘은 그때까지도 고개도 못 들고 울었다. 이윽고 저 멀리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화기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폭발하는 소리에 고려인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고려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윽…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왜, 왜…….”

안쉘이 중얼거리며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고려인이 조정을 끝냈는지 전투기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투기를 매어 놓았던 쇠사슬들이 하나둘씩 풀어지고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판테니엄관 상공에서 날아오는 560대의 미사일 발사대 중에서 460대는 내가 해킹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100대만 피하자고요. 100대.

안쉘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어쩌면 당신과 만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

고려인이 통신을 끊은 것처럼 침묵했다. 이윽고 조정실 입구가 천천히 열리며 그 안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전투기가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쉘은 손잡이를 붙잡고 마하의 속도를 버티기 위해 산소마스크를 썼다. 이미 호흡곤란이 올 정도로 울어 버린 안쉘은 예정된 지옥에 입술을 깨물며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 각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통신이 끊기기 바로 직전 고려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힘을 받은 전투기가 하늘로 쏘아지듯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전투기가 빠져나온 군함에서 연이어 폭발음이 들려왔다.

쾅! 쾅!

점차 속도가 붙는 전투기 안에서 안쉘은 바다 위의 풍경을 힐끗 바라보았다. 자신이 타고 있던 군함은 폭발과 함께 완전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수면 위로 나온 헤리엇의 하얀 몸체가 보였다.

그리고 엔저 맥과이어가 하얀 인어를 구하기 위해 주변 군함들을 향해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끝으로 안쉘을 태운 전투기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하늘을 질주했다.

*  *  *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헤리엇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보육원에 있을 때 봤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폭약 연기로 꺼멓게 변한 하늘, 바다로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 능력자들과 전투기 기체, 서로 부딪혀 가라앉는 군함.

그 어떤 것도 헤리엇에게 감흥을 주진 않았지만, 딱 하나, 다른 게 있었다. 바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엔저였다. 헤리엇은 그를 본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헤리엇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엔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빠르게 다가온 엔저는 인어의 모습인 헤리엇을 그대로 낚아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괜찮으십니까?”

“음.”

헤리엇은 대답하는 대신 그저 수면 아래로 시선을 줄 뿐이었다. 자신을 렘이라고 소개했던 또 다른 실험체는 바다 깊은 곳에서 숨이 끊어졌다. 바다는 너무나도 광활해서 그가 흘린 피나 시신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실제로 인어는 바다에서 죽으면 절대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죽으면 바다에 삼켜져 그대로 사라진다. 아마 렘의 시신은 인간이 무슨 수를 써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

그 순간 어디론가 날아가는 전투기 한 대를 발견한 헤리엇이 신음을 짧게 내뱉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전투기가 남긴 궤적을 시선으로 좇으며 입을 열었다.

“무사히 끝나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이런 상황과는 맞지 않은 생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헤리엇은 엔저에게 신뢰를 받는 안쉘을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아마 자신이 안쉘에게 질투를 느끼는 모양인데 새로운 느낌이긴 해도 딱히 반가운 감정은 아니었다.

아군의 군함 갑판 위에 안착한 엔저가 헤리엇을 조심스럽게 내려 주며 부축했다. 어느새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헤리엇이 기꺼이 부축을 받으며 똑바로 섰다.

몇 번째인지 모를 폭격이 또다시 시작되고 군함들이 서로를 견제하듯 천천히 빙글빙글 돌았다. 엔저는 바다 위의 상황을 날카롭게 훑어보며 헤리엇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주고 갑판을 가로질렀다. 건네받은 재킷을 꿰입은 헤리엇이 절뚝이며 그 뒤를 쫓았다.

“이쪽 피해는?”

“아군 피해 14척, 상대는 24척이 가라앉았습니다.”

“사망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안쉘의 후임으로 뒤따라온 보좌관이 잠시 머뭇거렸다.

“이 이상 전투가 길어지면 불리합니다. 이미 2시간 전 수도에서 350척의 군함이 출격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분명 단테의 함대입니다.”

“…….”

“남은 40척의 군함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보좌관이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이대로 철수해 버리면 북쪽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곳 인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었다. 독을 풀든 바다에 핵을 터트리든 북쪽 바다 인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리고 인어들이 멸족된다면, 바다는 정화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지상의 인간들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 뻔했다.

“엔저.”

헤리엇이 엔저의 옆에 서서 그를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헤리엇의 부름에 엔저는 붉은색 눈동자가 반쯤 사라질 정도로 아름답게 눈을 휘어 웃었다. 그는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하늘 같은 선배를 내려다봤다.

“네, 선배.”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거니?”

엔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보좌관은 그제야 엔저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히 방금까지는 모든 걸 잡아먹을 듯이 표정을 잔뜩 굳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웃고 있었던 것일까.

헤리엇은 귀여운 후배를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보좌관이 350척의 군함이 수도에서 이곳으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웃기 시작했던 것 같다.

“네, 선배.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서요.”

“…음.”

“개표가 의외로 일찍 끝난 것 같네요. 어리석은 늙은이가 개표 시간을 단축해 버린 덕분에.”

헤리엇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을 갖다 댄 엔저가 안도의 한숨을 꽤 길게 내쉬었다. 상대 쪽에서 포격이 중단된 것을 보니 그들도 수도에서 함대가 출격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 같았다.

상대 군함에서 흘러나온 정보로는 총책임자인 안토니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빠른 판단이었다. 완전히 잔챙이들만 모아 놓은 건 아닌 것 같았다.

- …님, …맥과이어 대령님.

그때, 엔저의 무전기에 신호가 잡혔다. 헤리엇은 무전기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올리자마자 엔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언제나 헤리엇만 바라봤다. 그 안에는 음습한 욕망, 헤리엇을 당장에라도 삼키고 싶어 하는 열망, 누구보다도 순수한 존경, 신의, 신뢰, 사랑 등 세상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헤리엇은 늘 그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보고해.”

헤리엇을 바라보는 눈빛과 다르게 무전기에 대고 말하는 투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

그 목소리에 헤리엇은 허리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엔저의 목소리만 들어도 등허리가 오싹거리는 게 너무나도 낯설었다.

헤리엇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느새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어마어마한 수의 함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고작 40척밖에 남지 않은 엔저 부대를 집어삼켜도 모자라지 않을 압도적인 수였다.

“히익.”

보좌관이 뒤에서 작게 신음을 삼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격렬하게 벌어졌던 전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북쪽 바다에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았다.

헤리엇은 어마어마한 수의 함대를 보면서 엔저와 자신의 힘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살짝 고심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엔저를 따라 느긋하게 행동했다.

“…….”

엔저 부대의 군인들은 엔저의 공격 혹은 항복 명령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엔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함대가 가까워질수록 경직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 군함 350척, 총인원 십만 명.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저 낯선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듣다 보니 안쉘의 목소리였다.

- 능력자 이만 오천 명, 출격 대기 상태입니다.

이윽고 다가오는 함대의 가장 선두 군함 앞머리에는 커다란 매와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더 가까워진 눈앞의 군함 갑판 위에 붉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군함에 새겨진 징표를 보고 예상했던 레이첼 맥과이어였다. 그녀는 무언가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무언가를 거칠게 흔들었다.

“고얀 녀석.”

너덜너덜하게 흔들리는 것은 목이 뜯긴 댕기 머리 소녀의 인형이었다. 그 안에 있던 쪽지는 이미 레이첼이 갈기갈기 찢어서 태워 버린 지 오래였다.

하늘을 빼곡히 덮는 검은 연기와 유빙 사이사이로 가득한 군함들의 잔재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레이첼이 고개를 좀 더 높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 와중에도 헤리엇은 속으로 엔저가 그녀가 가진 여러 면모를 정말 많이 물려받았다는 감상이나 하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다. 지금부터 무기를 든 녀석은 테러범으로 간주하고 즉결 사살 처분하겠다.”

레이첼의 군함 350척은 마치 새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엔저 부대와 단테의 함대를 포위했다.

*  *  *

제대로 된 보호 장비와 훈련도 없이 산소마스크만 낀 채 마하의 속도를 버틴 안쉘의 눈동자에 기어코 실핏줄이 터졌다. 고막은 이미 터졌는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자신은 하늘 따위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 따위를 하면서 조종 레버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팔이 덜덜 떨릴 정도로 강한 압력에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구토감을 간신히 삼켰다.

산소호흡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호흡이 모자랐다. 몸 안의 장기가 뒤틀리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싶다며 아우성치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레버를 잘못 움직이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전투기가 엄한 곳으로 처박힐 것만 같았다.

- 항공기 Z-12, 응답해라. 허가 코드를 말하라.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전투기를 발견한 수도구역 항공관제소에서 무전이 들어왔다. 그 말은 즉 전투기가 곧 판테니엄관에 도착한다는 소리였다. 안쉘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재차 경고가 들어왔다.

- 허가받지 않은 기체는 구역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항공기 Z-12, 멈추지 않으면 발포한다.

세상의 시작인 0구역은 세계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의 중심이자 수도의 기능을 하는 행정구역이었다. 그중에서도 0구역의 판테니엄관은 어느 곳보다도 많은 양의 정보와 의사결정들로 가득했다.

그렇기 때문에 거주자 및 방문자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대통령 및 각 구역의 의원장 혹은 특별위원회의 위원장들은 별도의 허가 없이 드나들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출입이 기록되고 출입 허가가 떨어져야 가능했다.

그것은 정‧재계의 유력 인사여도 예외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판테니엄관의 상공은 어떤 항공기도 침범할 수 없으며 수도 항공관제소는 단 두 번의 경고 이후에 별도의 허가 없이 바로 미사일을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 다시 한번 경고한다. 항공기 Z-12, 지금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항공관제소의 마지막 경고에 입술 끝이 바짝바짝 말라왔지만, 안쉘은 산소마스크 때문에 혀로 입술을 핥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리고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대로 추락해서 자신이 죽어 버리면?

그러면 제이든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엔저 맥과이어와 헤리엇 알스터는?

그리고… 앤은, 인어들은, 바다는,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으… 으윽!”

곧이어 경고 사격으로 세 발의 미사일이 날아왔다. 그것들을 손쉽게 피한 안쉘은 전투기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동시에 내장을 압박하던 느낌이 조금씩 줄어들자 그나마 고르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경고 사격을 날려도 멈추지 않는 전투기에 항공관제소는 무전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어마어마한 수의 미사일이 이쪽을 공격하기 위해 날아올 것이다.

전투기가 향하는 방향, 속도를 정밀하게 계산해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공격을 마구잡이로 말이다. 안쉘은 온 힘을 다해서 그 공격을 피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끄으윽!”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을 닦지도 못한 채 안쉘은 조종기를 붙잡고 최대한 몸 쪽으로 당겼다. 그에 따라 전투기 앞쪽이 들어 올려지며 위쪽을 향했다.

곧이어 날아가는 전투기를 목표로 미사일이 비처럼 쏘아 올려졌다. 기체의 궤적을 따라 폭발음이 연달아 들렸다. 조종석 내부가 지근거리의 폭발 열기에 후끈 달아올랐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던 왼쪽 귀에서도 피가 흘러나오면서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실핏줄이 터진 안쉘의 눈앞이 흐려졌다가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수많은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믿음직스럽지도 않은 녀석을 데리고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나?”

왜 나여야만 했냐고, 자신이 없다고. 단테 앞에서 얼어붙은 탓에 한마디도 못 하고 머저리처럼 빌빌거렸던 안쉘이 엔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엔저는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었다.

“엔저의 신뢰를 받고 있네.”

질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은 헤리엇이 말했었다. 왜 대령이 자신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안쉘의 투정에 헤리엇은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중위님을 믿고 있어요.”

안젤라는 리언의 배신과 세상의 풍랑에 휘청거리면서도 단단하게 서서 믿음을 주었다. 이 전쟁의 끝을 누구도 아닌 평범하고 머저리 같은 안쉘 리가 끝낼 수 있다고.

“어쩌면 세상은 너 같은 녀석을 지도자로 원할지도 모르지.”

온 힘을 다해 안쉘을 탈출시킨 제이든이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제이든을 구하러 되돌아갈 수 있었지만 전투기에 탑승하는 걸 선택했다.

그곳에서 안쉘이 함께 싸웠다면, 어쩌면 제이든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에 가라앉아 버린 전투기를 허망하게 바라만 봤겠지.

“으… 으윽…….”

자신이 타고 있는 군함을 지키려다 많은 이들이 희생했다.

“안쉘.”

콰과과광!

“아아악!”

“당신은 멋진 사람이에요.”

주변에서 연달아 터지는 미사일에 귀가 아파 왔다. 조종석의 온도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뜨거워졌고 미사일을 피해 높아지는 고도에 위장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뒷날개와 엔진이 파괴되어 기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투기가 크게 위아래로 휘청거리기를 반복했다.

“당신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원석이에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아아아악!”

이제 고도를 낮춰 아래로 하강하려던 안쉘은 조종간이 먹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몇 번이나 레버를 당기며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추락해 버리면 뼈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나의 툴툴이 씨.”

안쉘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산소호흡기를 떼고 손을 뻗었다. 그를 감싼 거대한 결계가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 열 겹 이상으로 펼쳐졌다.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 이능력 결계를 만드는 데 사용한 안쉘은 다시 레버를 잡고 어깨가 탈골되도록 힘주어 당겼다.

“당신은 분명, 멋진 보석이 될 거예요.”

- whoop! whoop!

- pull up! pull up! pull up!

조종석 내부에서 붉은색 비상등이 켜지고 고도를 높이라는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전투기 유리 창문과 안쉘의 결계가 부딪치며 사방으로 유리 조각들이 우수수 나뒹굴었다.

안쉘은 마지막으로 쏘아 올려지는 미사일이 전투기의 단면과 만나기 직전 탈출 버튼을 눌러 밖으로 튀어 나갔다. 단 1초만 늦었어도 폭발에 휘말렸을 만큼 긴박한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전투기에서 빠져나온 안쉘은 재빠르게 낙하산을 펼쳤다. 하지만 추락하는 속도에 비해 낙하산이 늦게 펼쳐진 탓인지 어딘가에 착지하면서 중심을 잃고 데굴데굴 엉망으로 굴렀다.

“으으윽! 쿨럭, 쿨럭!”

어금니 한 개를 입 안에서 내뱉은 그가 엉망이 된 몰골로 헉헉거렸다. 펄럭이는 낙하산이 피로 흥건한 안쉘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었다.

“헉… 헉… 헉헉…….”

추락한 곳이 어디인지, 판테니엄관에 제대로 도착하긴 한 건지, 이제 어떻게 될지, 잡혀 들어갈지 이대로 즉결사살 당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개표는 끝이 났을까.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가 누구일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안쉘은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잠깐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낙하산에 덮여 눈만 깜박이던 안쉘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내던 그는 낙하산이 걷어지는 감각에 겨우 고개만 들어 제 앞에 서 있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굉장한 미남이었다. 눈가에 있는 주름이 아니었다면 엔저 맥과이어가 눈동자 색을 바꾸고 나타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는 군복에 해군 전투단장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아…….”

안쉘은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TV 화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엔저 맥과이어의 부친인 한슨 맥과이어였다.

얼음이 서릴 만큼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한슨 맥과이어는 빙(氷)계 능력자로 레이첼과 비슷한 의미로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엔저는 내숭 덩어리에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며 안쉘 앞에서 제 아버지를 신랄하게 비웃곤 했다.

한슨은 자신의 보좌관들을 대동하고 빠르게 낙하산에서 안쉘을 끌어냈다. 그는 엉망이 된 안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방금 이곳 상공을 침입한 테러범이 당신이었습니까?”

“예…….”

“판테니엄관 상공은 허가받은 항공기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예…….”

“즉결사살이 허용되며 어떤 사유가 있어도 군 재판에 넘어가는 것도 아십니까?”

한슨의 말이 이어질수록 안쉘은 점점 불안해졌다. 설마 단테 막심이 당선된 것일까. 그동안 그렇게 노력하고, 많은 희생을 치르며 해 온 것들이 다 물거품이 되었나. 앤을 구하지 못하게 되나, 인어들이 죽어 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을까.

부정적인 예감에 안쉘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맑은 눈물방울이 피와 섞여 마치 피눈물을 쏟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안쉘이 실낱같은 희망으로 주변을 훑어보는데 한슨의 뒤로 많은 수의 의원과 군인이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은 모두 경례하는 중이었다. 의아했다.

“하지만 대통령 각하를 체포할 수는 없지요.”

한슨이 마지막으로 팔을 올려 경례했다. 이윽고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지듯 겨우 앉아 있는 피투성이인 안쉘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43% 대 42%.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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