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불안한 연설
안젤라는 위로 올려 묶은 머리를 만지며 차에서 내렸다. 뾰족하게 나와 있는 리본이 매우 귀여웠다. 민트색 땡땡이가 그려진 반소매 티셔츠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덧니가 도드라지게 보일 정도로 웃은 그녀는 뒤따라 내리는 리언에게 말했다.
“얼른 사무실에 갖다 놓고 집에 가자.”
사무실 내부에 설치할 잡다한 물품들을 들고 리언이 차 문을 닫았다. 그는 흰 티에 감색 면바지를 입고 손목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손목시계와 붉은색 끈 팔찌를 차고 있었다. 안젤라는 잠시 그 모습을 핥는 것처럼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데이트 같잖아.’
그리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을 한쪽 손으로 문지르며 안젤라가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기지에 도착했다. 안젤라의 모습을 살펴보던 리언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가 다시 헛기침했다.
“뭐 잊은 건 없지?”
“응, 필요한 건 다 샀어.”
“대장 머그잔은?”
“잘 챙겼지.”
리언이 가볍게 대답하면서 사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젤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를 알고 지낸 지 5년, 안젤라가 선임이지만 계급도 같고 마음까지 잘 맞아서 둘이서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묘한 분위기가 생기기 딱 좋은 위치의 젊은 남녀들이었다.
주근깨가 귀엽게 자리 잡은 리언의 얼굴은 어디 한 군데 모난 곳이 없었다. 앞서가는 리언의 등을 응시하던 안젤라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아, 생닭은 몇 개 샀어?”
리언이 중얼거리면서, 뒤를 돌더니 안젤라에게 가까이 다가와 몸을 숙였다.
어머? 이 녀석 봐라. 지금 끼 부리는 건가?
“다섯 개.”
“충분하겠네.”
호랑이를 위해 생닭을 5마리나 샀다. 원래 크기였다면 하루에 다 먹을 만큼의 양이었다. 애니멀 에스퍼인 호랑이가 전에 한 번 원래 크기로 돌아갔을 때 크게 혼나 지금은 작은 모습을 유지 중이었다.
호랑이의 짜증이 극에 달해 원래 크기로 돌아갔던 날 귀엽다고 만져 대는 안젤라의 팔을 물어 버린 적이 있었다.
리언이었다면 손목이 뜯기고도 남을 공격이었지만 안젤라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물린 팔뚝과 호랑이를 번갈아 보더니 활짝 웃었다. 그리고 호랑이의 송곳니에 손을 가져갔다.
빠각.
호랑이의 이빨이 허무하게 부러졌다. 안젤라는 손으로 호랑이 송곳니 하나를 아작 내고 그것을 입에 물고 씹었다. 아그작 하고 안젤라의 입 안에서 산산조각이 난 호랑이 이빨 조각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리언과 호랑이의 표정이 매우 창백하게 변했고 호랑이는 작게 줄어들더니 안젤라의 발치에서 바르르 떨었다.
‘야… 야옹.’
호랑이가 되지도 않는 고양이 흉내를 냈다. 애니멀 에스퍼는 능력을 가진 만큼 두뇌가 발달했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 듯했다. 퉤 하고 이빨 조각을 뱉어 낸 안젤라가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물면 안 되지, 야옹아~ 내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누가 사무실에 있나 본데?”
안젤라는 사무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크게 떴다.
“대장인가?”
“출근하셨나…….”
리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헤리엇이 성실하게 휴일을 반납하면서까지 출근할 것 같진 않지만… 둘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살금살금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문틈으로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한두 명은 아닌 듯싶었다. 그 속에는 헤리엇의 작은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젤라는 안심하며 사무실 문을 두어 번 두드린 다음 벌컥 열었다. 역시 사무실 안에는 헤리엇이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안젤라를 발견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손까지 흔들어 주기에 안젤라가 방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헤리엇이 앉은 소파 옆에 안쉘과 엔저가 서 있었고, 그 사이에서 우울하고 어두운 기운이 흐르는 중이었다. 그 기운은 물론 헤리엇이나 엔저의 것이 아니었다. 범인은 바로 안쉘이었다.
안쉘은 우울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타미를 두들겨 팬 사람은 엔저 맥과이어 대령이고, 안토니오 중령을 제압한 것은 헤리엇이었다. 근데 왜 선전포고는 자신이 받았으며, 왜 대통령과 안토니오의 충고를 자신만 받아야 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안젤라가 무척 귀여워 안쉘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칭찬했다.
“굉장히 귀엽군요, 안젤라.”
“아, 예… 감사합니다.”
별로 감사한 표정이 아닌 안젤라는 사 온 물품을 내려놓았다. 사무실로 온 이유도 아마 저 물품들을 미리 갖다 놓으려는 목적 같았다.
안젤라는 헤리엇에게 중위님이 왜 저러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저 나직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귀엽네, 안젤라.”
…역시 같은 안 씨끼리만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안젤라는 안쉘이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자 그의 어깨를 짤짤 흔들면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안쉘은 오늘 안젤라의 그런 기분을 눈치채 주지 않았다.
안토니오의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과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밀었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안쉘은 후회하고 싶지 않았고, 아직은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미는 무모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의도와는 다르게 묘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왜 모든 사건을 안쉘 리가 꾸민 것처럼 다들 알고 있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우울해하는 안쉘을 딱하게 여긴 헤리엇이 움직였다. 엔저의 시선은 당연히 선배를 따라갔다. 대통령이 보내는 수작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울한 안쉘에게 헤리엇이 귓속말했다.
“안쉘, 잠시만 들어줄래?”
“…뭘 말씀이십니까?”
“엔저가.”
혹시 엔저 대령님에게 묘책이 있었던 걸까? 그렇지. 지가 벌인 일인데, 있어야지.
안쉘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며 자위했대.”
“…….”
“…….”
“…네?”
헤리엇의 하얀 뺨에 홍조가 살짝 올라왔다. 안쉘은 이제 익숙하게 타이밍을 놓쳤다. 묘책 따위가 아니라 연애 상담이었다.
“그래서…….”
살짝 한숨을 쉰 헤리엇이 안쉘의 귓가에 계속 속삭였다.
“이번엔 내가 엔저를 훔쳐보면서 자위하게.”
분명히 귀에 대고 속삭이지만, 딱히 숨기려는 목소리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안쉘은 차마 엔저 맥과이어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 * *
단테 막심의 연설은 공격적인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항상 바다를 지배하는 인어가 얼마나 끔찍한지, 그것이 얼마나 굴욕적인지 꼭 짚으며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빼놓지 않고 20년 전 엘리키스호를 들먹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는 사람이었다. 안쉘은 몸을 부르르 떨며 몸서리를 쳤다.
단테 막심은 나이가 들수록 잔인해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인자한 미소 뒤에 숨은 어둡고 끔찍한 행태를 안쉘은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었다.
혈연에 연연하지 않고 죽이는 비정함마저 보였다. 친자식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이용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에 기가 질렸다.
과연 그런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거기다가 지난 20년은 전쟁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어는 물리쳐야 할 적이라는 인상도 강했다. 거기다 안쉘은 너무 젊었고 인지도도 없었다.
단테 막심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 노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대부분 국민의 심장을 울렸다. 여태껏 안쉘 리 역시 대통령의 연설에 박수를 보냈을 만큼.
긴장감에 목을 축이며 안쉘은 손톱을 지그시 깨물었다. 종이에 쓰인 연설 내용이 머리에 박히지 않아 괴로웠다. 목 안쪽이 죄이는 기분에 안쉘이 참지 못하고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내부에 에어컨도 달린 나름 최신식 군사용 기지였지만, 안쉘은 에어컨의 인위적인 찬 공기를 좋아하지 않아 꺼 둔 상태였다. 당연히 내부 온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안쉘은 저도 모르게 산으로 향했다. 어두운 산속은 위험했지만 안쉘은 겁나지 않았다. 그를 위협할 만한 사람은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내려오는 능력자가 아니라면 이런 시골 마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엔저나 헤리엇이 그를 공격할 리도 없으니. 그는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이 푹, 푹, 빠지는 산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고 힘들게 느껴졌다. 안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촤아악-.
물소리가 들렸다. 안쉘의 손전등을 발견한 것인지 가까이 다가간 호수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생명이 깃든 호수는 아름다운 작은 바다였다.
그가 머물기 시작한 이후로 호수에는 생명체가 살아 숨 쉬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안쉘은 호수 안쪽에 터를 잡은 생명을 보며 경외에 찬 신음을 흘렸다.
오로지 저 인어가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고여 있기만 했던 잔잔한 호수가 지금은 많은 생물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툴툴이 씨?”
안쉘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이는 푸른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신이 있다면 인어들을 아름답게 빚었을 터이고, 사내는 그중에서 가장 공들여 만든 존재 같았다.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북쪽 바다 인어 왕자 앤은 수려한 미소를 지으며 안쉘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머리가 흐트러졌네요.”
“왁스를 하지 않아서요.”
고개를 흔들어 앤의 손길을 피하면서 안쉘이 헛기침했다. 앤이 고운 눈을 접어 예쁘게 웃었다. 그는 막 인어에서 인간으로 변했는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의도치 않게 그의 알몸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앤의 다리 사이에 있는 성기가 참으로 거대했다.
‘젠장.’
괜스레 민망해진 안쉘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안쉘의 하체에 묶어 뒀다.
“…앞 좀 가리세요.”
“부끄러운 건가요? 하지만 이건 툴툴이 씨가 입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앤이 고개를 살짝 숙여 안쉘의 눈을 바라보고 매혹적으로 웃었다. 붉은 입술이 요사스럽게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반짝였다.
안쉘은 신음을 삼키며 옷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앤이 뒤돌아 호숫가로 첨벙 뛰어들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수면 밖으로 나온 앤은 완벽한 인어의 모습이었다.
안쉘이 다시 헛기침하며 바짓단을 접어 올리고 앤의 옆에 앉아 호숫가에 발을 담갔다. 그러자 앤이 웃으며 안쉘의 발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만하세요, 성희롱입니다.”
“오… 툴툴이 씨, 이건 성적인 의도가 아니었어요.”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성희롱입니다.”
앤이 씩 웃으며 안쉘 옆으로 팔을 짚고 얼굴을 감추었다. 참방참방 수면을 인어 꼬리가 찰지게 때렸다. 안쉘이 잠시 머뭇거리자 앤이 먼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이 밤중에 왜 이곳까지 왔나요?”
“…잠이 오지 않아서요.”
“어째서죠?”
“…내일 대통령 연설이 있거든요.”
“오.”
그게 뭔지 잘 모르면서 표정이 좋지 않은 안쉘을 위로하고자 앤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리액션 하나는 끝내주네.’
안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얼굴을 보는 앤의 눈가도 부드럽게 풀렸다.
“내일… 제 부모님을 죽였을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대면하게 돼요. 하지만 저는 겁쟁이라… 그자가 무서워 미칠 것 같습니다. 꼼짝도 못 하고 머저리처럼 어버버거릴 게 분명해요. 한심해서 죽고 싶습니다.”
“오, 이런. 죽지 마세요, 안쉘.”
안쉘은 한숨을 쉬다가 멈칫했다. 앤의 얼굴은 태연했지만, 안쉘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마치 무뢰배에게 농락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왜 이름을 부릅니까.”
“당신은 잘할 겁니다.”
“…….”
앤이 호수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튀어나왔다. 물기에 잔뜩 젖은 앤의 아름다운 얼굴이 안쉘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푸른 눈동자가 영롱하고 아름답게 반짝였다. 달빛 아래, 마치 그림처럼 앤의 머리카락이 뻗어 나갔다. 이윽고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는 걸 느끼며 안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 잘될 겁니다.”
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 * *
멍한 안쉘을 보며 헤리엇은 미소 지었다.
안쉘은 멍하게 있다가도 안절부절못하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헤리엇은 천천히 소매 단추를 잠갔다. 구김 하나 없이 다림질된 와이셔츠는 헤리엇의 피부처럼 깨끗한 새하얀 색이었다.
안쉘은 저도 모르게 헤리엇의 곧은 등을 응시했다. 저대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희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헤리엇이 소매 단추를 다 잠그고 검은색 넥타이를 매는데 그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한 폭의 명화같이 보이기도 했다. 헤리엇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검은 정장 바지와 검은색 베스트를 껴입었다. 그 위에 검은 재킷을 꿰입으니 그럴싸한 모양새가 나왔다.
안쉘은 자신도 입은 슈트를 헤리엇이 입고 있으니 묘하게 분위기가 다른 것을 눈치챘다. 안쉘이 직장인 같은 행색이라면 헤리엇은 어딘가의 재벌 집 도련님 같았다.
긴장했다, 풀어졌다, 멍해졌다, 혼자 다 하는 안쉘을 보며 헤리엇이 다시 작게 웃고 등 돌렸다. 검은 슈트가 무척 잘 어울리는 헤리엇은 이미 준비가 끝났다.
“연설 준비는 다 됐어?”
“잘 모르겠습니다… 형식적인 것들이죠. 긴장되지만…….”
그러다 문득 호수에서의 광경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달이 뜬 하늘은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도시에서는 도통 볼 수 없었던 깨끗하고 반짝이는 밤하늘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의 인어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조용히 호수에서 나와 안쉘의 허벅지를 잡고 키스하는 얼굴은 한 폭의 그림처럼 몽환적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앤의 얼굴이 떠오를 것은 뭐람.
이번엔 잔뜩 붉어진 안쉘의 얼굴을, 헤리엇은 붉은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구경했다. 헤리엇의 곧게 뻗은 다리는 안쉘의 다리보다 길었다.
안쉘은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연설을 외우기 시작했다. 빽빽하게 글자가 채워져 있는 것이 딱 안쉘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는 죽어도 2대8 머리를 고수했는데, 그 머리를 볼 때마다 헤리엇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헤리엇이 봐도 조금 촌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안쉘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연설문을 몇 번 중얼거리다가 숨을 뱉었다. 긴장한 그의 등이 한껏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여러 번 지역 방송을 통해 연설한 단테 막심과 달리, 안쉘은 이번이 첫 연설이었다.
저번 인터뷰에서 했던 저급한 도발과는 급이 달랐다. 수도 중앙부에서 시행되는 연설은 수많은 국회의원과 위원장들, 그리고 다른 후보인 단테 막심도 참여했다.
“차 소리.”
헤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엔저 맥과이어가 도착한 모양이다. 엔저는 새벽부터 본가에 다녀와야 했다. 헤리엇은 손바닥에 질척한 젤을 바르고,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힘없이 축 늘어졌던 헤리엇의 머리카락이 올곧게 위로 고정되었다.
곧 문이 벌컥 열렸고, 헤리엇과 마찬가지로 움직이기 쉬운 슈트를 입은 엔저가 등장했다. 그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멍하니 헤리엇의 모습을 응시했다.
왁스와 젤로 머리를 넘긴 헤리엇은 안쉘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마 안젤라와 리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엔저의 모습이 이해가 갔다.
엔저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헤리엇을 멍하니 보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영화나 촌스러운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서서히 붉어지는 엔저의 얼굴을 보며 안쉘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정신 못 차리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
“결계는 어느 정도 펼칠까요?”
안쉘이 부드럽게 차를 운전하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뒷좌석에 느긋하게 앉아 헤리엇의 어깨에 손을 두른 엔저는 이제 대놓고 헤리엇의 모습만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체.”
“…….”
그거 힘든 건 아시죠?
안쉘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운전대를 돌렸다. 대통령 후보로 연설하는 주인공은 자신인데 왜 지금 자신이 운전하고 있는가. 수행원으로 함께 가는 저 빌어먹을 두 명은 왜 뒷좌석에 느긋하게 앉아 가는 걸까.
고속도로를 빠져나가고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엔저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안쉘이 몇 가지 물어도 성의 없이 대답했다.
하얀 머리카락을 넘겨 올린 헤리엇의 모습이 그렇게 신기했는지, 엔저의 붉은 눈동자는 끝없이 헤리엇을 쫓았다. 안쉘은 속으로 제발 기도했다.
‘제발 발기만 하지 마세요. 생방송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머지않아 산산조각이 날 것임을 안쉘은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째서 우리는 바다에 가족을 잃어야 하는 겁니까!!! 마지막 북쪽 바다를 두고 손가락만 빨며 공포에 질려 있을 순 없습니다. 훗날 자식들에게 자유로운 바다를 약속해야 합니다. 저 단테 막심, 이번을 마지막 선거로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단테 막심의 연설이 이제 막 끝나고 있었다. 기자들이 끝없이 늘어져 있었고, 방송용 카메라가 끝없이 돌아갔다.
안쉘은 숨을 헐떡이며 긴장으로 벌벌 떨었다. 눈앞에 부모를 죽인 원수가 뻔뻔하게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었다.
그때, 단테 막심의 눈동자가 안쉘과 저를 발견했다. 그리고 뒤이어 절뚝거리며 따라오는 헤리엇을 발견하고 연설 도중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매우 인자하게 웃었다.
안쉘이 나타나자 몇몇 기자들이 신이 나서 안쉘에게 모여들었다. 아니, 대부분 엔저에게 모인 것이 맞았다.
연설장 1층은 사람이 빡빡했지만 2층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연설은 최대한 가까이 앉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터뷰도 더 따낼 수 있었다.
헤리엇은 아무도 없는 2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바다는 인간의 것입니다.”
“…….”
안쉘은 준비한 연설을 연습하다가, 심호흡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헤리엇은 지팡이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헤리엇 님. 연설대에는 수행인을 한 명만 데리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제 뒤는 엔저 대령님이 따를 것 같으니 어디 가서 쉬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럴까.”
지팡이를 들고 붉은색 보석을 손수건으로 닦던 헤리엇이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안쉘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리엇의 손에 돈을 몇 푼 쥐여 주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사 드십시오.”
“내가 지갑 안 가져온 건 어떻게 알았어?”
“이 정도 눈치도 없으면 대령님 보좌관으로 몇 년이나 못 굴렀죠.”
헤리엇은 고맙다고 말하며 대기실 밖으로 사라졌다. 엔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헤리엇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수행인을 한 명만 둘 수 있는 걸 어쩌라고.
안쉘은 엔저를 설득시키며 연설대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수행원에게서 물통을 받아든 단테 막심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를 보니 다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안쉘이 자신을 보며 굳어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단테 막심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조금 얼얼한 뒤통수였단다, 어디 한번 마지막까지 발악해 보겠니?”
신기하게도 인자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의 정신지배는 이제 안쉘에게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끔찍하게도 너그러웠다.
안쉘이 눈을 굴려 단테 막심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안쉘의 뒤에 있는 엔저를 향해 걸음을 옮긴 다음이었다. 단테는 엔저의 잘 빠진 정장을 툭툭 쳤다. 마치 어깨에 먼지나 묻히고 다니는 어린 조카를 대하는 손짓이었다.
“내 이야기는 잘 들었니?”
“…….”
“그 인어도 매우 잘 지내는 것 같고… 곧 찾아볼지도 모르겠구나.”
“오늘.”
엔저의 입이 열렸다.
“오늘 딱 뒤지기 좋으신 날입니다.”
단테 막심은 그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단테는 목줄을 쥔 갑이었고 엔저 맥과이어는 그 목줄을 누구보다 절실히 원하는 을이었다,
“길들인 개는 주인을 물지 않지. 그 애의 목줄은 아직 내게 있단다.”
‘…헤리엇 님을 말하는 건가. 길들여? 무슨 소리지.’
안쉘은 귀를 기울였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장이라도 엔저가 대통령의 멱살을 붙잡을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오히려 엔저는 지독히도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안쉘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 못했다.
궁금증만 간직한 채 안쉘이 연설대에 올라섰다. 수많은 기자와 생방송 카메라가 안쉘을 향했다. 그들은 감히 20년 동안 대통령 자리를 지킨 단테 막심에게 도전한 얼간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마이크를 점검하며 안쉘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준비한 연설지를 연설대 위에 깔고 얼굴을 마이크 가까이 가져간 안쉘은 낯이 익은 누군가를 정면의 2층에서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
헤리엇이었다. 그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2층에 서서 연설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것은 당연히 엔저 맥과이어였다.
인자한 선배가 웃으며 귀여운 후배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귀여운 검은 머리, 정수리를 보면서 헤리엇의 한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저 양반 지금 뭐 하는 거지?’
안쉘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이번엔 내가 엔저를 훔쳐보면서 자위하게.”
저 미친 양반이 지금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저기서 엔저 맥과이어를 보고 자위하는 거야!?!
“어어억!”
안쉘의 입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 아니 신음이 흘렀다. 마이크를 통해 연설장에 울려 퍼진 그 외침에 타이핑하던 기자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절대 저 2층에 사람들의 시선이 가게 하면 안 된다. 그 사명 하나로 안쉘은 시선을 돌렸다.
“기, 기… 기호, 기호 2번… 허어억!”
그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안쉘이 발견했으니 선배 센서가 달린 엔저도 선배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2층에서 헤리엇이 자신을 보며 무엇을 하는지 눈치챈 엔저의 것이 걷잡을 수 없이 발기하고 있었다. 다행히 안쉘의 몸과 연설대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다.
‘이 미친놈들, 이거 생방송인데.’
안쉘에게는 극도로 긴장하면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병 때문에 분명 이번 연설에서도 안쉘은 머저리처럼 횡설수설할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이번 연설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설대에 오르기 전까지 안쉘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안쉘을 아는 사람 모두가 놀랄 정도로 침착하고 매끄럽게 연설을 이어갔다.
“인어들과의 전쟁이 끝나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살지 않는 바다와 썩어 가는 거대한 늪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건 빽빽하게 적힌 연설지를 너무나 매끄럽게 술술 읽었다.
안쉘이 긴장을 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안쉘은 지금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싸하게 굳었다가 격정적으로 끓었다가 제멋대로 난리가 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안쉘은 무던히 노력했다. 상관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위해서 피눈물이 흐르도록.
“인어들은 지성체이며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안쉘은 술술 연설을 내뱉으면서 생각했다.
‘제발 얼른 싸든가, 발기 좀 거둬 주세요.’
그 둘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보내지 않기 위해 안쉘이 어울리지 않게 연설대를 탕! 탕! 치면서 소리 높여 외쳤다. 누가 보면 아주 격정적인 연설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쨌든… 예상보다 연설은 잘했다. 아주.
2층에서 내려온 헤리엇은 손뼉을 치며 안쉘을 칭찬하다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안쉘의 낯빛이 매우 창백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
왜 저렇게 낯빛이 안 좋을까, 연설이 힘들었구나.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헤리엇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다가갔다. 절뚝거리면서 걸어와 안쉘에게 말을 걸었다.
“연설 잘하던데.”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는데, 안쉘은 딱히 믿는 구석이 아니었다.
그는 30분 동안 정말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덕분에 헤리엇은 엔저에게 더 잘 집중할 수 있었다. 검은 슈트를 쫙 빼입고,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있는 모습이 근사하고 멋있었다.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어 그런지 엔저의 정수리가 훤히 보였다. 과거 아카데미 시절 매일같이 보던 정수리였다. 하지만 저 아래 있는 엔저는 아카데미에 다니는 작고 귀여운 아이가 아니었다.
연설을 준비하는 안쉘의 뒤에서 엔저가 잠시 시선을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들었었다. 그러다 2층에 있는 헤리엇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가 주변을 녹여 버릴 듯이 웃었다.
헤리엇은 둔했지만, 저 귀여운 후배가 남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이가 아니란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귀여운 나의 새끼 고양이.
헤리엇의 눈은 엔저를 항상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귀여운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열심히 움직이는 헤리엇의 손에 집중했다.
이윽고 엔저가 감탄한 듯 황홀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색 눈동자가 녹을 것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기자 중 몇 명이 안쉘의 연설을 듣다가, 엔저를 바라보며 탄성을 내뱉는 것이 헤리엇의 눈에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안쉘은 과장을 보태 쾅! 하고 연설대를 때리거나 아니면 바람에 펄럭이는 인형처럼 손을 크게 휘저어서 엔저에게 향하는 시선을 차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엔저의 앞섬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엔저의 시선이 헤리엇을 향했을 때부터 헤리엇은 허리를 움찔거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경계가 모호한 하얀 눈동자에 푸른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엔저는 당장 손을 뻗어 헤리엇에게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됩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안쉘이 소리를 치듯 호통하며 엔저의 무릎을 손으로 막았다. 입은 열정적으로 움직이는데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보이지 않는 눈물을 쏟고 있었다.
‘제발 사고 좀 치지 마세요!!’
어쨌든 안쉘의 피눈물 나는 노력 덕분에 연설은 나름 괜찮게 끝이 났다.
헤리엇이 손을 뻗어 엔저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슈트를 입은 엔저는 젤로 검은 머리를 올려 넘긴 상태였는데, 머리카락 몇 가닥이 떨어져 이마를 가리자 그것을 손으로 올려 주며 헤리엇이 작게 미소 지었다.
“수고했어.”
“네, 선배.”
“…….”
안쉘의 표정이 볼 만하게 변했다. 그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요, 가장 수고한 건 전데요.’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할 수 있었으면 진즉 했겠지. 안쉘은 한참 동안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직 이곳엔 기자들이 깔려 있었고, 대통령 파인 국회의원들이 코웃음을 치며 안쉘을 흘겨보고 있었다. 평의원들은 나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안쉘을 힐끔거리며 관찰하는 중이었지만, 어쨌든 이곳은 아직 적진 한가운데였다.
“언제 움직일까요?”
“차가 출발하면.”
안쉘은 다시 헛기침을 내뱉었다.
“대통령이 직접 움직일까요?”
“아니, 아마 그 아래 기르는 개들이 주인을 위해 직접 움직이겠지.”
엔저는 가볍게 얘기했지만, 안쉘에게는 가볍지 않았다.
‘길들인 개…….’
안쉘은 자기도 모르게 헤리엇에게 시선을 주었다. 단테는 엔저에게 길들인 개를 운운하며 협박하듯 조롱했었다.
안쉘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주제가 헤리엇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는 쫙 잘빠진 정장 주머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궁금한 점이 있을 텐데도 헤리엇은 그저 웃으며 붉은색 보석을 손수건으로 또 닦고 있었다. 지독할 정도의 마이페이스에 안쉘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갈무리했다.
“헤리엇 님, 이왕 나온 김에 외식할까 하는데…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쉘은 그렇게 말하고 다급하게 덧붙였다.
“코코아 빼고요. 아, 간식도 안 됩니다.”
그는 연두부도 빼자고 말하려고 했다. 헤리엇이 아침 점심 식단으로 연두부에 간장을 부어 먹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헤리엇은 자극적인 음식을 정말 너무 못 먹었다. 그렇다고 채소를 잘 먹는가 싶으면 또 그건 아니었다. 못 먹는 게 아니고 잘 안 먹는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과일 몇 조각은 부담 없이 후식으로 먹었다. 그런 헤리엇이 단 음식은 또 환장하게 좋아해서 안젤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외식을 할 수 있는 음식으로 말씀해 주시면 예약해 놓겠습니다.”
안쉘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며 말했다. 지도를 확인하며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길을 외웠다. 도시 끝에 부두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있을 즈음 헤리엇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회?”
“…….”
‘생선인 당신이 그거 좋아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안쉘이 당황해서 편협한 생각을 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안쉘이 운전대를 잡았다. 정작 수행원으로 온 둘은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염병할…….’
바르고 고운 말을 쓰고 싶은 안쉘은 속으로 욕을 까집으며 HUD를 조정했다.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으니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엔저 맥과이어가 직접 자택에서 가져온 개인용 차량이니 그만큼 비싸고 탄탄하겠지.
안쉘은 차체에 이능력 결계를 감싸며 주변을 살폈다. 운전대를 왼쪽 끝까지 돌리고 다시 돌리기를 반복했다.
“선배, 회를 좋아하셨습니까?”
“음.”
“…정말, 몰랐습니다.”
왠지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엔저가 중얼거렸다. 헤리엇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엔저의 뺨을 톡톡 쳤다.
받는 사람이 기분 나쁠 만큼 힘 있는 손길은 아니고, 귀여워서 치근덕거리는 것 같았다. 마치 삐진 어린아이의 기분을 풀어 주는 듯한 모습에 안쉘이 기겁했다.
“아홉 살 때 먹고 못 먹어 봐서 그래.”
“…그렇습니까.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여기 오니까 갑자기 떠올랐어.”
엔저는 정말 분하고, 견딜 수 없는 것처럼 탄식했다. 그는 선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타오르는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는 선배의 정자 개수마저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선배의 좋아하는 음식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살아 있을 자격도 없다.
얼굴을 붉히고 부들부들 떠는 엔저의 모습은 너무 가련하고 수척해 보였다.
“이런… 가여운 엔저.”
헤리엇은 지금 엔저가 뭐에 이렇게 충격받고 떠는지 모르면서 중얼거렸다. 그냥 엔저가 너무 슬프고 피폐한 표정을 짓고 있어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엔저의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묘하게 퇴폐적이고 야했다.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에 물이 어려 있었다.
“…….”
댁들 지금 뭐 하세요.
안쉘은 코를 파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운전에 집중했다. 끼어들기 미안했지만 안쉘은 차선을 변경할 때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두 쪽 횟집이 유명한데, 30분 정도 걸립니다.”
“가.”
선배가 아니면 말을 길게 해 주지 않는 엔저의 대답에 안쉘은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그동안에도 뒤에서 신파극은 계속되었다.
엔저는 울 것처럼 눈을 붉히고 헤리엇의 손을 붙잡았다. 붉은색 연지가 발린 것처럼 엔저의 야한 눈가를 진지하게 노려보던 헤리엇이 손을 들어 엔저의 붉게 물든 눈가를 쓰다듬었다.
“열 살 이전에 좋아하셨던 걸 알려 주세요.”
“음.”
“뭐든 좋아요. 먹을 것이라든가… 따로 좋아하시는 거라든가.”
엔저가 속삭였다. 헤리엇은 그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보육원에 있을 때의 헤리엇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욕심이 없었고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그래서 알시타 막심의 후견을 받을 수 있었다고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알시타의 아들은 죽었고, 그는 아들에게 주었어야 할 애정과 관심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 했다. 헤리엇과 처음 만날 당시의 알시타는 평화의원으로 아버지는 대통령 후보자였다. 그때 알시타는 헤리엇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사실 회가 좋은 건 모르겠고, 알시타가 처음 데려가 줬을 때 같이 나오는 옥수수 요리가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달고 느끼하고, 맛있었다. 그것만 열심히 퍼먹고 있으니 알시타가 맛있냐고 물었었다. 맛있다는 대답에 알시타는 웃으면서 회도 먹으라고 쌈을 싸 주었다.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 곤란한 미소를 짓던 헤리엇이 다시 손을 뻗어 엔저의 눈가를 꾹 눌렀다.
“네 눈동자가 좋아.”
“…하아.”
엔저의 입에서 뜨거운 신음이 흘렀다. 네 눈동자가 좋아. 선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선배의 눈에 이 눈동자가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엔저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드릴까요?”
“음. 아니… 네게 있을 때 가장 아름다워.”
맙소사, 엔저는 이제 정염에 휩싸여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헤리엇의 하얀 손가락이 불덩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빌어먹을 훼방꾼이 점점 다가오는 것 또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건 안쉘도 마찬가지였는지 핸들을 급하게 꺾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빠앙-!!!
이곳은 뻥 뚫린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뒤에서 요동치는 클랙슨 소리에도 안쉘은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왼쪽으로 핸들을 틀며 갓길로 빠져나갔다.
“몇 대 인지 확인할 수 있으십니까?”
안쉘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선배의 어깨를 끌어안은 엔저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며 말했다.
“일곱 대, 아니, 방금 여덟 대.”
“젠장!”
많기도 했다. 대통령은 몰라도 대통령의 개들은 적지 한가운데 직접 찾아온 안쉘을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들은 20여 년 동안 단테 막심이 길들인 개들이었다. 감히 햇병아리조차 안 되는 안쉘이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꼰대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안쉘이 멀쩡하게 수도를 벗어나는 걸 허락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안쉘도 엔저도 이미 짐작하고도 남은 상황이었다. 밥 먹기도 전에 기운 쓰게 생겼다. 안쉘이 혀를 차며 차선을 아예 바꾸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운전 똑바로 해. 씨발!!!”
안쉘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아예 역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끼이이익-, 섬뜩한 소리가 났고 스핀을 돈 탓에 도로 위로 스키드 마크가 진하게 남겨졌다.
그로 인해 운전자들이 욕을 하며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번잡한 도로가 금방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안쉘은 이를 악물고 차선을 계속 변경했다. 마지막엔 아예 반대로 역주행하며 달렸다. 마주 오던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클랙슨을 마구잡이로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안쉘은 신이 들린 운전 솜씨로 주행하는 차량을 전부 피하며 운전했다.
“역주행은 보험사에서도 안 받아 준다더라.”
헤리엇이 엔저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자신은 이를 악물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역주행하는데 뒤에서는 김빠지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선배, 과연 뛰어난 지식입니다.”
내가 말을 말지.
안쉘은 운전대를 사정없이 꺾으면서 도로 위에서 역주행하는 기행을 부렸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차체에 내장이 한쪽으로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몇 대 떨어져 나갔습니까!?”
“한 대도 안 떨어져 나갔는데.”
지옥같이 변한 도로 위가 더 난잡하게 망가졌다. 헤리엇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정말 검은 차 여덟 대가 숨지도 않고 뒤따라오고 있었다.
탕-!
“저 미친 새끼들이!”
아직 민간인들이 돌아다니는 시간대인데 상대는 아주 막장이었다. 선루프 위로 장전된 총이 번뜩이며 엔저의 차량을 노렸다.
탕-!
다시 총소리와 함께 도로 위 사람들의 비명이 질렀다. 난데없는 총격전에 모두 얼이 빠진 게 눈에 보였다. 안쉘의 이능력 결계에 막혀 총알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다가 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상관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총을 갈겨 댔다. 안쉘의 결계 능력은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상위권에 속했다. 총알만으로 그의 결계를 파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안쉘은 섬뜩한 기분에 핸들을 돌렸다.
끼이이익-.
도로 위로 난잡하게 그을음이 생기며 차가 반 바퀴 돌았다.
탕-! 퍽-!
놀랍게도 방금까지 총알을 막던 결계에 구멍이 생겼다. 이능력 결계를 파괴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능력자밖에 없었다.
“위협이라기엔… 본격적인데요.”
안쉘이 섬뜩해져서 중얼거렸다. 심드렁하게 뒤의 상황을 지켜보던 엔저가 앞이 적들의 차로 막혀 있는 것에 손을 까닥 움직였다. 차량이 두둥실 떠오르며 하늘로 날았다. 하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윽!”
“불인가, 성가신데…….”
엔진에 불이 붙었다. 다행히 폭발하진 않았지만 엔저가 능력을 쓸 수도 없었다. 불은 바람이 불면 더 잘 타오르기 때문이다.
엔저는 짜증 난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안쉘은 도로에 타이어가 닿자마자 다시 액셀을 밟으며 주행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상대 쪽에서도 바람 능력자가 있던 모양인지 차량 몇 대가 뒤에 바짝 붙었다.
“멈춰, 안쉘. 그냥 쓸어버리게.”
안쉘이 소름 끼친다는 듯 소리쳤다.
“도시를 반이나 날려 먹게요?!”
설마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도를 날려 먹을까. 헤리엇은 가볍게 생각했지만 안쉘은 정말 진지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부두가 나옵니다.”
엔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안쉘은 식은땀을 흘리며 운전대를 돌렸다. 운전대에 피가 묻어 있는 걸 보면 너무 강하게 잡은 탓에 마찰력으로 손바닥이 찢어진 것 같았다.
끼이이익-.
유턴하며 안쉘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헤리엇의 어깨를 잡고 있던 엔저가 차 문을 벌컥 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잔뜩 뒤로 넘겼던 머리가 난잡하게 흔들거렸다.
아, 하고 입을 열기 전에 엔저가 자동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차가 아슬아슬하게 부둣가 위에서 멈췄다. 조금만 더 나갔어도 바다에 그대로 풍덩 빠질 뻔했다.
안쉘은 숨 고를 틈도 없이 이능력 결계를 펼쳤다. 한 겹도 아니고 무려 다섯 겹이나 펼친 안쉘이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결계를 많이 펼쳤네.”
이러면 상대의 공격에 얼마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지만 반대로 이쪽에서도 아무런 공격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차하면 바닷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던 헤리엇이 의문을 표했다.
딱히 공격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 같았다. 헤리엇은 인조 인어였고, 눈앞의 바다는 헤리엇이 누구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원천이었다. 오랜만에 바다를 본 헤리엇의 눈동자에 푸른 안개가 살짝 피었다가 꺼졌다.
“…바다에서 엔저 대령님이 가장 크게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건, 바다가 드넓었기 때문입니다.”
“…….”
“엔저 부대는 대부분 결계 능력자와 탐사 능력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쉘이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헤리엇은 그만큼의 눈치가 없기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령님의 뒷수습을 위해 부대원들이 있는 겁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드넓은 바다와 견고한 도시를 한 방으로 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어쩌면 그 예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토네이도가 굉장한 속도로 몰려와 뒤따라오던 차량을 그대로 덮치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토네이도가 도시를 향한다면 정말 도시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쉘은 저게 겨우 한 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쪽 바다를 공격했던 거대한 토네이도는 무려 다섯 개였다. 하늘 위로 내리꽂은 심판처럼 거대하고 무섭고 위대했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안쉘과 헤리엇이 탄 차가 크게 흔들거렸다.
쨍그랑하고 가장 앞쪽에 펼친 결계 하나가 소리를 내며 깨졌다. 이미 반대쪽 차들은 능력자들이 힘을 쓰기도 전에 하늘 위로 높이 떠올라 바다로 처박힌 상태였다. 차들이 마치 작은 장난감이 된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안쉘은 휘몰아치는 태풍에 결계를 유지하며 피눈물을 쏟았다. 토네이도의 세기로 봤을 때 지금 엔저는 매우 슬퍼하고,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깟 회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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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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