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실험실
- 오늘 하루 시민단체에게 개방하는 연구소는 20여 년 동안 인어의 생태계를 조사하고…….
치직치직, 소리를 내는 노이즈가 거슬렸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쉘은 조깅을 하며 라디오 채널을 고정했다.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정보를 모으는 건 앞으로 있을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조깅을 끝낸 안쉘은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날씨도 더운데 격하게 움직이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눈꺼풀 위로 따갑게 흐르는 땀을 대충 손목으로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샤워를 대충 끝내고 검은 티셔츠를 입은 안쉘은 거울 앞에서 왁스와 젤을 들었다. 그리고 안젤라에게 몇 번이나 ‘그놈의 2대8 머리 좀 안 하면 안 돼요!?’ 하고 타박을 받았던 걸 떠올리며 손바닥 가득 젤을 발랐다. 그리고 2대8로 머리를 쓸어 넘긴 뒤에 안경을 꼈다.
TV 뉴스와 신문을 확인하니 여전히 연구소 개방으로 시끄러웠다. 하긴 20년 만에 처음으로 개방하는 연구소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긴 했다. 떠도는 음모론에는 생체실험이 진행된 무시무시한 곳이라고는 하나, 설마 그게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한 군 소속 연구 시설에서 행해졌을까 싶었다.
옛날에 인터넷 어딘가에서 그런 내용의 글을 읽었을 땐 말도 안 된다며 쓰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안쉘은 그러다가 문득 헤리엇 알스터를 떠올렸다.
그는 군에서 만들어진 인조 인어였다. 따지고 보면 생체실험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쉘은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걸 보면 딱히 그렇게 나빴던 실험은 아니었을 거라고 홀로 단정 지었다.
“헤리엇 님, 괜찮으십니까?”
안쉘은 사무실 내부로 들어가는 하얀 머리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오늘따라 하얀 머리카락이 부스스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딘가 불편한 듯 엉거주춤 앉아 있던 헤리엇이 안쉘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음… 내장이.”
갑자기 듣고 싶지 않아졌다.
헤리엇은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면서 몇 번 눈을 껌벅거리다가 걸음을 멈췄다. 절뚝거리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묘한 위화감이 아래에서부터 무럭무럭 올라왔다.
헤리엇은 실제로 몸이 두 동강이 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지금 그는 배가 아리고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처음 겪는 감각이고 고통이었다.
엔저의 거대한 몽둥이로 내장을 후려 맞았으니, 당연히 아플 만도 하지만…….
헤리엇은 끙끙거리며 겨우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가 다시 끙끙거리며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는 마치 아픈 늙은 개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소파에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지금 당장 호숫가로 뛰어가 인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헤리엇은 익숙지 않은 고통에 계속 아랫배를 쓰다듬다가 한 걸음 옮겼다. 발끝에서 미열 같은 고통이 올라왔다. 헤리엇에게는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역시 귀여운 후배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헤리엇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눈물까지 흘렸다.
헤리엇은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누워서 쉬니 조금은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헤리엇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오늘도 작열하듯 뜨겁게 타오르는 햇볕을 응시했다.
안쉘은 빠르게 책상으로 다가가 컴퓨터 전원을 켜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는 아침 브리핑할 자료를 인쇄하면서 사무실 안을 살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안젤라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말했다.
“대장님, 그거 어디 있는지 아세요??”
헤리엇은 아직도 아픈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소파 위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탁자에 올려놓은 헤리엇이 안젤라의 물음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거?”
“그거, 왜 있잖아요. 그… 잡초 뽑기.”
“잡초 뽑기?”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하는 헤리엇이 답답했는지 안젤라가 잠시 안절부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말을 정리했다.
“그 기계광 녀석이 만들어 준 거요. 옆집 할머니가 잡초 때문에 산에서 구르셨대요!”
착한 안젤라는 아마 산과 논에 있는 모든 잡초를 뽑아 버릴 생각인지 열정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헤리엇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창고는 찾아봤어?”
“아뇨, …다녀오겠습니다.”
차마 창고까지 찾아볼 생각을 안 했던 건지 안젤라의 귓불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잽싸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브리핑해야 하는데… 어딜 저렇게 쏘다니는지.’
안쉘이 한숨을 쉬며 인쇄한 자료를 헤리엇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기계광이요?”
“탈영했던 애가 있는데, 그 애가 기계를 참 잘 다뤘거든.”
헤리엇은 미세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탈영병 하나가 있었지. 안쉘은 재빠르게 기억을 되살렸다. 심심하다고 군대를 탈영하는 미친놈이 있다니 어이없어서 웃었던 기억밖에 나질 않는다.
헤리엇은 가끔 그 탈영병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재밌는 아이.’라고 일축할 뿐이었다. 안쉘은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은 그의 데이터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 대령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오늘 라디오를 듣더니 급하게 자리를 비웠어.”
헤리엇이 보좌관도 모르는 엔저의 행방을 말해 주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입가에 있는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안쉘은 그의 포커페이스가 느슨하게 깨진 걸 알아차리고 입술을 매만졌다. 하지만 거기서 입을 열 바보는 아니었다. 안쉘은 다시 큼큼 헛기침했다.
“그러면 브리핑은 둘이서 하겠습니다. 오늘 리언이 아프다고 병가를 냈는데 결재 부탁드립니다.”
“아파?”
“네. 어제 이장님과 먹은 음식이 상했는지 배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저런.”
오늘 시간이 나면 그의 집에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한 헤리엇은 다시 입술을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빈 사무실이 매우 적적했다. 시골로 좌천된 군인은 할 일이 없었다.
지상은 점점 평화를 되찾고 있지만, 바다는 여전히 전란이 진행 중이었다. 인어들도 끊임없이 죽어 나가 점점 바다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인어들의 저항이 지대했지만 결국 승리는 인간 쪽으로 기운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인어가 사라진 동쪽 바다 생태계가 점점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02구역에서 발표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금방 사그라졌다.
* * *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더운 해가 조금씩 기울어 갈 무렵, 안젤라가 밭일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코끝에 진흙이 잔뜩 묻어 있는 걸 보니 오늘도 일을 제일 열심히 한 건 안젤라가 분명했다.
거기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 끝에도 진흙이 묻어 있었다. 바지는 잔뜩 올라가 접혀 있었는데, 신발은 어디다 버렸는지 맨발이었다.
안젤라는 한참 헤리엇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거렸다. 헤리엇은 소파 위에 느긋하게 앉아 안젤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한참 동안 떠드는 안젤라를 보던 헤리엇이 시계를 확인하며 손을 들었다.
“퇴근해.”
헤리엇은 그녀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눈치챘다. 이른 퇴근에 활짝 웃은 안젤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허겁지겁 제 옷을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아까까지 아랫배, 그 안쪽 내장이 홧홧하게 아팠었는데 어느새 고통은 사라진 상태였다. 좋은 일이지만 묘하게 아쉬워진 헤리엇은 엔저를 생각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톡톡.
탁자의 유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해가 슬슬 지고 주황빛 하늘이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존재감이 희미해서 그런지 소파 위에 누워 있던 그가 잠시 사라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안쉘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 입을 달싹였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어디로 훌쩍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희미하게 사라지던 헤리엇의 존재감이 어느새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엔저?”
“선배.”
엔저의 손에는 달콤한 코코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배앓이를 했을 선배를 내팽개치고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사죄하는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헤리엇이 앉아 있는 소파에 다가갔다.
헤리엇의 눈동자가 잠시 크게 떠졌다. 오늘 하루 이상하게 유난히 마음이 헛헛했었는데 엔저의 모습을 보니 모두 사라졌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는 여느 때와 같은데 왠지 모르게 오늘은 더 예뻐 보였다.
원래도 잘생긴 후배였는데 지금은 그 효과가 너무 컸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퍼져 나가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대체 이게 뭘까.
헤리엇은 엔저가 건네준 코코아를 들어서 마셨다. 코코아 안에 얼음이 들어 있어 마시기가 좋았다.
“오늘 어떠셨습니까?”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헤리엇의 상태를 구석구석 살펴본 엔저가 아주 조심스럽게 어깨에 손을 둘렀다. 붉은색 눈동자가 헤리엇의 시선을 붙잡았다. 헤리엇은 슬픈지 아니면 기쁜지 모르는 감정으로 제 심장을 눌렀다.
“음… 엔저.”
“네.”
“조금 외로웠어.”
헤리엇은 손을 뻗어 엔저의 뺨을 쓰다듬었다. 검지로 턱선을 훑어 내리며 오늘 하루 느꼈던 감정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래, 그렇게 뜨겁게 자신을 안았던 엔저가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며 아침 댓바람부터 떠나 버린 뒤부터 지금까지 느낀 것은 온통 외롭다는 감정뿐이었다.
헤리엇이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것이기도 했다. 엔저 덕분에 새로운 감정을 알아가는 건 좋지만 썩 유쾌하진 않았다.
“…선배, 죄송합니다.”
엔저 맥과이어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오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선배.”
헤리엇은 곤란한 듯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엔저의 눈에는 그 어떤 사람의 것보다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잠시 제 선배에게 제 오감을 뺏긴 엔저는, 아침에 감히 선배를 두고 간 이유를 설명했다. 그 말에 안쉘은 펄쩍 뛰었고 헤리엇은 멍하니 엔저의 얼굴을 쳐다봤다. 전자는 너무 놀라서였고, 후자는 그냥 잘생긴 후배의 얼굴에 빠져든 것이다.
* * *
“군 연구실이에요?!!”
“알아.”
엔저는 펄펄 날뛰는 안쉘을 귀찮다는 듯, 혹은 멍청하다는 듯 쳐다봤다.
‘심드렁한 엔저의 얼굴도 어쩜 저렇게 예쁘고 고울까?’
헤리엇은 어제보다 더 잘생겨진 후배를 멍하니 쳐다봤다. 생각 없이 사는 헤리엇이 대책 없이 엔저의 얼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안쉘은 답답해하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지금 군 연구소에 잠입해서, 연구원을 모두 죽이겠다고요? 미치셨습니까, 대령님? 절대 안 됩니다!”
오늘 아침 라디오와 TV, 온갖 미디어 매체에서 종일 떠들었던 군 연구소는 오늘 하루 시민단체에 의해 개방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잠입해 연구원을 모두 죽이겠다고 말하는 엔저 맥과이어는 안쉘에게 미친놈 그 이상도 아니었다.
“죽여서 뭐 하시려고요?! 장기라도 파시게요?”
“죽이는 건 내 개인적인 원한이고.”
엔저는 안쉘이 펄펄 뛰는 정상적인 반응을 보여 주는 동안 헤리엇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안쉘은 불도저 같은 제 상사와 헤리엇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발 말려 달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헤리엇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안쉘 쪽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엔저는 착한 후배인데, 원한을 산 그쪽이 나쁜 게 아닐까.”
맙소사, 저쪽은 더 미친놈이었다.
안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몇 번이나 신음을 끙끙 흘렸다. 군 연구소는 쉽게 잠입할 수 없을뿐더러, 지금 죽이겠다는 사람들은 군에서 관리하는 연구원이었다.
연구원들 모두 능력자들이었으며, 그곳 자체가 20년 동안 한 번도 외부인에게 문이 열린 적 없는 철옹성 같은 곳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한 개방 때문에 연구원들은 많이 없겠지만 그만큼 보안은 더 강화되었을 터.
“…왜, 여기를…….”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거든.”
엔저는 붉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오늘 들어가지 못하면 이후에 연구소를 들어가는 건 더 어려웠다.
“이게 대체…….”
엔저는 자신이 준비한 지도를 탁자 위로 펼쳤다. 어디서 구한 건지 연구소 내외부가 꼼꼼히 그려진 지도였다. 테이블을 꽉 채울 정도로 거대했으며, 정말 정교했다.
헤리엇은 작게 미소 지은 채 엔저의 허리를 살살 쓰다듬다가 지도를 보며 아, 하고 작게 신음했다.
“여기, 내가 있던 곳이네.”
헤리엇이 작게 속삭였다. 안쉘은 간신히 신음을 삼키고 식은땀을 흘렸다.
“…생체실험.”
엔저 맥과이어의 개인적 원한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밤 그곳으로 잠입할 이유 역시 생겼다.
* * *
미쳤지, 미쳤어.
안쉘은 눈물을 삼키며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내려쳤다. 아무리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평범한 길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지만, 이건 너무 미쳐서 돌아 버리는 늪인 것 같다. 연구소는 생각보다 더 거대했고, 더 많은 군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인원은 적게, 그러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안쉘은 안젤라와 리언은 이 계획에서 당연히 뺐다. 헤리엇은 끼워 넣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헤리엇은 군인이었고, 아카데미 시절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으며 안토니오를 한 방에 제압하는 무력도 있었다. 다만, 엔저의 영향 때문인지 안쉘의 눈에 헤리엇은 늘 약해 보이고 지켜 줘야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안쉘이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옆에서 엔저가 헤리엇 외에 이 임무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고 조언까지 해 주었다. 결국 인원은 셋, 그러나 침입해야 하는 연구소에는 징글징글한 능력자들로 가득할 것이다.
안쉘은 저절로 나오는 앓는 소리를 삼키며 연구소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차를 주차했다.
“소음기를 장착한 총만 사용해야 합니다.”
헤리엇은 지팡이에 달린 붉은색 보석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 표정에는 긴장감 한 조각 찾기 힘들었다.
“최대한 얼굴 노출은 피하고, 발각되지 않게 움직입니다.”
일행은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양 허벅지에 달린 칼집에 나이프를 넣으며 만만의 준비를 했다. 그때 헤리엇이 방독면을 쓰며 물었다.
“연구원은?”
“…보는 즉시 사살합니다.”
그러면서 안쉘은 몇 번이나 헤리엇의 눈치를 살폈다. 안쉘이 봤을 때 아무리 헤리엇이 날렵하게 움직이더라도 그의 능력은 바다에서나 효율적이었다. 게다가 다리를 저는 사람이라 불가피하게 행동의 제약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절름발이인 헤리엇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전력이 얼마나 될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안쉘도 머릿속으로는 그가 약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한 실력을 모르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헤리엇은 바로 눈앞에 제 몸을 생체실험으로 쓴 연구실이 있음에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안쉘은 그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고민했다.
군 연구소가 시민 단체의 시위에 결국 이번에 처음으로 비공개적 개방을 허락했다. 만약 정말 저 안에서 생체실험이 행해졌다면 이 군 연구소는 단테 막심이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기밀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단테 막심의 약점을 찾아낼 기회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엔저조차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보안이 강했겠지만 오늘 개방으로 어딘가에는 구멍이 뚫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분명 시민단체의 눈을 속일 정도로 깊은 곳에 단테 막심의 약점이 될 자료들을 숨겨 뒀을 게 분명하니까.
침을 꿀꺽 삼킨 안쉘은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눈으로 확인하며 고개를 들었다.
“시민은 죽이면 안 됩니다.”
물론 시민단체가 빠져나가고 움직일 계획이지만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었으므로 미리 주의를 주었다.
먼저 앞서 정찰 다녀온 엔저가 헤리엇을 따라 방독면을 썼다. 이제 본격적으로 침입할 준비를 하자 안쉘은 정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육탄전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혹시 오늘이 지옥의 저승길로 끌려가는 날은 아닐까 생각하며 안쉘은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걸 안쉘도 잘 알았다. 저 엔저 맥과이어가 허겁지겁 작전을 짠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앞에 군인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지만 두 명이나 되니, 첫 관문부터 어렵군요.”
망원경으로 안쉘이 중얼거렸다. 그의 뒤에서 헤리엇과 엔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는데 방독면 사이에서도 끈끈하고 핑크빛 기류가 느껴졌다.
지금 상황에서 나올 수 없는 기류에 안쉘은 이를 갈았다. 지금 생사가 갈리게 생겼는데 둘은 서로에게 하트나 날리고 있었다.
일행은 연구소 주변에서 기척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 시민단체를 태운 버스가 지나고, 문이 서서히 닫혔다. 문이 개방되었다 닫히면서 생긴 CCTV의 사각지대가 눈에 띄었다.
지금 당장 저 군인 두 명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안쉘이 움찔거리는 동시에 옆에서 누군가 튀어 나갔다. 어어? 하고 소리 낼 틈도 없었다. 헤리엇과 엔저는 정말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엔저는 그렇다 치고 헤리엇은 절름발이인데?
문을 닫고 경계하던 군인에게 두 사람이 동시에 돌진했다. 몸의 축을 돌려 돌려차기를 날린 헤리엇의 몸은 무서울 정도로 날렵했다.
빠각 소리를 내며 사내의 몸이 한순간 허물어졌다. 그건 엔저 쪽도 마찬가지였다. 헤리엇은 턱이 돌아간 군인의 멱살을 잡고 소음이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군인의 몸무게가 제법 나갈 텐데도 허물어지는 그를 한 손으로 지탱하고, 아주 천천히 내려놓는 헤리엇의 몸이 땅에 뿌리박힌 나무처럼 단단해 보였다.
“…수석 졸업생.”
안쉘은 기가 막혔다. 지금 자신이 누굴 걱정했는지 허무해질 지경이었다. 군에서 관리하는 최고 교육기관인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괴물들을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사사이.’
‘사백사십이.’
헤리엇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하얀 수술복을 입은 무표정한 어린 소년이 복도 끝에 아스라이 서 있었다.
헤리엇은 그것이 환영임을 알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금발 머리, 녹안을 가진 소년은 바로 헤리엇 그 자신이었다.
연구소 이곳저곳에 그때의 잔재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어린 헤리엇은 연구 가운을 입은 이들에게 매일같이 이리저리 끌려갔다. 반항 한번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끌려가다 보면, 그곳은 항상 실험실이었다.
그들은 헤리엇을 사사이라고 불렀다. 어떤 이는 사백사십이라고 불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호명할 때마다 연구소 내부에 갇혀 있던 실험체들은 울부짖었다. 울고, 반항하고, 오줌을 지리고 화를 냈다.
알시타 막심이 죽고 그가 후원하던 보육원은 문을 닫았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은 모두 연구소에 팔려 나갔고, 개중에는 헤리엇도 있었다.
그들은 헤리엇을 꽤 값어치 있는 실험체라고 말했다. 열 살에 능력이 발현된 천재 소년. 하지만 그들에겐 좋은 실험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타닥.
헤리엇이 절름발이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군인을 제압하면, 그 뒤에서 엔저가 폭력으로 군인들을 무력화시켰다. 턱이 돌아가고 팔다리 어딘가를 부러트렸어도 죽이지는 않았다. 엔저는 정말 연구원들만 죽이려는 것 같았다.
헤리엇은 CCTV 전선을 자르기 위해 전기 분전함으로 향하는 안쉘의 뒤통수를 쳐다보다가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네.’
그는 넉살 좋게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여유로운 헤리엇에 반해 안쉘은 많이 긴장했는지 몇 번이나 헛손질했다. 그의 숨결은 매우 거칠고 목덜미가 땀으로 가득 젖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둠이 깔린 연구소 내부는 호러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분위기를 풍겨 긴장감을 가중시켰다. 금방이라도 흉악한 살인범이 ‘짠’하고 나타나 이곳을 초토화할 것만 같았다. 공포 BGM만 깔린다면 이곳은 그럴듯한 B급 공포 영화 안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고, 영화에나 나올 법한 군 연구소에 몰래 침입한 괴한은 바로 자신이었다.
“…어? 전선이 잘려져 있습니다.”
안쉘은 파란색 전선을 들고 뒤를 돌아봤다. 전선이 이미 깨끗하게 잘려져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마모된 게 아니라, 누가 날붙이로 자른 듯 단면이 매우 깔끔했다.
그제야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예상외로 사방이 잠잠했다.
안쉘은 얇은 가방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연구소 내부에 연구원 한 명 없이 무척 조용했다. 엔저는 고갯짓하며 손가락질했고, 헤리엇은 방독면을 고쳐 썼다. 세 사람은 다시 어둠이 깔린 복도를 달렸다.
꽤 안쪽으로 들어가던 안쉘이 문득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뒤따르던 엔저와 헤리엇도 벽에 붙으며 대기했다. 안쉘은 손짓으로 엔저와 헤리엇에게 생각을 전했다. 셋이 이곳에 오기 전 정한 암호였다.
〔안쪽에 사람이 세 명 있습니다. 연구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보아하니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엔저가 손짓하며 대답하자 안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엇은 조용히 몸을 숙였다. 셋 둘 하나, 마치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처럼 엔저가 주먹을 꽉 쥐자 안쉘과 헤리엇이 튀어 나갔다.
“헉.”
눈앞의 광경에 안쉘이 기가 막혀서 헛숨을 들이켰다. 세 명의 중무장한 군인이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문 앞에는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그들은 모두 능력자 표시가 있었는데,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즉사한 것처럼 보였다. 피가 바닥과 벽을 타고 흐르는 게 너무나도 끔찍했다. 안쉘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령님, 일단 대기할까요?”
안쉘이 방독면을 벗으며 말했다. 엔저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고, 이어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을 향해 고갯짓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동그랗고 꽤 커다란 문이었다.
어느새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땀으로 엉켜 있었다. 안쉘은 앞머리를 흔들면서 땀을 털어 냈다.
연구소 내부는 시원했지만, 긴장한 상태에서 격하게 움직이자니 절로 땀이 났다. 하지만 눈앞의 괴물들은 숨 한번 흩트리지 않고 묵묵히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젠장, 저 괴물들.’
안쉘은 속으로 두 사람을 욕하며 노트북을 펼치고 준비한 USB를 꺼냈다.
“…앞서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시큐리티가 깨져 있는 걸 보니 군에서도 슬슬 이상 징조를 깨달았을 겁니다. 대략 20분, 그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탈출까지 20분입니다.”
노트북 화면이 깜빡깜빡 켜지며 해킹프로그램이 좌르륵 실행됐다. 안쉘은 빠르게 타자를 치며 철문을 굳게 지키는 보안장치를 해킹했다.
그는 땀을 뚝뚝 흘리면서 이를 꽉 물었다. 이러려고 아카데미에서 해킹을 배운 건 아니었는데.
“열어.”
엔저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말은 쉽지.’
안쉘은 속으로 욕을 겨우 삼키며 신음을 흘렸다. 헤리엇은 방독면을 쓴 상태에서 안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작게 미소 짓는 것이 느껴졌다.
안쉘은 연구소 내 시큐리티를 모조리 해킹하고 USB를 뽑아 들었다. 그것을 시큐리티 안쪽 내부에 꽂아 노트북으로 전송하며 버튼을 만지자, 철옹성처럼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찰칵 열렸다.
짝짝짝.
헤리엇이 옆에서 태평하게 손뼉을 쳤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선배.”
엔저의 태평한 목소리도 들렸다. 지적할 힘도 없는 안쉘이 먼저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으슬으슬 찬바람이 몰려오는 것이, 내부 온도가 많이 내려가 있는 걸 깨달았다.
“선배, 기억나십니까?”
엔저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지도를 펼쳤다. 오후에 본 지도와는 다른 연구소 내부 지도였다. 이걸 대체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니 연구소 내 숨겨진 실험실이 곳곳에 표시된 지도였다.
헤리엇은 방독면을 벗고 고개를 숙여 지도를 살폈다.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경계가 모호한 하얀 눈동자가 지도를 훑다가 고개를 들었다.
“음, 대충은.”
“연구실은 총 몇 개입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열두 곳. 메인 실험실은 하나였어.”
엔저는 열두 곳이라는 소리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 팔뚝을 손가락으로 일정하게 두드렸다.
그러는 동안 안쉘은 헤리엇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을 생체실험했던 곳에 들어왔는데도 헤리엇의 얼굴에서는 분노 한 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곳 생체실험의 피해자이자 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헤리엇은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오늘 아침 산책을 나왔다고 해도 저것보단 생생하리라.
만약 생체실험을 당한 피해자가, 그 실험이 행해졌던 연구소에 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분명 헤리엇 같은 반응은 아닐 것이다.
혹시 정말 이곳 실험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런데 엔저 맥과이어는 왜 그렇게 득달같이 연구원까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할까.
안쉘이 아는 엔저는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엔저는 안쉘이 아는 한 한 번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런 이가 지금 이곳에서 헤리엇을 위해 대량학살을 예고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리엇은 화를 내지도 혹은 복수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 왜.
“혹시 선배, 총괄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음.”
실험체였던 헤리엇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가.
헤리엇이 작게 미소 지으며 엔저의 방독면 겉면을 검지로 톡톡 쳤다. 마치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고양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손길이었다. 물론 지조 없는 엔저는 그 손길에 녹아내렸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는데도 두 놈이 아주 염병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연구원들이 제일 많이 모였던 연구실은 알고 있어.”
“어디입니까?”
헤리엇이 손가락을 들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손톱마저 하얄까. 그는 손가락으로 지도 중 가장 구석에 있는 연구실을 두 번 톡톡- 쳤다. 지도 내에서 가장 작고 구석에 있어서 딱히 눈에 띄지 않은 곳이었다.
아마 헤리엇이 가리키지 않았다면 시간 없다고 지나칠 만한 크기였다. 안쉘은 땀을 훔치면서 주변을 살폈다. 묘하게 실험실 안에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대령님, 역시 우리 외 침입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끼이익-.
문을 열자, 마치 불에 타 죽은 재처럼 변한 연구원 시체 두 구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생기 없는 실험실 내부는 안쉘이 싫어하는 공포 영화를 닮아 있었다. 해쓱해진 얼굴의 안쉘과 달리 엔저는 태평하게 실험실 내부로 더 깊게 들어갔다.
이미 누군가가 한바탕 휩쓸고 간 곳에 쓸 만한 자료는 없어 보였다.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지금 탈출해야 할지도 모른다. 군이 벌써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안쉘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길 때 엔저가 말했다.
“선배가 말씀하신 연구실까지 간다.”
“…습격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시체가 아직 열기를 간직하고 있어요.”
안쉘은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불에 탄 시체는 지금까지 열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즉, 이곳을 헤집은 이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단 소리였다.
안쉘은 조금 겁을 먹었지만, 이내 진정했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두 사람은 군 최강의 영웅 엔저 맥과이어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헤리엇 알스터였다. 상대가 당하면 당했지 결코 이쪽에서 먼저 당하진 않을 것이다.
안쉘은 다시 방독면을 쓰며 초조하게 엔저를 뒤따랐다. 습격한 이는 불 계열 능력자인지 연구소 여기저기에 그을음이 있었다. 그 흔적조차도 아직 열기를 띠고 있었다.
“엔저, 먼저 가 있을래? 잠시 가 볼 곳이 있어서.”
안쉘의 뒤에서 따라오던 헤리엇이 속삭였다.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하고 있었는데 지도를 떠올린 안쉘은 헤리엇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실험실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헤리엇은 방독면을 다시 벗었고, 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네. 선배,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대령님?!”
아직 이곳을 습격한 놈이 있을 수도 있는데 혼자는 위험하니 셋이 움직이는 게 나았다. 하지만 엔저는 헤리엇의 부탁대로 그를 보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 피가 튄 연구소는 괴기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안쉘이 결국 참지 못하고 엔저의 뒤에서 헤리엇이 향한 곳을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불안한 듯 입술을 짓이겼다.
“대령님, 헤리엇 님을 홀로 보내도 되는 겁니까?”
“괜찮아, 그놈도 슬슬 빠져나갔겠지.”
그놈? 그러고 보니 엔저는 앞서 안쉘이 누군가 연구소를 습격했다고 보고했음에도 동요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움직였다.
“대령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이곳에 우리 말고 다른 이가 올 것이라는 걸.”
“단테 막심을 끌어내리고 싶은 게 나뿐만은 아닐 테니까. 뭐…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엔저 맥과이어는 방독면 바깥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안쉘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방독면으로 겨우 감추고 엔저의 뒤를 따랐다.
불타는 냄새와 화약 냄새가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은 연구소 내부에 연구원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꽂혀 있었다. 이건 정말,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것을 보고 지나가려니 안쉘은 속이 좋지 않았다.
엔저는 복도 끝에 위치한 꽤 허름한 문 앞에 서서 거침없이 문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쉘은 과연 이런 허름한 방에 제대로 된 정보가 있을지 긴가민가했다.
침입자는 이곳을 뒤져 볼 생각은 미처 못 했는지, 방 내부가 꽤 깨끗했다. 컴퓨터가 그대로 켜져 있었고 여기저기 실험 재료와 실험 연구 파일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해킹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5분 정도 걸립니다.”
안쉘이 USB를 본체에 꽂으며 말했다.
“…자료는 필요 없어. 키워드를 찾아.”
엔저 맥과이어는 능력을 살짝 사용하며 말했다. 바람이 불어 책장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수상한 파일은 모조리 꺼내 눈앞에 펼쳤다. 엔저의 주변으로 촤라락 종이 쪼가리들이 펼쳐졌다.
“키워드요?”
“그래, 세뇌 키워드.”
“…헤리엇 님의 것입니까?”
목줄, 길들인 개, 실험체, 그리고 세뇌 키워드.
종합해 보면 헤리엇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엔저 맥과이어가 왜 생체실험 자료를 두고도 단테 막심을 끌어내리지 못했는지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의 군 내부 생체실험에 관한 자료들은 지금이라도 단테 막심을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비인간적이었다. 제약 회사조차 동물실험이 법으로 금지되었는데 하물며 인간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못해도 단테가 쌓아 올린 모든 걸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군에서 최초의 인조 인어를 목줄 없이 풀어 줄 리 없지. 특히 그 늙은이는 더…….”
헤리엇에게 목줄을 감아 동쪽 바다를 전멸시킨 인조 인어를 지배하고 그를 원하는 엔저 맥과이어까지 장기 말로 이용할 수 있으니 대통령으로선 이득밖에 없었다. 안쉘은 엔저 맥과이어가 마지막까지 헤리엇 알스터라는 사내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지만 뭔가 찝찝하다.
안쉘이 컴퓨터를 해킹하며 내부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연구 자료가 좌르륵 나열되며 엄청난 속도로 백업되고 있었다. 헤리엇에 관한 실험을 찾기 위해 눈을 좌우로 움직였다.
“몇 분이나 걸리지?”
“곧 끝납니다!”
안쉘은 삼중으로 된 암호를 풀며 땀을 줄줄 흘렸다. 군 내부 연구소답게 해킹이 쉽지 않았다. 인조 인어를 만들 수 있는 연구 재료, 실험, 그리고 사례 등을 전부 USB에 담으며 안쉘은 고개를 돌렸다.
“풀었습니다.”
엔저는 방독면을 벗었다. 안쉘이 땀범벅이 될 동안에도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서 휴지통을 들어 안쉘의 앞에 가져갔다.
“토하려면 여기다가 토해. 증거 남기지 말고.”
“???”
엔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안쉘은 일단 해킹한 USB 내부 백업 파일들을 훑었다.
50… 61… 70… 99… 100.
인코딩이 끝나는 동시에 동영상 하나가 모니터 화면을 채웠다. 그건 인조 인어의 ‘성공 사례’이면서 ‘불량’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실험 영상이었다. 그곳에는 금발 머리의 소년이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안쉘은 그것이 헤리엇임을 단번에 눈치챘다.
“…….”
재생되는 영상을 계속 보던 안쉘은 엔저의 예견대로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쓰레기통 안으로 위장에 남아 있는 내용물을 토하고 말았다.
시큼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지고, 안쉘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영상으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엔저 맥과이어는 실험 영상을 눈에 가득 담고 있었다.
사실은, 별거 아닐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헤리엇은 화내지 않았고 슬퍼하지 않았다. 연구소 내부에 침입했을 때도 그에게서 감정의 흐트러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안쉘은 멋대로 생각했었다. 어쩌면 헤리엇이 당한 생체실험은 그렇게 지독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그래서 엔저가 연구원들을 죽인다고 선포했을 땐 기분이 꺼림칙했었다.
“우웩, 우욱… 이… 이건, 이건 제정신이 아니에요. 우웨에엑!!! 사람이… 사람이, 어… 어떻게… 살아 있죠? 어어… 어, 으으으… 어으으으… 헤리. 헤리엇 님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호흡이 힘들어 가쁜 숨을 내쉬며 안쉘이 달달 떨었다. 그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뚝뚝 떨어지는 위액이 그의 입술에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그런 안쉘을 엔저 맥과이어는 냉정할 만큼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대령님, 은, 그렇게… 냉정하게 있을 수 있습니까?! 이… 이건. 이건 정말, 으욱…….”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듯 안쉘이 몸서리를 쳤다.
군에 몸을 담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난 안쉘은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군인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견딜 수 없었다. 제아무리 전쟁으로 볼 꼴 못 볼 꼴을 다 봤다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괴, 괴물이, 잖습니까. 이건… 사람이…….”
바르르 떨던 안쉘이 다시 구역질했다. 헤리엇은 살아 있으면 안 됐다. 이 실험은 ‘살아남을 수 없는’ 실험이었다. 이것에 성공한 헤리엇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미쳤어요. 이건, 이런 실험을 받고… 어떻게 그분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죠?? 연금으로, 오백만 원이 나온다고?? 웨에엑… 그분에게 마음이, 있는 겁니까??? 제… 제정신이 아니야.”
말을 이어가는 안쉘의 입술이 고통스럽게 짓이겨졌다. 그는 헤리엇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헤리엇은 옆에 있으면 편하고, 포근해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변은 늘 조용했다. 희미한 헤리엇의 주변은 청량함이 남아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화된 것 같았다.
문득 델타 막심이 헤리엇을 보고 ‘불량품’이라고 떠들어 댄 것을 떠올렸다. 그래, 델타 막심의 말이 맞았다. 헤리엇 알스터는 불량품이고 실패작이었다.
그는 실험에 유일하게 성공한 군 최고의 인조 인어였지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실패작이었다.
안쉘은 자신이 어지간한 일에 단련된 편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어리석을 정도로 요동치는 속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배를 움켜잡으며 몇 번이나 고통스럽게 토악질했다. 겨우 멈췄다 싶으면 떠오르는 영상에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안쉘은 헤리엇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헤리엇은 망가졌다. 그건 확신이었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헤리엇의 정신은 망가지고 부서져 다시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괜찮을 리 없었다. 괜찮은 척하는 거다.
안쉘은 헤리엇을 동정하는 한편, 본인이 생각하기 편한 대로 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아픈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던 안쉘은 그제야 천천히 엔저를 올려다봤다.
엔저는 헤리엇을 사랑하고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헤리엇과 떨어져 있는 동안 그에 관한 자료를 광신도처럼 수집했고 미친놈처럼 모았을 것이다.
그 예로 안쉘은 헤리엇을 직접 만나게 될 때까지 얼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엔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코코아를 좋아하고 물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남자인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엔저는 그만큼이나 헤리엇을 마음에 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안쉘보다도 더 힘들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 엔저는 너무 냉정했다.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영상을 보고 있긴 했지만, 그 눈 속에서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기질적인 붉은 눈동자로 영상을 진득하게 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안쉘은 그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엔저는 그 끔찍한 실험 영상을 단 1초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하지 않고 훑고 있었다. 그건, 정말, 헤리엇을 사랑한다면 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저런 실험을 당했다는 걸 알았다면, 저렇게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토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비명을 지르고, 뇌가 녹아내릴 정도로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게 ‘정상’이었다.
“대… 대령님.”
위액과 타액으로 범벅된 입가를 소매로 닦으며 안쉘이 겨우 입을 열었다. 엔저는 영상까지 USB에 옮겨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컴퓨터 본체를 우그러트렸다.
엔저의 능력에 종이짝처럼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일을 진행하는 그가 지독히도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지금까지의 엔저는 유능한 군인이었고, 명령에 군더더기 없이 따르며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쉘은 5년 동안 모신 상관이 갑자기 너무 낯설었다.
“대령님은… 뭘 꾸미고 계신 겁니까?”
안쉘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엔저 맥과이어는 7년 동안 군의 개였다. 단테의 장기 말이었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인어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엔저에겐 죽인 인어들에 대한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안쉘은 가끔 그의 옆에서 그가 능력을 사용하는 걸 보는 날이면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는 무자비하고 목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령님께서 원하시는 게 대체 뭡니까?? 뭘 꾸미고 계신 겁니까!!”
안쉘은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소리 질렀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을 몰아내고 안쉘을 그 위에 올리겠다는 언뜻 보면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엔저가 헛소리를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안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본인이 한심하면서도, 그나마 인간다운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안도하고 만다. 안쉘은 바르르 떨리는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원하는 건 20년 전부터 단 하나였어.”
약간의 공백을 두고 입을 연 엔저는 언제나 그렇듯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황홀한 표정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의 눈앞에는 일곱 살의 엔저 맥과이어가 거대한 수조 앞에 서 있었다. 어린 엔저는 새하얀 인어를 홀린 듯 빤히 쳐다보았다.
엔저는 일곱 살 이후, 그곳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 * *
헤리엇은 익숙한 실험실 내부로 들어갔다.
어찌 된 게 이곳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헤리엇은 느긋하게 방독면을 바닥에 던지고, 아직 피가 고여 있는 것 같은 수술대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가 실험에 성공하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연구원들의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매우 당황했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저들이 실험해 놓고서 성공할 리 없는 작품을 보는 것 같은 공포감이 눈동자 가득 어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따금 고향에 오면 많은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그건 다시 돌아왔다는 황홀감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시골에서 자란 이들이 귀향을 꿈꾸는 것 또한 그 이유라고 했다.
“제법 그리웠었네.”
헤리엇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제법 황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헤리엇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동공마저 하얀 그의 눈동자가 비슷하게 색이 없는 속눈썹에 가려졌다. 엔저가 봤다면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했을 모습이었다.
그는 이곳에 올 때마다 수술대 위에 올라야 했다. 지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한때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도 피비린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좋은 추억은 아니지만 재미없는 인생에서 그나마 기억하는 강렬한 추억이었다. 그리고 헤리엇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어로 변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은 사라졌지만,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물을 다루는 능력을 손에 넣었다.
그 능력 덕분에 헤리엇은 동쪽 바다에 참전했고 당시의 기억이 사라졌다. 동쪽 바다에서 눈을 떴을 때 헤리엇은 움직일 수 없었다.
저 멀리서 군 의료용 보트가 천천히 다가왔고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헤리엇은 한쪽 눈을 감고 피를 질질 흘리면서 그들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전투의 충격으로 헤리엇은 인어 꼬리 한쪽이 완전히 망가져 어그러졌고, 인간으로 변해도 그 여파를 피해 가지 못했다.
안 그래도 조절하기 힘든 능력인데 꼬리지느러미까지 다치니 그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군은, 헤리엇을 최전방 바다에 배치했다. 그리고 얼마 후, 헤리엇은 갑자기 좌천되었고 엔저 맥과이어가 갑자기 부상하며 영웅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회상에서 돌아온 헤리엇은 귓가에 울리는 발소리에 작게 미소 지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이들은 실험실 문을 망설임 없이 열었다.
취이익-.
소독기는 아직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한참 동안 그들을 향해 소독약이 분사되었다. 헤리엇은 눈을 떠 침입자를 반겼다.
“일은 잘 끝났니?”
“네, 선배.”
엔저 맥과이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곳에서마저도 엔저는 어쩜 저리 반짝반짝 빛이 나는지 모르겠다. 실험체가 되었던 사실이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다고 생각했건만 전부 취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엔저는 방독면을 한 손에 들고,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긴 다리가 두툼한 군복에 감싸여 있었고, 검은 머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헤리엇은 가슴속부터 간질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헤리엇이 멍하니 엔저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안쉘이 갑자기 웩! 하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엔저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으며 헤리엇이 안타까운 듯 신음했다.
엔저는 보는 이를 현혹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에 붉은색을 물들일 듯이 마주 보며 손을 들었다. 엔저의 큰 손이 볼에 닿았다.
“마음 정리는 다 끝나셨습니까?”
엔저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헤리엇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옆에서 안쉘이 다 죽어 가는 신음을 흘렸다.
“정리까지는 필요 없었고, 한번 와 보고 싶었어.”
“어째서요? 좋은 추억은 아니잖습니까.”
“나한텐 그렇게 나쁜 추억은 아니었거든. 어쨌든 실험은 성공했고 지금은 아프지 않으니까. 바다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쁜 결과도 아니었고.”
헤리엇은 지상과 바다를 오가며 살 수 있었다. 그게 그렇게 나쁜 결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직하게 웃던 헤리엇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검지를 들어 엔저의 뺨과 턱 선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광대뼈를 톡톡 두들겼다.
“이곳만큼 내게 강렬했던 곳은 없었어. 그래서 한번 와 보고 싶었던 거야.”
“…….”
눈을 살짝 내리깐 헤리엇의 시선에 엔저의 묵직한 하반신이 볼록 솟은 것이 보였다. 어린 후배는 성욕이 과다했다. 이 긴박한 순간에도 그의 귀여운 성욕은 멈추지 못하나 보다. 마치 발정기를 앞에 둔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귀여운 나의 고양이.
헤리엇은 손가락을 살살 내려 턱을 쓰다듬었다가, 가슴 아래로 손을 내렸다.
“이건 왜 세우고 있니?”
“미… 미친, 세웠어요?”
엔저에게 물었지만 안쉘이 질색하는 대답만 돌아왔다. 안쉘은 몇 걸음 떨어졌다가, 속이 다시 뒤집히는지 웩! 웩! 구역질을 하며 부르르 떨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제는 위장에서 무언가가 나오진 않았다.
“좋은 추억은 아니잖아요.”
“이곳이?”
“네.”
오늘따라 엔저가 유난히 끈질긴 것 같다고 생각하며 헤리엇은 희미하게 웃었다. 작게 호선을 그린 입술과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던 엔저의 귓가가 움찔하고 떨렸다.
“좋은 추억은 아니지.”
기다렸다는 듯 엔저가 손을 뻗어 헤리엇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수술대 위에 헤리엇을 올리고 그의 다리 사이로 기어갔다.
그 모습을 본 안쉘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구토를 시작했다. 수술대 위에 오르는 헤리엇을 보니 아까 본 영상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액을 토하며 켁켁 기침을 내뱉었다.
헤리엇의 안타까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저런, 안쉘이 속이 많이 안 좋은가 본데?”
“나약해서 그럽니다.”
‘저 씨발 새끼들.’
댁들 때문에 그렇다고 반박할 힘도 없어 안쉘이 신음을 삼키고 눈물을 똑똑 흘렸다. 그러는 사이 엔저 맥과이어는 헤리엇의 하얀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 덮어 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의 ‘그’ 기억이 아니라, 제 아래에서 굴복하는 기억을 덧씌우겠습니다.”
“오, 엔저… 상냥하기도 하지.”
굴복시키겠다는 소리의 어디가 어떻게 상냥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안쉘은 지적할 정신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결계를 깔고 자신이 토한 흔적을 청소했다. 손끝에 힘이 도통 들어가지 않고 바르르 떨렸다.
그러는 사이 저 두 놈은 이 긴박한 상황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영상을 볼 때마다 늘 생각했어요. 그 개 같은 자식들의 손길이 아니라 제 밑에서 선배가 헐떡이면 좋다고 몇 번이나…….”
“저기요… 곧 군이…….”
안쉘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둘 때문에 혼자서라도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위험했다. 결국 피눈물을 삼키며 입구 쪽에 결계를 몇 겹으로 쌓아 소리를 차단했다.
헤리엇은 제 위를 점령한 엔저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시선 너머로 수술대 조명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헤리엇은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들은 어린 헤리엇을 붙잡고, 수술대 위에 올렸다. 저 눈부신 빛을 볼 때면 헤리엇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고통을 느꼈다.
헤리엇의 시선이 잠시 몽롱해지자 엔저는 고개를 들어 하얀 눈동자가 바라보는 시야에 자신이 다 들어오게 했다.
“…선배.”
“…….”
“이 영상을 보고, 제 무능함에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파리떼가 감히 선배를 집어삼키는데 머저리 같이 보기만 해야 했으니까요.”
“…음.”
대답은 했지만 엔저에게 집중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엔저는 아직도 넋 놓고 있는 헤리엇의 하얀 뺨을 쓰다듬었다. 피가 붉게 번지는 환영이 헤리엇의 하얀 몸을 더럽히고 있었다.
엔저는 헤리엇에 관한 건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헤리엇의 모든 건 엔저의 것이었다. 그가 쓰고 버린 머그잔, 양말, 젓가락, 옷, 그의 손을 거친 것 전부 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거의 잔재에 만족할 시기는 지났고 온전히 그를 가질 기회가 생겼다.
“헤리엇.”
“…….”
헤리엇의 시선이 단숨에 엔저를 향했다. 자신의 이름이지만 엔저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단어는 너무 낯설었다.
“날 봐. 이제야 겨우 이곳까지 왔어.”
엔저 맥과이어는 하얀 머리카락을 강하게 쥐고 헤리엇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피에서 느껴지는 고통에도 헤리엇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엔저의 강압적인 말을 얌전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그 마지막에 당신의 옆을 차지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야. 누구도 그 권리를 뺏을 수 없어. 헤리엇.”
“아.”
헤리엇은 아랫배가 찌르르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눈앞의 사내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지독할 만큼 어울리지 않는 반말을 하고, 자신을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는 엔저를 받아들였다.
헤리엇은 제 엉덩이 사이를 군용 나이프로 자르는 엔저를 돕기 위해 허리를 들었다. 도톰한 엉덩이 살이 자른 모양에 따라 삐죽 튀어나왔다. 엔저는 꼬리뼈부터 고환 밑까지 옷의 실밥을 자르며, 드러난 헤리엇의 엉덩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 음.”
간지러운 감촉과 함께, 다시 찌르르한 쾌감이 올라왔다. 전에 그의 거대한 성기를 받았던 항문이 그때의 감촉을 기억하며 뻐끔거렸다.
엔저는 입술을 모아 침을 뱉어 냈다. 그리고 엉덩이 골 사이로 진득한 침이 주르륵 떨어졌다. 맑은 액의 미끈거림을 빌려 헤리엇의 구멍으로 손가락 두 개를 한 번에 처넣었다.
“윽…….”
뚫린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나, 빡빡하게 마른 곳을 침입하는 손가락에 헤리엇이 고개를 젖혔다. 그는 고통을 잘 참는 대신, 그 속에 숨은 쾌감에는 일반인보다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금도 빠듯하게 들어간 손가락이 내벽을 긁고 간지럽히며, 들쑤시자 바지에서 나오지 못한 성기가 아플 정도로 발기해 버렸다.
엔저는 손목을 좌우로 돌리며 내벽을 들쑤셨다. 집요하게 밀고 들어오는 억척스러운 손길을 못 이기고 안쪽에서 장액을 조금씩 배출했다. 침으로 살짝 젖었던 내부에 조금씩 습하고 끈적거리는 액이 엉켜 들었다.
“선배, 한번 헉… 했다고. 이렇게…….”
손목을 타고 투명하면서 음란한 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칠게 내벽을 들쑤시자 헤리엇이 작게 신음을 터뜨렸다. 그 속에 고통은 없었다.
엔저는 손가락 두 개로 안을 들쑤시다가, 다급하게 빼냈다. 뽁-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붉게 물든 항문에서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엔저는 그 음란한 색에 못 이기고 헤리엇의 허리를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터질 듯이 부푼 자신의 성기를 바지 지퍼를 내려 꺼냈다.
“아… 아아아!!”
헤리엇의 비명이 터졌다. 옆에서 겨우 구역질을 가라앉히던 안쉘의 어깨가 펄쩍 뛰었다. 그는 저 두 미친놈이 정말 아주 미쳤구나, 괜히 걱정했구나, 하며 피눈물을 쏟았다.
“아아아……!!”
“헉…….”
엔저는 자신의 성기를 끊을 듯 조여 오는 헤리엇의 내부를 더욱 짓이겼다. 붉게 달아오른 항문이 바르르 떨리며 침입을 막으려 했지만 가소롭기 그지없는 거부에 엔저는 허리를 움직여 더 깊게 삽입했다.
“끄응…….”
아픈 사람처럼 헤리엇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렀다. 붉은색 입술 사이로 혀가 축 늘어졌다. 침을 뚝뚝 흘리는 헤리엇의 표정을 엔저는 일분일초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배… 배가…….”
배꼽 부근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헤리엇이 웅얼거렸다. 고통에 달아오른 얼굴이 너무나도 음란했다.
“배가, 왜요? 선배… 왜요.”
엔저가 강하게 허리 짓을 시작하며 대답을 종용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엔저의 움직임이 저번보다 거칠었다. 헤리엇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배꼽 근처를 손톱으로 짓이겼다.
“으윽. 윽… 아.”
이럴 수가. 위장에까지 침범할 것 같은 괴이한 감각인데도, 등허리가 짜르르하며 몸을 애달프게 했다. 배가 뜨겁고 간지러웠다. 내장을 후려치는 성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헤리엇의 다 죽어 가는 신음에 안쉘은 저 미친 상관을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밖을 경계하느라 귀도 못 막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답이 왜 없어!”
“아, 아…….”
엔저의 반말을 들은 헤리엇의 내벽이 움찔거리며 강하게 죄였다. 엔저는 드디어 헤리엇의 머릿속에 자신을 박아 넣었다며 환희에 차올랐다.
이, 개, 같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기억 안에 자신을 새겼다. 겨우, 겨우, 겨우, 겨우, 겨우, 겨우! 당신을, 이 손으로 끌어내렸다. 그의 고고하고 아름다운 선배를.
“헉… 선배…….”
바르르 떨며 헤리엇의 내부에 사정한 엔저가 숨을 몰아쉬었다. 헤리엇은 제 가슴 위로 쏟아지는 엔저의 숨결을 느끼며 땀에 젖은 엔저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끝났으면 얼른 가죠.”
콧물까지 흘리며 울던 안쉘이 수술대 위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엔저의 성기가 퉁- 하고 내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헤리엇의 하얀 엉덩이 사이로 불투명한 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엔저는 방탄복을 벗고 안에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헤리엇의 하체를 가리며 그를 안아 들었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안쉘은 이미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연구소 밖에는 수백 명의 능력자와 그보다 더 많은 군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상황 파악도 못했다면 군부의 존재 자체를 의심받아야 했다.
연구소 내부는 연구원들의 시체들로 가득했고 누가 봐도 범인은 안쉘을 포함한 엔저와 헤리엇이었다. 단숨에 연구소는 포위됐을 것이고,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연구소 학살사건의 범인이 국민 영웅 엔저 맥과이어와 대통령 대선 후보 안쉘 리라니, 이보다 좋은 특종감은 없었다.
“이게 대체…….”
안쉘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고요한 어둠 속은 사람의 숨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구소 밖은 썰렁했고, 그들이 기절시킨 군인들의 작은 앓는 소리만 흐를 뿐이었다.
안쉘은 다급하게 방독면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어디에도 부대가 파견된 광경은 없었다.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안쉘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엔저의 뒤를 따랐다.
엔저의 품에 안긴 헤리엇이 잠시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세로로 찢어진 바지 사이에서 질척한 액이 뚝 하고 떨어졌다. 엔저가 싸지른 정액이었다. 안쉘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정액을 손수건으로 슥슥 닦았다.
이 손수건은 불태워서 없애 버려야지.
여기서 엔저 맥과이어의 정액이 발견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음…….”
헤리엇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왼쪽 무릎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런 다리로도 체력전에서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는데 이상했다. 사실 떨리는 건 비단 왼쪽 무릎뿐만이 아니었다. 어깨도 떨리고, 엔저가 한껏 들쑤셔진 아래쪽은 더 심했다.
멍한 얼굴로 엔저의 어깨에 턱을 올린 헤리엇은 막 방독면을 벗고 있는 안쉘과 눈이 마주쳤다. 안쉘은 참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촌스러운 2대8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그의 턱을 타고 땀이 똑똑 흘러내렸다. 날이 더운 건지 아니면 긴장하면 저렇게 땀이 많이 나는 건지 모르지만, 헤리엇은 안쉘이 참 재미있었다. 게다가 오늘 그는 안경을 빼고 렌즈를 끼고 있었다.
“안쉘은 안경 쓸 때랑 인상이 다르네.”
엔저를 뒤따르며 헉헉거리던 안쉘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엔저가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다는 표정이 저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같은 표정을 하면서 나름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물론 전혀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헤리엇의 몸을 고쳐 안으며 엔저는 주변을 돌아봤다. 날은 완전히 저물어 사방이 깜깜했다. 연구소에서 나오는 미미한 불빛만이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재빠르게 미리 대기해 둔 차량으로 몸을 옮겼다. 다행히 차가 발각되진 않았다. 헤리엇을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내려놓은 엔저는 막 운전석에 탄 안쉘에게 말했다.
“고속도로는 타지 마. 산길로 내려간다.”
“네.”
안쉘은 운전대를 잡으며 대답했다. 엔저가 뒷좌석에 타는 걸 확인한 안쉘은 다급하게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돌렸다.
“대령님, 왜 군이 파견을 멈춘 거죠?”
분명 군에 출동 명령이 떨어졌을 터였다. 하지만 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세 사람은 무사히 연구소를 탈출 할 수 있었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둥근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잔 근육이 만져지는 감촉이 좋았다. 팔뚝으로 내려가는 수려한 손가락이 헤리엇의 허리와 골반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적어도 적은 아니란 소리지.”
엔저는 중얼거렸다.
차는 안쉘의 거친 손길과는 다르게 매우 부드럽게 움직였다. 헤리엇은 새삼 안쉘의 운전 실력에 감탄을 내뱉으며 칭찬했다. 이것만큼은 자신이 더 잘한다고 징징거리지 못한 엔저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위원장님, 설치 끝냈습니다.”
후우- 하고 연구소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탱크에서 붉은빛이 번쩍번쩍했다. 동그랗고 작은 빨간 불은 한참 동안 그 주변을 배회하더니 이내 훅 꺼졌다. 망원경으로 상황을 보고 있던 이가 작게 속삭였다.
“떠났습니다.”
치이익- 무언가 불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탱크 근처에 조용히 담배를 태우고 있던 사내였다. 그의 손가락 끝에 새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는 라이터 없이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어둠 속에 가려진 사내의 모습이 작은 불빛에 드러났다. 그는 TV 속에서 서글서글한 미소와 친근한 대화법으로 유명한 평화위원장 제이든 올던이었다.
구릿빛 피부에 짧은 갈색 머리를 쓸어 넘긴 중년 사내가 씩 미소를 지었다.
“폭파해.”
“네.”
그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버튼을 눌렀다.
콰앙-!! 쾅!!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연구소 내부가 불타올랐다. 이후로도 폭발이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들이 폭발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그들을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볼이 패도록 담배를 빨아들인 중년 사내는 톡- 하고 담배를 불타오르는 연구소로 가볍게 던져 버렸다.
매끈한 입술 사이로 담배 연기가 길게 흘러나왔다. 한참 동안 연구소가 폭파되는 걸 구경한 제이든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50대 중반이 넘은 사내의 것이라기엔 흉흉하고 번뜩이는 노란색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연구소를 배경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제이든이 탱크에 올라타자 잔뜩 군기가 잡힌 이들이 불타오르는 연구소를 뒤로하고 재빠르게 산길을 벗어났다.
위이잉-!
벌써 소방차 수십 대가 도로 위를 어지럽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는 다시 새 담배를 꺼냈고 허공에 도깨비불처럼 불꽃이 일렁거렸다.
“…위원장님, 탱크 내부는 금연입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어?”
제이든이 물었다. 사내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딱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위험합니다…….”
사내는 끈질기게 웅얼거렸지만 제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막심 대통령으로부터 전화입니다.”
위이잉- 윙-
수십 대의 구급차가 탱크를 지나쳤다. 제이든은 담배를 입에서 빼고 전화를 받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며 작게 미소 지었다.
“네, 아아… 물론 그건 빼놨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아버지.”
단테 막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울렸다. 알시타 막심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제이든에게 단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제이든은 알시타의 충성스러운 개였고, 평위원 대부분이 그를 따랐다. 제이든은 알시타가 살아 있었을 때 단테 막심을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따르고 그를 지지했었다.
그랬었지.
부르르 떨리는 제이든의 주먹에 힘줄이 선명하게 곤두섰다. 제이든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몸은 바르르 떨렸다. 그의 꽉 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럼요. 같이 알시타의 무덤에 폭죽을 터뜨리자고요.”
알시타의 무덤은 바다였다. 그 바다 위의 엘리키스호에서 알시타 막심은 무자비하게 죽었다. 제이든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계속 유지하며 통화했다. 연구소를 폭파한 무자비한 살인마는 이 순간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통화를 종료하고 위쪽의 탱크 출입구를 열었다. 그리고 고속도로 밖으로 탁- 담배꽁초를 던지며 동시에 휴대전화도 밖으로 던져 버렸다.
“불법 투기입니다. 그건 법에 위반됩니다.”
“이 새끼 누가 데려왔어?”
제이든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렸다. 작은 USB를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중년 사내의 얼굴은 지독할 만큼 피곤해 보였다.
“너를 잃고 내가 왜 살아 있는 걸까, 알시타.”
제이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까까지 그의 옆에서 밉살스럽게 조잘거리던 이들 모두가 침묵했다.
제이든이 품 안에서 조용히 녹음기를 꺼냈다. 네모난, 아주 낡은 녹음기였다. 이어폰을 연결한 제이든은 달칵- 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안녕 친구…….
그래, 제이든 올던이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살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그걸 그놈에게 줘도.”
사내들의 목소리도 어느새 진중해져 있었다.
“적어도 적이 아닌 걸 확인했으니 수확은 있었어.”
제이든은 손아귀에 들린 USB에 시선을 주었다가 뒤를 돌아봤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안쉘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냉장고에 있는 물통을 단숨에 비우는 일이었다. 턱을 타고 땀이 어찌나 흐르던지, 안쉘의 얼굴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500mL짜리를 한 번에 비우고도 하나를 더 따 마신 안쉘은 텀블러를 가지고 헤리엇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헤리엇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아까까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이 늘어지더니 이제 겨우 상태가 돌아오나 보다.
“…연구소가 폭파됐군요. 우리가 떠난 직후에 일어난 걸 보니, 상대도 우리의 동태를 확인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전신을 꽁꽁 싸맨 방탄복과 군복을 벗은 안쉘의 상체에 검은 티셔츠가 젖어 찰싹 달라붙었다. 나름 군인이라고 운동을 쉬지 않고 했기 때문에 보기 좋은 복근과 팔 근육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안쉘은 당장 티셔츠도 벗고 싶었지만 참았다. 에어컨을 켠 안쉘은 들고 있던 가방을 펼치고 노트북에 전원을 켜 USB를 삽입했다.
“…건진 건 별로 없지만, 적어도 단테 막심에게 타격을 줄 만한 것들입니다.”
USB에는 헤리엇이 당한 생체실험이 쭉 나열되었다. 인체 해부, 봉합, 새 인체, 장기이식 등등의 제목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바로 이걸 폭로할 순 없었다. 그건 엔저 맥과이어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저었다.
안쉘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들어 헤리엇을 쳐다보았다.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안쉘과 눈이 마주친 헤리엇은 항상 그렇듯이 작게 미소 지어 주었다.
헤리엇은 포근하고, 꽤 무관심한 사람이라 곁에 있기가 편했다. 무심하고 마이페이스지만 적어도 사람의 상처를 헤집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다, 헤리엇 알스터는.
저 사람이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래… 없었다.
“…죄송합니다. 브리핑은 내일 해도 되겠습니까?”
헤리엇이 검지를 들어 안쉘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엔저와 대화를 나눌 때나 그를 달랠 때 자주 하는 헤리엇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손끝이 차가웠다. 보기 좋은 손가락이 하얗게 반짝거렸다. 안쉘의 땀이 묻은 헤리엇의 손가락 끝과 손톱마저도 하얬다.
“얼른 가서 쉬는 게 좋겠다. 엔저, 우리도 돌아가자.”
“네, 선배.”
왜 당신이 그런 꼴을 당한 걸까.
안쉘이 입술을 깨물고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책상 위에 둔 지팡이를 챙긴 헤리엇이 엔저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이 적막해진 사무실 내부에 울렸다.
안쉘은 창문을 통해 멍하니 절뚝이며 걸어가는 헤리엇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어두운 밤에 더욱 눈에 띄었다.
원래 헤리엇 알스터의 흔적을 얼굴 아래로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저 헤리엇 알스터 또한 열 살 이전의 헤리엇이라고 보기 힘들겠지. 그는 인어와 혼합한 괴물이었다.
“윽…….”
안쉘은 괴로웠다. 헤리엇과 특별한 관계가 아닌데도, 그를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정이 요동쳤다.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어머니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만큼 발밑이 무너지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목이 메고 심장이 막막했다.
안쉘은 너무 답답해 땀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문을 열고 저도 모르게 미친 듯이 산 위를 올랐다.
“헉헉-.”
온종일 움직인 몸이 피로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몰린 안쉘은 자신의 몸 상태를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산길에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긁힌 뺨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평소라면 피할 수 있었음에도, 안쉘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겨우 목적지에 다다라 걸음을 멈췄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처럼 미소 짓고 있는 그를 응시했다. 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내는 마치 안쉘이 온 것을 알아챘는지 고개만 살짝 돌렸다.
그의 손에는 청개구리와 작은 새가 앉아 있었다. 개구리와 새라니, 엉뚱한 조합이 너무나도 그와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툴툴이 씨.”
안쉘에게 인사한 앤은 개구리를 손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브룩.”
개구리가 가지기엔 너무 멋진 이름이었다. 다음엔 새를 날려 보냈다.
“부탁드려요, 피오나.”
그 역시 작은 새가 가지기엔 너무 예쁜 이름이었다.
“밤에는… 보통 새가 날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툴툴이 씨는 아는 게 많군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안쉘은 뺨에서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앤이 어느새 다가와 혀를 내밀었다. 안쉘은 자신의 뺨을 혀로 할짝대면서 상처를 문지르던 앤의 손을 잡고 느릿하게 내렸다.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슬퍼서 울고 있는 것 같아요.”
앤의 말에 안쉘은 잠시 말을 멈췄다. 뺨에서 흐르는 피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아마 상처도 없어졌겠지.
안쉘은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앤은 왜 계속 여기에 머무는 겁니까? 편지는 전해졌고…….”
사실 이곳에 머물라고 권유한 건 안쉘이었지만 앤이 그 말에 따를 의무는 딱히 없었다. 말을 돌리는 안쉘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앤은 방긋 미소 지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다시 호수를 내려다봤다.
처음 봤을 때 생명체가 살아 숨 쉬지 못했던 호수는 어느새 작은 세계가 되었다. 작은 물고기들과 이제는 큰 물고기들까지 떼를 지어 하나의 마을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의 능력은 경이롭고 신비로웠다.
“약속했거든요. 아주 중요한 약속이요.”
앤은 마치 아주 중요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말소리를 낮췄다.
“약속이요?”
“네. 하지만 곧 지켜질 것 같아요.”
티셔츠만 입고 있었지만 안쉘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여름의 밤은 무더운 편이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똑 흘러내렸다.
안쉘은 마치 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느꼈다. 복잡한 시선으로 앤을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호숫가로 시선을 내렸다.
아름답고 맑은 호숫가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앤은 그 모습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 이 사내가 불현듯 보고 싶었을까.
안쉘은 소리 없는 의문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밤중에 그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안 한 건가. 안쉘은 멋쩍게 목덜미를 쓸었다.
앤의 푸른 머리카락은 염색으로도 내기 힘들 정도로 밝고 아름다웠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는 헤리엇의 인공적인 푸른 눈동자와 달랐다. 헤리엇이 마치 새하얀 도자기 위로 물감이 퍼지는 느낌이라면, 앤은 사파이어를 박아 넣은 것처럼 진한 색의 푸른 눈동자였다.
“미안했습니다, 앤. 이런 밤중에…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안쉘.”
앤이 손을 흔들었다. 소란하던 가슴이 여기에 와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안쉘은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산길을 내려가려고 했다.
“아.”
앤이 산에서 내려가려는 안쉘을 붙잡았다.
“안쉘.”
“??”
“당신은 아직 가꿔지지 않은 원석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안쉘이 몸을 돌려 물어보았다. 앤은 호수 아래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지상에 있느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앤이 인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헤리엇과는 모양이 다른 물갈퀴가 그의 예쁜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다.
“당신은 멋진 사람이라고요.”
하지만 안쉘은 그날 밤 악몽을 꿨다.
멋지지 않아요. 나는, 부모의 원수를 두고 무서워서 발발 떠는 개새끼고, 그리고…….
* * *
헤리엇은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헤리엇은 찬물을 받은 욕조 안에서 인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엔저는 욕조에 기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손을 욕조 위에 올린 엔저는 고개 숙여 눈을 감고 헤리엇의 손길을 즐겼다.
“…이런, 많이 충격적이었나 보네…….”
헤리엇은 매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헤리엇은 그 감촉이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나 엔저를 쓰다듬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엔저는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 같아서 이만큼 가까이 와 주지 않았다. 어쩌다 그가 방심했을 때 만졌던 게 다였기 때문에 헤리엇은 옛날부터 느끼고 싶었던 감촉을 양껏 음미하고 있었다.
안쉘은 아마 헤리엇에게 행해졌던 실험을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낯빛이 좋지 않았구나.’
헤리엇은 안쉘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는 착하고, 공감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냉정할 땐 냉정하지만 자기 사람에겐 한없이 물렀다. 안젤라는 이미 안쉘을 친오빠처럼 따르는 중이었다.
안쉘이 헤리엇을 은연중에 사람 대 사람으로 좋아하듯 헤리엇도 그가 싫지 않았다. 그는 꼼꼼하고 깐깐했지만 묘하게 느슨한 매력도 같이 가진 사람이었다. 허점이 많아 보여도 막상 일 처리는 능숙했다.
헤리엇이 싫어하는 점은 오로지 그의 촌스러운 2대8 머리와 안경밖에 없었다. 눈을 괴롭히는 건 사실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모습이 그렇게 못 볼 꼴이었니?”
“아니요, 그것 또한 아름다웠어요, 선배.”
“음.”
헤리엇이 의심하듯 작게 신음을 흘리자, 엔저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저의 20대 첫 자위는 선배의 그 영상이었으니까요.”
“오…….”
헤리엇은 눈을 크게 뜨고, 엔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모든 걸 사랑한다고 속살거렸다. 저를 예쁘게 봐 달라고 조르는 귀여운 후배의 귀와 턱을 쓰다듬던 헤리엇이 작게 미소 지었다. 턱을 지나 목덜미로 손을 옮긴 다음 힘을 주어 얼굴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쫍-.
귀여운 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엔저의 조잘거리는 입술을 빨아들인 헤리엇이 그의 뺨을 검지로 톡톡 쳤다.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본 적은 없거든…….”
“지금 틀어드릴까요?”
“있어?”
“네.”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황홀하게 반짝거렸다. 예쁜 루비를 닮은 후배의 눈동자를 보던 헤리엇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욕조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피곤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물속이 더 좋았지만, 드물게도 호기심이 피로를 이긴 순간이었다.
“치즈와 와인을 준비하겠습니다.”
엔저가 능숙하게 움직였다. 헤리엇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젠가 구석에 박혀 있던 비디오 플레이어를 찾았다.
엔저가 와인 잔과 적포도주를 테이블에 놓고 분주하게 마당에 있는 군사용 텐트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스박스에서 먹음직스러운 치즈와 비스킷을 꺼냈다. 아주 본격적이었다.
안쉘이 악몽을 꾸며 끙끙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헤리엇과 엔저는 소파에 길게 늘어져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각자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