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사망 플래그
다음 날 아침, 졸린 듯 하품을 쩍쩍 해 대면서 안젤라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덧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연 안젤라는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놀라서 다시 문을 닫았다. 문 앞에서 헛기침한 뒤 문을 똑똑 두들기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발랄한 안젤라의 목소리에 반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얗게 질린 안쉘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하얗게 불태워 재가 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사람이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안젤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쉘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일찍 와서 참외나 좀 깎아 먹으려고 했더니, 더 빨리 온 사람이 있었네.’
안쉘은 안젤라가 앞에서 얼쩡거려도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뭔 일 있었어요?”
“…….”
“중-위-님-! 무슨 일 있으셨냐구요~.”
탁탁, 탁자까지 두들기면서 불러 봐도 영 움직이질 않았다. 왜 이러나 당황스러운 와중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제 같이 출근하는 모습이 익숙해진 헤리엇과 엔저였다. 엔저는 평소처럼 헤리엇의 시중을 들면서 들어왔다. 절뚝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온 헤리엇은 안젤라에게 작게 미소 지어 주며 손을 들었다.
“좋은 아침.”
“네! 대장님, 안녕하세요.”
안젤라가 발랄하게 말했다. 하지만 안쉘은 헤리엇과 엔저가 들어와도 반응이 없었다.
‘이 사람 왜 이래요?’
헤리엇에게 눈짓으로 물어보았지만, 그는 안젤라의 눈짓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중위님이 아니면 받아 주는 이가 없구나.’
안젤라가 초조하게 안쉘의 앞을 탁탁 쳤다.
“중위님이 이상해요.”
“…음.”
헤리엇은 지팡이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잠시 천장을 응시했다.
그때, 안쉘의 어깨가 움찔했다. 헤리엇이 두리번거리며 리모컨을 찾는 중에 리언이 사무실로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 오늘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사무실 안은 오늘 하루 딱히 특별하게 다른 건 없었다. 사람들이 다 모이면 칼같이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말해야 하는 안쉘만이 정신을 못 차릴 뿐이었다.
“어제 방송 때문에 그래?”
“방송이요?”
“응… 생방송.”
그제야 안쉘의 어깨가 펄쩍 뛰었다. 헤리엇은 방송의 아주 끝부분만 봤기 때문에 앞에 어떤 질의문답이 이뤄졌는지 몰랐다. 그건 엔저도 마찬가지였다.
깔끔한 손놀림으로 하늘 같은 선배의 소중한 외투를 조심스럽게 든 엔저는 옷에 구김 하나 잡히지 않게 칼같이 정리하여 옷걸이에 걸어 놨다. 그리고 헤리엇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엔저는 무슨 일인지 묻진 않았지만, 대략 짐작 간다는 심드렁한 얼굴로 헤리엇에게 TV 리모컨을 받았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느리게 켜지면서 소리가 먼저 나왔다.
“딱 맞췄군.”
엔저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한쪽 팔을 헤리엇의 등 뒤로 돌려 그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감히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린 배은망덕한 짓을 하느라 엔저의 심장은 다른 의미로 쿵덕거렸지만, 헤리엇은 딱히 지적하지도 그 손을 쳐 내지도 않았다.
TV 화면에는 굳어서 창백해진 ‘안쉘’의 모습이 보였다.
“어? 중위님?”
어제 방송을 보지 못했는지 안젤라가 입을 열었다.
‘왜 저기에 유난히 더 촌스러운 몰골을 한 중위님이 계시지?’
안젤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안쉘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안쉘에게는 아주 몹쓸 고질병이 하나 있었다. 그건 아주 가끔 튀어나오는 병으로, 지금까지 그리 많이 겪어 본 것은 아니었다.
엘리키스호가 침몰할 당시, 그는 배 안에 부모님이 타고 있다고 필사적으로 호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매우 어눌하고, 엉터리 같은 말이었다.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 혹은 커다란 긴장과 흥분을 느끼면 말이 허투루 튀어나왔다. 그런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안쉘은 한 달 가까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군에서 처음으로 발령이 났을 때였다. 안쉘은 스물다섯 살 때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엘리트급 아카데미가 아닌 이상 일반인치고는 꽤 빠르게 졸업한 셈이다.
그리고 약 2년 동안 죽어라 군함 밑바닥에서 굴렀다. 그 무거운 포탄 스무 개를 한 번에 날라야 했고, 능력으로 배 전체를 감싸다가 탈진해 죽을 뻔했다. 거센 파도에 물이라도 차면 군함 간판을 쓸고 닦는 것도 따까리인 안쉘이 해야만 했다. 그렇게 딱 2년을 구르니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엔저 부대라니…….’
군에 들어오자마자 초고속으로 승진한 엔저 맥과이어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가 가문의 낙하산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개가 날개 돋친 사자였다. 그의 검은 군함 ‘어메전트호’에 탑승하는 건 하급 군인들의 꿈과 이상이었다.
안쉘 리는 그런 엔저 맥과이어의 직속 부관으로 임명받았다. 물론 자신 앞에 일 년 동안 총 여섯 명의 부관이 바뀌었다는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부임 첫날 긴장해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문 앞에 섰다. 눈앞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웅이 될지도 모르는 사내가 있었다. 안쉘은 엔저의 사령관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고, 안쉘은 힘차게 문을 열며 인사했다. 다만 멀쩡한 말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을 뿐.
“하, 하십니까!!!”
너무 긴장한 탓인지 고질병이 돋고 말았다. 엔저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다가, 머저리 같은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염병 천병. 안쉘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 안녕, 그러니까 안녕…….”
뒤에 하십니까를 붙여야 하는데 입이 꼬여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쉘은 그대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모습에 엔저가 처음으로 반응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엔저는 안쉘을 꽤 신뢰하고 있다. 그가 비상하게 눈치가 빠른 것도 엔저는 꽤 마음에 들어 했다.
“병신 새끼야?”
“…….”
참고로 젊은 날의 엔저 맥과이어는 정말 상종도 못할 쓰레기였다. 그는 정열적인 붉은 눈동자를 가졌지만 거의 모든 일에 무기질적이었고, 차가웠으며 관심이 없었다.
아무튼, 안쉘은 자신이 긴장하면 혀가 굳고 헛소리가 튀어나오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평소에 더욱 마음을 다잡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지금까지 몇 번의 고비가 더 찾아오긴 했지만,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엔저 맥과이어의 미친 짓에서 겨우 빠져나왔더니 매복해 있던 기자들과 맞닥뜨렸다. 심지어 그들은 안쉘도 아는 유명한 지방 방송 작가들이었다. 꽤 매력적인 입술을 가진 남자 아나운서가 안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신 안쉘 리 후보자님이시죠?”
“맞기는… 한데…….”
그들이 가진 마이크와 카메라에 붙은 로고는 안쉘도 확실히 아는 것이었다. 지역 방송이지만 꽤 규모가 커서 가끔 전국적으로도 송출하는 곳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TV에 출연하는 것은 안쉘에게 무척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거부했지만, 작가부터 시작해 PD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아주 간단한 질문에 답해 주시면 됩니다. 세상은 당신을 궁금해하고 있어요.”
매부리코를 가진 남자 작가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안쉘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냉정하게 그들을 쳐 냈다.
“약속을 잡고 와 주십시오.”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안쉘 후보자님, 사전 약속 없이 이렇게 찾아온 무례는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혁신을 바라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이 방송으로 안쉘 후보자님에게 마음이 돌아설 국민들이 있을 겁니다.”
매우 아름다운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아나운서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말발도 좋았다. 당차게 말하는 모습이 옆에 있는 작가보다 훨씬 유능해 보였다.
안쉘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뜸을 들였다. 하긴 안쉘은 지금 더운물 찬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한 표라도 더 얻어야 하는 몸이었고,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엔저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안쉘은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안쉘 리는 정말로, 정말로 엔저 맥과이어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아나운서가 손짓하더니, 아주 향긋한 국화차를 종이컵에 따라 주었다. 따듯한 보온병에 가득 준비해 뒀나 본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더운 여름이었다.
보기만 해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화차에 손이 가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안쉘은 어느새 그들이 준비한 의자에 착석해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TV 화면 속 안쉘은 누가 봐도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헤리엇이 안타까운 마음에 “저런…….” 하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 안쉘 리 후보자님, 이번에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시는데 그 배후에 우리들의 영웅 엔저 맥과이어 대령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 맞습니다.
긴장한 것과 달리 목소리는 꽤 차분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실제 엔저는 안쉘을 후원하고 있다고 직접 밝힌 바가 있었다. 순탄한 질문, 쉽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능숙하게 분위기를 잡은 아나운서는 바로 꽤 매서운 질문을 던졌다.
- 만약 대통령으로 선출되신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여기서 뭐라고 대답했을까.
안젤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TV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안쉘이 저런 인터뷰를 생방송으로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안쉘의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 박살 낼 겁니다.
아주 평온하게 그렇게 말했다. 안젤라가 입을 딱 벌렸고 리언이 들고 있던 외투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TV 속의 안쉘이 신음을 흘렸다. 사실 그는 정확히 ‘대통령의 체제를 박살 내고 전쟁을 종결 낼 것입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 …맙소사, 아주 자극적인 도발이네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나운서는 놀란 눈을 했다가 떡밥을 문 물고기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논란이 있는 편이 방송사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죽을 맛이겠지만.
- 누구를 박살 내신단 말씀이시죠?
- 대통령, 대통령의…….
물론 저 때의 안쉘은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깨닫고 얼른 정정하려고 입을 연 것이지만, 또 다른 오해를 낳고 말았다.
아나운서는 기절할 것처럼 소리쳤다.
- 대통령을 박살 내신다는 소리신가요?! 단테 막심 대통령을요!?
이건 정말 특종에 대박이었다. 아나운서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단테 막심은 20년 동안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세간에는 전쟁을 종결시키고 바다를 지상에 선물해 주는 멋진 지배자라고 하지만, 무서운 독재자라는 말도 어렴풋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 대통령을 박살 내겠다고 한 30대 후보라니, 목숨이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았다.
과연 엔저 맥과이어가 밀어주는 사내인가.
아나운서가 침을 삼키고, 또 질문을 던졌다.
- 대통령을 박살 낸다는 도발을 하셨는데, 그럼 가장 먼저 바꿔야 하는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아뇨, 잠시만요, 그게 아니라 체제… 대통령의 체제를 박살 내고.
지금 생각해도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남이 보면 자신은 아주 단테 막심에게 온갖 도발이란 도발은 다 하고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 맙소사!
아나운서가 정말 대박을 잡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TV 화면 속의 안쉘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안젤라도 웃지 못하고 입술만 씰룩거렸다.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 말은 거의 유언이나 남겨 두라는 뉘앙스였다. 단테 막심에게 저렇게까지 도발하는 젊은이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패기가 대단한 걸지도 몰랐다.
물론 안쉘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TV 속 안쉘이 눈물을 또르륵 흘리면서 나직하게 읊조렸다.
- 그것이… 다툼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이미 온갖 도발은 다 해 놓고 지껄이는 말이라니.
그렇게 인터뷰가 종료되었다. 지금은 재방송으로 전국에 퍼져나가는 방송일 것이다.
‘아침 방송이 저 모양인데 저녁쯤 되면 어떻게 될까…….’
안쉘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죽고 싶다.”
쪽팔려서.
* * *
탁, 탁, 탁-.
박자감 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하지만 적막이 가득한 방 안에서 울려 퍼지는 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책상 위에 있는 작은 태블릿에서 새어 나왔는데, 화면 가득 2대8 머리를 가진 촌스러운 남자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 대통령의 체제를 박살 내고…….
주름진 얼굴로 인자하게 웃으며 영상을 감상하는 이는 현 대통령 단테 막심이었다. 그는 어떤 애송이가 겁 없이 자신을 도발하는 인터뷰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보는 중이었다.
그는 매우 온화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긴장을 푸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곤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어 본 이들은, 단테 막심이 얼마나 잔악무도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직을 연임했고 그건 이번 선거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기르던 개에게 물렸다고 해야 할지, 아끼던 개 한 마리가 탈출해 주인을 위협한답시고 웃기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탁-, 탁-.
그의 주름진 손가락이 몇 번이나 책상을 두들겼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리듬이 있었지만, 무미건조했다.
그의 앞에는 델타 막심이 서 있었는데, 앉아 있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고 싶을 정도로 몰골이 처참했다. 델타의 얼굴은 상처로 가득했고 한쪽 귀에는 거즈를 대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붕대로 감은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대통령은 다시 안쉘 리의 인터뷰를 되감기 했다. 재생을 누르자 다시 안쉘의 목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 박살 내겠습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안쉘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던 단테가 주름진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한쪽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들려 있었는데, 하얗게 재가 되어 툭- 하고 책상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델타는 귀가 아픈 모양인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버러지 같던 놈이 어떻게 이런 용기를 냈지.”
“원래 그런 놈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백부의 말에 델타가 입을 열었다. 아니지, 대통령은 고개를 저으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차오르자 델타의 표정이 굳었다.
델타는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는 보고했지만, 전부를 말하진 않았다.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 ‘혹시나’ 하는 불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델타는 단테가 보낸 ‘그’ 시골에 가서 엔저에게 죽을 뻔했다. 물론 시골에 가기 전 백부는 괜찮겠느냐고 걱정해 주었고 델타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지만, 분명 말리려면 충분히 말릴 수 있었다.
실제로 델타가 크게 다쳐 돌아왔을 때 언뜻 비친 백부의 표정에서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니 의외군.’이라는 생각이 읽혔다. 실제로 단테는 델타의 생존을 보며 엔저의 충성심을 가늠하고 저울질했다.
“그 녀석은 제 분수를 아는 놈이었어, 그러니 그 애의 곁에 그렇게 오래 구를 수 있었지.”
대통령은 조카보다 더 친근한 투로 엔저를 불렀다. 안쉘 리의 후견인이 엔저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테는 아직 엔저를 믿고 있는 눈치였다. 델타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진통제와 소염제를 한 알씩 까서 입에 넣었다.
단테는 제 앞에서 벌벌 떨면서 하얗게 얼굴을 물들이던 안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담이 있는 놈 같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조심스러운 녀석이다.
그는 부모를 죽인 인어를 앞에 두고도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움직였었다. 그런 녀석들은 대부분 겁이 많았다.
“엔저 대령이… 백부님을 밀어내려는 속셈이 아닐까요?”
계속 침묵을 지키던 델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직 그는 엔저 맥과이어가 안쉘 리를 위해 단테를 밀어내기 위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단테는 조카의 말에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우습고 어리석은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엔저… 그 애가 나를 배신한다고?”
“…그럴 수도 있죠.”
“오… 그건 있을 수 없단다, 얘야.”
단테는 고개를 저으면서 부정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단테는 절대 엔저가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신뢰는 무엇일까.
델타는 침을 삼켰다.
“길들인 개는 주인을 물지 않아.”
대통령 단테 막심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길들인 개? 델타가 속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단테 막심이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엔저가 나를 배신하다니,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안쉘 리를 후원하는 것도 엔저 맥과이어고, 대통령 선거에 재를 뿌리고 있는 것도 엔저 맥과이어지만 대통령은 무슨 꿍꿍이인지 아주 인자하게 웃었다. 마치 손자가 재롱떠는 것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같은 미소였다.
* * *
엔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던 안쉘은 겨우 이성이 돌아왔는지 엔저의 눈치를 살금살금 보기 시작했다. 엔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헤리엇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헤리엇은 꽤 즐거운 얼굴로 TV를 응시했다. 언제나 무기력하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얼굴이었다. 핥는 것처럼 그 얼굴을 한시도 빠트리지 않고 바라보던 엔저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 즈음 헤리엇의 시선이 TV가 아닌 안쉘을 향했다. 그의 하얀색 눈동자와 마주친 안쉘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헤리엇은 섣불리 움직인 안쉘을 지적하거나, 인터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실망할 수도 있었다. 저런 도발로 대통령이 움직이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확률이 높았으니까.
“안쉘.”
“네.”
“화면발 잘 받네.”
“…예.”
맥 빠질 정도로 평온한 감상을 내뱉은 그는 광고로 넘어간 TV 화면을 다른 채널로 바꿨다. 다른 채널의 뉴스에서도 안쉘의 이야기로 온통 시끄러웠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안쉘의 얼굴이 나왔다. 촌스러운 2대8 머리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 도수 높아 보이는 두꺼운 안경까지.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안쉘이 TV를 점령했다.
할 말은 그게 끝이었는지 헤리엇은 느긋하게 소파에 등까지 대고 편안하게 앉았다.
뉴스부터 시작해서 언론은 너 나 할 것 없이 안쉘의 도발을 자극적인 기사로 마구 써 내려가고 있었다.
국민들은 흥미진진하게 이번 사태를 주목하고 있었고, 욕하거나 응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들 중 누구도 안쉘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안쉘 자신도 절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 미친 계획을 포기하고 도망치지 않는 건 누구보다 그가 엔저 맥과이어를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TV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정말 안쉘이 화면발을 잘 받는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그의 옆에서 엔저는 감히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귀와 눈은 TV 안의 안쉘이 헛소리를 하든 말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정말 저런 사람을 믿고 따라도 되는 거겠지. 안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까지 무한으로 치솟던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엔저는 헤리엇의 어깨에 올라간 제 손을 꼼지락 움직이면서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중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파에 나란히 앉아, 느긋하게 TV를 시청하는 고귀한 선배님의 어깨에 불경하게도 손을 올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선배 어깨 위의 제 손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엔저가 별안간 몸을 움찔 떨었다. 선배가 어느새 고개를 돌려 엔저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동자의 경계를 알아보기 힘든 하얀 동공이 엔저를 향해 있었다.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비치는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붉은색 파동이 일었다. 빠져드는 것처럼 엔저가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빌어먹을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한 선배는 어제 자신의 아래에서 더러운 체액을 잔뜩 뒤집어썼었다.
“안쉘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엔저.”
“네.”
헤리엇에게 허락된 유일한 붉은색 입술이 열렸다. 엔저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선배의 어깨에 올라간 손은 그대로였다.
헤리엇은 엔저의 멍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귀여운 후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잠시 고개를 모로 돌리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잘했어.”
“네?”
안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갑작스럽게 든 고개 때문에 알이 두꺼운 안경이 얼굴에서 주륵 흘러내렸다. 엔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잘했다고.”
“…….”
“저녁이면 네 기사가 쏟아지겠지. 국민들은 이제 네 이름을 기억할 거야. 이름도 모르는 기호 2번이 아니라 안쉘 리, 현직 대통령에게 겁 없이 도발이나 해 대는 건방진 젊은 후보를.”
엔저가 말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는 어느새 안쉘이 아는 눈동자로 변했다. 차갑지만, 즐거워하는 것 같은 눈. 안쉘은 그가 저런 눈을 하면 상대방은 온전하지 못했던 것을 상기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졸렬한 늙은이를 끌어내리기엔 딱 좋은 도발이지.”
그의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가 잠시 붙었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