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진실 혹은 거짓
범죄자들의 구역이자 세계의 끝에 위치한 29구역은 단테 막심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무법지대로 변했다. 소문으로는 단테 막심이 29구역 출신인 것 때문에 29구역을 건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살인이 일어나며 마약, 도둑질, 폭력 등 온갖 더러운 일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기심으로 매음굴 소굴로 들어간 머저리는 사지가 분리되어 튀어나온다는 그곳은 도르텔이라는 갱단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갱단은 유일하게 바깥 구역으로 통하는 터널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범죄가 끊이지 않는 그곳은 밤이 되면 갱단에 속해 있지 않은 이들은 숨을 죽이고 집이나 하수구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그런 29구역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낡고 허름한 부둣가 위로 돌풍이 불어 닥쳤다. 그리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헬기 세 대가 부둣가에 착륙했다. 일반적인 착륙장이 아닌지 한번 크게 휘청거리더니 제자리를 잡았다.
하수구에 숨어 있던 범죄자들이 눈을 빛내며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하는 거지?”
헬기 안에서 튀어나온 중년 사내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곧이어 그가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가 훅 꺼졌다. 본인의 능력을 담배 불붙이는데 사용한 제이든은 노란 눈을 번뜩이며, 이리떼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 29구역의 범죄자들을 벌레 보듯이 바라봤다.
평범한 사람이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지역이다 보니 사람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름 20년 전에는 그나마 사람 사는 냄새라도 났는데 변해도 너무 변했다.
조금 후, 사내의 뒤로 푸른 머리 사내가 헬기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외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다.
이 구역에 혼자 있다간 2분 안에 납치되어 가장 더러운 곳에 팔려 갈지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수구 아래 범죄자들의 더러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개구리 한 마리를 꺼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브레든이 멀미를 하는 것 같아요.”
“…개구리도 멀미를 하나.”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손목시계를 보던 제이든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늦는다고 성화였다. 그러는 와중에 헬기 내부에 틀어 둔 라디오에서는 쉴 새 없이 긴급특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바로 전쟁영웅인 엔저 맥과이어가 반정부성향을 보이며 탈영했다는 보도였다.
제이든도 엔저 맥과이어를 알고 있었다.
같은 아카데미 후배라서가 아니다. 이 세계에 살면서 그의 이름 하나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됐다. 그는 2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드디어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해 준, 그야말로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엔저 맥과이어 다음으로 유명한 그의 어머니 레이첼 맥과이어는 제이든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제이든이 기억하는 그녀는 불 속성 능력을 가진 능력만큼 화끈한 사람이었다.
그때 어두운 골목길 사이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났다. 무장한 네 명의 사내들이 나타나자 그들을 숨죽여 지켜보던 범죄자들이 다시 하수구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같은 시기에 무장한 놈들을 건드려서 좋은 꼴은 못 봤기 때문이다.
무장한 놈들은 아무리 봐도 능력자들이었고 이런 지역에서 능력자들은 모두 갱단 출신이다. 사내들 중 가장 선두에 있던 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마스크를 벗었다.
“제이든, 앤.”
“오, 안쉘.”
안쉘의 얼굴을 확인한 앤이 눈을 크게 뜨고 제이든은 담배를 꺾으며 피식 웃었다. 안쉘은 어디서 쥐어 터졌는지 얼굴 이곳저곳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앤은 깜짝 놀라 안쉘의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피기 시작했다.
“안쉘, 당신의 얼굴이 못생긴 개구리처럼 변했어요.”
“…….”
안쉘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앤의 손목을 잡고 내렸다. 그는 제이든에게 시선을 주면서 조금 머뭇거렸다.
중년의 사내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폭삭 늙어 보였다. 그동안 그에게 근심이 될 만한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쳐서 그런 것이 아닐까, 안쉘은 조심스럽게 걱정하는 마음으로 제이든을 쳐다봤다.
그에겐 갑작스럽게 나타난 헤리엇의 존재가 가장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제이든은 저번에 지나가듯이 이제 와서 헤리엇을 양자로 입적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전화로 간단히 설명해 드렸다시피, 헤리엇 님께서는…….”
“일단 들어가서 자세한 설명을 듣도록 하지.”
그가 주변을 탐색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때 알시타의 호랑이라고 불렸던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안광을 드리우며 섬뜩하게 번뜩였다. 아직 주변에는 쥐새끼들이 찍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고 있어 경계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안쉘은 어두운 골목길 내부를 빠르게 앞서 걸어갔다. 밖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은 것도 없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는 뒤에서 빠르게 쫓아오는 인원을 확인하며 골목길 끝에 있는 낡은 술집 내부로 들어갔다. 왼쪽 뺨에 길게 난 상처로 매우 험상궂게 보이는 술집 주인이 안쉘을 보고 눈만 깜박이며 인사를 건넸다.
보통 술집은 아닌 모양인지 벽 여기저기 칼과 권총이 걸려 있었고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상점이 일찍 문을 닫는 29구역에서 지금 시간까지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주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쉘은 주인에게 손을 들어 마주 인사한 다음 술집 안쪽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낡은 계단이 끼익끼익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그런 계단에 제이든과 그의 부하들이 다 같이 발을 디디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리가 났다. 3층까지 올라온 안쉘은 복도 가장 끝에 있는 낡고 허름한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안쉘은 성큼성큼 걸어가 바닥 한가운데 먼지가 가득한 카펫을 젖히고 보이는 낡은 홈에 손가락을 끼워 들어 올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위치한 비밀 통로가 드러나자, 제이든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건 남자들의 로망이지.”
“…….”
안쉘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비밀 통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먼지와 거미줄투성이인 방 안과 다르게 통로는 꽤 깨끗하고 넓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쉘이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조심해서 들어오세요. 함정을 건들면 내부 온도가 올라가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여기 전체가 뜨거운 오븐이 된다는 소리입니다.”
“그것참 끔찍하군.”
제이든은 투덜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앤을 제외한 일행은 군 최고의 아카데미 졸업자들이라 이미 행동이 조심스럽고 은밀했다. 다만 앤이 걱정스러웠기에 안쉘은 그의 손목을 붙잡고 함께 움직였다. 그 모습에 제이든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인간들의 대통령과 바다 왕자님이 사귀면 볼 만하겠는걸? 부부 싸움 나면 얄짤 없이 전쟁이구만.”
“시답지 않은 농담은 그만두세요.”
제이든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은 질 나쁜 아저씨들처럼 낄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안쉘은 그들의 웃음을 무시하며 몇 번이나 입술을 우물거렸다. 헤리엇에게 두들겨 맞아 터진 입 안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처보다도 엔저의 뺨에 붙여진 작은 반창고만 보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분노했다.
비밀통로를 5분 정도 걸었을 무렵 드디어 거대한 문이 보였다. 안쉘은 터치패드 위로 눈을 크게 뜨고 홍채인식을 했다.
이내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안쉘은 다시 주변을 살펴봤다. 이미 이 안에 1,500대의 CCTV가 있음에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엔저 대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자식은 뼛속까지 보좌관이군.
제이든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내부로 발을 디뎠다.
* * *
인어 학살자 엔저 맥과이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지 단테보다도 더 읽기 어려운 놈이었다. 제이든은 엔저에 대한 무성한 소문은 익히 들어 왔지만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가는 행사장에서 얼굴이야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어도 직접 접촉을 시도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많은 젊은이가 그의 품에 한 번만 안겨 봤으면 좋겠다고 찬양하는 이유가 있었다. 긴 다리를 거만하게 꼬고 앉아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있는 모습이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제이든이 엔저를 살펴보는 사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작은 동양인 사내가 제이든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관자놀이쯤에 멍을 달고 있었다.
안쉘도 그렇고 이 꼬마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참 잘도 얻어터지고 다니는군.
제이든이 혀를 쯧쯧 찼다. 엔저 맥과이어는 왼쪽 뺨에 작은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동양인 사내와 안쉘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잠시 후, 엔저가 먼저 한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올던 경.”
제이든 올던은 04구역 출신이었고, 그곳에서 귀족 작위를 받았다. 지위로 따지면 엔저 맥과이어가 조금 더 높은 계급이지만 그는 이제 국제적 범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든은 그가 내민 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주 잡았다.
“할 말이 많을 텐데, 그렇지 않나?”
제이든은 고려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동양인 사내에게 자료를 받아 테이블 위로 펼친 후 제 수하들에게 고갯짓했다. 그들 역시 모아 둔 자료를 펼쳐 두니, 겹치는 내용을 제외하고도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안쉘은 끝도 없이 나오는 자료들에 질린 듯 몸을 잘게 떨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는데, 단테는 무슨 생각인 거죠?”
“간단하지.”
제이든은 엔저 맥과이어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계획이 착실히 진행된다는 소리야.”
“계획?”
“대학살.”
제이든은 자신이 가진 정보를 엔저 맥과이어에게 풀어 놓으며 낡은 탁자 위로 노랗게 바랜 종이 뭉치를 던졌다. 단테 막심이 20년, 아니 그 이상으로 준비했을지 모르는 계획이 종이 안에 세세하게 쓰여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엔저는 뜻 모를 미소를 씩 지으면서 앞에 있는 의자를 발로 밀었다. 의자는 빙그르르 돌아 제이든의 앞에 멈췄다. 엔저는 이때까지의 예의 바른 행동과는 달리, 고개를 제이든 쪽으로 숙이고 말했다.
“이제야 대화를 하고 싶어지는군. 제이든, 여기 앉지.”
갑자기 들려오는 반말에 제이든이 얼굴을 굳혔다. 그러자 엔저는 무엇이 문제냐는 표정으로 제이든에게 고갯짓했다.
안쉘이 뒤에서 한숨을 쉬는 걸 본 제이든은 씩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제야 엔저 맥과이어가 대화를 시작했다는 걸 그 역시 눈치챘다.
“맞아, 단테는 인어들을 모두 죽일 예정이야.”
안쉘은 속이 거북한 표정으로 앤을 돌아봤다.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앤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안쉘 역시 단테 막심의 최종 계획을 알아차린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다.
안쉘은 굳은 얼굴로 고려인을 쳐다보며 이틀 전을 회상했다.
“내가 말했잖아. 그동안 핵을 조사했다고.”
안쉘은 고려인이 준 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실행될 리 없었다. 어떻게 이따위 생각을 한 미친놈이 있을까 감탄마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늘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는 고려인도, 조용히 뺨을 쓰다듬고 있는 엔저 맥과이어도 농담 따위가 아니라는 듯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면 정말, 단테 막심이…….”
“맞아. 바다 어딘가에서 핵을 발명하고 있어, 바닷속 인어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끔찍한 괴물을.”
안쉘은 단테 막심의 이유 모를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도를 모르고 날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어이 인어들을 모두 학살하겠다는 단테의 계획에 안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지경까지 된 것에 대해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늙은이의 장기말이 되어 인어들을 학살한 건 누구도 아닌 안쉘 자신이었다. 엔저를 따라 탈주 경로를 차단하고, 비명을 지르는 인어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모두 바다 아래로 수장시켜 버렸다.
현기증이 일어나 눈앞이 깜깜해진 안쉘은 고개를 흔들었다. 인어들의 절규 어린 비명이 들리고, 굴욕과 경멸이 섞인 얼굴을 한 인어들이 항복하는 것처럼 수면 위로 올라와 두 손을 든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심지어 안쉘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심취하기까지 했다.
“어머니, 아버지, 보세요, 당신들의 원수를… 제가.”
안쉘은 저도 모르게 엔저 맥과이어를 쳐다봤다. 그는 제 뺨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치료를 잘하라는 선배의 명령을 받고 반창고 하나를 뺨에 떡하니 붙인 엔저는 세상이 무료한 모양인지 나른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안쉘은 늘 엔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더욱 심했다. 엔저 맥과이어는 단테에게 대항했지만, 그게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과거를 회상하던 안쉘은 제 손목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손목을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잡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앤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긴, 인간의 대통령이 인어들을 모두 학살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역시 알고 있었나?”
제이든은 제 모든 패를 꺼냈음에도 놀라워하지 않는 좌중의 반응에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엔저의 시선이 잠시 고려인을 향했다가 떨어졌다.
곧이어 엔저는 아무런 양해 없이 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입에 무는 그의 행동에 제이든 역시 담뱃갑을 꺼냈다. 그러다 문득 미소를 지었다. 차가울 정도로 비열한 조소였다.
“하긴 단테가 이제 숨길 생각이 없을 테니까.”
“개 같은 늙은이지.”
엔저는 그의 말에 대답하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좆 같은 늙은이라거나, 멋대로 지껄이기나 하는 정신 나간 놈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술은 없나?”
“위스키라면 몇 병 있습니다.”
안쉘이 대답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유능한 보좌관이군.”
제이든이 장난스럽게 덧붙였지만, 엔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회의실 안에 적막이 가라앉고 제이든은 안쉘에게 잔과 위스키 병을 받았다. 술로 목도 축였겠다,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모든 패는 갖춰졌다.
하지만 엔저 맥과이어도 제이든 올던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안쉘은 맞아서 부어오른 눈두덩을 달걀로 살살 굴리면서 한 사내를 떠올렸다. 새하얗게 물들어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구는 그 사람을.
제이든은 이야기 중간부터 엔저가 헤리엇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피식 웃으면서 여러 의미로 인기가 많은 자식을 가진 아빠처럼 말했다.
“헤리엇이 매력적으로 크긴 했지.”
저번엔 무슨 희끄무레한 자식이라고 하더니, 이 양반도 태세 전환이 장난 아닌 사람이었다.
“스토커만 아니면 됐지, 뭐.”
제이든이 한마디 덧붙일 때마다 안쉘의 표정이 점점 썩어 갔다. 목숨을 걸고 헤리엇을 스토킹 하는 엔저 맥과이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주던 헤리엇도 함께 말이다.
둘 사이를 알게 된다면 제이든 올던도 혈압으로 목덜미를 몇 번 잡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쉘은 움찔거리는 얼굴 근육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했다.
“선거일까지 이제 4일 남았습니다. 그 안에 헤리엇 님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어렵군, 심지어 그놈 제정신이었다며.”
“…….”
그래, 누가 봐도 헤리엇 알스터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는 안쉘의 이름을 알았고 엔저 또한 기억했다. 달리 말하면 헤리엇 알스터는 처음부터 세뇌를 혼자 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헤리엇은 그러지 않았다.
“동쪽 바다에 있는 해저 기지가 폭발하면 그야말로 끝이다. 인어들은 모두 죽을 테고 단테 막심의 계획은 성공하겠지. 녀석은 그걸로 충분하다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거다. 하지만 지금 해저 기지를 폭발시키지 않고 있다는 건 아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거나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겠지.”
“…명분인가요?”
마냥 멍청이는 아니란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안쉘의 대답에 제이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실제로는 군사 독재 체제이지만 표면적으로 대통령은 늘 의원과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래서 단테도, 자신들도 더욱 명분이 중요했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엘리키스호로 많은 국민이 인어에게 등을 돌렸지만 아직 이런 생각은 가지고 있지. 인어들이 전멸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는가. 단테 막심은 이미 2년 전 핵실험을 완료했다. 하지만 쉽게 터뜨리지 못하고 있지. 국민들의 증오는 아직 그에 미치지 않았거든.”
“…그래서 전쟁을 억지로 진행하고 있는 거군요.”
“그래, 이번 북쪽 바다를 점령하면 단테는 망설임 없이 바다 기지 핵을 폭발시킬 거다.”
“바닷속에서 핵이 터지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방사능이 바다로 퍼질 텐데요.”
“그럴 걱정이 없으니까 문제지. 오로지 인어들만 죽일 수 있는 핵이거든. 어떤 천재가 발명했다더군.”
옆에 서 있던 고려인의 몸이 잠시 움찔하고 떨렸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그쪽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창백한 낯으로 안쉘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앤이 겨우 떨리는 입을 뗐다.
“…그는, 인간들의 대통령은 왜 인어들을 그렇게 증오하는 거죠? 왜, 우리들의 존재를 모조리 없애려고 할 정도로 그렇게.”
“이유는 없어. 아니, 있어도 상관없지.”
제이든이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는 알시타의 의지를 따라 인어를 믿었고, 지금 이곳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만큼 알시타를 사랑하던 후배를 떠올렸다. 후배는 결국 단테의 편에 섰다. 안토니오를 떠올리니 입 안이 무척이나 썼다.
“단테는 어마어마한 죄를 저질렀고 지옥에 떨어질 거다.”
본인의 야망과 감정을 위해 친아들을 손수 죽이고, 국민들을 이용해 인어를 학살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단테 막심은 이유를 불문하고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셈이다.
제이든은 손안의 담배를 굴리면서 입에 물고 불을 붙일까 말까 고민했다. 엔저 맥과이어는 어느새 다 피운 건지 전자 담배 전원을 끄고 있었다. 이미 담배 타임이 지나간 것을 깨달은 제이든은 들고 있던 것을 담뱃갑 안에 다시 넣었다.
“…명분은 중요해. 단테 막심은 인어들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늘 고심했고… 알시타의 죽음으로 명분을 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인어라는 종족의 전멸을 위해서라면 북쪽 바다에서 일어날 많은 희생도 서슴지 않을 거다. 말도 안 되게 큰 희생도. 예를 들면… 다른 핏줄의 희생, 그리고 많은 군인의 목숨.”
“…델타 막심.”
“맞아. 원래 국민 영웅 손에 비극적으로 살해당했어야 했지만, 그는 죽지 않았지.”
“…….”
델타 막심이 처음 기지를 찾아온 날, 엔저는 그를 죽여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죽이지 않았고 델타는 도주했다.
단테에게 목숨이란 무엇인가. 핏줄마저 그렇게까지 무정하게 버릴 수 있는 늙은 괴물에 소름이 돋았다.
“옛날부터 반정부성향을 보이던 엔저 맥과이어 대령이 델타 막심을 살해하고 인어들과 손을 잡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은 엔저를 막기 위해 핵을 폭파한다. 그게 영감탱의 계획이었지.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잖아. 그게 뜻대로 안 되니 이번에 강행해 버린 거야.”
“강제차출로 군을 집합시킨 것 말씀이십니까?”
“이번 출전에서 델타 막심은 확실히 죽는다. 그곳에 있던 군인들도 모두 ‘인어’에게 살해당할 거다.”
“북쪽 인어들은 전쟁에 대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이든의 말에 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끼어들었다가, 무엇이 떠오른 듯 침묵했다. 안쉘 역시 말문이 막힌 파리한 표정으로 엔저를 돌아봤다. 엔저는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어라면 있잖아. 훌륭한 인어가.”
“…헤리엇 님.”
이제야 대통령 단테가 엔저를 버리고 헤리엇을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종전된다면, 단테는 헤리엇을 공개 처형할 거다. 가장 잔인하게, 그에 대한 증거조차 나오지 않도록.”
안쉘은 숨이 막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 안쪽이 너무 답답해서 아프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던 안쉘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말하는 제이든과 엔저를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두 사람은 남이 보기에도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리엇 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제이든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겠지.”
그때, 비상벨이 울렸다.
* * *
헤리엇은 작은 미소를 유지한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깃털처럼 나풀거리다 이마를 상냥하게 두드리고 떨어졌다. 바다 위에 오른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헤리엇은 드물게도 무척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내 그의 손에서 땅콩 껍질이 사각사각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한참 동안 땅콩 껍질을 벗기던 헤리엇은 손바닥 가득한 땅콩을 하나둘씩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종종 헤리엇은 이렇게 견과류로 에너지를 채우곤 했다.
“당신, 왜 기분이 좋은 거야?”
어느새 델타 막심이 쪼르르 달려와 날카롭게 물었다. 갑판 위에는 많은 군인이 헤리엇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헤리엇은 제게 달려와 날카롭게 왕왕 거리는 델타를 쳐다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못된 말만 종알대는 입술 사이로 땅콩을 넣어 주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오물오물 씹어 먹던 델타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화를 내고 패악을 부리고 싶은데 상대가 영 받아 주질 않으니 기운이 빠졌다.
“지금 우리가 뭐 하러 가는지 알아?”
“답사?”
“놀러 가는 거 아니거든?!”
“귀는 다 나았나 보구나.”
헤리엇은 델타의 머리를 왼쪽 귀 뒤쪽으로 넘겨 주며 속삭였다.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문 델타는 누구 때문에 자신의 귀가 이렇게 된 건지 아느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먼저 시비 건 건 이쪽이기 때문이었다.
델타는 여전히 헤리엇 알스터를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괴물이고 실험의 실패작이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헤리엇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곧 북쪽 바다에 도착합니다.”
“능력자들은 모두 갑판에 나오고, 폭격 준비하세요. 결계 능력자들은 인어의 공격에 대비…….”
델타 막심은 능숙하게 명령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미 스무 살 때 장교급의 교육을 마친 상태였다. 단테의 많은 신임을 받아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더해 대통령의 조카라는 이유로 그는 낮은 계급임에도 군함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 전투 경험은 거의 없었다.
델타에겐 이번 전투가 겨우 두 번째 참가였기에 얼굴에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해빙이 방해하는 북쪽 바다는 인어의 흔적 없이 차갑고 고요했다.
인어들이 자신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군함을 먼저 공격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이번 작전의 시작이었다. 공식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게 되면 일이 복잡하게 굴러갈 것이 뻔했다.
웅장하게 빙하를 가르고 진입하던 군함들이 모두 바다 한가운데로 모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격할 것처럼 군인들이 공격 준비를 마쳤지만, 깨끗할 정도로 맑은 북쪽 바다는 인어 그림자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약 이십 대의 군함이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멈춰 서자 우웅거리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헤리엇은 갑판에 기대 조용히 바다를 내려 봤다. 그는 실험으로 만들어졌지만 본능은 인어에 가까워서 가끔씩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기 버거울 때가 있었다.
그래서 시간마다 물을 먹어 수분을 보충해야만 했고, 시골 마을에서 지낼 때도 작은 호수에 가서 인어의 모습으로 있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만 했다.
지금 이 넓은 바다는 헤리엇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헤리엇은 눈을 감고 찬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선배.”
귀여운 후배를 못 본 지 오래되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엔저가 처음이었다.
헤리엇이 어렸을 때 그를 담당하던 의사는 그를 미개발된 초자아(Undeveloped Superego)라고 말했다. 공감 능력 0%, 죄책감 12%로 보통의 아이에 비해 아주 낮은 수치를 보여 줬고, 수많은 심리 검사를 통해 헤리엇은 성격장애 판정을 받았다.
즉, 사이코패시(Psychopathy) 성향을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알시타는 그런 검사 결과를 받고도 아무런 동요 없이 헤리엇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헤리엇, 너는 사이코패스나 뭐 그딴 괴상한 게 아니야. 너는 그냥 모를 뿐이야.”
“…….”
“모르는 건 배우면 돼. 이상한 게 아니란다. 원래 사람은 배움을 통해 성장한다고 하잖아…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알시타 막심은 당시에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상황이었다. 가끔 찾아오는 제이든 올던에게는 복잡한 시선을 던졌고, 죽은 아내에게는 죄책감 같은 감정을 가졌다.
그런 그가 헤리엇에게는 많은 것을 알려 주려고 애썼다. 특히나 긍정적인 감정을 말이다. 덕분에 헤리엇은 알시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동물을 볼 때 드는 귀엽다는 감정, 곤란하다고 느끼는 건 무엇을 할 때인지, 사람은 어떨 때 기뻐하는지, 그런 것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가 잃은 아들을 생각하는 감정도, 제이든 올던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그리고 이따금 제이든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도, 죽은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죄책감을 가진 것도, 어찌 보면 가장 밑바탕에 있는 감정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알시타는 헤리엇에게 사랑을 알려 주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 헤리엇은 궁금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된 일이지.”
천천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군인들이 고요한 적막에 숨을 죽이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갑자기 첨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니 돌고래 떼가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다시 참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바로 군함 아래에서 들렸다. 소름이 돋은 델타 막심은 얼른 바다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가 군함 갑판에서 떨어진 듯 고요한 수면에 파문이 생겼다.
“마, 막심… 소위.”
“??”
“그, 그자가 떨어졌습니다.”
“누구요?”
“하얀 머리의 남자요!”
델타는 그제야 헤리엇이 보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괴물이야 인조 인어이니 바다에 빠졌다고 죽진 않겠지만 바다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델타는 뭔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급하게 군함에 정지 신호를 보냈다.
쿵-!
신호가 미처 뒤쪽으로 전달되기도 전에 선두에 있던 군함이 갑자기 멈춰 서면서 뒤따르던 군함들이 잇따라 부딪치며 쿵쿵 소리를 냈다. 충격이 가시는 것도 잠시 거대한 군함이 거칠게 흔들렸다.
“으, 아, 아아악!”
갑판의 가장 뒤쪽에 있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다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바다가 살아 있는 생물인 것처럼 그를 심연 아래로 끌고 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대부분의 인어가 사용하는 능력이었다.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인어들만의 물 속성 능력이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하라!!!”
장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바쁘게 움직였다. 델타는 그들과 함께 달리며 헤리엇이 떨어졌던 바다를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
그때, 수면 위로 헤리엇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얀 얼굴이 마치 물속에서 죽은 것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혐오스러운 실험 영상에서 본 얼굴을 떠올린 델타는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막고 달달 떨었다.
눈을 감은 헤리엇이 서서히 눈을 떴다. 이상하게도 하얗기만 했던 헤리엇의 눈동자가 연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델타는 굉장히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헤, 헤리엇!!”
델타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헤리엇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헤리엇의 주변에서부터 바닷물이 부글부글 들끓기 시작했다.
쾅!
무언가에 직격타로 얻어맞은 듯 델타가 탄 군함의 바로 뒤에 있던 다른 군함 한 대가 뒤집어지고 있었다. 갑판 위로 올라온 군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난간이나 돛대를 붙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대부분이 바다로 떨어지고 군함은 뒤집어진 채 서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델타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바다 위에 신이 강림하여 감히 바다를 넘본 인간들을 단죄하는 듯한 웅장한 광경이었다. 이어서 거대한 용오름이 하늘 위에 닿을 것처럼 솟아올랐다.
“하지 마!! 하지, 하지 마!!”
델타는 능력을 사용해 헤리엇을 향해 소리 질렀다.
사방에 솟아오른 용오름에 스무 척의 거대한 군함들의 모습이 마치 물로 된 감옥 안에 갇힌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바닷속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군함들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소용돌이 속으로 서서히 침몰해 갔다. 이곳저곳에서 섬뜩한 소리가 나고 델타가 탄 군함 가운데에도 구멍이 뻥 뚫렸다.
헤리엇은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군함에서 비명을 지르는 델타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 같았다. 북쪽 바다를 모조리 뒤집어 삼킬 것처럼 바닷속 소용돌이가 군함들을 잡아당겼다. 빙글빙글 떠밀리던 군함들은 제대로 공격도 한번 가하지 못하고 서로 부딪치며 두 동강이 나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델타는 소용돌이와 용오름을 피해서 상공을 날아다니는 드론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델타는 저 드론의 렌즈가 헤리엇과 군함을 향해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알시타 막심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단테에게 살해당할 것이며, 이후에 있을 전쟁의 명분으로 이용당할 것이라고.
델타 막심의 죽음이 단테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지금에서야 눈치챘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 없어. 아직, 아직 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군함 전체를 뒤흔들었다. 동쪽 바다에서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모조리 도륙했다는 헤리엇의 힘을, 지금까지 델타는 믿지 않았었다.
실제로 그는 겉으로는 무척 유약해 보이는 사내였으니까. 어떤 못된 소리를 들어도 작게 웃기만 하고,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전부 알면서 분노하지 않았다. 그런 힘이 있다면 당장 단테 막심을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분노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다가 언젠간 바스러져 사라질 사람처럼 보였다.
델타 막심은 비명을 삼키며 소용돌이 가운데로 끌려가는 군함 안에서 공포에 떨었다. 아직 살아 있는 능력자들이 헤리엇을 공격하기 위해 대응을 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바닷속에 있는 헤리엇은 마치 춤추는 것처럼 공격을 피했다.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하늘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용오름에 붙잡혀 수면 아래로 끌려갔다.
“지옥이야… 이, 이건, 지옥이야.”
헤리엇의 하얀 잔상이 어두운 물결 사이에서 언뜻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거대한 회오리가 바닷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수면 위에 떠 있는 군함을 집어삼키고, 감옥 철창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용오름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사람들을 바닷속으로 끌고 갔다.
지옥이었다.
그래, 이건 단테가 만든 지옥이었다.
델타가 절망에 빠진 순간 회오리에 휘말린 다른 군함이 델타의 군함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델타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떨었다.
그때,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하지만 폭발음이라기엔 너무나도 격정적이고, 둔탁했다. 쿵-! 하고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델타는 눈물로 가득 젖은 눈을 간신히 뜨고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아.”
델타의 군함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던 군함의 옆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우그러들었다. 충격으로 흔들린 탓에 보이지 않았던 다른 군함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델타의 군함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온통 검은색 일색인 군함이었다. 독수리 마크가 그려진 검은 군함은 델타가 탄 군함을 향해 달려드는 군함의 가운데를 정확히 뚫고 진로를 막아 버린 것이다.
“…검은 독수리…….”
검은 독수리, 엔저 부대였다.
그 뒤로 쿵-! 쿵-! 하고 몇 번 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검은 군함 세 대가 그 뒤를 이어 북쪽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어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엔저 맥과이어의 군함은 소용돌이 아래로 끌려 들어가는 델타 막심의 군함을 위로 끌어내고 있었다.
“왜…….”
엔저 맥과이어는 지금 세계적인 범죄자였다. 그가 어디에 어떻게 군함을 숨겨 두었는지 의문이 채 들기도 전에 델타는 다시금 몰아닥친 커다란 충격에 갑판 위를 구르고야 말았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검은 군함에 헤리엇이 공격을 가한 것이다. 군함을 들이박아도 멀쩡했던 검은 군함이 헤리엇의 공격 몇 번에 우그러지고, 안쪽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델타 막심 앞으로 거대한 이능력 결계가 펼쳐졌다. 유리처럼 투명한 막이 앞을 막아 세우자, 높이 솟아올라 델타를 향해 덮쳐 오던 용오름이 갑판 위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군함 전체가 물로 젖었다. 델타는 눈을 크게 뜨고 제 앞에 펼쳐진 이능력 결계를 멍하니 응시했다.
이내 거대한 검은 군함의 갑판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어 델타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촌스러운 2:8 머리는 어디에 팔았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늘어트린 안쉘이 보였다.
“델타 막심의 생사를 확인했습니다!”
다급하게 군함의 상태를 확인한 안쉘은 헤리엇의 능력으로 인해 금이 간 결계에 또 다른 결계를 덧씌웠다. 델타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들이 자신을 구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쉘은 필요에 의해 그를 구했지만, 델타 막심의 넋 놓은 얼굴을 보니 쓴웃음이 튀어나왔다. 헤리엇만 아니면 그가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마치 희망의 빛이라도 보는 듯한 저 표정을 보니, 저절로 입에서 쓴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안쉘은 상공을 배회하던 드론을 결계로 두 동강 내 격추시키고 한숨을 쉬었다. 엔저 부대가 군함을 움직였으니 이제 곧 단테 막심 대통령이 무슨 수를 쓸 것이다. 그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안쉘은 망원경을 들고 소리쳤다.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대령님!!”
바다 위로 어마어마한 돌풍이 불어닥쳤다. 그건 자연스러운 바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돌풍에 안쉘은 눈도 뜨지 못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믿고 있습니다, 대령님…….”
갑작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방해에 헤리엇 알스터의 모습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얀 머리카락이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평소 인어로 변하면 파란색으로 물들던 헤리엇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완전한 인어도, 완전한 인간도 아닌 그가 가진 부조화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헤리엇은 제 앞에서 불어닥치는 돌풍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게 미소 지은 채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한 사내를 응시했다.
군복이 아닌 편해 보이는 검은 전투복을 입은 엔저 맥과이어는 그 나름대로의 육체적인 매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는 능력을 사용해 바다 위를 걷는 것처럼 헤리엇의 앞으로 나아갔다.
“안녕하세요, 선배.”
“안녕, 엔저.”
헤리엇은 주변을 살펴보며 곤란한 듯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위험해, 엔저. 조금 물러나 주겠니?”
헤리엇은 엔저를 공격하기 싫었는지 눈썹이 팔자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바다는 헤리엇의 힘을 보충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해 그의 귀여운 후배를 공격할 것 같아 난감했다.
헤리엇은 델타 막심을 바다 아래로 가라앉히라는 임무를 받았다. 임무는 반드시 완수해야 하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숭고한 목적을 위해선 목숨을 아까워해선 안 된다. 그것이 헤리엇이 받은 세뇌였다.
“힘을 거둬 주세요, 선배.”
귀여운 후배의 투정을 들은 헤리엇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콰앙!!
엔저 부대의 군함을 갑작스럽게 다른 군함들이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델타가 무전기로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통신이 먹통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상대는 계속 대포를 발포하기 시작했다.
콰앙-!!! 쾅!!!
고막을 뒤흔드는 폭발음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리고 헤리엇과 엔저가 서 있는 곳 근처에서 군함 한 대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선배의 소원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옆자리는 내 것이겠지.”
엔저 맥과이어는 무척 부드럽고 정중하게 말하며 헤리엇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거대한 물의 장막이 헤리엇을 가두려는 듯 엔저의 손길을 거부했다.
“저는 늘 궁금했어요, 선배.”
엔저의 뒤로 거대한 태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내리꽂는 듯한 모양의 태풍이 주변 군함들을 뒤흔들며 용오름을 하나둘씩 집어삼켜 몸뚱이를 점점 키워 나갔다.
헤리엇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후배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사이 엔저의 몸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엔저는 이럴 때도 감히 선배를 공격하지 못했다.
헤리엇의 위에 군림하려는 것처럼 허공에 떠 있는 엔저의 모습은 헤리엇이 알고 있는 어린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헤리엇과 엔저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 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헤리엇은 여전히 수조 속에 갇힌 인어였고, 엔저 맥과이어는 그 인어의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고양이었다.
“후퇴!! 후퇴합니다!! 태풍에 말려들지 마세요!!”
쿵-! 하고 부딪치는 군함을 결계로 지키며 안쉘이 소리쳤다. 이어서 거대한 네 대의 검은 군함이 천천히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반 이상이 파괴된 델타 막심의 군함들은 여기저기 잔해를 남기며 잔상처럼 소용돌이 안에서 흔들거렸다.
다행히 엔저 덕분에 헤리엇의 능력이 분산되어 엔저 부대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지상에서도 최강의 체술을 보여 주던 헤리엇이 물을 만나니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었다.
안쉘은 왜 단테가 헤리엇을 외딴 시골 마을에 버린 채 방치했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헤리엇의 능력을 통제할 자신이 없던 것이다.
거대한 물줄기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엔저의 등 뒤를 덮쳤다. 그의 어깨에 물줄기가 스쳤을 뿐인데 마치 총상을 입은 것처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모습에 잠시 멈칫한 헤리엇이 무척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엔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멋있어서 전투복이 찢어지는 광경마저도 묘하게 심장을 수런거리게 했다. 그가 피 흘리는 모습을 본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저절로 맥이 풀렸다.
뭘까?
왜 이러는 걸까.
명령은 절대적인데도 헤리엇은 더 이상 엔저를 공격할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다시 힘을 끌어내어 엔저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쫓아오지 않는 헤리엇에게 잡힐 정도로 엔저는 녹록지 않았다.
헤리엇 역시, 이곳에서 델타 막심을 죽이면 자신이 단테의 손에 죽임 당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 수석졸업생인 그는 체술뿐만 아니라 전략과 지략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어린 엔저가, 그 작은 새끼 고양이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문을 열었던 그날, 헤리엇은 환하게 웃으면서 작고 어린 엔저에게 손짓했다.
“이리 오렴, 나는 궁금했단다.”
자신의 마지막 힘을 짜내 엔저를 불러들였다.
“왜 대통령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거니? 그러지 마, 엔저. 걱정하지 마. 너는 내가 죽으면…….”
헤리엇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엔저 맥과이어가 달려들었다. 다른 생각을 하며 곤혹스러워 하던 헤리엇이 갑자기 달려드는 엔저의 움직임에 반응할 새도 없었다.
헤리엇을 보호하기 위해 물이 저절로 움직였다. 투명한 무색의 창은 엔저의 배를 무자비하게 꿰뚫고 등으로 튀어나왔다.
“……?”
헤리엇은 지척에서 물기둥에 꿰인 엔저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제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손으로 문질렀다. 문지르는 것보다 더 많이 떨어지는 핏방울은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수면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엔저의 핏자국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역시.”
엔저는 잠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저 너머에 있는 군함에서 안쉘이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 헤리엇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헤리엇은 모든 생명에게 공평했다. 어느 것을 특별히 가벼워하지도, 무거워하지도 않았다. 명령에 따라 온 바다를 피로 물들여도 헤리엇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엔저를 보는 헤리엇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엔저, 상처… 상처가.”
이상했다. 왜 목이 메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자신의 상태가 너무 이상했다. 온몸이 사시나무같이 떨렸다.
“선배, 선배… 역시, 선배였군요.”
“엔저, 지금, 상처가… 상처가.”
엔저의 복부를 관통한 물줄기 자체는 크지 않지만 헤리엇은 그가 흘리는 핏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상해. 왜, 왜. 엔저가 다쳐야 하는 거지? 명령에 복종한 것 때문에 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고양이가 다친 건가.
헤리엇의 생각과 감정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빠지직하고 머릿속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헤리엇의 새하얀 눈동자가 천천히 푸른색을 되찾아 갔다.
헤리엇은 복부에 물줄기가 박힌 채 허공에 떠 있는 엔저의 뺨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복부를 감싸고 있는 엔저의 손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얼른 치료하지 않으면…….
“저는… 늘 궁금, 했어요, 선배.”
그날의 어린 엔저 맥과이어가 헤리엇의 앞에 섰다. 헤리엇은 그를 불러들였다.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날 우연히 엔저가 잠이 오지 않아 어슬렁거렸던 복도는 헤리엇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헤리엇은 인체 실험 이후로 점점 약해지긴 했어도, 그때까지는 자신이 가졌던 ‘본연의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감정.”
“…….”
“선배를 향한 이, 사랑.”
“…….”
“나를, 이루는 이 모든 것.”
헤리엇의 원래 능력은 허접한 단테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최상위 능력이었다. 단지 생각하고 바라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는 최상위의 능력, 그것이 헤리엇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능력은 제대로 개화하기도 전에 실험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헤리엇이 그 능력을 실제 사용한 건 평생 단 한 번뿐이었다.
그때의 헤리엇은 궁금했다. 알시타 막심, 제이든 올던, 그 외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리 오렴.”
헤리엇은 작은 고양이에게 손짓하며 다가오라고 속삭였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느라 몸을 둥글게 말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작은 아이는 감각이 뛰어난 모양인지 본인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는 경계하면서도 헤리엇에게 다가왔다. 물그림자 속에 집어삼켜질 것처럼 어린 날의 엔저가 조금씩.
어린아이는 조금 소심해 보였다. 하지만 아주 아름답고 빛나는 루비를 가지고 있었다. 붉은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본 헤리엇은 눈을 휘면서 활짝 웃었다.
나는 궁금했어.
그러니까,
나를 사랑해 봐.
“전부 선배가 만든 거죠?”
엔저 맥과이어는 손을 뻗어 헤리엇의 하얀 얼굴을 잡고 격정적이고 난폭하게 입술을 부딪쳤다. 얼굴에 피가 여기저기 묻어났다. 목구멍으로 엔저의 피가 쏟아져 들어왔다. 엔저는 너무나도 황홀하다는 듯 어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잡았다… 헤리엇. 나의 신.”
헤리엇은 사랑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