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깨달음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헤리엇의 곁에 루비 같은 눈동자를 가진 후배가 있었다.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면서도 자신에게 차근차근 다가오는 후배를 보며 헤리엇은 ‘귀엽다’라는 감정에 앞서, ‘사랑스럽다’라는 감정을 알았다.
바다 위를 점령했던 군함 중 한 대가 거대한 소리를 내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헤리엇의 시선은 오로지 엔저만을 향했다.
“언제부터?”
헤리엇은 쓰러지는 엔저의 어깨를 부축하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이상했다.
헤리엇은 도저히 이 감정을 정의할 수가 없었다. 피 흘리며 눈을 감은 채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모습을 한 그는 그대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언제부터 알았던 거니, 엔저.”
알았다면, 엔저는 왜 화를 내지 않을까?
왜 세뇌를 풀려고 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뜨겁고 정열적인 시선으로 헤리엇을 바라보던 엔저 맥과이어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사랑에 빠진 사내 그 자체였었다. 정신지배로 인해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었다.
“헤리엇 님!”
그때,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군함들의 잔재를 헤치고 검은 군함이 헤리엇의 앞에 나타났다. 갑판 위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쉘은 피를 흘리고 있는 엔저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헤리엇을 확인하며 의료팀을 다급하게 불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의료반이 올 것이라고 떠드는 안쉘의 목소리가 헤리엇의 귀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엔저 맥과이어가 다쳤다.
그의 귀여운 후배가, 사랑스러운 작은 고양이가 다쳤다.
검은 군함에서 내려준 바스켓으로 엔저를 안고 들어간 헤리엇은 인어 모습 그대로 끌어 올려졌다. 갑판 위로 올라오고 안쉘이 다가오고 나서야 헤리엇은 껴안고 있던 엔저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상처를 살폈다.
어찌 보면 오싹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안쉘은 헤리엇이 지금 대단히 혼란스러워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헤리엇 님, 눈동자 색이…….”
눈동자 색이 푸른색이었다가 연한 초록빛이 되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자신의 새하얀 비늘이 말라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헤리엇은 피가 흐르는 엔저의 복부를 손으로 압박하며 안쉘을 올려다봤다.
“엔저의 피가 멈추지 않아, 안쉘.”
“…복부가 뚫렸으니까요.”
“이상해. 어째서… 명령을 들으면 모든 게 잘됐을 텐데. 왜 엔저가 다친 걸까.”
헤리엇은 멍하니 엔저의 피가 묻은 양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안쉘이 얼른 군복 상의를 벗어 엔저의 상처에 대고 강하게 압박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등 쪽의 상처는 심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헤리엇이 무의식적으로 힘을 뺀 듯했다.
“전쟁이니까요.”
“…….”
“전쟁이니까요, 헤리엇 님. 지금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헤리엇은 충분히 스스로 세뇌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 실험으로 사라졌다고 한들 원래 가졌던 능력이 정신지배인데 자신에게 걸린 세뇌 하나 풀지 못했을까.
하지만 헤리엇은 세뇌를 풀지 않았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헤리엇은 군인이었고, 명령을 듣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엔저 맥과이어도 마찬가지였다.
* * *
엔저는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을 꾸었다.
그의 어머니 레이첼 맥과이어는 군 장교로 엄격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불 계열 능력자답게 화끈한 성격을 가졌다. 그와 반대로 엔저 맥과이어의 아버지 한슨 맥과이어는 근엄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세간의 소문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한슨은 매우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가문과 가문에 의한 정략으로 맺어졌고,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엔저를 임신했다.
자식을 하나 낳았으니 더는 후사를 볼 생각은 없다며 거대한 저택에서 부부가 각방을 쓰게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엔저의 나이 다섯 살에 레이첼은 아들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심리검사 결과 엔저 맥과이어는 타인과 감정을 교류할 수 없는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사이코패스와는 다르지만,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서워해 늘 겁에 질려 있는 소심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아이는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모두가 외계인으로 보인다며 매일같이 엉엉 울었다.
레이첼과 한슨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호전되기는커녕 엔저의 광증은 더 심해졌다. 아이는 이제 세상 사람 모두가 괴물로 보인다며 무섭다고 벌벌 떨었다.
혹시 또래 아이들과 지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레이첼은 엔저를 조금 이른 나이에 아카데미 기숙사로 보냈다.
기숙사에 들어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 외계 행성에 혼자 떨어지게 된 것 같은 두려움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어린 엔저는 느닷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겁도 없이 교내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엔저의 귀에 누군가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 봐.’
엔저는 홀린 듯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넓은 방 안에는 거대한 수조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곳에는 상처 입은 하얀 인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인어는 작게 미소를 띤 채 엔저에게 속삭였다.
‘나는 궁금했어. 그러니까, 나를 사랑해 봐.’
어린 엔저 맥과이어는 순간 머릿속을 강타하는 어떤 느낌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인어와 눈을 마주했다. 갑자기 눈앞에 있는 상처 입은 하얀 인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졌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리고 그를 보면 볼수록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감정이 솟아났다. 다른 사람이 괴물로 보인다며 울던 소심한 엔저 맥과이어가 아닌, 다른 감정에 조작당한 엔저가 서서히 태어났다.
생애 처음으로 타인을 생각하게 되는 감정을 가진 기분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상했다.
‘…아.’
엔저는 그날 코피를 터뜨렸다. 어린 그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격렬한 파도 같은 감각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생소한 자신의 감정에 경계하는 마음으로 헤리엇의 주변을 서성이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게 바로 다른 이를 사랑하는 감정이구나.
부모에게도, 어떤 누구에게도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그로 인하여 깨닫게 되었다. 만들어진 감정임에도.
나는 그를 사랑해.
그 사실을 결국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건, 사랑이야. 내 사랑이야… 하하… 하, 하하하!!! 이건 내 감정이야!!!’
엔저 맥과이어는 헤리엇의 꿈을 꾸고 몽정을 한 날, 속옷을 잔뜩 적신 정액을 확인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날카롭고 히스테릭했던 웃음은 점차 황홀한 그것으로 변해 갔다.
헤리엇 알스터를 향한 광적인 스토킹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버린 컵, 칫솔 등 그가 쓰던 모든 것을 모으기 시작한 엔저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감정에 감동하여 울먹였다.
이곳은 외계 행성이 아니다. 다른 이가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엔저는 헤리엇 알스터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임을 알았다. 조작된 사랑으로 감정을 깨달은 엔저와 사랑이 궁금해 정신을 조작한 헤리엇. 그들은 닮은 듯했지만, 또 완벽하게 달랐다.
지금까지도 엔저 맥과이어는 어린 일곱 살의 그 모습 그대로 수조 앞에 서 있는 채였다.
엔저는 서서히 눈을 떴다. 회색으로 바랜 낡은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 감히 쳐다보는 것도 황송했던, 고귀한 그의 신이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신 역시 나로 인해 사랑을 깨달아야 해.
당신을 하늘 위에서 끌어내려 안고 싶었다. 엔저 맥과이어는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선배.”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엔저의 손을 두 손으로 절박하게 붙잡고 눈을 감았다.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심장에 박혀 있던 얼음 조각이 녹아내리고 감정을 깨닫기 시작한 헤리엇은 엔저를 향한 이 감정에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어 눈물만 흘렸다.
“엔저… 나는… 이런 거였다면, 차라리 배우지 않는 편이 좋았어.”
* * *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늙은 의사는 비밀기지를 스윽 훑어보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는 엔저 맥과이어가 어렸을 때부터 담당해 온 주치의였다.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은퇴했지만, 안쉘은 당장 믿을 수 있는 이가 그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복부가 뚫려 기절한 엔저를 보고 코웃음을 치더니 가방에서 수술 도구를 꺼내 들었다. 모두 멸균 소독되어 가방에 가지런히 진공포장된 걸 보니, 이미 이런 사태를 예감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헤리엇은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엔저의 곁을 지켰다.
그는 마치 물가에 혼자 내쳐진 어린아이처럼 초조해 보였다. 헤리엇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안쉘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헤리엇은 자신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닫지 못한 모양인지 몇 번이나 엔저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헤리엇의 눈동자는 연한 초록빛을 되찾았다가 다시 하얗게 바래기를 반복했다.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인어 모습일 때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안쉘은 헤리엇이 원래의 제 눈동자 색을 되찾는 순간,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늙은 의사는 안쉘을 흘끔 보더니 안경을 벗어 두꺼운 안경알을 옷으로 쓱쓱 문지르며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
이전에 TV 연설에서 했던 헛소리를 본 모양이다. 혀를 콱 깨물고 싶어질 정도로 쪽팔린 그때의 기억이 생각나 말문이 턱 막혔다.
“거 좋은 소리군. 내가 어릴 땐 능력자들도 일반인들처럼 기업에 취직하고, 인어들은 종종 해안가까지 나와 노래를 불러 주었으니까. 전쟁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말이야.”
단테 막심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의 툴툴거림은 어딘가 밉살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했다. 안쉘은 자상하고 온화한 인상의 단테와는 정반대인 의사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단테의 미소 속는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지만, 의사의 얼굴에서는 사심 없는 솔직함이 보였다.
“지금의 아이들은 전쟁이 없는 시대를 몰라. 태어날 때부터 전쟁이었으니까. 덕분에 인어들에 대한 증오가 우리 세대와는 다르게 단단히 뿌리 박혀 있지. 세뇌당한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네.”
안쉘은 조용히 의사의 말에 경청했다. 안쉘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전쟁이 터졌고, 그 이후능력자들에게는 군 말고는 다른 길은 없었다.
군에 소속되지 않은 능력자들은 뚜렷한 사유가 없으면 대부분 강제로 징집되거나 수배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가질 수 없었다. 안쉘도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군에서 개같이 굴러야 했다.
늙은 의사가 말하는 평범한 직장을 가지거나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에 인어를 본 적이 있어. 해안가에 놀러 나온 예쁜 인어였는데… 이름이 무슨 하얀 용암인가 그랬지. 그는 경계하는 어린 나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어.”
늙은 의사의 눈동자는 이미 옛 추억에 푹 빠져 있었고, 그의 자글자글한 눈가는 촉촉하게 변했다. 그때의 평화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그가 기억하는 그날의 장면은 반짝이는 푸른 바다, 해안가에 나와 푸른색 머리를 늘어트리고 큰 바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아름다운 인어였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의사가 가방을 챙겨 들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공약 잊지 마. 내 마누라도 댁 뽑는다고 했으니까.”
의사는 툴툴거리면서 직접 자신의 눈에 안대를 둘렀다. 이곳은 세계적 범죄자가 된 엔저 맥과이어의 비밀기지인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더라도 보안을 철저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의사의 말에 안쉘은 잠시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안대를 쓰고 다른 부대원들에게 부축받아 나가는 의사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반드시 전쟁을 종전시키겠습니다!”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아나.”
안쉘의 외침에 의사는 코웃음을 한번 쳐 주고 비밀기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어딘지 다른 만족스러워하는 어투로 들렸다. 그의 주름진 입가가 활짝 펴진 걸 확인한 안쉘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서 있던 안쉘은 엔저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엔저의 방문 앞에 멀뚱히 선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그 인영의 주인공은 제이든이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거대한 풍채와 주름진 얼굴이 매력적인 그가 걸어오는 안쉘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 호랑이처럼 번뜩이던 노란색 눈동자가 지금은 복잡한 빛을 담고 답을 구하듯이 안쉘을 쳐다봤다.
그리고 끼고 있던 팔짱을 빼며 물었다.
“저 둘 대체 무슨 사이야?”
“…….”
그는 정말 혼란스러워 보였다.
“내가 비록 헤리엇을 어릴 때 몇 번 본 게 다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 우는 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아.”
“헤리엇 님이 울고 계신다고요?”
그건 안쉘도 생각지 못한 장면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제이든이 자리를 옮겨 방 안을 살필 수 있게 해 주었다. 방 안에선 엔저 맥과이어의 손을 잡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헤리엇의 모습이 보였다.
방문 밖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엔저는 배에 구멍이 뚫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침대에 꼼짝없이 묶여 헤리엇을 쳐다보고 있었다.
헤리엇은 엔저 맥과이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추슬러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다치고 아픈 건 그인데 왜 자신의 가슴이 이렇게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아픈지, 그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내가 아픈지 모르겠어, 엔저. 나는 네가 생각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아… 다시 가슴이 아파. 왜 이런 거니, 엔저?”
마치 엔저만이 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헤리엇은 울면서 물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헤리엇의 얼굴을 엔저 맥과이어는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안쉘은 틀림없이 엔저가 헤리엇의 눈물을 모두 혀로 핥아 집어삼키지 못해 아까워하는 중이라고 확신했다.
“모르겠어. 이 감정을 알려 줘, 엔저.”
엔저의 아름다운 손가락이 헤리엇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헤리엇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안쉘은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제이든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말려야 했다.
“아니, 저게 지금 무슨 수작질이야!?”
“제이든 잠깐, 잠깐만요!”
이미 생으로 두 사람이 뜨거운 시간을 갖는 걸 겪어 본 안쉘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필사적으로 제이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헤리엇을 양아들로 삼지는 않겠다고 해 놓고 자식을 꾀어내는 양아치의 멱살을 당장 잡아채려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선배, 저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사랑이라고?”
“네.”
알시타 막심이, 그리고 지금의 제이든 올던이 죽음마저도 불사하게 만드는 그 원초적인 감정을 엔저 맥과이어는 너무 쉽게 풀어헤쳤다. 헤리엇이 평생을 궁금해하던 것의 답이 엔저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래요, 저를.”
엔저의 손바닥이 헤리엇의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렇구나.”
헤리엇은 새삼스러운 눈동자로 엔저를 응시했다. 하얀 눈동자에 서서히 색이 차올랐다. 그리고 연한 초록빛으로 물든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헤리엇의 사랑스러운 후배는 무척 똑똑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착하고 순수한 아이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무조건 옳았다.
“사랑이구나… 엔저,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엔저는 포만감이 가득한 얼굴로 헤리엇의 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쓰다듬는 곳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생겼다. 아니, 헤리엇의 얼굴에 점차 색이 입혀지고 있었다. 그가 쓰다듬는 볼이, 눈가가, 귀가 점차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눈동자 색은 더욱더 진해졌다. 그리고 세뇌로 인해 빼앗겼던 헤리엇의 눈동자가 푸르른 초록빛을 완전히 되찾았다.
아름다운 초록빛 눈동자를 더 자세히 감상하기 위해 엔저가 손을 들어 헤리엇의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사락대며 넘어가는 머리카락 사이로 완벽하게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헤리엇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름다운 에메랄드를 박아 놓은 듯한 초록빛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단테 막심이 헤리엇에게 걸어 둔 세뇌가 완벽하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자, 이제.”
그 그림 같은 모습에 넋을 빼놓고 있던 안쉘과 제이든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고려인은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지만 눈동자만큼은 흉흉한 채로 웃고 있었다.
“반격해 볼까요? 약점도 사라졌겠다.”
* * *
헤리엇은 제 어깨를 감싸 안고 우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엔저는 선배를 빼앗긴 것이 불만인지 눈살을 잔뜩 찌푸렸지만, 그의 행동을 말리진 않았다. 그는 요즘 헤리엇을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사내였다.
엔저가 깨어나기 전, 헤리엇이 연두부를 으깨 먹으며 끼니를 때우는 것을 목격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본 것 같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온갖 산해진미까지 대령했었다.
물론 헤리엇이 먹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기름진 연어와 맵고 짜고 달 것 같은 바비큐가 그랬다.
그러니 헤리엇은 잘 먹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새삼스럽지만 이제까지 그렇게만 먹고 잘도 힘을 썼다고 안쉘은 남몰래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지금 제이든은 헤리엇의 어깨를 감싸 안고 곁에서 보기에 추할 정도로 엉엉 울고 있었다. 중년 사내가 눈물 콧물 빼는 장면이 그렇게 보기 좋은 것은 아닌데도 누구 한 명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자유를 되찾는 순간 누구보다 격렬하고 구슬프게 오열한 건 당사자인 헤리엇도 아니고 이제 그의 연인이 된 엔저도 아닌 바로 제이든이었다. 세뇌가 풀렸다고 전하는 순간 제이든은 잘됐다고 소리치면서 헤리엇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때문에 멋들어지게 폼을 잡고 있던 고려인이 씩씩대며 노트북을 닫았다.
헤리엇은 이 정도로 연배가 있는 성인이 이토록 추하게 질질 짜는 건 처음 봤다. 그건 엔저도 마찬가지였는지 제 선배의 손을 잡고 있음에도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제이든은 누가 봐도 막 사귀기 시작한 풋풋한 연인의 방해꾼이었다.
제이든은 돌아온 헤리엇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물만 계속 줄줄 흘렸다.
“그래, 이런 색이었지. 이런 색이었어. 으흐흐흑.”
헤리엇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제이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알시타를 사랑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이를 잃은 제이든이 실의에 빠져 헤리엇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건 제이든의 탓이 아니었다. 헤리엇을 양아들로 들이겠다고 결정한 건 알시타였으므로, 제이든에게 책임은 없었다.
“내가, 머저리같이… 너를 데려왔더라면… 20년 전부터 질리도록 봤을 텐데!”
제이든은 아름다운 녹음이 진 헤리엇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날카로운 늑대 같던 그의 눈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코를 훌쩍이는 꼴이 TV 속에서 보았던 능글맞고 호전적인 정치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보이지도 않는 기백으로 싸운다는 정치계에서 노련하게 받아치던 제이든이 이렇게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꼴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 까무러칠 것이 분명했다.
안쉘은 짜게 식은 얼굴로 제이든을 흘겨봤다.
“양아들로 삼을 생각은 없다면서요.”
제이든은 손수건에 코를 풀면서 눈치도 없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안쉘을 흘겨봤다.
“없어. 그럴 자격 따윈 없으니까.”
그가 다시 헤리엇의 어깨를 감싸며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제이든이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헤리엇이 조금 더 컸기에 어색한 자세가 연출되었다.
헤리엇은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느끼고 곤란한 듯 웃으며 제 옆에 있는 엔저와 눈을 마주쳤다.
“이상해.”
헤리엇은 제이든에게 끌어안긴 채 엔저에게 말했다. 엔저는 아직도 헤리엇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뭐가 이상하십니까?”
헤리엇은 속삭이는 엔저의 입술이 지독하게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엔저는 처음부터 예쁘고 귀여웠다. 자신은 착하고 순한 제 후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리엇은 엔저의 루비를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제이든은 조금 달랐다. 제이든의 행동 하나하나에 피가 격정적으로 끓어오르지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애틋하지도 않았다. 그저 심장 언저리에서부터 묘하고 이상한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뿐이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고 어정쩡한, 뿌리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래도 잔잔하게 치는 파도처럼 헤리엇을 자극하기는 했다. 헤리엇에게 제이든은 늘 알시타의 곁에서 꼬마라고 놀리던 이상한 어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그는 하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제이든의 등에 손을 올릴까 말까 머뭇거렸다. 그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헤리엇은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전혀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행동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제이든의 넓은 등을 쓰다듬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움찔거리기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헤리엇은 최근 계속 자신에게 이상한 일만 반복되어 혼란스러웠다.
“기분이…….”
제이든이 잘됐다고 소리치고 기뻐하면서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헤리엇은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지만, 곧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웃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이상해. 웃을 수가 없어.”
결국 헤리엇은 제이든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알시타 막심을 떠올렸다.
예전에 그는 헤리엇에게 따듯한 코코아를 타 주고, 맛있어하는 헤리엇의 얼굴을 보면서 기쁘게 웃다가도 종종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었다. 헤리엇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알시타는 사랑해서라고 말했었다.
또한 알시타는 헤리엇을 입양해 그에게 부모의 사랑을 알려 주고, 제이든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그는 헤리엇에게 여러 가지 사랑을 알려 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사랑도 알려 줄 수 없었다.
“알시타가 죽었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슬프지도 않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알시타나 제이든이 서운해하고 슬퍼하겠다고 여기겠지만 헤리엇은 숨기지 않았다. 그에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제이든은 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들었다. 멋지게 주름진 눈가가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알시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알시타는 헤리엇에게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제이든은 웃는 얼굴이 무척 예쁘지만, 우는 얼굴도 상당히 볼 만하다고 말한 적 있었다.
그는 그 당시에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예쁘거나 귀여운 얼굴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
“…….”
“너는 알시타의 죽음에 무덤덤했던 게 아니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구하기 위해 내 목숨을 걸 수 있는 거다.”
“…….”
“네가. 헤리엇 알스터인 이상.”
제이든은 알시타가 그리워서 죽을 것 같은 목마른 표정이었다.
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한때 앤은 인간을 증오했다. 그를 아는 육지의 사람들이 놀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을 미워했다. 미치도록 분노에 휩싸여 인간을 전부 죽이고 싶었다.
평화와 노래를 사랑하는 자신의 종족들은 싸움과 다툼을 싫어했다. 그런데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인간이 바닷속에서 조용히 살던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은 인어들이 소중하게 지켜 오던 아름답고 고요한 바다를 더럽혔다. 그런 인간들이 앤은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그의 눈앞에서 손쓸 틈도 없이 가족이나 다름없던 동족들이 죽어 나갔다. 동쪽 바다 인어들의 시체가 북쪽 바다까지 흘러 들어올 정도였다. 동쪽 바다로 놀러 갔던 돌고래들마저 영원히 북쪽 바다로 돌아오지 못했다.
인어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지 못하고 죽어 가는 바다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피비린내로 가득한 바다는 이제 그들이 사랑하던 아름다운 바다가 아니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그들의 터전이 잔인하게 짓밟혔다.
하지만 앤은 눈앞에 있는 인간을 차마 죽이지 못했다. 온몸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살 가망이 없어 보이는 가련한 인간을 말이다.
그 인간은 인어의 터전에 갑자기 쳐들어온 거대한 함선에 타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배는 가라앉고 있었고 인어들은 배 안에 있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무수히 많은 미사일이 쏟아졌고, 결국 배는 침몰하고 말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인간은 전신에 화상을 입고, 앤의 치료에도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앤의 능력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그는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만큼 심각한 상태였었다.
겨우 살아남은 인간이 처음 눈을 뜬 순간 본 광경은 증오와 공포로 가득 찬 인어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인간의 공격에 혼란스러워하며 분노하고 있었다.
격분한 몇몇 인어는 눈앞의 인간을 찢어 죽이고, 바다 아래에 수장시켜 버리자고 소리쳤다. 그를 본보기로 죽은 동족의 넋을 기리자며 끝내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앤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소리치던 다른 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분노했지만, 전신에 화상을 입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인간에게 손댈 수 없었다. 인간이 너무나 구슬프게 울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화상을 입은 인간은 눈을 뜨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심각한 화상을 입은 피부에 눈물은 독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그는 계속해서 울었다.
앤이 물었다.
“왜 울고 있나요?”
지금 울고 싶은 쪽은 인간인 그가 아니라, 예기치 못하게 가족을 잃은 인어들 쪽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 미친 듯이 울었다.
“흐흑, 흐흑, 흑흑.”
인간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눈에 보였다. 앤은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짓무른 피부 위로 지나는 것을 보았다.
상처가 아파서 우는 것일까.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내가. 내 욕심으로…….”
그는 바다를 억지로 횡단한 것을 미치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안일한 욕심이 결국 인어와 인간의 전쟁에 시발점이 된 것을 두고두고 곱씹었다. 계속해서 미안하다며 울었다.
“저는 평화위원장입니다. 이름은 알시타 막심, 당신들을 지옥으로 이끈 자의 아들입니다.”
알시타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동자는 인어들의 것과 닮아 있었다. 푸른 바다를 가득 담은 눈동자 속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알시타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계속해서 사과했다.
그대가 사과한다고 죽은 인어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앤은 차마 그 모진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알시타는 절박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모든 인간이 인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이… 전쟁을 바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소리도 그대들에게 위선적으로 들린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알시타는 죽을힘을 다해 팔을 움직여 품속에서 펜을 꺼냈다. 하지만 글을 쓸 종이가 없다는 사실에 다시 절망했고, 앤은 그를 위해 바다 아래 침몰한 엘리키스호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왔다.
인어들이 바닷물에 젖은 종이를 햇볕에 말리는 동안 앤은 알시타와 이야기를 종종 나눌 수 있었다. 그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염없이 울다가, 자신의 미련을 입에 담았다.
“헤리엇… 제이든.”
앤은 그가 말한 이름이 그에게 소중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소중한 이를 지상에 두고 왔음이 틀림없었다. 자비로운 인어는 어느새 증오를 잊고 알시타 막심을 친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빛이 꺼져 가는 알시타가 고통을 덜 느낄 수 있게 앤은 능력을 썼다. 그가 하루하루 어렵사리 삶을 연명해 가는 동안 앤은 그가 인어와의 싸움을 종결시키기 위해 소중한 이들을 뒤로하고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괜히 욕심을 부려서… 흐으윽. 이럴 줄, 알았으… 면, 사랑, 한다고 해 줄걸. 계속, 계속…….”
그의 미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사랑받을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알려 주어야 겨우 감정이라는 것을 배우는 그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그것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나타날까.
자신이 아이에게 준 것, 혹은 자신과 제이든이 서로 나누었던 것처럼 그 아이를 정말 애틋하게 죽을 만큼 사랑하고 아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가진 것도 없이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그 아이가 목숨을 걸 만큼 사랑하고 곁을 내어 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지켜봐 주고 싶었다. 사랑을 맞이할 때까지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알시타는 짓무른 화상이 고통스럽지도 않은지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행복하냐고 물어봐도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 작고 서툰 아이의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알시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계속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바다의 평화를 위해 편지를 쓰면서도 알시타는 헤리엇이라는 작은 아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의 앞에는 광활한 바다밖에 없음에도.
알시타는 숨이 끊기기 직전 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미안해요, 앤… 마지막으로 제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뭔가요?”
“헤리엇이, 그, 애가 행복한지, 당신의 눈으로 제발 확인해 주세요.”
알시타가 손을 들어 앤의 눈가를 쓸었다. 마치 그 눈동자 속에 제 영혼을 새기려는 것처럼. 앤의 눈을 통해 헤리엇의 행복을 빌려는 것처럼 말이다.
앤은 바다 밖으로 나가 달라는 그의 마지막 이기적인 부탁에 멈칫했지만, 지옥 끝에 서 있는 듯한 알시타의 고통과 슬픔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알시타는 앤의 대답에 마지막 순간만큼은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숨을 뱉어 내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힘을 다해 쓴 편지만이 그가 이곳에서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앤은 알시타가 말한 아이에 대해 이름과 약간의 생김새밖에 알지 못했다. 몇 살인지, 심지어 소년인지 소녀인지조차 몰랐다.
앤은 인어들 중에서도 정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어였기 때문에 바다를 오랫동안 비우면 분명 타격이 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앤은 알시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떠났다. 그 때문에 앤은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오가는 동물들의 힘에 의지해야 했다.
금발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했지.
앤도 알시타가 마지막까지 걱정했던 그 아이가 행복한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상은 바다만큼이나 광활했다. 그 속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을 솎아 내고 솎아 내도 앤이 찾는 헤리엇은 발견되지 않았다.
덕분에 이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친구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그동안 인간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난폭해져 갔다. 그리고 엔저 맥과이어라는 인간 쪽 영웅에 의해 인어들은 속수무책으로 항복을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던 헤리엇에 대한 작은 정보를 누군가가 물고 왔다. 그건 아주 잘생긴 독수리였다. 그는 리언이라는 소년의 부탁으로 하늘 위를 노닐다가 바다에까지 왔다고 했다.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헤리엇 알스터라는 사내가 있다는 소식을 독수리가 전해 주었다. 하지만 앤이 찾는 건 금발 머리에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지, 하얗게 새 버린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앤은 독수리에게 그의 풀네임을 듣고 알시타의 아이임을 알아차렸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알시타의 편지를 가지고 지상으로 갔다. 그리고 만난 헤리엇이 알시타가 말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
“행복한가요?”
앤은 헤리엇에게 알시타가 계속 궁금해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을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때마다 헤리엇은 늘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행복한가요? 헤리엇.”
앤이 하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왜 알시타가 그리도 서글프게 울며 헤리엇을 걱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행복한가요? 헤리엇.〕
앤은 헤리엇에게 입 모양으로 뻥긋거리며 물었다.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인어의 질문에 헤리엇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앤은 늘 그랬다. 헤리엇을 볼 때마다 항상 이 질문을 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무슨 목적으로 묻는지 알 수 없지만, 헤리엇은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 답을 주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엔저의 손을 잡은 헤리엇을 제이든이 끌어안고, 그 모습을 고려인과 안쉘이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는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앤은 또다시 질문했다.
“행복한가요? 헤리엇.”
북쪽 바다에 살던 앤이 굳이 그 좁은 호숫가에 머물면서 헤리엇의 곁에 있으려고 했던 이유는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헤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초록빛을 되찾은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응.”
.
.
“너는 알시타의 죽음에 무덤덤했던 게 아니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구하기 위해 내 목숨을 걸 수 있는 거다.”
“…….”
“네가. 헤리엇 알스터인 이상.”
헤리엇 알스터(Alster)
알시타(Alster) 막심.
그렇구나, 나는 슬펐던 거였어.
그 어린 날, 알시타를 놓을 수 없었던 내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름으로 그를 기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