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기계광 탈영병
능력자의 능력 사용조건은 의외로 까다로운 경우가 많았다. 안쉘이나 엔저 같은 경우 공간 제한 없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능력계열 등급 중에는 SSS급 정도로 매겨졌다.
정신지배나 소리를 이용한 능력자들은 귀를 막고 있는 적이나 귀머거리에게는 통하지 않고, 의외로 자연계 능력자들 역시 공간 제약을 많이 받았다. 지금 헤리엇이 물이 있는 장소가 아니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말이다.
“헤리엇 님, 엄호하겠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머저리 같았을지 안쉘은 3분 만에 눈치챌 수 있었다. 헤리엇은 엄호 따위 필요 없을 정도로 강했다. 오히려 도와준다고 어설프게 설치면 그의 움직임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신체 발화 능력자가 있었는지, 활활 타오르는 불을 온몸에 두르고 헤리엇에게 돌진하던 사내가 돌려차기 한 방으로 벽에 나뒹군 게 매타작의 시작이었다.
물론 상대도 어수룩했던 건 아니었다. 그들도 훈련받은 군인이었고, 잠시 흐트러졌던 대열은 금방 회복되었다. 한 명이 허무하게 고꾸라지는 모습에 나머지 인원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헤리엇의 주변을 포위했다.
그 순간 헤리엇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그는 미리 가져온 아주 작은 권총으로 가장 앞에 있는 사내의 미간을 향해 쐈다.
물론 통하진 않았다. 보통 훈련받은 능력자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사람이 얼간이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사내가 총성으로 주춤하는 사이 헤리엇이 움직였다.
단숨에 배열 중앙으로 끼어든 헤리엇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눈앞에 있는 상대의 턱을 손바닥으로 후려 올려 친 일이었다. 그 다음, 무너지는 그의 몸을 붙잡고 곤란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사내의 육중한 몸을 한 손으로 붙잡아 덜렁덜렁 들어 올렸다.
용 머리 가면의 육중한 몸집의 사내가 한방에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헤리엇의 손에 잡혀 있었다. 새하얀 헤리엇의 팔뚝에 힘줄이 잔뜩 솟아났다.
자신들의 동료를 방패막이로 쓰는 것에 다들 주춤한 사이 헤리엇이 허리춤에 숨겨 둔 단도를 꺼냈다. 과일을 깎는 용도로 쓰이는 과도만큼이나 작은 단도였다.
그리고 안쉘은 그것이 리언이 참외를 깎는 데 썼던 단도임을 눈치챘다. 옆에서 능력을 사용하려던 사내의 팔뚝에 가볍게 단도를 꽂아 넣은 헤리엇은 바로 상체를 숙였다. 한 손으로 육중한 사내를 들고 있다고 생각지 못할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주춤거리며 능력을 사용하려던 다른 사내의 무릎을 발로 차서 무너트린 다음 헤리엇은 그의 목덜미를 잡고 무릎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빠각 소리를 내며 사내의 가면이 부서졌다.
정신도 못 차리고 무너지는 이들의 혼을 쏙 빼놓으며 제게 달려드는 사내들을 요리조리 피하던 헤리엇이 갑자기 다리를 들어 피했다. 헤리엇이 딛고 있던 바닥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솟아나 헤리엇의 불편한 왼쪽 다리를 향해 공격을 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리엇은 몸을 빙글 돌려 피하며 들어오는 칼날을 무릎으로 두 동강 내버렸다.
“아, 뭐 저런 새끼가!”
헤리엇은 가면 사이로 얼핏 보이는 얼굴이 꽤 늙은 사내의 것임을 확인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바닥에 손을 댄 채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쥐 가면의 사내에게 두 동강 난 칼날을 던졌다.
“아악!”
그 칼로 사내의 어깨가 찢어졌다. 아수라장도 이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그들의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다만 헤리엇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뿐이다. 능력과 총을 이용해 무력화시키려고 해도 그들보다 헤리엇이 한 수 위였다. 능력을 사용하는 이들을 정확히 파악해서 약점을 파고드는 헤리엇의 움직임은 망설임이 없었다.
저번 연구소 침입 때도 놀라웠는데, 저 정도일 줄이야.
안쉘은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돼지 가면의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능력을 사용했다. 그는 꽤 보기 드문 이공간 능력자였다. 안쉘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SSS급 능력자였다.
공간을 찢고 도망가려는 사내의 등을 향해 헤리엇이 총을 발포했다. 날아가던 총알에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산화했고 돼지 가면의 사내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안쉘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고, 헤리엇은 바닥에서 피가 묻은 단도를 집어 들었다. 창고 안에 ‘으으… 아아…….’ 하고 신음을 흘리며 널브러진 열 명 사이로 헤리엇이 잠잠히 서 있었다.
이 모든 매타작이 고작 3분 만에 전부 끝났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던 토끼 가면의 사내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는 풍채 좋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에구구 소리를 냈다.
“몸이 늙으면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요즘은 노안도 왔거든.”
헤리엇은 볼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토끼 가면의 사내는 쯧쯧 혀를 차며 바닥에 뒹구는 이들을 보았다.
“니들은 한 명 가지고 이렇게 끙끙거리냐. 특수부대라는 이름이 아깝다.”
“으… 으으… 한 번 붙어 보든가요…….”
토끼 가면 사내 발밑에서 바르르 떠는 사내는 헤리엇의 무릎에 관자놀이를 처 맞고 능력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기절해 버린 양 가면의 사내였다.
“그래, 그러면 나는 몇 분 정도 걸릴 것 같나?”
토끼 가면 사내가 헤리엇을 향해 말했다. 헤리엇은 곤란한 듯 미소를 머금으며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무기질적인 하얀 눈동자가 토끼 가면을 쓴 사내를 담았다. 토끼 가면 사내의 주변으로 불덩이가 몇 개 타올랐다.
위험하다 싶을 때 총알을 산화시킨 불 능력자는 역시 그인 것 같았다. 그의 주변으로 불기둥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꽤나 위협적인 능력이었다. 안쉘은 그의 타오르는 사나운 불기둥에 기겁했다.
“15초 정도.”
하지만 헤리엇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토끼 가면의 사내는 한참 동안 헤리엇을 쳐다보는 듯하더니 두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불기둥과 창고 안을 채우던 불들이 모두 꺼졌다. 숨 막히는 열기가 훅 줄어들자 안쉘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려온 거야?”
토끼 가면의 사내가 안쉘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불이 꺼지는 바람에 창고 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이 헤리엇에게 잔뜩 얻어맞은 사내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으으…….”
신음을 흘리며 바르작거리는 그들을 보며 안쉘은 경계하면서도 동정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창고의 조명이 켜졌다. 아까와 다른 환한 빛이 나왔다. 가면이 깨진 사내들이 피를 닦으며 끙끙거리고 서 있었다.
헤리엇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살폈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나이가 꽤 지긋한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토끼 가면의 사내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의 얼굴을 본 안쉘은 기절할 것처럼 놀라 입을 벌렸다.
“제이든, 올던…….”
그는 평화위원장이자 단테 막심의 오른팔로 알려진 제이든 올던이었다. 돌연 칩거했다가 이번에 화려하게 복귀한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헤리엇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항상 알시타 막심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아니면 보육원에 혼자 찾아온 알시타를 찾아온 것이었든가. 그는 늘 알시타를 걱정했다.
“혼자 다니지 좀 마, 알시타. 위험하다고.”
제이든은 늘 그렇게 알시타에게 화를 냈다.
“자아, 능력은 확인했고 이제부턴 진짜 협상이라고. 내게 너희의 가치를 증명했으니 나도 내 가치를 증명해야지.”
제이든의 곁으로 사내들이 모였다. 그들은 마치 주인을 지키는 사냥개처럼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물론 헤리엇에게 얻어터져 볼품없이 멍이 든 얼굴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제이든은 미리 준비해 둔 듯 탁자 위로 사진 두 장을 던졌다. 안쉘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 사진을 살펴봤다. 사진 속 두 명의 남자 모두 안쉘이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유명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난번, 지지난번 대선 당시 단테에게 대항한 대통령 후보자들이었다.
늙고 중후한 분위기에 나름대로 정치 세력도 가졌던 것으로 기억했다. 둘 다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인기도 꽤 있었다. 둘 다 급작스러운 돌연사를 당해 죽지만 않았어도 단테 막심에게 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왜.”
“내가 후원하던 놈들이었거든.”
제이든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능력으로 불을 붙인 그가 씩 웃었다. 50대 중반의 그는 중후한 멋이 있는 매력적인 사내였다. 근사한 미소를 짓는 입가에 주름이 멋들어지게 펼쳐졌다.
안쉘은 늙는다면 저렇게 멋지게 늙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신음을 삼켰다. 친우가 인어에게 살해당했다고 믿는 그는 단테 막심의 곁에 서는 걸 선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왜죠?”
왜 그는 10년 전부터 단테 막심의 뒤를 치려고 준비한 사람처럼 말을 할까.
안쉘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제이든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손으로 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왜?? 알시타를 죽인 그 늙은이를, 내가, 가만두리라 생각한 건가??”
“…….”
안쉘은 숨을 삼켰다.
지금 지상의 거의 모든 이들은 알시타가 타고 횡단한 엘리키스호가 인어들에 의해 침몰했다고 믿었다. 단테의 세뇌는 멋지게 성공했고 그날 이후로 벌써 20년이 지났다. 거짓이 진실이 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도 알고 있는 일 아니었나. 그러니까 대통령이 되겠다고 설쳤지.”
제이든의 얼굴이 뿌연 담배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는 매우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20년 동안 싸워 왔다. 지독히도 오랜 시간이었다. 알시타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죽은 그를 위해 싸운 시간이 더 길어졌다.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지?”
“…국민투표 50%, 국회의원 투표 50% 아닌가요?”
“맞아.”
제이든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았다. 안쉘은 긴장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헤리엇은 이 복잡한 이야기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지 주변을 느긋하게 돌아봤다.
다만, 헤리엇과 눈을 마주친 이들이 움찔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욱신거리는지 잔뜩 부어 멍이 든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그들을 치료해 주는 게 나을까요?”
옆에서 앤이 속삭였지만 안쉘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러자 제이든의 시선이 앤을 향했다. 그가 앤의 푸른 머리카락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낀 안쉘이 긴장했다.
“너는 네가 투표에서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나?”
제이든의 말에 안쉘은 잠시 뜸을 들였다. 엔저가 없는 이 상황에서 제이든 올던, 그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제이든 올던을 믿기에 그는 단테 막심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안쉘은 신음하며 대답했다.
“안 되겠죠. 과격한 단테 막심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나, 현 대통령에게 동조하는 국민 여론이 우세한 편입니다. 의원 대부분은 단테 막심의 끄나풀이니, 솔직히 투표로 진행하면 승산이 없다고 봐야 하죠.”
일단, 누가 알아도 상관없는 정도의 정보로 안쉘이 대답했다. 하지만 제이든은 몇십 년을 정치계에서 굴러먹던 이었다. 그는 만족한 듯 씩 웃었다.
“그렇지. 투표로는.”
“하지만 쿠데타를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단테의 군사력을 쿠데타로 밀어붙이기엔 이쪽 힘이 부족하고, 그랬다간 국민들의 신뢰도 모두 바닥날 테니까요.”
제이든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안쉘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지금 바다의 희망은 온통 북쪽 바다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 사는 인어 왕족들마저 전멸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안쉘은 과연 제이든 올던이 아군일지 적군일지 생각하며 입술을 축였다.
“…그러면 올던 평화위원장님.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안쉘은 도박을 걸었다. 제이든은 앤을 힐끔 보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타고 남은 재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난 알시타의 부고를 듣고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 그가 없는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었어. 나도 같이 바다에 빠져서 알시타의 곁을 지켜야 한다며 온갖 지랄을 떨었지.”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제이든 올던의 목소리는 평이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러면 알시타의 한 어린 복수는 누가 하지. 그를 죽인 놈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알시타의 죽음으로 세상의 정점에 선 그 노인네에게 누가 복수하느냔 말이다. 내 사람의 넋은 누가 달래 주지? 그래. 알시타의 넋을 달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단테 막심과 그 떨거지들이야.”
안쉘의 눈에 분노로 바르르 몸을 떨며 노란색 눈동자를 번뜩이는 제이든 올던이 비쳤다. 그는 나이가 오십 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기백과 풍채만큼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았다. 이글거리는 노란 눈동자는 이미 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다른 한 사람에 대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안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제이든의 단테 막심에 대한 분노는 진짜였다. 그는 침을 두어 번 다시 삼킨 다음 고개를 숙였다가 다짐한 듯 눈을 떴다.
“…투표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테 막심이 대통령 후보에서 박탈당하게 할 순 있을 겁니다.”
제이든의 노란 눈동자가 휘어졌다.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지니 훨씬 더 젊어 보였다.
“생체실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단테 역시 알고 있고.”
단테 막심의 생체실험은 그의 정치 인생을 흔들 정도로 거친 파동을 일으키겠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단테 막심은 20년 동안 대통령직을 유지하며 언론을 가장 먼저 장악했다. 그의 말은 곧 진실이었고, 그가 원하지 않는 진실은 묻어 버릴 수 있었다.
“생체실험이라는 사실을 터트려 봤자 어느 포털에서도 그 기사를 찾긴 힘들 거다. 뉴스는 다른 주제에 열을 올릴 거고 단테 막심이 생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음모론으로 묻히겠지.”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안쉘은 제 짧은 경험으로는 감히 제이든 올던을 설득시켜 손잡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쉘은 약했고, 겁도 많았다. 소심하고 긴장하면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의 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쉘과 제이든이 동시에 시선을 맞췄다.
“어떻게든 그 영상을 퍼뜨리면 국민 대다수가 단테에게 등을 돌릴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투표는…….”
“의원투표.”
“의원투표.”
제이든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유지했다. 그는 안쉘이 병신같이 야망만 큰 놈이라면 숯불구이로 지져 버리겠다고 농담 삼아 말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평화위원은 모두 널 지지한다고 보면 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단테는 바로 기소될 거야. 범죄자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어.”
안쉘의 눈앞에 있는 제이든 올던은 위원회 중 가장 큰 세력인 평화위원의 장이었다. 제이든은 테이블에 손가락을 탁탁 치면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목이 타는 건 안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단테의 ‘어떤 계획’을 알고 6년 전 조사를 위해 몸을 숨겼어. 네가 대통령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복귀했지. 엔저 맥과이어를 후견인으로 두고 있다고.”
“네.”
안쉘은 헤리엇을 쳐다봤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군인들을 보며 안쉘은 말했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인가요?”
제이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오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까닥였다.
“우리들은 알시타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야.”
아버지에게 죽은 아들이자 자신들의 주인인 알시타의 넋을 달래기 위해 모인 이들의 눈빛은 형형했다. 제이든은 안쉘의 뒤에 있는 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건 인어군?”
“…맞습니다.”
안쉘은 제이든을 완전히 신뢰할 순 없었지만, 자신이 그와 목적이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공통된 적 역시 똑같았다. 제이든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앤을 살폈다.
“올던 위원장님. 당신은 어떻게 인어가 알시타 막심을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죠?”
제이든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알시타가 말했기 때문이야. 인어들은 평화를 좋아한다고.”
“…….”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없는 긴박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제이든 올던이 믿었던 건 죽은 알시타의 말이었다. 안쉘은 기가 막혔다. 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겠지만, 상관인 엔저가 떠올랐다.
“단테가 총을 쏜 인어들은 죽지 않았으니 나중에 데리러 와. 바다 아래에 내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구출했거든.”
앤의 낯이 한결 편해졌다. 끔찍하게 사냥당했다고 생각한 인어가 살아 있다니,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안쉘은 힘을 주어 앤의 손을 잡았다.
제이든은 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픽 웃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진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그는 존재감이 매우 옅은 희미한 낯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나름 특수부대 출신으로, 모두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혈혈단신으로 물리친 헤리엇을 제이든이 경계 어린 눈동자로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제이든은 헤리엇이 매우 낯이 익어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고민했다. 제이든이 복잡한 눈으로 헤리엇을 관찰하는 모습에 안쉘이 조심스럽게 진실을 얘기했다.
“저분은, 연구소의 최초 성공작입니다. 군에서 만든 최초의 인조 인어로…….”
“놀랍군.”
제이든 올던은 정말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인조 인어 실험이 시행되었다는 건 얼핏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결과물을 직접 보니 놀라움이 커졌다.
‘그 역겹고 잔혹한 실험이 결국 성공했구나.’
찝찝함에 제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안쉘이 준비한 패가 뭔지 깨달았다.
“세뇌를 당했을 텐데.”
“…….”
“아직 풀지 못했나 보군.”
제이든은 웃으면서 새 담배를 꺼냈다.
“중요한 사람입니다. 어떻게든 세뇌를 풀어 자유롭게…….”
“내 알 바는 아니지.”
안쉘이 생체실험 패로 인조 인어를 골랐다면 세뇌를 푸는 일은 오로지 그들의 일이지 제이든이 굳이 끼어들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생체실험에서 살아남은 헤리엇에 대해 자세히 볼 마음이 들었는지 제이든은 진지하게 헤리엇을 훑어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헤리엇을 보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헤리엇의 잔상에 가려진 작은 어린아이가 제이든 올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감정 없는 텅 빈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제이든은 한달음에 달려가 헤리엇의 손목을 잡았다.
“너… 꼬맹이…….”
그는 알시타를 따라 보육원에 와서는 항상 헤리엇을 꼬맹이라고 불렀다. 헤리엇은 이제 눈치챘냐는 듯 곤란하게 웃었다.
“…왜, 네가…….”
드디어 자신을 기억해 주는 제이든을 향해 헤리엇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는 목이 멘 채로 중얼거렸다. 늘 힘을 주던 얼굴이 풀어졌다. 주름진 얼굴에 가득 찬 충격은 그가 매우 놀랐음을 보여 줬다. 멍하니 풀린 노란색 눈동자가 물기로 가득 찼다.
“그렇군…….”
제이든과 헤리엇이 아는 사이인가?
안쉘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살폈다. 헤리엇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었고, 제이든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점점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칼에 맞아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늙은 중년 사내가 울기 시작하자 안쉘은 당황했다.
제이든 올던은 한참 동안 울며 무릎을 꿇고 헤리엇을 올려다봤다. 그는 마치 마법에 풀린 사람처럼 헤리엇을 알아보고, 그의 머리와 뺨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작게 미소 짓고 있던 헤리엇의 표정이 점점 사그라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는 제이든을 내려다봤다.
안쉘은 이게 무슨 일인가 조마조마한 시선을 보냈고, 앤은 가만히 있자는 듯 안쉘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이든이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알시타가… 너를 입양하려고 했어.”
눈물에 젖은 눈으로 제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에 약간이지만 파문이 생겼다. 헤리엇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알시타는, 내 청혼을 받아 줬어. 같이 살자고, 꽃, 처럼, 웃었, 지… 너를, 우리의, 양자로 받아들이자고… 그랬어.”
아내와 아들을 잃은 무렵의 알시타는 삶의 의지가 사라진 채였다. 그를 살린 건 제이든이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올곧게 알시타를 돌보던 제이든이 욕심을 낸 건 그때부터였다. 그는 알시타를 억지로 일으켰다.
알시타는 곧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지만 제이든을 바로 받아 주진 못했다. 둘은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우였고 동성이었다. 지금이야 동성 간 결혼이 합법이지만 과거에는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이 더 많았다. 하지만 제이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쯤 알시타가 보육원을 후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시타와 아버지인 단테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그쯤이었다.
헤리엇이라고 불린 작은 소년은 참 귀여웠다. 마치 알시타의 아들을 보는 것 같았다. 알시타와 헤리엇이 같은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헤리엇을 보는 알시타의 눈에는 안타까운 감정이 가득했다.
“공감 능력 0.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았는데?”
“쉿. 애 들어 제이든.”
헤리엇은 작은 어린애였지만 제이든이 보기에도 오싹할 정도로 무기질적이었다.
“감정을 알려 주고 있어. 좋은 거, 좋은 옷, 웃는 법. 곤란한 법. 조금만 더 지나면 더 많은 걸 알려 줄 수 있을지 몰라.”
제이든이 보기에 저 꼬맹이는 감정을 전혀 모르는 인형 같았지만, 알시타에겐 달랐나 보다.
알시타의 화려한 금발 머리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걸 보며 제이든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꽃다발을 건넸다. 알시타는 분명 오늘도 익숙하게 거절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조금 풀이 죽어도 포기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알시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긴 쌍꺼풀을 팔락거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제이든은 너무 놀라 마주 닿은 알시타의 손가락에 펄쩍 뛸 뻔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팔딱팔딱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제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꽃다발을 든 알시타는 그보다 더 환하고 밝게 웃었다.
“어, 왜, 어… 알시타?”
“저 애를 입양할 거야. 제이든, 나와 함께 저 애를 키워 주겠어? 우리가 알려 주자. 사랑하고 받는 법을.”
“…알시타.”
“저 애는 뜨거운 코코아밖에 먹는 방법을 몰라.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려 주자, 제이든.”
청혼을 받아 주는 알시타를 늘 꿈꾸고 상상했지만 이렇게 생생하진 않았다. 제이든은 입을 막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알시타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중에 제이든이 후원한 엘리키스호의 횡단을 위해 알시타가 함께 출항한다는 것을 알게 된 제이든은 무척이나 초조해했다. 하지만 알시타는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위로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를 믿어, 제이든. 인어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아.”
하지만 제이든은 이상하게도 너무 초조했다.
“나도 따라가겠어.”
“너는 여기 있어 줘.”
“제발… 제발 알시타. 같이 가게 해 줘.”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버지가 나를 죽일 리가 없잖아.”
단테 막심의 낌새가 이상했다. 지금 분위기는 마치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제이든은 초조했지만 알시타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설마 아들을 죽이기라도 하겠냐고, 알시타는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알시타 막심은 두 번 다시 제이든 올던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죽겠다고, 계속 날뛰는, 나를… 측근들은 견디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넣었지… 내가 다시… 복수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날. 너를 가장 먼저 찾았지만 너는 어디에도 없었어.”
하지만 제이든 올던은 헤리엇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의 복수는 늘 단테를 향했고, 그의 마음에는 헤리엇이 아닌 알시타밖에 없었으니까.
헤리엇은 제이든 올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돌렸다. 안쉘이 창백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자신에게 얻어터진 이들마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제이든의 등과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다.
제이든은 엉망이 된 얼굴로 울고 있었다. 입양. 그건 알시타가 정한 것일 뿐 제이든에게는 그 책임이 없었다.
‘……?’
그들이 왜 슬퍼하는지 헤리엇은 알 수가 없어서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엔저가 보고 싶었다.
귀여운 그의 후배는 지금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을까.
* * *
-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 안토니오… 역시 믿을 건 자네뿐이야.”
자글자글 주름진 손으로 담배를 입에 문 단테 막심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하지만 하하 호호 웃기 위해서 안토니오에게 연락한 것은 아니었기에 단테는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언제 출전할 수 있지?”
- 선거 당일, 각하께서 당선되시는 즉시 가능합니다.
단테는 대통령이었지만 선거를 앞에 두고 있었고, 덕분에 북쪽 바다를 침범하려는 계획이 조금 늦춰지고 말았다. 하지만 안토니오도 단테도 시일이 살짝 늦어진 것일 뿐 당선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는 일말의 재고도 없었다.
- 그리고 곧… 알시타의 기일입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단테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멍청한 아들놈이었지만 사람 다루는 것만큼은 뛰어나서 여기저기 제 사람들을 뿌리고 다녔었다. 그걸 누구보다 유용하게 써먹은 단테 막심은 흡족하게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늙고 주름진 얼굴 위로 인자하고 자상한 미소가 담겼다. 입 밖으로 내뱉은 목소리 역시 표정과 다르지 않게 무척 자상했다.
“그래. 그날 북쪽 바다를 아들의 무덤으로 만들어 주자고.”
- …예.
안토니오는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통화를 종료했다. 단테는 개인용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끼익 소리를 내는 고급 의자가 탐탁지 않았지만, 곧 있을 축제를 생각하면 나쁜 기운이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단테는 제 아들이지만 알시타 막심이 한심했다.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아비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앞길이나 막으며 시시콜콜 방해만 하는 아들을 단테는 늘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결국에는 자신이 두 손 두 발 놔 버릴 정도로 제멋대로인 알시타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말뿐인 평화. 말뿐인 공존. 그건 단테 막심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말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인어들하고 타협해야 한다, 바다는 인어의 것이니 우리는 그들과 공존해야 한다, 아비가 만들어 준 평화 속에 살고 있으면서 아주 잘도 지껄이고 다녔더랬다.
심지어 단테 막심의 희망인 손주 녀석까지 바다에서 잃었으면서도 알시타는 한심한 평화를 계속 주장했다.
“멍청한 자식.”
단테 막심이 상냥한 표정 그대로 욕설을 내뱉었다. 주치의가 담배를 끊으라고 했지만 근래 들어 다시 손대기 시작하니 끊기가 더 힘들었다.
순한 장기 말이었던 엔저 맥과이어가 슬슬 자신을 긁어 대며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봐줄 만한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에 제 보좌관을 내세운 것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아직은 소중한 장기 말을 아끼고 보살펴야 했다.
“제까짓 게…….”
단테 막심은 코웃음 치며 중간까지 피운 담배를 손아귀에서 짓뭉갰다. 엔저는 맥과이어가(家)에서 애지중지 기른 최고의 능력자이지만, 그가 제 기능을 다 해 더는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놈의 선배와 함께 바다 아래로 밀어 넣어 줄 생각이었다.
그 역겨운 실험체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단테는 엔저 맥과이어가 그에게 사랑에 빠질 줄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서류로 올라왔던 희미한 사진을 얼핏 봤을 땐 희끄무레하기만 한 사내였다. 델타 막심처럼 예쁘장한 것도 아니고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단테는 자신 있었다. 그건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이었다. 알시타 막심은 한심하고 아비에게 대항했던 멍청한 놈이지만, 죽은 그는 참으로 효자였다. 가래 끓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단테 막심은 주름진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효자지, 효자야.
그가 멍청하게 바다로 나가 죽어 준 덕분에 단테는 인어들을 칠 명분이 생겼고, 국민들이 인어들에게 적개심과 공포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효자야, 효자.”
그리고 알시타가 남겨 두고 간 이들은 모두 이용하기 딱 좋은 놈들이었다. 안토니오부터 시작해 알시타를 따르던 평화위원까지 모두 단테가 흡수해서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었다.
단테 막심이 목숨만큼 사랑하던 손주를 잃은 순간부터 알시타는 죽을 운명이었다.
지이잉-.
그때 단테 막심이 책상 위로 던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개인용 휴대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한 단테는 손을 뻗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발신자는 방금 끊었던 안토니오였다.
“무슨 일인가?”
- TV를 확인해 주십시오!! 지금 제이든이…….
안토니오가 다급하게 본론부터 꺼내며 소리쳤다. 단테 막심은 눈을 가늘게 뜨고 TV 화면을 켰다. 마지막으로 보고 있었던 게 뉴스였기 때문에 채널을 따로 돌리지 않아도 안토니오가 말한 화면이 떡하니 단테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 개새끼들이.”
단테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던지며 부르르 떨었다. 축 처진 눈두덩이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 제이든 올던 외 평화위원회 2천 명, 모두 안쉘 리 후보를 지지할 것을 대대적으로 공개…….
* * *
“…헤리엇 님이 태어난 지역은 몇 번 구역입니까?”
“기억은 안 나지만 01구역이었던 거 같은데.”
헤리엇이 안쉘에게 서류를 건네받으며 대답했다. 보육원 출신인 헤리엇이 자신이 태어난 구역을 기억할 리 없었지만, 예의상 물어본 것이었다.
“미권에서 태어나셨군요.”
“음. 하지만 확실하진 않아. 보육원이 일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거든.”
헤리엇이 있던 보육원은 국립으로, 알시타 막심이라는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운영하던 곳이었다. 다른 사립 보육원들보다는 대우가 좋았고, 헤리엇은 먹을거리나 입을 것 등등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후원받으며 살았다.
물론 알시타가 죽고 나서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 모두 연구소로 끌려가거나 다른 곳으로 팔려 갔지만 어쨌든 그전까지는 대우가 무척 좋았었다.
“모든 구역의 원수인 대통령 아래로, 각 구역을 담당하는 120명의 위원장, 그 아래로 전부 대략 만 이천 명의 의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평화위원회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가장 인원이 많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단체입니다.”
그건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거라 헤리엇도 알고 있었다. 안쉘은 진지한 표정으로 TV 화면을 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그 평화위원장인 제이든 올던이 단테 막심을 배신하고 우리 편에 섰다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헤리엇은 그에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어제, 아니 자정이 지난 오늘 어두운 밤. 제이든 올던이 물기에 젖은 눈으로 헤리엇의 어깨를 잡고 엉엉 꼴사납게 울었다.
오십이 넘은 중년 사내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한참 코를 훌쩍이며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알시타와 마찬가지로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던 어린 소년이 제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이 선명하게 보여 더욱 오열했다.
사실 헤리엇이 생각하기에 제이든 올던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가 울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알시타가 헤리엇을 입양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제이든을 통해 알게 되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제이든은 한참 동안 헤리엇을 놔주지 않고 울다가, 다짐한 듯 손을 가슴에 올렸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너를 자유롭게 해 주마.”
제이든은 날이 밝은 오전에 바로 기자회견을 하고 다음 주에 치러지는 선거에 있어, 안쉘 리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건 아주 파격적이었다. 손을 잡긴 하지만 침몰할 가능성이 더 큰 안쉘의 배에는 공식적으로 타지 않고, 단테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서로 이용만 하자던 가벼운 태도가 단번에 바뀌었다.
“이제 제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으면 제이든은 살해당할 것입니다. 평화위원회는 뿔뿔이 흩어지겠죠. 이런 위험 요소를 전부 짊어지고 제이든은 저를 지지하겠다고 공식적 발표를 한 것입니다.”
“그런가.”
헤리엇은 작게 미소 지으며 안쉘의 시선을 따라 제이든의 모습이 보이는 뉴스 화면을 응시했다. 곤란한 듯 웃는 헤리엇의 표정은 얼핏 보면 제이든의 행동에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제법 그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안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헤리엇은 아무 생각도 없는 거다. 자신 때문에 제이든 올던이 목숨을 걸었다는 것에 대해. 공허하게 비어 있는 하얀색 눈동자가 안쉘은 조금 무서워졌다.
지금쯤 제이든이 한 도발은 단테에게 정확히 먹혀들어 갔을 것이다. 단테는 북쪽 바다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고, 국민투표와 인수인계만 남은 대통령이었다. 그 때문에 아직 서명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사실상 바다 위는 그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헤리엇 님,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안쉘은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서류를 정리하면서 초조한 듯 입술을 씹었다. 안쉘은 자기 자신이 마음 약하고, 그릇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를 앞에 두고도 머저리같이 벌벌 떨었으며, 헤리엇이 말도 못 할 실험을 당한 것을 보고도 떨면서 토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제이든 올던과 그 외 평화위원회의 목숨까지 짊어지게 되어 덜컥 겁이 나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서워요… 전… 저는, 대통령을 할 그릇이 못 됩니다. 만약. 만약 기적의 확률로 제가 대통령이 된다고 치면. 그러면… 제 말 한마디에 종전이 되는 겁니까?”
단테 막심의 죄는 어떤 것으로도 완벽하게 씻을 수 없다. 인어 종족의 절반 이상이 죽었으며 바다는 피로 물들었다.
지금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전쟁통에 태어나 매일같이 전쟁 소식을 들으며 자랐다. 매일같이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사회에서 생명의 중함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평화를 모르는 군부 독재 사회를 안쉘은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차라리 엔저 맥과이어가 이상적인 대통령이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했다.
그는 온 국민이 알고 따르는 아름답고 멋진 군주였으니까.
“음… 잘하지 않을까?”
“…….”
“엔저가 아무 생각 없이 너를 데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고저 없이 내뱉는 헤리엇의 말은 얼핏 보면 이 상황에 관심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지만, 이상하게 신뢰감이 들었다.
안쉘은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테이블 위로 자료를 쭉 펼쳤다. 안쉘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헤리엇은 졸린 모양인지 두 눈이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볕을 쬐는 헤리엇의 몸이 그대로 산화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때 창밖으로 철부지들이 뛰어노는 게 보였다. 안쉘이 기겁하며 낡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아, 안젤라!! 그게 뭡니까?”
“네? 이거요??”
탕- 하고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는 거대한 로봇 대가리를 보면서 안쉘이 기가 막혀 소리쳤다. 여기가 무슨 SF 군사 기지도 아니고 왜 로봇 대가리가 창문 너머로 휙 휙 지나가고 있는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쿵쿵 소리를 내는 그것은 일단 지름이 안젤라만 했다.
절대로 일반인은 들 수 없을 크기의 로봇 대가리를 안젤라는 한 손으로 휙휙 가볍게 들고 놀다가 리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장님하고 아침마다 순찰을 하던 리언이 오늘따라 사무실 공터에서 호랑이를 데리고 안젤라와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었다.
“이거 려인이가 만들어 두고 간 거예요.”
“려인이?”
리언이 주근깨 달린 볼을 쓰다듬으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라는 잔뜩 으르렁거리며 눈을 찌푸렸다.
“탈영병 새끼요.”
“탈영병…….”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아하니 안젤라는 그 탈영병이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계를 무척 잘 다루는 아이인데… 아마 군에서 사고를 치고 이쪽으로 좌천되었을 거야.”
일광욕을 즐기던 헤리엇이 옆에서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귀여운 것을 보는 것처럼 웃으며 안젤라와 리언을 빤히 구경하고 있었다.
심심하다고 탈영하는 놈이니 분명 제정신 아닌 건 알겠는데, 무슨 이유로 군에서 좌천되었을까.
안쉘은 오늘 그놈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생각하며 창문을 닫았다.
“조심해서 놀아요.”
“네.”
지금은 근무시간이고 안젤라는 군인이었지만, 어차피 여기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저렇게라도 놀아야 사고를 안 치지.
“저거 설마 몸체는 따로 있는 건 아니겠죠?”
“만들려고 했는데, 아마 그 전에 탈영해 버려서 못 만들었을 거야.”
“…옛날 로망이 로봇 타는 거였는데. 재미있네요.”
안쉘은 심란한 표정으로 안젤라가 마당에서 가지고 노는 로봇 대가리를 응시했다.
“…….”
그리고 안쉘이 점심시간 동안 조사해 본 결과, 그 탈영병이라는 놈은 생각보다 더 미친 또라이였다. 심심하다고 탈영할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설마 이런 놈일 줄이야.
“심심하다고 군함을 잠수함으로 바꿨다고요? 심지어 메인 시스템까지 해킹해서 가지고 놀았네요?”
“음… 난리 났었다고 듣긴 했는데.”
난리 정도가 아니라 이건 사형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미친 짓이었다.
[이름: 고려인
구역: 18구역 (한권)
나이: 22세]
“이번 자율군함 메인 시스템 발명도 려인이가 했을 거야. 그래서 사형은 못 하겠고, 이쪽으로 좌천시켜서 보낸 거지. 매일 기계를 만지던 애가 이런 시골에 오고 얼마나 심심했겠어.”
“…….”
안쉘은 파리한 얼굴로 이 자식이 탈영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보면 볼수록 제 짬으로는 관리가 안 되는 놈이었다. 자신이 저질렀다면 백번 사형당해도 모자랄 기록을 이곳에 오기 전까지 거의 매일 갱신했다.
특히 단테 막심이 사는 판테니엄 프리미엄관 시큐리티를 해킹해서 그 여름에 에어컨을 모조리 정지시켰다는 자료를 읽었을 땐 감탄까지 터트렸다.
그냥 돌아오지 마라.
안 그래도 저번에 산 100정짜리 위장약 한 통을 다 먹어 가는 안쉘의 입장에선 그나마 이 미친놈이 탈영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 대통령 선거 준비나 북쪽 바다 전쟁에 대한 걱정, 그리고 엔저 맥과이어의 연락 두절은 안쉘의 위장을 더욱 아프게 했다.
이렇게 푸념하듯 말하니 헤리엇이 아주 자연스럽게 안쉘의 머리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통화했는데.”
“…엔저 대령님하고요?”
“응. 영상통화로.”
영상통화로 뭘 했는지 모르지만,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꼴을 보니 위장과 복부가 아파졌다. 신경성 과민반응이라면서 의사에게 주의를 몇 번 받았지만, 세상과 주변이 안쉘을 편안하게 두지 않았다.
조용히 위장약을 찾던 안쉘이 점심을 치우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그 탈영병 분 성격은 어땠나요?”
안쉘이 지나가는 투로 물었고, 헤리엇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재미있는 아이였어.”
점점 더 불안해졌다.
도랑에 빠진 트럭을 좀 건져 달라는 마을 주민의 부탁에 안젤라와 안쉘이 차를 타고 좁은 시골길을 달렸다. 안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울리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제이든 올던이었다.
- 다음 주 방송 메인 시스템을 해킹할 예정이야.
다짜고짜 본론부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안쉘은 도랑에 빠진 트럭 쪽으로 다가가는 안젤라의 등을 힐끔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을 텐데요.”
- 단테 막심이 이미 미디어를 잡고 있으니 별수 있나. 10분이면 돼.
제이든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쉘이 이마를 찌푸릴 때 안젤라가 트럭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고맙다고 호호 웃으며 안젤라에게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챙겨 주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안쉘이 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냈다. 저번에 한 번 채워 넣은 액상이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실패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 난 벌써 두 번이나 실패했어. 세 번째 실패는 곧 죽음이지.
두렵거나, 혹은 망설이는 목소리였다면 안쉘은 허세 그만 부리고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기자회견을 다시 하라고 충고하려 했다. 하지만 제이든은 안쉘보다 더 확고한 태도를 고집했다.
내 주변에는 왜 이런 사람들뿐이람.
안쉘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 이미 골수까지 단테를 지지하는 놈들에겐 통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겐 큰 자극을 줄 거야. 기적을 믿어 보자고.
“기적… 그거 좋네요. 해커는 저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여기서 엔저라면 무슨 해답을 내놨을까. 그는 실패가 두렵지 않을까. 안쉘은 전자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쿵-! 쿵-! 하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땅이 저절로 울리는 거대한 충격에 안쉘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안젤라가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 질렀다.
“아아악!!!”
- 안녕, 마이 스위티 허니.
“이, 이런 미친!”
안쉘은 저도 모르게 값비싼 전자 담배를 땅에 뚝 떨어트리고 말았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서 있는데 쿵- 쿵-! 거리며 다가오는 그것의 모습이 더욱 확실하게 보였다.
크지는 않지만 적어도 5층 높이는 넘어 보이는 로봇 한 대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안젤라와 안쉘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우두둑 꺾이는 게 딱지라도 떼어 벌금을 물어야 할 판이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로봇의 가슴팍이 열리고 그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군복을 입고 있어서 군인이라는 건 알겠는데, 한쪽 다리의 바지가 찢어져 있어서 썩 좋은 꼴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체구가 작고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귀엽게 생긴 사내였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돌아왔어.”
“고려인!!!”
그가 손에 들고 펄럭이는 건 신문지 한 장이었다. 이전에 안쉘이 연설을 위해 단상에 섰던 사진이 찍힌 신문의 1면이었다. 그 뒤로 헤리엇과 엔저가 수행인으로 서 있었다.
헤리엇의 모습을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걸까?
고려인이라고 하는 기계광 탈영병이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 무슨 일이야?
아직 통화를 끊지 않았는지 제이든이 물었다. 안쉘은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파리하게 물든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해커… 찾았습니다.”
[이름: 고려인
구역: 18구역 (한권)
나이: 22세
능력: 기계 창조(S급)
군 최고의 해커. ★요주의]
* * *
소파에 등을 대고 늘어지게 앉아 있던 헤리엇은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얀색 머리통이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일정하게 박자를 탔다. 늘 단정했던 하얀색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졌고 팔랑거리던 하얀 속눈썹이 이내 눈동자를 가둬 버렸다.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는 헤리엇의 앞머리가 따듯한 바람에 살랑살랑 잘도 흔들거렸다. 마치 그대로 사라질 것처럼 존재감이 더 희미해진 헤리엇은 꿈을 꾸는 것처럼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머그잔이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안에 든 코코아는 이미 모두 먹어 버렸는지 흔적만 남아 있고 내용물은 없었다. 코코아는 소식가에 입이 짧은 헤리엇이 유일하게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헤리엇은 가끔 삼시 세끼를 당으로 보충하곤 했다.
부하들이 ‘그러다 진짜 죽어요, 대장…….’ 하고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해 대서 줄이고 있는 거지, 사실 온종일 단걸 입에 넣으라고 하면 넣을 수도 있었다.
머그잔에 남아 있는 달콤한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헤리엇은 그리운 꿈을 꾸고 있었다.
그건 과거의 자신으로, 알시타를 만났던 때의 헤리엇이기도 했고, 연구소 내에서 실험을 기다리던 사사일이기도, 귀여운 어린 후배를 처음 만났던 헤리엇이기도 했다.
각각의 장면은 시간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도 자신의 모습은 괴기스러울 만큼 달라져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물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헤리엇이었다. 저 멀리서 문이 서서히 열리며 갑작스러운 방문자의 등장에도 헤리엇은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고양이처럼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신을 경계하는 작은 후배는 경외와 공포심이 어린 붉은색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검은 털을 가진 귀여운 고양이가 생각나는 후배였다.
이리 와, 경계하지 말고 이리 와 봐. 귀여운 아이야.
고양이처럼 앙칼지지만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연약한 작은 후배를 보며 헤리엇은 속으로 손가락을 내밀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어린 후배는 점차 커지더니, 헤리엇의 신장을 훌쩍 넘기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계급도 실력도 이제 까마득히 멀어져 버렸다.
“선배.”
어젯밤, 헤리엇은 제이든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렁이는 가슴을 잡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이든이 알시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엔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참 잠이 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마음으로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화장실에는 엔저가 선물해 준 도청기가 있었다.
새벽이 다 되어 가는 어스름한 시간,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지금 시간이면 자고 있을 엔저를 향해서.
“엔저. 듣고 있니?”
보고 싶다고 덧붙이려던 찰나 헤리엇의 휴대전화에 진동이 울렸다. 얼른 손을 뻗어 확인하니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머뭇거리며 받자마자 엔저 맥과이어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 선배.
“어떻게…….”
안쉘이 엔저와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기던 걸 떠올리며 헤리엇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 보고 싶어서요.
“귀여운 엔저.”
-조금 더 불러 주세요.
낮게 웃은 엔저가 애교 부리듯 더 불러 달라며 보챘다. 그럴 때마다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후배의 응석을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귀엽고 순한 후배의 말을 선배는 최대한 들어주고 싶었다.
“엔저.”
- 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문득 말을 멈추자 엔저가 다시 채근했다.
- 선배, 제 이름 불러 주세요.
그러면 헤리엇은 또 조용히 속삭였다.
“귀여운 나의 고양이.”
그 말에 엔저가 기분 좋은 것처럼 웃었다.
- 영상통화 하실래요?
“어? 나 옷 벗고 있어.”
피곤해서 씻고 나와 바로 이불에 누운 탓에 현재 헤리엇은 알몸이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숨을 헐떡이는 소리와 함께 엔저의 말이 뚝 끊겼다.
“…?? 엔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헤리엇이 엔저의 이름을 불렀지만, 전화는 이미 뚝 끊긴 상태였다. 그리고 통화 종료 화면이 꺼지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이번엔 영상통화였다.
왠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엔저의 전화에 헤리엇은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엔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헤리엇은 영문도 모른 채 열심히 다리를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어젯밤의 일을 꿈으로 꾸면서 헤리엇이 선잠에 빠져들었을 때 어디서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헤리엇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결국 헤리엇이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끊겼던 소리가 다시 우렁차게 들렸다.
쿵! 쿵!
착각이 아니었는지 점점 다가오는 진동에 헤리엇은 조용히 일어나 서랍장에서 나이프를 꺼내 벽에 기댔다. 창문으로 밖의 상황을 살피던 헤리엇은 저 멀리, 커다란 나무 사이에 보이는 로봇 대가리에 눈을 크게 떴다. 밖으로 나오자 진동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쿵-! 쿵-!
로봇이 움직일 때마다 일대가 크게 울려 산새들이 짹짹 소리를 지르며 하늘 높이 올라 성질을 냈다.
저 로봇 대가리는 어디서 많이 봤던 것이다. 헤리엇은 마당에서 안젤라가 공처럼 가지고 놀던 로봇 머리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로봇 머리를 번갈아 쳐다보고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끼이익 소리를 내며 사무실 쪽으로 달려오는 차를 발견하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섰다. 누가 운전하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능숙하고 빠르게 나무를 피해 달려오던 차량은 헤리엇이 밖에 있는 걸 발견했는지 막판 속력을 내며 다가왔다.
차가 헤리엇의 앞에서 끼이익 소리를 내며 반 바퀴 돌더니 멈춰 섰다. 손뼉이라도 쳐 줘야 할 법한 신들린 운전 실력이었다.
조수석에서 안젤라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비틀거리며 헤리엇 쪽으로 내달렸다. 난폭한 운전 덕에 토할 것처럼 눈이 뱅글뱅글 도는 모양인지 발걸음이 들쑥날쑥했다.
“대, 대, 대장… 놈이 왔어요.”
헤리엇은 그 소리에 쓰게 미소 지었다. 그는 안젤라가 ‘놈’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윽고 안쉘이 운전석에서 내리고 뒤를 돌아봤다. 차를 따라 이곳으로 오던 로봇은 나무를 뿌리째 뽑으며 지나오고 있었다.
“…역시 딱지를 떼는 게…….”
안쉘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아니, 탈영병 신고가 먼저인가.”
모든 걸 포기한 듯 헛웃음까지 지었다. 만약 헤리엇이 제대로 들었다면 재미있는 유머를 한다며 웃어 줄 법한 소리였다.
위이잉, 하고 로봇 가슴이 열리고 그 안에서 검은 머리의 귀여운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활짝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쌍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안녕, 대장! 여전히 맹한 얼굴이네.”
마치 어제 마실 나갔다가 들어온 것처럼 탈영병 고려인이 손을 흔들었다. 헤리엇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탈영은 영창인데…….”
“하하하, 이렇게 재미있는 계획을 짤 거면 진작 말해 주지 그랬어!”
활짝 웃는 고려인의 한쪽 눈가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헤리엇은 그에게 음료수 잔을 건네다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왜 그래?”
“응? 앙칼진 귀염둥이한테 맞았거든.”
“…죽고 싶지.”
안젤라는 헤리엇의 옆에 앉아 잔뜩 경계하는 야생 동물처럼 으르렁거렸다. 괴력인 안젤라에게 맞고도 용케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보호 장구를 겹겹이 끼고 있지 않았을까 헤리엇은 추측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우리 귀염둥이가 날 때렸거든.”
“…….”
“…살찌고 더 못생겨졌다고 했습니다.”
안쉘이 헤리엇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하지만 고려인은 팔짱까지 끼면서 이게 왜 문제냐는 듯 툴툴거렸다.
“원래 남자들은 좋아하는 허니 앞에선 반대로 말하는 거 몰라?”
모른다.
헤리엇은 고려인의 유쾌한 만담에 웃으며 텀블러에 담긴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여태까지 뭐하고 지냈니? 탈영은 사형이야.”
이미 여러 번 사형당할 뻔한 천재 해커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이에 답지 않은 천진하고 어린 외모에 안쉘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뭐… 그냥저냥. 핵을 연구하고 있었어.”
푸우웁!!!
“단테가 지금 어디 살고 있지? 프리미엄관은 내가 에어컨 고장 내서 못 살고… 엑시즈관에서 머물고 있나? 거기에 핵이나 좀 떨어트려 주려고.”
이미 떨어트릴 핵은 가지고 있다며 고려인이 익살맞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그가 웃는 얼굴 그대로 안쉘에게 고개를 돌렸다.
“재밌죠?”
“…….”
“재밌잖아요. 그렇죠? 나 아니면 누가 그 씨발 개 같은 영감탱이 욕을 하겠어요.”
“려인이가 욕이 조금 격해.”
헤리엇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안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단테에게 유감이 많아 보이는 고려인은 안쉘에게 재미있으니 어서 웃어 보라고 강요했다.
그 바람에 어색하게 미소 짓는 안쉘에게 려인은 작은 네모난 상자를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이게 무엇인지 눈으로 묻는 안쉘에게 고려인이 속삭였다.
“이거 뚜껑 열고, 버튼 눌러 봐요.”
“이렇게요?”
“네, 그거 누르면 군 메인 시큐리티를 전부 파괴할 수 있거든요.”
이런 미친!
안쉘은 기겁하며 버튼을 누르려던 엄지에 힘을 풀었다.
혹시 눌렸으면 어쩌지.
심장이 튀어나와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내 심장을 찾아 떠나 버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며 안쉘이 할딱일 때 고려인은 익살스럽고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농담이에요. 이 형 은근 재미있네.”
아니, 이런 개또라이 새끼가 다 있나.
안쉘은 위장약 두 알을 또각또각 따며 물을 찾았다. 안젤라가 헤리엇 옆에서 한심한 듯 눈을 흘겼다.
“형이 아니라 중위님이거든?”
“귀염둥이, 나 탈영해서 이제 군인 아니야.”
“군법상 능력자는 모두 군인이야!!”
고려인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머리에 뒤집어쓰면서 안젤라의 말에 일일이 대꾸했다.
“너 그리고 나한테 왜 귀염둥이라고 해? 내가 나이가 더 많은데.”
“그러면 스위티 허니라고 다시 불러 줄까?”
“다른 한쪽 눈도 판다가 되고 싶으면 마음대로 부르던가.”
사이가 나빠 보이면서도 좋아 보인다. 안젤라는 리언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설마 삼각관계인가.
안쉘이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으며 고려인이 농담처럼 전달했던 버튼 상자 뚜껑을 조용히 닫았다. 헤리엇이 옆에서 안쉘에게 충고했다.
“려인이는 농담 안 해.”
“……”
그게 더 무서웠다. 그러면 진짜 이 버튼이…….
불길한 마음에 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을 때 무언가를 꺼내 눈에 두른 고려인이 가장 먼저 안젤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헤리엇에게 옮겨갔다.
그 모습에 안젤라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거 뭐야?”
“어? 그냥, 사람의 신체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는 발명품이야. 귀염둥이 여전히 근육… 건강하네.”
“…….”
때릴 타이밍을 놓쳐 버린 안젤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헤리엇을 조용히 쳐다보며 아무 말도 없는 고려인의 모습에 헤리엇이 드물게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으로 소파를 슬슬 긁었다.
갑자기 와락 인상을 찌푸린 고려인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대장, 혈당 관리 좀 하라고 했죠!?”
헤리엇은 못 들은 척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소파 가죽만 열심히 문지르기만 할 뿐이었다.
…인조 인어도 당뇨 위험이 있나?
안쉘은 궁금했지만, 굳이 묻고 싶지 않아 침묵했다. 그리고 고려인의 시선이 드디어 안쉘을 향했을 때, 그는 말없이 안쉘을 슥 지나쳤다.
“너무 평범해서 재미없어. 난 재미없는 사람은 딱 질색이거든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영 알 수가 없다.
눈으로 심장 박동, 혈압, 체온, 호흡 등 기본적인 바이탈 사인은 물론 혈당까지 측정할 수 있는 발명품이라고 했다. 그것 참 신통방통한 물건이라고 안쉘은 감탄했다.
이것저것 만들고 남는 재료로 심심해서 만들었다는데, 과연 기계 창조 능력자다웠다.
“기계는 배신하지 않거든요. 감정을 느끼지도 않고. 보고 있으면 화도 나지 않고 가끔 재밌고.”
고려인이 씩 웃으며 헤리엇을 돌아봤다.
“그래서 내가 참 대장을 좋아해.”
안쉘이 아직도 심각한 얼굴로 버튼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헤리엇의 휴대전화가 지잉 하고 울렸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귀신처럼 전화를 거는 것이 역시나 선배 스토킹도 허투루 하지 않는 엔저 맥과이어였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전쟁 영웅이 사실 한 사람을 스토킹하는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안쉘은 제 전화를 모두 무참히 씹으면서 헤리엇에게는 꼬박꼬박 통화하는 상사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때, 고려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
고려인은 한참 동안 물안경같이 생긴 그것을 통해 헤리엇을 요리조리 살펴봤다. 그 정신없는 움직임에 전화를 받던 헤리엇이 웃는 얼굴로 엔저와 통화하다가 고려인을 귀엽다는 듯 흘겼다. 그리고 다시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알았어, 이따 보자.”
금방 끊는 걸 보면 별것 아닌 안부 인사였나 보다. 안쉘은 바로 제 휴대전화로 엔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무참히 무시당했다.
‘이 개 같은 상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대령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응? 오늘도 옷 벗고 잘 거냐고 물어서.”
“…그래서요?”
“벗을 거라고 하니까 꼭 통화하자고 하더라고.”
아마 그 통화가 영상통화인 것에 안쉘은 제 군 생활 모두를 걸 수 있었다.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름 하여 ‘상태창’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물안경 발명품을 쓰고 있던 고려인이 다가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장… 누구예요?”
“응?”
“그 사람 누구예요? 지금 대장… 심장 박동 수 장난 아닌데요?”
“!!!”
헤리엇이 고려인의 말에 흔치 않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걸 발견한 개구쟁이처럼 고려인이 씩 웃었다.
“혈압도 오르고, 체온도 올라가고 있어요. 대장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마치 사랑에 빠진… 읍!”
고려인이 멋대로 더 입을 놀리게 두지 않기 위해 헤리엇은 얼른 두 손으로 움직이는 주둥이를 막아 버렸다. 수치심이라곤 저 멀리 던져 둔 사람이 이런 것에는 참으로 과민하게 반응했다. 헤리엇이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 고려인을 향해 팔을 허우적댔다.
“아니, 대장 주둥이를 푸웁, 막으면 어떻, 아읍. 아니 시바 무슨 사춘기 청소년도 아니고!! 누군데 우리 대장이 이렇게 사랑에 빠졌을까?”
요리조리 헤리엇의 손을 피하면서 고려인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동자를 빛냈다. 누구보다 기계 같은 헤리엇의 생동감 있는 반응에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있습니다, 댁보다 더한 또라이가.’
“맞네! 와, 심장 박동 수 장난 아니네, 대장.”
무늬만 군인인 고려인은 헤리엇이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만 당황한 탓에 얼굴만 시뻘겋게 물들일 뿐이었다.
* * *
리언은 싸움이 싫었다.
다툼이 싫어서 이곳으로 도망치듯 좌천되었다.
리언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강도가 강하다 보니 사람의 감정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이 좋았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산속에는 동물들이 있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감정 공명 능력인 리언에게 전쟁터는 산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인어들이 느끼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죽어 가는 군인들의 소리 없는 절규를 리언은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네 힘이 필요하다.”
모든 능력자는 강제로 군에 입대한다. 그건 인어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만들어진 당연히 지켜야 할 법이었다.
리언은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였고 명령 불복종은 최대 사형이었다. 리언의 부모는 그가 군인이 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싸우기 싫어요.”
“싸워야 하는 상황인데도?”
“저는…….”
“차악을 선택한다고 생각하면 돼. 네 힘은 분명 평화를 위해 써야 할 것이 맞으니까. 그러니 이 전쟁을 어서 끝내야 하지 않겠니?”
리언이 머뭇거리고 대답하지 못하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이가 리언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억지로 오게 된 이곳은 생각보다 더 리언에게 맞는 곳이었다. 싸움과 전쟁이 없는 곳. 주민들은 순박하고 리언을 잘 챙겨 주었다. 같은 동료인 안젤라는 겉과 속이 똑같은 순진한 군인이었고, 리언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싫어 이곳으로 도망치듯 좌천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헤리엇 알스터는.
생각보다 더 이상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안젤라와 리언을 귀여워해 주었고, 웬만한 규칙들을 어기고 다니는 두 사람을 많이 눈감아 주었다.
생각해 보면 이곳의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그 더운 날 허리가 아플 정도로 숙여 밭을 일구는 것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따라 정원에 앉아 수박이나 술을 한 잔씩 걸치는 것도. 웃으면서 트럭 가득 과일을 싣는 것도. 모든 것이 다 너무 좋았다.
헤리엇 알스터는 하얗게 비어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채워질 날이 올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느 날부터 헤리엇은 점점 채워져 갔다. 마치 감정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처럼 스펀지처럼 흡수해 감정이 풍부해졌다. 바로 엔저 맥과이어, 그 이상한 영웅 덕분에.
명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질 수밖에 없는 엔저 멕과이어는 이상한 변태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헤리엇을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려인은… 그는 잘 모르겠다. 자신을 싫어하는 듯 노려보긴 했지만, 막상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고, 그와 친해지려고 노력하기 전에 그가 탈영해 버렸다.
그는 귀여운 신병이었지만 좀 수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끔 밤에 누군가와 은밀하게 통화했다. 누구와 통화하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주변을 탐색하는 것이 매우 수상했다.
그런 고려인이 지금 순찰을 다녀온 리언의 앞에 여유롭게 손까지 흔들며 서 있었다. 리언이 잠시 멈칫하고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고려인은 여유만만한 태도로 안젤라에게 추파를 던지면서 헤리엇이 타 준 따뜻한 코코아를 홀짝였다.
헤리엇이 탐나는 얼굴로 머그잔을 힐끗거릴 때마다 눈을 뾰족하게 만들면서 당뇨 걸리는 걸 두 눈 뜨고 못 본다며 일침을 놓았다. 입이 짧고 소식하는 헤리엇이지만, 단 음식은 또 죽어라 좋아하는 걸 아는 리언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그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군요.”
고려인이 리언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모습에 안쉘은 헤리엇에게 귀여운 동생들의 연애를 구경하는 흐뭇한 형처럼 속닥거렸다. 코코아를 먹지 못해 눈썹이 팔자로 변한 헤리엇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연적이라서.”
“귀여워라.”
서른셋, 서른네 살인 아재 두 명은 싱긋 부드러운 미소 띤 얼굴로 팔팔한 이십 대들을 구경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청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고려인의 장난기 많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리언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 오늘 려인이가 돌아왔어.
탈영은 영창에 군법상 최대 사형이지만, 돌아온 제 부하를 신고할 생각이 없는 헤리엇의 말투는 오늘도 나긋나긋했다.
“그렇습니까?”
엔저 맥과이어는 전자 담배를 입에 물고 미소 지었다. 그의 앞에 사진 한 장이 톡 떨어졌다. 엔저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사진을 몇 번 톡톡 두들기며 검은색 머리카락의 18구역 청년이 찍힌 사진을 응시했다.
귀엽게 생긴 얼굴이지만 묘하게 초점이 나가 있는 눈동자가 예사 놈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 오랜만에 보니까 좋더라.
고저 없이 내뱉는 말을 경청하며 엔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연기를 내뱉었다.
“저도 보고 싶어요, 선배.”
항상 똑같은 속도로 반응해 주던 헤리엇이 오늘은 한 박자 쉰 후, 웃음기가 조금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도.
제 선배 앞에선 누구보다 완벽한 가면을 쓰는 엔저는 헤리엇이 영양가 없는 말을 해도 싫은 내색 없이 몇 번이고 그에 반응해 주었다. 엔저 맥과이어라는 사내를 안다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헛소리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엔저가 몇십 분이나 전화를 붙들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며 추임새까지 완벽하게 넣는다는 걸 보면 아마 뒤로 넘어갈 사람이 트럭으로 와도 모자랐다. 하지만 엔저는 선배의 말을 감히 한 소절도 빼놓을까 봐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특수부 고 려인 소위-
엔저가 켜 놓은 TV 화면에서는 제이든 올던이 안쉘 리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특종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조용히 낡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일정하게 두드리던 엔저는 헤리엇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걸 소리로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선배 주무세요?”
- 아니, …아, 나 잤니?
“아니요, 선배, 졸려 보여서요.”
엔저는 입에 문 전자 담배 전원을 켜며 소곤거렸다. 시계를 확인해 봐도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닌데 헤리엇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몇 번이나 졸았다. 헤리엇이 결국 항복하는 것처럼 난감해하는 투로 말했다.
- 졸리기는 하네. 오늘 정신적 소모도 컸고.
정신적 소모?
엔저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헤리엇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느끼는 역치가 낮았기 때문에, 정신을 소모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헤리엇이 신경 쓸 정도의 일이 뭘까. 엔저는 탁- 탁- 일정한 속도로 사진을 내려쳤다.
“선배, 요즘 피곤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 아마… 네가 없어서 그런가 봐.
엔저는 헤리엇이 말한 18구역 탈영병처럼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어물어물 말하는 헤리엇의 대답에 엔저는 눈물이 나올 것처럼 벅차올라 허벅지를 몇 번이나 꿈틀거렸다.
고귀한 선배가 자신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를 느낀다는 사실에 저절로 흥분이 일어 이를 악문 턱 근육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요즘 꿈을 꾸거든.
“꿈이요?”
- 음…….
역시 헤리엇의 집에 도청기가 아니라 CCTV를 설치했어야 했나. 곤란해하는 헤리엇이 눈썹을 팔자로 내리는 모습이 상상됐다.
헤리엇은 곤란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감정을 겪을 땐 눈썹을 아래로 내리고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면 정말 곤란한 사람처럼 보여 대부분은 그 표정에 속아 넘어갔다. 그리고 엔저는 그 표정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주무세요, 선배.”
- 아니, 피곤한 건 아닌데…….
아마 이 전화를 끊는 게 아쉬운 건 자신뿐만이 아닌 듯싶었다.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정염에 점점 더 붉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도 졸고 있는 헤리엇을 붙잡고 더럽히고 싶은 음험한 욕망이 수면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물을 머금은 것처럼 헤리엇의 목소리가 조금씩 뭉개졌다. 아마 지금 침대에 누워 전화를 받다가 서서히 잠이 드는 중인 모양이다.
- 엔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니?
문득 생각난 듯 몽롱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렸다. 엔저는 그에 기억한다고 대답했다. 기억하지. 기억만 할 뿐이랴, 지금도 생생하게 그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날 맡았던 물의 냄새와 방을 가득 채우던 수조의 생김새도 모두 기억했다. 물그림자로 가득했던 방 안에서 엔저는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도 했더랬지.
그 수조 안에서 하얗게 빛나는 인어가 상처 입은 채 피를 흘리며 몸을 동글게 말고 있었다. 인어의 하얀색 눈동자가 천천히 열리고 엔저를 발견한 순간 인어의 눈동자가 아름다운 녹음을 되찾았다.
수조 속 인어는 빙긋 미소 지으며 갑작스럽게 찾아온 방문객에도 놀라는 것 없이 손을 뻗었다. 마치 이리오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어린 엔저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궁금해.”
어린 인조 인어 헤리엇이 엔저에게 속삭였다. 만약 엔저가 거기서 무섭다고 도망갔다면 지금 이곳의 엔저 맥과이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너는 정말 귀여웠는데… 어리고 작았어. 왜 계속 그때 꿈을 꾸는 걸까?
엔저는 어릴 때 또래보다 신장이 작고 체격도 왜소했다. 헤리엇은 그때의 엔저를 떠올리는 건지 그의 목소리에 작은 웃음기가 어렸다. 그건 엔저도 마찬가지였다. 헤리엇을 생각할 때마다 늘 그때를 떠올렸다.
“나는 궁금해.”
헤리엇은 분명 수조 속에서 그렇게 말했다. 엔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전자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전자 담배 전원을 끄며 수마에 빠져드는 헤리엇에게 속삭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대답 없이 통화가 종료됐다. 아마 헤리엇이 저도 모르게 누른 것 같았다. 엔저는 통화종료 화면이 꺼진 후에도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번호를 누른 뒤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전화 한 번 하기 힘드네요, 대령님. 그동안 헤리엇 님 하고는 잘도 통화하셨더라고요.
잔뜩 날을 세운 안쉘이 전화를 받았다. 엔저는 톡톡- 책상을 다시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안쉘, 대통령이 움직였다. 늙은이가 조급했던 모양이지.”
그러자 전화기 너머의 안쉘이 경계와 긴장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설마 제이든 때문입니까?
엔저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안쉘은 생각보다 일 처리가 능숙하고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그러니까 엔저도 굳이 안쉘을 선택했고, 부하 중 유일하게 그곳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그래.”
- …만약 대령님이 그곳에 있었다면, 제이든과 손을 잡았을 겁니까?
안쉘이 물었지만, 엔저는 딱히 답을 내놓지 않았다. 없었던 일을 가정으로 삼아 상상이나 하는 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안쉘을 믿기에 그곳을 맡겼고, 그의 선택이 제이든 올던과 손을 잡은 것이라면 그게 자신의 정답이다.
- 왜 계속 그때 꿈을 꾸는 걸까?
“내일 기지를 버리고 최대한 18구역을 나와. 노엘을 보낼 테니까 합류해. 그리고…….”
엔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안쉘에게 지시를 내렸다.
“선배를…….”
* *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안쉘은 다급하게 엔저를 불러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통화가 종료되자마자 안쉘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에도 밖으로 튀어 나갔다.
컨테이너 밖에서 뜻밖의 인물이 안쉘을 반겼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바로 고려인이었다. 낮에 지었던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고려인이 경례했다.
“저, 잘 곳이 없거든요. 재워 주시겠습니까, 중위님?”
“어…….”
안쉘은 당장 헤리엇에게 달려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눈앞에 나타난 고려인을 내려다봤다. 그는 장난기 많은 남동생처럼 익살스럽게 주인의 허락도 없이 안쉘이 머무는 컨테이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가 멋대로 군화를 벗으면서 말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거 좀 탈영했다고 고새 집을 가져가 버리고.”
헤리엇을 제외하고 이곳에 좌천된 군인들은 대부분 군에서 지급한 컨테이너에서 지냈다. 불편함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화장실까지 구비된 최첨단이라서 익숙해지면 나름 편리한 공간이었다.
안쉘은 머뭇거리면서 손에 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가, 고려인을 따라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휘휘 저으며 찢긴 군복을 벗은 고려인이 안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씩 웃었다.
“엔저 대령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걸 어떻게.”
“제 소개를 제대로 하지 않았네요. 반갑습니다, 선배. 엔저 부대 소속 특수부원 고 려인 소위입니다.”
“아니, 무슨…….”
“일단 앉으세요.”
고려인이 채근하듯이 앉으라고 강요하자, 안쉘은 저도 모르게 그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낡은 의자가 소음을 냈다.
고려인은 컨테이너에 설치된 형광등을 줄을 당기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그가 줄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형광등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먼지를 후드득 쏟아 내렸다.
“아니, 무슨…….”
안쉘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려인은 분명 오늘 점심시간에 안쉘이 그의 군적을 확인할 때도 직급은 하사로 헤리엇보다 낮았다. 그런데 소위라니? 안쉘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고려인을 노려봤다.
엔저 부대는 모든 군인이 능력자인 소수 부대였다. 인원은 200명이 넘지 않으며 하나같이 능력이 뛰어났고, 그에 따라 유지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안쉘은 엔저의 보좌관으로서 이미 부대 내 인원 파악이 끝난 상태였고, 3년 전부턴 직접 부대원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제가 모르는, 엔저 부대의 부대원이라고요?”
“맞아요. 1년 전에 그렇게 됐어요.”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어여쁘게 있는 이목구비를 활짝 펼쳐 웃으며 고려인이 말했다. 안쉘은 이런 때도 유쾌하게 웃는 고려인을 내려다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안젤라를 놀리고, 헤리엇에게 친근하게 굴며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하하 호호 웃던 탈영병이 갑자기 대령님이 보낸 감시역이라고 하는데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저는 단테가 부리던 개새끼 중 하나였어요. 두 살 때 부모님을 잃고 연구소에 갇혀서, 단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개처럼 실험당했죠. 제 능력을 알고 단테는 다른 쪽으로 저를 거두었지만, 거기도 개 같기는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리고 방사성 물질 피폭으로 딱 뒤지겠다 싶을 때쯤 구해 준 게 바로 대령님이었습니다.”
고려인은 두 손을 펼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과장된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안쉘의 안색은 썩 좋지 못했다. 단테 막심의 연구소에서 실험체들이 어떻게 굴려지는지 이제 알기 때문이다. 고려인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어쩌면 저랑 중위님은 닮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부모님을 죽인 단테의 밑에서 개처럼 일하고, 이용당하기만 하다가 대령님에게 구원받았잖아요.”
“…설마.”
“맞아요. 우리 아빠도 엘리키스호 기계공이었어요. 제 능력은 부계니까요.”
“하지만… 왜 탈영을.”
고려인은 그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장난기 많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로소 그의 진짜 성격이 점점 드러나는 듯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로 누군가를 장난감 삼아 죽여 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엔저 대령님이 대장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시골 마을로 좌천시킨 건 알고 있죠?”
“…네.”
“저는 1년 전, 대장을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이곳에 왔어요. 하지만 몇 주 못 버티고 뛰쳐나와야 했죠. 왜인 줄 아세요?”
기록에는 심심해서 탈영했다고 보고되어 있었고, 헤리엇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여기서 며칠 지내니까 알겠더라고요.”
뭘?
안쉘은 어두운 창밖을 힐끔거리면서 말을 삼켰다. 별이 촘촘하게 박힌 밤하늘이었지만 산속의 밤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곳에 단테의 스파이가 있는걸요.”
안쉘은 그제야 엔저 맥과이어가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세상은 생각한 것보다 더 매정하고 차가웠다.
안쉘은 자신이 밤새도록 모은 자료와 고려인이 가져다준 자료를 확인하고 절망적인 얼굴을 했다. 그리고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짹짹-.
산새들이 지저귐을 울리며 아침을 알렸고, 이른 해가 얼굴을 내밀어 컨테이너에 유일하게 있는 작은 창문 사이로 햇볕을 내리쬐었다. 고려인은 밤을 새우는 게 일이라고 했으면서 졸려 죽겠다는 얼굴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그러고 보니 보고에는 인어 왕자 앤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어디 있나요?”
“…인어를 사람이라고 말하네요.”
“헌법에 인어는 인간의 또 다른 민족이라는 조항이 있어요. 당연한걸요. 뭘.”
안쉘은 힘겹게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냈다. 시간이 없어 빠르게 움직여야 하건만 머리는 욱신거리고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려인은 멍하니 전자 담배를 피는 안쉘을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없어요. 제이든의 아지트로 모두 넘어갔거든요. 거기서 인어 두 명과 합류하여 동쪽 바다로 갈 예정입니다.”
단테에게 사냥당할 뻔한 인어 둘과 합류하기 위해 앤과 라임이 떠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난 상태였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들의 목표는 헤리엇 님입니다. 당장 그분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죠.”
“좋은 생각이에요. 헬기를 준비해 뒀습니다.”
고려인은 개구쟁이처럼 씩 웃고 이곳에 둘밖에 없는데도 안쉘에게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하지만 너무 모법 답안이라 재미없네요.”
“그러면 뭐가 유쾌한 대답입니까?”
“그 자식을 쏴 죽이자고 했어야죠.”
이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안쉘은 황당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려인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엔저에게 뚜렷한 확답이 오지 않은 상태이며, 오히려 고려인이 단테의 끄나풀일 수도 있었다.
모두가 수상한 가운데 한쪽의 말만 듣고 다른 한쪽을 살해할 순 없었다. 일단 엔저의 족쇄이기도 한 헤리엇을 먼저 피신시킨 다음에,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안쉘은 언제든 고려인을 제압할 수 있게 뒤에서 경계하며 걸어갔다.
“그동안 그럼 스파이를 알아본 겁니까?”
컨테이너에 잠금장치를 걸고 밖으로 나오면서 묻자, 고려인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만들었다.
“말했잖아요. 핵에 대해서 연구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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