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반격의 시작
헤리엇이 이상하다.
안쉘은 자신의 뺨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원래도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한 헤리엇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엔저를 엄청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에서 무언가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평소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평소 헤리엇의 눈빛은 무언가 알맹이가 없어 그의 감정을 파악하기 힘들었었다. 물론 헤리엇의 눈빛이 항상 무감정하게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엔 확실히 뭔가가 달랐다. 마치 맹목적으로 사랑을 좇는 사람의 눈빛이 저랬던 것 같았다.
안쉘이 5년 동안 봐 온 누군가의 눈빛과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헤리엇과 매우 어울리지 않는단 것도 잘 알았다.
“잘생겼어…….”
그리고 안쉘은 헤리엇이 엔저가 쓰던 수건에 얼굴을 묻는 것을 목격하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수건을 조용히 방으로 들고 들어가는 엔저가 눈에 들어왔다.
저 커플은 왜 쌍으로 미친 짓을 하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 그것을 자신이 보고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 않니, 안쉘? 저렇게 사랑스럽고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있어?”
“…….”
헤리엇의 초록빛 눈동자는 무언가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는 감정에 복받치는 사람처럼 전신을 들썩거렸다. 아무리 봐도 엔저 맥과이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 그 자체였다.
도대체 선배의 얼굴이 닿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건을 조심스럽게 챙기는 스토커 변태 후배가 헤리엇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기에 저럴 수 있는가 싶었다.
안쉘은 염병 첨병 떠는 두 사람이 이젠 부러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들고 있던 무전기에서 녹색 불빛이 반짝였다. 상황실로 돌아와 복잡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내려다보던 안쉘이 다이얼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무사히 도착하셨습니까?”
무전기 너머로 끼룩끼룩 울고 있는 갈매기와 바닷소리가 들렸다.
- 네.
듣기만 해도 평화로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전해졌다. 바다에 어울리는 청량함을 가득 담은 울림에 안쉘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다행입니다.”
굳이 다른 할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앤이 무사히 북쪽 바다에 도착한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런데도 묘하게 무전기를 끊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 왜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긴장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와 헤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듣는 듯한 목소리에 안쉘은 울렁거리는 심장을 진정하려 애썼다. 그리고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앤의 말에 집중했다.
인어라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앤은 범상치 않은 존재였고, 안쉘이 어려워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안쉘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개구리를 품에 안고 다닐 만큼 좋아했고 성격은 긍정적이다 못해 이런 상황에서도 낙관적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미친 인어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그의 강한 개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전쟁이 끝나면 개구리 백 마리를 모아 악단을 만들겠다고 말했을 땐 받아 주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 모두가 인간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요.
안쉘은 자신이 지금 느끼는 울렁거림은 피해자에게 미안한 가해자의 감정 같은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순수하게 말하는 앤의 목소리에 증상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앤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늘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바다에서 푸른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그는 지상의 누구보다도 바다에 어울리는 존재일 것이다.
그는 척박하기 짝이 없는 호숫가에서도 누구보다 빛났다. 그래서 바다에 있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에 안쉘은 묘하게 아쉬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단테는 전쟁을 원할 겁니다.”
안쉘은 단테가 절대로 쉽게 물러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욕심 많은 그가 20년 동안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해 온 일이었다.
그런 단테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긴장이 되기 시작하며 무전기를 쥔 손에 땀이 차올랐다. 그런 안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앤의 대답은 매우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듣는 이가 편해질 만큼.
- 저는 당신이 막아 줄 것이라고 믿어요.
“…….”
- 안쉘, 저는 믿어요.
“…저는.”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믿는 것일까?
자신은 그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하지 않다. 비겁하고 겁쟁이에다 머저리같이 구는 멍청이일 뿐이었다.
- 안쉘은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에요.
앤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깊이 박혔다.
- 도망칠 수 있을 텐데도 당신은 피하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당신이 굉장히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인 걸 알았어요.
얼마 전에 앤이 지나가듯 동족을 죽인 인간들을 전부 잡아 죽여 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뼛속 깊숙이 새겨진 인간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아 매일같이 울부짖으며 저주했었다고 했다.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듯했던 인어가 피를 토할 정도로 인간이 미웠다고 말했다. 평화를 지켜야 하지만 그것을 간절히 깨뜨리고 싶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앤은 결국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을 상처 입히는 가시밭길이라도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 것이다.
안쉘 또한 도망치고, 피하고 싶었다. 지금도 엔저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당장이라도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리석은 복수를 위해 무고한 인어들을 자신의 손으로 학살했다는 죄책감이 안쉘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앤. 저는…….”
눈이 부실 것처럼 아름다운 달이 뜬 그날 밤이 떠올랐다. 어두운 숲속 호수에서 머물렀던 반짝거리는 인어에겐 광활한 바다가 어울렸다. 그들에게 완전한 바다를 돌려주어야 했다.
“제가… 반드시 전쟁을 막겠습니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바다를 돌려드리겠습니다.”
목이 메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바다는 인어가 존재하기에 찬란하다. 게다가 앤은 신이 가장 강한 능력을 부여해 준 인어들의 왕자였다. 인어들의 신이라고 불릴 만큼. 그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그가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돌려주어야 했다.
안쉘의 말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앤이 대답했다.
- 네. 나의 툴툴이 씨.
“…심술궂은 범고래라고 하셨잖아요.”
- 맞아요. 자신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는 아주 사랑스러운 범고래랍니다.
안쉘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무전기에 불이 꺼지고 앤의 목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인어들이, 앤이 평화를 선택했다.
그들은 피해자이고 인간들은 가해자였다. 그러므로 앤은 피해자들의 대표였고 안쉘은 가해자 쪽에 서서 평생 그들에게 속죄해야 한다. 인간은 인어를 학살하고 바다에서 내몰아 버리자고 말하는 단테 막심이 무서워 아무도 반대의견을 소리 높여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일이 꼭 성공해야 했다.
“반드시.”
그리고 안쉘은 감정을 모르는 인형 같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헤리엇 알스터, 단테가 주도한 연구의 실험체이자 군 연구소에서 만들어 낸 끔찍한 결과물. 본인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잘 알면서도 화내는 법을 몰라 온순하게 잡혀 있었던, 화낼 의지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사랑을 깨닫고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가 보지 못했던 이십 대의 엔저를 아는 보좌관일 뿐인 자신에게 질투하기도 했다.
그 헤리엇 알스터, 단 한 사람을 위해 엔저 맥과이어는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을 걸었다.
안쉘은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나오는 위대한 사랑에 종종 감명을 받았지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누구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이가 생긴다면 그 아름다운 인어가 좋겠다고 때때로 생각했다.
그쪽은 바다의 왕이 될 테고 이쪽은 지상을 대표할 준비를 해야겠지.
안쉘은 무전기에 이마를 대고 괜찮다고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무전기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인어가 그 말을 들을 수 없겠지만 다짐하듯 말했다.
“그, 아름다운 바다는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이제,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 제이든 올던 평화위원장이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군요. 의원 투표가 종료되면 다음은 국민투표가 시작됩니다. 15시간 동안 진행되는 대대적인 선거인만큼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단테 대통령의 독재 기간 동안 그의 비인륜적 행위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선거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안쉘 리 후보를 향한 지지를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한 제이든 올던의 행보 또한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테 막심의 뚜렷한 입장 표명이 없는 가운데 새로운 대통령이 나타날 것이냐, 아니면 독재정권이 계속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이든의 얼굴이 TV 화면 가득 잡혔다. 오십 대 중반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멋진 미소를 지으며 수하들과 함께 차를 타는 뒷모습까지 중계되었다.
* * *
기호 2번 안쉘 리.
어색한 2대8 머리에 촌스러운 안경을 쓰고 찍은 선거공보 사진에 제이든은 이 자식이 과연 제정신인지 생각해 보았다. 저 흉악한 뿔테안경을 쓴 녀석에게 인어와 인간의 미래가 달려 있다니… 새삼 기가 막혔다.
세상 꼴이 정말 우스워졌다고 생각할 때쯤 제이든은 작은 꽃집 앞에 차를 세웠다.
“잠깐. 꽃다발을 하나 사야겠어.”
제이든의 수하가 부드럽게 갓길에 차를 세우고 의아한 듯 물었다.
“꽃다발이요?”
“그래.”
차에서 내려 꽃집으로 향하는 중에 알시타에게 청혼하면서 샀던 꽃이 눈에 띄었다. 알시타는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하고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제이든도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알시타를 알고 지낸 이들 중에 그에게 빠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 그와 닮은 헤리엇을 떠올리며 제이든은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꽃집 주인은 배불뚝이 중년이었다. 그는 두툼한 뱃살을 두드리면서 아침으로 도넛을 먹고 있었다. 시청 중인 TV 화면에는 때마침 제이든의 얼굴이 확대되어 나오고 있었다. 주인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수염을 정리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난 당신을 알아요.”
제이든은 팬서비스라도 하는 것처럼 멋들어지게 미소 지었다.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시원하게 웃으니 TV 화면 속 얼굴과 똑같은 호감형의 사내로 변했다.
“하얀색 안개꽃은 없습니까?”
“안개꽃이요?”
“네. 그것으로 꽃다발을 주문할 생각입니다.”
꽃집 주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제이든을 쳐다봤다. 보통 꽃다발을 만들 때 안개꽃은 다른 화려한 색의 꽃이 돋보이도록 주변에 장식하는 용도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받는 사람이 이 꽃과 무척 어울리거든요.”
“음… 한 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새하얗다 못해 바래 없어질 것 같은 헤리엇을 떠올리던 제이든은 오늘 새벽, 기지에서 나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내 양아들이 되어 주겠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격전을 앞두고 제이든은 엔저의 품에 안겨 있는 헤리엇에게 충동적으로 말했다.
헤리엇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엔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나른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엔저의 품에 안긴 지금의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운 사람 그 자체였다.
엔저는 온순한 양처럼 변해 선배의 허리를 감싸 안아 헤리엇이 보다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지탱하는 중이었다.
“…….”
제이든의 말에 헤리엇과 엔저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서로 다른 유형인 짐승들의 이목을 받으니 등 뒤로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헤리엇의 초록빛 눈동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엔저의 날카로운 붉은색 눈빛에는 제이든도 저절로 오금이 쪼그라들었다.
제이든은 변태 스토커 주제에 길들여진 개처럼 행동하는 그가 아주 고까웠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러니까… 내 재산하고… 집을…….”
별생각 없이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바람에 아차 싶었지만 되돌릴 순 없었다. 그는 이렇게 갑자기 헤리엇에게 양자로 들어오지 않겠냐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양자로 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긴 했지만 헤리엇의 모습을 볼 때마다 몰려오는 죄책감에 권유하지도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제이든은 안쉘이 매끈거리는 뺨을 문지르며 미묘한 시선을 보내도 최대한 모른 척했다.
“뭐… 좋아요.”
헤리엇은 오늘 아침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고민하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어린 자신을 외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제이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아니, 어쩌면 받아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이제 그의 의사결정에는 엔저 맥과이어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음… 좋을 것 같네.”
재산에 욕심은 없었지만 집은 가지고 싶어졌다. 사실 지금까지 헤리엇은 자신 소유의 집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군에서 제공한 시골 마을의 좁고 열악한 작은 집 하나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꽃처럼 예쁘고 연약한 후배를 지켜 줄 든든한 공간이 필요했다. 엔저를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좋은 집을 구해야 했다.
엔저와 함께 살아갈 계획을 마친 헤리엇이 드물게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항상 그렇듯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작게 미소 짓는 얼굴일 뿐이지만, 그의 눈가와 뺨이 미세하게 상기해 있었다. 그리고 제이든에게 처음으로 눈을 휘어 웃어 주었다.
제이든은 그의 모습에 까마득한 그리움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 표정도 없이 알시타의 등을 시선으로 쫓던 어린 소년과 웃고 있는 지금의 헤리엇이 겹쳐 보였다.
알시타가 저 모습을 보게 된다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안타깝고 그리운 여러 감정이 한데 뭉쳐 눈시울을 붉힌 제이든이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제이든은 헤리엇의 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산 상속을 끝낼 생각이었다. 서류야 뚝딱 만들면 그만이고 공증인을 두고 변호사에게 지장이 찍힌 그것을 보내 주면 끝난다.
빌어먹게도 자신은 유산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고 구역마다 거대한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딴 재산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요즘은 이것이라도 헤리엇에게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제이든에게 시선을 빼앗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엔저가 헤리엇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막판에 보기 싫은 광경을 떠올린 제이든을 현실로 끌어올린 꽃집 주인은 우악스러운 얼굴과 다르게 야무진 솜씨로 꽃다발을 포장하고 있었다. 온통 안개꽃투성이인 꽃다발이 한 아름 완성되어 갔다. 제이든은 마지막으로 꽃다발을 장식할 리본은 초록색으로 골랐다.
문득 알시타에게 용기 내 청혼했을 때가 떠올랐다. 얼뜨기처럼 온갖 색이 다 들어가 있는 휘황찬란한 촌스러운 꽃다발을 주면서 함께 살아 달라고 빌었었다.
알시타는 정확한 대답 대신 헤리엇을 양자로 삼고 둘이서 키워 보자고 말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또한 두 사람이 사랑을 듬뿍 준다면 분명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흰색 꽃다발을 들고 씁쓸하게 웃던 제이든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이는 안토니오였다.
안토니오는 알시타와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를 다녔던 후배였고 제이든과 마찬가지로 알시타를 마음에 두었었다. 사실 제이든은 안토니오를 동정했다. 그는 알시타를 사랑했지만 알시타는 그에게 감정 한 톨 나눠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안토니오는 알시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제이든을 매우 싫어했고, 알시타의 시선이 제이든에게 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알시타를 사랑했던 두 사내는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았다. 안토니오가 제이든을 이해하지 못하듯 제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공통점은 미련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큰 차이가 있었다. 알시타의 아내와 아들이 죽었을 때 안토니오는 무척 기뻐했지만 제이든은 알시타의 곁에서 함께 슬퍼하고 그를 위로했다.
“…너는 왜 인어를 믿었던 거지?”
제이든은 결국 어리석은 안토니오가 단테의 곁에서 떠나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어깨를 으쓱인 그는 한때 연적이었던 비참한 사내를 응시했다. 자신의 마음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안토니오를 알아줄 알시타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나는 인어가 평화를 사랑한다는 알시타의 말을 믿은 거고 너는 믿지 못했던 거지.”
안토니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목이 졸린 듯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는 안토니오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를 지나쳐 갔다. 알시타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외쳤던 자신만만한 등이 오늘따라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오늘따라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푸르고 아름다웠다. 알시타가 무참히 떠나간 그날도 하늘은 새파랗기 짝이 없었다.
“추격자는?”
제이든이 차에 올라타 운전석에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안쉘과 비슷한 방어 결계 능력자인 부하가 고개를 저었다. 새삼 안쉘 그놈이 제법 유능한 편이라는 걸 깨달은 그는 새하얀 안개 꽃다발을 들고 피식피식 웃었다.
“바로 안쉘 후보자와 합류하실 생각입니까?”
“늦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군의 메인 시스템을 해킹한 고려인은 약 200척의 군함이 오늘 오전에 북쪽 바다로 출항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쪽에서 아무리 끌어모아도 고작 육만 명 안팎의 병력과 50척의 군함이 끝이었다.
부하가 라디오를 켰다. 선거 당일이라 그런지 모든 채널이 선거 이야기로 바빴다. 뉴스에서는 과연 단테 막심이 대통령직을 이어 나갈지 혜성같이 나타난 신예 후보자에게 교체당할지 예측하며 신나게 떠들었다. 마지막으로 29구역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불이 났다는 소식이 짧게 지나갔다.
제이든은 손등으로 턱을 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본격적인 시작의 신호였다.
.
.
“내가 알시타를 믿었기 때문이지.”
거짓이다. 틀리지 않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옆에서 새로운 보좌관으로 온 렘이 그런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는 단테가 새 보좌관으로 보내 준 인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틀린 건 저놈이지. 그래… 나는 틀리지 않았어. 모든 악은 인어들이다. 놈들에게 선배가 현혹당한 것뿐이다.”
함내에 설치된 작은 커맨더 화면에 제이든 올던의 뻔뻔한 낯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위에서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구역질 나는 면상이다. 알시타의 과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감히 그 이상을 바랐던 어리석은 놈.
하지만 왜인지 알시타는 그런 파렴치한 놈에게 곁을 내주었었다.
“어리석은 건… 네놈이다, 제이든.”
아카데미 시절 알시타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단테 막심의 아들이지만 부자간에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괴짜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이에서 그의 진가를 자신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가 누구보다도 고귀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이 먼저 알아챈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토니오가 생각한 대로 알시타는 점점 주변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누구보다 우뚝 섰다. 아버지의 후광이 아니라 스스로 성취한 것이었다. 그렇게 빛나던 그를 인어들 따위가 죽여 버렸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고민하던 영웅을 바다가 집어삼켰다.
자신이 하는 이 모든 것은 알시타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었고 그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과오를 대신 짊어진 행위였다. 그러니까 알시타 막심은 하늘에서라도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다.
알시타가 죽은 이후로 안토니오를 이해하고 지지해 준 사람은 그와 피가 이어진 단테 막심뿐이었다. 안토니오는 알시타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핏줄이 잔뜩 선 눈동자로 헛소리를 내뱉는 안토니오를 지켜보던 렘은 혀를 차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안토니오의 눈동자가 세뇌로 색을 잃어 갔지만, 주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지상은 전부 막혔을 거야. 단테가 중위님이 수도에 도착하는 걸 가만둘 것 같아? 군인들을 이끌고 강제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긴 한데 추천하진 않아. 그렇게 되는 순간 쿠데타가 되어 버리니까.”
고려인이 말한 대로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라 봤자 그 끝은 파국이었다. 내전이 일어나 지상은 황폐화될 것이다.
“…북쪽 바다의 전투를 끝내려면 개표가 끝날 즈음 저는 판테니엄관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뭐… 쉽게 갈 수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하겠지?”
판테니엄관에서 특급 수배자인 엔저의 수도구역 입장을 허가해 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안쉘 혼자 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인데 안쉘은 차마 그 방법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헤리엇이 옆에서 산뜻한 목소리로 고려인의 물음을 이어 갔다.
“바다에서 전투기를 타고 판테니엄관까지 가면 되겠네.”
“…판테니엄관은 허가받지 않은 비행 물체가 침범하는 순간 미사일 560발이 발사됩니다.”
“그건… 알아서 피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농담하는 건 아니겠지.’
어이가 없어진 안쉘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엔저가 옆에서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완벽한 작전입니다.”
‘알아서 피해 봐라.’의 어느 부분이 훌륭하고 완벽한지 모르겠지만 이미 엔저는 세상에서 가장 군더더기 없는 작전을 들은 병사처럼 감탄을 터트리며 염병을 떨었다.
단테가 칼을 갈고 나온 이상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단테의 곁에서 열심히 단물을 뽑아 먹던 지금의 정치인들이 모두 안쉘을 죽일 방법만 찾는 중일 테니까.
“그러기 위해 지상에 남아서 단테의 행적을 보고받아 전해 줄 사람이 한 명 필요한데…….”
고려인이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해 줄 수 있겠어? 안젤라.”
방 밖으로 겨우 나오게 된 안젤라가 수척한 얼굴로 믿음직한 미소를 지었다. 덧니가 사랑스러운 그녀는 주근깨 가득한 콧잔등을 찡그리며 활짝 웃어 보였다.
“물론이지. 나도 군인인걸.”
그녀는 전쟁이 싫어서 일부러 시골 마을로 좌천되어 온 군인이지만 전쟁의 끝자락에 서서 홀로 슬픔에 잠겨 있고 싶진 않았다.
“나만 믿어요, 대장.”
헤리엇은 시골에 있을 때부터 그녀를 귀여워했지만, 오늘은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마치 조카나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작게 웃으며 안젤라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조심하렴, 안젤라.”
“네!”
- 기지 폭파 완료.
“다친 사람은?”
-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대기하십시오.”
안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갑판 위로 올라갔다. 무전기의 전원을 끄고 주변을 돌아보니 출항 준비를 끝낸 50척의 군함이 눈에 들어왔다.
엔저 부대는 단 50척의 군함으로 북쪽 바다를 제외한 모든 바다를 제패하고 항복을 얻어 낸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인어를 지키기 위해 출전 준비를 끝마쳤다. 이래저래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인 소위가 지정해 준 좌표에 의하면 오전에 출항한 단테의 군함은 이곳에서 북서쪽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집결한 후 갑판을 열어 놓겠습니다. 그때 전투기에 탑승하셔서 출발하시면 됩니다.”
노엘이 안쉘의 곁으로 다가와 아까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수정된 계획을 정리해 주었다.
“…네.”
안쉘은 제 목숨이 어디까지나 ‘운’에 달렸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막상 실행하려니 긴장됐는지 그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노엘이 안쉘의 안색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위님. 혹시 전투기 조종 방법은…….”
“압니다.”
“…….”
현재 안쉘이 걱정하는 점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안쉘이 타고 있는 항공모함이 엔저와 헤리엇이 타고 있는 최전방의 전함과는 다르게 크고 눈에 띄어 방어에 약하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하늘 위로 쏘아 올려질 미사일들을 어떻게 뚫고 판테니엄관으로 들어가느냐였다.
노엘이 묘한 시선으로 안쉘을 쳐다보더니 헛기침을 내뱉었다.
“가끔 생각하는 겁니다만.”
“네?”
“중위님은 못 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 같습니다. 분명히 어영부영 대통령 자리에 오르셔도 그대로 잘해 내실 겁니다.”
“…….”
“무운을 빌겠습니다, 중위님.”
경례를 마친 노엘이 안쉘을 한 번 돌아보더니 제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다른 함선으로 옮겨 갔다.
때마침 제이든과 그의 수하들이 도착해 함선에 올랐다. 제이든은 한눈에 봐도 부담스러운 꽃다발을 품 안 가득 껴안고 헤리엇을 찾았다. 누군가를 닮은 새하얀 꽃잎으로 가득한 꽃다발을 질린 눈으로 보던 안쉘이 제이든에게 다가갔다.
“누구를 찾으시는지 알 것 같은데 이미 늦었습니다. 헤리엇 님은 엔저 대령님과 함께 저쪽에 계시니까요.”
50척의 군함 중에서도 날렵해 보이지만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한 척을 가리켰다. 엔저 부대의 상징인 검은 독수리 마크가 뱃머리에 새겨져 있었다. 제이든이 그곳으로 넘어갈 기세로 갑판을 가로지르자 안쉘은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기다리세요, 제이든! 당신은 저와 함께 가야 합니다.”
꽃다발을 들고 한참을 시무룩해 하는 제이든을 끌고 안으로 들어온 안쉘은 사령관실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얀 제복을 오랜만에 찾아 입은 헤리엇이 두 사람을 반겼다.
제이든이 시무룩했던 얼굴을 환하게 펴고 한달음에 달려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오십 세가 넘은 중년의 사내가 짓기에는 너무나도 낭만적인 표정에 안쉘은 하마터면 웩, 하고 혀를 내밀고 토할 뻔했다.
“헤리엇 님께서는 엔저 대령님과 함께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음, 하지만 조금 걱정돼서.”
저 헤리엇이 자신을 걱정해 주었다는 사실에 안쉘은 소소하지만 감동 받았다. 헤리엇은 새하얀 속눈썹을 깜박이며 건네받은 꽃다발을 만지작거렸다.
평생 처음으로 받는 꽃다발일 테고 엔저 대령이 알면 세상이 멸망해 버릴지도 모르니 나중에 저 꽃을 조용히 꽃병에 담아 주자.
안쉘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짜고 있을 때 고려인의 목소리가 함대 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 메인 시스템 해킹 완료. 군함 작동 준비 완료, 출항 준비 시스템 해킹 완료.
아무래도 보안상의 문제도 있다 보니 군부의 메인 시스템을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었는데 어느새 고려인이 모든 시스템 해킹을 완료해 버렸다.
- 출항 준비 마치셨습니까?
“이쪽은 P-X 메어리전트. 출항 준비 완료.”
무전기에 대고 안쉘이 입을 열었다.
- 버퍼.
다른 쪽의 군함들 역시 차례로 출항 준비 완료 신호를 보냈다.
함선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안쉘은 갑판으로 다시 올라갔다. 눈앞으로 광활한 바다가 펼쳐졌다. 노엘과 반이 탄 군함이 선두에서 함대를 이끌었고 그 뒤를 엔저 맥과이어가 타고 있는 군함이 따랐다.
헤리엇의 시선이 엔저가 있는 전함에 못 박혔다. 분명히 귀엽고 연약한 후배가 걱정되는 거겠지. 그 사랑스러운 후배는 오히려 선배가 없어야 더욱더 야수처럼 날뛸 수 있었다.
안쉘이 타고 있는 군함을 호위하는 것처럼 49척의 군함이 순식간에 산개했다. 거대한 바다를 보며 안쉘은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인간을 공격해서도, 인어를 공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종전이지 또다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싸움이 되리란 건 모두가 예견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저를 무사히 지켜 주십시오. 남은 12시간만 버티면 반드시 끝내겠습니다.”
아직 선거 중이었고 안쉘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쉘은 이제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었다. 멍청하고 모자란 보좌관일 뿐이었던 그가 제법 의젓하게 입을 열었다.
“목적지는 북쪽 바다. 단테의 끈질기고 비열한 야망에 더 이상 희생자가 나와선 안 됩니다. 모두 출항하십시오.”
원래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해야 하는 사람은 엔저 맥과이어였다. 그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게 맞았고 안쉘은 그를 보좌하는 곁다리일 뿐이었다.
엔저의 장교복 코트와 모자를 챙기며 전쟁을 마친 그에게 ‘수고하셨습니다.’하고 인사하고 퇴장하는 존재. 하지만 지금 이 작전의 중심은 안쉘이었고 끝낼 수 있는 것도 안쉘이었다.
“당신은 아름다운 원석이에요. 언젠간 빛나는 보석이 될 단단하고 끈기 있는 원석.”
이제 보석이 될 시간이다.
안쉘은 무전기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간 즐겼던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이 언젠간 끝나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이런 형태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령관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군함 동력실 내부를 살펴보던 안쉘이 무전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1 엔지니어실 이상 없습니다. 보고하십시오.”
- 2 엔지니어실 이상 무.
- 3 엔지니어실 이상 무.
2, 3에 이어서 마지막 동력실까지 이상 없음을 확인한 안쉘이 무전기의 주파수를 바꾸고 고려인과 연결했다. 그는 현재 50척의 군함 메인 시스템을 각각 손보면서 지금도 군 센터에서 접근하는 해커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안쉘은 그의 능력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단테가 왜 그의 공방에 고려인을 가두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 보고 부탁드립니다.”
상황은 심각하기 짝이 없는데 고려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 죽음이지 뭐. 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죽어도 오늘 하루는 버틸 수 있으니까.
군에서 내로라하는 해커들과 단신으로 싸우는 중이면서 어디 골목대장들이 다투는 것처럼 말투가 가벼웠다. 그래도 안쉘은 오히려 고려인의 그런 부분이 더 안심되었다.
다시 한번 더 조심하라고 강조하자 고려인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그는 이윽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입에 넣고 씹었다. 한시도 메인 컴퓨터 앞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요강까지 준비했다던 그는 이 상황에서도 군것질을 하고 있었다.
껌을 씹고 있는지 짝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푸우-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탁 터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 풍선껌을 씹고 있는 듯했다.
안쉘은 고려인이 단테의 공방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단지 어렸을 때부터 그의 능력을 알아본 단테가 그를 공방에 가두었고, 사람들과의 교류도 모두 단절시킨 채 개처럼 부려 먹었다는 것만 알았다. 로봇 같은 삶을 살아도 그것보단 낫다면서 고려인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었다.
고려인이 무전을 끊지 않고 머뭇거리기에 할 말이 더 남아 있나 기다리던 안쉘은 이어서 들리는 말에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 안젤라나 잘 지켜 줘. 임무 복귀했다면서.
항상 그녀의 성질을 있는 대로 긁어 대면서도 뒤에서 하는 말이 조금 많이 달랐다. 매일같이 속마음을 숨기고 놀리기만 해 대니 안젤라가 당연히 치를 떨고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의외로 고려인은 수줍음이 많은 청년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도 귀여운 동생들의 재롱을 보는 연장자의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안쉘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무전기를 끊었다. 아직 여기저기 보고받아야 할 곳이 많았다. 귀여운 동생들의 재롱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지만, 상황의 여의치 않았다. 혀를 찬 안쉘이 다음 보고를 받기 위해 무전기를 들었다.
북쪽 바다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예정이었다. 단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군함을 남서쪽 바다에 숨겨 두었더니 아무래도 북쪽 바다까지 거리가 좀 멀었다.
부드럽게 바다를 횡단하는 군함은 그 위용에 걸맞은 긴장감을 가져다주었다. 안쉘은 항해를 처음 시작했을 때 긴장해서 갑판 위에서 토했던 날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타고 갈 전투기의 점검까지 모두 끝낸 안쉘이 한숨을 쉬며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최고 속도가 마하3을 넘는 초고속 전투기는 바다 위를 떠다녔던 안쉘에겐 조금 많이 낯선 물건이었다.
안쉘이 가라앉은 눈으로 무전기를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 * *
남서쪽을 횡단하여 항해하는 엔저 부대와 달리 안토니오는 현 정부의 지지 하에 북쪽 바다까지 어떤 함대보다도 빠르게 도착했다. 사령관실에서 갑판으로 튀어나온 안토니오는 파도 없이 고요한 북쪽 바다를 충혈된 눈동자로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단테 막심은 자신의 권한을 일부 넘겨주고 진급과 함께 2개 대대를 안토니오에게 맡겼다. 안쉘 리 후보가 죽은 다음 찬반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된다면 바로 출전할 수 있게 350척의 군함도 수도의 항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모순적이게도 그 350척의 군함을 지휘하는 함대장이 엔저 맥과이어의 어머니인 레이첼 맥과이어였다.
“조용하군요.”
안토니오의 뒤를 따라 갑판 위로 올라온 렘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북쪽 바다의 풍경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지만 부서질 것처럼 반짝이는 빙하는 금방이라도 군함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유빙을 가르며 전진하던 군함 150척이 일제히 멈춰 섰다.
“도망친 걸까요?”
안토니오가 코웃음 쳤다. 이제 완전히 회색빛이 도는 눈동자가 섬뜩하게 가라앉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어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것은 인간이 인어를 발견할 당시 그들을 동등한 종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했던 무언의 약속이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했다. 동서남북 네 곳에 결계를 치고 인어들이 지정된 구역의 바다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는 설이었다.
그것을 시행한 게 누구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었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그저 개소리라고 여겼다. 그저 그놈들이 저주받은 탓이다. 바다 안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면서 굳이 바다를 지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어들이 심해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대통령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뱀처럼 생긴 렘의 얇은 입술이 열리자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그걸 뿌려라.”
렘은 그럴 줄 알았다며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머리가 근육으로 만들어진 멍청한 놈이라 걱정했는데 대통령이 말한 대로 움직이기 쉬운 말이었다.
안토니오가 이끄는 2개 대대는 온전히 국군에 소속된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인원의 절반 정도는 단테가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안토니오의 명령을 비웃었지만, 돈을 받은 만큼 착실히 움직였다. 오히려 군에 속한 이들의 움직임이 없었다.
“뭣 하고 있나! 어서 움직이지 않고!”
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군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움직이던 그들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북쪽 바다를 한번 둘러봤다. 빙하 안쪽이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한 바다가 정말로 전쟁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일 년 내내 겨울인 이곳은 인어들에 의해 접근이 통제되어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덕분인지 그들이 봐 온 어떤 바다들보다도 깨끗한 군청색을 띠었다.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춥고 매서운 바람이 느닷없는 불청객을 쫓아내려는 것처럼 함선 갑판에 모여 있는 이들을 후려쳤다.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들은 오히려 이 흥미로운 상황에 신이 나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상관의 명령에 굼뜨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인어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잔잔한 바다에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게 영 내키지 않아 보였다.
이래서 영웅의 뒤에 숨은 머저리들은 쓸모가 없다. 안토니오는 인어의 잔인하고 포악한 점을 제대로 겪어 보지도 않고 동정하는 저놈들이 우습기만 했다.
결국 그는 참다못해 황소 같은 육체를 일으켜 군인들이 우물거리느라 던지지 못했던 커다란 포대를 바다로 던져 버렸다.
“바다에 독을 풀다니… 인어뿐만이 아니라 많은 생명이 죽을 겁니다.”
안토니오에게 포대를 빼앗긴 군인이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바다에 던져진 포대에서 나온 대량의 독이 검은 안개처럼 표면을 더럽히며 점점 심해로 흘러 들어갔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냉정하게 대답한 안토니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포대를 찾아 바다로 던져 버렸다. 이윽고 150척의 군함이 싣고 온 독이 든 포대가 전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북극곰이나 고래들의 이동통로가 되는 곳입니다. 심해에 사는 생명체들마저 독에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갈 겁니다.”
옆에서 종알종알 떠드는 얼간이는 그저 그런 가문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어중이떠중이였다. 안토니오는 아마 저 녀석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싶어서 입대했다는 머저리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다녔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멱살을 추켜잡으며 안토니오가 완전하게 잿빛이 된 눈동자를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그럼 네가 한 번 빠져 볼 테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는 군인의 멱살을 잡고 노려보던 안토니오는 이 녀석이 다시 한번 더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독을 품은 바다 위로 던져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잔뜩 겁먹은 병사는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겁쟁이 녀석.”
까맣게 물들어 가는 수면 위로 무언가가 두둥실 떠올랐다. 인어인가 했더니 함선의 절반 정도 되는 커다란 고래가 배를 까뒤집은 채 죽어 있었다.
저런 크기의 고래가 한순간에 절명할 정도이니 제아무리 인어라 할지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안토니오가 상기된 얼굴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점차 함대 주변으로 수없이 많은 생명이 죽은 채 떠오르기 시작했다.
“히익……!”
누군가가 옆에서 숨넘어갈 듯 놀랐다. 수면 위에 빼곡하게 올라온 물고기를 포함해 죽은 바다 생명체들이 초록색의 물질을 잔뜩 묻힌 채로 함선 주변에서 떠다녔다. 독을 품은 바다가 세상을 오염시켜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것처럼 점차 죽음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때, 바다 위에 퍼지는 검은 안개 위로 무언가가 반짝였다.
“…인어.”
“인어다!”
심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북쪽 바다의 인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뿐이지만 상반신만 드러낸 채 나타난 인어는 군인들이 봐 온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청량한 푸른색 머리카락은 검은 기름때로 더러워진 것처럼 바다에 퍼진 독이 묻어 있었음에도 말이다.
안토니오는 우왕좌왕하는 주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 저 인어를 잡아 죽이라고 소리쳤다.
“저 인어를 포획해라! 능력자들은 대열을 맞춰 공격해라!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
안토니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병들은 벌써 인어를 향해 포를 겨누고 있었다.
“…맙소사.”
안토니오에게 멱살을 잡혔던 군인이 손을 덜덜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인간도 무사하지 못할 맹렬한 독을 온몸에 묻히고도 살아 있는 인어가 손을 뻗고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독으로 검게 물들어 있던 그의 주변이 서서히 원래의 색을 찾아가는 게 눈에 보였다.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바다에 퍼졌던 독이 조금씩 정화되어 갔다.
이윽고 인어의 옆으로 다른 인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공격할 준비를 하던 군인들이 갑판 위에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멍하니 있던 그들의 귀에 어느 순간부터 바람을 타고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노래……?”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들려오는 소리는 청아한 노랫소리였다. 안토니오와 마찬가지로 광기에 휩싸였던 이들이 머릿속을 맑게 해 주는 노래에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공격을 위해 폭탄을 준비하던 용병들도,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비행 능력자와 조를 이뤄 상공에 떠 있던 능력자들도 모두 행동을 멈췄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니, 그건 진짜 기적이었다.
회생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검은색 바다가 점차 밝은 군청색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제 색을 되찾은 바다는 투명하게 찰랑이며 그곳에 있는 모두의 귀에 평화를 속삭였다.
“독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군함이 침범하기 전으로 돌아온 바다 위로 다른 인어들의 노랫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처연하고 아름답게 웃는 인어들이 입을 열 때마다 바다는 더욱 빠르고 넓게 정화되어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면 지금 이 순간이지 않을까.
“공격해! 현혹당하지 마라!”
안토니오가 소리를 지르며 발포대까지 단숨에 달려가 능력을 이용해 포를 번쩍 들고 발사했다.
쾅!
폭탄이 날아가 터지자 뒤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던 이들 역시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무기로 공격을 시작했다. 바다를 두 갈래로 가를 것 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인어들에게서 날아오는 공격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바다에서 강한 생명체인 그들이 되받아치지 않는 이상 일방적인 학살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래가… 노래가 끊이질 않습니다!”
뒤에서부터 날아오던 포탄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첫 번째 공격이 끝나고 자욱했던 연기가 사라지자 보이는 것은 마치 보호막을 씌운 것처럼 물의 장막으로 버티는 인어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방어만으로 전투에 임할 생각인 것이다. 눈앞에 동족을 학살하고 지금도 변함없이 공격하는 인간들을 두고도, 인어들은 반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랫소리가 조금 더 커진 듯했다. 장막을 뚫고 들어온 폭탄에 맞아 머리에서 피를 흘리거나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인어들의 모습도 보였다.
“…대령님, 정말… 우리가 틀리지 않은 게 맞습니까?”
“인어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에요. 그들은 이따금 해변으로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그건 인간과 친해지고 싶다는 그들만의 표현 방식이에요.”
평화를 위해 노래하는 종족.
어디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숨어 있었는지 군함을 바라보는 인어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빠르게 늘어갔다. 너나 할 것 없이 바다를 담은 듯한 빛나는 푸른색을 띠는 인어들은 그동안 악귀처럼 인간과 싸웠던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어들에게는 죄가 없고 평화를 사랑했던 종족이라는 안쉘 리 후보자의 폭로에 확신을 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군인들 사이에서 안토니오가 두 번째 공격을 명령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혼란한 와중에도 공격 태세를 갖췄다.
가장 선두에서 노래 부르던 인어가 눈을 감은 그 순간.
“8시 방향… 군함입니다!”
공격을 가하려던 군함과 인어들 사이에 거대한 이형의 힘이 장벽을 세웠다.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처럼 보이는 그것은 인어를 감싸는 것처럼 동그랗고 커다랬다.
전 세계에 이런 크기의 이능력 결계를 펼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능력이었다.
심해까지 독이 퍼진 순간부터 앤이 인어들과 죽음을 각오하고 수면 위에 올라와 노래하던 그때까지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왔던 한 사람.
“엔저… 맥과이어!”
안토니오가 크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던 검은 군함이 안토니오의 군함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파도가 요동치며 군함이 부딪치는 소리가 상공을 뒤흔들었다.
“앤!”
이능력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느라 하얗게 질린 채 갑판 위에서 비틀거리는 안쉘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얼굴이 죽을상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인어들이 바다 위에서 군함과 대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안쉘은 발밑으로 꺼지는 듯한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심지어 공격 태세도 갖추지 않고 그저 노래만 부르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공격하지 않겠다고 하긴 했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앞에 나섰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안쉘.”
안쉘은 바다에 있는 그의 모습이 어느 인어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그런 감상이나 내뱉을 때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둥지둥했던 안토니오 휘하 군인들이 정신 차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안쉘은 인어들이 제발 심해로 도망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앤과 눈을 맞추었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만 지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쉘. 슬슬 들어가.”
제이든이 갑판 위로 올라와 안쉘에게 고갯짓하며 맞은편에 있는 안토니오를 노려봤다. 비록 거리가 있어 서로의 얼굴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안토니오도 제이든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사령관이 사령관실을 마음대로 빠져나오면 쓰나.”
“…….”
“들어가. 인어는 우리가 지킬 테니까.”
콰앙!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안쉘의 군함 바로 앞으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충격이 울렸다. 비틀거리며 갑판 위에 버티던 안쉘이 앤을 한 번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제이든.”
* * *
“이번 전투, 우리에게 가장 불리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답을 모르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이쪽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아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엔저 맥과이어였다. 그는 능력 자체가 우수하기도 하지만 인어와의 수많은 해상전투에서 승리해 온 경험도 풍부했다.
지금은 인어의 편에 서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물론 엔저는 인어의 편이라기보단 헤리엇을 위해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이쪽은 지키는 쪽이라 이거지. 인어도 인간도 심한 사상자가 나와선 안 돼.”
엔저가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서 살짝 벗어났다고는 해도 불과 며칠 전 헤리엇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 그는 복부에 붕대를 감은 채 팔짱을 끼고 나른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상대편 사상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아직 인어를 싫어하는 인간이 많으니까요. 인어의 편에 서서 같은 인간을 죽인다는 인식만큼 우리에게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쿠데타 때문인가.”
정답이었다. 아직 안쉘은 지지 기반이 불안했으므로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은 채 단테 일당을 일망타진해야 했다. 혹시라도 반란군이 생겨 들고일어난다면 큰 문제였다. 더 나아가 내전이 발발하기라도 한다면 인어와의 전쟁으로 불안한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단테에게 남은 시간은 없었지만, 그가 가진 권력은 아직 유효했다. 그는 20년 동안 이 세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면서 독재 체제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힘을 키웠다. 단테 소유의 공방에는 고려인과 같은 괴물들이 수두룩했다.
본인의 권력과 욕심을 위해 수만 명의 사람을 끔찍하게 죽였고 그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안쉘과 눈이 마주친 헤리엇이 눈썹 끝을 내리고 미소 지으며 붉은색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간단히 말하면 군인들에게 최소한의 피해만 입히면서 인어들을 지키고, 안쉘이 무사히 하늘을 날아 판테니엄관에 도착하면 된다는 거지.”
헤리엇이 전혀 간단하지 않은 사실을 무척이나 가볍게 말했다. 안쉘은 그게 쉬우면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렵다고 말하는 순간 정말 모든 일이 어그러질 것 같았으니까.
“…맞습니다. 간단합니다.”
안쉘은 헤리엇과 엔저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의 뒤에는 많은 전투로 영웅이 된 사람과 감정을 배워 가는 인조 인어가 있었다. 안쉘이 속한 엔저 부대는 바다 위에선 최강이었고 모든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믿을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 * *
한때 인어들을 향했던 엔저 맥과이어의 검은 군함이 지금은 그들 쪽에 서서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다른 군함들보다도 훨씬 견고하고 거대한 군함은 인어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독수리가 그려진 엔저 부대의 마크가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었다.
“흥.”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에 코웃음 친 엔저가 비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팔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기세로 달려들던 무형의 것들이 엔저의 손끝에도 닿지 못하고 저 멀리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폭발의 충격으로 크게 출렁이는 파도에 군함이 이기지 못하고 반쯤 기울어졌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든지 엔저는 그저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단정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최전방으로 나선 엔저의 군함 양쪽으로 엔저 부대 군함 2척이 끼어들었다. 바다 위에서 거대한 군함들이 빙글빙글 돌며 서로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고 비행 능력자들이 하늘에서도 공격을 날려 보냈다.
콰앙!
빙하에 부딪힌 안토니오의 부대 군함 한 척이 한순간에 불타오르며 바다 아래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정비해라! 당황하지 마! 편대 흩트리지 마!”
“방어 능력자들은?”
무전기에 대고 비명 지르듯 소리치던 안토니오는 렘에게 떠넘기다시피 무전기를 던졌다. 자신의 어깨에 맞고 갑판에 떨어진 무전기를 주운 렘이 안토니오를 흘깃 쳐다보고 회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방어 능력자들을 최전방에 세우고 뒤에서 공격하십시오.”
- 하지만 그러면 아군이…….
“어차피 해상 전투에선 엔저 맥과이어의 부대를 정공법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바다의 지배자들을 상대로 밥 먹듯이 승리해 온 부대였다. 아마 대통령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잡아 두기 위해 애썼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전처럼 쉽게 승리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인어에게 유감이 매우 많은 렘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이기는 게 더 좋겠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안쉘 리 후보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북쪽 바다 인어와의 전투는 미끼일 뿐. 안쉘 리를 보이는 즉시 사살해야 합니다.”
쾅!
선체가 큰 충격에 사정없이 흔들렸다. 군함이 기우뚱거리고 파도가 집어삼킬 듯이 몰아닥쳤다. 갑판 위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이 군함은 안토니오 덕분에 상대방 측에 표적이 된 것 같았다.
엔저 맥과이어의 검은 군함에서 끝없이 폭발음이 들려왔다. 하늘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어 버릴 정도로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에 방어 능력자가 없는 군함 2척이 빙하에 부딪히고 폭탄에 맞은 충격 때문에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가라앉고 있는 군함 안에서 빠져나오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가증스럽게도 인어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동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인간 군인들을 하나둘씩 건져 내 빙하 위에 올려 주었다. 군인들은 연신 기침을 내뱉으며 추위에 떨었지만 적어도 죽을 고비는 넘겼다.
“구역질 나는 인어 놈들.”
렘이 입고 있던 군복 상‧하의를 모두 탈의해 갑판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다음 거친 손놀림으로 군화와 양말도 벗어 버렸다. 전라가 되어 가는 상관을 보던 군인이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불렀다.
“…소위님?”
이윽고 완전히 나체가 된 렘이 군함에서 뛰어내렸다. 주변 군인들의 눈엔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갑판 위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이윽고 렘이 빠진 바다 아래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폭발로 군함 한 척이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북쪽 바다는 군함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혼란스러운 광경을 그려 냈다.
쾅!
그런 와중에 통제할 수 없어진 군함끼리 부딪히면서 더 거센 파도가 일어나 군함을 집어삼킬 듯했다. 안쉘이 타고 있는 군함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엔진과 프로펠러가 폭발로 인해 전부 손상되어 버리고 제1, 2동력실이 망가져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계속해서 높은 파고로 덮쳐 오는 파도에 군함이 오뚝이처럼 기우뚱거렸다.
통제실에서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안쉘이 중심을 잃고 넘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기둥을 잡고 몸을 지탱하던 제이든이 안쉘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정신 차려.”
“윽…….”
“당장 일어나. 여기서 탈출해야 해.”
더는 이곳에 있을 순 없었다. 안쉘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제이든의 팔뚝을 잡은 채 최대한 다리에 힘주어 버텼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사일이 쉴 새 없이 날아와 군함을 공격했다. 그로 인해 선체가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윽… 헤, 헤리엇 님은?”
“…….”
제이든이 착잡한 눈빛으로 바깥 상황을 보여 주는 화면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엔 파도가 커다랗게 일어나 군함을 덮쳤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크게 일어나 멈춰 있는 파도는 안쉘이 탄 군함을 지키려는 것처럼 커다란 보호막이 되어 주고 있었다.
안쉘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떠올렸다. 비록 온전한 인어는 아닐지라도 강하기로 지상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는 인조 인어를.
“…헤리엇 님께서.”
“윽… 맞아. 일단 나가자고.”
제이든은 상대의 공격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안쉘의 등을 떠밀었다. 제이든의 이마를 타고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갈비뼈도 나간 모양인지 가슴을 부여잡으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크게 흔들린 탓에 구르던 안쉘을 잡아 받쳐 주느라 통증을 심한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이든.”
“미안하면 일단 살아서 나가지.”
제이든이 엉망으로 금이 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똑. 시계에 핏방울 하나가 떨어져 번졌다. 20년 넘게 차고 다닌 손목시계는 여전히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개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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