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인어의 비밀
사무실로 돌아온 안쉘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냉장고에 있는 물통을 단숨에 비우는 일이었다. 턱을 타고 땀이 어찌나 흐르던지, 안쉘의 얼굴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500mL짜리를 한 번에 비우고도 하나를 더 따 마신 안쉘은 텀블러를 가지고 헤리엇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헤리엇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아까까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이 늘어지더니 이제 겨우 상태가 돌아오나 보다.
“…연구소가 폭파됐군요. 우리가 떠난 직후에 일어난 걸 보니, 상대도 우리의 동태를 확인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전신을 꽁꽁 싸맨 방탄복과 군복을 벗은 안쉘의 상체에 검은 티셔츠가 젖어 찰싹 달라붙었다. 나름 군인이라고 운동을 쉬지 않고 했기 때문에 보기 좋은 복근과 팔 근육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안쉘은 당장 티셔츠도 벗고 싶었지만 참았다. 에어컨을 켠 안쉘은 들고 있던 가방을 펼치고 노트북에 전원을 켜 USB를 삽입했다.
“…건진 건 별로 없지만, 적어도 단테 막심에게 타격을 줄 만한 것들입니다.”
USB에는 헤리엇이 당한 생체실험이 쭉 나열되었다. 인체 해부, 봉합, 새 인체, 장기이식 등등의 제목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바로 이걸 폭로할 순 없었다. 그건 엔저 맥과이어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저었다.
안쉘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들어 헤리엇을 쳐다보았다.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안쉘과 눈이 마주친 헤리엇은 항상 그렇듯이 작게 미소 지어 주었다.
헤리엇은 포근하고, 꽤 무관심한 사람이라 곁에 있기가 편했다. 무심하고 마이페이스지만 적어도 사람의 상처를 헤집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다, 헤리엇 알스터는.
저 사람이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래… 없었다.
“…죄송합니다. 브리핑은 내일 해도 되겠습니까?”
헤리엇이 검지를 들어 안쉘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엔저와 대화를 나눌 때나 그를 달랠 때 자주 하는 헤리엇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손끝이 차가웠다. 보기 좋은 손가락이 하얗게 반짝거렸다. 안쉘의 땀이 묻은 헤리엇의 손가락 끝과 손톱마저도 하얬다.
“얼른 가서 쉬는 게 좋겠다. 엔저, 우리도 돌아가자.”
“네, 선배.”
왜 당신이 그런 꼴을 당한 걸까.
안쉘이 입술을 깨물고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책상 위에 둔 지팡이를 챙긴 헤리엇이 엔저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이 적막해진 사무실 내부에 울렸다.
안쉘은 창문을 통해 멍하니 절뚝이며 걸어가는 헤리엇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어두운 밤에 더욱 눈에 띄었다.
원래 헤리엇 알스터의 흔적을 얼굴 아래로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저 헤리엇 알스터 또한 열 살 이전의 헤리엇이라고 보기 힘들겠지. 그는 인어와 혼합한 괴물이었다.
“윽…….”
안쉘은 괴로웠다. 헤리엇과 특별한 관계가 아닌데도, 그를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정이 요동쳤다.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어머니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만큼 발밑이 무너지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목이 메고 심장이 막막했다.
안쉘은 너무 답답해 땀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문을 열고 저도 모르게 미친 듯이 산 위를 올랐다.
“헉헉-.”
온종일 움직인 몸이 피로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몰린 안쉘은 자신의 몸 상태를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산길에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긁힌 뺨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평소라면 피할 수 있었음에도, 안쉘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겨우 목적지에 다다라 걸음을 멈췄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처럼 미소 짓고 있는 그를 응시했다. 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내는 마치 안쉘이 온 것을 알아챘는지 고개만 살짝 돌렸다.
그의 손에는 청개구리와 작은 새가 앉아 있었다. 개구리와 새라니, 엉뚱한 조합이 너무나도 그와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툴툴이 씨.”
안쉘에게 인사한 앤은 개구리를 손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브룩.”
개구리가 가지기엔 너무 멋진 이름이었다. 다음엔 새를 날려 보냈다.
“부탁드려요, 피오나.”
그 역시 작은 새가 가지기엔 너무 예쁜 이름이었다.
“밤에는… 보통 새가 날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툴툴이 씨는 아는 게 많군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안쉘은 뺨에서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앤이 어느새 다가와 혀를 내밀었다. 안쉘은 자신의 뺨을 혀로 할짝대면서 상처를 문지르던 앤의 손을 잡고 느릿하게 내렸다.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슬퍼서 울고 있는 것 같아요.”
앤의 말에 안쉘은 잠시 말을 멈췄다. 뺨에서 흐르는 피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아마 상처도 없어졌겠지.
안쉘은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앤은 왜 계속 여기에 머무는 겁니까? 편지는 전해졌고…….”
사실 이곳에 머물라고 권유한 건 안쉘이었지만 앤이 그 말에 따를 의무는 딱히 없었다. 말을 돌리는 안쉘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앤은 방긋 미소 지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다시 호수를 내려다봤다.
처음 봤을 때 생명체가 살아 숨 쉬지 못했던 호수는 어느새 작은 세계가 되었다. 작은 물고기들과 이제는 큰 물고기들까지 떼를 지어 하나의 마을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의 능력은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약속했거든요. 아주 중요한 약속이요.”
앤은 마치 아주 중요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말소리를 낮췄다.
“약속이요?”
“네. 하지만 곧 지켜질 것 같아요.”
티셔츠만 입고 있었지만 안쉘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여름의 밤은 무더운 편이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똑 흘러내렸다.
안쉘은 마치 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느꼈다. 복잡한 시선으로 앤을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호숫가로 시선을 내렸다.
아름답고 맑은 호숫가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앤은 그 모습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 이 사내가 불현듯 보고 싶었을까.
안쉘은 소리 없는 의문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밤중에 그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안 한 건가. 안쉘은 멋쩍게 목덜미를 쓸었다.
앤의 푸른 머리카락은 염색으로도 내기 힘들 정도로 밝고 아름다웠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는 헤리엇의 인공적인 푸른 눈동자와 달랐다. 헤리엇이 마치 새하얀 도자기 위로 물감이 퍼지는 느낌이라면, 앤은 사파이어를 박아 넣은 것처럼 진한 색의 푸른 눈동자였다.
“미안했습니다, 앤. 이런 밤중에…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안쉘.”
앤이 손을 흔들었다. 소란하던 가슴이 여기에 와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안쉘은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산길을 내려가려고 했다.
“아.”
앤이 산에서 내려가려는 안쉘을 붙잡았다.
“안쉘.”
“??”
“당신은 아직 가꿔지지 않은 원석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안쉘이 몸을 돌려 물어보았다. 앤은 호수 아래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지상에 있느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앤이 인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헤리엇과는 모양이 다른 물갈퀴가 그의 예쁜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다.
“당신은 멋진 사람이라고요.”
하지만 안쉘은 그날 밤 악몽을 꿨다.
멋지지 않아요. 나는, 부모의 원수를 두고 무서워서 발발 떠는 개새끼고, 그리고…….
* * *
헤리엇은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헤리엇은 찬물을 받은 욕조 안에서 인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엔저는 욕조에 기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손을 욕조 위에 올린 엔저는 고개 숙여 눈을 감고 헤리엇의 손길을 즐겼다.
“…이런, 많이 충격적이었나 보네…….”
헤리엇은 매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헤리엇은 그 감촉이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나 엔저를 쓰다듬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엔저는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 같아서 이만큼 가까이 와 주지 않았다. 어쩌다 그가 방심했을 때 만졌던 게 다였기 때문에 헤리엇은 옛날부터 느끼고 싶었던 감촉을 양껏 음미하고 있었다.
안쉘은 아마 헤리엇에게 행해졌던 실험을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낯빛이 좋지 않았구나.’
헤리엇은 안쉘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는 착하고, 공감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냉정할 땐 냉정하지만 자기 사람에겐 한없이 물렀다. 안젤라는 이미 안쉘을 친오빠처럼 따르는 중이었다.
안쉘이 헤리엇을 은연중에 사람 대 사람으로 좋아하듯 헤리엇도 그가 싫지 않았다. 그는 꼼꼼하고 깐깐했지만 묘하게 느슨한 매력도 같이 가진 사람이었다. 허점이 많아 보여도 막상 일 처리는 능숙했다.
헤리엇이 싫어하는 점은 오로지 그의 촌스러운 2대8 머리와 안경밖에 없었다. 눈을 괴롭히는 건 사실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모습이 그렇게 못 볼 꼴이었니?”
“아니요, 그것 또한 아름다웠어요, 선배.”
“음.”
헤리엇이 의심하듯 작게 신음을 흘리자, 엔저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저의 20대 첫 자위는 선배의 그 영상이었으니까요.”
“오…….”
헤리엇은 눈을 크게 뜨고, 엔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모든 걸 사랑한다고 속살거렸다. 저를 예쁘게 봐 달라고 조르는 귀여운 후배의 귀와 턱을 쓰다듬던 헤리엇이 작게 미소 지었다. 턱을 지나 목덜미로 손을 옮긴 다음 힘을 주어 얼굴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쫍-.
귀여운 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엔저의 조잘거리는 입술을 빨아들인 헤리엇이 그의 뺨을 검지로 톡톡 쳤다.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본 적은 없거든…….”
“지금 틀어드릴까요?”
“있어?”
“네.”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황홀하게 반짝거렸다. 예쁜 루비를 닮은 후배의 눈동자를 보던 헤리엇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욕조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피곤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물속이 더 좋았지만, 드물게도 호기심이 피로를 이긴 순간이었다.
“치즈와 와인을 준비하겠습니다.”
엔저가 능숙하게 움직였다. 헤리엇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젠가 구석에 박혀 있던 비디오 플레이어를 찾았다.
엔저가 와인 잔과 적포도주를 테이블에 놓고 분주하게 마당에 있는 군사용 텐트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스박스에서 먹음직스러운 치즈와 비스킷을 꺼냈다. 아주 본격적이었다.
안쉘이 악몽을 꾸며 끙끙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헤리엇과 엔저는 소파에 길게 늘어져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각자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리언이 뒤쪽을 힐끔거렸다. 헤리엇은 소파 위에 느긋하게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고, 안쉘과 엔저는 그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푸른 머리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갈색 피부에 투명할 정도로 예쁜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었다. 특이하게 산호로 만든 비녀를 머리에 꽂고 있었다.
“북쪽 바다 하얀 산호 라임입니다.”
인어임을 증명하는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보던 안쉘은, 입을 다문 채 느긋하게 웃고 있는 헤리엇 대신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이유가…….”
지금 지상의 인간들은 인어를 미워하고 있었다. 인어가 지배하는 바다를 빼앗기 위해 20년 동안 바다를 공격했다. 양쪽 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보고 있는 현시점에서, 다른 인어의 등장은 너무 위험했다.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어요.”
자신을 라임이라고 소개한 인어는 제 가슴에 한 손을 올리며 당당하게 웃었다. 그녀의 뒤로 같은 머리색을 가진 아름다운 사내 두 명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라임의 어깨 위에는 통통하고 작은 새가 부리를 내밀고 앉아 있었다. 안쉘은 저 새를 어디서 많이 본 기분에 눈을 가늘게 떴다.
“…피오나.”
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안쉘을 향했다. 그녀는 기다란 푸른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씩 웃고는 손가락을 뻗어 작은 새의 가슴 털을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지 새가 부리를 쩍쩍 벌리면서 웃었다.
“오라버니가 혹시, 앤입니까?”
“맞아요, 그가 제 오라버니에요.”
“…….”
두 인어는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똑 부러지게 웃으며 대답한 라임은 주변을 돌아봤다. 지금은 햇빛이 쨍한 여름의 대낮이었고, 수분을 빼앗아 가는 이 날씨에 지상에 올라온 인어는 힘이 없었다.
그때 안젤라와 리언이 그들 사이로 머그잔을 달칵- 내려놓았다. 다섯 잔에는 차가운 보리차가 가득 담겨 있었다. 헤리엇과 5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인어들이 이런 날씨에 뭐가 필요한지 잘 아는 그들이었다.
안젤라가 컵을 다 내려놓고 라임의 뒤에 있는 이들을 훑어봤다. 한 명은 무척 큰 근육질의 사내였고, 또 한 명은 꽤 갸름하게 생긴 사내였다.
둘 다 굳은 얼굴로 라임을 지켜보는 모습이 예민하게 날이 선 분위기였다. 마치 조금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목숨을 다해 라임을 지키겠다는 결연까지 보이는 듯했다.
“…앤 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산 위로 올라가면 호수가 있어요.”
안쉘이 헤리엇에게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이야기는 호숫가에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인원은 최소로, 안젤라와 리언은 두고 가겠습니다.”
“좋아.”
원래 계급대로라면 책임자는 엔저였지만, 이 작디작은 부대의 대장은 헤리엇이었다.
안쉘은 안절부절못하는 안젤라를 안심시키고 뒤를 돌아봤다. 리언도 안젤라만큼은 아니지만 불안한 표정이었다.
한숨을 쉬며 인어들을 살펴봤다. 티가 나지 않게, 곁눈질로 관찰하며 긴장으로 굳은 볼 안쪽을 이로 씹으며 침을 삼켰다.
왜 왕족이라고 정평이 난 인어들이 북쪽 바다를 떠나 위로 나왔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평범한 일은 아니라는 것, 그뿐이었다.
* * *
“라임!”
“앤!”
남매가 서로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흰 원피스를 입은 라임이 조급하게 옷을 벗고 앤과 포옹하며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리엇이 작게 미소 지으며 텀블러의 물을 들이켰다.
라임과 앤은 몇 번이나 호수 아래로 들어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수면 위로 올라온 그들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흰 피부를 가진 앤과 달리 라임은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매끈한 피부 위로 물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신이 만든 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인어들은 한참 저들끼리 안부를 묻으며 조잘거리기 바빴다.
“이게 다입니까?”
수면 위로 완전히 올라온 앤이 물었다. 라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설 수 있는 인어들이 몇 없었어요. 이번에도 인간의 군함이 공격을 해 와서…….”
라임이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두 인어가 앤을 향해 고개를 까닥인 다음, 입고 있던 두꺼운 후드를 벗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라임과 앤이 뛰어들었을 때와 달리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눈을 감고 얼굴에 잔뜩 튄 물을 털어 낸 헤리엇이 작게 미소 지었다. 호수 안에서 네 인어가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말씀해 주지 않겠습니까?”
헤리엇이 앤을 향해 나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앤은 잠시 안쉘과 눈이 마주쳤다. 안쉘은 입을 달싹이다가 앤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감이 그랬다. 그가 이제 곧 떠나야 할 때라고, 이곳에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저희는 동쪽 바다로 갈 겁니다.”
앤이 안쉘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동쪽 바다요?”
그곳은 이제 인어가 살지 않았다. 헤리엇이 참전한 전쟁에서, 그는 심해까지 도망가는 인어들마저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군함과 인어 할 것 없이 그곳은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동쪽 바다가 죽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육질의 인어는 붉은 용암 도트럼, 곱상하게 생긴 사내는 푸른 용암 레이럼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같은 알에서 태어난 쌍둥이라고 들었을 땐 믿어지지 않았다.
인어가 난생이라니, 새로운 지식에 안쉘이 놀랐다. 하지만 그것에 놀랄 틈은 없었다. 안쉘은 바르르 떨며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입을 열었다.
“…인어가 존재하지 않는 바다는 썩어 간단 말인가요?”
“맞아요. 우리는 바다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어요. 경계를 벗어나야 할 때는 지상을 통해 횡단해야 하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잖아요.”
그래, 인어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 덕에 인간은 큰 승리를 쟁취했다.
안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충격에 뇌가 굳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군, 그래서 지금 동쪽 바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었던 건가.”
엔저의 확답에 안쉘이 뻣뻣하게 굳었다. 모두가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지만 지금 동쪽 바다는 심해에서부터 썩은 생물이 점차 올라오고 있었다. 생태계가 서서히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인어가 조금이라도 남은 남쪽과 서쪽 바다와는 다르게, 동쪽은 인어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못했다.
“인어들은 바다를 생명의 근원으로 삼고 있지만 그건 바다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있음으로 바다가 살아갈 수 있죠. 앤은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앤이 간다면 동쪽 바다는 다시 예전의 푸름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상을 횡단하여 동쪽 바다로 가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를 포함한 도트럼과 레이럼, 그리고 앤이 동쪽 바다에 정착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최종 목적입니다.”
안쉘은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이 말을 믿어 줄까. 인어가 없다고 바다가 썩어 간다니. 모두가 코웃음 치며 자신을 매도하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안쉘은 이를 깨물었다. 결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임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앳된 얼굴이었다. 아마 안젤라보다도 나이가 더 어릴지도 몰랐다. 그녀의 외모는 안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원래 살던 고향인 북쪽 바다를 떠나 인어가 모두 죽은 그 광활하고 넓은 바다에 고작 저 인어 넷이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안쉘이 꺼낼 수 있는 말은 겨우 이것뿐이었다. 그들이 몸을 담근 호수는 앤이 그곳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이유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서야 깨달았지만, 이건 앤만이 가진 고유 능력이 아니었다. 이건 인어들의 능력이었다. 이게 바로 바다를 차지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인어들의 종족 능력이자 존재 이유였다. 왜 그걸 여태 몰랐을까!
안쉘의 눈가가 붉게 변했다. 바다를 살아가게 하는 인어들에게 인간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을 없애고 바다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들이 존재함으로 바다가 살아갈 수 있었는데.
바다가 죽으면 지상이라고 온전할까.
“혹시 당신이 툴툴이 씨인가요?”
“…….”
라임의 물음에 안쉘은 대답하지 않고, 앤을 노려봤다. 지금 이 중요한 때에 그딴 이름으로 나를 소개했냐는 눈초리였다.
“전쟁을 종결시켜 줄 거잖아요.”
라임은 의연하게 웃으며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헤리엇은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직시했다. 동쪽 바다의 인어를 모두 죽인 건 헤리엇, 바로 자신이었다.
“…음?”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행동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묘하게 가슴이 싸하고, 목덜미가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 어떤 감정이라고 정의하지는 못했다.
“동쪽 바다는 우리에게 맡겨 주세요. 우리는 절대 바다를 멸망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은 인간이 밉지 않습니까?”
헤리엇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질문은 헤리엇이 할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앤과 처음 만났을 때 안쉘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인어들은 인간을 미워하고 증오할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의 증오는 정당한 것이었다.
인어들이 멸망한다면 바다는 썩어서 죽을 것이고, 인간 역시 많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특히 이미 인어들이 전멸한 동쪽 바다와 접한 지역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인어들은 인간과 같이 멸망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쪽 바다를 정화하고 다시 생명을 불어넣겠다고 전했다. 그건 인어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또한 인간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앤에게 들었어요. 전쟁을 멈추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죽은 우리 동족을 위해 기도를 해 주세요. 그리고 이 전쟁을 멈춰 주세요.”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라임의 곁에서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도트럼과 레이럼이 차례로 말했다. 외모는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는 누가 말했는지 모를 만큼 똑같았다.
둘은 라임과 같이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들의 순수함에, 멍청할 정도로 착한 심성에, 그리고 올곧은 믿음에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라임은 그제야 씩 웃었다. 어른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안젤라가 짓는 것과 같은 순수한 웃음이었다.
“우리는 평화와 노래를 좋아하는 종족이기 때문이지요.”
헤리엇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의 하얀 눈동자가 잠시 초록빛을 띠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헤리엇, 인어는 평화와 노래를 좋아하는 종족이야.”
“하지만 ----는 인어는 바다를 지배하는 독하고 나쁜 종족이라고 했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앞에서 알시타 막심이 무척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인어는 순수한 생명체야. 증오를 모르는 가련한 이들이지. 나는 그들에게서 평화를 배우고 싶어. 그러니까 헤리엇.”
“너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헤리엇… 분명 배울 수 있을 거야.”
“네게 코코아를 차갑게 먹는 방법을, 바다를 횡단하고 알려 줄게.”
하지만 알시타 막심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죽었고, 헤리엇에게 코코아를 차갑게 먹는 방법을 알려 주지 못했다.
“선배, 이렇게 먹는 겁니다.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알시타 막심이 사라진 그곳에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얼음이 가득한 코코아 위에 휘핑크림을 얹어서 손에 들고 온 그는 어여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은 오로지 헤리엇을 향한 것이었다.
그가 붉은 눈동자를 예쁘게 반짝이며 헤리엇을 온전히 담고 있었다. 바람의 능력을 가진 이답게 바람에 어울리는 후배였다. 그의 결 좋고 보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잔뜩 헝클어졌다. 그 모습 또한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귀엽고, 여리고, 작고, 소중한 내 어린 후배는 여전히 어여쁘고, 아름다웠다. 헤리엇은 입을 달싹였다. 알시타가 말했던 감정이 이런 거라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답답하고 목이 멨다.
삐리리릭-.
분위기를 깨는 촌스러운 기계음 소리가 들리고 안쉘이 조심스럽게 등을 돌렸다. 그동안 헤리엇은 몇 번이고 엔저를 힐끔거렸다.
후배는 늘 그렇듯 언제나 헤리엇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에 담기는 붉은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뭐? 어째서… 잠깐, 잠깐만!!”
처음에 작게 소곤거리던 안쉘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부술 듯이 휴대전화 화면을 다급하게 누르던 안쉘의 낯빛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아까까지 인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상기해 있던 표정하곤 정반대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엔저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차마 인어들에게 들려줄 수 없는 내용이었는지 보고하는 목소리가 낮았다.
“대령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군단장님의 명령입니다. 당장 연대로 복귀하라는 내용입니다.”
“…….”
군에서 엔저를 원하는 건 당연했다. 그는 유능했고, 능력자였으며, 그의 부대는 늘 승리를 가져다줬다.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엔저의 손목을 잡고, 그가 어디로 가지 못하게 막을 뻔했다.
군이 무서운 곳임을 헤리엇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엔저는 여리고 착한 후배라서, 분명 전투를 치를 때마다 상처 입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리엇은 엔저를 향해 뻗으려던 제 손을 내려다보면서 작게 미소 지었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어긋나 있는 미소였다.
왜 엔저를 막으려고 했을까? 그가 군인이고 자신이 군인인 이상 명령에 복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엔저를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건 헤리엇이 살아온 당연한 이치였고, 엔저 역시 그것에 따를 것임에 의심은 없었다.
“기어이 북쪽 바다와 전쟁을 할 심산입니다, 대령님…….”
“너도 언젠간 감정적으로 사람을 상대할 날이 올 거야, 헤리엇.”
군부의 명령, 상부, 군, 대통령, 위를 향한 복종, 엔저 맥과이어가 군인인 이상 당연히 참전해야 하는 전쟁.
하지만 그런데도 헤리엇은 고개를 계속 모로 돌리며 갸우뚱거렸다.
‘가지 마, 엔저.’
그 말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입 안에서 맴돌았다. 자신에게도 명령은 절대적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 * *
각이 잡혀 반짝반짝 광이 나는 제 군화를 내려다보던 델타 막심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찾는 이가 없었는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주변은 경례하는 군인들이 군집해 있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자세가 흐트러져도 그를 꾸짖는 이 하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델타 막심은 단테 막심의 조카였고 화려한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얼마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해 왼쪽 귀를 잃고 뺨에 흉측한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 역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완벽하게 복구시켜 예전의 고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군인들은 물론이요,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는 기자들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잘못 찍혀 미디어에 머저리 같은 모습을 평생 남기느니 오늘 좀 고생하고 말지.’
델타는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들었지만, 푸른색 눈동자는 우왕좌왕 주변을 살펴보느라 바빴다.
오로지 전쟁을 위해 지어진 항구인 만큼 부두는 거대했고, 수백 개의 컨테이너에는 한 개의 지역을 간단히 몰살시킬 수 있는 화약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다를 집어삼킬 듯 어마어마한 수의 함대가 명령을 기다리며 항에 대기하고 있어 드넓은 바다가 모두 군함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북쪽 바다로 전진할 기세라, 얼마나 위협적이고 웅장한지 델타마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많은 군함을 숨기고 있었던 백부의 힘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젠장, 세상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좀 닥쳐. 끌려가고 싶어?”
“꼴이 웃겨서 그런다.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웃겨서.”
묵묵히 정면을 보고 경례하는 델타의 뒤로 속닥거리는 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름 목소리를 줄인다고 속닥거리는 거겠지만, 바로 대각선 앞에 있는 델타의 귀에 모두 다 들렸다. 거친 사내의 목소리였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았다.
“굳이 북쪽 바다를 침범할 이유가 없잖아.”
“…중앙센터와 군부에서 정한 일이야.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사항이 아니라고.”
“그렇지.”
약간 맥 빠진 목소리로 수긍한 사내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델타 막심은 코웃음을 칠 뻔했다. 북쪽 바다를 칠 이유와 명분은 차고도 넘쳤다. 저 야만족들이 언제 동쪽과 서쪽을 노릴지 몰랐고, 그렇게 되면 지금 바다를 횡단하는 무역선들이 모두 바다 아래로 잠들고 말 것이다.
인간을 언제 덮칠지 모르는 불온한 싹은 미리 잘라 버려야 했다. 단지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드넓고 아름다운 바다를 그 짐승들이 차지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알시타, 기억나지 않는 숙부는 델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죽었다고 했다. 델타는 그가 참 한심했다. 그는 자기 아들도 지키지 못하고 단테의 눈 밖에 난 머저리였다.
분수도 모르고 꿈에만 부풀어 평화라는 말도 안 되는 노래만 부르던 사람이라고 단테의 측근들은 입을 모았다. 델타는 죽은 그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 바라던 평화를 본인이 깨 버렸구나.
알시타 막심의 섣부른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바다 아래 수장되어 결국 인간이 바다를 침범할 수 있는 명분을 준 셈이다. 그가 바라던 평화는 결국 알시타에 의해 깨진 것이다. 델타는 죽은 그를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그냥… 무서워서 그런다.”
“제발 좀 닥쳐, 노엘.”
델타는 낯익은 이름에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무심코 뒤를 곁눈질했다. 수다스럽게 떠들던 이들의 정체는 엔저 부대의 노엘과 반이었다.
노역장에서 보석이나 탐지하는 것 외엔 쓸모없는 능력을 가진 그들을 발탁한 건 엔저 맥과이었다. 군부에서 그런 비루한 능력으로 최전방에서 무슨 공을 세우겠냐며 그들을 비웃었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은 최전방에서 치루는 전투마다 훌륭한 공을 세웠다. 그러자 군에서도 점차 그들을 능력 있는 젊은이들로 인정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엔저 부대로 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엔저가 직급을 대뜸 내려놓고 시골로 귀향해 엔저 부대가 공중에 붕 떠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부대 내 군인들이 모두 상당한 실력을 가진 능력자로 이루어진 엔저 부대는 단 3대의 군함으로 서쪽과 남쪽 바다를 휩쓸었었다.
“꼭…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잖아.”
세상이 멸망하다니, 지나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엔저 부대의 최전방을 담당하는 이들치곤 참 나약한 소리였다.
인어 따위 없다고 세상이 멸망할 리 없지 않은가. 이 바다는 이제 인간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바다로 인해 인간은 지금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지도 몰랐다.
그들을 비웃으려던 델타를 막은 건 부두에 막 부드럽게 도착한 군용 차량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소란스러웠던 항구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햇볕은 쨍하고 더웠지만 땀 한 방울마저 식히는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수행인들 몇이 내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차량 문이 열리고 늙은 사내가 내렸다. 힘없이 풀죽은 흰 머리, 주름진 얼굴.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로 자신의 군사를 둘러보던 단테 막심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뒤로 측근 두 명이 따라 내렸다. 마지막으로 뒤를 따라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테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조용했던 좌중이 급작스럽게 들뜬 열기로 가득 찼다. 침만 꿀꺽 삼키던 기자들이 플래시를 요란하게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 댔다.
인터뷰는 사전에 금했기 때문에 달려들진 못했지만, 조금의 틈만 보이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승냥이 떼처럼 눈을 번쩍였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바리게이트로 설치한 결계가 흔들릴 뻔했다.
델타 막심은 저도 모르게 욱신거리는 왼쪽 귀를 감쌀 뻔했다. 지금은 그 동통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죽이려고 한 사내였다. 처음엔 밉고 무섭고, 증오스러워 이를 아득바득 갈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시 연심이 조금씩 차올랐다.
그럼 그렇지. 저도 군인인데 복귀 안 할 수 없겠지.
군인에게 명령 불복종은 곧 죽음이었다.
“영웅이다.”
“저게 엔저 맥과이어인가?”
“사진보다 훨씬 잘생겼는데.”
“국민 영웅.”
수군수군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대중에 엔저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기며 장교모를 썼다.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번뜩이는 붉은 안광은 가리지 못했다.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단테의 뒤를 쫓는 게 어찌나 그림처럼 아름다운지 델타는 침을 삼켰다.
단테 막심은 군인들을 포함한 기자들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출전에 만들어진 단상은 작았지만, 단테의 모습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항구에 단단히 정박해 있는 검은 군함에 빛이 비추며 거대한 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있던 군중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단테 막심은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왜 북쪽 바다마저 침범해야 하는가. 많은 국민들이 의문을 가지고 계시리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을 봐 주십시오.”
단테 막심은 평소와는 다르게 군인이라도 된 듯 딱딱한 목소리로 서두를 꺼냈다. 긴장이라도 했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표정이었다.
배를 스크린 삼아 켜진 영상에는 두 명의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이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들은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표정은 꽤 두려워 보였지만 누구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저건… 인어.”
푸른 머리카락에 얼핏 보이는 눈동자 역시 푸른색이었다.
‘인어들이 인간의 형상을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구나. 기분 나쁘게.’
델타 막심은 침을 뱉고 싶었다. 두 인어는 인간의 다리로 다급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막다른 길에 막힌 듯 서로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인어는 결국 다급하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인간의 다리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인어 꼬리로 변했다. 그들은 바다로 도망쳤고, 곧 영상이 꺼졌다.
“이렇게 인어들이 지상을 통해 다른 지역의 바다로 침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는 곧 북쪽 바다 인어들을 내버려 두면 다시 비극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아들 알시타 막심과 우리 옆의 사랑하는 가족이 다시 허망하게 바다 아래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또다시 바다를 안전하게 횡단할 수 없습니다. 북쪽 바다 인어들을 몰아내고 바다를 차지해야만 우리들의 살길이 보입니다.”
단테 막심은 그렇게 말하고 쾅! 단상을 내려쳤다.
노엘은 ‘…그러면 바다를 횡단하지 않으면 되잖아.’ 하고 중얼거리려고 했지만, 반에게 막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단테는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바다를 잃은 인어들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이 테러의 시작입니다. 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모든 군은 북쪽 바다를 향해 마지막 희망의 등불을 비출 것입니다.”
“내 뜻이 곧 모든 지상의 뜻이니, 바다에 인어 따위는 필요 없다.”
이전에 단테 막심은 델타에게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그리 말했다. 백부는 정말 인어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총사령관 엔저 맥과이어는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단테 막심의 말이 끝나고 마이크는 뒤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엔저에게 돌아갔다.
엔저 맥과이어는 붉은 눈동자를 들어 좌중을 훑었지만 입을 열지 않고 제 옆에서 대기하던 해군군단장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는 자신보다 계급이 한참 아래인 엔저에게 총사령관직을 뺏겼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마치 분풀이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소리를 꽥꽥 질렀다.
단테 막심은 인자하게 웃으며 엔저의 등을 토닥이고 허리를 쓸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상한지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흐뭇하게 웃을 정도였다.
조카를 대하는 듯한 단테의 자상한 웃음을 내려다보던 엔저가 입을 거의 열지 않고 속삭였다.
“저 두 인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런 게 궁금한가? 죽였다네.”
단테는 마치 산책 나간 개가 똥을 싸서 곤혹스러웠다는 말투로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엔저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죽인 인어들만 해도 몇백, 몇천 마리인데, 고작 두 마리 가지고 죄책감이라도 들었나?”
“…….”
“그리고 지금도.”
엔저는 단테의 자상한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 보며 함께 웃었다.
지금은 웃으라지, 늙은이.
* * *
안쉘은 아연실색하여 TV 화면을 응시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군인들이 부둣가에 한데 모여 있는 것도 미치겠는데, 설상가상 군함의 수만 해도 벌써 오백 척이 넘어갔다.
어디서 저런 거대한 군함들을 모아왔는지 기가 찰 정도였다. 저 정도면 북쪽 바다뿐만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러 간다고 해도 믿겠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중간부터 단테 막심의 수행원인 것처럼 등장한 엔저의 모습에 안쉘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옆에서 북쪽 바다 인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TV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TV의 존재에 화들짝 놀라는가 싶었는데 화면 속의 인간들이 모두 북쪽 바다를 침공하기 위해 모인 것임을 알고 표정을 굳혔다.
그들 역시 군함을 본 적 있었다. 그 위에서 인어들을 살벌하게 공격하는 인간들의 모습 또한.
“전쟁이… 왜…….”
라임이 입술을 바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군함은 당장에라도 북쪽 바다로 향할 것 같았지만, 다행히 침공은 바로 행해지진 않았다. 아직 대통령 서명란이 공란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단테는 대통령이긴 했지만 어디까지 임시였다. 안쉘 리라는 후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아마 저 군함은 모두 북쪽 바다로 향했을 것이다.
안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테가 일부러 저 영상을 틀어 준 까닭을 눈치챘다. 인어가 바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대중은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과거 전례가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인어는 언제든지 바다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고, 바다를 허락 없이 횡단한 인간들을 심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늘 그 심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떻게 하죠?”
안쉘이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헤리엇을 쳐다봤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헤리엇은 TV 화면 속 엔저 맥과이어의 모습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엔저는 간다는 말도 없이 다음 날 사라졌다. 그러더니 TV 속 단테의 옆에 서 있었다.
헤리엇은 자신이 충격받은 건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엔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감정의 의미를 도통 모르겠다. 군의 명령은 절대적이니 엔저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라고 분명히 생각하는데 말이다.
단테는 이번 선거에서 질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예 질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하지 않은 게 맞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이 될 것이고 결국 서명하겠지. 북쪽 바다 인어들은 그대로 죽고 말 것이다.
바로 다음 주가 선거인데,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며 무기력하게 안쉘이 주저앉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지. 대령님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구나.
안쉘이 자기혐오에 빠져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부드럽게 잡았다.
“…….”
“걱정 마세요.”
“…….”
“저건 겁을 주기 위한 보여 주기인 것이죠? 아직 모든 일은 정해지지 않은 게 맞죠?”
“…….”
앤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을 내려치는 안쉘의 손목을 잡고 일으켰다. 하지만 안쉘은 단테를 막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20년 동안 중앙을 지배한 단테는 떡 주무르듯 군을 조종할 수 있었다. 사실상 그가 선포했으니 전쟁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삐리릭 하고 안쉘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듣기 괴로울 정도로 심각하게 촌스러운 기본음이었다.
“…네.”
- 안녕, 안쉘 리 후보. 통화 괜찮은가?
“누구십니까.”
이런 심각한 때에 장난을 주고받고 싶지는 않았다. 안쉘이 날카롭게 대답하자 상대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했다. 중후한 늙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단테 막심이 부드럽다고 하면, 이 사내는 더 젊고 묵직했다.
- 지금 뉴스 보고 있지? 손을 잡자고.
“댁이 누군데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안쉘이 경계하며 대답했다. 사내가 웃음을 큭큭 터뜨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에 안쉘의 손이 뻣뻣하게 굳었다.
- 메일 보냈으니까 확인하고, 나를 믿겠으면 적힌 장소로 튀어 와.
자기 할 말만 끝내고 사내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 절박한 상황에 이런 수상한 전화라니. 그는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허망하게 바닥을 노려보다가, 앤이 부축해 준 손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
노트북 전원을 켜자, 멍하니 TV 화면을 보고 있던 헤리엇의 시선이 돌아갔다. 안쉘은 마우스를 달칵거리며 개인용 메일로 들어갔다.
그가 쓰는 메일은 단 두 개였는데 하나는 군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이고 하나는 개인용이었다. 군사용으로 쓰는 건 메일이 오면 따로 알림이 오는데 개인용은 알림이 울리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 않은 마음으로 개인용 메일을 클릭한 안쉘은 피로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앤이 다가왔다. 모두의 시선이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안쉘은 힘이 빠진 손길로 앤이 잘 볼 수 있도록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메일로 온 것은 하나의 영상이었다.
라임과 도트럼, 레이럼의 시선이 모였다. 헤리엇도 고개를 돌려 그들과 함께 영상을 봤다.
영상 안에는 아까 TV에서 단테가 틀었던 영상이 나왔다. 두 인어가 도망가고 있었다. 인어들은 바다로 뛰어들었고,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다. TV를 통해 봤던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노트북에 실행된 영상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인어들이 서로를 껴안고 바르르 떨며 눈물을 흘렸다. 화면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더 도망가 봐, 사냥할 맛이 나지 않네… 이 더러운 괴물들아.
그건 아주 온화한 늙은이의 목소리였다. 단테 막심의 목소리였다. 단테 막심은 능력자였지만 살상 능력은 없었다. 단테 막심의 손이라고 추정되는 주름진 손이 화면 안으로 튀어나왔다. 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두 인어는 눈물을 흘리며 바르르 떨다가 바다 아래로 도망가듯 헤엄쳤다. 하지만 화면 안에서 탕!!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라임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돼!!!”
바다는 금세 피로 물들었다. 탕! 탕! 몇 발의 총성이 무자비하게 들렸고, 곧 영상은 끝이 났다.
안쉘은 굳은 표정으로 노트북을 돌렸다. 사방이 조용했다. 라임은 두 귀를 막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도트람의 표정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입술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씹고 있었다. 붉은 피가 인어의 입술 틈새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단테 막심은 생각보다 더 무서운 늙은이였다. 그의 잔혹함과 비정함에 안쉘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저런 자를 이길 수 있을까.
단테는 인간성마저 버린 무서운 사람이었다. 안쉘은 착잡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영상이 끝나고 다음으로 넘어가니 글자가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메일 자체에 오류가 발생했다.
쾅-!
“윽!”
약간의 경고음과 함께 노트북이 폭발했다.
폭발에 휘말린 안쉘의 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상을 입었는지 손이 욱신거렸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갑자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대체 자신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어마어마한 일에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지 허탈하다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모님의 뒷모습이 안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능력자인 자신을 위해 당신의 몸도 한번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죽을힘을 다해 일했던 부모님. 안쉘은 고개를 들었다.
“헤리엇 님.”
“…….”
헤리엇은 어딘가 멍해 보였다. 안쉘은 지나치듯 본 헤리엇의 눈동자가 약간 녹색이 번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다시 본 헤리엇의 눈동자는 여전히 새하얗게 바래 있었다. 안쉘은 다시 헤리엇을 불렀다.
“헤리엇 님,”
“응?”
그는 엔저가 본인을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안쉘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그 곤란한 듯한 작은 미소를 본 안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방심하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가 봐야 할까요?”
“…….”
그래도 영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닌지 헤리엇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안쉘은 짧게나마 노트북이 터지기 전 그들이 말해 준 접촉 장소의 주소를 봤다. 가고 안 가고는 헤리엇의 판단에 따를 생각이다. 이곳의 대장은 엔저가 아닌 헤리엇이었다.
물론 안쉘보다 한참 계급은 아래라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헤리엇을 상관처럼 따르고 있었다. 헤리엇은 작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제 턱을 톡톡 두들겼다. 안쉘은 그 가벼운 손짓 하나에 심장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함정일 가능성이 커요.”
앤이 옆에서 끼어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제 종족이 그렇게까지 허무하고 굴욕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능글거리며 웃던 얼굴이 딱딱하게 변한 것이 안타까웠다.
앤의 푸른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인간을 용서하겠다고 말한 인어들은 어느 순간이든 이 분노를 인내하고 견뎌야만 했다. 안쉘은 그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인 자신이 보기에도 인어들이 놓인 상황이 너무나도 불합리해 가슴이 답답했다.
“안쉘.”
“네.”
헤리엇의 부름에 안쉘이 대답했다.
“혹시 가기 전에 엔저가 남긴 말은 없어?”
“…….”
있었다.
엔저는 헤리엇에게는 말없이 떠났지만, 그 전에 안쉘에게 한 가지 명령을 하고 떠났다. 어두운 밤하늘을 등지고 헤리엇을 집에 두고 안쉘을 찾아온 엔저는 붉은 눈동자를 어둡게 번뜩였다.
그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는데, 과거 헤리엇에게 선물했던 도청기와 연결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있습니다.”
“뭐라고?”
“…헤리엇 님을 이곳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감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관할 구역은 엔저가 헤리엇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헤리엇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제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사락. 힘없는 하얀 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갔다. 엔저는 헤리엇의 머리카락을 감히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힘을 주어 당기거나, 아니면 깨지는 물건을 대하는 사람같이 부드럽게 만져 댔다. 헤리엇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색을 내는 붉은 입술이 열렸다.
“가자.”
“네?”
“가자, 안쉘. 그 협력자가 있는 곳으로.”
“언젠간 너도 네 감정대로 움직이는 날이 올 거야.”
알시타는 그렇게 말했지만, 헤리엇은 지금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헤리엇은 티가 나지 않을 뿐 나름 사물을 느끼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단걸 좋아하고 코코아를 좋아했다. 안젤라나 리언은 귀여웠고, 나름 시골 마을에서 밭이나 갈며 느긋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의 동물들은 무척 흥미롭고 사랑스러웠다.
알시타는 알려 줬었다. 어린아이는 단걸 좋아하고, 자극적인 걸 잘 먹지 못하고, 동물을 사랑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만약 분노하는 방법이나 슬퍼하는 걸 알려 줬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헤리엇 님은…….”
헤리엇은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풀고 제 옆에 앉은 앤을 돌아봤다. 지금 차 안에는 안쉘과 앤, 그리고 헤리엇이 타고 있었다. 인어 전부를 태우고 이동하기엔 너무 위험했고, 앤이 죽는다고 해도 인어들은 계획대로 동쪽 바다를 향할 생각이었기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끔찍한 영상을 보고도 자신들의 신념을 무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대단한 이들이었다. 인간들보다 더 우직하고 강했다.
헤리엇은 제 엄지를 손톱으로 작게 누르며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 그들을 볼 때마다 동쪽 바다에 처음 출전했을 때가 기억났다. 그들이 가라앉은 핏빛 바다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헤리엇은 아직 동정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행복하신가요?”
“…음.”
뜬금없는 질문에 안쉘도 침묵했다. 앤은 이런 상황에서도 앤이었다. 그는 푸른 눈동자를 따듯하게 빛내며 헤리엇에게 물었다.
헤리엇은 나름 이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평온했고 조용했다. 마을 사람들은 헤리엇을 대장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노인들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환한 웃음으로 펴질 땐 지나가는 마음으로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헤리엇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어두워진 도로를 깜박거리는 가로등이 밝히고 있었다. 헤리엇의 하얀 얼굴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어둡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헤리엇은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불행한 적 또한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중이었다.
“여기에 엔저가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답을 어떻게 들었는지 앤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엔저가 옆에서 헤리엇을 향해 선배, 선배, 고양이처럼 작게 속살거리면 참 좋겠다. 고작 하루였지만, 헤리엇은 엔저가 참으로 보고 싶었다.
한참 도로를 달리던 차가 골목길 내부로 들어갔다. 헤리엇은 늘 새삼스럽게 안쉘의 운전 실력에 감탄을 내뱉었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꺾는데도 차체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안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해 갑니다.”
헤리엇은 뒷주머니에 작은 단도를 끼워 넣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먼저 차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차에서 내린 헤리엇이 탁- 지팡이를 소리 내어 바닥을 두들겼다.
안쉘은 바로 차를 타고 도망갈 수 있게 자동차에 시동을 건 상태에서 운전석 밖으로 나왔다. 뒤를 이어 앤도 함께 나왔는데, 사실 그는 수중이 아닌 이상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안쉘은 기척 없이 바로 창고를 습격할 예정이었지만, 앤은 훈련받은 군인이 아니라서 발소리를 죽이지 못했다.
그게 참 앤답다고 해야 할지.
안쉘은 한숨을 쉬며 급습한다는 계획은 빼 버렸다. 애초에 성공하리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안쉘은 작은 창고 문을 열었다. 슬슬 어두워지는 하늘에 작은 창고는 폐가처럼 음습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안쉘은 침을 꿀떡 삼키며 문을 완전히 열었다. 요즘 여기저기 참 많이도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렸지만, 안은 정말 어두워서 눈앞 하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안쉘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언제든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하지만 그 전에 헤리엇이 안쉘의 목덜미를 붙잡고 뒤로 쭉 당겼다.
“악!?”
안쉘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헤리엇은 안쉘을 당기며 뒤에 숨겨 뒀던 작은 나이프를 들고 한곳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뭉툭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방이 밝아졌다. 훅훅 끼치는 열기에 안쉘이 눈을 찌푸렸다.
조명을 켠 게 아니라 여기저기 도깨비불처럼 불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시야가 밝아지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이쪽을 향해 총구를 내밀었던 사내의 손목을 관통한 헤리엇의 나이프였다.
“생각보다 더 대단하군.”
목소리가 매우 중후하고 낮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헤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토끼 가면을 쓴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낡은 철제 의자가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얼마나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바닥에 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총 열두 명, 모두 무장한 사내들이었다. 그들 전부가 각각 동물 가면을 쓴 괴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협력을 위해선 신뢰가 1순위일 텐데. 가면을 쓰고 공격까지 하려고 하다니.”
“이딴 습격에 당할 별것도 아닌 치를 믿을 순 없잖아.”
토끼 가면의 사내가 아주 느긋하게 말했다. 안쉘은 역시 함정인가, 아니면 꿍꿍이가 있는 것인가 사내의 의중을 가늠하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직접 듣는 사내의 목소리가 왠지 익숙했다.
‘어디서 들어 봤지…….’
토끼 가면의 사내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꽤 중후한 목소리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얼추 오십 대 정도는 되어 보였다.
“섣부른 것도 없잖아 있고. 내가 너희를 죽일 단테의 끄나풀이면 어쩌려고?”
그는 가볍게 얘기했지만, 이쪽은 전혀 아니었다. 사방은 무장한 군인이었고 심지어 능력자들로 보였다.
젠장, 그냥 무장한 군인도 열두 명을 상대하기 힘든데 능력자라니.
절로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안쉘 역시 너무 섣부른 결정을 내렸다고 후회하며 혀를 찼다. 엔저가 단테의 술수에 손수 걸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초조해져 평소보다 경계가 한층 무너진 탓이다.
안쉘은 빠짝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때 헤리엇이 느긋하게 앞으로 나가 뒷주머니에 미리 준비해 뒀던 권총을 꺼냈다.
“…헤리엇 님.”
“3분.”
“네?”
안쉘은 침을 삼켰다. 늘 그렇듯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속삭이는 헤리엇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헤리엇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느긋하게 총을 장전하며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다 처리하는 데 3분 정도 걸릴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