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엔저 맥과이어의 성욕 (6/30)

05. 엔저 맥과이어의 성욕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안쉘은 한숨을 쉬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이 시골 마을에 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혼란스러웠던 그날 이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안쉘은 정말 많은 일을 했다. 군이 보내 준 컨테이너를 나름 집처럼 열심히 꾸미고 단장했다. 빌어먹을 상관 새끼 때문에 이런 곳에 와 군 시설용 컨테이너에서 생활해야 했지만, 그것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시골 마을은 여름의 막바지 더위가 시작되었다.

긴소매 옷을 입기엔 더웠기에 모두가 반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바다에서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군함을 탈 땐 덥든 춥든 규정된 군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이곳에선 그게 잘 안 되었다.

더우면 군복을 벗었고, 흰 티 차림으로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아이고~ 총각 때문에 살았어.”

“예뻐라 예뻐. 몇 살이야?”

열심히 수박을 수확하고 있는 안쉘의 곁으로 노인들이 몰려왔다. 작은 마을이라고 치기엔 더럽게 많고 넓은 논밭 중에서 지금 수확 중인 건 제철보다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수박이었다.

차가운 보리차를 주면서 늙어 주름진, 그러나 그게 매력인 할머니들이 환하게 웃었다. 안쉘은 목장갑을 벗고 할머니에게서 조심스럽게 종이컵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땀을 훔치며 보리차를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켰다.

“서른셋입니다.”

“아이고, 젊어라.”

“우리 손녀 소개해 주고 싶어, 아주.”

할머니들이 꺄르륵 웃으면서 차례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안쉘은 쓰게 웃으며 종이컵을 옆 트럭 위에 올려 두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안쉘은 마을에 잘 적응하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나름대로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고, 특히 그중에 이장님과 술자리를 한번 가지면서 매우 편해졌다.

작은 시골 마을이니만큼 대부분 노인뿐이었다. 한 번도 이 산골짜기를 벗어난 적 없는 그들은 지상이 지금 바다와 전쟁 중인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안쉘은 땀을 닦으면서 다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아이고~~ 우리 귀여운 손녀 왔어!!”

“예뻐라 예뻐! 이거 먹어, 떡 먹어.”

“귀여운 내 새끼!”

수박밭에서 열심히 수박을 굴리고 있던 노인들이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곳에는 작은 키의 여성이 짧은 운동복을 입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에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그녀는 이 마을의 아이돌 안젤라였다. 그녀는 덧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는 떡을 덥석덥석 받아먹었다.

이 마을에서 힘쓰는 일을 하는 건 대부분 안젤라였고, 그녀는 안쉘도 감탄할 정도의 체력과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쉘이 두 시간 동안 땀 뻘뻘 흘리며 고생한 일을 안젤라는 단 30분 만에 해치워 버렸다. 그녀는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면서 방끗방끗 잘도 해 나갔다.

일을 끝내고 노인들에게 둘러싸여 떡을 먹던 안젤라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중위님.”

“네.”

안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위였다. 그러나 그가 상관인 엔저가 대령으로 승진하면서 저절로 진급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됐어요?”

“??”

“대선 출마요.”

“…아.”

잊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안쉘은 할머니들이 나눠 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그는 대통령 단테 막심이 저를 죽이려 특공대를 파견할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안젤라는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깔깔거렸지만 안쉘은 진심이었다. 대통령의 행적을 조사할수록 그의 잔혹함이 드러났다. 그는 인어들뿐만 아니라 인간을 가지고도 실험을 했다.

헤리엇은 442번째 실험체였다. 그동안 441명의 인간이 실험으로 살해되었다는 소리였다. 헤리엇은 마치 옛날의 빛바랜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사사이라고 불렸어. 가끔 어떤 연구자들은 넘버 사백사십이라고 불렀고.”

“…….”

“내가 최초의 성공작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앞에서 실험당한 이들은 고통과 부작용으로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안쉘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헤리엇의 고통을 느끼는 한계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아주아주 높았다. 아니, 그는 고통뿐만 아니라 감정 자체가 아주 희미했다. 그는 늘 곤란하다는 듯 웃었고,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있었다.

“연금은 얼마나 받으십니까?”

“오백만 원.”

“…….”

헤리엇은 한 달에 오백만 원이라고 하면서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 먹고 놀고 월급을 따로 받으면서 오백만 원이 꾸준히 나오면 좋긴 하지.

하지만 헤리엇이 받은 반인륜적인 취급과 실험은 그깟 돈으로 환산될 것이 안 되었다. 안쉘의 마음이 심란하든 말든 헤리엇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엔저의 정자 수가 아주 많아.”

헤리엇의 손에는 빽빽한 동그란 무언가가 찍힌 사진이 들려 있었다. 그은 아주 진지하게 그것을 뚫어질 듯 내려다봤다.

‘아, 예… 정자가 평균보다 많다니… 역시 엔저 대령입니다…….’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그는 몇 번이나 책상 위의 액자에 꽂아 둔 엔저의… 말하기 싫지만, 정자 사진을 힐끔거렸다. 안쉘은 저 빌어먹을 사진과 비슷한 것을 엔저의 책상에서도 보았다.

이 미친놈들은 서로의 얼굴이나 꽂아 둘 것이지 왜 팔팔했던 정자 사진을 교환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곧 끝나지 않나요?”

“…꼭 해야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안쉘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엔저는 안쉘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지만, 능력이 뛰어났고 머리도 비상했다. 그러니까 그 나이에 대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물론, 안쉘도 일반인과 비교해 그나마 나쁘지 않은 진급 속도였지만 천재 밑의 범인일 뿐이었다. 그의 결계는 엔저가 진심으로 공격하면 2초 이상도 버티지 못할 능력이었다. 그런 자신이 대선 후보로 출마한들 과연 누가 지켜 주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대령이 출마하는 게 훨씬 승산이 있는 싸움이기도 하고.”

안젤라는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안쉘은 우울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젤라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네, 상관없어요.”

안쉘은 연기가 그녀에게 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며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요즘 그는 그 일 때문에 무척 우울했다.

대통령 선거에 나간다고 치면, 그다음은?

그냥 나가면 되는 자리도 아니었고, 자신은 대통령 자리에 앉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려니 부모님의 등이, 자신의 손에 죽어 나간 인어들의 모습이 눈을 감아도 아른거렸다.

“…매운 게 먹고 싶네요.”

“매운 거요?”

“네, 눈물 나게 매운 거요.”

“우리 집에 캡사이신 있는데 드릴까요??”

안쉘은 전자 담배 전원을 끄면서 쓰게 웃었다.

“네, 눈물 빠지게 먹고 싶네요.”

안 그래도 요즘 울고 싶으니까.

안쉘은 안젤라에게 캡사이신 한 병을 통째로 받았다. 읍내에 나갔을 때 마트에서 사 온 것인데, 너무 매워서 그녀도 먹지 못하고 방치해 두었다고 했다.

안쉘은 냉장고 안에 뭐가 있었는지 떠올리면서 차를 몰았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차 내부를 통과했다.

더워서 안 되겠다.

안쉘은 조용히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켰다. 그러는 사이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고, 군 기지에 가까워졌다. 안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를 천천히 몰면서 앞서 걷고 있는 이를 불렀다.

“헤리엇 님.”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가고 있는 단정한 뒷모습은 누가 봐도 헤리엇이었다. 하얗게 바랜 그의 머리카락이 주홍빛 저녁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등을 돌린 헤리엇이 인사를 하며 물을 마셨다.

“어디 가십니까?”

“집에.”

“태워 드리겠습니다.”

“차를 타고 갈 정도는 아닌데…….”

헤리엇은 조금 작게 웃으면서 중얼거렸지만, 조수석에 순순히 타는 것을 보면 밖이 덥기는 더웠나 보다. 일반 사람보다 감각의 역치가 현저히 높은 눈앞의 사내는 더위에 무척 약했다.

“저녁 만들려고?”

노인들의 허락을 받아 밭에서 뽑은 배추와 감자 등이 뒷좌석에 쌓여 있는 걸 보면서 헤리엇이 중얼거렸다. 안쉘이 부드럽게 커브를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앤이 찾던데.”

“젠장, 그 변태 인어가.”

안쉘이 이를 벅벅 갈며 거칠게 핸들을 꺾었다.

호수에 인어의 거처를 만들어 주는 사흘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이를 벅벅 가는 것일까, 헤리엇은 작게 웃었다.

“함께 드시겠습니까?”

딱히 권유는 아니었지만, 예의상 물어보았다. 헤리엇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에 반응이었기에 안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집에 큰 냄비가 있어.”

“아, 감사합니다.”

안쉘이 가지고 있는 냄비는 조금 작아 요리하기엔 불편했고, 가스레인지가 없어서 빌어먹을 아궁이에 열심히 불을 붙여야 했다. 헤리엇의 집에는 가스레인지도 있고, 적당한 크기의 냄비도 있으므로, 그의 집으로 가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헤리엇의 집 앞에 부드럽게 주차한 안쉘은 저 끔찍한 군사용 텐트가 아직도 있다는 것에 몸서리를 쳤다. 옆 옆 건물의 리모델링이 끝났는데도 엔저는 도통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늦은 새벽, 안쉘은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온 국민의 스타인 엔저 맥과이어가 헤리엇이 자는 방 창문 앞에 딱 달라붙어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뒷모습을 말이다.

젠장, 전설의 고향이 훨씬 덜 무섭지.

안쉘은 그날 밤 악몽까지 꾸었다.

그는 속으로 익숙한 욕을 내뱉으면서 감자와 양파를 빠르게 손질했다. 칼과 도마를 꺼내 뚝딱뚝딱 써는 동안 헤리엇은 멍하니 초콜릿 과자를 먹고 있었다. 안쉘이 선반을 열면서 헤리엇에게 말을 걸었다.

“이 머그잔은 다 이용하는 것들입니까?”

“…응. 그 하얀 건 물 대용이고, 이건 음료수… 그리고 이건 코코아.”

왜 코코아 머그잔만 그렇게 거대한 거지.

헤리엇은 단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안젤라가 당뇨 걸린다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였다.

지금도 식전인데 헤리엇은 자연스럽게 초콜릿 과자 두 개를 까서 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인어도 단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인어가 되면 입맛이 달게 바뀌나.’

안쉘은 냄비 안에 채소를 쏟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카레 가루를 넣자 헤리엇이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카레…….”

“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데.”

“…….”

‘이 흔한 음식을 먹어 본 적 없다니.’

안쉘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는 동안 헤리엇은 ‘보통 사람의 열 배가 넘는 엔저의 정자’ 사진을 들고 소파 위에서 감상 중이었다.

그동안 인어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부모님의 복수를 고민하던 안쉘의 기가 팍 죽을 정도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물론 헤리엇이 들고 있는 사진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지만.

안쉘은 한숨을 쉬며 저도 모르게 캡사이신을 카레에 한 바퀴 휙 둘렀다. 정신 차리고 다시 크게 한 바퀴, 총 두 바퀴의 캡사이신이 카레에 뿌려졌다. 그리고 국자로 휘적거렸다.

대통령에 출마해서 만약 당선된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들었다. 안쉘은 지배계층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거라곤 그 빌어먹을 상관 새끼, 엔저 맥과이어보다 높은 계급을 가질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건 대단히 매력적이었지만 인어들과 지상을 위해서 안쉘은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카레가 완성되었다. 안쉘은 익숙하게 밥을 그릇에 담고 위에 카레를 올렸다. 그렇게 두 그릇의 카레가 완성되었다. 냄새는 아주 좋았고, 헤리엇은 제 앞에 놓인 것을 보며 다시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안 드십니까?”

“뜨거운 걸 못 먹어서.”

안쉘은 뜨거운 카레를 잘도 입 안에 욱여넣었다. 하지만 곧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맵기는 또 더럽게 매웠다. 카레가 좀 심하게 매운데… 하지만 딱 좋았다. 복잡한 머리를 풀어 주니까.

안쉘이 네 입 정도 먹었을 때 헤리엇이 카레를 겨우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헤리엇의 집 문이 벌컥 열렸다.

“대령님.”

침입자는 역시 엔저 맥과이어였다. 그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마치 방해꾼을 보는 것처럼 안쉘을 흘겼다. 엔저는 요즘 보는 이가 넋을 놓을 정도로 매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선배!!!”

안쉘을 흘기다가 헤리엇을 본 엔저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그는 헤리엇이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왜 그래?

안쉘도 덩달아 놀라 벌떡 일어났다.

“윽, 흑…….”

헤리엇은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엔저는 떨어지는 헤리엇의 눈물을 아깝다는 듯 손바닥으로 받으며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어떤 새끼입니까.”

그는 감히 제 선배를 울린 이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안쉘은 헤리엇의 입가가 붉게 변한 것을 보고 눈치채고 말았다.

놀랍게도 헤리엇은 매운 것을 먹고 엉엉 우는 중이었다. 군의 생체 실험을 버티고,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던 사내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그 씹새끼… 제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아주 살벌했고,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지로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는 헤리엇이 눈앞에 안쉘이 만든 음식을 먹고 우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매어…….”

헤리엇이 풀린 혀로 말했다. 새하얀 눈동자에서 눈물이 보석처럼 뚝 떨어졌다. 안쉘은 이 상황에서도 엔저가 헤리엇 몰래 손바닥에 모은 눈물을 혀로 싹싹 핥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매… 매, 매어….”

“어떤 씹새끼라고요?”

“흑…….”

헤리엇은 매운 것을 못 먹고, 자극적인 음식에 젬병이다. 새로운 정보를 획득한 안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용히 카레 두 그릇을 싱크대로 버리며 다짐했다.

대통령 꼭 하자.

적어도 이 일을 들켰을 때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  *  *

시골의 아침은 무척 빠른 편이다.

어딘가의 배경음처럼 꼬끼오- 하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아침이 시작되었다. 헤리엇은 아침잠이 많고 저혈압이었기 때문에 한참 동안 침대에 앉아 잠을 쫓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화장실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입가가 얼얼한 걸 보니 어제 먹었던 그 엄청나게 매운 카레가 어지간히도 강했나 보다. 헤리엇은 이제 카레 따윈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칫솔을 물었다.

자극적인 음식에 심하게 약한 그는 아침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찾기 힘든 편이었다. 진한 국물은 어렵고 찌개도 힘들었다.

그래서 헤리엇은 아침을 대부분 연두부나 두유로 해결하고는 했다. 가끔 과일을 먹곤 했지만, 그렇게 많이 챙겨 먹지는 못했다. 다만, 단것은 예외였다.

헤리엇은 간단하게 씻고 나와 검은색 티셔츠를 구겨 입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도저히 군복을 입을 수가 없었다. 군화는 이미 저 멀리 버려둔 지 오래였다. 헤리엇은 군법에 어긋나지 않은 심플한 검은 샌들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의 귀여운 후배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헤리엇이 나오는 타이밍을 어떻게 맞추고 나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헤리엇은 잠시 곤란한 듯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잤어?”

“네, 잘 잤습니다.”

“음…….”

엔저의 얼굴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는 이곳에 오고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삶의 활력을 찾은 사람 같다고 말하며 안쉘은 헤리엇을 한 번 쳐다보고 땀을 흘렸었다.

엔저는 도시 생활보다 시골 생활이 더 어울리는가 보다.

“오늘의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음… 오늘은, 딱히 없네.”

이곳의 여름은 수확의 계절이다.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노인이었고, 그나마 있던 젊은이들도 도시로 이주했다.

그래서 수천 제곱미터가 넘는 논밭을 관리하기 힘들어질 때 주민들은 군 기지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면 안젤라는 신이 나서 뛰어나가 밭일을 후딱 끝내 버렸다.

언제 한번 그녀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보니 오히려 몸을 움직여서 너무 좋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수확을 도와주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는 안쉘과 안젤라가 고생해 준 덕분에, 여름 내내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수박을 잔뜩 받고 말았다.

“낚시나 할까.”

“네.”

“인어라도 낚으면 좋겠네.”

“하하… 하하하하하!!!”

또다시 나온 헤리엇의 죽음의 유머에 엔저는 다시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헤리엇은 제 유머에 웃어 주는 사람은 엔저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뿌듯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엔저는 한참 웃다가, 감동한 눈으로 헤리엇을 응시했다. 그는 감히 자신이 선배의 유머를 들었다는 사실에 감명받은 듯 보였다.

“선배의 유머 감각은 정말 못 당할 것 같습니다.”

“음… 그래?”

“네. 제 배꼽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헤리엇은 작게 웃으며 엔저의 검은 티셔츠를 살짝 들어 올렸다. 매끈해 보이는 하얀 아랫배에 근육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디서 운동을 하는지 참 탄탄하고 든든한 몸이었다.

헤리엇은 엔저의 배꼽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조금 탁하게 흐려졌다.

“배꼽이 있는데?”

“아… 네.”

“엔저?”

“…네.”

잠시 흐려졌던 눈동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마치 이성이 우주 밖으로 튀어 나갔다 들어온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네, 발기했습니다.”

딱히 그걸 물어본 게 아니라, 영혼을 어디 빼놓은 사람처럼 굴어서 물어본 건데…….

역시 엔저는 착실했다. 유머에 웃어 주다가도 갑자기 발기하는 엉뚱한 후배였다. 헤리엇은 살짝 웃으며 엔저의 배를 쓰다듬었다. 진정하라는 손짓이었지만 오히려 엔저의 상태는 실시간으로 나빠지는 중이었다.

헤리엇은 살그머니 엔저의 검은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만지고 싶었던 배꼽과 복근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엔저는 아주 얌전히 헤리엇의 손길을 받으며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하아…….”

뜨거운 한숨을 흘리며 엔저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땀 한 방울이 또르륵 떨어졌다.

요즘 헤리엇은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엔저에게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아름다운 눈동자부터 시작해서, 매혹스럽고 섹시한 입술까지 엔저의 모든 것에 홀린 듯이 시선을 사로잡혔다.

특히 눈빛에는 욕정으로 가득하면서, 얌전하고 조신하게 헤리엇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 주는 그가 요물 같았다.

헤리엇이 근육으로 이뤄진 복부를 만지다가 옆구리로 옮겨 쓸어 올리는 동안, 엔저는 조용히 티셔츠를 입에 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조용히 올라갔다. 흥분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커진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발기하는 건강한 후배의 뒤처리를 해 주느라 헤리엇의 출근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오셨습니까?”

조용히 소파에 앉아서 서류를 뒤적이던 안쉘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촌스러운 2대8 머리를 각 잡은 것처럼 아주 말끔하게 고정하고, 알이 두꺼운 안경을 썼다.

헤리엇은 그의 매끈한 이마가 이젠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 절뚝거리면서 걷는 헤리엇의 뒤로 엔저가 따라 들어왔다.

안쉘은 짐승 같은 직감으로 아침부터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영리하게 모른 척했다. 그리고 종이 몇 장을 들고 헤리엇에게 다가왔다.

헤리엇이 요 며칠 겪은바, 안쉘은 정말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었지만 일 처리가 빨랐고, 능력은 꽤 유용했다.

안쉘은 육탄전과 전략에 강한 엔저와 다르게 보기보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그는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바로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어제저녁 대통령에게 전화로 임무를 보고하기까지 했다. 목소리에 떨림은 없었지만 헤리엇은 그의 손끝이 피가 안 통할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헤리엇과 엔저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젤라와 리언이 양손에 수박을 들고 방긋 웃으며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안젤라는 출근하다가 옆집 할머니에게 받았다며 수박을 내려놓았다.

노동의 대가로 받은 수박들도 아직 처리하지 못했는데…….

안쉘은 조용히 수박을 굴렸다.

“피자나 햄버거가 먹고 싶네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게 생기셨는데 의외네요?”

“좋아합니다. 평범하게.”

안쉘은 창문을 열고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방 안으로 연기가 들어오지 않게 조심하면서 몇 모금 더 빨더니 전원을 껐다. 읍내에 나가도 전자 담배 액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아껴 피워야 했다. 결계로 출입구와 창문을 차단한 안쉘이 고개를 돌렸다.

헤리엇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안쉘의 전자 담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이걸 피우겠다고 덤비면, 저는 저 뒤에 있는 분에게 죽습니다. 안 그래도 카레 사건으로 몸을 사리는 중이던 안쉘은 재빠르게 전자 담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안쉘이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모았다. 헤리엇은 소파에 앉은 안젤라와 리언의 표정이 썩 좋지 못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안쉘의 브리핑은 길었고, 재미가 없었다. 틀에 박힌 군인이라는 타이틀에 알맞은 안쉘은 깐깐하고 꼼꼼하게 안젤라와 리언을 지적했다. 시골 마을에 좌천되어 자유롭게 살아가던 망나니들의 최후였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맺혀 떨어질 정도로 더웠다. 헤리엇은 냉장고에서 텀블러를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날이 점점 더워지니까 지상에 있기 힘들었다.

오늘은 인어 앤을 만날 겸 호수를 찾아갈까, 헤리엇은 짧게 고민했다. 안쉘은 안젤라와 리언이 꾸벅꾸벅 졸 때까지 브리핑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선생님 앞에 서 있는 학생처럼 두 사람은 괴로워했다.

“그리고 곧 대통령이 감시인을 보낼 겁니다.”

“감시인이요?”

“네, 그냥 지방 군사 기지 감시원이니 긴장하지 말고…….”

아니, 이미 글렀구나.

안쉘이 대선 후보로 나서서 지금 대통령을 밀어낼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아는 안젤라와 리언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지금 말만 듣고도 저 모양인데 실제 사람이 오면 아주 볼 만하겠군.’

안쉘은 두 사람을 조용히 순찰조에 넣어 보내 버리자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군 정기 건강검진이 있을 예정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예외는 없으며 능력자들은 특수 검진까지 받습니다.”

“아… 벌써.”

“귀찮네.”

도시라면 종합병원과 큰 병원이 있으니 상관없었지만, 지금 이곳은 병원이라곤 보건소 하나뿐인 시골이었다. 특수 검진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은 읍내에도 없었다. 검사를 받으려면 도시까지 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2년에 한 번씩 받아야 하는 검진인데 할 때마다 성가시고 귀찮았다. 특히 남자들은 성기능 검사까지 받아야 했다. 리언은 왜 능력자들의 성기능 검진이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투덜거렸다.

브리핑까지 끝내니 정말 할 일이 없었다. 마을에 없는 파출소 대신 주민들이 찾아오는 것 말고는 외부인 출입도 없었고, 안쉘이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중이었지만 도움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다.

그때 헤리엇의 귀여운 두 참새가 아까 가져온 수박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안젤라가 한 손으로 수박을 고정하고 손끝을 세웠다. 그리고 단단한 껍질에 손을 휘둘렀다. 어이없을 정도로 수박이 쉽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헤리엇은 그 기행에 짝짝 손뼉을 쳤다.

리언이 수박 즙이 튄 제 볼을 닦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윽고 그는 사무실 구석에서 한 손엔 과도를, 반대 손에 도마를 들고 나왔다. 그가 능숙하게 수박 한쪽을 도마 위에 올리고 열심히 수박을 먹기 좋게 잘랐다.

리언이 칼질하는 동안 안젤라는 나머지 수박도 같은 방식으로 두 동강 내려고 하다가 리언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대령님.”

엔저는 안쉘에게 무언가를 건네받고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헤리엇에게 다가갔다.

“선배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음… 언제 돌아와?”

“점심시간 전에는요.”

지금 시간이 오전 10시 23분이니, 그렇게 오랜 부재는 아니라는 소리다. 엔저가 밖으로 나가자 안젤라가 어깨에 힘을 쭉 빼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엔저의 팬이었고, 그는 전 세계적인 유명인이었다. 그가 아무리 헤리엇에게 친근하게 굴어도 헤리엇 한정일 뿐이기에 그녀는 엔저가 어려웠다.

“안쉘 중위님은 언제부터 엔저 대령님과 페어가 되셨어요?”

페어라기보단 끌려다니는 상태라는 게 더 정확하지만, 안젤라의 물음에 안쉘은 수박 한 덩어리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건 헤리엇도 궁금했다. 안쉘은 꽤 오랜 시간 엔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는지 매우 익숙하게 그를 다루고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엔저가 부관 중 유일하게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한 5년 정도 됐습니다.”

“어땠어요?”

“…….”

안쉘은 악몽을 떠올리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헤리엇이 이 시골로 내려온 게 5년 전이었다.

“처음에는 영웅과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솔직히 우습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대령님은 그때 당시 스물두 살이었고, 저보다 어렸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엔저 맥과이어는 소문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사내였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지 안쉘이 몇 번 팔뚝을 쓰다듬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절대로 대령님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절대요.”

그게 설령 지상 쪽 최고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라고 해도, 안쉘은 진심으로 엔저 맥과이어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엔저 대령님은 대부분 검진에서 올 S를 받았죠?”

언제 한번 건강검진 결과가 뉴스화된 적이 있었다. 안젤라가 국에 밥을 말아 먹다가 뉴스를 보면서 감탄했었다. 국민 영웅은 프라이버시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건강검진은 모두 건강한 상태였고, 능력 수치 역시 올 S였다. 그 외 특수 검진에서도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게 뉴스 내용의 요지였다.

“그렇죠…….”

안쉘은 이것까지 말해도 될지 잠시 머뭇거렸다.

“한 개 빼고 모두 다 양호한 상태셨습니다.”

“한 개?”

엔저 맥과이어가 흠이 있다고?

모두가 고개를 들어 안쉘을 쳐다봤다.

“네. Sexual Function Test는 최하점인 F가 나왔습니다.”

Sexual Function?

헤리엇마저 눈을 크게 떴다.

“…F 받으면 뭐예요?”

엔저 맥과이어가… 그러니까, F를 받은 게 하필이면 성기능 검사라 이거지? 거기서 만약 최하점을 받으면 뭐가 되나?

“고자라고요.”

사무실 안에 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

*  *  *

국가에서 지정한 건강검진은 군 복무 중인 이들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리고 크게는 능력이 없는 일반인과 능력자로 구분했다.

능력자들은 의무적으로 2년에 한 번씩 특수 검진을 받는데 이게 참 해괴한 게 많았다. 성기능 검사도 그중 한 가지였다. 테스트는 최고 S등급에서 최하 F등급으로 나뉘었는데, 말이 기밀이지 사실 다 까발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건 전쟁 영웅이기도 한 엔저 맥과이어도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결국 테스트로 인해 엔저 맥과이어가 고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다행히 언론에 그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막아 놓은 덕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퍼지는 것은 막았다. 전 세계적으로 고자 영웅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군 내부에서 암암리에 퍼지는 소문은 막지 못했다.

어쨌든 엔저 맥과이어는 그 사실에 대해 딱히 크게 신경 쓰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건 엔저가 무기력하거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엔저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쉘이 보좌관으로 파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검진을 받은 그를 비웃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가족, 혹은 가문의 이름을 믿고 설쳐 대는 엔저 맥과이어라고.

고자라는 사실과 능력이 비례하는 것도 아니건만 겁도 없이 엔저에게 시비를 거는 놈이 하나둘씩 생겼다.

툭.

예전에는 엔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던 험상궂게 생긴 군인 한 명이 어느 날 엔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콧수염을 잔뜩 기른 그는 엔저와 동기였다. 계급이 한참 아래였음에도 사내는 미안한 표정은커녕 이죽거렸다.

“미안해, 고자 소령.”

“…….”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당시의 엔저 맥과이어는 해상 전투에서 여섯 번째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참이었다. 안쉘이 옆에서 엔저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는 딱히 화를 내거나 반격할 생각을 하고 있어 보이진 않았다. 엔저는 그저 멀어지는 사내의 등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엔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같은 계급의 노인도 이때다 싶은 듯 시비를 걸어왔다. 그는 평소에 자신보다 어린 엔저 멕과이어와 같은 계급을 가진 것에 불만을 품은 쪼잔한 사내였다. 하지만 역시 엔저는 그에게도 아무런 제제나 화를 내지 않았다.

‘의외로 평화주의자인가? 아니면 머저리?’

그런 모욕을 당했는데도 가만히 있는 엔저를 보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에 안쉘은 한숨을 쉬곤 했다.

엔저는 굉장히 무심한 성격을 가졌고, 자신에게 열등감을 가진 이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적의 수를 더 키우는 지름길이었지만 신경 쓰진 않았다.

그러나 엔저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간과했다는 걸 며칠 뒤 알게 되었다.

“아…아아아악!!!!!”

엔저와 대련한 사내의 두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엔저는 검은색의 가벼운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 헤드기어를 쓰고 있었지만, 딱히 필요 없어 보였다. 능력을 쓰지도 않고 사내를 무릎 꿇린 엔저가 붉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안 부러졌잖아.”

그리고 엔저는 기이하게 꺾인 사내의 무릎을 향해 다시 발차기를 날렸다. 그 후는 안쉘이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얗게 질린 이들이 군 의료반을 찾아 데려왔다. 두 다리가 부러진 놈은 저번에 엔저에게 시비를 건 그 동기였다. 그는 두 번 다시 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군사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엔저는 전에 시비를 걸었던 같은 계급의 노인과 군함 해상전투 훈련을 위해 바다를 가로지르며 훈련을 치렀다.

엔저와 모든 군함이 훈련을 끝내고 기지로 돌아왔을 땐 놀랍게도 함께 있던 늙은 소령이 행방불명 된 다음이었다. 바다 위 행방불명(IMO) 판정이었다.

“늙은이가 바다에 빠졌나 보지.”

엔저는 웃지도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흘 뒤 구조된 사내는 엔저만 보면 비명을 지르며 게거품을 물었다. 기절해 눈을 까뒤집은 그 역시 군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허공에 둥둥 떠서 의자에 앉은 것처럼 다리를 꼬는 엔저를 보며 안쉘은 생각했다.

‘저 독한 새끼. 사이코패스…….’

*  *  *

“그… 대령님은 건강하시잖아요.”

안젤라의 말에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기 왕성한 후배는 헤리엇이 조금만 움직여도 발기할 정도로 건강했다.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하는 엔저가 고자라니… 차라리 헤리엇이 단걸 끊었다는 사실을 믿겠다고 안젤라가 중얼거렸다.

안쉘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백분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지만, 시선은 헤리엇에게 향해 있었다. 설마 엔저 맥과이어가 그 정도로 순정남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이걸 순정이라고 표현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욕이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됐기 때문입니다.”

안쉘의 중얼거림에 그곳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헤리엇을 향했다. 헤리엇은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본 안젤라가 화들짝 놀랐다.

“대장 얼굴이 마치 코코아에 휘핑크림을 올릴까 말까 고민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요즘 건강에 관심이 많은 헤리엇 다운 고민이었다. 따듯한 코코아에 휘핑크림을 올리느냐 마느냐가 요즘 그의 최고 고민거리였다.

“뭐… 시비 걸거나 무시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놈들 모두 대령님 손에 군 생활을 마감했다고 말하는 안쉘의 귀에 쨍그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헤리엇이 아끼던 머그잔 하나를 손에 놓쳐 바닥에 떨어트렸나 보다.

“이런,”

안쉘은 바닥에 떨어진 헤리엇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혀를 찼다. 그리고 얼른 헤리엇을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

“……?”

안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썹에 힘을 줬다. 제가 본 광경이 정말 맞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안젤라와 리언마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헤리엇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는 정말 제대로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엔저 덕분에 눈으로 대화할 수 있게 된 안젤라와 안쉘이 고갯짓했다. 둘이 같은 안 씨더니 마음마저 통했나 보다

‘몰라요.’

안젤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음, 안쉘 혹시… 조금 얘기 나눌 수 있을까?”

나였던 건가. 무슨 실수를 한 거지?

계급으로 따지자면 훨씬 위인 안쉘의 얼굴이 헤리엇과 같이 하얗게 변했다. 헤리엇을 건들면 분명 엔저에게 반 불구가 된 녀석들과 똑같은 꼴이 될 것이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 옆에 할머니가 오이 좀 따 달라고 했어요.”

“이장님이 순찰하자고 했는데…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불똥이 튈까 봐 걱정하던 안젤라와 리언이 잽싸게 사무실을 나갔다.

젠장, 오이는 겨우 열두 그루밖에 없는 조그만 텃밭이고, 이장님은 어제 밤새 술을 먹어 점심시간에나 순찰을 할 텐데!

안쉘은 부러운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의 등을 응시하며 손을 들었다. 헤리엇에게도 표정이 드러날 수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안쉘은 심각한 상황에서도 업데이트했다.

뭐가 그렇게 느긋한 헤리엇 알스터를 긴장하게 했는가.

“…엔저는.”

그런가. 역시 엔저 맥과이어 때문이었나.

안쉘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헤리엇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얀 얼굴에 묘하게 붉은색을 띤 입술이 겨우 열렸다.

“그렇게 보여도 마음이 여리고 착하잖아…….”

“…….”

“…….”

“…네?”

그만 대답할 타이밍을 한 박자 놓치고 말았다. 요즘 귀가 이상해서 계속 헛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며 헤리엇의 말에 이번에는 꼭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한번 더…….”

“엔저가 그렇게 보여도 사실 마음이 여리잖아.”

“…….”

안쉘은 멍한 얼굴로 그만 침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살면서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게 힘들었다.

마음 여린 놈이 대련을 핑계로 동기 다리를 부러트리고, 선배를 바다 한가운데 표류시킵니까.

“놀림을 받으면 분명 슬퍼할 거야.”

지금 헤리엇의 머릿속에는 군 동기들, 친한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우울해하며 눈물을 훔치는 엔저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안쉘이 그 상상을 보았다면 뒤로 넘어가 온몸을 비틀며 아니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엔저는 무척 그… 왕성한 애잖아.”

물론 그건 신처럼 모시는 선배님 한정이지만, 헤리엇 혼자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수많은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군 실험실에서 살아남았을까에 대해 안쉘은 진지하게 의문을 가졌다.

헤리엇은 하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엔저가 적어도 F 판정은 받지 않을 방법이 없을까?”

아하… 그러니까 이건 지금 상담이구나.

안쉘은 엔저가 검사할 때 헤리엇이 앞에 서 있기만 해도 특 S급은 받을 거라는 조언을 목 안쪽으로 삼켰다.

분명 안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헤리엇은 엔저에게 가서 ‘내가 앞에 있으면 S급을 받을 수 있다는데 정말이니?’ 하고 물을 것이고, 엔저는 ‘어떤 놈이 F라고 말했습니까?’라고 묻겠지.

안쉘은 침을 꿀꺽 삼키고 헤리엇에게 속삭였다.

“그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

안쉘은 방법을 제시했고, 그 방법 또한 헤리엇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엔저는 굉장히 멋있었다. 그건 아마 헤리엇의 눈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저 멀리 있던 의료진들이 멍하니 엔저의 너른 등을 보며 뺨을 붉히며 힐끔거렸다.

인간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영웅, 많은 이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엔저는 이미 병원에서 극진히 모셔야 할 귀빈 중 하나였다.

검진을 위해 가운으로 갈아입은 엔저는 정말 섹시하고 근사했다. 쇄골이 얼핏 보였다가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모습이 단정하면서도 퇴폐적인 미를 자랑했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엔저 맥과이어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의 손에는 헤리엇의 손이 잡혀 있었다. 지팡이가 없으니 인간 지팡이가 되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헤리엇은 역시 자신의 후배는 상냥하고, 또 자상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선배의 보틀… 제가 가져도 됩니까?”

엔저가 마치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그윽하게 말했다. 헤리엇은 눈동자를 굴려 그를 응시했다. 병원 내부는 많은 군인이 검진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엔저 맥과이어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엔저는 그런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보틀?”

“혈액과 소변을 담는 시험관입니다.”

“아… 가져갈 수 있어?”

“선배가 허락해 주신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오겠습니다’라는 말이 안쉘의 귀에 환청처럼 들렸다가 사라졌다.

헤리엇은 곤란한 듯 작게 웃으면서 제 하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게 왜 필요한진 모르지만 어쨌든 후배가 달라고 하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보틀은 병원의 것이고 헤리엇이 어떻게 할 순 없었겠지만, 아끼는 후배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근사하게 웃으면서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말하는 꼴 좀 봐라…….’

안쉘은 눈썹이 찌푸려질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그리고 헤리엇을 향해 엄지를 척 내밀었다.

헤리엇은 그것을 보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엔저가 두 사람의 사인에 눈을 번뜩이며 안쉘을 응시했다. 네가 뭔데 감히 우리 선배와 사인을 주고받느냐는 시선이었다.

오금이 저린 안쉘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이물질이 사라지자 엔저가 다시 환하게 웃으며 헤리엇의 어깨를 잡고 부축했다. 헤리엇은 눈을 굴렸다.

“엔저, 나는 저쪽에서 검진을 받아야 해.”

“…….”

엔저와는 정반대의 검사실이었다. 선배와 단둘이 검진을 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엔저는 풀이 죽었다. 그래도 헤리엇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는지 엔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머리 꼭대기가 잔뜩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저러다가 다시 성기능 검사에서 F 판정을 받으면 어쩌나 싶어 헤리엇이 엔저의 귀에 속삭였다.

“엔저.”

“네.”

헤리엇의 손이 서서히 자신의 가운 앞섬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 가운을 흐트러트렸다. 엔저의 시선이 헤리엇의 손을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혹시 너무 보고 싶은 선배의 환상이라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천국에 왔나.

0.1초 동안 수없이 많은 생각이 뇌를 통해 빠져나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굳어지는 엔저를 보고 헤리엇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아닌가? 하지만 이러면 분명 검사에서 S등급은 물론,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안쉘이 그랬는데.

“…좋은 등급 받아와 엔저, 상을 줄 테니까.”

그래도 일단 안쉘이 알려 준 대사까지 하고 헤리엇이 다시 엔저를 쳐다봤다. 엔저의 양미간이 좁혀지며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보였다.

그의 시선은 헤리엇의 살짝 드러난 가슴을 향했다. 정확히는 하얗고 하얀 신체에서 유일하게 분홍색으로 물든 그곳을.

‘젖꼭지를 보면 분명 뭔가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상하군.’

헤리엇은 혹시 그 가슴이 제 가슴이 아니라 엔저의 가슴이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엔저가 조용히 등을 돌렸다.

헤리엇은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엔저가 고자라고 오해받아 놀림거리가 되는 게 싫었다. 여리고 심성이 착한 엔저는 분명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도 상처받았을 것이다.

엔저가 상처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울적해진 헤리엇이 서서히 뒤돌아 걸음을 한 발자국 옮겼다. 동시에 엔저가 들어간 검사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 기계가 고장 났어요!!!!”

“수치가 끝도 없이 올라가요!”

간호사들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는 게 병원 내부에 울려 퍼졌다.

엔저 맥과이어, Sexual Function (측정 불가)

푸쉬쉬쉬-.

연기가 나는 검사실에서 엔저는 마치 히어로 영화에서 히어로가 등장하는 것처럼 아주 멋있게 등장했다.

그는 병원 가운을 펄럭이며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그의 뒤로 고장 난 기계에서 쉴 새 없이 검은 연기가 나와 병원 내부를 가득 채웠다.

“사고 쳤구나!! 사고 쳤어!!”

저 멀리서 안쉘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고 음습하게 헤리엇을 향했다. 정확히는 가운 아래에 자리한 헤리엇의 흐트러진 쇄골이었다. 놀랍게도 엔저는 가운을 뚫고 나올 것처럼 발기해 있었다.

역시, 고자가 아니라니까.

헤리엇은 감동하여 두 손을 벌렸다.

“이리 온, 엔저.”

“이리 온, 엔저.”

예전에 헤리엇이 그렇게 부르면 귀여운 엔저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치 주인에게 부름을 받은 고양이처럼 목을 쭉 빼 내밀었다. 그리고 도도도 헤리엇에게 달려왔다.

짧은 다리로 후다닥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 엔저는 헤리엇의 주변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웃지 않는 얼굴에 경계가 가득했다.

작고 귀여운 엔저의 행동에 헤리엇은 몇 번이나 검은 머리를 쓰다듬고, 만지고, 헝클면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에 엔저의 귀가 작게 움찔거렸다. 엔저는 이상하게 헤리엇의 웃음소리를 좋아했다.

그는 헤리엇에게 없는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머리도 좋았고, 귀여웠다. 엔저는 그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무척 근사하고 멋있게 자랐다.

그럼에도 헤리엇은 과거의 기억들 때문인지 확실히 엔저를 조금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의 엔저는 헤리엇의 신장을 훌쩍 넘겼고, 능력은 어쩌면 헤리엇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푸쉬쉬쉭-.

검은 연기를 등지며 멋지게 걷던 엔저는 주변의 패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헤리엇을 향해 직진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며 기다리는 헤리엇의 품으로 들어가,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귓가에 꾸욱 눌렀다.

자연스럽게 껴안은 두 사람이 더욱 달라붙었다. 헤리엇의 배꼽에 엔저의 커다란 성기가 뭉근하게 눌렸다.

“하아…….”

엔저가 작게 한숨을 쉬며 헤리엇의 귓가에 밭은 숨을 내뱉었다.

“선배…….”

“응?”

“상을 주세요.”

귓가에서 흩어지는 흉포한 목소리. 야옹 하고 우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의 것이 아니라, 사냥감을 뼈째로 씹어 먹을 듯한 육식동물의 것이었다.

하지만 헤리엇은 고양이를 칭찬하는 주인처럼 엔저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게 하늘 같은 선배의 체취를 느끼던 엔저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헤리엇은 손을 내려 엔저의 귓불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다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와 날렵한 턱 선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상이라……. 그냥 안쉘이 알려 준 대로 내뱉었을 뿐이라 아직 생각해 놓은 게 없는데… 뭘 상으로 주어야 엔저가 좋아하려나.

헤리엇은 곰곰이 생각했다. 귓바퀴에서 뱉어지는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

일단 아래에서 눌리는 성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기에 헤리엇은 엔저를 진정시키고자 널찍한 등을 토닥거렸다. 그런데도 엔저는 흥분을 멈추지 못해 온몸으로 씩씩거렸다. 이를 어쩌지 하며 쓰게 웃고 있을 때 안쉘이 얼른 달려와 엔저의 모습을 눈으로 살폈다.

그리고 엔저의 거대해진 그것을 본 안쉘의 눈알이 한번 밖으로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그는 안경을 고쳐 썼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저쪽에 비어 있는 검사실로 데려가 주세요.”

확실히 지금, 병원 내부를 가득 채우는 검은 연기 때문에 군인과 의료진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그들은 불이 난 것인가 하고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병원 내 환자들이 모두 훈련된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큰 소동으로는 번지지 않았다.

헤리엇은 안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엔저를 빈 검사실로 데려갔다. 얼굴이 붉어져 숨을 헐떡이는 엔저의 손을 잡아당기며 헤리엇은 불을 켜기 위해 벽면을 더듬거렸다. 쓰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불이 꺼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겨우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올리자 전등이 깜박거리더니 곧 환하게 켜졌다. 밝아진 내부를 훑어보며 헤리엇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옆에 있던 수술용 키트에서 일회용 메스를 손에 집었다. 비닐을 까고 그것을 천장으로 가볍게 휙 던지자, 깡! 소리를 내며 메스가 정확하게 CCTV 렌즈 중앙에 박혔다.

그리고 뒤를 돌아 엔저를 벽에 세우고, 흥분감에 헐떡이는 엔저의 벌어진 가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탄탄한 근육이 헤리엇의 손길에 따라 작게 약동하며 움찔거렸다. 귀여운 엔저는 이제 흐릿한 붉은 눈동자로 잡아먹을 듯 헤리엇을 응시했다.

가운을 벌리자 엔저의 훌륭한 성기가 보였다. 선단은 이미 침을 뚝뚝 흘리며 가엾게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선배… 가슴 핥아도 됩니까?”

“…음, 좋아.”

엔저의 근육을 손가락으로 연주하듯 만지던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엔저가 거칠게 헤리엇의 가운을 잡아 벌렸다.

아까 얼핏 본 분홍빛 유두가 빳빳하게 서 있었다. 엔저가 참지 못하고 혀를 내밀어 헤리엇의 유두를 길게 핥았다.

“음…….”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헤리엇 역시 손을 움직였다. 엔저의 옆구리를 쓰다듬던 손이 서서히 올라가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쪽쪽 핥는 엔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엔저가 통통한 유륜을 입에 욕심껏 물고 이로 살짝 깨무는 게 정말 고양이가 애교부리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처럼 음란하지도 거대한 성기를 내놓고 꺼덕거리지도 않는다.

헤리엇은 엔저의 기세에 밀려 점점 뒤로 밀려났다. 어쩜 이렇게 맛있게 핥으면서 행복해하는지 헤리엇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헤리엇은 작게 신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나다가, 예비용 이동 침대에 발이 걸리자 드러누워 버렸다.

“선배…….”

엔저는 헤리엇의 갈비뼈를 쓰다듬다가, 다시 유두를 손가락 두 개로 꼬집었다.

엔저는 의외로 가슴을 좋아하는구나, 헤리엇은 몸을 비틀면서 생각했다. 그러던 엔저가 귀엽다고 할 수 없는 거대한 성기를 헤리엇의 젖꼭지에 문질렀다.

하도 핥고 물어 붉어져 툭 튀어나온 유두에 귀두를 문지르다가, 헤리엇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하얀색 머리카락은 결이 부드러웠고 얇았다. 머리카락마저 선이 얇은 헤리엇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음.”

작게 신음을 흘린 헤리엇이 엔저의 커다란 손에 머리를 비볐다. 머리카락이 만져지고 쓰다듬어지니 등줄기가 찌릿찌릿한 것이 기분 좋았다. 헤리엇의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엔저가 속삭였다.

“선배… 상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음… 그렇지.”

“그러면 제 위로 올라와 주세요.”

엔저는 헤리엇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고 자신이 이동 침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그가 헤리엇의 가운을 조심스럽게 벌리며 속삭였다. 헤리엇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엔저의 튼튼한 복근 위에 올라갔다.

거대한 성기에 헤리엇의 엉덩이 살이 뭉개졌다. 잠시 중심을 잡기 힘들어진 헤리엇이 엔저의 탄탄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선배, 조금 더 위쪽으로.”

엔저가 헤리엇의 한쪽 엉덩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헤리엇은 조금 고민하다가 불편한 왼쪽 다리가 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처음 입대했을 때 배운 포복 자세를 하는 것 같았다. 엔저의 가슴까지 올라가니 헤리엇의 성기가 엔저의 턱 끝을 살살 자극했다. 너무 앞으로 왔나 싶었는데 엔저의 손이 헤리엇의 허벅지를 잡았다.

“선배 조금 더 위요.”

“그러면 네 얼굴에 주저앉게 되는걸.”

헤리엇이 곤란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엔저는 세상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예요.”

“??”

헤리엇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엔저가 움직였다. 헤리엇의 은밀한 부위가 엔저의 얼굴 위에 닿았다. 엉거주춤하게 쪼그려 앉은 자세로 헤리엇은 제 다리 사이에 있는 엔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성기와 그 아래, 그리고 엉덩이 사이에 엔저의 숨결이 느껴졌다.

“…음.”

묘하게 불편해진 헤리엇이 이동 침대 끝을 붙잡고 허리를 들었다. 하지만 엔저의 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엔저는 혀를 내밀어 눈앞에서 제 얼굴을 뭉개는 헤리엇의 엉덩이 사이를 핥았다.

“아… 앗.”

헤리엇의 신음에 높낮이가 생겼다. 엔저의 성기는 더욱 빳빳이 서서 금방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핏줄이 불거졌다. 헤리엇은 성기와 항문 사이에 엔저의 콧날이 눌리는 것을 느끼며 아무래도 이건 좀 민망한 것 같다고 짧게 생각했다.

하지만 엔저는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헤리엇의 엉덩이 구멍을 열심히 핥고 있었다. 그런 곳은 더러우니 하지 말라고 타박해야 할지, 헤리엇은 고민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는 어린 후배에게 약했다.

“으음… 아.”

엉덩이 사이를 정성스럽게 핥으며 꼬리뼈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엔저가 자극으로 움찔거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하나 집어넣었다. 침으로 젖은 구멍은 엔저의 손가락을 쉽게 품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란 헤리엇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엔저의 얼굴이 모두 가려지고 검은 머리카락만 보였다. 헤리엇이 살짝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움직였다.

“선배. 뜨거워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엔저가 말했다. 직장 내부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가,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감각이 섬뜩했다.

“…무겁지 않니?”

“아주 좋습니다.”

엔저는 이번엔 손가락 하나를 더 삽입했다. 이물감에 불편한 것도 있고 엔저의 거기가 너무 불편해 보인 것도 있어, 헤리엇은 엔저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엔저… 잠시 방향을 바꿔도 되겠니?”

“네.”

엔저는 선배님 말이라면 이런 중요한 순간에도 순종하는 버릇이 있었다. 타액 섞인 손가락 두 개가 직장 내부에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잠시 움찔한 헤리엇은 끙 하고 소리를 흘리며 방향을 틀었다. 엔저의 얼굴 위로 헤리엇이 다리를 활짝 벌리고 방향을 트는 게 훤히 보였다. 엔저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다.

엔저의 얼굴 위에서 겨우 방향을 튼 헤리엇은 한숨을 쉬었다. 엔저의 하체 쪽으로 얼굴이 가게 몸을 돌리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엔저가 허리를 잡고 지탱해 준 덕에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헤리엇은 뒤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다시 엔저의 얼굴에 맞춰 엉덩이를 내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성을 내고 있는 엔저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움찔하고 엔저의 허리가 펄쩍 튀었다.

“후후… 엔저, 늠름하게 컸구나.”

키가 크질 않는다고 작게 투덜거린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거대한 물건을 다리 사이에 키우고 있는 것이 감개무량했다.

헤리엇은 손을 뻗어 엔저의 성기를 만져 주고 싶어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의 골반을 손으로 잡아 누르며 엔저가 다시 혀를 내밀어 엉덩이를 싹싹 핥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음… 엔저.”

타박하듯 헤리엇이 그를 불렀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헤리엇은 한숨을 쉬며 엔저의 복근과 가슴을 손으로 만지며 눈을 찡그렸다.

혀로 핥다가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고 살살 쓰다듬는 게 어찌나 간지러운지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고꾸라져 움찔 몸을 떨었다. 원래 감각이 남다르게 둔한 편인데도 몸이 저절로 떨리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읏…….”

크게 신음을 흘리진 않지만, 이상한 감각에 헤리엇의 몸이 움찔움찔했다. 엔저는 볼 수 없었지만 헤리엇의 어깨와 목덜미 부근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헤리엇은 혀와 손가락으로 농락당하는 제 엉덩이 사이가 너무나도 이질적이게 느껴지는지 하얀 속눈썹이 깃털처럼 내렸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동물이 핥는 것처럼 간지럽더니, 나중에는 조금 쓸려 아플 만큼 자극이 되었다.

결국 앞으로 무너져, 엔저의 복근 위에 침을 흘리며 조용히 숨을 갈무리하던 헤리엇이 말했다.

“엔저… 조금 힘드니까, 그만하지 않으련?”

추웁 하고 헤리엇의 항문을 양껏 입에 물었다가 뱉은 엔저는, 잇자국이 난 헤리엇의 엉덩이 사이를 만족스럽게 쳐다보고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 그런지 헤리엇의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하얀 어깨와 뺨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단풍나무가 제 색을 되찾은 것 같았다. 헤리엇의 허벅지가 주르륵 엔저의 얼굴을 지나 가슴께에 닿았다. 엔저는 헤리엇의 붕 뜬 허리를 꾹 잡으며 속삭였다.

“선배…….”

“…음.”

귓가에 울리는 음성에 헤리엇이 만족한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둘 다 사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척 성이 난 상태였다. 엔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헤리엇의 팔을 들어 겨드랑이를 핥으며 허리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헤리엇의 콧잔등에 엔저의 성기가 닿았다. 물론 엔저도 헤리엇의 성기를 볼로 문지르다가, 입에 넣었다. 따듯하고 습한 곳에 성기가 들어가자 은근한 쾌감이 몰려왔다. 헤리엇은 다리를 위로 올린 채라서 얼굴에 피가 모이는 것을 느꼈다.

끙, 하고 얇게 신음을 흘린 헤리엇이 엔저의 성기를 입에 물고 핥기 시작했다. 일단 엔저가 핥아 주니까 저도 핥아 주긴 하는데, 미끈거리는 액이 너무 많이 나와서 삼키기가 힘들었다.

끙끙거리며 헤리엇이 입을 조이고 성기를 꽈악 물었다. 엔저가 짧게 신음을 삼키며 헤리엇의 입과 볼, 그리고 하얀 머리카락에 사정했다. 헤리엇 역시 엔저가 도달했을 때 그의 입에 잔뜩 내보내고 말았다.

헤리엇이 겨우 엔저의 품에서 벗어났을 땐, 머리에 피가 몰려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마찰로 붉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정액이 주르륵 흘렀다.

하얀색 머리카락에 희뿌연 정액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엔저는 입 안에 가득한 정액을 삼키면서 헤리엇의 얼굴을 쳐다봤다.

“…….”

“이제 제가 보이십니까, 선배?”

정액에 물들어도, 쾌락과 열락에 헐떡여도 엔저의 눈에 헤리엇은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존재였다. 더럽혀지지 않는, 순결하고 고귀하고 새하얀 그만의 인어.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엔저를 올려다봤다. 넓은 어깨와 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 있는 몸, 강렬하고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는 매혹적으로 빛내며 헤리엇을 향해 올곧게 피어 있었다.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아닌, 한 명의 사내가 헤리엇의 앞에 있었다. 이래도 내가 아직도 어린 후배로 보이냐는 듯 엔저가 혀를 내밀어 헤리엇의 턱에 붙은 정액을 핥아 먹었다.

“……?”

헤리엇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엔저는 귀여운 후배고, 아직도 헤리엇의 기억 속에서는 어린아이인데……. 심장에서 맴도는 낯선 감각에 혼란스러웠다.

*  *  *

이런저런 소란이 진정되고, 안젤라를 비롯해 리언까지 모두 건강검진을 마쳤다. 안쉘은 다음부턴 절대 둘을 따라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검사실 내부는 후끈한 열기와 막 정사를 끝낸 냄새로 가득했다. 안쉘은 그곳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막는 데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심지어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엔저가 고장 낸 기계는 시가 20억이 넘는 의료 기기였다. 사람의 주파수를 확인해 성적인 기능을 검사하는 의료 기기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엔저는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을 했지만 사고를 수습하는 안쉘은 머리가 다 아팠다. 그 외에 특별한 사고는 없었지만, 그 이후로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생겼다. 바로 헤리엇의 태도였다.

헤리엇은 언제나 엔저를 귀여운 후배, 혹은 애완동물을 보는 것처럼 곤란한 미소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는데 요즘은 좀 달랐다. 헤리엇 알스터가 엔저 맥과이어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처음 그것을 깨달았을 때 안젤라와 안쉘은 말도 안 된다고, 잘못 본 거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병원에 다녀온 후부터 둘의 기류가 아주 이상하게 변했다. 헤리엇이 조금씩 엔저를 밀어내는 게 안쉘의 눈에도 보였다. 헤리엇은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헤리엇 알스터가 말이다.

옆에서 호랑이가 짖어도, 하늘에서 용이 튀어나왔다고 해도 그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면서 “음.” 하고 말 사내가, 혹은 내일 당장 유성이 떨어져 세계가 멸망한다고 떠들어도 코코아 따위나 마시면서 “…그렇구나.” 하고 오히려 말하는 사람을 위로할 그가 말이다.

엔저는 헤리엇이 자신을 피한다는 사실을 무려 두 시간 만에 눈치챘다. 엔저는 대단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런 상태로 하루가 지나자 눈에 띌 정도로 재기불능이 되어 버렸다.

그 무지막지한 엔저 맥과이어가!

안쉘은 지금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따로 헤리엇을 불러냈다. 헤리엇은 절뚝거리면서 안쉘과 함께 사무실 뒤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헤리엇의 머리카락 위에 나비 두 마리가 붙었다. 꽃이 아닌데도 가끔 나비가 헤리엇의 머리카락에 달라붙곤 했다. 안쉘은 손을 휘저어 헤리엇의 머리에 붙은 파란색 나비를 쫓아내 주었다. 그리고 바람 부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서서 전자 담배를 꺼냈다.

액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요즘 계속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안 그래도 대통령 때문에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엔저 맥과이어라는 좋은 장기 말이 헤리엇 알스터라는 군의 불량품에 관심을 표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량품이어도 헤리엇 역시 언젠가는 쓸 수 있는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엔저에게서 헤리엇을 떨어트리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이용하고 싶어 했다.

담배를 입에 문 안쉘이 연기가 헤리엇에게 닿지 않게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숨을 뱉었다. 원래 일반 담배를 피웠는데, 건강상 문제도 있고 상관인 엔저가 담배 냄새를 싫어해서 전자 담배로 바꿨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

“요즘 대령님을 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안쉘이 전자 담배 전원을 끄면서 말했다. 두어 모금 피우니까 더 피우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안쉘의 말을 들은 헤리엇은 살짝 곤란한 듯 웃었다. 그 표정은 여태껏 헤리엇이 짓던 기계적인 미소가 아니라, 정말 곤란한 사람 같은 웃음이었다.

“…그게.”

오, 입을 열어 주려나.

안쉘은 귀를 기울였다. 엔저 맥과이어가 저렇게 힘없이 행동하다가, 언제 폭발할지 몰라 무서웠기 때문에 빨리 수습을 해야 했다.

“엔저가 어른이 됐어.”

“…….”

“…….”

“…네?”

젠장, 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안쉘은 도무지 이곳에 있으면서 정상적이고 침착한 행동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헤리엇은 생각하는 사람처럼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엔저가, 어른이 된 것 같아.”

“…….”

‘원래 어른이었는데요. 그것도 7년 전에 이미.’

엔저 맥과이어는 서류상 완벽한 성인이었다.

“그렇게 귀여운 내 고양이였는데…….”

그래서 만져도 태연할 수 있었고, 원해도 상관없었다. 헤리엇이 엔저에게 가지는 감정의 큰 틀은 어린 새끼를 보듬어 안는 것이었다.

헤리엇에겐 그랬다. 그는 제 틀 안에 있는 이들 모두 귀여운 새끼를 대하듯 굴었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 자신을 만지는 엔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야하고 요염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더는 과거의 후배로 볼 수 없었다. 예전의 그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근사하게 자란 것이다.

“이제 제가 보이십니까? 선배.”

그렇게 말하고 웃는 엔저의 붉은 눈동자는 어릴 때와 똑같은데도, 뭔가 달라 보였다. 헤리엇은 정말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의 서른네 살 인생 속에서 너무 뜻밖에 갑자기 찾아온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엔저 대령님에게 호감이 생겼다는 말씀입니까?”

‘이제 와서? 겨우?’

안쉘이 어이없어서 묻자, 헤리엇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 안쉘은 지금 이 순간 엔저가 없어서 대단히 유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중에 알게 된다면 안쉘의 눈을 파 버린다고 할지도 몰랐다.

헤리엇의 하얗기만 한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난생처음 가지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인형처럼 뺨부터 귀까지 모두 붉어졌다.

그렇게 하얀색이 조금씩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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