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위기(2권) (8/30)

07. 위기 

쏴아아아아-.

어제 그렇게 맑더니 오늘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헤리엇은 온몸이 노곤했다. 특히 어젯밤 엔저가 계속 만지작거린 가슴 부근은 욱신거렸다. 헤리엇이 노곤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자, 엔저가 제 어깨가 젖는 건 상관하지 않고 헤리엇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역시 내가 우산을 펴는 게…….”

헤리엇도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엔저의 우산 하나로 장정 두 사람이 빗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아닙니다, 선배.”

이런 걸로 감히 선배를 귀찮게 할 수 없다고 속삭이며 엔저가 근사하게 웃었다. 날이 갈수록 엔저는 성적 매력을 더해 갔다.

헤리엇이 곤란한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에서 보급받은 검은 우산은 매우 크고 견고했지만 가벼웠다.

‘꼴값 떨고 있네.’

‘꼴값들 떨고 있네요.’

두 사람을 뒤에서 지켜보는 안쉘과 안젤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앞에 서 있는 헤리엇과 엔저는 물론 그 뒤에 대기하는 안젤라와 안쉘까지 정식으로 군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리언은 마을행사로 참가하지 못했다. 본인은 아쉬워했지만, 안젤라는 지금 그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비가 와서 습도가 높은데 덥기까지 하니 짜증이 일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의 한쪽 어깨는 붉은 망토로 가려져 있었다. 더운 날씨를 더 덥게 만드는 군복은 많은 군인의 적이기도 했다.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드는군요.”

“불안한 기분이요?”

안젤라와 안쉘은 그새 많이 친해졌는지 나란히 서서 말을 주고받았다. 안젤라는 자연스럽게 안쉘의 우산 안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친한 오누이 사이라고 착각할 만큼 뒷모습이 닮아 있었다.

안쉘도 안젤라를 꽤 귀여워했다.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그녀 같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감이 좋거든요.”

“아, 음, 넹.”

안젤라는 썩 믿는 표정은 아니었다. 농담을 한 게 아닌 안쉘의 표정이 조금 더 나빠졌다.

안젤라는 제 어깨를 적셔 가면서도 헤리엇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고 있는 엔저의 닭살 행각을 뒤에서 지켜봤다. 그는 매우 기분 나쁜 스토커이면서 또 어느 때는 아주 근사한 신사 같기도 했다.

“설마 엔저 대령님이 대장을 저렇게 좋아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5년 동안 시골에 있으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헤리엇은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국민 영웅인 엔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엔 왠지 나사 하나가 빠진 듯 부족했다.

그리고 헤리엇은 군의 실험체이기도 했다. 아마 군은 전쟁이 끝나면 헤리엇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헤리엇을 쳐다보는 안젤라의 시선에 안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엔저 대령님은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습니다.”

“…와.”

그건 정말 의외였다.

“…죽이지 않아도 사람을 망가뜨리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시니까.”

취소다. 더 무서웠다.

안쉘은 비가 쏴아아 내리는 공터를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불길합니다.”

가늘게 뜬 안쉘의 눈동자에 저 멀리서 아주 비싸 보이는 외제차 한 대가 보였다. 네 사람이 나란히 군복을 입고 대기하게 만든 감시원이 분명했다.

원래 군용 차량을 이용해야 하건만, 군법 위반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제재를 가할 것 같진 않았다. 그나마 입김이 강한 엔저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고, 그런 엔저를 컨트롤할 수 있는 헤리엇은 멍한 사람처럼 노곤해 보였다.

결국 여기서 정신 차리고 상황을 정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소리.

안쉘은 우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저 차에 타고 있는 그는 지금 이곳에서 보기에 가장 껄끄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외제차가 기립해 있는 네 사람 앞에 천천히 멈추었다.

부드럽게 주차에 성공한 외제차의 운전석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콧수염이 아주 멋진 노인이었다. 그는 군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개인 비서까지 대동하고 아주 많이 잘났구나, 안쉘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욕을 내뱉었다.

검은색 우산을 펼친 노인이 뒷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우산을 받아든 사내는 우중충하고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넷을 차례로 응시했다. 특히 그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닿은 엔저에게 끈질기게 머물렀다.

사람을 앞에 두고도 엔저가 딱히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에 있던 안쉘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젊은 사내는 이제 갓 20대 초중반이 됐을 법한 외견을 가졌다. 그런 그가 대령이며 국민 영웅이기도 한 엔저 맥과이어의 마중을 받을 수 있다니, 참 우습고 놀랄 일이었다.

“델타 막심 소령님.”

“심심한 시골 마을이군. 백부님께서 왜 날 이곳으로 보냈는지 모르겠어.”

그는 단테 막심의 조카로 엔저와의 약혼 이야기가 오갔던 델타 막심이었다. 물론 엔저는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고 단테를 무시했지만 말이다.

“…그에게 절대 앤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됩니다.”

안쉘이 헤리엇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 되게 싫네요.”

뒤에서 안젤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앞서서 걷는 델타 막심은 엔저를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엔저에게만큼은 사근사근했다.

하지만 엔저의 온 신경은 오로지 헤리엇에게 향해 있었다. 결국, 그의 푸른 눈동자가 헤리엇을 향했다.

“…리 중위, 잠시 그와 할 얘기가 있으니 앞장서 주시겠어요?”

“…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뒤돌아본 안쉘이 엔저를 힐끔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헤리엇에게 우산을 받쳐 주느라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엔저에게 델타 막심이 다가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백부님께서 전화 받으라고 하세요.”

“…….”

“계속 피하고 계셨다면서요. 받으세요.”

엔저가 무심한 눈으로 델타를 쳐다봤다. 델타는 굴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우산을 들어 지팡이를 짚고 있는 헤리엇에게 씌어 주었다.

“그동안 제가 우산을 들고 있을 테니 받아 주세요.”

“…씨발.”

드물게 헤리엇 앞에서 욕설을 내뱉은 엔저가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엔저의 모습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헤리엇이 곤란한 듯 작게 웃었다.

델타 막심은 끈질기게 엔저의 모습을 시선으로 쫓았다. 등을 돌린 엔저는 전화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델타 막심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엔저의 잘 빠진 등을 응시했다.

“백부님께서 탐내실 만해. 아주 근사하고 멋진 사내야.”

속삭이는 목소리에 존대는 없었다. 헤리엇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왜 얼굴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일까 싶어서 볼을 만지작거렸다.

처음 겪는 묘한 술렁임에 헤리엇이 당황하고 있을 때 델타가 그를 돌아봤다. 델타 막심의 표정에 경멸이 어렸다.

“너지. 백부님께서 말한 불량품이.”

그는 아무래도 헤리엇이 무슨 실험을 받았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주 잘 아는 듯싶었다.

‘그건 아마 엔저도 모를 텐데…….’

헤리엇은 다시 곤란한 듯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 애를 설득시킬 수 있겠니?”

단테 막심의 걱정스러운 말에 델타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옛날부터 천사라느니 귀엽다느니 등등의 말을 듣고 자란 델타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 단테 막심은 조카인 델타 막심을 꽤 아꼈다. 나이 차이 나는 막냇동생이 낳은 아이에게 델타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 또한 단테였다.

그맘때쯤 단테는 손자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 매일 아들인 알시타와 실랑이를 벌였었다고, 아버지가 지나가듯 말했었다.

델타의 아버지이자 단테의 막냇동생은 심신이 유약한 사람이었다. 정치나 전쟁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예술가였다. 델타는 그런 아버지의 삶이 재미없다고 느꼈다.

그는 어찌 보면 단테의 아들인 알시타와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성질의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인 델타 역시 조용하고 한적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델타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테 막심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는 손자에 이어 아들을 잃었다. 그 후 어렸을 때부터 싹이 보이는 델타에게 단테가 사랑을 쏟아부은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델타는 의외로 아버지보다 백부인 단테를 더 닮아 갔다. 그는 권력을 좋아했고, 백부의 권위를 이용하는 걸 즐겼다.

그래서 델타보다 더 높은 직급의 사내들은 그와 마주하기를 어려워했다. 나이 차이가 얼마가 나든, 직급이 얼마나 높든 그들은 모두 델타의 망나니짓을 받아 주고 참아 주었다.

그건 아주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다. 백부의 힘을 등에 업고, 델타는 가지지 못하는 게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 가지지 못하는 게 생겼다.

‘엔저 맥과이어…….’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사내의 이름을 떠올리며 델타는 이를 갈았다.

처음에 델타는 TV와 잡지에 나오는 엔저의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당시 엔저의 직급은 소령이었는데, 그때에도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였다. 그를 모르는 국민이 없을 지경이었다.

2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끝내 줄지도 모르는 영웅에게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래 봤자 제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해야 하는 인간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델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백부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엔저 맥과이어를 실물로 본 적이 있었다. 대단하신 영웅 나리 얼굴이나 보자고 코웃음을 쳤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델타는 엔저의 외모에 빠져 버렸다.

빌어먹을 기자 놈들은 저 아름다운 피조물을 고작 그따위로밖에 찍을 줄 모르는 머저리들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띠고 델타를 힐끔 쳐다봤다. 그 속에는 어떤 관심도 열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엔저는 군인임에도 피부가 꽤 하얗고 입술은 요사스러울 정도로 붉었다. 그로 인해 옆에 있던 평범하게 생긴 보좌관이 오징어처럼 보일 정도였다.

장교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올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늘씬한 긴 다리로 걸어오는 엔저를 쳐다보며 델타는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그러나 엔저는 델타를 스쳐 지나가며 힐끔 쳐다본 것이 다였다. 키도 자신보다 훨씬 크고 모든 것이 다 완벽했다.

붉은색 눈동자와 푸른색 눈동자가 잠시 마주치는 그 짧은 찰나에, 델타는 욕심껏 엔저를 탐했다.

그의 능력은 맥과이어 가문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이었다. 그는 세상에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탐이 났다. 엔저 맥과이어가 너무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그는 이런 시골 마을에서 저 불량품 때문에 썩어 갈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더 밝고 아름다운 이와 함께 세계를 제패해야 했다. 사람들은 곧 엔저와 델타를 환호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비가 오는 허공을 응시하며 델타는 뒤를 돌았다. 생각보다 더 볼품없는 희멀건 사내를 보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바랜 사내는 절뚝거리면서도 잘도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감히 엔저 맥과이어에게 우산 시중을 들게 했다.

“…우웩.”

언젠가 단테가 한번 보여 준 헤리엇 알스터의 실험 사진과 영상에 델타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런 괴물이 저 엔저와 어울릴 리 없다. 엔저는 겉모습에 속고 있을 뿐이었다.

백부도 저 남자를 탐냈다. 역시 자신과 백부는 닮은 부분이 많았다.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자신의 아비와 그의 아들보다도 더.

저런 괴물을 엔저가 사랑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저런 것에 속은 엔저가 가여웠다. 델타는 자신이 엔저를 구해 줄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믿었다.

*  *  *

“저 사람 언제까지 여기 있어요?”

“…길면 일주일.”

“…미친, 저 일주일 동안 휴가 쓸게요.”

안젤라의 귀엽고 고운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안쉘은 잠시 움찔하고 놀랐지만 흠흠, 헛기침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진지하게 안젤라에게 말투에 대해 설교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갈지 고민했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입을 험하게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설교할 건지도 없고, 권력으로 찍어 누르기엔 내키지 않았다. 결국, 안쉘은 한숨을 쉬며 안젤라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수 없는 거 알잖아요.”

“왜 계속 우리 대장을 저렇게 기분 나쁘게 흘겨보는 걸까요?”

툴툴거리면서 안젤라가 팔짱을 끼었다. 이래저래 대장을 아끼는 좋은 부하였다.

안쉘은 안젤라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비 때문에 부스스한 머리에 정전기가 잔뜩 올라 버렸다. 안젤라는 안쉘의 손을 치우면서 다시 심술궂은 얼굴을 했다.

다리가 불편한 헤리엇이 이 비 오는 날 밖에 나와 고생하는 것도 싫은 눈치였다. 누가 보면 헤리엇이 걷지도 못하는 노인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헤리엇은 나름 군인이었고 보기와 달리 일반인 이상으로 체력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안쉘이 기억하기로 델타 막심이 예전에 엔저에게 집적거리다 옆에서 보는 남이 무안할 정도로 개무시를 당한 적이 있었다. 안쉘은 대통령의 조카인 델타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붙여 보는 게 어떠냐고 엔저에게 조언까지 했었다.

하지만 엔저는 마지막까지 델타 막심이라는 존재를 무시했다. 그 덕에 자존심이 높아 보이는 델타는 얼굴까지 붉어져 엔저를 노려보았었다.

다들 군부에는 낙하산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있었다. 그 대표 케이스가 델타 막심이었다. 대통령은 아들을 잃고 조카인 델타를 꽤 아꼈으니 말이다.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했지만, 아마 목표는 엔저 대령님이겠죠.”

안쉘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델타 막심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기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제발 이 기간이 조용하게 지나가기를 바랐다.

“아직은 막심가를 건들 수 없습니다.”

안쉘의 눈동자에 순간 증오가 어렸다. 안젤라는 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요?”

“…네.”

쏴아아아아아-.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에 둘의 목소리가 묻혔다. 이내 하늘에서 쿠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정말 이런 곳에서 지냈다고요?”

델타 막심은 충격받은 듯 안쉘에게서 받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나름 이곳의 군인들이 잘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이었다. 비록 폐건물을 이장님과 마을 주민들이 수리해 줬던 것이긴 해도.

똑똑-.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델타는 꽤 볼 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쉘은 소파에 묻은 물기를 얼른 닦으면서 호숫가에 있는 앤을 떠올렸다.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괜찮을까. 그래도 명색이 인어인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안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그 변태 인어를 떠올리느니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게 나았다.

“호텔을 잡아 놨습니다. 먼저 그곳으로 가겠습니까?”

“아니요, 할 얘기가 있으니 먼저 하고 가죠.”

역시 볼일은 그거였나.

안쉘은 능숙한 보좌관답게 따듯한 물과 차를 금방 준비했다. 옆에서 안젤라가 거들어 주긴 했지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녀는 힘을 쓰는 일은 잘했지만, 이런 섬세한 일에는 젬병이었다.

안쉘이 다섯 잔의 따듯한 차를 만드는 동안 안젤라는 끔찍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얼굴을 붉힌 안젤라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이 만든 작품을 싱크대에 버림으로써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델타 막심은 안쉘에게서 자연스럽게 따듯한 차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맞은편 소파에는 엔저와 헤리엇이 앉아 있었는데, 델타는 그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헤리엇 또한 안쉘에게서 따듯한 코코아를 건네받았다. 보좌관 인생 7년, 눈치 하나는 비상하게 빠른 안쉘이었다.

헤리엇은 자연스럽게 티스푼으로 코코아를 한 번 저은 다음 입에 넣고 쪽 빨았다. 제 앞에 티스푼이 놓여 있음에도 엔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헤리엇으로부터 티스푼을 받고, 제 찻잔에 넣어 정성스럽게 휘저었다.

얼굴을 보니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뿌듯한 일을 한 이의 얼굴이었다. 안쉘은 남쪽 인어들에게 항복을 받아 냈을 때도 엔저가 저런 표정을 하지는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델타는 제가 뭘 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안젤라와 안쉘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못 본 척 찻잔을 들었다.

전에 안쉘이 헤리엇에게 왜 티스푼을 같이 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말 기분 나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헤리엇이 뿌듯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안쉘이 설거지하기 힘들 테니 티스푼을 함께 쓰자고 했어.”

안쉘의 모든 손가락을 걸고 거짓말이 분명했지만 ‘엔저는 귀엽고 믿음직스러운 후배’라는 공식이 성립된 헤리엇은 모르는 눈치였다. 괜히 알려 줬다가 엔저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까 싶어 그곳에 있던 이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델타였다.

“군으로 복귀해 주세요, 엔저 대령님.”

“누구 마음대로?”

엔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엔저의 얼굴을 감상하던 델타가 헛기침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나른하게 반말을 중얼거린 엔저의 얼굴이 살짝 귀찮다는 듯 일그러졌다. 방금 있었던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과 같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군은 엔저가 필요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특히 선거를 앞둔 단테 막심은 더더욱 엔저가 필요했다.

“백부님에게 들어서 아실 것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대령님이 필요해요.”

지가 인간 대표도 아니면서 말은 잘하지.

안쉘은 속으로 빈정거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건 안젤라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

“…기밀을 꼭 여기서 말해야 합니까?”

엔저가 모른 척하자 델타가 초조해져서 말했다. 다시 만난 엔저는 정말 멋있고 아름다웠지만, 여전히 눈동자는 싸늘했다.

“곧 북쪽 인어들과 전쟁을 선포할 거예요.”

델타의 입에서 폭탄과도 같은 말이 떨어졌다. 그 말에 안쉘이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직 대통령 선거 전입니다! 어떻게 될 줄 알고 전쟁을 마음대로.”

갑작스럽게 끼어든 안쉘을 흘기며 델타의 눈썹이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그는 ‘기밀’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보좌관은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 눈이 있어도 못 본 척해야 했다. 하지만 안쉘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들을 이용해 인어와 전쟁을 시작하고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신을 이용한 대통령의 뻔뻔한 행태도 치가 떨리는데 그보다 더한 짓을 하겠다고?

죄 없는 인어들을 학살한 대통령이 다시 피해자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하다니. 속이 뒤집히는 일이었다.

“백부님의 이번 공약은, 북쪽 바다 인어들과의 전쟁이니까요.”

“그런… 걸.”

안쉘은 기가 막혔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 들어 먹히는지 알고 있었다. 곧 바닷길이 개방될 것이다. 사람들은 더 부유해지고, 바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했다.

하지만 북쪽에 인어들이 있다면 아무래도 바다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쉽게 사그라들진 않을 것이다. 인어들이 언제 인간을 공격할지 모를 테니까.

그리고 단테 막심은 그 군중 심리를 아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내였다. 특히 그의 능력은 정신지배였다. 군중에게 단테의 목소리는 그 어떤 말보다 뚜렷이 들릴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를 이끌고, 바다를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 어린 목소리가.

“난 충분히 그 늙은이의 같잖은 명령을 들어줬어. 이제 갑은 그 새끼가 아니야.”

엔저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헤리엇과 있을 땐 사근사근하게 말하더니 지금은 저열한 욕까지 함께 섞어 가며 말을 내뱉었다.

안쉘은 그 모습이 더 익숙했지만 헤리엇과 안젤라는 아닌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디 엔저는 결코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안쉘은 보좌관으로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엔저는 말수도 굉장히 없는 인간이었다. 이곳에 오고 헤리엇의 앞에 선 후에야 엔저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엔저 맥과이어가 그나마 사람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단호한 엔저의 말에 델타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절대로 넘어오지 않는 엔저를 핥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탐이 나 죽겠다는 욕심이 그의 얼굴에 잠시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델타의 시선이 잠시 엔저를 향했다가, 옆에 앉아 있는 헤리엇에게 향했다. 헤리엇은 조용히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저 인조 인어 때문에 그런 건가요?”

엔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쉘은 저 남자의 입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졌다. 델타 막심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이를 건드리려 하고 있었다.

헤리엇은 제 이야기임을 알았어도 그저 작게 웃으며 코코아에 마실 뿐이었다.

“그는 괴물이에요. 군에 분명 반사회적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요!!”

쾅!

델타가 탁자를 내려쳤다. 델타 막심의 능력은 증폭이었다. 전투에는 하등 쓸모가 없었지만 대통령인 단테에게는 매우 유용한 능력이었다.

찌잉, 하고 귓가가 울리는 느낌에 헤리엇이 살짝 고개를 털었다.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델타를 빤히 응시했다.

“헤리엇 님은 군에 아무런…….”

함께 지내다 보면 헤리엇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헤리엇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는 딱히 군에 분노하거나 복수심을 불태우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열정조차 가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헤리엇을 보면 이따금 비어 있는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인형이 아끼는 후배를 통해 마음이 생기고 있으니 참 놀랍고, 그 후배가 하필 저 엔저라니 통탄할 따름이었다.

“그런 꼴을 당했는데 반감이 생기지 않았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델타가 다시 소리쳤다. 그는 헤리엇의 실험 영상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구역질하며 꺼 버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실험 중에 쇼크사로 죽었을 일이었다. 살아남더라도 군에 복수하겠다고 속으로 칼을 갈고 있을 만했다.

하지만 헤리엇은 그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작게 웃었다. 결국 델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 괴물이…….”

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헤리엇은 딱히 화가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델타는 헤리엇이 당한 실험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건 엔저도 볼 수 없었던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이 만약 세간에 알려진다면 군 전체가 뒤집어질 정도로 반인륜적이고 끔찍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헤리엇은 딱히 그 실험에 분노하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아팠지만 견딜 만했고, 그 후로 연금이 꼬박꼬박 나와서 좋았다. 지금은 바다와 지상을 노닐 수 있으니 딱히 불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엔저는 손으로 턱을 괴며 비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델타와 헤리엇이 동시에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헤리엇은 엔저의 이런 악동 같은 얼굴은 처음 봐 신기했다.

“그 늙은이는 다음에 대통령직에 오르지 못할 거야.”

“…무슨 소리죠?”

“안쉘이 이번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거든.”

느슨하게 앉은 엔저가 노래 부르는 것처럼 속삭였다. 동시에 안젤라와 안쉘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특히 안쉘은 비명을 지를 것 같은 표정으로 하얗게 질렸다.

델타 또한 놀란 듯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마치 지독한 장난을 본 사람처럼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대선이 애들 장난도 아닌데 무슨 소리를…….”

안쉘은 인지도도 없었고 단지 엔저 맥과이어의 보좌관이라는 경력이 다였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스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국민들 대부분은 안쉘이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게다가 그는 대통령직에 오르기엔 나이가 너무 젊었다. 누가 그를 한 나라의 원수로 믿고 맡기겠는가. 이는 어리고 철없는 델타도 아는 사실이었다.

안쉘은 벌떡 일어났다가 그 자리에서 주춤거리며 엔저를 내려다봤다. 엔저는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안쉘을 쳐다봤다.

엔저가 미쳐서, 혹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델타에게 계획을 말해 준 것은 아닐 거다. 엔저는 보기 보다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었다. 특히 제 선배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안쉘은 정말 눈치채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곁에서 5년을 구르다 보니 저절로 제 상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킨 안쉘은 엔저가 눈앞의 델타를 살려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엔저가 손짓으로 델타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장난으로 말한 거라고 생각한 델타가 고개를 숙여 그에게 귀를 가져갔다.

엔저는 헤리엇의 고귀한 귀에 감히 제 더러운 말이 닿지 않게 델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엔저의 숨결이 닿자 델타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이윽고 감미로운 엔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지껄여 봐.”

“……?”

“개 같은 새끼야, 다시 지껄여 보라고.”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델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푸른색의 눈동자를 들어 자신을 내리깔아 보는 엔저의 붉은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살기 어린 눈동자에 침이 저절로 꼴깍 삼켜졌다.

더운 날씨라 그런 건지 아니면 살기 때문인지 식은땀이 주르륵하고 델타의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왔다. 땀이 턱을 타고 똑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슨.”

“안쉘!”

엔저가 보좌관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안쉘은 매우 파리해진 표정으로 엔저를 바라보고 다급하게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단숨에 헤리엇의 군사 기지에 거대한 결계막이 펼쳐졌다.

안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상황 파악을 위해 소파 위에서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헤리엇만이 평화롭게 웃으며 눈을 찌푸렸다. 그는 엔저가 델타와 비밀을 얘기하는 것처럼 귓가에 속삭인 게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지금 그딴 질투를 할 여유가 있냐고 안쉘의 영혼이 소리쳤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안쉘은 들어 올린 손 그대로 굳었다. 군사 기지 내부를 가득 채운 안쉘의 투명한 결계가 통- 하고 흔들렸다.

“저… 저에게 해를 끼치면 백부님께서.”

델타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살기 어린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델타의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아까 헤리엇을 향해 보여 줬던 따듯하고 바보 같은 미소는 없었다.

그래 바로 이게 엔저 맥과이어지. 아름다운 짐승.

역시 엔저에게 저 허여멀건 한 사내는 어울리지 않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델타는 혼자 씨익 미소 지었다.

“제가 이곳에서 실종되거나 상처를 입고 돌아간다면, 백부님은 온 힘을 다해 대령님을 추궁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겁니다. 대령님, 제 백부는 무서운 분이랍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20년 동안이나 대통령을 해 먹을 순 없었겠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델타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안쉘은 초조하게 엔저를 응시했다.

그는 엔저의 보좌관으로 지난 5년 동안 아주 신나게 굴렀다. 상관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 고생한다고 눈물 흘리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던 건 엔저의 눈부신 업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래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헤리엇에 관한 일이 아니면 어떤 일에도 굳이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좌관이 신경 쓸 요소도 적었다. 그런 엔저가 저렇게 짜증을 내며 욕을 내뱉은 일은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멍청한 장교 새끼 한 명이 괜히 엔저를 건드려 보겠다고 그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구겼을 때였다.

“이 좆같은 새끼야, 그거 내놔.”

엔저가 격분하여 천하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에 상대는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얼굴을 잔뜩 상기시켰다.

그는 꽤 자신만만해 보였다. 자신이 저 전쟁 영웅 엔저 맥과이어의 이성을 잃게 했다고. 그것보다 이까짓 사내 얼굴이 박힌 사진이 뭐라고 저리 화를 내나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는 결국 사진을 엔저에게 돌려주지 않고 호승심에 새하얀 머리를 가진 사내의 사진을 꾸깃 하고 주먹을 쥐어 구겨 버렸다.

엔저는 사내가 사진을 구긴 순간 그의 손목을 잘랐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폭행했다.

능력을 쓴 건 사내의 팔을 잘랐을 때 한 번이었다. 엔저는 매우 화가 난 얼굴로 싸울 의지도 빼앗긴 채 제발 살려 달라고 비는 사내를 밟고 또 밟았다. 그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은 안쉘도 처음이라 덜덜 떨면서 엔저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사내는 장교였고, 꽤 잘사는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는 능력자였으며 장교로 당당하게 입대한 둘째 아들을 꽤 아꼈다. 그런 아들이 손이 없어진 건 물론이요. 똥오줌도 못 가리는 상태가 되었으니 사태가 꽤 심각한 방향으로 이어질 뻔했다.

하지만 국민들과 군은 엔저 맥과이어를 사랑했다. 그래서 못된 장교가 영웅의 한계점을 건드릴 정도로 괴롭혔다며 오히려 사내를 비난했다. 맥과이어 가문은 사랑하는 외동아들을 위해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선뜻 내주었고, 장교는 결국 비난 속에 사라졌다.

엔저는 구겨진 사진을 되찾고 나서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연약했는지 안쉘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진은 몇 년의 연심을 숨기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엔저의 유일한 휴식처였을지도 몰랐다.

사진은 CCTV로 찍은 듯 뿌옇기만 한 헤리엇 알스터의 모습이었다. 무심한 눈동자로 한 손에는 물병을 들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진이었다.

얼마나 확대했는지 하얀 머리 이상으로 눈코입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쉘은 그때만 해도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다.

두 번째는 엔저 맥과이어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스물네 살 때였다. 그는 최전방으로 가기 전날 대통령 알현실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안쉘은 뒷짐을 지고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알현실은 방음이 잘 되어 있어 웅얼웅얼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대기하는 안쉘의 옆에는 대통령의 보디가드, 벤다민 오거가 굳건히 서 있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안쉘이 엔저의 뒤를 따르고자 한 발짝 물러났을 때, 매우 인자하고 상냥한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 애를 그곳에 숨겨 둔 거니? 후후, 못 찾을 줄 알았던 건 아닐 테고.”

엔저는 문을 박차고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주변에 강풍이 부는 것처럼 바람이 휘몰아쳤다.

대통령의 보디가드, 벤다민이 긴장한 얼굴로 총에 손을 가져갔다. 안쉘은 초조한 얼굴로 둘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봤다. 대통령을 건드는 즉시, 계엄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제아무리 엔저라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영웅을 원해. 이 뜻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하마, 엔저. 너는 지금 아주 잘해 주고 있으니 말이야.”

대통령이 웃으며 손짓했다. 벤다민은 긴장한 얼굴로 엔저의 등을 응시하다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엔저는 사무실로 돌아와 매우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날, 엔저가 최전방으로 보직 이동을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엔저는 원래도 많은 전투를 치르었으나, 곧 최전방에서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이미 국민들이 엔저에 열광하고 있었는데, 그가 최전방에서 싸운다면 그 기세가 더 강해질 것을 안쉘도 알 수 있었다.

‘…그 애? 숨겨 둬?’

대통령과 엔저의 대화를 떠올린 안쉘은 어리둥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던 엔저가 금테두리로 된 전자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안쉘은 일반 담배를 선호했지만, 엔저의 모습에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엔저가 너무 근사하게 전자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한 번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붉은 입술에서 연기가 빠져나왔다.

“…그 좆같은 늙은이는 언젠간 내게 감히 ‘그분’을 걸고 거래하고자 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걸걸하고 저열한 욕을 내뱉으며 엔저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회상을 마친 안쉘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엔저를 쳐다봤다. 안쉘이 생각하기에 지금 막심 가문, 그것도 델타 막심을 건들기엔 시기상조였다.

“이런… 엔저, 왜 그렇게 화났니?”

딱 봐도 본인이 모욕당해 그의 충성스러운 고양이인 엔저가 발톱과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데도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그는 엔저의 등을 살짝 토닥거리면서 말했다.

“귀여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어.”

헤리엇이 주머니에서 사탕 두 개를 꺼내 주며 화를 풀라고 했다. 엔저는 델타를 쳐다보고 있다가 손을 뒤로 내밀었다.

빌어먹을 저 진지한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마이페이스였다. 엔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사탕을 받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에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흘렸다.

‘저 양반 진짜 왜 저래!’

‘원래 저래요!’

안쉘과 안젤라가 익숙하게 눈으로 대화했다. 안젤라는 빨리 이 상황을 좀 어떻게 마무리해 달라는 눈빛으로 안쉘을 쳐다봤다.

델타는 고요해지는 분위기와 함께 누그러지는 엔저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아아아악!!!”

“젠장!”

안쉘은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델타를 향해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던 델타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꿇린 충격에 잠시 비명을 멈추었다.

안쉘이 결계를 더욱 강화했지만, 밖에서 델타의 보디가드로 온 사내의 귀에 비명이 들렸을 것이 분명했다.

델타는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진 제 귀를 보면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상처를 막은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몽글몽글 샘솟더니, 이내 주르륵하고 떨어졌다.

델타는 귀가 있던 자리를 감싸고 헉헉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엔저 맥과이어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헤리엇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안쉘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델타의 허리를 무릎으로 꾹 누르며 숙였다. 귀가 잘린 충격으로 델타의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밭은 숨을 내뱉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곧 귓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차 고통이 몰려왔다.

안쉘은 델타의 뒤통수에 총구를 대며 엔저의 눈치를 봤다. 망할 상관은 뭘 생각하는지 헤리엇의 옆에 멀뚱히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쾅-!

그때 안쉘의 결계가 크게 흔들렸다. 델타의 보디가드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지원군을 부르거나 상부에 보고할 것이 자명했기에 안쉘은 결계를 풀었다.

“도련님!!”

“…개인 보디가드는 거느릴 수 없을 텐데요, 델타 소령님. 적어도 군 보디가드를 이용하십시오.”

안쉘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콧수염이 멋진 늙은 사내는 안쉘에게 잡혀 피 흘리며 무릎을 꿇은 델타를 보고 눈을 번뜩였다. 그는 핏줄이 돋은 얼굴을 거무죽죽하게 물들이더니 소리쳤다.

“감히 이딴 짓을 하다니! 이 개자식들이 모두 군법 위반으로 영창에 갈 줄 알아!”

군인도 아닌 새끼가 영창이라는 말을 왜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안쉘은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러운 난동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2대8 머리가 주르륵 흘러 5대5가 되었다. 요즘 2대8을 고수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다음부턴 스프레이를 아낄 겸 그냥 다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사내의 몸이 울긋불긋하게 변해 갔다.

“불 능력자인가 봅니다.”

“비가 오는데 불 능력자를 거느리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엔저가 이죽거리면서 속삭였다. 그 점은 안쉘도 동감이었다. 사내가 화염으로 불타오르는 몸으로 안쉘에게 달려들었다. 일단 델타를 압박하는 그를 먼저 치우자는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안쉘의 앞으로 거대한 결계가 만들어지고 쾅!! 소리를 내며 결계에 부딪힌 사내의 몸이 휘청거렸다. 안쉘은 여러 겹의 결계를 마치 보호막처럼 이용했다. 허투루 전쟁 영웅인 엔저 맥과이어의 곁에 있는 게 아니었다.

“자, 자자자, 잠깐만요!!”

안젤라가 비명을 지르며 소파 뒤로 도망갔다. 그녀는 갑자기 시작된 전투와 피가 낭자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싫어서 도망친 사람이었다.

안쉘은 그녀를 챙기지 못한 것에 혀를 차며 다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사내가 서 있는 곳으로 결계를 세로로 길게 내리찍었다. 그것은 사내의 어깨에 작은 상처를 입히고, 바닥을 가를 것처럼 깊이 박혔다.

그리고 연이어 쾅! 쾅! 소리와 함께 사내가 있는 곳으로 마치 단두대가 내려찍는 것처럼 결계가 박혔다. 사람이 서 있었다면 충분히 두 동강이 날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나름 델타 막심의 보디가드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사내는 정말 여기저기 잘도 피했다. 그러나 안쉘은 델타까지 제압한 상태에서 보디가드를 상대했다.

점점 간격이 좁아지는 결계에 보디가드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안쉘은 사내의 어깨와 팔다리에 힘껏 결계를 때려 박아 넣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으으아악!”

사내가 살이 베이는 감각에 비명을 지르자 안쉘은 총을 들어 그의 이마 정중앙을 겨냥하고 쐈다. 안쉘은 숨을 몰아쉬며 다시 델타 막심의 허리를 눌러 그가 납죽 엎드리게 했다.

헤리엇이 그 광경에 감탄했다.

“안쉘 실력이 참 좋네.”

“선배만큼은 아니지만요.”

“나는 물이 없으면 소용없잖아.”

“아뇨, 선배의 원래 능력 말입니다.”

물을 다룰 수 있고, 인어의 모습을 가진 건 어디까지나 후천적 능력이었다. 헤리엇은 엔저가 아홉 살에 기록을 깨지 않았다면 계속 최연소 능력자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헤리엇은 하얗게 바랜 눈동자를 굴려 엔저를 쳐다봤다.

그걸 엔저가 어떻게 알았을까…….

헤리엇은 무척 상냥하게 웃었다. 하지만 딱히 뭔가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헤리엇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헤리엇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들어온 인어의 능력도, 그리고 부질없이 사라진 원래의 능력도 갈구하지 않았다.

헤리엇은 생김새 그대로 무척이나 하얗고 백지 같은 사람이었다. 눈을 감고 작게 미소 짓는 헤리엇은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았다. 헤리엇이 눈을 살짝 내리깔자 하얀 속눈썹이 하얀 눈동자를 가렸다.

“이제 그만 저 애를 용서해 주는 건 어떠니?”

“선배를 모욕했는걸요.”

“나는 그다지 아무렇지 않아서…….”

“제가 싫어요, 선배.”

엔저가 마치 어리광부리듯 속삭였다. 그는 헤리엇이 자신의 어리광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헤리엇은 고양이 같이 제 어깨에 얼굴을 가져다 대는 엔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헤리엇은 곤란한 듯 미소 지으며 델타를 내려다봤다. 안쉘에게 잡혀 웅크려 있던 델타가 공포와 고통에 굳은 얼굴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텅 비어 있는 헤리엇의 눈동자를 떨리는 눈으로 마주했다.

무섭다, 두렵다. 저 사내는, 정말 괴물이었다.

사람 하나가 죽어 가든, 싸움이 나서 주변이 엉망으로 변하든 하등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늘 그렇듯이 작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의 주변은 공허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미쳤지……!’

이딴 괴물 소굴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계속되는 공포와 고통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일시적으로 통증을 죽여 주었다. 그러자 엔저의 표정이 잘 보였다.

엔저를 본 델타의 눈동자가 조금 몽롱하게 풀렸다.

“저… 정말 저를 죽일 생각은 아니시죠? 저를 죽이면… 백부님께서.”

델타는 귀 한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말이 심했던 건 인정하지만, 그게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많은 이들이 입에 가시를 달고 살지만, 그들 전부를 죽일 수는 없다.

그건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전쟁 중에 헌법이 여러 번 바뀌고, 군부 사회로 돌입하면서 군인은 명령 불복종으로 하극상을 벌인 부하를 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복종일 때의 이야기다.

“그 늙은이는 네가 죽을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보냈겠지.”

엔저는 소파에서 일어나 델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실 엔저는 델타에게 얻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헤리엇 알스터의 실험 영상이었다. 그 비윤리적인 것은 엔저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기밀에 싸여 있었다.

헤리엇은 별것 아닌 실험이라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기밀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엔저 맥과이어는 스스로가 헤리엇 알스터에 대한 모든 걸 알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를 죽임으로써 내 계획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대응하겠지. 그 늙은이는 원래 그런 새끼야.”

그러니까 아들인 알시타 막심을 희생할 수 있었겠지.

그리고 엔저에게 델타 막심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한 가지는 델타 막심이 헤리엇에게 행해지는 실험 영상을 봤기 때문이다. 엔저는 그것을 본 놈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두 번째는 델타 막심이 생각보다 더 버러지였고, 헤리엇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원석을 알아보고 아름다운 제 선배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주제도 모르는 똥파리들이 선배를 이용하고 싶어 했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놈들에게 그건 사치 중의 사치였다.

엔저가 능력을 이용해 델타의 머리를 터트리기 전, 델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델타는 죽음 앞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비명을 지르며 제 능력을 한계치까지 올려붙였다. 능력을 사용한 충격파에 가까운 고음이었다.

덕분에 안쉘의 고막이 터져 피를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머리까지 욱신거려 안쉘이 비틀거리다가 손아귀에 쥔 힘을 풀고 말았다. 머리가 핑핑 돌고 눈앞에 별이 깜빡거렸다.

능력으로 헤리엇과 자신에게 바람을 펼쳐 충격파를 완화 시킬 수 있었던 엔저와 달리 안쉘은 방어할 순간을 놓쳤다.

엔저가 헤리엇을 챙기느라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델타 막심이 안쉘의 명치를 가격하고 밖으로 도망쳤다.

“콜록!”

잡을 새도 없이 델타가 쥐새끼처럼 달려가 차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죽음 앞에서라곤 하지만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콜록콜록!”

고막도 터지고 명치도 맞은 안쉘이 기침하는 사이 안젤라가 다가왔다. 그녀는 온몸이 강철 같다더니 고막도 강철이었나 보다. 안젤라는 음량이 좀 큰 음악을 들은 사람처럼 귓구멍을 후볐다.

“놓쳤나?”

당장 쫓아가면 잡을 순 있었지만 헤리엇이 살짝 막으며 웃었다.

“어린앤데 그만 놔주자, 아주 겁을 먹은 것 같은데…….”

델타의 잘린 귀를 들어 올리며 헤리엇이 말했다. 엔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선배의 말을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어리광을 부리듯 어깨에 얼굴을 살짝 얹고 숨을 들이마시며 헤리엇의 체취를 음미했다.

안쉘은 숨을 헐떡이다가, 상황이 정리된 것에 안도하며 보디가드의 시체를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저… 대령님.”

“??”

헤리엇에게 기댄 엔저는 안쉘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따지기에 안쉘은 너무 찝찝하고 묘한 기분에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델타 막심에게 제가 대통령이 된다고 말씀하셨죠?”

“그래.”

“그럼 그 소리도 단테 대통령에게 전해지겠고요.”

“그렇겠지.”

“…그럼 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안쉘은 잠시 멍해졌다가 되돌아왔다.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델타 막심은 안쉘이 대통령 후보에 오른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살아서 이곳에서 도망쳤다. 대통령은 스파이로 심어 둔 안쉘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안쉘 리는 가루가 되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뒤지겠지. 출마하기 전에.”

엔저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고 안쉘의 뒤에 블랙홀이 보였다. 블랙홀로 빠져나가는 안쉘의 영혼이 엔저에게 ‘너는 시발, 니가 사고 쳐 놓고, 시발, 아, 시발!’ 하고 욕을 했지만 닿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갔다 돌아온 안쉘은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며 제정신을 차렸다. 자신이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저렇게 심드렁해 보여도, 엔저 맥과이어는 한 번 마음먹은 일을 그르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불가능할 것 같은 전투에서도 늘 승리를 쟁취해 냈다. 안쉘은 그런 모습에 반해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다. 몇 번이나 그만둘까 고민했던 보좌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그 나름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었다.

엔저 맥과이어가 설마 정말 선배의 부탁이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델타 막심을 살려 보내는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있겠구나.

안쉘이 손을 들어 귓가에 들러붙은 핏자국을 긁어냈다. 바사삭, 마른 핏덩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고개를 터니 다시 피가 주르륵하고 나오는 것이, 단단히 고장 난 것 같았다. 아까부터 이명이 웅웅 들리고 막이 쌓인 것처럼 멍했다.

다가오는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정확히 들리지 않으니, 델타 막심의 능력을 얕본 본인의 책임이었다.

“괜찮으세요?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구했는지 구급상자를 들고 안젤라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녀는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를 보더니 윽,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녀는 군인이었고, 지금은 전쟁 중이었으니 피를 보고 호들갑 떠는 건 민간인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안젤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쉘은 안젤라의 왼쪽에 서서 최대한 시체가 보이지 않게 했다.

“안 됩니다. 병원은 위험합니다.”

델타 막심이 지금쯤 백부이기도 한 대통령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며 전화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사실 몇 가지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엔저 대령이 말한 덫이 있었으니까.

불신.

그래, 엔저는 델타에게 단테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었다. 그것이 향후 어떤 작용을 할지 안쉘로서는 추측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죽이는 것에서 방향을 바꾼 걸 보면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 싶었다. 안쉘은 안젤라의 도움을 받아 귀에 거즈를 대었다.

안쉘은 충격파로 깨진 안경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앤에게 다녀오는 건 어떠니?”

헤리엇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안젤라는 온몸이 단단해서 큰 충격을 받지 않았고, 헤리엇은 엔저가 필사적으로 방어하여 모습이 멀쩡했다.

안쉘은 갑자기 서러움을 느꼈다. 여기서 고막 터진 건 나밖에 없구나……! 거기다가 명치까지 얻어맞았다.

“…….”

안쉘은 정말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병원에 가지도 못하는데 고막을 다쳤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었다.

고막이 찢어진 것만으로 청각이 손실되진 않지만, 그냥 두면 안쪽의 상처가 곪아 심해질 수 있었다. 결국 안쉘은 다시 한숨을 길게 쉬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알겠습니다.”

지금 산 위 호수에 기거하고 있는 북쪽 바다 인어 왕자 앤의 타액은 훌륭한 치료제였다. 지상에도 치유 능력을 가진 인간이 몇 있었지만, 효과는 미비했고 가격도 엄청 비쌌으므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안쉘이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엔저가 헤리엇에게 속삭였다.

“선배, 담배를 피우고 오겠습니다.”

“담배?”

헤리엇의 시선이 엔저를 향했다. 엔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붉은 눈빛을 가라앉히고 헤리엇과 눈을 마주했다. 엔저가 담배를 피우는 사실을 처음 안 헤리엇은 조금 들뜬 얼굴로 말했다.

“나도 같이 가도 되겠니?”

“물론입니다.”

1분 1초라도 선배 곁에 있고 싶은 착실한 후배는 즉각 대답했다. 헤리엇이 엔저의 뒤를 따르며 안쉘에게 말했다.

“덧나기 전에 비가 와도 꼭 앤에게 찾아가.”

“…네.”

안쉘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안젤라가 움찔거리면서 보디가드 시체를 힐끔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무서워하니까 일단 저 시체 먼저 치우겠습니다.”

“내가 해 줄 테니 치료를 받는 게…….”

“아니요, 제가 하겠습니다.”

안쉘은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말했다. 헤리엇은 두 번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엔저에게 걸어갔다. 엔저는 우산을 들고 이미 시중들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안쉘은 저도 담배가 당기는 것을 참고 시체를 밖으로 끌고 갔다. 안젤라가 도와주기 위해 기웃거리는 걸 괜찮다며 사무실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거구의 보디가드 시체를, 다른 한 손에는 삽을 들고 산속으로 향했다.

먼저 공격한 건 이 남자 쪽이니 죽여도 할 말은 있다만 귀찮아지는 건 사양이었다. 안쉘은 삽질을 시작했고 어느새 귀를 덮은 거즈가 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할 일은 다 했지만 너무나 내키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리던 안쉘은 호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

비가 쏟아지는데도 안쉘은 우산을 쓰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산을 올랐다. 그리고 호숫가에 이르러서 살짝 머뭇거렸다. 호숫가에서 푸른색 머리통이 보여 저도 모르게 멈춘 것이다.

원래 인어란 것들이 그런 건지 아니면 저 양반이 특별히 이상한 건진 모르지만 앤은 개구리들을 잔뜩 모아 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앤의 아름다운 화음에 개구리들이 저마다 개굴개굴 화음을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짜 미친놈도 저런 미친놈이 없었다.

“흠흠.”

안쉘은 헛기침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소리에 앤이 고개를 돌렸다. 비가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호수 밖에서도 인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설마 비가 오는 날엔 그 모습으로 지상에 나올 수 있는 건가… 인어 연구 학계가 이 사실을 알면 깜짝 놀라겠는데.

“뭐하십니까?”

안쉘이 물었다. 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안쉘의 머리 위로 투명한 물의 막이 생기며 안쉘에게 쏟아지는 비를 막아 주었다.

안쉘은 나름 군인이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12시간이나 밖에서 개같이 훈련하며 구른 적이 있어 괜찮았다. 심지어 그날은 기온이 18도로, 조금 쌀쌀한 날씨였다.

“개구리들에게 노래를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앤이 씩 웃으며 말했다. 노래가 멈추고 안쉘이 등장하자 초록색 개구리들은 여기저기 이미 도망간 상태였다. 설마 저 정신 나간 오페라를 내가 멈춘 건가 안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툴툴이 씨.”

젠장, 누가 툴툴이야. 그 툴툴이 씨는 지금 토끼 같은 범고래 자식을 얻고 남쪽 바다로 헤엄쳐 갔다며!

“다쳤군요.”

“…네, 병원에 갈 수 없으니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오, 이런. 이리 오세요, 불쌍한 툴툴이 씨.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건가요?”

그놈의 툴툴이 씨 얘기 좀 그만할 수 없나.

안쉘은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앤의 눈동자에는 푸른 안개가 끼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헤리엇과는 조금 다른 모습인 앤의 지느러미는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등허리도 헤리엇과 달리 매끈했으며, 지느러미는 무지갯빛으로 아름다웠다. 푸른 비늘은 보석처럼 영롱한 것이 과연, 인어들의 왕족다웠다.

앤이 붉은 혀를 내밀며 말했다.

“아주 깊게 핥아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그런 말은 성희롱이라고 안쉘이 중얼거리자 앤이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안쉘은 결국 한숨을 쉬며 그를 향해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쏴아아아아-.

방금까지의 소란은 거짓말인 것처럼 군 기지 앞의 공터는 고요했고, 비 때문에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튀는 소리만 들려왔다. 산속의 시골 마을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엔저는 공터에 세워져 덩그러니 비를 맞고 있는 본인의 개인 차량에 다가갔다. 그리고 익숙하게 차 문을 열었다.

잠금을 해 놓지 않은 모양인지 쉽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계기판 위쪽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고급 상자를 들고 왔다. 그동안은 헤리엇이 우산을 들어 주었다. 엔저는 얼른 담배를 꺼내고 헤리엇에게 우산을 받아 들었다.

“비를 피할 곳이 없군요. 선배에게 연기가 가는 게 싫어서 밖으로 나온 건데.”

“괜찮아. 안쉘이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거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야.”

엔저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 전자 담배의 전원을 켰다. 헤리엇은 성인이 되자마자 담배를 한 번 피워 본 적이 있었는데 그날 온종일 토를 했다. 온몸이 담배를 거부한 것이다. 단 한 개비만으로도 초주검이 된 헤리엇은 그날 이후로 담배를 기피했다.

“담배를 피웠었네.”

“네, 자주는 아니지만 피우고 있습니다.”

헤리엇은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뱉는 엔저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고급스러운 전자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뱉는 동작마저 아름다워 보였다. 생각에 잠긴 듯 붉은색 눈동자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고민하는 게 혹시 방금 일하고 관련이 있니?”

헤리엇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웃자 눈썹이 팔자로 내려갔다. 엔저는 순해 보이는 헤리엇의 얼굴을 응시하며 연기를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헤리엇에게는 연기가 가지 않도록 능력을 써 저 멀리 보내 버렸다.

“…네. 생각 같아선 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했는데?”

“…그랬다간 선배의 비디오를 찾을 수 없으니 참았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선배.”

“…….”

엔저는 헤리엇을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하늘보다 높은 선배를 두고 감히 엔저는 거래를 했었다. 그건 아주 좆같고 역겨운 일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엔저 맥과이어가 헤리엇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델타 막심을 살릴지 말지 고민했었다.

“…녀석은 반드시 죽이겠습니다. 그 비디오를 포르노물처럼 가지고 있는 개돼지만도 못한 놈들도 모조리 다.”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아르릉거려 봤자 헤리엇의 눈엔 귀엽기만 했다. 거기다가 엔저는 지금 군복을 쫙 빼입고 있었다. 엔저의 속살을 남김없이 가둔 군복에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아랫배가 조금 조이는 기분이었다. 헤리엇은 본능적으로 엔저의 턱 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러자 귀여운 후배가 겨우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증오와 경멸, 그리고 자괴감으로 가득했던 붉은색 눈동자였다면 지금은 오로지 헤리엇을 담은 채 열기만이 가득했다.

“안쉘에게도 그 소리를 해 줘, 놀리는 재미가 있지만, 너무 가엾잖아.”

비슷한 시각 안쉘이 인어 앤에게 제 발로 찾아가 농락당하는 줄 모르는 헤리엇이 말했다. 엔저는 헤리엇의 말에 냉큼 대답했다.

“네.”

“귀여운 엔저, 재미있는 얘기를 해 줄 테니까 그만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자.”

헤리엇이 속삭이며 말하자,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조금 풀렸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헤리엇의 유머에 크게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선배의 유머는 다른 이들의 것과 달리 무척이나 심오했다. 자신의 머리로는 감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엔저는 항상 크게 웃으며 헤리엇에게 감동했다.

곤란하다는 듯 작게 웃는 헤리엇의 목소리에 엔저는 귀를 쫑긋거렸다.

찰칵-.

가벼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엔저는 옆 옆집 공사가 끝났음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헤리엇의 집 앞 공터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비가 와서 바닥이 질척질척해졌을 것이 분명해 헤리엇은 엔저에게 권했다.

“오늘은 안에 들어가서 같이 자자.”

해는 졌어도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다. 엔저는 고개를 확실하게 끄덕였고, 혹시 몰라 두 번이나 더 끄덕거렸다.

둘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빗줄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군용 우산이 커다랗다고 해도 장정 두 사람이 장대비 속에 함께 쓰고 있었기 때문에 둘 다 홀딱 젖을 수밖에 없었다. 헤리엇은 지팡이를 신발장 위에 올려 두고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서 수건과 파자마를 가지고 나왔다.

“이건 나한테 조금 컸거든. 아마 맞을 거야. 입을래, 엔저?”

“물론입니다.”

엔저가 냉큼 대답하며 옷을 받았다. 그리고 헤리엇이 있음에도 숨을 거칠게 쉬며 헤리엇의 파자마에 얼굴을 묻었다.

으음… 빤 거였는데, 아무래도 빨지 않고 뒀어야 했나. 후배의 어리광에 보답하고 싶었는데. 헤리엇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엔저가 군복을 천천히 벗었다. 빗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동작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근사해 보였다. 헤리엇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작네…….”

“입을 만합니다.”

헤리엇이 작은 편이 아닌데도 훌쩍 커 버린 엔저는 그보다 더 컸다. 근사하게 입은 엔저를 보며 헤리엇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헤리엇이 늘 입던 파자마인데 이상하게 엔저가 입으니 무슨 잡지에 나오는 모델 같았다. 헤리엇은 흰 티에 가벼운 운동복을 입고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율무차 좋아하지?”

“네.”

헤리엇의 말에 대답한 엔저는 지금 빨래 통 앞에서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헤리엇이 비에 젖은 속옷까지 모두 벗어 빨래 통에 넣은 걸 보았기 때문이다.

엔저는 이길 수 없다고 모두가 고개를 저었던 남쪽 인어와의 해상 전투에서 전략을 짜는 모습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빨래 통을 노려봤다.

“뭐하니?”

“선배의 팬티를… 가져가고 싶어서요.”

엔저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

헤리엇은 팔자로 내렸던 눈썹을 더욱 내리며 서랍을 뒤적거렸다.

“새것이라면 여기 있는데…….”

“아뇨, 아니, 그것도 필요하긴 한데…….”

엔저는 망설이며 헤리엇을 돌아봤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여지없이 측은하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헤리엇은 그런 엔저에게 너무나 약했다. 헤리엇의 눈에는 마치 버림받은 새끼 고양이처럼 축 처진 꼬리와 귀가 보였기 때문이다.

“빨지 않아서 냄새날 텐데.”

“그러니까요.”

“???”

요즘 그래도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헤리엇이 곤란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가져가.”

엔저의 주변으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보물을 영접하는 사람처럼 헤리엇의 팬티를 들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헤리엇은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움직이는 엔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엔저는 헤리엇의 팬티를 벗어 놓은 자신의 군복 주머니 안쪽에 집어넣었다. 마치 보물을 숨기는 고양이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하며 헤리엇은 다시 작게 미소 지었다.

*  *  *

헤리엇은 아침 햇살에 눈을 끔뻑이다가 비몽사몽인 상태로 어기적어기적 일어났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난 것 같은데 이제야 일어나다니, 어지간히도 피곤했나 보다. 헤리엇은 어깨를 주무르면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길게 눈을 감고 몇 번을 깜박거리자,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자는 이가 보였다. 방이 한 칸밖에 없는 집이니 잘 곳이 마땅치 않아 한 이불에서 함께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났다.

헤리엇은 하얀색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엔저를 응시했다. 새근새근 잘도 자는 엔저는 평소 봤던 얼굴보다 배는 귀엽고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헤리엇이 어제 준 입었던 팬티가 들려 있었는데, 다른 한 손은 바지 안의 아랫도리에 집어넣은 채였다. 잠이 든 헤리엇을 보며 야심한 새벽까지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엔저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고 있었다.

엔저의 얼굴이 헤리엇의 속옷에 반쯤 파묻혀 있었는데, 손을 움찔움찔 떨고 얼굴은 풀어진 게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허허, 녀석.

헤리엇이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엔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깨어 있는 그는 늘 근사했는데, 잠에 빠진 모습은 굉장히 귀여웠다. 아니, 원래의 엔저도 귀엽긴 했다. 어쨌든 헤리엇은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정확히 7시였다.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지 않으면 늦을 것이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어도 헤리엇은 군에서 녹봉을 받아먹는 군인이었고, 그건 엔저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비가 많이 왔으니 도움을 청하는 마을 주민들이 넘쳐날 것이 분명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제대로 된 파출소도 하나 없어서 나이 많은 시골 노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군 기지뿐이었다.

그런데도 헤리엇은 엔저를 깨울 수가 없었다. 눈을 곧게 감은 채 자는 엔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여러 번이 되고서야 헤리엇이 정신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요즘 엔저가 무슨 일만 하면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시간이 잦았다. 잘생기고, 섹시하고, 어여쁘기도 했다. 어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매우 근사해 보였다.

깨워야 하는데 자는 얼굴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도 깨워야 하는데, 5분만 더 보자.

5분만 더.

그 생각으로 멍하니 엔저의 얼굴을 감상하던 헤리엇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엔저를 깨울 수 있었다. 널찍한 어깨를 잡고 흔드니 엔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눈동자가 헤리엇을 향했다.

“…아, 선배.”

엔저는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헤리엇의 팬티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숨을 쓰읍- 하, 하고 들이쉬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게슴츠레 뜬 눈이 번쩍 빛나더니 붉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헤리엇의 팬티를 소중한 보물 다루듯 곱게 접어 챙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 버렸습니다.”

엔저는 시계를 확인하며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헤리엇의 팬티를 입수했다고 생각하니 설레서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고롱고롱 잠을 자는 헤리엇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 옆에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다만 헤리엇의 곁에서 너무 무방비하게 잠들어 버렸다.

하지만 더 곤혹스러운 게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헤리엇의 체취가 가득 묻은 팬티에 얼굴을 묻고 있었으니 엔저의 솔직한 몸이 반응해 버린 것이다. 엔저는 굳이 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은 파자마를 뚫을 듯 기상하는 제 아랫도리를 응시하다가 엔저가 고개를 들었다. 헤리엇은 눈을 깜박거리며 조금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아침부터 건강하네, 엔저.”

“네, 선배 덕분입니다.”

엔저가 멋지게 씩 웃었다.

엔저 덕분에 지각한 헤리엇은 절뚝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리언이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헤리엇이 들어오자 그는 겨우 깨어 브리핑 전 졸린 눈을 비벼 가며 겨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그런데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안쉘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그런 일도 있고 몸도 성치 않으니 오늘은 많이 늦을 생각인가, 헤리엇은 걱정이 되어 슬그머니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안쉘은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규범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각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지각을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본인에 한해 하는 말이고 사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헤리엇에게 주의를 준 적은 없었다.

“안젤라는?”

“참외 얻으러 갔어요.”

“아.”

안젤라는 참외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이번 주의 수확은 대부분 참외 농사이기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안젤라가 날뛰며 밭일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당차고 괴력이 넘치는 아가씨였다.

헤리엇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엔저는 자리에 앉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 둔 파일을 들고 헤리엇에게 다가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장님이었다. 그는 늙고 주름진 얼굴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장’이라고 쓰인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누가 구해 줬는지 기가 막히게도 잘 어울렸다.

이장님은 리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마 오늘 순찰을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리언은 찾아온 이장님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고 함께 지도를 살펴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제 리언은 마을 행사에 참가한 덕분에 어제 이곳에 있었던 일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알았으면 저렇게 태연하게 이장님하고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말을 주고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장이 늙고 주름진 손으로 모자를 벗어 헤리엇에게 인사를 했다. 헤리엇은 저 모자를 과연 누가 선물해 준 것인가 궁금해하면서 작게 웃고 고개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어제 비가 많이 오던데, 밭은 괜찮으십니까?”

“그려.”

아침에 리언과 순찰을 하기 전에 이장은 이곳 사무실에 가끔 와서 커피나 과일 등을 얻어먹었다. 물론 그런 커피나 과일들은 마을 주민들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요즘 산에 짐승이 출몰해서 큰일이야, 밭도 엉망으로 만들고… 에잉.”

이장은 속이 상했는지 리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리언이 헤리엇과 엔저에게 인사하고 이장의 뒤를 따랐다.

“그는 항상 순찰을 하는 건가요?”

“응, 동물하고 교감할 수 있어서 리언은 대부분 저녁까지 순찰을 해.”

물론 그사이 이장님네 가서 점심을 얻어먹거나, 새참 만드는 일을 도와주거나, 혹은 시원한 마을 회관에서 노인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다. 헤리엇은 그의 능력을 부러워하면서 작게 웃었다.

“그의 능력은 아주 상냥하거든.”

“그렇군요.”

어렸을 때부터 동물학자가 꿈이었던 헤리엇에게 리언의 능력은 부러운 것이었다. 본인은 그것 때문에 전쟁터에서 힘들어했지만, 이런 평화로운 곳에선 유용하게 쓰일 능력이었다.

리언과 이장이 순찰하기 시작하면서 이 험한 시골 마을에 범죄나 야생동물의 습격이 많이 줄어들었다. 가끔 야산에 무언가 묻으러 오는 이들도 있었는데, 리언이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들을 포획했다.

엔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언이 나간 방향을 응시했다. 시계는 슬슬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엔저가 들고 있던 서류를 팔랑이며 헤리엇에게 다가갔다. 그는 머뭇거리면서,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오래 걸려?”

“저녁에는 돌아올 예정이지만…….”

오래 걸린다는 소리였다. 묘하게 쓸쓸한 기분이 든 헤리엇은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어 곤란한 미소를 흘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자신보다 더 외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는 엔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때문에 가는데?”

*  *  *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쉘이 숨을 헐떡이면서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우편물이 들려 있었다. 거즈를 뗀 귀는 멀쩡해 보였다. 헤리엇은 안쉘을 살펴보며 물었다.

“앤에게 갔다 온 거니?”

“…….”

안쉘은 잠시 침묵하면서 불편한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는 어제 그렇게 헝클어진 머리를 어떻게 다시 정리했는지 아주 반듯하고 각진 2대8 머리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경은 또 몇 개나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새 안경처럼 반짝 빛나는 안경을 쓴 안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령님은요?”

“볼일이 있다고 잠시 나갔어.”

볼일?

안쉘이 의아해하며 겉옷을 벗었다. 헤리엇은 안쉘의 목덜미에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걸 보았다. 모기에 물린 건지 벌레에 물린 건지 꽤 선명했다.

안쉘은 몸이 뻐근한지 어깨를 잡고 몇 번 흔들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우편물을 헤리엇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이번 건강검진 결과표입니다.”

헤리엇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편물을 뜯었다. 그 안에는 안젤라부터 시작해서 리언과 엔저, 그리고 안쉘의 것까지 있었다. 하지만 헤리엇 본인의 것은 없었다.

헤리엇은 네 사람의 것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나쁜 곳은 없었고 모두 양호했다. 특히 엔저의 것은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모든 게 완벽했다. 헤리엇은 내심 뿌듯해하며 웃었다.

“헤리엇 님의 것만 없네요.”

“응, 내 검진표는 기밀이거든.”

그러고 보니 헤리엇만 따로 검사를 받았다. 아마 실험 때문인 듯했다. 안쉘은 전에도 물었지만, 다시 묻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헤리엇 님은 정말 화가 나지 않습니까?”

어떤 실험인지는 모르겠지만 델타 막심과 엔저의 반응으로 유추하건데 결코 유쾌한 실험은 아닐 것이다.

델타 막심이 말한 대로 끔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런 실험을 받은 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헤리엇의 반응은 너무나도 유했다.

그는 군 실험은 자신이 팔렸기 때문에 강제로 참가한 것이고, 연구원들은 정당한 가격을 주고 사 와 본인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 얘기했다.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선량한 미소였다.

헤리엇은 엔저의 건강검진표를 보며 말했다.

“엔저의 성기능 검사가 한계치를 찍었어.”

예, 그러겠죠, 기계를 고장 내 먹었는데.

안쉘은 그때만 생각하면 솔직히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헤리엇에게 알려 준 방법이 잘 먹히다 못해 360도 돌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긁적거린 헤리엇이 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출하러 가야 하네.”

“도시까지 내려가십니까?”

“음.”

굳이 오늘 내지 않아도 되지만 엔저도 없겠다, 빨리 해치워 버리자고 생각한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쉘은 헤리엇에게 우편물을 받아들며 말했다.

“운전은 할 줄 아십니까?”

“면허는 있긴 한데.”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차가 있으면 편하긴 하지.

헤리엇은 굳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쉘은 아주 정중하고 조용하게 운전을 즐겼는데, 헤리엇이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운전을 잘했다.

안쉘은 차 열쇠를 들고 헤리엇에게 손짓했다. 지금 서류를 제출하고 오면 점심시간이 훌쩍 지날 테니, 오는 길에 읍내에서 먹거리나 좀 사 오자고 생각한 헤리엇은 안쉘의 뒤를 따라 그의 차를 향해 다가갔다.

안쉘이 즐겨 타는 차는 회색 AUD였다. 안쉘은 마치 엔저의 시중을 드는 것처럼 차 문을 열어 헤리엇을 뒷좌석에 태우고 저도 운전석에 착석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점심은 시장에서 사 갈까 하는데.”

“좋군요, 애들도 좋아할 겁니다.”

안쉘은 리언과 안젤라를 생각하며 그리 말했다. 두 사람을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잠시 길게 한숨을 쉬다가 엑셀을 밟았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안쉘은 헤리엇 생각에 못내 복잡한 모양이었다. 헤리엇은 안쉘의 등을 토닥이고 싶어졌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지나니 아스팔트길이 나타났다. 안쉘은 부드럽게 도로로 진입하며 시골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한참을 달리다가 사이드미러를 힐끔거리며 헤리엇에게 말했다.

“헤리엇 님.”

“음.”

“사격 몇 점 받으셨습니까?”

헤리엇은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마 아카데미 시절을 말하는 모양이다.

“올 A.”

“저보다 잘하시겠군요. 저는 C를 받았습니다.”

“그건 정말 끔찍한걸?”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C는 어지간한 교수들도 잘 주지 않는 점수였다. 안쉘이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그래도 어제 총을 썩 잘 다루던 것을 떠올렸다.

사람이 노력하면 못 하는 일이 없다더니 안쉘이 딱 그 짝이구나.

“그럼 사격은 맡기겠습니다.”

“……!”

안쉘이 재빠르게 운전대를 왼쪽으로 돌렸다.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는 운전대에 차량이 크게 흔들리며 차량 내부가 덜컹거렸다.

끼이이이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서 마찰로 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헤리엇이 허리를 접으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차량이 180도 회전하며 고속도로 위에 미끄러졌다.

직선으로 가던 차가 어느새 대각선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이번에 안쉘은 사이드미러를 확인하지 않고 운전대를 반대로 쉴 새 없이 돌리며 후진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뒷좌석에 있던 헤리엇의 몸이 다시 덜컹거렸다.

탕!

어디선가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리엇은 자동차 뒤쪽 창문을 통해 검은 봉고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음…….”

“엄호하겠습니다, 헤리엇 님.”

헤리엇은 안쉘에게 받은 총을 만지작거리며 안전장치를 풀었다. 총알 개수를 확인하고 차 시트에서 미끄러지듯 몸을 숙였다.

그와 동시에 헤리엇이 있던 곳으로 총알이 날아와 자동차 앞 유리를 깨고 밖으로 나갔다. 하마터면 머리가 날아갈 뻔했다.

“아무래도 헤리엇 님이 탄 걸 모르나 봅니다.”

대통령은 헤리엇을 통해 무언가 이루고자 할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아마 차가 안쉘의 차이니 공격하는 것이리라. 안쉘은 뒤로 후진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안쉘의 차가 중앙 분리대를 박기 전에, 거대한 결계가 생겨 차의 방향을 부드럽게 바꿔 주었다.

끼이이이익-.

고무 타이어 타는 냄새와 함께 들린 마찰음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헤리엇은 창문을 내리고 두 손으로 총을 장전했다. 안쉘이 360도 회전하듯 차량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쫓아오던 차를 향해 역주행을 시작했다. 쫓아오던 차량과 안쉘의 차가 교차한 순간.

탕-!

헤리엇과 상대가 동시에 총을 발포했다. 헤리엇은 제 귀를 스치고 가는 화끈함에 살짝 고개를 흔들었고, 사내는 목의 정 중앙에 총알이 관통했는지 피를 주르륵 흘리며 창문에 걸쳐 고꾸라졌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사내를 엄호하던 이가 튀어나왔다. 헤리엇은 그를 향해 다시 총을 발포했다. 하지만 사내는 재빠르게 차 밑으로 숨어들었다.

봉고차 유리가 방탄이었는지 총이 깊게 박히지 않고 퍽- 소리를 내며 유리에 흠집만을 내고 튕겨져 나왔다.

산에서 내려가는 고속도로였기 때문에 아래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가 보였다. 사내들은 다급하게 시동을 걸며 자리를 이탈하려고 했다.

헤리엇은 운전석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봉고차와 부딪친 충격 때문인지 안쉘이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날쌔게 조수석 쪽으로 자리를 옮긴 헤리엇은 잠시 기절한 안쉘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우고 운전대를 잡았다. 불편하지 않은 다리로 액셀을 크게 밟으며 도망가는 봉고차를 쫓았다.

그리고 안쉘을 한 손으로 보호하며 에어백을 터뜨리는 동시에 봉고차를 강하게 들이박았다.

안쉘에게 미안하지만 차는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찌그러지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헤리엇은 기름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는 것을 맡으며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에서 기름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위험해…….’

헤리엇은 지팡이와 챙기고 절뚝거리며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안쉘의 몸을 운전석에서 끌고 나왔다.

질질질 끌려가던 안쉘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완전히 망가진 제 차를 보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거… 새 차… 할부…….”

헤리엇은 다시 작게 웃으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엔저에게 연락을 시도하려는 모양인지 표정이 진지했다. 안쉘은 콜록거리다가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욱신거렸지만 저렇게 들이박았는데도 오히려 몸이 지나치게 멀쩡했다.

“대령께서는… 콜록, 아 이런, 음… 대령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아무래도 보고를 올려야 했다. 안쉘은 무참해진 제 애마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빌어먹을 대통령이 벌써 움직이는 것 같다며 숨을 죽이고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엔저 맥과이어에게 말해야 했다. 헤리엇은 핸드폰을 들고 가볍게 말했다.

“네 대통령 선거 출마 서류를 들고 갔어.”

“…….”

안쉘은 잘못들은 줄 알고 반문했다.

“무슨 서류요?”

“네 대통령 선거 출마 서류. 기탁금도 모두 엔저가 부담한다고…….”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선거 출마를 위해선 일정 금액의 기탁금이 필요했다. 그 금액은 생각보다 많았고, 대령의 보좌관으로 있는 안쉘에겐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었다.

안쉘은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할부금도 아직 남아 있는 차를 머릿속에서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충격에 입을 벙긋거렸다. 그가 말했다.

“그… 그거, 저 사인 안 했는데요?”

“음… 네 뜻은 알겠다고 엔저가 서류에 도장을 찍었어.”

헤리엇이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안쉘은 잠시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다가 고꾸라졌다. 그는 기절하면서 중얼거렸다.

“그거… 서류… 위조…….”

흑흑.

대통령 부하들에게 습격받았을 때보다 더 침착함을 잃어버린 안쉘이 기절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헤리엇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을 받았다는 헤리엇의 말에 엔저가 어디냐고 쩌렁쩌렁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선배 어디 다치지는 않았느냐고 소리 지르다가 귀에 총알이 스쳐 좀 상처가 났다는 소리에 엔저가 정말 스피커 밖으로 튀어나올 듯 소리치는 것까지 들렸다.

안쉘은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만약 천만분의 일의 기적이 일어나 대통령이 된다면 일단 저 자식을 한 대만 후려치자고.

훌쩍훌쩍.

정신을 잃기 전 안쉘이 서럽게 훌쩍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며칠 후, 기호 2번 안쉘 리가, 아주아주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로 찍은 전단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뿌려졌다.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손안에 든 종이를 주시했다. 심각하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안젤라가 웃겨 죽겠다는 듯 말했다.

“다툼 없는 세상을 위해, 기호 2번 안쉘 리?”

“…그만하십시오.”

안쉘이 드물게 안젤라에게 정색하고 말했다. 낯빛이 썩 좋지 않을 걸 보니 정말 싫은 모양이었지만 안젤라는 눈앞에 있는 전단을 볼 때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결국 웃음을 참다못해 숨을 못 쉬어 꺽꺽거리기까지 했다. 조그만 얼굴은 붉어져 터질 것 같았고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었는데 건들면 툭 떨어질 것 같았다.

안쉘이 전단을 보고 인상을 팍 찡그렸고, 그것이 안젤라의 마지노선이었다.

“꺄아아아하하하학!!!!”

“…방정맞습니다.”

안젤라가 그 말대로 방정맞게 웃으며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가 웃자 옆에서 겨우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리언도 푸흡 웃어 버렸다.

옛날에는 귀엽다고 생각한 웃음이 지금은 누구보다 얄미워 보였다. 웃고 있는 입을 잡아 쭉 늘여 버리고 싶었다.

안쉘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웅얼거렸다. 이따위 전단이 지금 전국에 퍼졌다고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르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단 말입니다. 갑자기 선거용 포스터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기껏 쫙 빼입은 정장이 어색했다. 안쉘은 능력이 발현된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고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안쉘은 모두의 생각대로 군인이 되었고, 서른세 살인 지금도 군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선거용 포스터 사진을 찍을 테니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라고 하면 더 어색해지기 마련이다.

포스터 안에는 엄청 어색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안쉘이 헤-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없었다. 2대8 머리는 누구보다 촌스러웠고 안경은 두꺼웠다. 열정적인 정치인보다는 깐깐한 반장쯤으로 보였다.

인지도가 없으면 인물이라도 좋아야지. 둘 다 어중간하게 아니니 이것도 나름 코미디라면 코미디였다.

“젠장, 그냥 웃으세요.”

안쉘이 결국 포기하며 말했다.

그러자 방금 웃었던 건 준비 운동도 아니었다는 듯 안젤라가 실성한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나름 안쉘을 오빠처럼 따르지만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웃겨서 미칠 지경이었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던 헤리엇은 혼자 평화로운 듯 작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늘 그렇듯 설탕은 네 스푼, 얼음은 갈아서.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넘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말이다.

햇빛에 아스러지는 하얀 머리카락을 만지며 헤리엇은 마치 귀여운 동물을 보는 것처럼 안젤라를 응시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안쉘은 자신들을 습격한 사내들이 실종되었다는 말을 헤리엇에게서 전달받았다.

분명 대령이 손을 쓴 것이겠지.

그리고 대통령에게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는데 안쉘은 휴대전화 전원을 종료하고 호수 안으로 던져 버렸다. 이후에 앤이 눈치도 없이 물에서 나와 안쉘에게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 같다며 손수 쥐여 주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말이다.

엔저는 그날 헤리엇의 상처를 보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쉘은 그날 인류가 멸망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헤리엇의 귀를 스치고 간 총탄 덕분에 헤리엇의 목덜미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하얀 피부에 흐르는 붉은색 피에 엔저는 흥분하면서도, 그것이 타인에 의한 상처인 것에 한동안 분노를 갈무리하지 못했다.

“휴… 그런데 지금 뭐하고 계세요?”

겨우 진정한 안젤라가 물었다.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너무 웃어서 배가 아팠던 모양인지 복근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안쉘은 최대한 포스터에서 시선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이번 대통령 후보 여론 조사 자료입니다. 이쪽은 제가 곧 방송에서 해야 할 연설, 그리고 단테 막심 대통령의 비리와 군사 실험의 바탕이 되는 증거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엔저 맥과이어 대령이 준 것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정리는 본인이 했다며 안쉘이 으스댔다. 안젤라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종이를 뒤적였다.

“중위님, 28%나 얻으셨네요?”

“대부분 엔저 대령님의 팬들입니다.”

안쉘의 뒷배로 엔저 맥과이어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언론을 통해 퍼뜨렸다. 사람들은 영웅인 엔저 맥과이어가 선택한 안쉘을 궁금해했다.

호기심은 곧 여론조사에 큰 영향을 줬다. 아마 이 이후에 대통령의 방해 공작이 더 심해질지도 몰랐다. 어쩌면 스캔들이라고 이상한 추문을 퍼뜨릴지도 몰랐지만, 그 부분에 있어 안쉘은 정말 찔러서 먼지 하나 없다고 확신했다.

군 생활 시절의 대부분을 엔저를 따라 군함에 올랐고, 그리고 지상을 위해 몸 바쳐 일했다. 사생활에 관해 해가 될 건 없었다.

“…….”

‘다만 요즈음, 좀, 그렇지… 그런… 음…….’

안쉘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이곳 주민들의 표를 확고히 잡아 두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들은 단테 막심보다 저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이니까요.”

그래 봤자 이 시골에 있는 주민은 고작 백몇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안쉘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사실 이런 곳에서도 단테 막심을 뽑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거 정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맞습니까.’

안쉘은 짓눌리는 압박감에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  *  *

어두운 새벽,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느닷없이 바람이 불었다. 고급스러운 아파트에 불어 닥친 바람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매우 조용하게 난간에 착지했다. 집주인이 아님에도 당당하게 베란다에 내려선 사내는 조용하게 들어온 행동이 무색하게 창문 유리에 주먹을 날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유리가 깨지자, 사내는 깨진 유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창문 잠금을 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적막한 내부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제집처럼 아파트에 침입한 그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엔저 맥과이어였다. 엔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긴 다리를 이용해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꽁무니를 뺏나 보군.”

엔저가 차가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불을 켜자 엉망이 된 내부가 보였다. 짐을 싸서 도망갔는지 옷장에 옷가지가 잔뜩 사라진 상태였다. 사치를 좋아하는 놈인데 금붙이 하나 없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먹고 튄 것 같았다.

하지만 엔저가 필요한 건 그딴 금붙이가 아니었다. 그런 재물 따위야 이미 그에게 차고 넘치는 것들이었다.

엔저는 먼저 집주인의 침실일 것으로 추정되는 방으로 들어갔다. 엔저의 손짓에 바람이 불지 않는 방 안에 거센 돌풍이 불어 닥쳤다. 어지러운 방이 더 엉망이 되어 갔다.

바람이 엔저의 검은 머리를 상냥하게 휘날리며 지나갔지만, 막상 물건에 닿는 바람은 그리도 매서울 수가 없었다.

콱, 쿵, 퍽.

온갖 소리를 내며 옷장이 부서지고 서랍이 모두 빠져나와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한 것인지 엔저는 미련 없이 방 안을 빠져나왔다.

거실을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상당한 수의 손목시계와 신발이 보였다. 워커부터 시작해서 운동화, 심지어 하이힐도 있었다. 급하게 나가느라 차마 전부 챙기지는 못한 것이다.

엔저는 이곳 역시 자신의 능력으로 엉망으로 헤집었다. 그 정도까지 하는데도 엔저가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설마 그것까지 가져갔나? 그럴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진 않았는데.

엔저는 초조하게 입술을 톡톡 치면서 생각했다. 방을 모두 뒤졌지만 나오지 않는 물건의 쓰임새를 떠올리며 엔저는 거실로 나왔다.

서랍장 위에 있는 TV를 응시하며 엔저는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멀리 떨어져 바닥에서 나뒹굴던 리모컨이 엔저의 손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눌러 비디오를 재생시켰다.

삐-.

비디오테이프가 안에 들어 있었는지 TV가 작은 노이즈를 생성시키다가 켜졌다. 예상대로 엔저가 원하던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는 엔저 맥과이어의 목숨이자 모든 것이기도 한 하늘 같은 선배가 있었다.

선배는 어렸고, 지금과 달리 금발에 녹안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생각나는 얼굴이었지만 엔저는 TV 속 어린이가 헤리엇임을 단번에 눈치챘다.

엔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재생되는 영상을 시청했다. 델타 막심이 차마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고 토악질을 한 영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엔저는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순간까지 당신은 아름다운 겁니까.

엔저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이미 그의 아래는 뻐근할 정도로 발기해 있었다. 헤리엇이 괴로워해서도 아니고, 그 실험을 보고 흥분한 것도 아니다. 온통 핏빛인 영상 안에서도 헤리엇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고했기 때문이다.

엔저는 저 실험을 막을 수 없었다. 헤리엇이 군 실험 연구용으로 팔려 갔을 당시에 엔저는 아직 능력 한 톨 발현되지 못한 얼뜨기였고, 가문의 기대만 받는 머저리였다.

막을 수 있었으면 바로 막았을 것이다. 헤리엇은 원래 능력도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우니까.

그 사실을 비관할 마음은 없었다. 헤리엇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간 엔저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독실한 신자라도 되는 것처럼 TV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눈물 흘리며 감탄했다. 감격에 벅차 눈물만 흘렀다. 엔저는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냉정했던 붉은색 눈동자에는 마치 신을 마주하게 된 신자의 벅참과 감동이 어려 있었다.

“아아. …아름다워요, 아름다워요. 나만의 인어.”

그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은 이를 한 명도 살려 두지 않겠다. TV 속 아름다운 인어는 자신의 것이다. 자신이 평생 모시고, 섬겨야 할 아름다운 레퀴엠이었다.

“그놈들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선배에게 했던 그 모든 실험과 똑같이 해 줄게요, 아아, 선배… 아름다워요.”

엔저의 사랑은 언제나 광기를 담아냈다.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엔저를 봤다면 안쉘은 진저리를 치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미친.’이라고.

*  *  *

헤리엇은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어젯밤에는 엔저가 외박하는 바람에 조금 외롭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후배는 항상 밤늦게까지 헤리엇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는데, 헤리엇이 잠들 때까지 창문 밖에 착 달라붙어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말을 이어 주었다. 헤리엇은 개운할 정도로 잘 잤음에도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역시 외롭다고 생각했다.

헤리엇이 보육원에 있을 때 알시타 막심이 매일 찾아오다가, 갑자기 어느 날부터 찾아오지 않았을 때도 느끼지 못한 외로움이었다.

알시타 막심은 아주 뜨거운 코코아를 헤리엇에게 알려 준 사람이었다. 보육원에 있는 모두가 원하는 달콤한 초콜릿 향을 풍기는 음료를, 헤리엇은 그날 처음 먹었다.

헤리엇은 호호- 불면서 코코아를 먹고 처음으로 뜨거운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는 차가운 건 잘 먹었지만 뜨거운 건 선천적으로 잘 먹지 못했었다.

그러자 알시타가 쓰게 웃으며 헤리엇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다음에는 차갑게 먹는 방법을 알려 주마.”

알시타가 그렇게 약속했다. 헤리엇은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알시타 막심은 헤리엇에게 코코아를 차갑게 먹는 방법을 알려 주지 못했다. 영원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헤리엇은 무기력한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치약을 짜고 칫솔질하는 손길이 기계처럼 일정했다. 세수까지 하고 밖으로 나온 헤리엇은 검은 티셔츠를 입고, 아래는 군복을 입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무력감이 없어지지 않았다. 헤리엇은 이 감정을 정의할 수 없어 곤란한 듯 작게 웃으며 현관을 열었다.

그리고 붉은색 눈동자를 보았다. 아름다운 보석을 박은, 마치 루비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자 헤리엇의 마음속에 있던 조그만 외로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헤리엇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서 와, 엔저.”

“다녀왔습니다, 선배.”

누가 보면 아주 몇 년 떨어진 줄 알겠지만 놀랍게도 둘은 어제 헤어지고 오늘 만난 참이었다.

헤리엇은 익숙한 길을, 함께 걷는 게 익숙한 후배와 걸었다. 군사 기지까지 멀진 않았지만 절뚝거리는 헤리엇의 걸음은 느렸으므로, 자연히 엔저의 보폭도 느려졌다.

초반에 헤리엇은 엔저에게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어쨌든 엔저를 배려하고 싶었다. 귀여운 후배가 지각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엔저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끈질기게 헤리엇의 뒤만 쫓았다.

“먼저 가도 좋아, 엔저. 수업에 지각하겠어.”

곤란한 듯 웃으며 말해도 엔저는 듣지 않았었다. 모른 척 헤리엇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뒤를 따랐다.

“어디를 다녀왔니?”

“잠시 회수할 것이 있어서요.”

다행히 엔저는 회수해야 하는 것을 찾았는지 짧게 대답했다.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곧 군사 기지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엔저가 문을 열고 헤리엇이 먼저 들어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켰다.

헤리엇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늘 그렇듯 연갈색 머리에 촌스러운 2대8 머리를 한 사람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안경은 매우 두꺼워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딱 봐도 어딘가의 만화 속 기숙사 사감처럼 보였다.

그는 엔저와 헤리엇에게 인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헤리엇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안쉘은 바쁘게 상자를 옮기고 있었는데 무슨 상자일까 들여다보니 알록달록 색종이가 그득했다.

“색종이?”

“네, 어제 주문했습니다. 다행히 일찍 도착했군요.”

안쉘이 고개를 끄덕이고 군비에서 보탰다면서 보고서를 헤리엇에게 건넸다. 몇 박스이긴 하지만 색종이 단가가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어서 헤리엇은 쉽게 결재 사인을 해 주었다.

“웬 거야?”

“마을 회관에 봉사차 다녀올 예정입니다. 어르신들 종이접기나 다른 놀이에 저도 참여할 생각입니다.”

안쉘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색종이가 참 알록달록 예쁘기도 했다. 헤리엇은 그의 방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투표에 투철한 어르신들을 먼저 공략하는 방법이었다.

색종이가 화려하니 눈길을 사로잡을 테고, 안쉘이 종이접기 같은 걸로 재롱을 떨면 누구든 좋아할 것이다.

“종이접기 할 줄 알아?”

“네.”

헤리엇은 사실 종이접기를 할 줄 몰랐다. 군 보육원은 다른 기관보다 시설이 좋은 편이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헤리엇의 하얗게 바랜 시선이 색종이에 머물자 안쉘이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몇 가지 할 줄은 압니다. 비행기나, 배, 학, 종이꽃도 접을 줄 압니다.”

“종이꽃도?”

“아카데미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머쓱하게 웃은 안쉘이 분홍색 색종이를 잡아 능숙하게 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종이로 된 예쁜 꽃이 완성되었다. 헤리엇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안쉘은 마법사구나.”

“마법사라고 할 것까진 아닙니다.”

안쉘이 피식 웃으면서 헤리엇에게 종이꽃을 넘겨주었다. 아니, 넘겨주려고 했으나 이걸 넘겨주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종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력한 본능이 그것을 막아 주었다.

“하하하.”

경직된 웃음을 흘리며 안쉘이 꾸깃하고 종이꽃을 주머니에 넣었다. 가지고 싶었는지 헤리엇의 시선이 잠시 안쉘의 손을 향했다. 그러자 엔저가 헤리엇의 옆에 앉으며 속삭였다.

“선배, 저도 접을 줄 압니다.”

“그래?”

“네, 선배만을 위해 접어 드리겠습니다.”

엔저가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옆에서 닭살이 돋은 안쉘은 혹시 어제 식용유라도 먹었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현명한 그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안쉘은 정말 직감과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붉은 색종이를 들고 몇 번 접던 엔저가 별안간 갑자기 눈을 감았다. 그의 뺨이 조금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안쉘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엔저가 수줍음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생각이란 것을 포기하며 살고 싶었다.

“왜 그래?”

헤리엇이 묻자, 엔저가 접고 있던 붉은색 종이꽃을 들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엔저의 눈가를 살며시 덮었다가 떨어졌다. 엔저의 뺨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붉은 눈동자가 잔잔하게 붉은색 종이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배를…….”

“응?”

“꽃이, 선배를 닮아서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안쉘이 옆에서 색종이를 정리하며 화들짝 놀라 엔저를 쳐다봤다.

‘여기서 대체 왜, 하필 지금. 둘만의 세계로 빠지는 건지 모르겠네!’

엔저는 손안에 있는 종이꽃을 여기저기 돌리면서 수줍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네.”

“어디가?”

헤리엇은 어딜 봐도 꽃을 닮았다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호리호리하지만 키가 큰 성인 남성이었고 종이꽃의 화려한 색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꽃을 닮은 건 엔저 쪽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검은 머리와 화려하고 정열적인 붉은색 눈동자를 가졌으니까. 하지만 엔저는 몇 번이나 꽃을 응시하면서 중얼거렸다.

“희고… 붉은 점이요.”

단면 색종이라서 한쪽 면은 색이 있지만 다른 한쪽 면은 흰색이었다. 종이꽃을 접다 보면 흰색과 붉은색을 어우러진 단아하고 정열적인 색의 완성품이 나오긴 했다.

“…음, 그래??”

“네, 선배는 온통 새하얀데…….”

수줍게 중얼거리는 엔저가 가라앉은 눈동자로 꽃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꽃을 들어 입술에 가져가며 눈을 감았다. 마치 종이꽃이 헤리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입술이 붉어요.”

엔저가 붉은 혀를 내밀어 종이꽃을 핥았다. 그가 꽃잎 부분에 혀를 집어넣고 질척하게 핥아 올리는 순간, 안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엔저의 요사스러운 혀를 빤히 보던 헤리엇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일어난 안쉘을 바라보았다. 안쉘은 너무 기분이 나빠 오소소 소름 돋은 팔을 진정시키며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음… 그래?”

“네! 안젤라와 리언에게는 제가 잘 전달해 놓겠습니다!!”

뭘 전달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쉘이 허겁지겁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헤리엇은 잘 가라고 인사도 못했다. 헤리엇은 다시 시선을 돌려 엔저를 쳐다봤다.

혀를 내밀어 종이로 만든 꽃잎 사이로 혀를 끈적하게 넣고 핥던 엔저가 다시 헤리엇을 쳐다봤다.

한 손으로는 꽃을 들고 혀를 안으로 깊게 넣으면서, 남은 한 손으로 헤리엇의 가슴을 쓸어 올렸다. 얇은 검은색 티셔츠 사이로 유두가 손가락에 걸려 한 번 튕겨 오르듯 치솟았다.

“…….”

“가슴도 붉어요, 선배.”

이미 종이꽃은 침으로 젖어 흐느적거렸다. 엔저는 그래도 못 참겠는지 헤리엇의 가슴을 밑으로 다시 쓸어내렸다. 헤리엇이 흠칫하고 뒤로 물러나자 이번엔 엄지와 검지로 헤리엇의 유두를 꼬집었다.

“하아… 선배.”

헤리엇은 시선을 내렸다. 이미 종이꽃 사이사이를 핥을 때부터 엔저는 이미 바지를 뚫고 나올 정도로 발기해 있었다. 헤리엇은 엔저의 손가락이 제 가슴을 아플 정도로 꼬집는 걸 내려다보기만 했다.

엔저는 엄지로 살살 유두를 문질렀다가, 이제는 꼿꼿하게 선 알갱이를 검지로 통통 튕겼다.

“…읏.”

헤리엇이 거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는 손을 더욱 대담하게 움직였다.

“선배는, 쓰다듬는 것보다 아프게 하면 더 붉어져요, 여기가…….”

엔저는 부드럽게 옷 위로 헤리엇의 가슴을 쓰다듬다가, 다시 아플 정도로 손가락 사이에 끼고 힘을 주었다. 고통에 익숙한 헤리엇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숨을 들이켰다.

헤리엇은 모든 감각에 둔했다. 그래서 실험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거고 유일한 생존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엔저가 쓰다듬을 때마다 온몸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신경 하나하나가 살아났다.

엔저는 헤리엇의 뺨에 서서히 붉은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며 못 참겠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정염에 번들거렸다. 옷 위로도 확연하게 보이는 헤리엇의 유두를 보면서 잡아먹을 것처럼 제 입술을 핥았다.

“선배… 보여 주세요, 부탁이에요.”

“…음.”

헤리엇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리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복부에 손을 집어넣었다. 헤리엇은 왜 이렇게 갑자기 손이 떨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검은색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새하얀 복근과 그 위로 갈비뼈가 도드라진 가슴이 보였다. 헤리엇은 군인인 만큼 잔 근육이 많았는데, 소식을 하다 보니 살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제 몸을 내려다보는 붉은색 눈동자에 잠시 바르르 떨면서 상의를 전부 위로 들어 올렸다. 드디어 드러난 붉은색 유두에 엔저가 침을 삼켰다.

헤리엇의 하얀 나신 위로 톡 하고 튀어나온 불그스름한 유두가 미친 듯이 색정적이었다.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색이었다.

“하아…….”

헤리엇의 신음에 엔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헤리엇은 눈을 내리깔고 엔저의 느린 동작을 감상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사락 소리를 내며 헤리엇의 가슴에 퍼졌다. 하얀색에 대조되는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거미줄처럼 헤리엇의 피부에 탐욕스럽게 달라붙었다.

헤리엇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닿는 부분이 간지러워 소파 위에 눕다시피 한 상태에서 허리를 틀었다. 그러자 엔저의 입술이 헤리엇의 갈비뼈 부근에 닿았다.

“…음.”

갈비뼈에 닿는 숨과 입술의 촉감에 헤리엇이 입을 우물거렸다. 사실 엔저는 이전부터 성욕이 왕성한 아이여서 이런 접촉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부끄러웠다.

엔저가 헤리엇의 갈비뼈 사이사이를 혀로 핥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플 정도로 꼬집힌 탓에 붉게 물든 유두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운 상태로 움직임이 뚝 멈췄다.

“……?”

엔저의 숨결이 간지러운 탓에 헤리엇이 고개를 들어 엔저를 보았다.

“선배, 아름다워요.”

“…….”

통통한 유륜을 따라 엔저가 혀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느리게 느껴지던지 헤리엇은 참지 못하고 허리를 띄웠고 엔저의 혀에 드디어 가슴이 닿았다.

잠시 눈을 크게 뜬 엔저는 녹을 듯 아름답게 웃으며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헤리엇의 붉게 물든 유두를 쪼옥 하고 빨아 당겼다.

“음…….”

기분 좋은 간지러움에 헤리엇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엔저는 이런 순간에도 헤리엇의 작은 웃음을 듣는 게 좋았다. 눈앞의 다디단 과실을 무는 것처럼 헤리엇의 유두를 핥고, 이로 살짝 깨물며 자극하니 헤리엇이 좋다고 다시 신음을 흘렸다.

헤리엇의 얄팍한 허리에 커다란 손을 올린 엔저가 선배의 몸을 농락했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하늘 같은 사람의 몸을 아래에 깔고, 입술로 농락한다는 배덕감에 엔저의 숨이 다소 거칠어졌다.

그는 입술을 떼고 타액에 젖은 붉은 유두를 감상하며 침을 흘렸다. 아름다운 몸이 이 검은 짐승에게 더럽혀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헤리엇은 누구보다 하얗고, 아름다웠다. 엔저가 목 안 깊숙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내뱉으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선… 배.”

지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엔저의 커다란 손이 헤리엇의 허리를 강하게 잡았다. 이렇게 강압적인 접촉은 처음이라, 헤리엇은 엔저가 색다르게 보였다.

예전의 엔저는 마치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 같이 굴었는데 지금은 더 안달하고, 괴로운 사람 같았다. 손에 힘을 조절할 수 없는 풋내기 애송이 같기도 했다.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그런 엔저가 무척 귀엽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과거에 성경을 읽으면서 왜 아담과 이브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과실을 먹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신 역시 지금 당장 엔저를 삼키고 싶었다.

“음… 귀여운 나의 루비…….”

헤리엇이 속삭이며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손을 올렸다. 분명히 아래에 깔린 것은 그인데도 마치 머리 꼭대기에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엔저는 간신히 신음을 참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벨트를 풀고, 한 손으로 지퍼를 내렸다. 엔저가 퉁 하고 튀어나온 성기 위로 헤리엇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헤리엇은 손에 닿는 뜨거운 것을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둥이 맥박 치면서 울컥하고 선액을 내뱉었다. 투명한 액이 헤리엇의 하얀 손목을 더럽히고 아래로 흘렀다.

“하아… 하아.”

엔저가 숨을 몰아쉬었다. 헤리엇은 엔저의 찡그린 얼굴을 올려다보며 두 손으로 성기를 포개듯 잡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감촉에 엔저의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헤리엇의 상체 위로 올라갔다. 소파가 좁은데 장정 둘이 눕다시피 하고 있으니 소파가 버티지 못하고 꺼져 버렸다.

그에 상관하지 않고, 엔저는 한쪽 다리를 바닥에 두고 헤리엇의 가슴 위, 정확히는 유두 위에 성기를 비볐다. 헤리엇이 웃으며 제 유두를 손에 잡고 단단히 받쳐 주자 이성을 잃은 짐승은 더욱 크게 움직였다.

“선배… 선배.”

붉은 유두가 성기의 마찰에 더욱 붉어졌다. 거친 움직임으로 감히 선배를 농락하던 후배는 그만 참지 못하고 정액을 터뜨렸다. 헤리엇의 목을 따라 대각선으로 왼쪽 뺨까지 더러운 액이 끼얹어졌다.

입술을 타고 흐르는 정액을 혀로 핥으며 헤리엇은 제 아랫도리를 응시했다. 그 역시 흥분해 있었다.

“…선배, 저도…….”

그러자 엔저가 제 검은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보기 좋은 구릿빛 복근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근육이 들어찬 복부에 손을 들어 함께 쓸어 올렸다. 엔저가 제 가슴까지 티셔츠를 올리며 말했다.

“제 가슴으로 자위해 주세요, 선배…….”

엔저의 말에 헤리엇은 손을 들었다. 방금까지 엔저가 했던 행동을 더듬더듬 되풀이하며 그의 가슴을 쓸어 올렸다.

“하아…….”

낮은 신음을 흘리며 엔저가 헤리엇의 성기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제 유두에 헤리엇의 성기를 비볐다.

“…음.”

헤리엇은 귀두에 걸리는 작은 알갱이에 신음을 흘렸다. 간지럽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헤리엇의 성기 선단에서 투명한 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엔저의 가슴에 묻은 투명색 액은 끈적하고 매끄러웠다. 엔저는 제 가슴에 헤리엇의 성기를 계속 비비면서, 헤리엇의 엉덩이 사이를 두 손가락으로 갈랐다.

액으로 질척거리는 헤리엇의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천박하게 움직였다. 가슴에 헤리엇의 성기를 끼고 움직이면서 그의 사정을 유도했다. 그리고 그의 구멍에 손가락 한 개를 더 넣고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성감을 자극했다.

“아, 아… 윽…….”

“하아, 선배… 붉어졌어요.”

제 옆에 바짝 굽힌 무릎과 허벅지에 키스하면서 엔저가 속삭였다. 내벽 깊은 곳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다가, 마치 뒤집을 것처럼 손목을 움직여 손가락 위치를 바꿨다. 그러면 헤리엇의 몸이 움찔하고 뛰어 올랐다.

엔저는 혀를 내밀어 유두에 닿은 헤리엇의 귀두에 경애의 키스를 했다. 구멍에 넣은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가 되었다. 벌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펼치기도 하고, 후비기도 하면서 깊은 곳을 찌르자 헤리엇이 허리를 띄우며 사정했다.

엔저는 제 머리카락에까지 튀는 헤리엇의 정액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불투명한 액이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최음제처럼 느껴졌다.

소파 위에 널브러진 헤리엇의 몸에, 하나둘씩 붉은 꽃이 피어났다. 어깨부터 시작해 배꼽과 성기 주변으로 아름다운 붉은 꽃이 피어났다.

“아아… 선배… 너무 아름다워요.”

정액을 얼굴에 뒤집어쓴 엔저가 마치 자신의 손으로 타락시킨 아름다운 천사를 보는 악마처럼 그렇게 속삭였다.

헤리엇은 엔저가 창문을 활짝 여는 걸 나른한 눈으로 응시했다. 딱 맞는 검은색 티셔츠는 엔저의 몸에 착 붙어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냥 평범한 군용 티셔츠인데 이상하게 금욕적인 동시에 색정적이었다.

엔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헤리엇은 홀로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노곤한 것이 마치 사우나실에 들어왔다 나온 것 같았다.

사무실을 환기하고,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 엔저가 다시 나왔다. 그는 제 검은색 머리카락에 묻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헤리엇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아마 수건을 뜨거운 물에 적시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었나 보다.

“왜 웃으십니까?”

“네가 정말 많이 컸다고 생각해서.”

엔저는 낮게 미소를 지으며 헤리엇의 뺨과 목덜미를 닦았다. 따듯한 수건이 몸을 훑으니 더욱 노곤해졌다.

드물게도 헤리엇은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엔저와 조용히 뒹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눈을 뜨자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헤리엇은 기분이 좋아져 엔저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내게 꽃을 접는 법을 알려 주겠니?”

“물론이에요.”

안쉘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들인 색종이지만 두어 장 쓴다고 뭐라 비난하진 않겠지.

헤리엇은 엔저와 소파 위에서 뒹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 맞은편에 있는 TV를 켰다. 삑- 하고 켜진 TV 채널에서 지방 방송이 시작되었다.

헤리엇은 색종이를 들고 자리를 잡았고, 엔저가 옆에서 수건을 조심스럽게 챙기고 있을 때, TV 안에서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어… 네.

엔저와 헤리엇의 고개가 단번에 TV를 향했다.

[대통령 안쉘 리 후보의 단독 인터뷰]

- 어… 그것이…….

무슨 맥락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안쉘은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륵 흘렸다. TV 화면 가득한 촌스러운 2대8 머리를 본 헤리엇은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색종이를 스르륵 떨어트리고 말았다.

- …다툼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쟤 저기서 뭐해?

미래의 안쉘 리가 지우고 싶어 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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