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과거의 조각
아침부터 단테 막심의 연설 아닌 연설이 시작되었다.
- 영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엔저 맥과이어 대령의 배신으로 큰 충격에 빠진 국민 여러분. 우리는 어째서 그가 그토록 무심한 길을 걸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쉘 리 후보자는 평화와 공존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인어들은 여전히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바다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서 바다를 되찾아 와야 합니다. 엔저 맥과이어 대령은 안쉘 리 후보자의 말도 안 되는 이상에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지친 국민 여러분. 저 단테 막심을 뽑아 주신다면 절대 고통받을 일도 슬플 일도 없을 것입니다. 평화를 선택한 인간들에게 인어들은 무력으로 답했습니다.
엘리키스호의 참혹했던 과거를 떠올려 주십시오. 사랑하는 내 가족! 나의 이웃이! 무참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던 그날의 분노와 공포를!
저는 늙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오명의 역사는 제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바다를 인어들에게서 되찾아 다시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단테 막심의 열정적인 연설이 마무리되고 있을 때, 그가 나오는 TV 화면에 치직, 하고 노이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도시 번화가의 대형 스크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있던 휴대전화, 노트북 화면에도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방송국 상황실의 수많은 스크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연설을 끝마친 대통령이 온화하지만, 격정적인 표정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무슨 일이지?”
무전기로 방송국 상황실과 교신하던 안토니오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신호가 먹통이라고 합니다.”
“뭐?”
단테 막심은 수행인으로 함께한 안토니오에게서 무전기를 빼앗았다.
- 해킹인 것 같습니다.
무전기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테 막심이 고개를 들어 TV 화면을 쳐다보니 치지직거리며 듣기 싫은 잡음을 내던 화면이 어떤 사내의 뚜렷한 형상으로 바뀌었다.
“안쉘 리…….”
그건 단테 막심이 벌레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던 대통령 후보 안쉘 리의 모습이었다. 그는 의연한 표정을 짓고, 근사한 정장을 입은 채 하얀색 책상에 앉아 있었다. 머리도 2대8의 촌스러운 스타일이 아닌 뒤로 넘겨 고정한 모습이었다.
겁에 질려서 발발 떨기만 했던 머저리의 얼굴을 보며 단테의 주름진 얼굴이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 우리는 그들에게 더는 죄를 지어선 안 됩니다. 평화와 노래를 사랑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바다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모든 건 진실이 알려 줄 것입니다.
그의 간단한 연설 다음으로 어떤 영상이 재생되었다.
“당장 방송을 중단시켜!!!”
- 해킹당한 채널이 복구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주변 사람들의 꺼져 있던 휴대전화 화면까지 저절로 켜지고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단테 막심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바닥에 던지며 평소 고수해 왔던 이미지에 맞지 않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 영상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화면에는 고요한 바다와 엘리키스호를 떠받들고 있는 인어들의 모습이 찍힌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 속의 인어들은 누가 봐도 배가 가라앉지 않게끔 지탱하며 인간을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잔인할 정도의 많은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엘리키스호를 공격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그리고 단테 막심이 그날 비공개로 탄약 사용 허가서에 서명했다는 증거가 떴다.
내레이션도 없는 다큐멘터리식의 너절하고 지저분한 영상이었다. 다만 엘리키스호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만큼은 그대로 나갔다.
곧이어 영상은 엘리키스호에서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 단테 막심의 주도하에 인간과 인어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이 진행되었던 연구실이 보였다. 연구실에 있는 이들은 모두 군의관이었으며, 그곳은 최근에 폭발한 군이 운영하던 연구소였다.
대부분 10세 이하의 인간 어린아이들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실험 장면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중에 유일한 성공작인 헤리엇의 이름도 영상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은 단테 막심이 전에 일부만 공개했던 영상으로, 인어들을 사냥하는 모습이었다. 인어들은 도망가고 있었고, 단테는 웃으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결국에 사냥감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그는 총을 들고 재미없다는 듯 지루한 얼굴을 한 채 마구잡이로 쏴 갈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단테 막심이 죄 없는 인어들을 학살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방송국을 포함한 군 채널과 전자기기를 모두 해킹한 고려인은 사흘 밤낮을 새운 덕에 검은색 그림자가 눈 밑에 짙게 내려와 있었다. 단테의 악행을 낱낱이 떠벌린 그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반응은 어때요?”
안쉘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씹으며 고려인의 옆에서 말했다. 그는 고려인보다 안색이 더 좋지 않았다. 머리를 뒤로 넘기고 젤로 고정한 안쉘의 옆에서 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굉장히 멋있어요, 안쉘.”
“…잘생긴 걸로 따지면 앤이 제일 잘생겼어요.”
“오, 그런 게 아니에요. 안쉘 당신은 정말 멋있어요.”
앤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북쪽 바다로 떠나게 되는 앤과 함께할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안쉘은 처음으로 렌즈를 낀 탓에 건조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잘될 거예요.”
“뭐든지?”
“네. 잘될 거예요.”
안쉘은 자신이 없었지만 앤을 위해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자신은 눈앞의 아름다운 인어에 대해 잘 모른다.
그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인어라는 것, 사실 바다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개구리를 좋아하고 그들과 노래하길 좋아하는 괴짜라는 아주 사소한 것만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앤의 푸른 눈동자가 지상에 있을 때보다 물속에서 누구보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까지만 말이다.
안쉘은 입을 뻐끔거리면서 앤의 손목을 잡았다.
“저는… 머저리고, 겁쟁이에다, 비겁한 놈이지만…….”
“당신은 멋진 사람이에요.”
“…….”
자신의 말을 가로채는 앤의 목소리에 안쉘이 머뭇거리는 사이 제이든이 들어왔다. 그의 부하들이 누구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앤을 북쪽 바다로 데려다줄 것이다. 앤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안쉘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웃어 주었다.
“다 끝나면, 그때 다시 만나서 얘기해요.”
그리고 제이든의 부하들과 기지를 나섰다. 안쉘은 기지 안에서 앤이 타고 있는 차량이 점점 멀어지는 걸 CCTV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제이든과 고려인이 온갖 글자와 영상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커다란 화면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회의 중이었다.
“반응은 어때?”
“초반에는 합성이다 뭐다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말이 많이 들어갔어요. 물론, 영상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손가락 빨고 있진 않을 텐데?”
제이든의 말에 고려인은 피곤한지 어깨를 주물럭거리면서 덧붙였다.
“단테가 적어도 제정신이라면 여기서 그쳐야죠. 하지만 아직 군에는 단테의 끄나풀이 더 많고… 정부도 마찬가지예요. 20년 동안 왕처럼 군림했던 사람이니…….”
슬슬 고려인이 준비해 둔 영상의 끝이 다가왔다. 많은 채널이 원래대로 복구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인은 오늘 오후 6시에 또 다른 영상을 터트릴 예정이었다.
채널이 복구되자마자 여기저기서 특종과 함께 뉴스 속보가 보도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채널에서 이 모든 영상이 거짓이며, 자신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안쉘 리의 조작이라는 단테 막심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몇몇 채널에서는 희망의 불씨가 퍼지고 있었다.
- 단테 대통령의 행보가 주목받는 가운데, 영상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판독 결과를 △△△ 대학의 000 교수가 발표했습니다. 뒤이어 스물네 명의 기자가 성명문을 내고 차례로 기사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테의 행보에 수상하게 여겨 조사 중이었으며 대통령의 보복이 두려워 지금까지 증거를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요.
- 충격에 빠진 국민들은 아직 이 괴영상이 진실인지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고한 인어들을 바다에서 내몰았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가짜 같다며 오히려 안쉘 리를 대통령 후보에서 박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둘씩 드러나는 단테 대통령의 악행에 그를 보호하는 여론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 선거 이틀 전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년 동안 대통령이었던 단테 막심이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진실이 폭로되어 그의 대통령 후보 자격 박탈에 대한 논의를 위해 국회에서 단테 막심을 긴급 소환 요청했습니다.
- 숨어 있던 영웅들. 단테가 주도한 생체실험을 조사했다는 형사 맥 도널이 갑작스러운 폭로 영상에 힘입어 본인의 자료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 안쉘 리 후보자는 평화위원장인 제이든 올던과 함께 단테 막심의 악행에 대한 증거 자료를 모아 왔고, 더는 불의를 참을 수가 없어 발 벗고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각 구역의 위원장들은 침묵하고 있으며, 엔저 맥과이어의 모친이자 제1함대장 레이첼 맥과이어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고하게 죽은 실험체들과 인어의 실험 영상이 퍼지면서 실신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중입니다.
- 이에 막심 대통령 측은 유언비어를 퍼트린 안쉘 리를 고소할 것이며, 영상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또한…….
고려인은 채널 이곳저곳을 돌리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여러 곳에서 증거들이 터져 나오고 있으니 어떤 머저리가 봐도 단테의 악행은 모두 진실임이 기정사실화될 것이었다.
앤이 가져왔던 알시타의 친필 문서까지 발표되면 이제 단테는 대통령 후보에서 박탈당할 가능성이 컸다. 아직은 현직 대통령이니 체포는 불가하더라도, 적어도 이틀 뒤 선거에서 안쉘이 승리할 가능성이 커졌다.
대통령 후보가 한 명이라면 선거는 국민투표 100%로 넘어가 찬반투표로 바뀐다. 물론 거기서 반대표가 더 많으면 말짱 꽝이다. 혹은, 안쉘 리 후보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 버려도 마찬가지였다.
“단테 대통령은 이제 악에 받쳐 중위님을 죽이려고 들 겁니다. 우리 계획에서 댁이 죽어 나자빠지면 우리 모두 발목에 시멘트 트렁크를 매달고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해.”
마음이 더욱더 무거워졌다. 안쉘은 손끝에 피가 돌지 않는 기분에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고려인은 팔짱을 끼면서 안젤라가 쉬고 있는 방 복도를 비춘 CCTV 화면을 힐끔 쳐다봤다.
호감을 느끼고 있던 리언에게 배신당한 이후로 안젤라는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고려인은 흠흠 하고 다시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니면, 북쪽 바다를 치는 걸 밀어붙이거나.”
하지만 그건 정말 자멸이나 다름없었다. 안쉘은 앤이 늘 궁금해하던 것을 떠올렸다.
“대체 단테는 왜 그렇게 인어들을 증오하는 걸까요?”
“인어들을 증오한다기 보단, 바다를 차지하는 인어들이 증오스러운 거겠지.”
제이든은 예전엔 알시타의 아버지인 단테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편이었다. 실제로 안쉘과 손을 잡기 전까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단테의 곁에서 그를 신뢰하는 척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바다를 차지하는 인어들이요?”
“그래, 단테는 바다를 늘 차지하고 싶어 했으니까.”
“인간이 바다를… 대체 왜?”
“글쎄…….”
제이든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나고 있었다.
* * *
문을 열고 들어온 여성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타오르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변을 뜨겁게 만들 것 같은 외모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한기가 어려 있어 차갑기 그지없었다.
별 세 개와 훈장 두 개를 가슴에 나란히 단 그녀는 장교모를 한 손에 들고 방 안을 날카롭게 살폈다. 그녀는 꽤 젊은 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름진 눈가가 연배를 대충 짐작하게 해 주었다. 실제로 그녀가 서른을 바라보는 아들을 둔 여성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첼.”
“어머니.”
레이첼 맥과이어, 엔저 맥과이어의 어머니이자 남쪽 바다를 총괄하는 해군 통합사령부 소속 제1함대장인 그녀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아카데미 동기 제이든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아는 레이첼 뤼어드치 아니, 레이첼 맥과이어는 혈연에 연연하는 따듯한 심장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제이든과 같은 불 속성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성정은 능력과 반대로 차갑다 못해 빙하기가 온 것처럼 꽁꽁 얼어붙은 사람이었다.
아들이라고 해도 당장 체포해 버릴지도 모를 그녀가 어떻게 엔저 맥과이어의 비밀기지까지 찾아올 수 있었는지 제이든은 알 수 없었다.
“당당하게 집을 나간 것 치곤 꼴이 말이 아니구나.”
레이첼은 냉정한 시선으로 엔저를 위아래로 훑었다. 엔저는 부상으로 인해 아직 휴식 중이었다. 의사가 수술을 하고 나서 앤이 치유 능력을 발휘해 많이 호전되었다. 그래도 복부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깊은 상처라 내상이 완전히 나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침대 옆에 앉아 엔저의 손을 잡고 있던 헤리엇은 자신의 루비가 누구로부터 그 색을 물려받은 건지 깨달았다. 그는 레이첼과 엔저의 붉은 눈동자를 힐끔거리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 때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안쉘은 전설의 제1함대장을 눈앞에서 보게 된 영광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경례 중이었다. 빳빳하게 굳어서 보는 이가 안쓰러워할 정도로 땀을 뻘뻘 흘렸다. 레이첼은 도톰한 입술을 내밀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단테 막심이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주저앉을 머저리로 보이진 않을 테고.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테니 싸움을 걸었겠지.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어도 아직 단테는 대통령이야.”
레이첼은 표정을 풀지 않고 엔저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와 한슨은 멍청한 가족 놀음으로 신파 찍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단다. 명령이 내려오면 따르고 복종한다. 그게 군법이니까.”
비어 있는 낡은 의자에 털썩하고 앉은 그녀의 몸은 꽤 단단하고 두꺼워 보였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뜬 레이첼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들을 쳐다봤다. 누가 보면 삭막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녀로서는 그나마 자식이기에 온정을 베푸는 중이었다.
레이첼은 아들인 엔저가 자신과 한슨의 능력치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범죄를 저지를 예정이니 가문에서 내쫓으라고 통보한 아들을 말리기 위해 남편과 짜고 그를 공격했다가, 되레 반격당해 한동안 운신이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잠시 땅이 꺼질 듯 커다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 아들이 침대 밑에 괴물이 숨어 산다고 울먹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눈이 획 돌아서 세계적인 범죄자가 되어 있으니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날, 아들의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아카데미에 처박았던 게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일까. 혀를 찬 레이첼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엔저는 말없이 제 어머니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눈을 감았다.
“멍청한 자식, 나와 달리 한슨이 얼마나 울고불고했는지 아니?”
엔저가 어머니의 모습이 된 레이첼에게 순순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한슨 맥과이어와 레이첼 맥과이어는 부부라기 보단 동료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제1함대장 레이첼의 관할에 있는 제1전투단장이 한슨 맥과이어이기도 했다.
한슨은 얼음 계열 능력자로 레이첼과는 상극일 정도로 소심한 성격이었다. 부부 같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엔저 맥과이어는 엄연히 그들의 외동아들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아들의 곁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헤리엇을 보았다. 희한하게 센 흰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사내는 매우 선량하고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 모습에 기시감을 느끼며 레이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쪽 바다로 출항하라는 명령이 우리 함대에 떨어졌다. 단테는 내일 북쪽 바다를 모두 정리할 생각이야.”
그건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엔저만큼은 아니지만, 헤리엇과 엇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
레이첼은 엔저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북쪽 돛단배를 조심하세요. 검은 댕기 머리 여자애가 목이 잘려 바다로 흘러갈 테니까.”
“…….”
엔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대답 없이 나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비밀기지를 나섰다.
엔저의 비밀기지가 있는 29구역 중심은 일반인이 혼자 어슬렁거리기에 위험한 거리였다. 그런데도 레이첼은 혼자서 그 거리로 나갔다.
기지에서 나와 부두까지 향하는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그 짧은 시간에 쓰레기들이 눈을 번뜩이며 레이첼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궐련을 빼 들고 입에 문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군복을 입은 레이첼을 보고 멈칫했던 쓰레기들은 겁도 없이 마취제를 듬뿍 묻힌 더러운 천을 들고 그녀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가 덮치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몸이 산화하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겉에서 불이 붙은 것이 아니라 사내의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며 까맣게 재가 되고 있었다. 사내의 몸이 마른 성냥개비처럼 순식간에 타올라 사라져 버렸다. 입에서 궐련 연기를 내뱉은 레이첼이 먼지를 털어 내려는 것처럼 양손을 탁탁 마주쳤다.
레이첼에게 어린 시절의 엔저는 참 순하고 멍청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그 모자란 아들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담고, 사람들이 외계인으로 보인다고 엉엉 울던 어린아이는 이제 없었다.
북쪽 돛단배. 검은 댕기 머리 여자애. 목이 잘린.
골목길 쓰레기들이 겁에 질려 달달 떠는 것을 가볍게 무시한 레이첼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군화가 잿더미를 짓밟고 지나갔다.
* * *
레이첼이 떠나고 하얗게 질린 채로 엔저의 방을 나서는 안쉘의 등을 보던 헤리엇이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엔저를 바라봤다.
귀여운 후배는 마치 애교 부리듯 헤리엇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귓가에 제 뺨을 비볐다. 사랑스러운 몸짓에 헤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순하고 귀여운 후배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엔저가 작게 움직일 때마다 숨결이 느껴졌다.
“안쉘이 많이 긴장한 모양인데.”
엔저는 헤리엇의 관심이 자신이 아닌 다른 쪽으로 향하는 게 싫었는지 연신 헤리엇의 귀와 뺨을 약하게 깨물었다.
“왜 하필 안쉘이었니?”
헤리엇은 그런 엔저가 귀여웠는지 손가락으로 턱을 살살 쓰다듬다가 그의 매끈한 볼을 톡톡 쳤다. 수려한 눈썹은 가지런했고, 검고 긴 속눈썹은 나비처럼 우아하게 팔랑거렸다.
가까이서 본 엔저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잘생기고 아름다워 보였다. 헤리엇은 일반적인 미의 관점은 잘 모르지만, 이 정도면 아름답고 잘생긴 편이라고 자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헤리엇은 엔저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눈에 가장 밟히는 사람은 제이든이었고,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아끼게 된 사람은 안쉘이었다.
안쉘은 어디 하나 잘난 곳은 없었지만 못나지도 않았다. 일 처리가 빠른 만큼 노력했고, 머리가 비상하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대통령이 될 재목은 아니었다.
“지금 세상이 원하는 대통령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저는요, 선배… 선배의 부관이 되고 싶어요. 동물학자가 되고 싶은 선배의 곁에서 이것저것 보조하고, 선배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어요.”
마지막, 그 마지막에 당신의 곁을 차지하는 건 나라고 말하는 엔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때 헤리엇은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
헤리엇은 그의 정열적인 얼굴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발기하고 말았다.
* * *
어쩌다가 이 꼴이 됐지.
안쉘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술잔을 들고 홀짝이는 하얀 사내를 응시했다. 그대로 공기 중으로 산화할 것 같은 희끄무레한 사내는 초록빛 눈동자를 온화하게 반짝이며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왜 그런 헤리엇의 등 뒤로 수라의 형상이 보이는 걸까. 안쉘은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울고 있는 이들은 테이블 주변에서 무릎 꿇고 있는 다른 사내들이었다.
“혀, 형님, 제발, 흐흐흑 살려 주십셔.”
헤리엇은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살려 달라고 비는 사내 중 한 명이 조금이라도 팔을 내릴라치면 주먹을 쥐었다. 안쉘이 봤을 때 모든 것에 평등하게 온화할 것 같은 헤리엇은 의외로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오는 스타일이었다.
이 구역의 골목길에서 어깨에 잔뜩 힘주고 다녔던 것 같은 그들이 헤리엇의 발치에 누워 나뒹굴다 못해 달달 떨면서 쌍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안쉘은…….
“…헤리엇 님, 취하셨습니까?”
“응? 아니.”
안쉘이 자리를 뜨려고 일어날 때마다 헤리엇은 싱긋 웃으며 쾅! 하고 다리를 올려 옆에 있던 테이블을 발로 차 박살 냈다. 그 테이블이 자신이 된 것 같아 안쉘은 겁에 질려 생각했다.
술 취했구나.
그러니까 왜 이런 꼴이 되었는가를 설명하자면 오래 걸리겠지만 일단 오늘 오후로 돌아가야 했다.
안쉘은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는 자신이 긴장하면 얼마나 얼간이 같아지는지도 잘 알았다. 항상 단테 앞에서 주눅 들고 머저리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데도 단테에게 전면전을 선포하고, 북쪽 바다로 출전하는 단테의 군에 대응하여 인어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남아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을지도.
여러 가지 생각이 얽히고설켜 안쉘은 여느 때보다도 겁을 먹고 혼란스러웠다. 그런 안쉘에게 헤리엇이 대뜸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상하지.”
“…….”
“엔저가 안쉘을 참 아끼는 모양이야. 신뢰로 가득 차서 칭찬하는 걸 보는데…….”
그 말을 하는 헤리엇은 무척 순하고 선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널 죽이고 싶었어.”
“…살려 주세요.”
안쉘은 진심으로 빌었다.
“음, 그런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정말 죽이진 않아.”
헤리엇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온화하게 웃었다. 안쉘은 팔자로 내려간 그의 눈썹이 평소와 달리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초록빛 눈동자가 살의로 가라앉는 걸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쉘은 달달 떨면서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댁까지 나한테 왜 이래!’
그런데 갑자기 헤리엇이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엔저를 보고 있으면 여기가 계속 뜨거워.”
“…….”
안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여러 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휙 날아가 버렸다. 헤리엇은 제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서른네 살에 처음 느끼는 음심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새하얀 사람을 보면서 안쉘의 넋은 진창에 빠졌다.
“…대령님에게요?”
“음.”
“발기하신다고요?”
“음.”
헤리엇의 대답에 안쉘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경악에 차 소리쳤다.
“아니 대체 왜 이런 것만 대령님을 닮으시는 겁니까?!”
부부는 닮는다더니. 아, 이럴 때도 부부인가? 그 망할 변태 상관이 결국 벼르고 벼르다가 저 하얀 인어를 집어삼켰구나.
안쉘은 탄식하면서 중얼거렸다.
“알코올 당긴다…….”
그 말에 헤리엇이 반응했다. 헤리엇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술?”
“네. 요즘 맥주도 한 캔 못 마셨더니…….”
안쉘은 헤리엇의 시선에 비친 호기심을 읽었다. 헤리엇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표정이라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헤리엇 님, 한 번도 술 드셔 본 적 없으십니까.”
그에 헤리엇은 대답하지는 않고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하긴 제 감정도 모르고 산 사람이 유흥거리로 술을 마실 리 없나.
안쉘은 오늘 밤 정말 피곤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잠시 정신이 나간 그는 저도 모르게 헤리엇에게 제안했다.
“한 번… 마시러 가 보시겠습니까?”
지금 딱 저녁 시간대였고, 고려인은 2차 폭로에 돌입한다고 신이 나서 엔저의 방으로 쳐들어간 상태였다. 양아들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더니 어느새 헤리엇의 아버지가 된 듯한 제이든이 그의 뒤를 자식의 몹쓸 남자 친구를 감시하려는 것처럼 따라 들어갔다.
헤리엇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아무리 위험하다는 29구역이라고 해도, 안쉘은 헤리엇과 자신의 능력이라면 뒤탈은 없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구역 내에서 나름 안전하다고 알려진 술집으로 헤리엇을 안내했다. 그게 안쉘에게 주어진 오늘 일과의 끝이었다.
술집으로 들어와 자리 잡고 앉은 안쉘은 헤리엇을 위해 위스키 두 병, 와인 두 병, 한권의 술인 소주 두 병을 시켰다.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하며 도수가 높은 양주도 한 병 추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쉘은 헤리엇이 술에 강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안쉘의 직감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가장 먼저 소주를 두 잔 마신 헤리엇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지만, 안색은 언제나 그렇듯 새하얗기만 했다. 취한 흔적을 얼굴 어디서도 찾지 못한 안쉘이 조금 더 센 술을 따라 주어야 하나 잠시간 고민했다.
그러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계산서를 본 안쉘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었다. 고작 술 몇 병으로 연봉의 반이 술값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범죄 구역인 29구역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고 생각한 안쉘은 그들에게 다가가 항의했다. 헤리엇과 기분 좋게 술잔을 비울 생각이었는데 다 망치게 생겼다.
하지만 역시 안전하다고 알려진 술집이라고 해도 29구역이었다. 술집 주인은 금방 쓰레기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사내여도 구멍을 이용하면 비싸게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저들끼리 시시덕거렸다.
안쉘이 혀를 차며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일어났다. 하지만 앞에서 싱긋, 말갛게 웃던 헤리엇이 모여든 깡패들을 쭉 훑었다.
“이런 곳에서 이방인이 술 처먹으면 다음 날 장기 뽑혀 간다는 소리는 못 들은 거야?”
사내들은 그 말이 괴담이 아닌 진짜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놀렸다. 안쉘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헤리엇의 미소는 더욱 온화해졌다.
안쉘은 설마설마하는 기분으로 제 앞에 있는 헤리엇에게 속삭였다.
“…설마 취하셨습니까?”
“응? 아니.”
그래, 헤리엇 알스터 저 강한 사내가 설마 소주 두 잔으로 취할 리가.
두 병도 아니고 작은 잔으로 두 잔이다. 거기에 잔으로 절반 조금 넘게 따라 주었으니 사실 완전한 두 잔도 아니다. 낯빛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목소리도 뭉개지지 않은 걸 보면 딱 평소의 헤리엇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등골이 오싹한 건지 모르겠다.
그때 불량배 중 한 명이 겁도 없이 헤리엇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어깨동무랍시고 하는 짓이 어딜 봐도 시비 거는 투였다. 안쉘은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떨어지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에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상하다. 안쉘의 손은 테이블에 닿지도 않았다. 즉, 다른 곳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는 건데…….
주변을 훑어보니 헤리엇은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작게 미소 지으며 손을 들고 있었는데 그에게 어깨동무했던 불량배의 모습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헤리엇에게 후려 맞고 저 멀리 날아가 다른 테이블에서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 헤리엇 님??”
“엔저는 정말 사랑스럽고 귀여운 후배야.”
“…….”
“그 애가 혹시 전쟁으로 상처 입으면 어쩌나 걱정돼. 착하고 순한 애잖니.”
‘누가요? 설마 엔저 맥과이어?’
헤리엇의 눈에는 대체 그 악독한 영웅이 어떻게 보이기에 저런 헛소리를 하나. 헤리엇은 엔저가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헤리엇의 뒤에서 다른 불량배들이 각자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그 행동이 무색하게도 잠시 후 그들은 헤리엇에게 얻어터져 바닥을 기었다.
안쉘은 헤리엇이 의외로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은근히 주먹에는 주먹으로 대응했다. 그러면서 그게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헤… 헤리엇 님, 취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쌍코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는 놈들이 왠지 낯설지가 않아 안쉘이 달달 떨었다. 내일은 북쪽 바다로 출전하는 단테의 군대와 충돌할 가능성이 컸다. 그로 인해 심란해진 마음을 가벼운 술 한잔으로 떨치고 싶었던 안쉘은 더 불길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슬금슬금 움직이며 헤리엇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헤리엇은 살금살금 움직이는 안쉘의 앞에 있던 의자를 긴 다리를 휘둘러 산산조각 냈다.
“헤, 헤리엇 님!”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야. 나는 헤헤리엇이 아니라 헤리엇인데… 그리고 아직 술이 남았어… 조금만 더 마시고 가자, 안쉘.”
목소리와 얼굴은 상냥했지만, 행동은 정반대였다. 안쉘은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재빠르게 의자에 앉았다.
저 양반 취했다. 겨우 두 잔에 얼큰하게 취하셨구나.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래, 안쉘 널 죽이고 싶다고…….”
“아, 아, 아뇨! 아뇨, 아뇨! 헤리엇 님, 엔저 대령님이 걱정된다고 하셨습니다.”
기억이 뒤죽박죽인지 헤리엇은 눈썹을 찡그렸다. 자극적인 것에 약한 건 알았지만 설마 알코올에도 약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헤리엇의 눈가가 다시 풀렸다. 분명 사랑스럽고, 순하고, 귀엽고, 누구보다 착한 후배님을 떠올리고 있겠지.
안쉘은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 따질만한 용기는 없었다.
“엔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
그냥 옆에서 숨만 쉬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안쉘은 침을 삼켰다.
지금 같은 시기에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자신은 지금 단테를 몰아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패였고, 대통령의 자리에 대한 압박감과 짊어진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짓눌릴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일단… 헤리엇 님이 발기했다고 본인에게 직접 말씀하시면…….”
세계의 평화와 안녕에는 관심 없는 미친놈들의 연애 상담이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정신이 멍해지는 게 자신도 정상적인 꼴은 아니겠구나.
안쉘은 술에 취해서 생각했다. 목이 말라서 눈앞에 있는 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젠장, 이것도 술이었다. 그것도 도수가 매우 높은 보드카.
평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의 헤리엇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안쉘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말했다.
“그래서?”
아니, “계속해.”라고 했었나.
헤리엇은 안쉘이 입을 다물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웃는 낯짝으로 계속 말하기를 종용했다. 안쉘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엔저 맥과이어 대령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스물두 살의 어리고 풋풋했던 엔저는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가 헤리엇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개뿔. 스물두 살의 어린 엔저는 귀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싹수없는 사이코패스였다고…….
조금만 수틀리게 해도 상관이고 뭐고 뒤에서 조져 버리는 통에 증거가 나오지 않아도 엔저의 눈 밖에 나면 곱게는 끝나지 않는다는 건 부대 내 모두가 은연중에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안쉘은 그의 곁에서 구르면서 세상에 이렇게 악독한 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미친놈도 제 선배 앞에선 온순한 양이 따로 없으니 둘은 천생연분이 분명했다. 아직도 엔저의 뒷모습만 봐도 게거품을 물고 달달 떨면서 바다로 뛰어들 만한 사람 몇몇을 떠올린 안쉘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날조를 시작했다.
“네… 엔저 대령님, 이십 대 초반에는 풋풋했었습니다. 좋은 상관이니 제가 5년 동안이나 지금까지 붙어서 보좌관 노릇을 하고 있죠. 하하, 입술을 왜 계속 핥냐고요? 그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요. 어?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안쉘은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걸 어디까지 입 밖으로 꺼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인기는 많았습니다. 대령님, 솔직히 그 얼굴에 능력까지 잘났으니 주변에서 가만둘 리가 없잖습니까. 맥과이어 가문의 외동아들이면서 머리도 좋지, 능력도 군 최강에 단테 대통령의 신임까지 듬뿍 받아, 아!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하의원부터 평의원까지, 심지어 위원장들도 애가 달아서 제 자식하고 맞선 한 번만 봐 달라고 난리가 났다니까요. 저한테 봉투를 건네고 협박까지 하면서 다리 놔 달라는 인간들도 사방에 널렸었습니다. 그 왜 무기 업체로 유명한 체르엘의 회장도 대령님께 제 딸하고 약혼하지 않겠느냐고 은연중에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능력자 전용 무기를 만드는 고고하기 짝이 없는 체르엘의 호랑이, 본 버버치가 짠, 하고 나타나 엔저에게 추파를 던졌을 땐 솔직히 안쉘도 놀라서 나자빠질 뻔했다.
그는 자식 중 막내딸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 막내딸을 엔저에게 주겠다며 꾀어내려고 했다. 물론 그 막내딸이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아주 어린 소녀임을 엔저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전부 무시했다.
종종 엔저는 도를 넘으면서까지 끈질기게 구는 것들에겐 아주 혹독한 값을 치르게 했는데, 그 본보기가 바로 본 버버치였다. 엔저와 엔저 부대원들의 공격에 회사 주식은 반값으로 급락했고, 그가 고용한 용병들은 모두 바다 아래로 처박혔다. 그 뒤로 엔저에게 연애나 결혼을 강요하는 자리는 싹 사라졌다.
“음… 한 번도… 제대로 응답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이라서 말하는 건데, 엔저 대령님은 늘 헤리엇 님의 사진을 들고 다녔거든요.”
물론 엔저가 그 사진을 핥고 물고 빨고 별 지랄을 다 했다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았다. 일 년마다 갱신되는 사진과 자료들. 그리고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쓰레기더미들을 생각하면서 안쉘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자 뺨에 차가운 잔을 대었다.
“대령님은 고자였거든요. 어… 고자.”
술에 취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안쉘이 두 눈을 감고 몇 번이나 고자… 고자, 하고 중얼거리며 푸흐흐 웃기 시작했다.
안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헤리엇은 취한 건지 아닌지 모를 만큼 허옇게 물든 얼굴로 안쉘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말해 봐.”
머리끝까지 취한 안쉘은 헤리엇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식탁을 두드리며 웃었다.
“고자였다고요오… 푸흐, 푸흐흐. 푸하하하!!”
헤리엇의 상태가 평소보다 더 초조해 보였으나, 곧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술주정을 부리는 안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엔저에 대해서 더 말해 봐, 안쉘. 엔저는 어땠니? 분명 사랑스러웠겠지?”
‘안 사랑스러웠어요. 그 양반은 댁 앞에서만 순~한 양의 탈을 쓴답니다. 하하, 개 같은 상관이 아니고 진짜 개새끼 상관이었어요.’
안쉘이 뭐라 웅얼거리면서 테이블에 완전히 엎드리자 넋을 놓은 헤리엇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평소 늘 짓던 미소가 사라지고 여유가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은 헤리엇이 술에 취한 안쉘의 어깨를 계속 흔들었다.
“억울해…….”
헤리엇은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안쉘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 아래로 무릎을 꿇고 있던 깡패 중 가장 덩치가 큰 놈 한 명이 슬그머니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든 놈은 겁도 없이 헤리엇을 향해 휘둘렀다. 술에 취해 있으니 빈틈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칼을 휘두름과 동시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단도를 들고 있던 손목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인 것이다. 깡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어느새 일어난 헤리엇이 긴 다리로 사내의 팔뚝을 올려 차면서 뼈를 완전히 아작 냈다. 속상한 헤리엇에게 적당히 상대를 봐줄 여유 따위 없어 보였다.
역시 저 인간은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스타일이다.
“어흐흑.”
테이블 위로 엎어진 안쉘은 문득 자신의 신세가 더럽게 서러워져서 울었다. 안쉘의 술버릇 중 하나가 술에 취하면 눈물샘이 고장 난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휘두르는 헤리엇을 보며 저 발에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던 게 생각났다. 비 오는 날 먼지 털듯이 온몸을 두드렸더랬다. 앤이 치료해 줬지만 그래도 뼈가 시릴 정도로 아팠다.
* * *
으엉, 하고 울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잠에서 깬 안쉘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목도 아팠다. 안경을 찾기 위해 손을 더듬거리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경이 어디에도 없었다.
“으… 목말라.”
그는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각 방에 설치된 작은 냉장고 안에는 물병과 맥주들로 가득했다.
병째로 물을 꿀꺽꿀꺽 들이켜던 안쉘은 전날 밤의 기억이 나지 않아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미쳤지… 오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술이나 처먹고 남 연애 상담이나 해 주다니. 그런데 뭐 실수한 건 없나…….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큰일 났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망할 상관을 욕했거나, 엔저 맥과이어가 얼마나 성격 나쁜 사람인가 열변을 토했던 것 같은데.
빌어먹을!
이러다가 아군의 손에 맞아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안쉘은 겁에 질려 발발 떨었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착하고 폭력을 쓸 줄 모르는 헤리엇의 귀여운 후배는 사실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람을 쥐어 패고 다니는 개 같은 자식이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군이 제 생명을 위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안쉘이 핼쑥해진 표정으로 방문을 열었다.
노엘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안쉘은 숙취에 엉망인 모습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노엘.”
“아, 좋은 아침입니다, 중위님.”
“네. 별일 없었나요?”
노엘이 그에게 들고 있던 서류를 자연스럽게 건네며 인사했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군함은 모두 대기 완료예요. 그 한권 구역 사람 엄청 대단하던걸요?”
‘고려인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나 보군. 요즘 잠도 안 자고 철야로 일하는 것 같던데.’
“안젤라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방에…….”
“아, 이번에 식당으로 나왔습니다. 당찬 아가씨던데요.”
노엘은 안젤라가 귀여웠던 모양인지 씩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그래도 마음이 많이 쓰였는데 기운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안쉘은 서류를 넘겨 보면서 말했다.
“출전 인원은 총 몇 명입니까?”
“오만 오천 명입니다.”
안쉘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적은 수는 아니지만 백만 명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단테에 비하면 초라한 인원이었다. 군함 42척, 항공기 200기뿐으로 군함 300척에 항공기 3천 기가 넘는 단테의 전력에 발끝도 못 미쳤다.
“바깥쪽 분위기는?”
“뭐, 반반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동안 단테의 독재가 무서워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기자들이 용기를 내서 폭로전에 가담했거든요. 그리고 어제저녁 저희 쪽에서 2차 영상을 유포했습니다.”
단테의 반인륜적 행위를 알게 되었어도 바닷속의 자유롭고 강한 인어들을 노예처럼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안쉘 리가 폭로한 진실은 모두 조작되었으며 언론이 선동에 가담한다고 주장했다.
“제이든은 어디 있습니까?”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던 노엘이 이번에는 머뭇거렸다. 안쉘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눈을 찌푸렸다.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눈앞이 흐릿했다. 왠지 모르게 벌써 피곤해진 안쉘은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2-45 휴게실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인다고 두 번 정도 더 강조한 노엘은 경례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후줄근한 흰색 러닝 티셔츠 차림에 초췌한 몰골인 안쉘은 기름진 제 얼굴을 몇 번 쓰다듬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면도도 하고 씻으면서 아직도 남아 있는 술 냄새를 좀 없애고 제이든을 찾아가든 뭘 하든 바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결국 방 안에서 안경을 찾지 못한 안쉘은 매일 의식적으로 하던 2대8 머리를 하지 못했다.
안경이 있어야 완벽한 패션의 완성인데…….
안쉘은 혀를 차면서 밖으로 나와 조금 전에 노엘이 말한 제이든이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제이든.”
지하 벙커 내부는 곳곳마다 휴게실이 테마별로 있었다. 무척 쓸모없는 자잘한 것까지 신경 쓴 모양새에 넋이 나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 안쉘이 들어간 곳은 천장에 인공 하늘을 설치한 봄 소풍 테마의 휴게실이었다. 이런 소녀 같은 주제를 누가 생각해 냈는지 물어보니 놀랍게도 우락부락한 반의 의견이었다고 했다.
“제이든?”
“…….”
“대체… 당신 꼴이 이게 뭡니까?”
제이든의 눈두덩이 거멓게 푹 들어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열 살은 더 늙어 버린 것 같았다.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니겠지.
안쉘은 당황해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생기를 모두 빨린 미라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안쉘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제이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하지만 이미 우주 저편으로 떠나 버린 제이든의 영혼은 도무지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이든은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낙엽처럼 버석거리다가 주저앉았다. 화들짝 놀란 안쉘이 뒤로 세 걸음 더 물러났다.
“…헤리엇이.”
“헤리엇 님이?”
“…….”
제이든은 안쉘을 힐끔 보다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양반이 더 궁금해지게 왜 이러나.
안쉘이 끈질기게 추궁하자 결국 그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 * *
제이든은 어젯밤 안쉘과 나간 헤리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기댄 채 담배를 입에 물고 초조한 표정으로 발끝으로 바닥을 탁- 탁- 쳤다.
제이든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헤리엇은 조용하고 얌전하고, 무척 내성적이어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좋아하지 않는 소심한 아이였다. 아이는 유독 알시타만 쫓아다녔고 제이든이 친해져 보겠다고 나섰지만, 쉽지가 않았었다.
“젠장! 그 빌어먹을 꼬맹이.”
제이든이 화를 내며 펄펄 뛰었다. 그러자 그 옆에서 수첩을 든 채 일정을 확인하던 알시타가 웃음을 터트리며 볼펜 끝으로 제이든의 볼을 꾸욱 찔렀었다.
“그래,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된 애랑 싸워서 좋아?”
“…애답게 굴어 보라고 그런 거야.”
제이든은 알시타가 매일 찾아가는 인형 같은 꼬마를 떠올리며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살짝 홍조가 도는 구릿빛 얼굴에 알시타는 씩 웃으며 제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을 때 머리는 만지지 말라고 난리 치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참 온순해졌다 싶었다. 알시타의 손길을 조용히 느끼던 제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저놈이 감정을 느끼긴 하는 거냐? 인형도 아니고. 뭐든 상관없다는데, 어쩔 땐 소름 돋을 정도야.”
어린아이는 억지를 써도 된다. 감정을 표출하거나 의사 표현을 하는 가장 일차원적 방법이기 때문에 가장 어린아이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저놈은 달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녹색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니 도무지 정을 주고 싶어도 가까이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알시타는 녀석을 양아들로 삼고 싶은 눈치였지만 지금은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는 것뿐이었다.
“너랑 내 사이를 질투하나 봐.”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제이든은 심드렁했다. 그가 아는 헤리엇이라는 작은 꼬마는 절대 질투를 느끼지 못하는 놈이었다. 공감 능력도 없고 제 감정도 모르는 감정 장애 판정을 받은 아이가 질투를 어떻게 알겠나. 가장 기본적인 감정표현도 교육을 통해 배워야 하는 놈이다.
제이든은 이 광경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고, 알시타는 수첩을 들고 제 아비를 설득시킬 무언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조사했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무표정한 금발 머리의 작은 소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던 작은 꼬맹이가 지금은 훌쩍 커서 서른 살이 넘은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그동안 헤리엇이 커 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제이든은 입이 썼다.
이미 성인이 되고도 시간이 훌쩍 지난 헤리엇에게 지금 와서 다 늙은 사내가 양아들로 삼겠다고 하는 것만큼 민폐는 없겠지만, 제이든은 헤리엇에게 주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재산이나 작위도 모두 물려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변호사를 만나 유산 상속에 대해 유언장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헤리엇만 허락한다면 11구역에 있는 알시타와 함께 살기로 했던 저택을 그에게 주려던 참이다. …물론 그 망할 붉은 눈 자식하고 산다고 하면 다시 생각을 좀 해 봐야겠지만.
“쯧, 어쩌다가 그런 미친놈한테 물려선.”
대충 듣기론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되었고, 엔저 맥과이어의 끈질긴 구애로 헤리엇이 넘어갔다고 하지만 제이든은 인정하지 않았다. 안쉘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댁이 뭔데 인정하냐 마냐 지적하겠지만, 그는 현재 헤리엇에게 붙들려 강제로 술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제이든은 아직도 엔저 맥과이어 그 망할 자식이 순결한 헤리엇을 꾀어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위험한 놈이었다. 위험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헤리엇을 잡아먹지 못해서 끙끙거리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헤리엇은 귀엽다느니 사랑스럽다느니 하는 얼빠진 소리나 하고 있어서 더욱 애가 탔다.
헤리엇이 조금만 허락해도 단숨에 배를 가르고 내장부터 꾸역꾸역 집어삼킬 놈인데 어쩌다가 저리됐을까.
역시 어떻게든 헤리엇을 찾아 그의 곁에 있어 줘야 했다. 위장에서 또다시 쓴물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에 제이든은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 자신이 찾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엔저?”
“선배, 술 마셨습니까?”
기분 나쁠 만큼 정중한 목소리에 제이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느끼기에 엔저 맥과이어라는 사내는 누군가의 밑에 있을 놈이 아니었다. 위에 있는 놈을 잡아먹어야 성에 차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감히 말을 붙이는 것조차 송구스러워하는 정중한 말투를 하니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 사람의 탈을 쓰고 아양 떠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음…….”
제이든은 밖으로 나가는 입구와 이어진 로비 바로 위쪽의 복도에 있었는데 창문을 통해 아래가 모두 보였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그들을 구경하게 되었다.
헤리엇은 안쉘과 의리가 있었는지 술 취해 인사불성이 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만약 헤리엇이 정신을 놓은 안쉘을 두고 왔다면 계획이 틀어졌을 것이다. 술집에서 술 퍼마시다 대통령 후보가 뒤져서 계획이 수포가 돌아간다면 어디서 하소연도 못할 일이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발치에 널브러져 술에 취해 잠든 안쉘을 내려다보면서 눈동자를 빛냈다. 제이든은 설마 저놈이 저런 일로 안쉘을 죽이지는 않겠지라고 걱정하며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언제 다가와 끌어안았는지 엔저의 품에 쏙 들어간 헤리엇이 웅얼거렸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묘하게 엔저를 향해 애교부리는 어투인지라 제이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기억하는 헤리엇은 절대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억울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든의 귀에 헤리엇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끌어안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제이든은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스물두 살의 너는 그렇게 사랑스러웠다고 안쉘이 조잘거리는데 혀를 뽑아 버릴 뻔했어. 너무 억울하지 않니, 엔저……?”
안쉘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였음에도 헤리엇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이든은 묘한 분위기의 두 사람의 가운데에서 널브러진 안쉘을 짠하게 한 번 쳐다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선배, 질투하시는 겁니까?”
엔저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는 헤리엇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멀리서 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온몸을 떨고 감격했다.
“음…….”
헤리엇은 엔저의 어깨 위에 볼을 대고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숨을 내쉬었다.
“…선배.”
“귀여운 나의 엔저.”
헤리엇은 손을 뻗었다. 제이든이 있는 쪽을 등진 탓에 헤리엇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 평소의 무덤덤하고 곤란한 미소는 아닐 것이라고 제이든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얼굴일까 아니면 질투에 눈이 먼 얼굴일까. 어느 쪽이든 엔저 맥과이어에겐 최고의 선물이겠지.
두 사람이 진득하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본 제이든은 감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도했다.
* * *
헤리엇의 숨결이 엔저의 귓가에 닿았다.
내쉬는 숨마저 매혹적인 그의 모습에 엔저는 늘 아찔하고 어지러운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아플 정도로 발기된 성기가 헤리엇의 아랫배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마치 그곳까지 이 흉기를 처넣고 싶다는 듯이.
헤리엇의 배꼽을 성기 끝으로 꾹 누르면서 엔저는 그의 입술을 핥았다. 훅 퍼지는 알코올 향에 오히려 자신이 더 취할 것 같았다. 집어삼킬 것처럼 입맞춤을 이어 가니 헤리엇의 숨결이 가빠졌다.
집어삼키고 싶어. 하지만 누구보다 숭배하고 싶어. 더럽히고 싶어.
깨끗한 상태로 보고 싶어. 아름다운 나의 선배. 이렇게 고귀하고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엔저는 탄식을 내뱉으며 헤리엇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알코올로 예민해진 몸은 그것마저 자극으로 느껴지는지 움찔움찔 반응했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쿵쿵 뛰는 것이 들리는 듯했다.
엔저의 손길이 간질이는 것처럼 야릇하게 움직였다. 이내 허리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앞쪽으로 이동해 마치 연주하는 것처럼 헤리엇의 갈비뼈를 쓸어내렸다.
옷 위로 느껴지는 미묘한 느낌에 헤리엇은 제 아래를 내려다봤다. 엔저의 품에 안겼을 때부터 발기했지만 왠지 모르게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엔저의 손가락이 천 위에서 갈비뼈를 쓰다듬다가 상의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조금 더 거칠게 움직였다. 새하얀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헤리엇의 유두를 살살 어루만졌다.
헤리엇의 하얀 몸에서 유일하게 불그스름한 색을 띠고 있는 유두는 엔저의 손가락에 점차 딱딱해져 갔다. 통통한 유실을 손가락 두 개로 꼬집듯이 힘을 주자, 약하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선배, 좋아요? 처음에는 그냥 간지러워하시더니, 이렇게 음란해져서…….”
헤리엇의 검은색 티셔츠의 목둘레를 아래로 끌어 내려 드러난 붉은색 유두에 입을 맞췄다.
“으음…….”
톡 튀어나온 것이 사랑스럽다는 듯 가볍게 쪽, 쪽 입을 맞추다가 혀를 내밀어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할짝거리며 위아래로 동그랗게 혀를 기니 헤리엇의 입술에서 신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 부근에 붉은 꽃이 만개하는 것을 본 엔저는 통통하게 부어오른 유실까지 모두 한입에 넣어 쪽, 하고 빨았다.
쉴 새 없이 움직여 대는 혀에 헤리엇의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따듯한 감각이 느껴지고 등허리가 너무나도 간지러워서 힘들었다.
“아… 아앗.”
헤리엇의 붉은 입술 사이로, 그보다 더 색이 진한 혀가 튀어나왔다.
“아… 아, 아파.”
얼마나 강하게 빨아 대는지 유두가 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붉게 물들어 봉긋하게 솟았다. 잡아 늘이고 있었던 목둘레를 놔주니 티셔츠가 단단해진 유두에 걸쳐졌다. 그 모습이 헤리엇을 더욱 음란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기에 엔저는 침을 삼켰다.
빠각-.
그때였다. 헤리엇의 귓불을 어그러트리듯 입에 문 엔저의 발밑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은. 흥분해서 헐떡이는 엔저와 헤리엇의 시선이 잠시 아래를 향했다.
“…….”
“…….”
“흑…….”
거기엔 술에 취해 널브러진 안쉘이 잠결에 서럽게 울고 있었다. 심지어 엔저가 밟은 것은 안쉘의 안경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발밑에 누군가가 자고 있다고 그만둘 정도로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오밤중에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서 이런 짓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엔저는 헤리엇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가볍지 않을 무게일 텐데도 헤리엇을 번쩍 들어 올려 계단에 걸터앉게 했다. 자신의 몸이 옮겨지는 동안 헤리엇은 힘줄이 돋은 엔저의 팔뚝을 보고 황홀한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선배, 빨아 주세요.”
앉아 있는 헤리엇의 뺨에 엔저의 성난 성기가 비벼졌다. 뺨을 지나 붉은 입술에 발기한 성기를 꾹꾹 누르자 헤리엇이 고개를 들어 엔저를 올려다봤다. 더 거칠게 굴고 싶은 본능과 미친 듯이 싸우는 엔저의 얼굴이 보였다.
헤리엇은 손을 들어 엔저의 탄탄한 복근을 어루만졌다. 붕대를 하고 있어도 단단한 근육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헤리엇은 손바닥으로 엔저의 복부를 마음껏 만졌다. 곧이어 헤리엇의 붉은 혀가 살짝 나와 선단을 음란하게 핥았다.
귀엽기도 하지.
헤리엇은 액을 질질 흘리는 성기의 끝에 혀를 할짝거리며 입술을 벌렸다.
엔저의 몸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주인을 닮아 나긋나긋하고 조심스러웠다. 헤리엇이 손을 붕대 사이에 밀어 넣고 맨살을 쓸자 엔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입 안에 들어간 성기에서 울컥, 하고 맑고 끈적거리는 액이 터졌다.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점액질이 헤리엇의 턱을 지나 뚝뚝 길게 흔적을 남기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술에 취했지만 약간의 이성이 남아 있던 헤리엇이 웅얼거렸다. 하지만 엔저의 성기는 헤리엇이 흉악한 기운을 한 번 잠재워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광포하게 일어서서 주장하고 있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턱을 잡고 허리를 튕겨 제 성기를 그의 목구멍 깊이 욱여넣었다. 욕지기를 느꼈는지 헤리엇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선배, 선배… 아름다워요.”
헤리엇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엔저가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내 혓바닥을 짓누른 귀두에서 정액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하얀 정액이 헤리엇의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붉은 입술 안쪽으로 탁한 정액이 가득 고이고, 헤리엇은 입술에 묻은 끈적끈적한 액을 혀로 핥다가 꿀꺽 삼켰다. 맛있지는 않지만, 맛이 없지도 않은 게 아마 그가 사랑하는 후배의 것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엔저는 제 아래에서 저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헤리엇의 모습을 눈으로 핥듯이 살폈다.
헤리엇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을 발아래 둘 수도 있었다. 엔저의 무력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만큼 강하고 고고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하얀 신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헤리엇의 귓가와 뺨, 목덜미를 지나 어깨까지 전부 붉게 달아올랐다. 유두와 배꼽, 그리고 허벅지 안쪽 할 것 없이 울긋불긋한 흔적에 엔저는 현기증이 일만큼 행복했다. 새하얀 피부 때문에 자신이 피워 낸 꽃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하아…….”
헤리엇의 상의를 홀딱 벗겨 버린 엔저는 홀린 듯이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헤리엇을 눕혔다. 눈앞의 잘 뻗은 다리 사이로 들어간 엔저는 헤리엇의 무릎 뒤로 손을 넣어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활짝 벌어진 헤리엇의 다리 사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목과 어깨만으로 전신을 지탱하게 된 헤리엇이 드물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건 힘겨워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서 나온 소리였다.
헤리엇의 구멍은 벌써 젖어 있었다. 물기에 젖은 반짝거림이 헤리엇의 구멍을 보다 음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젖은 겁니까?”
엔저는 별다른 저항 없이 구멍에 쏙 들어가는 검지와 중지를 보며 속삭였다. 헤리엇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헐떡였다. 엔저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헤리엇의 내부를 손끝으로 헤집고 돌리고 쑤셔 넣었다.
딱히 윤활제도 쓰지 않았는데 이미 헤리엇의 그곳은 꿀을 흘리며 손가락을 질척하게 만들었다. 손목을 타고 팔뚝 끝까지 흐른 애액이 뚝뚝 떨어지며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기대하고 계셨던 거죠, 선배? 지금 여길 이렇게 돌리면… 젠장, 좋아하잖아요.”
엔저는 헐떡이면서도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헤리엇이 날카로운 비명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엔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쾌감과 고통에 허덕였다.
이게 아픈 건가? 아픈데, 지금까지 느꼈던 어떤 고통보다도 더 날카롭고, 주체할 수 없는 쾌감에 붕 뜬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 아, 엔저, 잠깐… 배가, 이상해.”
“어디가 이상한데요?”
“윽… 눌려, 안쪽이… 아.”
손톱으로 구멍 안의 예민한 곳을 긁던 엔저는 헤리엇의 반응에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살피며 손가락을 쑤욱 꺼냈다. 그리고 뻐끔거리는 그의 비문에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핥았다.
단단하면서도, 물컹하고 축축한 것이 아래를 사정없이 들쑤셨다. 구멍이 내뿜는 액을 모두 집어삼킬 것처럼 흡입하던 엔저가 헤리엇의 허벅지를 팔꿈치로 강하게 고정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기까지, 들어갈 거예요, 선배. 아프고, 이상하다고 해도 꾹 눌러서 엉망으로 만들어 줄게요. 아… 헤리엇.”
엔저는 헤리엇의 이름을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삭였다. 그리고 좁은 헤리엇의 구멍을 가르고 거대한 귀두가 단숨에 진입을 시작했다. 천천히 해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성기를 반쯤 욱여넣은 엔저는 미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흐윽… 윽… 아, 배가 이상해… 엔저.”
안쪽이 엉망으로 변하는 느낌에 헤리엇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아직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힘이 잔뜩 들어간 구멍은 엔저의 성기가 더는 진입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애썼다.
“!!!”
헤리엇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곧이어 인상을 찌푸리고, 격정적이고 정열적인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온화한 표정은 사라지고 붉은 얼굴 위로 비참할 정도의 쾌감이 덮어지고 있었다.
“하, 윽… 아, 엔저…….”
깊숙이, 더 깊은 안쪽까지 제 존재를 각인시킬 것처럼 엔저의 허리가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아직 반밖에 들어가지 못한 성기를 슬슬 움직이며 헤리엇의 탄탄한 허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헤리엇이 잠시 방심한 사이 단번에 성기를 모두 집어넣은 엔저의 입술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삽입에 헤리엇은 아파했다.
엔저는 그의 안쪽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헤리엇이 숨 고를 시간도 주지 않고 허리를 뒤로 뺐다.
내장이 아래로 쏠리는 느낌에 헤리엇이 숨을 들이켠 순간,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엔저의 성기가 깊게 처박혔다.
“흐윽!”
헤리엇이 평소 내지 않았던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아, 아아… 엔저, 괴로워. 배가, 아파. 이게… 뭐야? 흐윽… 아.”
“좋은 거예요, 선배. 좋아서 지금 싸고 있잖아요. 선배, 보여요?”
언제 사정했는지 엔저의 손이 헤리엇의 정액으로 젖어 있었다. 헤리엇은 멍하니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기 끝에서 정액이 주륵, 하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음란한 걸까?
아니다.
헤리엇은 단언할 수 있었다. 몸속 깊은 곳을 정복하고 파헤치고, 몰아치는 이가 엔저 맥과이어라서 그런 것이다.
“아아!! 수, 숨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헤리엇의 무릎을 얼굴에까지 내리누를 작정으로 엔저의 온몸이 부딪쳐 왔다. 엔저의 성기와 마찰하는 안쪽이 뜨겁고, 홧홧하게 아팠다. 고통과 쾌감이 섞이는 감각에 헤리엇은 무기력하게 그의 거친 행위를 받아들여야 했다.
헤리엇의 엉덩이 사이로 엔저의 거대한 성기가 나왔다 들어오는 움직임이 매우 빠르게 보였다. 제 아래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붉게 물든 선배의 모습을 감상하듯 입술을 핥았다.
엔저의 모습은 마치 어떻게 하면 이걸 더 맛있게 발라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육식동물 같기도 했다.
“엔저… 아, 이럴 수, 가. 아… 배가 너무 아파. 흐윽 엔저. 아프다니까…….”
“아픈 게 아니야, 헉, 좋, 은 거야. 젠장.”
고통에 둔감한 헤리엇이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모습에 엔저의 움직임이 더욱 흉포하게 변했다.
“괜찮아요, 선배. 아프지 않아, 좋은 거야. 좋은 거라니까, 헤리엇. 지금 좋아서 질질 싸고 있잖아. 손도 대지 않았는데.”
흥분한 나머지 평소 말투가 튀어나왔지만, 헤리엇도 엔저도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못했다. 나름 상냥하게 속삭이는 말과 달리 엔저의 허릿짓은 이제 헤리엇의 내부를 부술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찔꺽거리는 소리는 살이 부딪치는 소리에 감춰졌다. 몸을 절반으로 구기듯 헤리엇을 몰아붙인 엔저가 이번엔 그의 몸을 빙글 돌렸다. 개처럼 흘레붙는 자세였다.
“아……!”
한 손으로 헤리엇의 등과 엉덩이를 쓰다듬던 엔저는 성기가 구멍에 들락날락하는 적나라한 모습을 감상하듯 구경했다. 좁은 구멍이 거대한 성기를 욕심 부리듯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붉은색 성기가 길게 빠져나올 땐 질척한 액이 가득 묻어서 반짝였다.
볼깃살을 잡고, 성기를 욱여넣은 구멍을 좀 더 잘 보이게 벌리니, 오히려 구멍이 우물거리면서 안쪽을 강하게 조였다.
“헤리엇…….”
엔저는 헤리엇의 이름을 귓가에 속삭이며 강하게 안으로 처박았다. 그리고 경련하는 내벽 깊은 곳으로 정액을 뿜어냈다. 제 주인을 닮아 분홍빛일 것이 분명한 내장이 하얀 정액으로 혼탁하게 더럽혀져 있겠지.
참을 수가 없어.
엔저가 허리를 천천히 뒤로 물려 구멍에서 성기를 꺼냈다. 거대한 성기로 쉴 새 없이 공략당한 구멍은 벌어져서 닫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 꽤 깊게 정액을 때려 박았는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건 없었다.
“…하아, 하아.”
헤리엇은 체력적으로 힘겨워하는 중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와 등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엔저는 엎드려 있는 헤리엇의 한쪽 다리를 붙잡고 위로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안쪽으로 다시 한번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윽!”
사정 직후 예민해진 내벽이 잘게 경련했다.
“아읏… 아… 엔저.”
“쉿… 기분 좋을 거예요, 선배. 이번엔 천천히 할게요.”
엔저가 헤리엇의 귓가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하지만 헤리엇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욕심 많은 성기는 상냥한 말투와 다르게 매우 거칠었다.
헤리엇은 속절없이 엔저의 목에 팔을 두르고 흐느끼며 엔저의 움직임을 버텨 냈다. 앓는 듯이 신음을 흘리던 그는 혀를 살짝 내밀어 밭은 숨을 내쉬었다. 내장이 위로 올라가는 느낌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헤리엇의 한쪽 다리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난 엔저는 움직임의 반동을 이용해 성기를 박아 댔다. 헤리엇의 발가락 끝이 바닥에 겨우 닿을락 말락 했다. 자신이 지탱하는 무게만큼 엔저의 성기가 더욱 깊게 들어왔다.
헤리엇은 이게 바로 죽을 맛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음…….”
“…….”
“…….”
언제 왔는지 안쉘이 두 사람의 발밑에서 자고 있었다. 아마 추워서 온기를 찾다가 여기까지 기어 온 듯했다. 이쯤에서 일반인이라면 산통 다 깼다는 듯 떨어져야 정상이겠지만, 엔저는 헤리엇의 허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잡고 있던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더욱 거칠게 허릿짓했다.
안쪽 깊이 싸질렀던 정액이 성기의 무자비한 삽입에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안쉘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으음…….”
안쉘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지만, 엔저와 헤리엇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제이든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안쉘이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두 분이 제 위에서……?”
“…….”
그렇게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할 때까지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