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영웅
헤리엇은 느긋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 주었다.
저 멀리서 안쉘과 안젤라가 이젠 손발이 척척 맞아 밭에서 열심히 수박을 수확하는 게 보였다. 동그랗고 커다란 수박이 무거울 법도 한데 안젤라는 열 개 정도 되는 수박을 한꺼번에 들고 트럭까지 뛰어갔다.
“안젤라! 넘어지니까 조심하세요!”
“알고 있어요, 중위님이나 잘하세요~!”
안젤라가 깔깔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을 안쉘은 귀여운 동생을 보는 것처럼 웃었다. 헤리엇이 보기에도 두 사람은 꽤 죽이 잘 맞았다. 안젤라는 이제 계급까지 떼고 안쉘을 놀려먹었다.
군법 위반이었지만 안쉘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이 규칙이 빡빡한 중앙 본부였다면 한 마디 했을 테지만 이곳은 달랐다. 대령이 중사에게 존대하고, 실질적인 팀의 대장도 중사였다. 계급으로 모든 걸 따지는 군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새 수박을 가득 채운 트럭이 부우웅 소리를 내며 떠났다. 이번에도 보상을 받아왔는지 양손에 수박 두 개를 챙긴 안젤라가 코에 흙을 묻힌 채 다가왔다. 안쉘은 땀을 흘리며 헤리엇이 주는 물을 건네받았다.
“선거는 어떻게 되고 있어?”
“이번에 한번 시내로 나가 홍보를 하기로 했는데…….”
잘 안 된 모양인지 안쉘이 쓰게 웃었다.
“코에 흙이 묻었습니다.”
코뿐만이 아니라 안젤라의 뺨과 이마에도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안쉘은 혹시 안젤라가 이런 불합리한 노동에 불만을 가진 건 아닐까 헤리엇에게 상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헤리엇은 안쉘의 고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안젤라는 오히려 사무실에 앉아 있는 걸 더 싫어했다.
손가락으로 수박을 반 토막 낸 안젤라는 챙겨 온 일회용 수저 세 개를 둘에게 내밀었다. 헤리엇은 그것을 건네받고 수박의 가장자리부터 사각사각 갉아 먹었다. 안쉘은 그늘에 있어도 덥다고 생각하며 연신 부채질을 했다.
“덥지 않으십니까?”
“음… 이런 날엔 호수에 자주 갔는데.”
헤리엇이 호수의 시원함을 떠올리려는지 눈을 감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그 호수에는 인어 왕자 앤이 살고 있었다. 안쉘은 앤과 관련된 대화로 주제가 옮겨가자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수박을 퍼먹었다.
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리는 걸 보니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안젤라는 대충 눈치챈 듯 시선을 돌렸지만 헤리엇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는 더우면 더울수록 무기력해졌다.
“대령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가문에서 불러들였습니다. 잠시 들렀다 올 테죠.”
가문 내 원로들이나 가문 자체에서 해명이 필요했다. 맥과이어 가문은 대대로 군인 가문이었고 엔저는 가문의 보물이었다. 사람들은 맥과이어 가문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이라고 엔저를 칭송했다.
그런 그가 지금 대통령과 척을 치게 생겼으니 부랴부랴 가문에서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하지만 안젤라가 놀란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엔저 대령님이 부모님 말에 순순히 끌려갔다고요?”
“끌려간 것은 아니지만…….”
안쉘은 말꼬리를 늘리며 우물쭈물했다.
헤리엇은 멍하니 바람을 쐬며 눈을 떴다. 두 사람은 어느새 엔저에 대한 주제에서 오늘 점심엔 피자를 시켜 먹고 싶다는 주제로 넘어갔다.
안젤라는 패스트푸드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건 안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아주 짝짜꿍이 되어 신나게 침을 튀기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엔저 대령님이 입이 심심하긴 해요.”
“패스트푸드의 사랑스러운 점을 모르는 분이긴 하죠.”
엔저의 뒷담화를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안쉘은 퍽 마음에 든 듯싶었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은 처절한 전쟁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안쉘은 처음 이곳에 좌천되어 내려왔을 땐 눈물을 흘렸지만, 어쩌면 이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싱그러웠고, 더웠지만 산속이라 그런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더위였다.
헤리엇은 병을 들고 안에 있는 물을 연신 들이켜며 더운 여름이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전쟁이 끝나면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안젤라가 뜬금없이 말했다.
“저는 군을 그만둘 거예요. 능력자는 대부분 군인이 되는 게 정해져 있었잖아요.”
15년 정도 전부터 모든 능력자의 아카데미에 입학을 필수로 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싫든 좋든 모든 국민이 만 10세가 되면 받아야 하는 능력자 테스트에서 선발된 이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나이가 들어 일반 학교에 입학한 사람이 늦게라도 능력이 발현되면 아카데미에 편입해야 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졸업한 이들은 빠짐없이 군인이 되었다. 안쉘이 그랬고, 안젤라와 리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하시게요?”
사실 안쉘은 전쟁이 끝나도 군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인생 대부분을 군인으로서 살아왔다. 그 외에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안젤라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주변을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에 꽤 어른스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귀농할 거예요.”
“…….”
“돈을 모아서 땅을 살 거예요. 그리고 군 컨테이너가 아니라 내 집을 마련할 거고.”
그녀는 이 시골 마을에서 사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동물학자가 되고 싶어요.”
헤리엇은 멍하니 그녀의 등을 응시하면서 눈을 깜박였다. 헤리엇은 꿈이 뭐냐는 알시타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래, 동물을 꽤 좋아했다. 헤리엇은 늘 동물 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지만, 전쟁이 끝나면 정말 엔저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동물을 구경하고 연구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요즘 생각했다. 자신의 옆을 엔저가 지키고 있는 미래라는 게 매우 새로웠다.
그는 이제까지 누군가에게 독점욕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마음이 움직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헤리엇은 자신을 후원하는 알시타에게마저 정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알시타를 싫어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그는 안젤라도 좋아했고, 안쉘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이 죽거나 떠난다고 해도 헤리엇의 감정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왜 엔저만큼은 다른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엔저가 기지로 복귀한 건 안젤라가 피자를 네 판이나 시키고 난 다음이었다. 리언까지 달려와서 열심히 피자를 물어뜯었다.
헤리엇은 기름진 것을 잘 먹지 못하기 때문에, 옆에서 이온 음료나 홀짝이고 있었다. 한 입도 못 먹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달아 보이는 푸딩을 먹고 있었다.
설마 저게 점심은 아니겠지. 짐승처럼 피자를 흡입하던 안젤라는 헤리엇의 건강 상태를 염려했다. 저러다가 대장이 쓰러지면 어떡하지? 그래도 안젤라는 먹는 것을 멈추진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엔저는 사무실 안에 가득한 피자 냄새에 살짝 멈칫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 헤리엇의 옆에 앉았다. 푸딩을 먹고 있던 헤리엇은 엔저의 안색이 썩 좋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는 모습이 피곤해 보였다.
가련한 나의 고양이.
헤리엇은 푸딩을 한 스푼 떠서 엔저에게 내밀었다. 단건 질색하는 엔저를 아는 안쉘이 잠시 멈칫했지만, 엔저는 표정에 찡그림 하나 없이 평범하게 입을 열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입술을 열고 붉은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헤리엇의 푸딩을 기꺼이 음미했다.
그의 팬이었던 안젤라마저 멍하니 엔저를 바라볼 정도로 두 눈을 감은 그는 오늘도 근사했다. 늘 자신만만하고 오만했던 엔저가 이렇게 지쳐서 오다니, 그의 부모님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헤리엇은 아카데미 시절, 엔저의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레이첼 맥과이어는 매우 당차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에 정열적인 붉은 눈동자를 가진 능력 있는 군인이었다. 그녀의 능력이 불인만큼, 능력에 어울리는 화려한 외모를 가졌다. 소문으론 성격도 불같다고 하던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일 있니?”
“아니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헤리엇이 엔저의 뺨과 턱 선을 쓰다듬자 엔저가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헤리엇은 잠시 손을 멈췄다.
“저를 막는 부모님께 능력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기절시켰죠. 죽이지는 못했지만…….”
“사이가 나빴니?”
“아니요.”
헤리엇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마음이 아픈 적이 없었고, 남에게 버림받아도 슬프지 않았다. 그렇지만 엔저의 무덤덤한 말에 묘하게 가슴 언저리가 쿡쿡 찔렸다.
엔저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순 없지만, 그는 능력을 사용해서 피곤해 보일지언정 후회나 고통은 없어 보였다. 아주 태연하고 귀찮다는 듯 피곤해 보이는 엔저의 얼굴을 보는 게 괜히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든 다 잘 될 거야.”
헤리엇이 속삭였다. 엔저는 웃음을 지었다.
* * *
쏴아아아아아-.
비가 쏟아졌다. 아니, 그것은 비가 아니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닷속이 폭발했다. 얼마 후 피로 물들어가는 수면 위로 인어들의 시체가 둥둥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군함이 뒤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파도가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돌려!!! 우측으로 배를 돌려라!!”
“늦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울먹거리는 병사들의 혼란에 군함은 이리저리 휘둘리며 바다 소용돌이 가운데로 점점 침몰하고 있었다. 거대한 군함이 완전히 소용돌이로 가라앉음과 동시에 그곳으로 인어들이 몰아닥쳤다.
인어들의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로 점철되어 있었다. 평화와 노래를 사랑하던 인어들이 자신들의 종족과 가족을 살해하는 인간들을 향해 살의를 내비쳤다.
“북쪽 인어들의 강세가 너무 강합니다. 군함 45척이 한 번에 전멸했습니다.”
수염을 기른 노인은 안토니오 중령으로, 계급으로는 엔저에게 밀리지만 나름 실력이 출중하고 듬직한 군인이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왕족 때문인가?”
“네. 동‧서‧남 인어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보고하는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북쪽 바다의 인어들은 정말로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북쪽 아래의 해역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남쪽, 동쪽, 서쪽 인어들도 모두 제 자리를 지키기만 하고 다른 해역으로는 도망가지 않았다. 까닭을 모르겠지만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게 생겼습니다. 이후에 오는 지원군도 전멸할 가능성이 큽니다.”
안토니오의 보좌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헐떡거렸다. 지금 그들은 북쪽 바다 인어들과 비공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일인 만큼 엔저 맥과이어가 아니라 그들이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북쪽 바다 인어들은 너무 강했고, 인어 왕족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인어들에게 신(神)처럼 받드는 인어 왕족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안토니오는 정말 배꼽이 빠지도록 비웃었다.
미개한 바닷속 종족들에게 왕족이 있다며, 어디에 나오는 소설이냐고 한참을 웃었다. 노래나 하고 처자빠지는 것들이 감히 바다를 지배한답시고 알시타 막심을 죽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안토니오는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수염이 바닷바람에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의 보좌관은 능력은 좀 떨어지지만, 잔머리가 좋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이였다. 안토니오는 딱히 그의 그런 심성이 싫지는 않았다.
“북쪽 인어들에게 이기기 위해선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에 안토니오는 고개를 돌렸다. 이미 바닷속에 수장된 군함만 총 45척이었다. 그 피해는 일반인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군함에 있던 수많은 물자와 폭탄은 물론, 귀한 능력자들까지 바다 아래에 수장되어 버렸다.
“뭐지?”
안토니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보좌관이 비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웅을 불러야지요.”
* * *
헤리엇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활한 바다는 매우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헤리엇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온몸이 구속된 채 어떤 시험관 안에 갇혀 있었다. 입은 막혀 있었고 시험관 안에는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사사이.’
‘사사이.’
그들은 헤리엇을 그렇게 불렀다.
‘네 힘을 보여 줘라. oooo.’
헤리엇의 기억에 혼선이 찾아왔다. 그들은 어떤 명령을 내렸고, 헤리엇은 그것을 착실히 이행했다. 그것에 헤리엇의 의지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명령에 몸이 멋대로 움직였고 바닷속에 처박힌 헤리엇이 겨우 제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을 때.
동쪽 바다, 그 광활한 곳에… 살아남은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헤리엇의 초록빛 눈동자가 광활한 동쪽 바다의 지평선을 향했다. 그가 본 바다는 온통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
헤리엇은 쩝- 하고 침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지만 오늘은 쉬는 날이었고, 헤리엇은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다시 누울까 멍하니 생각하다가 헤리엇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그보다 30분이 더 지난 상태였다.
까치집이 든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이불에서 아예 벗어난 헤리엇은 뒤를 돌아봤다. 늘 그렇듯 아무것도 없이 휑한 집 안이 보였다. 그나마 엔저가 집에 자주 온다고 부랴부랴 소파를 준비해서 그런가, 조금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긴 했다.
헤리엇은 느릿하게 움직이며 냉장고에서 연두부를 꺼내 그릇에 넣고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원래 헤리엇은 보는 이가 질릴 만큼 단 코코아를 아침마다 먹었는데, 오늘은 코코아가 없었다.
아침을 먹은 그는 이른 아침부터 씻고 옷을 입었다. 물론 군복은 아니고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주워 입었다. 티셔츠와 마찬가지인 검은색 모자를 쓰고,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신발장에 세워 놓은 붉은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신었다. 나가기 전에 그는 목을 쓸면서 한숨을 쉬었다.
현관문을 열자 마당에 있는 거대한 텐트가 보였다. 엔저 부대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군사용 텐트였다. 헤리엇은 그것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텐트의 주인은 오늘 외출하고 없었다. 그 없는 주말은 오랜만이라 헤리엇은 조용히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의 산길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올라왔다.
헤리엇은 절뚝거리면서 군용 차량에 올라탔다. 다리가 불편하긴 했지만 운전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시동을 켜자마자 부우웅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매캐한 검은 연기를 내뿜어 내는 것을 보니 차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헤리엇은 부드럽게 차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와 읍내로 향했다. 엔저가 오기 전, 그는 읍내로 자주 나가는 편이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빼곡했기 때문에 읍내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몇 없었다. 조용히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헤리엇은 창문을 열고 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아침 바람을 느꼈다.
오늘은 날이 좋을 것 같았다.
* * *
아주, 정말.
시발, 날이 너무 좋았다.
안쉘은 한숨을 쉬며 운전대를 잡고 부드럽게 꺾었다. 검은 세단이 부드럽게 우회전하면서 우둘투둘한 길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엔저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고가의 망원경이 놓여 있었는데 그걸로 대체 뭘 할 생각이냐고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원래 엔저의 부관으로 구르면서 주말이나 쉬는 날, 휴일을 챙겨 본 적이 손에 꼽았던 안쉘은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헤리엇 님을 따라갈 줄 알았는데.’
안쉘은 자동차 앞쪽의 인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며 엔저의 모습을 살폈다. 어제 안쉘은 사무실을 나가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헤리엇에게 물었다.
“내일 뭐 하십니까?”
딱히 정말 궁금해서 물었던 건 아니고 의례적으로 지나가듯 툭 내뱉은 말이었다.
“내일 시내 가기로 했어요.”
“호랑이 간식 사러 가요.”
질문은 헤리엇에게 했는데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렸다. 안젤라와 리언이 차례로 대답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낚싯대와 그물을 들고 있었다. 듣자 하니 옆집 이장님하고 밤에 개울가에서 밤낚시를 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둘은 아마 내일 시내로 놀러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재미있겠군요.”
안쉘은 두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헤리엇은 늘 그렇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썹을 팔자로 휘어 웃으며 말했다.
“내일은 볼일이 있어서.”
그게 엔저와 함께하는 일정은 아닌 것 같았다. 안쉘은 그때 직감했다.
아, 내일 주말은 침대에서 뒹굴뒹굴할 수 없겠구나.
그런 이유로 안쉘은 새벽에 득달같이 출근해서 엔저의 검은 세단을 몰고 있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를 느끼며 안쉘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의 새 차는 첫 할부금이 나가기도 전에 폐차가 되어 공업사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어디에 차를 멈출까요?”
망원경을 만지작거리던 엔저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거울에 반사되어 안쉘을 쳐다봤다.
언제 봐도 섬뜩할 정도로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였다. 그의 팬들은 아름다운 보석이라고 칭찬하지만, 글쎄. 안쉘의 눈에는 그의 손에 죽어난 수 없이 많은 핏방울이 떠올랐을 뿐이다.
“저쪽.”
엔저가 고개를 틀어 어떤 건물을 가리켰다. 그 건물은 낡고, 매우 음산해 보였다. 무너질 것 같진 않지만,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었다.
안쉘은 일단 상관이 가라니까 그쪽으로 차를 움직였다. 엔저가 왜 시내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까라면 까고 가라면 가는 게 보좌관의 임무였다.
차에서 내린 엔저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안쉘이 눈을 크게 뜨며 엔저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능력을 사용하십니까?”
“여기 엘리베이터 고장 났거든.”
그러면서 엔저는 제 몸을 아예 하늘 높이 띄웠다. 그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돌풍이 불었다. 바람을 자유로이 지배하는 엔저의 능력은 어느 때든 경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바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비단 엔저만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국민 대부분이 바람하면 엔저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바람을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는 엔저 외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
안쉘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엔저가 맨 꼭대기 층 창문을 밟고 올라가는 게 보였다. 폐가와 비슷한 낡은 건물에 들어가는 방문자는 오로지 안쉘과 엔저뿐인 것 같았다. 안쉘이 기가 막혀서 고개를 들었다.
젠장, 그럼 나는 걸어 올라가야 하잖아!?
안쉘은 계단을 이용해 단숨에 9층까지 올라갔다. 훈련을 게을리한 적 없으니 이 정도는 거뜬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안쉘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낡은 문 앞에 섰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혹시 이 사무실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에 엔저는 정확히 이 낡은 사무실 창문으로 들어갔다.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문을 열며 안쉘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안쉘의 머리부터 시작해서 넥타이까지 아주 현란하게 흔들거렸다.
2대8로 겨우 고정한 머리가 이리저리 휘날리고 안경이 살짝 삐딱하게 움직인 것을 고쳐 쓰며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하고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유리 조각이 밟히자 검은 먼지가 뽀얗게 올라왔다.
엔저는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의자가 있던 건 아니고, 허공에 앉아서 망원경으로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쉘은 흐트러진 제복을 정리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망원경으로 시내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안쉘이 묻자 엔저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선배는 주말에 카페에 앉아서 사색을 즐기거나 책을 읽는 걸 좋아하셔.”
“…….”
그건 또 몰랐다. 그렇다면…….
안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제 시력에 매달렸다. 엔저가 보고 있는 방향에 작은 카페가 있었고, 테라스 테이블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하얀 머리카락에 안쉘은 감탄을 내뱉었다. 자신의 상관은 정말 또라이였다.
‘그건 어떻게 안 거야, 대체.’
“헤리엇 님의 많은 걸 알고 계시네요.”
‘이 스토커야’라고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안쉘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자 엔저가 처음으로 안쉘 앞에서 웃음을 흘렸다.
“선배는 열 살에 능력이 나온 천재시고, 카페에서는 항상 코코아를 마셔. 선배의 주말은 아주 고상하고 아름다워…….”
그리고 그의 주말은 대부분 그런 선배를 스토킹하는데 쓰고 말이다.
사실 엔저가 자신에게 저렇게까지 친근하게 말하는 것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안쉘은 하얗게 질렸다. 그의 상사는 또라이에다 스토커였다. 이제 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미동도 없이 동상처럼 망원경으로 선배의 사색을 스토킹하는 상사의 꼴불견을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안쉘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저는 잠시 밖에 나가 보겠습니다.”
엔저는 안쉘에게 대꾸조차 해 주지 않고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감이 제 선배를 향한 것이다. 안쉘은 왠지 저 멀리 있는 헤리엇의 작은 목소리도 엔저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오싹해졌다.
“하아… 선배.”
엔저가 갑자기 느른한 신음을 흘렸다.
‘못 볼 꼴을 보겠구나.’
안쉘이 뒷걸음질 치며 문을 열고 도망쳤다. 잽싸게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 안쉘은 고개를 들어 엔저가 스토킹하며 숨을 할딱이고 있는 9층 창문을 올려다봤다.
제발 미쳐도 곱게 미쳐 줬으면 좋겠다.
이왕 읍내로 나온 것, 구경이나 해 볼까. 안쉘은 주변을 둘러봤다. 슬슬 여기저기 가게 문이 열리고 있었다. 살 것은 딱히 없지만, 안젤라와 리언을 생각하며 안쉘은 사탕을 골랐다.
헤리엇이 단걸 좋아해서 그런지 사무실엔 군것질거리가 무척 많았고, 안젤라는 야금야금 제 상관의 간식을 훔쳐 먹었다. 리언은 안젤라처럼 대놓고 먹진 못했지만, 몰래몰래 먹는 걸 안쉘은 알고 있었다.
귀여운 부하들의 간식을 사서 나온 안쉘이 시장 입구에 들어가자, 그를 알아본 꼬마가 손가락질했다.
“어! 아저씨!”
“…….”
‘이제 이런 애들한테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지.’
안쉘은 자조적으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TV에서 봤어요.”
…염병 천병.
다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튀어나오려는 욕을 막을 수 있던 까닭은 어린애 앞에서 차마 더러운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TV에 나오는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꼬마는 빡빡머리에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안쉘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안녕, 이름이 뭐니?”
“알아서 뭐 하게요?”
건방진 꼬마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단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이름을 물어보면 일단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라고 했어요.”
그 부모님 참 가정교육 잘 시켰다. 맞는 말이라 안쉘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를 알아보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힐끔힐끔 곁눈질로 쳐다보는 게 눈에 띄었다.
하긴, TV에서 그런 미친 짓을 했는데 유명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TV에 나왔으니,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니.”
안쉘은 꼬마의 빡빡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인자하게 말했다. 최대한 착하게 보이겠다는 마음이 통했는지 꼬마가 입을 열었다.
“재믹이라고 해요.”
그것 참 재미있는 이름이구나.
그렇게 생각한 안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만약 여기 헤리엇이 있었다면 했을 법한 유머였다. 그가 이 생각을 들었다면 엄청 웃었을 것이다.
안 돼 안 돼, 물들면 안 된다.
안쉘은 고개를 털었다.
“그래. 부모님께 좋은 말 좀 전해 줘.”
안젤라와 리언을 위해 잔뜩 사 놓은 사탕 꾸러미에서 사탕 한 알을 꺼낸 안쉘이 꼬마의 손에 사탕을 툭 올려 주었다.
“뭘요?”
“나 좀 뽑아 달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지는 꼬마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꼭 부모님께 전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도장까지 받았으니 믿어도 되겠지 뭐.
“…어?”
그렇게 시장을 빠져나온 안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봇대 뒤로 숨었다. 뒷모습이 너무 익숙한 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염이 멋있는 중년 사내와 무척 야비하게 생긴 사내였다.
조합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그들의 기색을 살피며 안쉘은 거리를 벌려 둘을 미행했다.
‘안토니오 중령이잖아?’
그는 막심가의 개였다. 특히 알시타 막심의 측근이었다. 안쉘은 알시타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 저 듬직하고 무거운 사내가 콧물까지 흘리며 펑펑 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는 알시타의 뜻에 따라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아닌 복수를 선택했다. 안쉘은 단테 막심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떠올렸다.
그는 평판이 꽤 좋은 사람이었지만, 안쉘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부관으로 두고 있는 야비한 저놈 때문이었다.
‘왜 여기에……?’
안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미행했다. 왜 이런 시골에, 그것도 엔저가 좌천된 곳에 상급 군인이 온 것일까? 설마 암살? 습격?
아니, 그렇다기에 안토니오는 너무 존재감이 컸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안쉘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고정하고 휴대전화를 들어 익숙하게 엔저의 전화번호를 찍었다. 이건 엔저의 군용 번호가 아닌 개인 번호였다. 군용은 언제 해킹당할지 모르니 사적으로 이용하는 휴대전화가 더 안전했다.
- 뚜르르르, 뚜르르르.
기본 통화음이 이어졌다. 두 사람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던 안쉘이 지나가는 사람들 기척에 제 기척을 숨겼다.
다행히 두 사람은 아까 안쉘이 꼬맹이와 나눈 대화가 꽤 시끄러웠을 텐데도 안쉘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확인해 보니 역시 안토니오 중령이 맞았다.
- 왜.
여보세요, 라고 한마디라도 하면 뒈지는 듯한 스토커 상관이 전화를 받았다. 안쉘은 두 사람 쪽을 쳐다보며 지금 상황에 대해 보고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엔저의 숨소리가 좀 거칠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물소리도 들렸다.
‘이 양반 뭐 하고 있는 거야?’
“대령님, 지금 안토니오 중령을 시내에서 발견했습니다. 지금 미행중이며, …근데 지금 뭐하십니까?”
선배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미친 상관이 대답했다.
- 자위.
안쉘은 감히 상관의 전화를 멋대로 먼저 끊어 버렸다.
‘이런 미친.’
안쉘은 엔저의 보좌관으로 구르면서 여러 꼬락서니를 보고 듣고 겪었다. 엔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욕망은 대부분 엔저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엔저에게 직접 접근하지 못하고 대부분 함정을 파 두거나, 보좌관인 안쉘을 통해 그들의 욕망을 표출하곤 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뜬 안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토니오 중령의 옆에 있는 쥐새끼같이 생긴 놈은 타미 돈 소위였다. 군부에서 비열하기 짝이 없는 종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타미를 보좌관으로 둔 안토니오의 평판도 좋을 리 없었다.
안토니오 자체는 듬직하고 충성심이 강한 군인이었는데 어쩌다 저런 보좌관을 들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내칠 수 있음에도 내치지 않는 것은 모두 안토니오의 선택이었고, 그로 인한 평판 또한 그의 책임이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쉘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대충 눈치챘다.
비공식적으로 접근하고 싶은 인물이 과연 누구일까. 뻔하지, 바로 영웅 엔저 맥과이어였다. 그렇다면 엔저를 원하는 그들의 요구는 타당할까. 물론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공식적으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부탁하기 위해 이렇게 쥐새끼처럼 몰래 엔저에게 접근하려는 것이다.
조용히 두 사람의 기색을 살피며 따라가던 안쉘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주민들 덕분에 곤욕을 치렀다.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골목길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 안쉘이 조심스럽게 벽에 붙었다. 그는 살짝 고개만 뻗어 골목길 내부를 확인하고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들킨 것이다. 두 사람도 나름 베테랑 군인이었고, 안쉘은 미행에 서투른 편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안쉘 리 소위?”
철컥-.
안쉘이 골목길로 완전히 들어가자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안쉘은 자신이 이런 초보 같은 덫에 걸린 사실에 회의를 느끼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등을 돌리자 중년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투박한 군복을 입은 그는 그놈의 수염 좀 어떻게 할 수 없냐고 쏘아붙이고 싶을 정도로 지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중위입니다.”
“언제 승진했지?”
“엔저 대령님께서 승진하셨을 때 함께 했죠.”
안쉘 리의 평판은 군 내부에서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일각에선 엔저 맥과이어의 옆에 들러붙어 단물이나 쪽쪽 빨아 먹는단 평이 있었지만 안쉘 입장에선 모두 개소리였다. 그 단물 너나 처먹으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안쉘은 엔저의 곁에서 정말 열심히 굴렀다. 휴일도 반납하며 구르다 보니 어지간한 일에 놀라지 않을 강심장이 되어 있었다.
안쉘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등을 돌렸다. 총이 무서웠던 것은 아니다. 안쉘의 능력은 방탄유리보다 두꺼운 결계를 소환하는 것이니까. 총은 안쉘에게 가장 방어하기 쉬운 무기 중 하나였다.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막심가의 개, 안토니오는 알시타 막심을 추종하던 이들 중 한 명으로, 원래 평화를 굉장히 사랑하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주인을 잃고 복수에 불타올라, 단테 막심의 뜻을 누구보다 지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안쉘은 기분이 묘했다.
“잘됐군. 기지를 찾을 수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었거든.”
“??”
“엔저 맥과이어 대령님을 뵙고 싶다.”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까?”
안쉘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엔저의 대부분 스케줄은 모두 보좌관인 안쉘이 관리하는 중이므로, 그가 모르는 상관의 약속이란 없었다.
“비공식적인 일이라서, 지금 보좌관을 통해 연락하면 되겠군.”
안토니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안쉘은 뜸을 들이다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젠장. 보고는 해 놓은 상태이긴 한데, 이 빌어먹을 양반이 선배를 몰래 관음하며 하는 짓을 빨리 끝냈으면 하고 빌었다.
“…비공식?”
안쉘은 엔저의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그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안토니오 중령은 대통령과 가까운, 군 내부에서 꽤 유명한 사내다. 그런 그가 이런 곳까지 비공식적으로 엔저에게 만남을 청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전쟁입니까?”
“그래.”
“씨발!”
안쉘은 비명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보다 계급이 한참 높은 안토니오의 앞에서 욕을 내뱉고, 멱살을 붙잡고 싶은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선거 기간에 전쟁은 금지되어 있을 텐데요!”
“북쪽 인어들이 먼저 덤벼들었다.”
“웃기는 소리!”
그 소리는 아직 군은 북쪽 인어들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엔저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처절하게 패배했다는 소리였다.
안쉘이 엔저의 보좌관을 하면서 신물이 나도록 들은 소리이기도 했다.
“이번 한 번만 전투에 참전하면…….”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으니…….”
그들이 엔저 맥과이어에게 말하는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골자는 똑같았다. 힘에 겨우니 도와 달라는 말이었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정식으로 엔저 대령님께 방문 신청을 받고 오십시오.”
안쉘은 딱딱하게 말하면서도 긴장했는지 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안쉘 같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정직한 이를 더 좋아했다. 알시타 막심같은 이를.
“말이 통하지 않는군. 보좌관 주제에.”
“지금은 대통령 선거 후보입니다.”
원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세울 게 하나 생겼다.
안토니오는 코웃음을 치며 총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군에서 엔저의 보좌관인 안쉘의 능력을 모르는 이를 찾는 게 더 힘들었다. 머릿속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안쉘은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분명 안토니오 중령의 능력은.
콰앙!
안젤라와 비슷한 괴력. 안쉘이 눈앞으로 돌진하는 안토니오 중령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결계를 펼쳤다. 손짓하는 대로 아래에서부터 치솟은 유리 같은 결계는 안토니오의 주먹을 한 번 정도는 제대로 막아 주었다.
“…콜록.”
하지만 어찌나 힘이 강하고 묵직한지 안쉘이 충격에 기침을 내뱉었다.
쾅-!
그가 결계를 주먹으로 칠 때마다 안쉘의 앞을 막아 주는 견고한 방어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얼마 못 버티겠구나.’
안쉘은 뒤로 물러나며 그 뒤로 수십 장의 결계를 펼쳤다.
탕-!
안쉘은 다급하게 옆쪽으로 손을 벌렸다. 아슬아슬하게 총탄을 막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안토니오 중령의 옆에 쥐새끼처럼 붙어 있던 사내가 총을 들고 기습한 것이다.
어쩔까… 혼자 안토니오 중령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옆에 쥐새끼까지 있으니.
“엔저 대령님께 연락해라.”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영웅 엔저 맥과이어는 지금 망원경을 들고 사랑스러운 선배님을 핥느라 매우 바쁜 몸이었다. 거기다가 이곳은 능력을 사용하기 좋은 곳이 아니다.
이곳은 시골의 구석진 골목길이었고, 밖에는 민간인들이 지나다녔다. 그들은 대부분 노인이며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마른 입술을 연신 핥으며 주춤거리고 있을 때, 안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띠리링.
긴장감이 도는 와중에 우렁차게 울리는 휴대전화 때문에 민망한 기분이 든 안쉘이 욕설을 내뱉었다. 결계를 거두지 않은 채 빌어먹을 발신인을 확인했다.
엔저 맥과이어였다.
그래… 즐거운 자기 위로 타임은 끝났나 보지, 지금 부하는 곤란에 빠졌는데.
안쉘이 천천히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 데리고 와.
그리고 다시 뚝 하고 끊겼다. 안쉘은 머리가 아픈 듯 눈을 찌푸렸다.
놀랍게도 엔저가 앉아 있는 곳은 헤리엇이 코코아를 마시면서 책도 읽고 사색을 즐기는 작은 카페였다. 엔저는 매우 온순하게 헤리엇의 앞에 앉아 있었는데, 안토니오는 그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사복을 입은 엔저의 겉모습만큼은 눈이 부셨다. 그는 딱딱해 보이는 제복을 벗고, 부드러운 카키색의 얇은 카디건에 검은색 티셔츠, 색이 잘빠진 청바지를 입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늘어져 엔저의 하얀 얼굴을 덮고 있었다.
헤리엇이 눈앞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홍빛 꽃이 엔저의 눈가에 잔뜩 퍼졌다.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 눈동자가 즐거운 듯 반쯤 사라져 있었다.
물론 그의 모든 것은 앞에 있는 헤리엇만을 위한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늘 살벌할 만큼 딱딱하고 차가운 엔저의 모습만 봐 왔으니 적응이 안 되는 것도 당연했다.
“왜 여기 계십니까?”
“들켰거든.”
엔저가 가볍게 대답했다. 저 멀리 있는 폐건물에 9층에 있는 엔저를 헤리엇은 잘도 눈치챘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보고 있기에 재미있어 처음부터 그대로 놔뒀더니 엔저가 보고 싶어졌다. 결국 헤리엇은 귀여운 후배가 있는 곳을 향해 작게 미소를 지어 주면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리 온.〕
그러자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엔저가 도착했다. 안쉘이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다.
“…….”
‘이 새끼…….’
바르고 고운 말만 쓰고 싶은데 안쉘은 도저히 예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맥과이어 대령님.”
안토니오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누가 봐도 엔저가 한참 어리지만,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 그의 계급은 중령이었고, 엔저는 대령이었다. 헤리엇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건인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지 곤란한 미소를 작게 지으며 코코아가 든 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는 이 더운 여름에도 뜨거운 코코아를 먹었다. 얼굴에 잠시 스치는 행복감을 보건대, 헤리엇은 이 긴박한 상황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용건은?”
엔저 맥과이어는 가볍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숨죽이며 엔저를 보고 있던 쥐새끼 같은 사내의 시선이 번뜩였다. 안토니오는 지저분하게 기른 수염을 연신 쓰다듬었다.
“북쪽 인어들이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엔저가 눈을 깜박이며 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헤리엇은 그 얼굴이 못내 귀여워 다시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물론 공식적인 것은 아닙니다. 인어들이 군함 45척을 공격해 수장시켰습니다.”
안토니오가 재빨리 덧붙였다. 한마디로 지금 북쪽 바다를 제압하기에 힘이 부족하니 비공식적으로 도와달라는 소리였다.
엔저가 대답 없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헤리엇을 힐끔 쳐다보는 모양이 안쉘은 지금 엔저가 욕을 삼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 선배 앞에선 내숭 부리느라 성질을 죽이고 있지만, 엔저는 결코 입이 고운 사람이 아니었다. 발령 첫날 그에게 ‘병신 새끼야?’라는 말을 들은 안쉘은 기가 막혔다.
“…왜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지.”
겨우 성질을 죽인 엔저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토니오를 빤히 응시했다.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안토니오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쥐새끼 같은 타미가 엔저에게 다가갔다.
“대통령 각하께서 이것을…….”
“좆 같은 새끼야,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각하의 은밀한 임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엔저는 헤리엇이 들리지 않도록 작게 지껄였지만, 타미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붉은색 눈동자가 타오를 정도로 안토니오와 타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리엇은 코코아를 내려놓고 하얀색 눈동자로 엔저와 안쉘을 번갈아 쳐다봤다. 타미가 엔저에게 건넨 것은 편지였다. 단테 막심의 편지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것이 정답인 듯 엔저의 고운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편지를 전부 읽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
엔저는 잠시 기가 막힌 듯, 그러다가도 웃겨 죽겠다는 듯 몇 번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쉘도 이미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안쉘은 눈치를 보며 덜덜 떨었고, 안토니오는 타미를 쳐다봤다. 저 편지가 대체 뭔지 궁금해하는 시선이었다. 아마 실질적인 대통령의 심부름꾼은 저 쥐새끼 같은 놈인 것 같았다.
안쉘이 방심한 사이 엔저가 갑자기 일어나 타미의 목을 조르고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도 민간인이 많은 이곳에서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는지 그로서는 참 잘도 참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자신의 부관이 폭행당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 듬직한 상관이었기에 일어나서 엔저에게 돌진했다. 안쉘은 그의 능력이 괴력임을 상기하고 엔저의 앞으로 결계를 펼치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헤리엇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게 빨랐다. 앉은 그대로 헤리엇이 지팡이를 약하게 흔들어 안토니오의 허벅지를 툭 쳤다. 돌진하던 안토니오가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자 헤리엇이 팔꿈치로 그의 턱을 강하게 내려쳤다.
안토니오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었고 헤리엇은 정신을 못 차리는 안토니오의 등을 성치 않은 왼쪽 무릎으로 짓눌렀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꼼짝달싹 못 하고 바닥에 붙었다.
“엔저는 폭력을 쓰지 않는 착한 아이니까, 조금만 지켜봐 주면 안 될까요?”
헤리엇이 곤란한 듯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작게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미친… 타미가 지금 턱이 무너지도록 맞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안쉘은 총을 꺼내며 주변을 돌아봤다. 상황은 심각했다. 헤리엇이 억누르고 있지만, 안토니오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괴력을 가진 능력자였다.
지금은 턱을 후려 맞은 반동으로 지금은 뇌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헤리엇의 솜씨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예리했다. 당분간은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괴력 능력자이기도 한 안토니오니까 저 정도로 끝났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턱이 돌아가다 못해 떨어져 나갔을지도 몰랐다. 마치 자신이 다 아픈 것 같아 안쉘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턱을 매만졌다.
헤리엇의 능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헤리엇이 하얗게 바랜 눈동자로 엔저를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의 엔저 맥과이어는 정말 폭력을 쓰지 않는 착한 아이인 것 같아서, 사람들이 점점 모여드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안쉘은 헤리엇에게 질문했다.
“누가 착하다고요?”
“엔저.”
헤리엇이 약간 둔감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쉘은 좀 기가 막혔다. 경계가 모호한 하얀색 눈동자에는 오직 순수한 의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엔저는 아주 여린 아이니까, 지금도 많이 아파할 거야.”
안토니오가 조금 바르작거리자, 헤리엇은 무릎에 힘을 주면서 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친…….’
안쉘은 튀어나오려는 욕을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헤리엇의 하얀 속눈썹이 아래로 한번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느린 동작 하나하나가 그림 속 풍경처럼 인위적으로 보였다.
안쉘은 어쩌다 자신이 저런 놈들 사이에 꼈을까 한탄하며 눈물을 삼켰다. 발을 빼기엔 늦어도 너무 늦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안쉘은 총을 들었다. 그리고 안토니오의 머리를 향해 한발 갈겼다. 솔직히 이건 화풀이였다.
이능력 결계는 만능이 아니다.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 이따금 시행자에게도 충격이 갔는데 방금 안토니오와 싸우면서 안쉘은 내장에 얼얼한 감각을 맛봤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안토니오의 얼굴이 확 꺾였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엔저 맥과이어가 겨우 진정하고 타미의 멱살을 놔줬을 때, 그는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타미가 턱 밑까지 피를 줄줄 흘리며 결국 혼절해 버리자, 엔저는 일말의 동정심조차 느끼지 않은 얼굴로 상체를 들었다.
쓰러진 타미의 입에서 게거품이 일어났다. 다행히 죽진 않았는지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올 때마다 움찔움찔 몸이 경련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쉘은 안면근육을 꿈틀거리며 생각했다.
저게 여린 거면 이 세상은 연두부투성이다, 염병.
안쉘은 총을 재장전하며 타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부르르 경련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안쉘은 우울한 낯으로 엔저를 올려다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지금까지 어둡게 번뜩이고 있었다. 아니, 대체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엔저 맥과이어가 저런 반응을 보이나 궁금증이 일었다.
“무슨 편지였습니까?”
“…….”
“제가 보겠습니다.”
딱히 말리지 않았기에 안쉘은 손을 뻗어 그가 던진 편지를 주워 빠르게 훑었다. 역시 대통령이 보낸 편지가 맞았다. 그리고 예상 가능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북쪽 인어들을 쓸어 버려야 한다는 대통령의 야심 찬 포부가 가득 담긴 편지였다. 대통령은 바다에서 인어들을 모조리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안쉘도 이 포부에 감명받아 동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문단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모리어티. …모리어티?’
그것은 조금 생소한 단어였다. 안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물론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진 않았다.
[네 힘을 보여 줘라, 모리어티.]
아마 엔저가 분노한 부분이 이것 같은데 안쉘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여기는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기지로 돌아가죠.”
안쉘이 조용히 권했으나 엔저는 대답하지 않고 전자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전자 담배의 전원을 켜는 그 순간까지 엔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전자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뿜어내는 게 어디 잡지 화보에나 나올 법한 근사한 장면이었지만, 그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너무 몰리고 있었다. 안쉘이 다시 그를 불렀다.
“대령님.”
“선배, 그 사람은 이제 그만 놔주세요.”
초조하게 자신을 부르는 안쉘에게 대답하는 대신 엔저는 안토니오를 제압하고 있는 헤리엇에게 말을 걸었다.
헤리엇은 작게 미소 지은 표정 그대로 안토니오의 등을 제압하고 있던 무릎을 풀어 주었다. 절뚝거리면서 걷는 헤리엇을 묘한 시선으로 보던 안토니오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지만, 안토니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가늠할 수 없는 헤리엇과 명실상부 최강의 능력자이기도 한 엔저에게 단신으로 덤빌 용기는 없었나 보다.
대신 그는 타미를 어깨에 짊어지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안쉘을 노려봤다.
‘아, 왜 저요? 그래, 여기서 제일 만만한 게 나지!’
안쉘은 욕을 삼켰다. 안토니오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요.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민 것을.”
“…….”
그걸 또 왜 나한테 말하냐고.
안쉘은 너무 기가 막혀서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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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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