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세뇌
달칵-.
문이 열리고 어두운 방에 빛이 서서히 들어왔다. 헤리엇은 감은 눈을 뜨고 방문객을 반겼다.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문 앞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검은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가 머뭇머뭇 다가왔다.
“나는 궁금해.”
그리고 헤리엇은 눈을 떴다. 하얀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헤리엇이 상체를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엔저와 통화하다가 문득 잠이 들었나 보다. 요즈음 계속 옛날 꿈을 꿔 온 헤리엇은 머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숙였지만, 어디 한 곳도 깨지거나 내려앉은 곳은 없었다.
죄책감인가?
헤리엇은 알시타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었지만, 어느 것 하나 공감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책에서는 죄책감을 느끼면 가슴이 무거워지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 것이라고 했다.
곤란한 듯 미소 지은 헤리엇이 침대에서 벗어나 일어섰다.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진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면서 헤리엇은 충전기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이르긴 하지만 출근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어차피 출근이란 걸 해 봤자 할 일도 없이 늘어져 있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묘한 사명감에 헤리엇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결국 충전기는 포기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칫솔을 찾았다.
탁, 쨍그랑-.
멍하니 있다가 실수로 선반 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리고 선반 위에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을 확인하니, 엔저가 선물로 줬던 달걀 모양의 장식이었다. 그 안에서 빠지직 전기를 내며 고장 난 기계 하나가 망가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엔저가 줬던 도청기였다.
“이런.”
헤리엇은 난처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엔저가 이걸 듣고 힘을 낸다고 했는데…….
귀여운 후배가 시무룩해할 걸 생각하니 너무나도 안타까워졌다. 귀여운 후배의 부탁은 무조건 들어주고 싶은 게 선배의 의무였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헤리엇은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도청 장치를 이리저리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안쉘에게 가져가서 혹시 고칠 수 없는지 물어봐야겠다. 무척 싫은 표정을 짓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알아봐 줄 것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기체가 헤리엇 앞마당에 떡 하니 놓여 있었다. 헬기였다.
“???”
왜 헬기가 앞마당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마 이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못 듣고 멍하니 있었던 것인가 싶은 헤리엇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그때, 헬기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쉘?”
“헤리엇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음.”
“문을 두드렸는데 깨어나지 않으셔서 기다렸습니다. 문을 강제로 열어서 들어갈까 고민했지만, 아직 시간이 이르니 괜찮을 것 같아서요.”
안쉘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헬기 조종 자격증 따위 있을 리 없었다. 헬기를 조종해 본 적이 없다는 안쉘에게 고려인이 개구쟁이처럼 활짝 웃었다.
“나도 없어!”
그러면 이 빌어먹을 헬기는 대체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아카데미 시절 항공정비사 자격증을 심심해서 따 놨으니, 그거하고 비슷하겠거니 하고 세뇌하며 안쉘은 헤드셋을 벗었다.
“일단 타십시오.”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며 안쉘이 헤리엇을 재촉했다. 솔직히 그냥 차를 타고 가고 싶었으나, 사람 인적이 드문 도로는 위험했다.
그렇다고 하늘 위는 안전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긴 한데, 고도를 유지하면서 날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헤리엇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안쉘에게 말했다.
“좋은 아침.”
“…….”
저 사람의 포커페이스는 도대체 언제 깨질까.
안쉘은 고민하며 그에 답례하듯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헤리엇은 헤드셋을 받아 끼면서 운전석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
“려인이도 있네.”
“안녕, 대장. 아, 오늘은 혈압하고 심장 박동수가 정상이네. 당 수치도 좋아.”
그 짓궂은 웃음이 어찌나 불안하던지, 마치 단테 막심이 살고 있던 판테니엄 프리미엄관의 에어컨을 모두 고장 내고 지은 웃음이 저랬을까. 헤리엇은 일단 헬기에 올라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대장!!”
그때, 헤리엇의 뒤로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검은 티셔츠에 군복 바지를 입고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헤리엇의 집 앞마당에 있는 헬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 납치당해요?”
마치 납치당하는 주인을 지키려는 강아지처럼 안젤라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더니, 헤리엇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헬기에 오르던 헤리엇은 안젤라의 머리를 토닥이면서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서 그녀에게 씌어 주었다.
“너도 같이 날아 볼래?”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닙니다…….”
안쉘이 힐끔 뒷좌석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젤라는 의심쩍은 얼굴로 고려인과 안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헤리엇보다 먼저 헬기에 올라탔다.
“누가 신고했습니까?”
안쉘이 굳은 얼굴로 정색하자 안젤라가 살짝 눈치를 보면서 웅얼거렸다.
“리언이…….”
그와 동시에 헬기를 향해 무언가가 빠르게 접근했다. 안쉘이 깜짝 놀라 결계를 펼치자, 투명한 이공간 결계가 펼쳐지며 다가오는 무언가를 막아 냈다.
헬기를 공격한 건 거대한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면서 안쉘의 결계를 이빨로 아득아득 물어뜯었다. 결계가 쩌저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갔지만, 두 번의 공격 정도는 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장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안젤라가 온 길을 따라 리언이 헬기를 향해 접근하며 낮게 물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천진했던 소년을 떠올리며 안쉘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안젤라는 설마 리언이 공격할 줄 몰랐던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우리 귀염둥이는 놀라는 모습도 귀엽네.”
고려인이 안젤라의 모습에 씩 웃으면서 능글거렸지만, 그는 곧 커다란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일단 튑시다, 중위님!”
안쉘은 헤리엇이 헬기 안으로 어정쩡하게 발을 걸친 것을 확인하고 헬기를 가동했다. 손으로 버튼을 꾹꾹 누르고 레버를 올리면서 힘껏 엔진을 가동시키니, 헬기의 프로펠러가 점차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젤라!! 그걸 막아!!”
“어? 어어??”
“중위님!! 고려인이 스파이입니다!!”
리언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 모습에 안쉘은 오히려 한숨을 쉬며 확신했다. 고려인이 아주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그것 봐요. 저놈이 스파이 맞다니까.”
“스, 스파이??”
“아직 누가 스파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서 지껄였냐.”
고려인은 질 나쁜 웃음을 터트리며 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의 얼굴은 귀여웠지만, 반대로 미소 짓는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두두두두-.
헬기 프로펠러 소리가 점점 커졌다. 헤리엇은 안젤라에게 헤드셋을 넘겼기 때문에 그 소음을 막지 못했다. 덕분에 리언이 뭐라고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호랑이가 공격하듯 달려들었다. 이번에 헬기 꼬리를 이로 물고 흔들어 대니 그 안에 있던 이들의 몸도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자랑했던 것만큼 호랑이의 공격으로 크게 망가지진 않았지만, 그 충격이 고스란히 돌아오는 느낌에 고려인이 작게 신음을 삼켰다.
“잠, 잠깐만요. 누가 스파이예요!?”
안젤라는 흔들리는 헬기 좌석에 매달리며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여차하면 헬기 자체를 괴력으로 부술 기세였다. 안젤라의 말에 입을 삐죽 내민 고려인이 기죽은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또라이 같은 놈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연약한 남자일 뿐이었다.
“저놈이 스파이라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증거 있어?”
“내가 설마 증거도 없이 이러겠어?”
고려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었지만 5년 동안 리언과 동고동락하며 그에게 가끔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던 안젤라는 달랐다. 그녀는 농담인지 아닌지 모르는 고려인의 말에 웃을 수가 없어서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애니멀 에스퍼인 호랑이의 몸은 어느새 집채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단테는 처음부터 제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침착하게 대응하고, 그 다음 날 제가 공격을 두 번이나 당한 걸로 알 수 있죠. 그 당시 제가 출마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어야 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곳에 있던 이들이 아니라면.”
안젤라를 진정시키려는 듯 안쉘이 천천히 설명했다.
“그다음부터 대령님은 누군가를 항상 빼거나, 그가 없을 때 일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유일하게 그 자리에 계속 없었던 이가 누구인지 혹시 안젤라는 기억하십니까?”
안젤라는 딱딱하게 굳어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쐐기를 박듯 안쉘은 인상을 찌푸렸다.
“항상 같은 시간, 이장님하고 순찰을 가기 위해 리언은 자리를 비웠습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 이장님은 5년 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누군가가 차지해 리언의 알리바이를 증명했어요.”
“…설마.”
“이장과 리언은 단테 막심이 보낸 스파이였습니다.”
고려인이 준 서류를 떠올리며 안쉘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안쉘은 안젤라와 리언을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애초에 안쉘은 리언이 스파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그냥 이곳에서 멀어져 헤리엇을 안전한 곳, 엔저에게 인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단테 막심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곳은 이제 안전하지 못했다.
안젤라가 망연자실해 하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리언과 함께 이장님을 자주 만났다.
그 사람은 무척 괄괄하고 호탕한 노인네였다. 가끔 두 사람에게 술을 주면서 동네 주민들과 낄낄 웃기도 했다. 어디서부터가 단테의 계략인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5년 동안 부하 직원으로 리언을 꽤 귀여워했던 헤리엇은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안젤라는 충격에 굳어 버린 눈으로 저 멀리서 울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리언을 번갈아 쳐다봤다. 리언이 물기에 젖은 눈으로 절망스럽게 소리쳤다.
“조금이었는데… 아주, 아주 조금이었는데.”
그러면 안젤라가 자신의 배신을 알게 되지도, 헤리엇을 상처 입히는 일도, 자신이 이렇게 절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면서 리언이 고통스럽게 눈을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허엉 하고 울면서 소리쳤다.
리언은 스파이였지만, 5년 동안 헤리엇과 함께 있으면서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단테 막심이 처음 이곳으로 그를 보냈을 때, 매우 긴장했고 무서웠고 겁이 났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저 대장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계속 숨겨 왔었는데!!”
리언이 소리를 지르며 헤리엇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상관은 늘 마이페이스라서, 눈썹을 팔자로 내린 채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더욱 참담한 기분을 느낀 리언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를 이곳에 보낸 이가 최후의 수단으로 쓰라는 그 방법을 쓰기 위해.
고려인은 리언이 무슨 짓을 할지 알아차렸는지 뒤를 돌아 헤리엇의 귀를 막으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말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리언의 목소리가 헤리엇을 덮치는 게 더 빨랐다.
“네 힘을 보여 줘!! 모리어티!!!”
그냥, 그때, 그 앞에, 셜록홈즈라는 책이 있어서. 그래서 그걸로 키워드를 만들었다고, 단테 대통령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리언에게 자상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헤리엇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세뇌 키워드는 그의 유흥거리조차도 되지 못했다.
“…아.”
헤리엇의 몸이 잠시 경련하듯 떨렸다.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찌푸리고, 헉, 하고 숨을 들이켜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면서 고통은 계속되었는지 몸은 잘게 경련했다.
“헤리엇 님?”
“망했다, 망했어. 젠장.”
고려인은 혼비백산하여 작은 몸을 움직여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헤리엇의 복부에 발을 올리며 절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대장.”
안쉘은 어젯밤에 엔저 맥과이어가 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 만약 선배가, 세뇌 키워드에 걸리면… 선배를 버리고 도망쳐라.
그에 증명하듯 헤리엇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복부에 발을 올린 고려인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뻗었다.
고려인은 숨을 들이켜며 헤리엇을 헬기 밖으로 떨어트리기 위해 발로 힘껏 찼다. 헤리엇은 바닥에 떨어져 몇 바퀴 구르고 고개를 계속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아직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출발해!!”
고려인이 헬기의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헤리엇은 가만히 앉아 몇 차례 경련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하얀 눈동자는 여전히 상냥한 빛으로 반짝였다.
얼굴에는 늘 짓는 미소가 흘렀고 가볍게 다가오는 몸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리언도 그걸 느꼈는지 헤리엇을 향해 헉헉거리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고려인은 쾅! 하고 짧은 다리를 들어 안쉘의 팔꿈치를 찼다. 그에 조종 레버를 쥐고 있던 안쉘의 손이 뻗어나가, 프로펠러가 돌아가기만 하던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붕 떴다.
호랑이가 헬리콥터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위로 점점 떠오르는 헬기는 한 번 휘청거렸다가 고도를 되찾았다.
“헤리엇 님을 두고 가겠다고요?!”
안쉘은 욕설을 삼키며 고도를 조금 내리려고 핸들을 잡았다.
그때 헤리엇이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 하나를 들어 헬기를 향해 힘껏 던졌다. 우웅 하고 프로펠러를 향해 돌이 날아들었다.
“우측으로 핸들 꺾어요!!!”
“젠장!”
안쉘은 숨을 들이마시며 핸들을 확 꺾었다. 온몸의 축이 왼쪽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프로펠러를 지나쳐 날아갔지만, 헬기가 크게 휘청거릴 정도로 돌이 튕겨 나갔다. 괴물같이 무서운 힘이었다.
“리, 리언이… 대, 대장한테…….”
안젤라가 울면서 말했다. 안쉘은 정신없는 와중에 다시 헬기를 돌려야 하나 고민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중에서 고려인이 유일하게 정신 차리고 그나마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미 늦었어요. 키워드를 들었으니 세뇌가 풀릴 때까지 대장은 키워드 주인의 말만 들을 거예요.”
“…주인?”
“단테.”
“아직 그 개의 목줄은 내가 가지고 있단다.”
그게 그 뜻이었구나.
헤리엇을 지칭함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일 줄 생각도 하지 못했던 안쉘은 탄식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안젤라를 따라 눈물을 흘리면서 핸들을 잡았다.
이 사실을 엔저가 알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부터 일었다. 목숨을 다해 지키고 싶었던 선배였을 텐데 자신의 부족함으로 지키지 못했다. 그뿐일까. 단테 막심의 손아귀에 넘어가기까지 했다.
안쉘은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헤리엇의 모습이 아주 얼핏 보였다. 그는 멍하니 헬기를 올려다보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유약해 보일 정도로 착한 얼굴이었다.
엔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분홍색으로 물들던 사람이 다시 새하얗게 변했다. 헤리엇의 옆에서 리언은 매우 슬픈 얼굴로 주저앉아 헤리엇과 헬기, 그리고 다른 곳을 멍하니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안쉘은 힘이 빠지려는 손을 겨우 붙잡으며 핸들을 붙잡아 고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다가, 곧 엔저 맥과이어와 접선하기로 했던 곳을 향해 헬기를 돌렸다.
헬기 안은 점차 숨소리도 사라지고, 참담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연료를 확인하던 안쉘은 고도를 조금씩 내리며 프로펠러 속도를 조절했다. 버튼과 레버 내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안젤라마저 숨을 죽이며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점차 안정된 상태로 날아가는 헬기는 도시를 빙 둘러 엔저가 말한 착륙장으로 부지런히 날아가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착륙장에 두어 명의 군인이 보였다. 그들 모두 안쉘이 아는 엔저 부대의 사람들이었다.
안쉘은 떨리는 손으로 착륙 준비를 하다가, 거칠어지는 숨결에 입술을 악물었다.
노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는 제복을 입고 장교모도 쓰지 못한 엔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헬기가 착륙장에 무사히 착륙했지만, 헬기 운전석 안에서 안쉘은 손을 덜덜 떨기만 하고 차마 나가지 못했다.
그러자 노엘이 엔저에게 무어라 속삭였고, 곧 엔저가 헬기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안쉘은 감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헬기의 문이 뜯길 것처럼 열리고, 참담한 분위기의 안쪽과 마주한 엔저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안쉘이 겨우 눈을 떠 엔저를 바라보았다.
“헤리엇 님께서…….”
안쉘은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무기력하게 말했다.
엔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노엘과 반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같은 구역에서 태어났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노엘은 고아로 빈민가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가난하게 자랐다. 가진 것 없이 치이고 빼앗기고 치열하게 살아가며 버텼다. 덕분에 그는 어릴 때부터 총을 다룰 수 있었으며 도덕적 관념이 일반인들보다 현저히 부족했다.
제대로 된 교육 한 번 배우지도 못하고 마약상의 밑에서 일하던 노엘은 열일곱 살에 초능력이 발현되어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연줄도 없이 늦은 나이에 능력이 발현된 노엘은 그야말로 군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개같이 굴렀다.
10년 동안 하릴없이 노역장에서 보석이나 탐지하다가 스물여덟 살에 운이 좋게 엔저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그것은 인생에서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능력이 발현되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전환점을 아주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정찰조인 퍼스트 군함에 탑승했고, 덕분에 현재 서른두 살의 나이로 직위는 소위, 나름 높은 연봉을 받으며 능력껏 살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노엘은 자신과 똑같지만, 전혀 다른 반을 만났다.
반은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삶을 살았다. 부모는 유명한 가수이자 아티스트였고 매해 벌어들이는 돈이 몇백 억에 가까웠다. 그들은 외동아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반은 편안하고 안락한 유년기를 보냈다.
하나뿐인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부모의 밑에서 그는 돈과 부모의 사랑 둘 다 모자란 것 없이 생활했다. 그런 어느 날 그의 나이 열일곱 살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반이 능력자로 발현한 것이다.
반의 부모는 일반인이었기 때문에, 반 자신도 능력이 발현되었을 땐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절망하고 놀라 했다. 부모는 슬퍼하며 울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법을 어길 순 없었다. 반의 부모는 아들이 군에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여러 방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온갖 인맥은 총출동하여 반은 군 생활도 꽤 쾌적하게 보낼 수 있었다.
반은 부모의 덕에 노역장에 가진 않았지만, 자신의 탐지 능력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행정직에서 허송세월하던 반을 엔저가 자신의 부대로 데려왔다. 그리고 노엘과 마찬가지로 정찰조인 퍼스트 군함에 탑승하게 되었다. 그의 직위는 원사. 부사관 최고 계급이었으나 장교는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번 달부터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연인 사이였다. 지금 같은 전란의 시기에 그러고 싶으냐고 주변에서 많은 타박을 받았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이런 시기이니 사랑이 싹트는 것이라고 뻔뻔하게 대답하고 다녔다.
그런 노엘과 반 앞에 굴삭기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안쉘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누군가 건들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머리카락을 죄 뜯더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중위님, 입에서 피가 나옵니다.”
노엘이 보다 못해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의 주변에 떠도는 분위기가 매우 가라앉아 있어 보기만 해도 이쪽까지 우울해질 지경이었다. 안쉘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이, 개 같은… 병신, 같은… 나는, 왜 이딴…….”
한숨을 내쉰 반이 결국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팔을 번쩍 들었다. 그렇게 노엘과 반이 안쉘을 보며 걱정할 때, 그는 지구 내핵까지 도달해 속이 문드러지게 울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 더 빨리 헤리엇을 데리고 도망쳤다면, 혹은 조금 더 은밀하게 움직였다면. 리언이 스파이임을 의심하고 있었다면. 자비 없이 그를 쏴 죽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끝없이 자책하며 그때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헤리엇은 정말로 도화지 같은 사람이었다. 처음 만날 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감정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안쉘이 느끼기에도 그는 참 많이 변해 있었다.
엔저에게 호감이 간다면서 안쉘에게 조언을 구하던 헤리엇은 볼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심장 박동 수가 장난이 아니라며 사랑이냐고 놀리던 고려인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그렇게 강한 사람이 서툴게 움직이며 덤벼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헬기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던 얼굴까지 삼중으로 떠올리며 안쉘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망쳤어. 내가 망친 거야.
안쉘은 몇 번이나 자책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러는 모습이 지금 얼마나 얼간이 같고 어리석은지 알아도 도무지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장교모도 쓰지 못하고 달려 나오던 엔저가 떠올랐다. 그는 안쉘을 책망하지 않고 바로 비밀 기지로 세 사람을 이끌었다.
비밀 기지는 지하 벙커를 본떠 만든 방어책이었는데, 놀랍게도 안에서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각 구역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만약 코드를 입력하지 못한 이가 침입했을 시 경보음이 울렸다.
그뿐만 아니라, 불청객이 난입할 땐 방마다 숨겨진 기관총이 튀어나와 생체에너지를 내는 상대에게 일제히 불을 뿜어대며 난사하는 장치까지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분명 헤리엇도 안심하고 머물 수 있을 터였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고려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뒤를 따라 엔저도 함께 들어와 노엘과 반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그는 노트북을 회의용 탁자에 올리며 혀를 쯧 찼다.
“땅 파고 있을 줄 알았지. 그만 좀 파고 이리 와 봐요.”
고작 이틀 만에 안쉘을 파악한 고려인은 굴삭기로 땅을 파고 있는 그의 멱살을 잡아채 끌고 나왔다.
고려인이 노트북 전원을 켜면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테 막심을 아직도 모르겠어요?”
고려인은 단테 막심을 떠올리는지 눈을 찡그렸다. 허공에 스크린 화면이 펴지며 노트북 화면을 비추었다. 고려인은 가슴 포켓에 꽂아 둔 볼펜을 꺼내 책상을 탁하고 내려쳤다.
“퍼포먼스예요. 일부러 리언 그놈을 이용한 거라고요. 빌어먹을 영감탱.”
“…그 말은.”
“굳이 리언 놈을 쓰지 않아도 언제든지 세뇌 키워드를 발동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당시엔 너무 당황해서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 그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아무 수작도 부리지 않고 그곳에 대장을 놔 둘리 없어요. 생각해 보면, 오히려 여기에 대장이 없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요. 능력도 쓸 수 없는 우리가 대장을 상대로 몇 분이나 버틸 수 있겠어요.”
고려인의 말에 안쉘은 거멓게 변한 낯빛을 얼굴에 달고 생각했다. 헤리엇은 유약해 보이는 사람이었고, 늘 온화하게 웃었고, 마이페이스가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기와는 다르게 적에게는 가차 없었다. 그리고 보는 이가 섬뜩할 정도로 체술에 강했다. 능력을 쓸 수 있는 군인 열두 명을 인스턴트 카레 데우는 시간에 두들겨 패 무력화시킬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고려인은 무슨 생각할 것이 있냐는 듯 장난스럽게 씩 웃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이 피바다가 되고도 남았을걸.”
안쉘의 시선이 엔저를 향했다. 엔저는 턱을 쓰다듬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안쉘과 눈이 마주치자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뭐.”
“…….”
“감히 내가 선배를 공격하라고?”
“…….”
“선배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말하는 엔저의 표정은 무척 황홀했다. 안쉘은 그의 한심함에 잠시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턱 끝까지 내려앉은 안쉘의 눈 밑 그림자와 우울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가셨다.
겨우 정신을 차린 안쉘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면… 헤리엇 님은.”
“그딴 짓 하지 않아도 대장의 뇌를 조물딱거릴 수 있었단 소리지.”
가설이긴 했지만, 사실 엔저도 고려인도 이 정도 변수는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리언이 이렇게 빨리 무너져 내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고려인은 혀를 차며 그 멍청한 놈을 떠올렸다. 자기변명이나 하며 연민에 빠진 얼간이 같은 놈. 명령을 쳐 들으면 그냥 들을 것이지, 괜한 죄책감에 휩싸여 이도 저도 못 하다가 결국 여러 사람 가슴에 못이나 박고 한심하게 우는 꼴이라니. 고려인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장 머릿속에는 칩이 박혀 있는데, 이거 폭발하면 뇌가 산산조각이 나서 즉사예요.”
고려인은 심각하게 말하면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볼펜을 탁탁 내려치면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볼펜이 탁탁 책상을 칠 때마다 허공에 떠 있는 화면이 휙휙 바뀌었다.
“이건 물론 내가 해킹으로 전원을 꺼서 발동할 일은 없지만.”
“그렇다면…….”
“하지만 정신지배는 내 전문이 아니라서… 단테가 자살하라고 명령하면 그걸 말릴 순 없어.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선거 전날 대장의 세뇌를 깨트려야 해요. 그래야 단테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으니까.”
고려인은 존대와 반말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헤리엇에게도 그러더니 안쉘과 엔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그의 성격인가 싶었는데 또 그건 아닌지 고려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안쉘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난, 19년을 단테의 공방에서 개처럼 일했어요. 다른 사람도 한 번 만나지도 못하고. 그 어둡고 개 같은 곳에서 오로지 기계만이 친구였지만, 내게 말을 알려 주진 않았어. 그래서 말투가 이따위인 거니까 좀 봐줘요.”
깡, 하고 고려인이 책상을 향해 볼펜을 집어 던졌다. 동시에 스크린 화면에서 단테의 그동안의 행적과 증거자료가 좌르륵 쏟아져 나왔다. 고려인은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려 웃었다.
“우리는 그 영감탱에게 벌레 그 이하였어요. 죽일 가치도 없는 벌레. 그러니까 우리가 알려 줘야 하지 않아? 20년 동안 그 악마가 저지른 악행이 어떤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지.”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노엘과 반은 진지하게 말을 경청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제 야망을 위해 아들인 알시타 막심을 살해했다는 증거를 봤을 땐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처럼 머리까지 흔들었다. 인자하고 온후한 표정 뒤에 그런 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놀라운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헤리엇과 여태까지 죽은 수백, 수천 명의 실험체에게 가한 실험을 보고 기절할 것처럼 놀라 바르르 떨었다. 그들이 상대하는 이의 본모습을 알고 나자 몸을 떨면서 공포에 휩싸였다.
“…괴물이군.”
“어쩌다 그런 괴물이 된 거지? 분명… 위원장으로 있었을 땐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고려인이 잠시 뜸을 들이며 눈을 찌푸렸다. 4시간이 넘는 회의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입을 놀리던 것과는 상반된 표정이었다.
“그리고 대장을 세뇌했단 건… 곧 대령님을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해요.”
모두의 시선이 잠시 엔저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무료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안에 회오리를 만들면서 놀고 있었다.
“버린다고요?”
안쉘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들어가서 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고려인은 혀를 차며 슬슬 회의를 마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엔저 대령님을요? 하지만 대령님은…….”
“국민들의 영웅이지.”
그래, 그 말대로 엔저는 모든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는 다른 어떤 스타들보다 유명했다. 그건 그가 맥과이어 가문의 적장자이기도 했지만, 그의 능력과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남사스럽지만 엔저는 안쉘이 봐도 탄식이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 신장이 크고 비율이 좋아 모델을 했어도 억만장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때 고려인이 틀어 놓은 뉴스에서 막 엔저 맥과이어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국민 영웅, 엔저 맥과이어가 군에서 탈영해, 군법에 따라 그를 제1급 특급범죄자로 공개수배하며, 발견 즉시 사살해도 좋다는 보도였다. 다행히 안쉘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단테 막심이 엔저 맥과이어를 완전히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 * *
델타 막심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엔저 맥과이어가 탈영이라니, 도통 믿기가 힘들었다. 델타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앞에 있는 이를 노려봤다.
하얀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들어 올려질 때마다 힘없이 살랑거렸다. 속눈썹까지 하얀 그는 꿈을 꾸는 모양인지 달리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무슨 꿈이라도 꾸기에 저렇게 곤히 자는지 괜히 깨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델타는 저놈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떠올리고 찝찝한 표정으로 왼쪽 귀를 쓰다듬었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불량품이라는 단어가 절로 붙을 만큼 역겨운 실험을 당한 헤리엇 알스터는 이해할 수 없는 종자였다.
델타는 앞서 오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대통령이자 백부이기도 한 단테에게 불려간 그는 제 앞에 서 있는 이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굳었다.
힘없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보면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니, 잔상조차 희미할 정도로 희끄무레한 사람이 눈에 겨우 들어왔다. 헤리엇 알스터는 작게 미소 지으며 단테 막심의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예전부터 그랬다는 듯 단테의 주름진 손을 잡고 있었다.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단테는 제 조카를 보며 아주 온후하고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너와 함께할 이다. 이름은…….”
단테가 잠시 뜸을 들였다. 헤리엇은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으며 그의 말에 옆에서 덧붙였다.
“헤리엇입니다.”
“그래, 헤리엇.”
단테는 기억하기 싫은 것을 떠올렸는지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하필 그놈을 닮아선.”
그리고 다시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와 껄껄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델타에게 지어 주던 미소와 똑같아 소름이 돋았다. 당신의 명령으로 저 남자가 얼마나 개 같고 역겨운 실험을 당했는지 알면서 그렇게 웃고 있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델타는 소름이 돋아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그래, 헤리엇. 오늘 처음 본 아이인데 고분고분한 게 참 마음에 들어.”
“백부님… 그는.”
“알고 있단다. 그러니 네게 감시역을 맡기는 게 아니냐.”
헤리엇이 곁에 있음에도 단테는 감시역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늙은이의 온후한 미소에 델타는 굳었던 몸을 겨우 풀었다.
제 백부지만 어떨 땐 섬뜩할 정도로 무서웠다.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짓던 헤리엇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호한 표정으로 델타를 보고 있었다.
“엔저가 군을 배신했단다, 얘야.”
단테는 매우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마치 믿었던 친지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 짝으로 점찍어 두던 아이였는데, 매우 안타깝구나.”
델타는 엔저 맥과이어가 탈영해, 지금은 범죄자 신세라는 건 뉴스를 통해 이미 알았다. 지금 온갖 언론사 전체가 엔저 맥과이어에 대한 이야기로 바빠서 지금 북쪽 바다로 군함이 은밀하게 출항하고 있는 사실은 묻히고 있었다.
헤리엇의 눈가가 미미하게 꿈틀거렸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헤리엇은 아주 강한 아이란다. 아카데미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고 들었는데.”
헤리엇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어도 단테는 제 좋을 대로 받아들였다.
“그 애를 잡아 올 수 있겠니? 반항이 심하면 죽여도 좋지만… 최대한 생포했으면 좋겠구나. 늙으니 정도 많아지고 눈물도 많아져.”
단테는 정말 슬프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노인의 등은 쓸쓸해 보였지만 델타는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소름 돋았다.
엔저 맥과이어가 백부에게 생포된다면, 그는 분명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실험을 당한 다음 곱게 죽지도 못할 것이다. 첫눈에 반해 지금도 그 연정을 숨길 마음이 없는 델타는 할 수 있는 한 엔저 맥과이어를 죽이는 게 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엔저 대령님은, 아니 엔저 맥과이어는 지상에서 가장 강한 능력자입니다. 백부님, 엔저를 상대하려면…….”
“그를 데려가니 괜찮을 거다.”
헤리엇 알스터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엔저의 등 뒤에 숨어 있을 뿐인 얼간이였고, 그 역겨운 실험을 당했어도 복수할 생각도 않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숨죽이고 사는 멍청이였다.
엔저 맥과이어가 본인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백부에게 이용당하는 걸 보니 그의 인생도 참 기구한 것 같아 동정심이 생겨 속으로 혀를 찼다.
“알겠습니다.”
델타는 헤리엇과 함께 단테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뒤를 돌았다. 헤리엇은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려 나갔던 왼쪽 귀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참 기구하네. 당신도.”
그 소리를 들은 걸까, 헤리엇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졸린 모양인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고 고개를 들었다.
델타는 지도를 확인하며 뒤를 돌아봤다. 뒤쪽에서 따라붙어 오는 검은 세단 두어 대가 눈에 보였다. 아마 운전사도 백부가 보낸 끄나풀이 분명할 터였다. 헤리엇의 감시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소리다.
“꿈이라도 꾼 거야?’
델타는 다리를 뻗어 툭- 하고 헤리엇의 정강이를 발로 건드렸다. 아프게 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통증이 없을 정도로 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헤리엇의 모습에 델타는 기시감을 느꼈다.
헤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건 마치 개와 고양이를 보며 귀여워하는 마음으로 웃는 것과 같은 미소였다. 그는 놀랍게도 옆자리의 델타 막심을 귀엽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델타는 어이가 없었지만 헤리엇은 태연했다.
“어릴 때 꿈을 꿨는데.”
“…….”
“매우 귀여운 고양이가 나왔어. 새끼 고양이였지. 너처럼 앙칼져 보였는데…….”
델타 막심은 처음 만났을 때 헤리엇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썼는지 반말을 썼는지 헷갈렸다. 어쨌든 헤리엇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델타는 다시 혀를 찼다. 헤리엇은 눈을 살포시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불러서, 나를 좀 사랑해 보라고 속삭였어.”
“그랬더니?”
헤리엇은 고개를 들고 델타와 마주보고 눈을 휘었다. 대답하진 않았지만, 딱히 기억하는 것 같진 않았다. 꿈은 끝났고 헤리엇은 현실에서 눈을 떴으니까.
약 네다섯 대의 군용 차량이 적막한 공터에 줄 서서 멈췄다. 그곳을 뛰어다니며 놀던 주변의 꼬마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 곁으로 모여들었다가 이내 뿔뿔이 사라졌다.
군인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던 어른들의 말을 떠올린 것이다. 차에서 내린 델타는 총을 들었다. 그리고 헤리엇의 멱살을 잡고 차에서 내리게 해 제 앞으로 끌고 왔다. 하지만 헤리엇은 끌려간다는 느낌도 없이 나긋나긋하게 움직이며 델타의 앞에 섰다.
델타 막심의 능력은 소리 증폭, 딱히 전투에 실용적이지 못한 능력이었다. 최대치로 끌어 올리면 사람의 고막을 터뜨리는 등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 상대에게 집중 포격 당하면 끝일 능력이었다.
“당신은 일단 나를 지켜.”
헤리엇의 능력을 실제로 본 적 없는 델타는 지상에선 능력도 쓰지 못하는 그가 불안했지만, 총알받이라도 하라면서 투덜거렸다.
평소에 헤리엇을 지탱해 주던 지팡이가 어디에도 없었다. 시골 마을을 갑자기 떠나오면서 미처 챙기지 못한 탓이다. 절뚝거리며 걷던 헤리엇은 허전한 모양인지 아무것도 없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먼저 엔저의 지하 기지를 습격했던 이들이 하나둘씩 지하 벙커에서 나왔다.
“아무도 없습니다.”
“선수치고 도망간 것 같은데요.”
“메인 시스템을 해킹당한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고려인. 그 이름 석 자가 떠오르자 델타는 이를 갈았다. 언젠간 뒤통수칠 것 같더니, 진짜로 거하게 치는구나.
델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전화를 들어 제 백부에게 전화를 걸며 한숨을 쉬었다.
“네, 백부님. 아무도 없어요. 도망친 것 같습니다.”
단테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사람처럼 끙끙 앓다가, 주변을 수색해 그들이 도망간 위치를 탐색하고 철수하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동원된 인원은 고작 20명, 이걸로 엔저 맥과이어의 털끝이라도 건들 수 있을지 고민하던 델타는 제 옆에서 나긋나긋하게 웃고 있는 헤리엇을 돌아봤다.
“알겠습니다.”
툭- 하고 전화를 끊은 델타가 탐지능력자들을 부르자 네 명의 군인이 튀어나왔다. 백부는 이미 엔저 맥과이어가 선수 쳐서 먼저 이곳을 뜰 것이라고 예상했나 보다. 델타는 그들을 시켜 엔저가 도망간 위치를 탐색하도록 명령했다.
“쉽진 않겠지만…….”
엔저 맥과이어의 도주이니만큼 수많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델타는 네 명의 사내를 각각 동서남북으로 나눠 탐색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는 사이 헤리엇은 주변에 있던 굵은 나뭇가지를 들어 지팡이 삼아 움직이고 있었다. 절뚝거리면서 속도를 유지하고 걷는 게 신기했다.
세뇌라고 했나. 어쨌든 백부의 말을 잘 듣는 개가 되었다고 했으니. 기억도 사라진 건가? 그래서 저렇게 자존심도 없이 웃을 수 있는 건가.
궁금증이 인 델타가 헤리엇에게 다가갔다.
“이봐 당신.”
“음?”
“정말 아무 기억도 없는 거야?”
델타의 의심 어린 말에 헤리엇은 고개를 돌려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리다가, 다가오는 이들로 인해 입을 다물었다. 동서남북을 각각 탐색하고 있던 탐지능력자들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동쪽, 한쪽에서 발자국이 끊겼습니다.”
“서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쪽, 이하동문.”
“…북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델타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엔저의 능력은 바람이었다. 그것도 바람 계열 능력 중에선 최상위 능력자였다. 그의 능력으로 도시 반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을 정도다. 고작 몇 명, 혹은 몇십 명의 사람을 하늘로 띄우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헬기 준비하세요.”
델타는 무전기를 들었다.
준비된 헬기는 총 두 대였다. 갑작스럽게 요청한 것 치곤 쉽게 허가를 받았다. 곧 보급용 한 대도 10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델타는 두 대에 먼저 탐색능력자 세 명과 나머지 능력자들을 태웠다.
“제가 보급용에 탑승하겠습니다. 먼저 위에서 탐색을 시작하세요.”
델타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들이 헬기에 탑승했다. 소음을 내는 헬기에 델타가 귀를 막으며 눈을 찌푸렸다. 군용 헬기이긴 했지만, 소음이 너무 심했다. 헤리엇은 멍하니 눈앞의 헬기를 보고 있었다.
한 대가 먼저 하늘로 오르자 나머지 한 대도 그 뒤를 따랐다. 양쪽으로 나눠 탐색을 시작하는 걸 보고 델타는 등을 돌렸다. 지금 남아 있는 인원은 고작 네 명이었다. 탐지 능력자 한명과 델타와 헤리엇, 그리고 직위도 기억나지 않는 바람계 능력자 한 명이었다.
“백부에게 지원군을 더 요청해야겠어.”
짜증을 내며 델타가 무전기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헤리엇이 움직여 델타의 앞에 섰다. 그가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으며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나이프가 들려 있었는데, 그 끝이 뭉툭하고 날이 빠져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그 순간, 델타가 있던 곳으로 이능력 결계가 펼쳐졌다. 델타와 헤리엇을 가둔 결계는 투명한 막처럼 보이기도 했고 유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 세계에 이런 이능력 결계를 가진 이는 많지 않다.
“…안쉘 리.”
그에게 당한 바가 많아 유감이 많은 델타가 이를 벅벅 갈며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안쉘은 5년 전 백부가 엔저에게 붙여 준 놈이었다. 꽤 일 처리가 빠르고 유능해서 기억에 남았다.
평생 머저리처럼 백부에게 이용이나 당하면 될 걸 갑자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질 않나,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었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대령님도 안 계시는데.”
“그렇다고 헤리엇 님을 두고 갈 순 없잖아요.”
그 뒤로 몇 명의 사내가 더 보였다. 거기엔 고려인도 함께였다. 그는 이상한 기계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어디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로봇 안이었다.
다만 크기가 매우 작아 3m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 로봇을 보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고려인이 한숨을 쉬었다.
헤리엇은 눈을 깜박이다가 그들을 보고 작게 웃었다. 설마 기억이 돌아왔나 싶어 델타가 긴장하는 동시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안녕, 안쉘.”
“……”
“……”
그곳에 있던 이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안쉘은 물론 그 뒤에 있던 고려인까지 입을 다물고 멍하니 헤리엇을 보았다. 모두의 주목을 받음에도 헤리엇은 무척 태연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안쉘의 결계를 톡톡 치고 있었다.
“…헤리엇 님?”
“음.”
“기억이…….”
안쉘은 차마 목이 메는지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헤리엇은 안쉘에게 자주 지어 주던 웃음을 흘리며 나이프를 고쳐 들고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엔저는 잘 지내니?”
헤리엇이 나이프를 휘둘러 안쉘의 이능력 결계를 두 동강 냈다.
저렇게 쉽게 두 동강 날 결계가 아닌데!
안쉘은 경악하며 다시 손을 들었다. 헤리엇이 두 동강 낸 결계 위로 또 다른 결계가 생겨났다.
“서, 설마. 헤리엇 님 기억이 그대로 있으신 겁니까!?”
“음…….”
헤리엇은 제 앞에 생긴 결계 역시 두 동강 내면서 빠르게 안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떤 기억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기지에서 있던 기억은 모두 하고 있지.”
헤리엇이 회상하듯 눈을 깜박거렸다. 그의 앞에서 리언이 엉엉 울며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헤리엇의 바지춤을 잡고 대장,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고 멈추지도 않고 입을 놀렸다.
물론 헤리엇은 리언이 왜 저렇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윽고 리언이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복종은 헤리엇에게 예전의 감각을 일깨웠다. 동쪽 바다에서 헤리엇에게 내려진 명령이 오로지 섬멸이었다면, 지금은 그야말로 복종 그 자체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헤리엇은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대로 리언과 함께 대통령이 기거하는 구역으로 복귀했고, 단테의 명령대로 안쉘과 엔저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경악하는 안쉘에게 빠르게 다가간 헤리엇은 망설임 없이 팔꿈치를 들어 안쉘을 목덜미를 향해 내리찍었다. 죽을 만큼 아프고 어디 하나 부러지겠지만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헤리엇의 공격에 정신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던 안쉘이 머리 위로 최대한 두껍고 견고한 이능력 결계를 펼쳤다. 그의 발동 조건은 손가락을 위로 올리는 간단한 것이었다.
챙그랑-.
아니, 그러니까… 쉽게 깨지는 유리 조각 같은 게 아닌데!
안쉘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결계의 파편에 눈을 질끈 감았다. 견고하다고 자부하던 결계가 헤리엇의 팔꿈치 한방으로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다. 헤리엇은 안쉘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낚아채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었다.
“켈록!!”
안쉘이 위액을 내뱉으며 꿇어앉았다. 고려인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취 총을 들어 헤리엇을 향해 발사했다.
로봇 안에 탑재된 마취총은 어지간한 기관총보다 위력이 더 강했다. 하지만 헤리엇은 싱긋 웃으며 안쉘의 멱살을 잡고 그를 방패 삼아 마취 총을 피했다.
푹-, 오히려 안쉘의 왼쪽 어깨에 마취약이 박히고 말았다.
“하하, 대장 좀 봐줘.”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고려인이 하는 말에도 헤리엇은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고려인이 타고 있는 로봇의 이음새로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헤리엇이 나이프를 들고 고려인의 앞에 서 있었다. 문제는 고려인이 운전대를 잡고 레버를 당겨도 로봇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능력자들 능력에도 버티는 합금 로봇인데.’
“하하… 너무 괴물이잖아, 대장.”
적으로 만나니 도저히 도망칠 재간이 없었다. 땀을 흘리며 고려인이 두 손을 들었다. 어차피 도망도 못 가는 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겠다.
“…대장, 엔저 대령님이 슬퍼할 거야.”
“음…….”
“기억이 있다니 놀라운걸? 대장 지금 기분이 어때?”
헤리엇은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어린 이들에게 약했다. 동물에겐 더 약했고, 그들을 공평하게 귀여워했다. 고려인 역시 헤리엇이 귀여워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헤리엇은 나이프를 들고 로봇 이음새를 찌르면서 착실히 대답해 줬다.
“어떤 기분 말하는 거니?”
“…지금, 좆, 같지 않냐고.”
“어째서?”
이래서 더 무섭다.
어디 호러 영화에라도 출연하냐고, 혹시 대본대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어쩌면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단테 막심의 계획이 아닐까 할 정도로 섬뜩하고 소름이 돋았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 나이프를 들고 공격하는 헤리엇의 모습은 꿈에라도 나올까 두려웠다.
“대장을 그렇게 만들었잖아. 어… 그러니까 아프게.”
결국 로봇의 사지가 잘리고 고려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에 쓰러진 로봇 위로 헤리엇의 발이 보였다. 고려인은 로봇 안에서 튀어나와 주저앉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음… 아프지만 견딜 만했고. 별로 화도 나지 않았어.”
헤리엇은 살짝 고개를 틀어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했다. 안쉘이 기습적으로 헤리엇에게 이능력 결계를 날렸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머리 뒤에도 눈이 달린 게 아닌데 어떻게 갑자기 소환된 결계를 피한단 말인가. 안쉘이 이를 악물고 헤리엇에게 덤벼들었다.
“헤리엇 님, 제가, 제가 무능력해서 죄송했습니다!!”
헤리엇은 안쉘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의 얼굴을 내려치면서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안쉘은 이까지 시릴 정도로 욱신거리는 타격에 비틀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에 정신 차린 델타가 안쉘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 일단 생포해!! 백부님께 끌고 가겠어!!”
엔저 맥과이어는 사살하라고 했지만, 저 사내는 아니다. 분명 백부도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델타가 소리 지르자, 헤리엇은 곤란한 듯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안쉘의 멱살을 잡고 마치 기절시키려고 하는 듯 손을 들었다.
“아플 거야, 안쉘.”
고저 없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안쉘 역시 고려인과 마찬가지로 소름이 돋아 몸을 파르르 떨었다.
“선배.”
안쉘과 헤리엇이 동시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건 매우 들뜨고 흥분으로 고조된 목소리였다. 안쉘이 얻어맞아 부어터진 눈으로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헤리엇의 등을 응시했다.
기지 내에 있던 자료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옮긴 엔저 맥과이어는 언제 왔는지 태연하고 근사한 모습이었다. 기척도 내지 않고 나타난 엔저는 헤리엇을 보면서 쓰고 있던 장교모를 얼른 벗었다.
그는 흥분해 상기된 표정으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수줍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어요, 선배.”
“오, 엔저…….”
귀여운 후배를 보면서 헤리엇은 두들겨 패던 그의 부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주먹을 내린 헤리엇이 제 손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하얀 눈동자에 엔저를 담으며 헤리엇은 부드럽게 말했다.
“오랜만이네,”
“네.”
상황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매우 친근했다. 헤리엇은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후배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고, 엔저는 하늘 같은 선배를 보면서 흥분하고 있었다.
아랫도리 발기 좀 안 시키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냐고 안쉘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헤리엇은 웃으며 엔저를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역시 선배이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실력이라니.”
엔저는 감히 제가 선배의 나이프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감동에 벅차 울먹이며 헤리엇의 나이프를 가볍게 피했다. 헤리엇이 나이프를 피한 엔저의 멱살을 붙잡고 마치 껴안듯이 그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엔저의 무릎을 발로 살짝 밟으며 그의 몸을 땅으로 처박았다.
“오, 훌륭해 엔저. 좋은 낙법이야.”
“영광이에요, 선배.”
저 새끼들 뭐 하는 거지.
안쉘은 그동안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던 날을 떠올리며 코를 슥 훔쳤다. 헤리엇이 손속을 두지 않고 골고루 쥐어 팬 덕분에 얼굴이고 몸이고 멍이 스멀스멀 노란색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팼으면 벌써 멍이 올라오나 싶다.
헤리엇과 엔저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서로를 공격했다. 헤리엇이 공격하면 엔저가 부드럽게 피하기를 반복했다.
델타가 초조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옆에 있던 이에게 총을 받았다. 총을 헤리엇과 대치 중인 엔저에게 겨누는 동시에, 엔저의 고개가 헤리엇이 뻗은 나이프를 따라 왼쪽으로 돌아갔다.
헤리엇이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엔저의 얼굴을 응시했다. 델타 막심도, 뒤에서 엄호하려고 손을 뻗던 안쉘도 그에 함께 정지했다. 헤리엇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엔저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가 등을 돌렸다.
“…뭐야?”
델타는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헤리엇에게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나 헤리엇은 무척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상대가 너무 다쳐 생포는 틀렸어. 죽이라는 명령도 있었지만 생포할 기회가 있을 테니 오늘은 그만 철수하자.”
“…뭐?”
미쳤어? 하고 델타가 소리 지르려다가, 엔저 맥과이어의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델타의 영웅이었다. 루비처럼 빛나는 그의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헤리엇의 등을 잡아먹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델타는 이를 갈다가, 그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말았다. 엔저 맥과이어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델타는 그 무섭고 두려운 백부에게 비밀을 만들고야 말았다.
“…….”
델타는 엔저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총을 겨눠 누군가를 향해 발포했다. 탕- 탕- 두 발의 총성과 함께 델타와 함께 있던 군인 두 명이 털썩, 하고 쓰러졌다.
그들은 머리에 총알이 박히고 즉사했다. 경련조차 하지 않고 죽은 그들을 보며 델타는 헤리엇과 함께 보급용 헬기에 올라탔다.
“헬기 운전할 줄 알아?”
“음.”
안쉘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엔저를 돌아봤다. 저대로 헤리엇을 보내도 되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헤리엇은 헬기에 오르기 전 엔저를 돌아봤다.
“…엔저, 상처 치료 꼭 하렴.”
“…….”
엔저의 볼에는 아주 작은 새끼손가락만 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를 본 헤리엇이 공격을 멈추고 등을 돌린 것이다.
저 상처 때문에 엔저 맥과이어가 설마 생포 불가능할 정도로 다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헤리엇의 시선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안타까운 사람처럼 보였다. 고작 엔저의 얼굴에 조그마한 상처 하나 입혔다고…….
고려인과 안쉘을 향해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으며 웃던 그가 말이다.
주르륵.
때마침 안쉘의 코 밑으로 뜨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훔치니 쌍코피가 터졌다.
댁 세뇌당했다면서.
헤리엇에게 비 오는 날 먼지도 안 나게 줘 터진 안쉘은 쌍코피를 흘리며 엔저의 얼굴에 난 상처를 그저 한없이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