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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잃어버린 말 (5/30)

04. 잃어버린 말

“…….”

참새가 짹짹거리는 싱그러운 아침이었다. 헤리엇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눈을 감고 상체를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그렇게 아침 햇살을 맞고 있으니 꼭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잠시 후, 헤리엇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아직 하얗게 바랜 눈동자가 몽롱한 것이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헤리엇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약한 헤리엇은 기상하고 정신 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목을 긁적이며 일어나서 싱크대로 직행한 헤리엇은 뜨거운 물을 머그잔에 잔뜩 따라 붓고 코코아 가루를 세 번이나 넣었다.

‘그렇게 먹으면 대장 건강 안 좋아져요!!’라며 당 걱정을 해 주는 안젤라가 없어서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헤리엇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미약하게 구겼다.

“…뜨거워.”

헤리엇은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체질이었다. 식히기 위해 머그잔을 식탁 위에 올려 둔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칫솔을 꺼내 치약을 바르고 입에 물었다. 멍하니 양치질을 하고 거울을 빤히 응시하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인데도 늘 낯설었다.

그래도 어릴 땐 꽤 예쁜 금발을 가졌었는데…….

거울로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헤리엇이 가위를 들었다. 머리가 꽤 자랐다 싶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길게 자라 있었다. 앞머리가 눈을 찌를 정도였다.

읍내에 갈 시간이 없어서 머리카락을 제때 정돈하지 못한 탓이었다.

머리카락에 가위를 가져다 댄 순간.

똑똑-.

싹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헤리엇은 자르려던 곳보다 더 위쪽에 가위질을 하고 말았다.

헤리엇은 멍하니 선반과 바닥에 흩어지는 제 하얀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거울을 쳐다보니 앞머리 한쪽이 이가 빠진 것처럼 엄청 짧게 잘려 있었다.

웃기는 몰골이었다. 헤리엇은 제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곤란한 듯 웃어 버렸다.

“선배.”

“…안녕.”

“크윽…….”

문을 열고 헤리엇이 인사를 하자, 엔저는 눈이 부시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헤리엇은 엔저가 혹시 심장병이 있었던 것인가 싶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엔저?”

“서, 선배, 너무 귀엽습니다…….”

거의 울먹거리면서 엔저가 헤리엇의 모습을 카메라로 찰칵, 찍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찍는 행위에 헤리엇은 딱히 할 말도 찾지 못하고 엔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앞머리가 웃기게도 구멍이 뻥 뚫렸는데 이 친절한 후배는 빈말로나마 칭찬해 주었다. 상냥한 엔저의 마음 씀씀이에 헤리엇이 푸스스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옆에 안쉘이 있었다면 헤리엇의 두 손을 맞잡으며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하고 말해 주었겠지만,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헤리엇은 엔저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멍하니 자신의 앞마당을 응시했다. 앞마당에는 거대한 군사용 텐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난밤 엔저가 머무른 곳이었다.

어제 엔저가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 아니, 이사라기엔 어감이 이상하지만, 엔저는 군사용 텐트를 끌고 와서 헤리엇의 집 마당에 떡하니 설치했다.

안쉘이 말하길 헤리엇의 집 옆의 옆 건물을 지금 리모델링 중이라고 했다. 엔저가 이사 갈 집은 헤리엇의 집에서 도보로 4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런데 하필 왜 자신의 집 앞에 텐트를 설치하냐고 물어보니, ‘언제든 선배를 지켜볼 수 있는 곳이 좋다.’라고 대답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안쉘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지만 헤리엇은 눈치채지 못했다. 안쉘은 복장 터져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그냥 호텔에서 자라고 울부짖었지만, 상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엔저는 이미 손수 망치를 들고 텐트를 고정시킬 침을 땅에 박았다. 깡-깡-깡- 소리와 함께 안쉘의 넋도 함께 부서져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냥… 집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안 됩니다.”

“음.”

혹시 전에 집에서 잔 게 불편했나 싶었다. 하지만 착한 후배 언제는 혹여라도 선배가 오해할까 봐 세상 둘도 없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제 이곳이 폭발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헤리엇은 엔저의 손가락을 따라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엔저의 아랫도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가 민망하지 않게끔 작게 웃었다. 그저 귀여운 후배가 혈기 왕성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음… 건강하구나.”

“네.”

이 미친놈.

안쉘은 속으로 욕을 터뜨렸다. 그는 정말 피곤하다는 듯 차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헤리엇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엇은 멍하니 멀어지는 차를 응시했다.

그렇게 엔저가 마당으로 이사 오게 된 지난밤을 떠올리며 헤리엇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엔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니 욕실에서 기척이 들렸다.

가서 보니 엔저는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헤리엇의 머리카락을 멸균 지퍼백에 한 올 한 올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있었다. 하얀색 머리카락을 모으는 엔저에게 헤리엇이 물었다.

“뭐해?”

“네, 잠시 선배의 머리카락을 수집 중입니다.”

“…….”

그걸 구해서 대체 뭐에 쓸지 모르겠지만 헤리엇은 짧아진 제 앞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면서 무안하다는 듯 웃었다. 자신의 멋없는 머리카락에 비해 엔저는 대단히 멋있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다. 귀여운 후배가 가진 건 언제 봐도 매력적이었다.

“선배, 오늘 나가지 않겠습니까?”

“음… 좋아.”

어차피 이발소도 들러야 했고, 때마침 머그잔 두어 개를 더 사고 싶었다.

시골 마을의 읍내라고 해 봤자, 사람이 조금 더 많고 시장이 활성화됐을 뿐 큰 도시에 있는 유흥거리는 없었다. 구멍가게나 마찬가지인 슈퍼와 카페, 술집 그리고 노래방 정도가 끝이었다.

엔저는 머그잔을 고르는 헤리엇을 멍하니 관찰했다. 새하얗게 바랜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헤리엇은 이곳에서 이질적인 존재라 사람들의 시선이 헤리엇을 향했다.

몇 년 동안 이곳에 머물러 살고 있음에도 그는 항상 타지 사람인 것처럼 주목을 받았다. 둔감한 성격 덕분인지 헤리엇은 딱히 크게 상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양손에 든 하얀 머그잔과 붉은 보석이 그려진 머그잔을 번갈아 보더니, 결심한 듯 하얀색 머그잔을 진열대에 다시 놓았다.

“하나만 사시는 겁니까?”

“응.”

“더 사 드리겠습니다.”

“질리니까…….”

한 번에 많이 사면 질릴 수도 있었다. 헤리엇의 말에 엔저는 더 권하지 않았다. 정말 말을 잘 듣는 후배였다. 헤리엇은 쓰게 웃으면서 지갑을 꺼냈다. 엔저가 지불하기 민망할 정도로 값싼 머그잔이었다.

이발소에 가기 전에 사탕을 한 봉지 산 헤리엇이 엔저에게 손짓했다. 헤리엇은 식욕이 그다지 왕성한 편은 아니지만 단것을 무척 좋아했다.

“손 벌려 봐, 엔저.”

“…….”

“선물 줄게.”

알록달록한 과일 사탕을 엔저의 손에 가득 부으며 헤리엇이 작게 미소를 흘렸다. 팔자로 내려간 눈썹이 헤리엇의 얼굴을 매우 순하게 만들었다. 아카데미 때도 엔저는 헤리엇에게 수없이 많은 사탕을 받았었다.

사실 엔저는 사탕을 싫어했다. 달고 끈적거리고 입 안에 붙어서 맴도는 감각이 싫었다. 하지만 엔저는 단 한 번도 헤리엇이 준 사탕을 버린 적이 없었다. 전부 다 먹어 치웠다. 헤리엇을 삼키고 싶을 만큼.

엔저는 헤리엇을 떠오르게 하는 하얀색 사탕을 들어 입 안에 넣었다. 사과 맛이 입 안 가득 풍겼다.

짧게 자른 머리가 어색했는지 헤리엇이 연거푸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에 자른 앞머리에 맞추느라 머리가 많이 짧아졌다.

이발소 주인이 헤리엇의 머리카락을 청소하기 위해 빗자루를 드는 것을 엔저는 능력까지 사용하며 막아섰다. 결국, 엔저의 지퍼백은 헤리엇의 머리카락으로 가득 찼다.

“이 아까운 걸 버리려고 합니까!?”

이발소 주인은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하는 표정을 짓다가, 그 얼굴을 확인하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미친놈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세간에서 유명한 영웅, 엔저 맥과이어였기 때문이다.

작은 소란 후, 이발소를 나온 두 사람은 읍내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 늙은 노부부가 운영하는 카페로, 헤리엇은 이따금 주말에 이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처음에는 뜨거운 코코아를 시켜서, 천천히 식히느라 책을 가져와 읽었던 게 계기였다. 그런데 엔저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 카페를 귀신같이 찾아냈다.

“사 드리겠습니다.”

“…음.”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로 들어가는 엔저의 등을 빤히 쳐다보며 헤리엇은 눈을 깜박거렸다.

쏴아아-.

바람이 헤리엇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헤집고 지나갔다. 붉은색 지팡이를 든 헤리엇은 눈을 깜박거렸다. 다리를 저는 헤리엇의 속도에 맞추느라 별일 아닌 볼일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엔저는 늘 그렇듯이 헤리엇의 느린 걸음에 맞춰 주었고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조금 후, 엔저가 음료를 들고 카페에서 나왔다.

“선배, 아이스입니다.”

“…아이스?”

“네. 한번 도전해 보세요.”

엔저가 시원하게 웃으며 헤리엇에게 아이스 코코아를 건넸다.

코코아는 뜨겁게 먹는 음료가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음료와 함께 얼음을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헤리엇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엔저 말대로 얼음을 넣어 먹을 수 있는 코코아였다. 다만 이전에는 헤리엇이 그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헤리엇은 코코아를 뜨겁게 먹는 방법밖에 몰랐으니까. 컵을 두 손으로 받친 그가 곤란한 듯 웃었다.

“맛있네.”

“그렇죠?”

엔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군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엔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엔저는 검은색 티에 검은색 청바지, 군청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많이 컸구나, 엔저.”

“네. 이제는 작았던 제가 아니에요.”

엔저가 헤리엇의 한쪽 손을 잡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  *

읍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하늘이 조금씩 어둑어둑해졌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사람들의 인적이 조금씩 줄어들고 차가 지나가는 도로가였고 뒤에는 절벽이었다. 맞은편에는 낡은 건물이, 그 옆엔 서점과 카페가 함께 붙어 있었다.

“…….”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헤리엇의 몸이 저절로 두둥실 날아올랐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지팡이를 놓쳤지만, 그것도 함께 하늘로 둥둥 떠올랐다.

곧 엔저가 헤리엇의 양손을 잡았다. 다 먹은 일회용 음료수 잔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엔저의 능력이었다. 그도 함께 헤리엇과 날아올랐다. 점점 높이 올라가서 건물이 작게 보였다.

헤리엇은 지상에서 멀어지는 제 몸을 내려다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엔저가 조금 더 높게 떠 있어 고개를 숙여 헤리엇과 시선을 마주했다.

“…선배, 저는 노력했어요.”

“…….”

“저는 선배에게 칭찬받고 싶었어요.”

하늘 높이 날아오른 엔저를 보며 살짝 웃은 헤리엇이 함께 떠오른 지팡이를 잡기 위해 잠시 몸을 틀었다. 지팡이를 잡자 이번엔 엔저가 헤리엇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허리가 잡히고 엔저가 귓가에 속삭였다.

“선배.”

어리광 부리듯이 꽉 안아 오는 몸에 헤리엇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난감한 듯 아래를 내려다봤다.

위에서 바라보는 배경은 놀랍도록 찬란했고 엔저의 능력은 아름다웠다. 이런 감동적인 상황에서 부끄러움이 많은 후배에게 어떻게 말해야 민망해하지 않을까 헤리엇은 잠시 고민했다.

엔저는 이제 어리지 않고, 혈기 왕성하고 건장한 청년이다. 고추라고 말하면 싫어하겠지. 헤리엇이 엔저의 머리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엔저… 그… 자지가 섰어. 그리고 그게 허리에 닿았어.”

헤리엇은 예전에 군용 헬기를 탄 적이 있었다. 헬기 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헬기에 매달린 물로 가득 찬 시험관 안이었지만 말이다.

아래에는 백여 척의 군함과 마지막 남은 동쪽 인어들의 격렬한 전쟁이 치러지고 있었다. 헤리엇은 진정제가 가득 투여된 시험관 안에서 두둥실 떠 있는 감각을 맛봐야만 했다. 바로 지금처럼.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는 헤리엇의 허리를 잡고 엔저가 뜨거운 숨을 흘렸다. 아까부터 엔저의 아랫도리는 전혀 진정하지 못하고 단단하게 발기해 있었다.

헤리엇은 허리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단단한 것 때문에 조금 간지럽고 불편해서 몸을 살짝 틀었다. 하지만 마치 손에 빨판이라도 붙은 것처럼 엔저의 손이 집요하게 움직였다.

도망가려고 떨어지는 헤리엇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잡고 붉은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잡은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도망가지 마세요… 떨어집니다.”

“음…….”

“선배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

헤리엇은 엔저가 하는 말의 뜻을 파악하느라 허리를 쓰다듬는 음험한 손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는 편이었다.

헤리엇이 잠시 멈칫한 틈을 타서 하얀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엔저는 부드러운 피부를 쓸어 넘기다가, 가슴 쪽으로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등허리가 간질거리는 감각에 헤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여전히 곤란하다는 얼굴 그 자체였지만 입술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했던 말씀이요.”

“다… 닿고 있어?”

뜨겁고 아플 정도로 꾹꾹 허리를 누르는 엔저의 성기에 헤리엇이 드물게 말을 더듬거렸다. 엔저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 바로 앞에 했던 말이요.”

“자지?”

“…읏.”

몸을 부르르 떤 엔저가 헤리엇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짧아진 헤리엇의 머리카락에 드러난 목덜미를 핥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포커페이스에다 존경해 마지않는 대상이 저속한 말을 내뱉는 광경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흥분이 몰려왔다. 헤리엇의 배꼽과 배를 한참 쓰다듬던 엔저가 낮게 속삭였다.

“선배… 저는 칭찬 받고 싶어요.”

“음…….”

시골 마을에서 재회한 이후로 엔저는 헤리엇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고 강조해 왔다. 헤리엇은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귀여운 후배인 엔저가 노력하고 있다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자신의 옷 속을 희롱하는 엔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어.”

“하아… 선배…….”

솔직히 과거에 스치듯이 한 말을 여태껏 기억해 준 것만으로도 기특했다. 헤리엇은 희미하게 웃으며 엔저의 머리카락을 비비듯이 만졌다. 결이 좋은 검은 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흩어졌다. 엉망이 되기는커녕 만질 때마다 더욱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좀 더 말씀해 주세요.”

엔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가 헤리엇의 허리를 잡고 빙글 몸을 돌렸다. 손에서 그만 지팡이를 놓친 헤리엇이 작게 신음을 흘리는 동시에, 엔저의 입술이 헤리엇의 배에 닿았다.

혀를 내밀어 단단한 복근이 자리 잡은 헤리엇의 배를 핥아 올렸다. 잔 근육이 많은 헤리엇의 몸은 그가 가진 분위기와 달리 꽤 단단했다. 하얗고 말랑말랑할 것 같이 생겨 놓고.

고조되는 흥분에 엔저는 바지 안에서 빠듯할 정도로 부푼 제 성기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헤리엇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 모습이 마치 비에 젖은 고양이 같아 헤리엇은 찡하고 가슴이 울렸다.

“선배… 상을 주세요.”

“상?”

“네… 미쳐서 날뛸 것 같은 제게 상을 줘서 진정시켜 주세요.”

왜 미쳐 날뛸 것 같은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혈기 왕성한 후배의 곤란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헤리엇은 작게 소곤거렸다. 하늘에는 아무도 없는데도 이상할 만큼 목소리가 작아졌다.

얼굴 위로 살짝 땀방울이 흘렀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은 그늘 한 점 없어서 솔직히 좀 더웠다.

“그래, 엔저. 상을 줄게.”

헤리엇이 말하면서도 엔저가 대견해 흐뭇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화답하듯 엔저가 눈웃음을 치며 바지춤에서 성기를 꺼냈다. 공기 중으로 드러난 그의 것에 헤리엇은 감탄했다.

“크네…….”

“감사합니다.”

진지하게 안젤라의 팔뚝을 떠올리며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엔저의 것도 엔저처럼 매우 잘생기고 모난 데 없이 잘 자란 듯했다.

유난히 붉은색인 귀두부터 시작해 아래로 내려올수록 힘줄이 돋아 꿈틀거렸다. 단단해 보이는 데다 길이도 길어서 헤리엇의 허리 부근에 엔저의 것이 닿았던 게 이해가 갈 정도였다.

이 큰 것이 잘도 저런 작은 천 안에 구겨져 들어가 있구나. 헤리엇은 또다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엔저가 그런 헤리엇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배꼽에 제 성기를 비볐다. 왜 자신의 배꼽에 엔저가 이러는지 모르지만, 뭔가 기분이 좀 묘했다.

발을 핥았을 땐 간지러운 느낌뿐이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 척추와 꼬리뼈를 자극했다.

“???”

“하아… 하아, 선배, 선배….”

엔저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흥분해서 신음을 흘리며 헐떡였다. 그는 헤리엇의 배꼽을 성기로 찌르다가, 매끈한 복근에 대고 허리를 움직이면서 그의 허리와 목덜미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헤리엇의 상의에 손을 집어넣고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핥고 싶다고 연신 중얼거렸다. 짧아진 머리카락을 코로 한번 훑고 입으로 잘근잘근 씹으며 매달리는 모습이 마치 발정기가 온 고양이 같았다.

헤리엇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엔저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선배, 선배…….”

“음.”

“…선배. 넣으면 여기까지 들어갈까요?”

엔저의 붉은색 눈동자가 잔뜩 상기되었지만, 입으로 내뱉는 말투는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위치로 봤을 때 여기까지란 말은 엔저의 성기가 배꼽 부근까지 들어가냐는 말인 것 같았다.

헤리엇은 그 정도까지 들어오면 사람이 죽지 않을까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탄탄한 복근에 제 성기를 비비면서도 엔저의 눈동자는 끈질길 정도로 헤리엇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헤리엇의 하얀색 동공이 붉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엔저가 혀를 내밀어 헤리엇의 눈알을 핥았다. 이건 아무리 헤리엇이라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엔저의 성기가 길게 정액을 내뿜었고,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손으로 받고 말았다. 흥분해서 헐떡이는 엔저의 상태에 따라 바람의 기복이 커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던 헤리엇의 몸이 이리저리 휘청였다.

방금까지는 바람이 일정하게 불었는데, 지금은 높낮이와 풍향이 달라졌다. 엔저가 숨을 가다듬고 헤리엇의 아래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선배도 섰어요.”

“유두를 자극하니까…….”

헤리엇이 작게 속삭였다. 엔저와 마찬가지로 딱히 부끄러워하지 않는 말투였다. 엔저는 이때다 싶은 얼굴로 재빠르게 헤리엇의 바지춤을 풀었다.

쉽게 내려간 바지를 멍하니 쳐다보던 헤리엇은 엔저가 허벅지를 길게 핥아 올리자 움찔하고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만큼은 지독하게 평온했다.

어리광 부리는 고양이가 귀여워 곤란하고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엔저는 그 모습에 더욱 흥분하여 헤리엇의 성기를 입으로 덥석 물었다.

설마 엔저가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던 헤리엇은 허리를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엔저의 두 손이 엉덩이를 잡고 막았다.

잡고 있기만 한 줄 알았는데 떡 주무르듯 주물럭거렸다. 손가락으로 엉덩이를 좌우로 가르며 엔저가 구음을 계속했다.

“…읏.”

헤리엇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자 엔저는 입에서 얼른 헤리엇의 성기를 빼 주머니에 있던 작은 병을 꺼냈다. 지퍼 백부터 저런 작은 병까지 저 주머니에는 대체 뭐가 그렇게 많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작은 병을 헤리엇의 성기 입구에 댄 그는 대단히 진지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선배, 여기에 싸 주세요.”

“……??”

정액을 병에 담아서 뭘 하려는지 모르지만, 엔저의 얼굴에서 장난기는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천천히 땅에 착지했는데도 이상하게 세상이 뒤집히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헤리엇이 휘청거리자 엔저가 그의 허리를 잡으며 부축했다.

그러면서도 엔저는 무척 소중한 듯 작은 병을 쓰다듬고 있었다. 불투명한 하얀색 액체가 담긴 병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는 엔저를 보던 헤리엇은 저걸 어디에 쓸 것인지 물어보려다가 만족스러운 후배의 표정에 그만두기로 했다.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에 서 있는 엔저의 모습은 화폭에 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불편한 다리로 절뚝거리던 헤리엇은 엔저가 열어 준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군사용 차량이 아니었다. 엔저가 스스로 고르고 고른 비싼 고급 차였다.

사실 하늘을 날 수 있는 엔저에게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헤리엇과 함께 다니려면 필요했다. 이 차는 앞으로 헤리엇의 발과 다리가 되어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군사 기지에도 리언과 헤리엇이 돈을 모아 산 싸구려 고물차가 있었지만, 그것은 안젤라의 난폭운전으로 인해 엉망이 된 상태였다.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켠 엔저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헤리엇을 돌아봤다.

“제가 운전을 잘하진 않습니다.”

“아아… 그래?”

확실히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잘하진 못했다. 헤리엇은 뒷좌석에 앉아 불편한 다리를 시트 위로 옮기면서 웃었다. 못하는 게 있다고 머쓱해하는 후배가 참 귀여웠다.

꽤 오래 하늘에 둥둥 떠 있느라 그런지 헤리엇은 문득 목이 말라 왔다. 가방을 뒤적거려 보았지만, 여분의 물은 모두 소비한 뒤였다.

요즘 날이 더워서 빠져나가는 수분이 먹는 양에 따라가지 못하는 듯했다. 헤리엇은 난감해진 기분으로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말했다.

“엔저, 혹시 물 있니?”

“네.”

엔저는 이런 순간에도 상체를 뒤로 완전히 돌려 아주 공손하게 두 손으로 물병을 헤리엇에게 건넸다. 헤리엇은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엔저… 너 운전대는?

얼떨결에 물병을 받은 헤리엇은 아주 구불구불한 산길에 진입한 차가 눈앞의 나무와 충돌 직전인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곧 있을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다행히 차는 나무와 부딪치지 않았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차가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기 때문이다.

“음… 역시 운전보단 이게 좋은 것 같죠?”

팔짱을 끼고 자동차를 능력으로 조종하던 엔저가 쓰게 웃었다. 그 얼굴도 헤리엇의 눈에는 무척 매혹적인 미소로 보였다.

헤리엇은 멀뚱히 엔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헤리엇에게 엔저는 늘 귀엽고, 사랑스러운 후배였다. 믿음직한 후배의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고 싶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을 따르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뭐지?’

헤리엇은 지팡이에 달린 붉은색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이 지팡이를 준 스폰서는 지금 세상에 없었지만 군에서 도망가라고 말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어들에 의해 바다 아래 깊은 곳에 수장되었다.

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

헤리엇에게 항상 그 말을 해 주었다. 하지만 헤리엇은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

고개를 들어 엔저에게 시선을 준 헤리엇은 그의 어깨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손을 대자 엔저가 느껴지는 체온에 고개를 돌렸다. 부릉부릉 의미 없는 액셀을 밟던 그가 웃으며 헤리엇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헤리엇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엔저가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하늘에 떠 있는 차가 더 높이 올라갔다. 높아질수록 내부는 뜨거워졌지만,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놔 덥지는 않았다.

지상을 이렇게 느긋하게 바라보는 건 헤리엇도 처음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내려다봤던 곳은 바다였고, 피로 물들어 있었으므로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헤리엇의 집에 도착했고 엔저가 자연스럽게 차를 앞마당에 정차했다. 바람 때문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엔저의 임시거처인 군용 천막이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헤리엇은 엔저와 함께 내리면서 말했다.

“밥 먹을래?”

“평생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

뭘 어떻게 가보로 간직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먹겠다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엔저가 두고 올 것이 있다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헤리엇은 아까 자기도 모르게 엔저의 어깨에서 떼어 낸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었다.

엔저의 머리카락이었다. 오늘 아침 엔저가 헤리엇의 머리카락을 챙기는 걸 봐서 그런지 자신도 챙기고 말았다.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은 매우 반짝이고, 결이 좋았으며, 좋은 향기가 났다.

헤리엇은 그것을 코에 가져가 킁킁거리다가 작은 투명 상자에 넣었다. 탁, 하고 뚜껑을 닫고 자신의 수집품인 머그잔이 가득한 선반에 올려놓았다.

어디서 무언가가 찰랑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미세했기에 헤리엇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안젤라는 신이 나서 룰루랄라 마트를 빠져나왔다. 날이 더운 만큼 짧은 청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은 그녀는 평소보다도 귀여웠다.

그녀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퍼지며 잔뜩 벌어진 입술 위로 덧니가 조금 도드라져 보였다. 뒤로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안젤라가 달릴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지나가던 마을 할머니가 급하게 달려가는 안젤라를 보고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젤라는 쌩, 하고 지나가면서도 인사성이 매우 밝았다. 마을 할머니들은 밝은 성격의 안젤라를 무척 좋아했다.

흔들흔들. 마트에서 산 고양이 간식거리가 봉지 안에서 흔들거렸다. 길에서 달릴 땐 사람과 부딪칠까 봐 나름 살살 달리던 안젤라는 산속으로 진입하자마자 속도를 더욱 높였다.

힘들지도 않은지 안젤라의 달리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잔상이 남았다가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런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안젤라는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있음에도 멈추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뼈가 부러지거나 큰 충격을 받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안젤라는 두 손을 뒤로 하고 다리를 붕 띄운 채 앞으로 가격하듯 발차기를 날렸다. 놀랍게도 바위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 안젤라의 환하게 웃는 얼굴 여기저기에 날아왔다.

산에 있는 큰 바위 하나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헤리엇이 봤다면 분명 ‘…힘 좋네.’라고 중얼거리면서 곤란하다는 얼굴로 손뼉을 칠 일이었다.

“리언!! 리언!”

안젤라가 겨우 속도를 줄인 곳은 마을 변두리에 사는 리언의 집 근처였다. 리언의 집은 사람의 왕래가 드문 산 끝자락에 위치했다.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일부러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군이 제공한 컨테이너를 설치했다. 동물들이 하도 많이 찾아오니까 평범한 사람이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토끼나 노루부터 시작해 곰이나 멧돼지까지 리언을 찾아오곤 했다.

안젤라는 자동차로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뛰어서 10분 만에 도착했다. 뛰느라 힘들긴 했는지 헥헥 숨을 몰아쉬며 리언의 집으로 냉큼 뛰어 들어갔다.

“고양이!!!”

목표는 이것이었다. 물론 이번에 리언이 데리고 온 동물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였지만, 안젤라에게는 사소한 차이일 뿐이었다.

그녀는 헤리엇 만큼이나 동물을 좋아했다. 그녀가 예전에 아프리카 권역으로 봉사 활동을 나간 적이 있었다. 안전지대 외의 초원에는 사자나 치타 같은 위험 동물들이 출몰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현지인들이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배가 고픈 어미 사자 한 마리가 초원 끝에서 사람들이 머무는 베이스캠프를 찾아왔다. 홀쭉해진 뱃가죽을 보니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어미 사자였다. 원래 사자는 무리를 만들고 암컷끼리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이라 이상한 케이스였다.

능력을 펼친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뒤로 물러나라고 눈짓했다. 암컷 사자는 침을 뚝뚝 흘리며 능력자의 공격을 재빠르게 피하고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콱-!

안젤라가 팔뚝을 들어 올린 채 가이드를 밀쳤다. 암사자의 입에 팔이 들어간 상태에서 그녀는 놀랍게도 웃고 있었다.

뚝.

그때, 안젤라의 팔을 문 사자의 어금니 하나가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에 반해 사자에게 물린 사람치곤 안젤라는 너무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 못해 매끄러웠다. 안젤라는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워.”

가이드 능력자가 뒤로 엎어진 자세 그대로 입을 쩍 벌렸다.

사자에게 제 식량까지 나눠 준 안젤라는 떠나는 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닭 두 마리를 후다닥 해치운 사자는 거대한 돼지고기를 뼈째 들고 떠났다. 저 멀리 수사자와 새끼 사자들이 보였다.

황당해하는 자원 봉사자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리가 먹을 건?”

“내가 굶을게!”

아무튼 안젤라는 육식이든 초식이든,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모든 동물을 좋아했다. 단지 동물들이 안젤라를 무서워할 뿐이었다.

안젤라가 리언의 컨테이너를 탕탕탕 두들겼다. 안에서 ‘아… 아 잠깐 기다려 안젤라. 앗, 나비야!’ 하는 리언의 목소리와 우당탕거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도 들렸다.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던 안젤라가 안달 나서 발을 동동 굴리는 사이,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안젤라가 고개를 돌렸다. 혹시라도 산에 나물이나 약초를 캐러 온 마을 노인이 뙤약볕에 못 이겨 탈수로 쓰러진 것일까 싶어 허겁지겁 달려갔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젊은 사내였다. 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내는 푸른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끼이익-.

컨테이너 문을 열고 나온 리언은 군용 목줄에 빨간색 리본을 단 새끼 호랑이를 품에 안고 나왔다. 호랑이도 썩 싫지는 않았는지 금색 눈동자를 말똥말똥 뜬 채 그의 품 안에 순순히 안겨 있었다.

“안젤라?”

“어… 리언, 지금 대장한테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안젤라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나뭇가지로 찌르며 말했다.

“인어야.”

*  *  *

“아름다워요, 선배…….”

낮게 읊조리며 무릎을 꿇고 헤리엇을 우러러보는 엔저의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땀에 젖은 검은색 머리카락이라든가,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붉은색 눈동자는 보석을 닮아 있었다. 헤리엇은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대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에 새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하얀 눈동자가 드러나자 안쉘이 들어왔다.

요즘 헤리엇은 자신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엔저를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했다. 전에는 둘도 없이 소중하고 귀엽고, 모든 어리광을 받아 주고 싶었는데 요즘은 좀 달랐다. 그렇다고 소중하지 않다거나 어리광을 안 받아 주고 싶은 건 아니라서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엔저가 이곳에 발령받아 내려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안쉘은 시골 마을이 이렇게 평화롭고 한가한 곳이라는 것에 매일같이 놀라는 중이었고, 엔저는 뭘 하든지 기본적으로 헤리엇의 근처에서 열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뒤를 돌아보면 항상 엔저가 서 있었다. 마치 ‘기다려’를 배운 강아지 같아서 헤리엇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불러 사탕을 건네주었다.

그럴 때마다 안쉘은 복잡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 어떤 장교가 엔저에게 사탕을 건네자마자 바다에 빠진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바다에 인어들이 없어서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그 일로 전쟁이 날 수도 있었다. 그 장교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간신히 배 위로 올라왔다.

그때의 엔저 맥과이어는 정말 무감각하고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경고했다. 그 모습이 흡사 사신과 같았다.

“그딴 쓰레기 주지 마.”

힘은 엔저가 더 강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장교와 엔저의 계급은 똑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안쉘마저 치를 떨 정도로 싹수가 노란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엔저는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두 손에 헤리엇이 준 사탕을 꼭 쥐었다.

“잘 먹겠습니다, 선배.”

“음.”

이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헤리엇은 마치 엔저가 사탕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설마 해서 물어보니 역시나 그러했다.

“엔저는 단걸 좋아해.”

안쉘은 영특하게도 이곳에서 누가 실세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했다. 계급은 자신이 좀 더 높지만 헤리엇이 이곳의 책임자이며, 근무 연수도 그가 더 높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헤리엇에게 말을 편히 해 달라고 부탁했다. 헤리엇은 처음에 곤란해하다가, 안쉘이 사정사정하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안쉘은 엔저가 단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겠지요…….”

여기서 잘못 말하면 인생이 꼬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안쉘은 급하게 끼어들지 않았다.

한숨을 쉰 그의 손에는 리언과 안젤라의 프로필이 들려 있었다. 헤리엇의 정보는 기밀이라 안쉘이 도저히 캐낼 수 없었고, 다른 두 사람은 비교적 쉽게 손에 넣었다.

리언은 동물 교감 능력 때문에 인어들과의 전투에서 실성하거나 전투 불능이 될 때가 많아 이곳으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가끔 변신 능력을 가진 스파이를 구별하기 위해 본부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 시간엔 대부분 이장과 마을 순찰을 하거나 노인들의 자잘한 심부름을 했다.

안젤라는 괴력형 에스퍼였다. 몸을 강철로 만들 수 있었고 신체 능력은 평균치를 가볍게 넘겼다. 즉, 하하 웃으면서 호랑이의 이빨을 한 손가락으로 날려 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녀는 동기들 중에서도 꽤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지만, 전쟁이 싫다고 스스로 시골에 좌천되어 왔다. 알아보니 본부에 갈 때마다 동기들에게 뒤에서 비웃음을 당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안쉘은 전에 안젤라가 농담으로 웃으면서 한 손가락으로 음료 캔을 손가락 마디만 하게 찌그러트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에게 까불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녀는 전에 바퀴벌레가 나오는 바람에 건물을 부숴 버린 이후로, 리언과 마찬가지로 군이 보내 준 임시거처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탈영병이 한 명 있었다.

“탈영병이 있군요.”

“응… 심심하다고 나갔어. 꽤 재미있는 녀석이었는데.”

헤리엇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코코아는 무척 싱거워 보였다.

그는 왜 이렇게 맛이 없을까 고민을 하며 코코아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안쉘에게 물었다.

“…엔저는?”

“오늘 급하게 받을 게 있다고 외출하셨습니다. 일주일 내내 기다려 받는 것이라 하더군요.”

안쉘은 종이를 넘기면서 가볍게 말했다. 헤리엇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눈만 끔벅이며 안쉘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받았다.

정말 오랜만에 일을 하는 기분이라 헤리엇은 팔자 눈썹을 더욱 내리고 무표정으로 서류를 결재했다. 저건 보급품, 저건 총기 소지 허가서, 저건 능력자들을 위한 식별 카드 등등, 엔저가 이곳으로 오자마자 그를 후원하는 기업들로부터 물품이 끝없이 제공되었다.

엔저는 세계의 모든 기업이 주목하는 거대한 광고 덩어리였다. 엔저가 가지고 다니는 장식품 총은 마치 그것이 유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

엔저가 타고 있는 자동차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엔저는 걸어 다니는 광고였고, 사람들은 영웅이 하고 다니는 모든 것에 열광했다.

“곧 대통령 선거 때 엔저 대령에게 호위 명령이…….”

안쉘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안젤라가 다급하게 무언가를 업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대장!!”

안젤라의 뒤로 리언이 들어왔다. 리언은 빨간 리본이 달린 호랑이 새끼를 품에 안고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헉…….”

헤리엇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았다. 가만히 안겨 있는 작은 호랑이가 너무나도 귀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랑이는 헤리엇을 보고 얼굴에 주름을 잔뜩 만들어 내며 으르렁거렸다.

시무룩해진 헤리엇이 손을 내려놓자 호랑이는 리언의 품에 안겨 가증스럽게 모르는 척 킁킁거렸다.

“물 좀 주세요!!”

안젤라가 업고 있던 사람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안쉘이 화들짝 놀라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이 세상에 이토록 선명한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종족은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었다. 바다를 그대로 담은 것 같은 머리카락… 인어였다.

안쉘이 쓰러진 인어에게 총을 겨누자 안젤라가 그것을 가볍게 잡고 마치 수수깡 부러뜨리는 것처럼 부숴 버렸다.

“…….”

안쉘이 너무 황당해서 입을 벌리는 사이 안젤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 인어… 무려.”

“…….”

“왕자님이래요.”

“…….”

설마 그런 이유로 상관의 총을 부숴 먹은 건 아니겠지, 안쉘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냉장고에서 텀블러를 꺼낸 헤리엇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인어의 입술에 대 주었다. 말라비틀어진 입술로 비실비실 죽어 가던 인어가 물을 한 모금 꼴깍 마셨다.

“하하하하! 친절한 인간의 자식분들께 예를 표합니다.”

인어는 정말 환하게 웃었다. 눈동자도 푸르스름하게 반짝였다. 그는 텀블러에 들어 있는 물을 두 병 더 먹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본인이 현재 있는 곳이 적군 기지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우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는 북쪽에 사는 인어들의 왕자, 북쪽 조개 앤 이라고 합니다.”

설마 북쪽 조개도 이름에 포함된 건 아니겠지…….

안쉘은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인어족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곳은 남쪽 바다 인어들이 군에 의해 처리된 곳이었다.

설마 복수를 하러 왕자가 직접 행차했다 이건가?

하지만 그를 잡아가면 군은 완벽한 승리였다. 인어들의 우두머리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어들에게도 신(神)처럼 모시는 부족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바다의 왕족이며, 인어들 사이에서도 가장 능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 친구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북쪽 바다 인어 앤은 무척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유언이라니, 설마 남쪽 바다 인어의 유언인가?

안쉘이 잔뜩 긴장해 능력을 펼칠 계산을 하고 있었다.

벌컥-.

이번에도 초치듯이 열린 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젠장, 군 기지 사무실 문이 저렇게 쉽게 열려서는! 내일부터 보안장치를 달아야겠다고 생각한 안쉘은 들어온 이를 보고 경례를 했다.

“엔저 대령님!”

그는 재빠르게 눈앞의 인어에 대해 보고하려고 했다. 하지만 엔저는 바다를 담은 푸른 머리의 인어를 힐끔 보기만 하고 헤리엇에게 직진했다.

엔저의 손에는 두 장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고작 사진일 뿐인데도 심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헤리엇이 엔저를 발견하고 작게 웃으며 물었다.

“손에 뭐야?”

“오늘 드디어 받았습니다.”

엔저가 수줍게 웃으며 사진을 헤리엇에게 건넸다. 북쪽 바다 인어 앤에게 쏠렸던 모든 긴장감과 집중이 그 사진으로 향했다.

사진은 검은색 배경에 불투명한 동그란 무언가가 찍혀 있었다. 이건 과학 시간에나 볼 법한 무언가와 닮아 있었다. 헤리엇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선배에게 받은 것입니다.”

“…아.”

헤리엇은 저번 주에 엔저와 외출했다가 하늘 위에서 그와 한 짓을 떠올렸다. 갑자기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헤리엇이 사진을 보고 중얼거렸다.

“이 사진, 내 정자야?”

쏴아아아-.

그 말이 나오자마자 인어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 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아…….’

‘제발…….’

‘좀…….’

안젤라와 안쉘의 표정은 물론 호랑이를 껴안은 리언까지 싸늘하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헤리엇이 벌떡 일어나더니 절뚝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헤리엇마저 저렇게 피하는 것 아니냐고 모두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정자? 인간의 자식인가?”

북쪽 바다 인어 앤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인간의 근원이긴 하다만… 모두가 침묵했다. 인어에게서 바다를 빼앗은 엔저 맥과이어가 저런 놈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헤리엇이 무언가를 찾는 듯 선반을 뒤적이다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팔자로 쳐져 있던 눈썹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그는 살짝 들뜬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도. 엔저, 나도 네 정액을 줘.”

헤리엇의 손에는 놀랍게도 작은 병이 들려 있었다. 엔저는 그 말에 뺨을 붉히고 시선을 돌렸다.

‘쟤 왜 저래?’

‘몰라.’

안쉘과 안젤라가 시선을 교환하며 대화했다. 믿었던 헤리엇마저 정신 나간 짓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머릿속 저편에서 무언가가 아그작하고 깨졌다.

그에 반해 엔저는 매우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며, 마치 제 첫 동정을 주는 숫총각처럼 중얼거렸다.

“…네.”

헤리엇과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아래쪽만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수줍어하는 엔저를 괴물 보듯 보는 모두에게서 인어 왕자는 깡그리 잊혔다. 참 괴상한 곳에서 부끄러워한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같던 헤리엇이 아주 조금씩 엔저에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안젤라가 비명을 지르며 울먹였다. 북쪽 인어 왕자가 나왔을 때보다 더 경악스럽고 좌절에 빠진 비명이었다.

엔저에게 나중에 반드시 주겠다는 다짐을 받은 헤리엇은 조용히 선반에 작은 병을 내려놓았다. 안젤라가 옆에서 헤리엇의 허리에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대자아앙!! 죄송해요!! 이제 더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원래의 대장으로 돌아와 줘요오!!”

평소 헤리엇의 포커페이스를 보며 이미지 체인지를 해 보는 건 어떠냐고 장난처럼 말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헤리엇은 안젤라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작게 웃었다.

정신없는 광경을 구경하던 북쪽 바다 인어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뜬금없었지만, 음색은 좋았고, 굉장히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인어의 노래를 처음 듣는 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물 콧물을 질질 짜던 안젤라마저 한순간에 뚝 그쳤다.

눈을 감고 뺨을 붉힌 엔저가 조용히 헤리엇을 따라 그 옆에 앉았다. 안쉘은 왜 저 혼자 서 있는 건지 의문을 품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막았다.

“인어들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특히 울고 있는 이들에게요.”

앤이 탁자 위에 꽂힌 조화를 안젤라에게 주며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안쉘은 저 행동을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다시 헛기침했다.

망할 두 놈 때문에 이야기가 어긋났지만, 지금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군 기지에 인어 왕자라는 적이 떡하니 등장한 것이니 말이다.

“대령님, 인어입니다.”

안쉘이 속삭이자 엔저가 헤리엇의 옆에서 뺨을 붉히다가, 표정을 바꾸고 안쉘에게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보면 알아.”

“…….”

그래 알겠지. 제 선배가 아니면 온갖 싹수는 다 탑재한 빌어먹을 상사 놈.

안쉘은 속으로 욕하면서도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바다를 휩쓸고 하늘을 날면서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봐야 하는 인어의 외형을 엔저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엔저는 눈앞의 적을 보면서도 태연자약했다.

엔저 맥과이어, 인간들의 영웅인 그의 손에 죽은 인어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만큼 엔저 맥과이어의 업보는 쌓이고 있었다.

안쉘은 혹시 엔저가 인어를 미워해서 죽이는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자신이 봤을 때 그는 의외로 인어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딱히 혐오하는 것도 아니었다.

인어들이 미워서 죽이는 게 아니라면 정부 대한 충성심인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엔저는 안쉘이 모르는 어떤 의무감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재물이나 명예, 혹은 권력 같은 것도 아닐 것이라고 안쉘은 추측했다. 맥과이어 가문 자체가 워낙 부유한 집안이었고, 장교 출신인 부모가 엔저에게 군 생활을 강요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히려 군인인 부모는 엔저가 평범하게 생활하기를 바랐다고 전해졌다.

안쉘은 눈앞에 인어가 있어도 딱히 감흥 없는 얼굴로 헤리엇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엔저를 살폈다. 문득 그가 왜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당신이 엔저 맥과이어군요.”

안젤라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한 인어 앤이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엔저 맥과이어라는 이름은 인어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모양이었다.

앤의 얼굴은 준수하고 아름다웠다. 푸른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바다를 담은 인어들의 푸른 머리카락은 과거엔 안쉘도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잔악무도한 종족들이었다. 살려 달라고 비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배를 침몰시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안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일촉즉발, 사무실 안에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엔저는 눈앞에 인어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았다.

- 우리들은 바다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 순간 치직 하고 저 멀리 라디오에서 빛이 들어오면서 단테 막심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통령 선거 기간이 시작된 것이다.

안쉘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파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모든 미디어 관련 기계들이 저 혼자 켜져서 채널을 고정했다. 미디어 매체들이 능력을 사용해 온 국민의 기계를 조종하는 중이었다.

- 잔혹하고 전투적인 인어들과 우리는 마지막 전투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때의 분노, 원한을 담은 비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으며, 저 단테 막심 역시 사랑하는 아들을 바다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안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연설은 대통령 선거의 시작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10여 년 전부터 단테 막심에게 대항할 수 있는 대통령 후보는 나오지 않았다.

단테 막심의 연설은 아직도 바다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에게 흥분을 끌어냈고 덕분에 찬반 투표에서 많은 찬성표를 얻었다. 안쉘 역시 단테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인어들이 무자비하게 굴며 인간들에게 바다를 양보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인어들이 적어도 그날 엘리키스호를 침몰시키지 않았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멀뚱히 단테 막심의 연설을 듣는 인어 왕자라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안쉘은 허리춤에서 예비 총을 꺼내 인어에게 겨눴다.

옆에서 안젤라가 벌떡 일어나 막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안쉘이 안젤라를 결계로 결박했기 때문이다.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지 못한 안젤라가 낑낑거리면서 몸을 바둥거렸다.

“인어를 체포하겠습니다.”

- 왜 바다는 인어들의 것인가! 왜 인어들은 공존을 선택하지 않은 것인가! 인간은 인어들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건만 어째서 돌아오는 것은 잔혹한 죽음인가!

단테 막심의 연설은 뒤로 갈수록 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그에 안쉘의 숨결도 덩달아 가빠졌다.

안쉘은 엔저의 눈치를 한번 봤지만, 그는 딱히 말리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엔저의 모든 신경은 헤리엇을 향해 있었다.

그러면 헤리엇은 어떤가? 그 역시 곤란하다는 듯 눈꼬리가 축 처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원래 그의 표정이 저렇게 맹해서 그런 것이지 정말로 상황이 곤란해서는 아니었다.

- 저 단테 막심의 아들… 알시타 막심 역시 인어들과의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애썼습니다. 대통령이기 전 아들을 잃은 아비로서, 그리고 온 국민의 대표자로서 마무리를 짓고 싶습니다. 인어들과의 전쟁은 이제 마지막입니다. 욕을 먹는 것도 손가락질받는 것도 이 단테 막심 혼자이면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 대통령 선거, 저 단테 막심이 모든 것을 끝내고 다음 이에게 평화를 넘기겠습니다.

“바다를 뺏길 것 같으니 이제 와서 허겁지겁 왕족이 등장한 겁니까.”

안쉘이 그저 눈만 끔뻑거리는 앤의 푸른 눈동자를 강하게 노려봤다. 안쉘은 이 왕자를 제압하고 바로 군 사령부에 연락을 올릴 참이었다.

북쪽 바다에 서식하는 인어들의 왕족을 붙잡았다고. 그를 통해 실험이든 뭐든 해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사적인 원한을 담아 그렇게 쏘아붙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엔저의 옆에 무심히 앉아서 이 상황을 구경하는 헤리엇을 발견한 안쉘은 총을 내려놓을 뻔했다. 헤리엇은 군의 실험체였으며, 군이 만들어 낸 인조 인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이 인간의 자식은 왜 이렇게 화가 많은 겁니까.”

인어 앤이 자신의 앞에 앉은 리언에게 물었다. 리언은 호랑이를 품에 꼭 껴안고 안젤라를 결박한 결계를 안절부절못하며 살피다가 화들짝 놀라 움찔 떨었다.

새끼 호랑이가 눈앞에 군복을 입은 인간들로 가득해 심기가 불편했는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리언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앤에게 설명했다.

“…저, 당신이 있는 곳은 인간들의 군 기지예요. 조금 허름하고… 사람이 없어도.”

리언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인어 앤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는 안젤라에게 했던 것처럼 탁자 위에 있던 조화를 한 송이 꺾었다.

“젠장, 저거 읍내에서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안젤라가 옆에서 구시렁거렸다.

“화를 그만 내 주시겠어요? 당신은 마치 우리 바다에 사는 범고래 툴툴이를 닮았군요.”

“…투, 툴툴이?”

“네, 늘 화를 내고 툴툴거려서 제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물론 지금은 금쪽같은 새끼를 낳아 남쪽 바다로 이동했지만요.”

“치우세요. 인어 따위와 하하 호호 웃을 입장이 아니니까.”

아직도 안쉘의 눈앞에는 부모님이 문을 열고 나가는 등이 선했다. 능력자인 안쉘을 위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가야 했던 그들. 보고 싶어서 울어도 다시 볼 수 없는 그의 부모님이.

“인어족의 왕자라는 분이 참 태평하기 그지없으시군요.”

안쉘이 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 역시 심해로 도망가는 인어들을 결계로 붙잡고 도망갈 길을 차단했던 군인이었다.

엔저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군함은 그 자체로 인어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자식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평화와 노래를 좋아하니까요.”

평화를 그렇게 사랑하면서 왜 그날, 그 크고 거대한 크루즈를 침몰시키고 그 안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을 죽였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평화위원장인 알시타 막심은 그가 만든 단체의 이름답게 인어와의 평화를 주장했다. 그런 이를 죽인 시점에서 인어들은 인간들과의 평화를 바라지 않은 것이다.

“저는 친구의 유언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인간의 자식인 그대들과 싸우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앤은 매우 인자하고, 발랄하게 웃었다. 그는 커다란 조개를 꺼내 손가락으로 두 번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조개 아가리가 쩍 벌어지며 먹음직스러운 조갯살이 보였다.

꼴깍. 해산물을 좋아하는 리언이 진지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침을 삼켰다.

“맛있어 보이네…….”

헤리엇도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앉아 있던 헤리엇의 말에 엔저가 즉각 반응했다.

“얼른 찜을 준비하겠습니다.”

“안 돼요~. 이건 먹는 게 아닙니다.”

“…….”

지금에 와서 엔저가 눈앞의 인어 왕자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다. 헤리엇이 눈을 몇 번 끔벅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렇게 큰 거 말고, 작은 걸로.”

“지금 당장 읍내에서 조개란 조개는 모두 사 오겠습니다. 선배.”

“고마워, 엔저.”

헤리엇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저들만의 세상에 빠진 태평한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자니 힘이 빠지는 듯했다. 안쉘은 이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흔들고 총을 겨눈 상태 그대로 인어를 주시했다.

앤은 머리에 총이 겨눠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개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뚜껑이 아주 잘 닫힌 유리병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들어 있었다.

“내 친구가 이걸 누군가에게 전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인어는 헤리엇에게 그 종이를 건네주었다. 왜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자신을 고른 건지 모르는 헤리엇은 멍하니 있다가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종이를 펼쳐 읽은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엔저가 옆에서 곁눈질로 편지 안의 내용을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생일 축하해, 헤리엇.”

“…….”

“알시타의 글씨…….”

헤리엇은 종이에 쓰인 문구를 보고 중얼거렸다. 안쉘은 눈을 크게 떴다.

“알시타 막심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음… 내 후원자였어.”

헤리엇에게 붉은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준 장본인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팡이의 몸체는 헤리엇이 성장함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있었지만, 알시타가 선물로 준 붉은 보석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에 녹안을 가진 귀여운 소년이라고 했지만.”

헤리엇의 하얗게 바랜 눈동자에 초록빛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지만, 북쪽 바다 인어 앤은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알시타는 헤리엇에게 군에서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라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항상 말해 주었다. 왜 인어인 앤이 알시타의 편지를 이곳까지 가져왔을까, 왜 그를 친구라고 부르는 걸까, 헤리엇은 고개를 들었다.

이건 틀림없는 알시타 막심의 필체였다.

“인어가 아니구나…….”

헤리엇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인어는 조용히 헤리엇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알시타는 어린 헤리엇에게 바다 횡단이 끝나면 아버지가 손댈 수 없게 인어들과 평화 협정을 맺겠다고 말했다. 헤리엇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때는 네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주겠노라, 그렇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인어들이 배를 공격하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저 역시!”

안쉘이 소리를 지르며 쾅! 하고 탁자를 내려쳤다. 엔저가 인상을 쓰고 헤리엇의 찻잔을 잡아 주는 게 보였다. 자신 역시 뉴스를 보면서 얼마나 부모님을 살려 달라고 빌었는지… 결국 안쉘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희는 오로지 알시타밖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 버티지는 못했습니다.”

인어 앤은 이번엔 허름한 옷가지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능력자가 만든 불에 타지도 젖지도 않는 특수 종이였다. 거기에는 평화 협정이라는 제목이 크게 쓰여 있었고 맨 밑에 알시타 막심의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 바다를 무사히 지나가면, 아버지는 인어들이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전쟁을 치를 수 없을 거야.”

인어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노래를 좋아했다. 돌고래와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던 인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저 멀리서 거대한 배 한 척이 인어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다.

인어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배가 무사히 지나가게 길을 터 주었다. 누군가의 자식, 사랑하는 이의 아들, 인간들의 자식! 모두 평등하게 사랑받는 자식들을 향해 인어들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하지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인어들 사이로 지나가던 배가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침몰하는 배를 보며 인어들이 속삭였다.

“인간의 자식이 지금 바다에 빠지고 있는데?”

“인간의 부모가 자식을 살려 달라고 하고 있어.”

“우리는 인간의 자식을 살려야 해.”

저들끼리 속닥거리던 인어들이 모두 수면 위로 나타났다. 저 깊은 심해에서 쉬고 있던 인어들까지 모두 나오자, 아름다운 푸른 물결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침몰하는 배를 위로 들어 올렸다. 인어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들어 올린 배가 살짝 움직인 순간, 배를 향해 무수히 많은 폭탄이 떨어졌다.

“인어들은 배를 살리려고 했구나.”

헤리엇이 하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알시타 막심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 바다를 되찾고, 무자비한 인어들을 몰아내어 비극적인 전쟁을 종결짓겠습니다.

단테 막심의 야망에 찬 목소리가 어둡고 좁은 시골 마을의 군사 기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알시타의 편지가 확실합니까?”

“응… 내 생일하고, 그다음에 선물해 주겠다는 물건부터…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일치해.”

헤리엇은 유년기를 보육원에서 보냈다. 보육원 원장은 헤리엇을 낳아 준 부모가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 귀하고 예쁜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운이 좋게도 헤리엇은 군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랄 수 있었다. 민간이 운영하는 시설과 비교했을 때 대우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봉사자들 역시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헤리엇이 여덟 살 되던 해, 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알시타 막심이 후원자로 나타났다. 그는 헤리엇의 금발과 녹안을 예쁘다고 칭찬해 준 사람이기도 했으며, 열 살 때 헤리엇이 군에 입대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뚜렷한 주관이 없는 헤리엇을 걱정하곤 했다.

“네 뜻대로 해.”

알시타는 늘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는 평화위원장답게 평온하고 잔잔한 사람이었다. 이따금 헤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싸움이 싫으면 군에서 나와도 된다고, 네가 평화를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런가. 알시타는 이용당했구나.

헤리엇은 곤란한 듯 눈썹을 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콰앙!

멀쩡하던 탁자가 저절로 두 동강이 나 주저앉았다. 헤리엇은 편지지를 든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동강 난 탁자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에 억눌린 자국이 보였다.

안쉘의 주변으로 거대한 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늘 이성적이었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안경은 이미 튕겨져 나가 바닥 한구석에 나뒹굴었고 단정한 2대8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그의 눈에 뿌연 막이 생겨났다. 눈에 눈물이 차오른 안쉘의 모습은 마치 상처 입은 야생동물처럼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으르렁거리는 동물.

안젤라가 꽥! 하는 소리를 내며 소파 위에서 발버둥 쳤다. 안쉘의 힘이 더해질수록 방 안에 결계가 한 겹 두 겹씩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인어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기도 힘듭니다! 당장 본부로 데려가야 합니다!”

안쉘이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그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바다와 지상은 전쟁 중이고, 인어는 충분히 지성을 가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함정에 대한 의심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인어의 말만 듣고 무작정 이 편지는 알시타 막심의 것이 맞으며, 대통령은 사실 모든 배후였다고, 우리 인간들이 했던 모든 것이 사실 학살에 지나지 않았다고 인정하기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더구나 헤리엇은 그에 따른 군의 실험체였고, 엔저는 여태껏 전쟁에서 많은 인어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운 영웅이었으며, 안쉘은 복수심에 멀어 인어들을 증오하고 원망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부모님이 탄 엘리키스호가 침몰했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마음을 알아준 건 대통령밖에 없었습니다!!”

인어들의 구역을 침범한 얼간이와 그 선원들. 꼴좋다, 꼴좋아.

사람들의 말은 너무나도 가볍고 잔인했다. 자업자득이라며 많은 사람이 비웃고 혀를 찼다.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부모님을 잃은 어린 안쉘의 귓가에 가득 찬 그들의 악의적인 속삭임은 아직도 가슴에 사무쳐 빠지지 않는 가시가 되었다. 부모님이 그들의 구역을 침범했다는 사실은 안다. 알고 있지만…….

“하지만!!! 하지만!!! 죽여선 안 되는 거였잖아!!”

안쉘이 소리를 지르며 헐떡였다. 그러면서 아직도 알시타의 편지를 들고 곤란한 듯 눈썹을 내린 헤리엇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소파 위에 앉아 있던 안젤라와 리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은 평범한 휴일을 보내다가 정부의 어마어마한 음모를 알아채고 파르르 떨었다.

“애초에 당신이 한 말도 진짜라고 할 수 있습니까?”

“…….”

“당신도, 결국 똑같잖아요!!”

안쉘은 지금 자기 자신이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실험체이며 인조 인어인 헤리엇이 바다에 사는 인어들과 똑같다고 횡설수설하면서 입 밖으로 되는대로 내뱉는 중이었다.

좁은 군사 기지에 안쉘의 결계가 겹겹이 쌓여 갔다. 그것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협할 만큼 좁아졌을 때, 헤리엇이 특유의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하얀색 눈썹이 잔뜩 팔자로 휘어졌다.

그때,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옆이 퍽- 하고 터져 솜뭉치들이 삐죽 튀어나왔다. 안쉘의 능력은 결계이지만, 아주 단단한 유리처럼 만들어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정신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헤리엇은 난감한 듯 중얼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늘 그렇듯 작게 미소 짓는 얼굴은 안젤라가 애교 부릴 때도 보여 주던 웃음이었다.

헤리엇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엔저와 시선을 마주했다. 엔저는 이 상황에 딱히 신경 쓰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헤리엇만 바라봤다. 정확히는 헤리엇이 들고 있는 알시타 막심의 편지를 보고 있었다.

“그렇지? 엔저.”

헤리엇이 안쉘을 자극하지 않고자 엔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귀여운 후배는 선배의 속삭임에 아주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낮게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예쁘고 근사했다.

“네.”

“살살해, 살살.”

엔저의 귀에 다시 속삭였다. 정신지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일정한 시간 동안 능력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거나, 혹은 아주 강한 충격을 받으면 된다. 지금 이 세상에 언론 매체가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당연히 정신지배 해제를 위해 선택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눈이 새빨개져서 뵈는 게 없어 보이는 안쉘은 확실히 이상했다. 오랜 시간 함께 있던 건 아니지만 헤리엇은 그가 이런 과격한 성격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인어가, 인어가…….”

마치 세뇌라도 당한 듯 인어가 나쁘다고 반복하며 중얼거리는 안쉘의 멱살을 잡고 엔저가 손을 올렸다. 안쉘의 눈동자에 빛이 없고 탁해져 있었다. 역시 정신지배의 영향을 받은 게 맞았다. 색을 잃어버린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짜아악! 하는 소리가 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조용히 상황을 관전하던 앤도 어깨를 움츠릴 정도로 거센 타격음이었다. 엔저는 안쉘의 멱살을 잡은 채 고개를 모로 기울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눈동자에 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래서 엔저는 대통령을 싫어했다. 그 노인네는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비열한 짓을 잘했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진 상대에게 정신지배 능력을 펼쳤다.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리는데 지금은 아마 안쉘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엔저가 안쉘의 뺨을 몇 번 더 후려갈겼다. 찰진 쫙! 쫙! 소리가 몇 번 더 울렸다. 안쉘의 광기에 어린 눈동자가 점점 고통과 충격에 제대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엔저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너무 친절한 상관이지 않아? 네가 헛소리를 해도 이렇게 관대하게 넘어가 주니까.”

‘친절은 개뿔, 젠장… 관대한 사람들 다 죽어 없어졌나.’

안쉘은 신음처럼 흘러나오려는 욕을 삼켰다. 안쉘의 눈동자에 빛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이 멍해지며 분노로 온몸이 끓어오를 것 같았던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그는 엔저가 다시 손을 올리기 전에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정신 차렸습니다.”

“아직 덜 차린 것 같은데.”

안쉘은 엔저가 뺨을 한 대 더 올려붙이기 전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입 안에 짭짤한 쇠 맛이 느껴졌다. 골이 아직도 흔들거렸다. 어금니도 하나 정도 나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충격이 없었더라면 안쉘은 아직도 정신지배에서 허우적대며 정신 나간 소리나 지껄이고 있었을지 몰랐다. 정신지배 능력의 공포를 몸소 체험한 안쉘이 비틀거리면서 헤리엇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안쉘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헤리엇은 알시타의 편지를 다시 병에 넣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표정에는 분노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저…….”

안젤라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참을 수 없었는지 리언이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올렸다. 둘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얼굴로 일단 가장 궁금한 것부터 질문했다.

“대장은 인어인가요??”

“아.”

안쉘이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헤리엇은 딱히 커다란 비밀이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신 정보가 군에서 얼마나 기밀로 치부되고 있는지 아냐고 안쉘은 무심코 지적할 뻔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정신지배를 당했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안쉘 본인이었으니까.

“나 인어야. 그것도 군에서 만들어진 인조 인어.”

헤리엇은 마치 오늘 다리털을 밀었다는 은밀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곤란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아, 우리 대장이 인어였구나.’

‘근데 인어는 물에서 사는 생물 아닌가?’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몇 초 뒤 일제히 참새처럼 짹짹거렸다. 둘은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애처럼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 그, 그 그럼!! 대장도 그, 인어처럼 꼬리가 나오나요!?”

“생선 꼬리!”

‘생선…….’

과거에 헤리엇이 저지른 만행이 떠오른 안쉘의 표정이 더욱 나빠졌다.

“나와.”

“그러면!! 그, 대장도 그, 물을?!”

“물을 먹나요?”

물은 인간들도 먹는 건데…….

헤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였습니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앤 마저 소란스러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젤라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대장이 그렇게 물먹는 하마처럼…….”

꽃밭에 사는 이들처럼 신나서 물어보는 세 사람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안쉘이 엔저에게 조용히 물었다.

“우리는… 우리는 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엔저는 대답하는 대신 시선만 내려 안쉘을 쳐다봤다. 섬뜩한 붉은색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안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그동안 행한 짓들은.”

사람들은 바람의 신이 엔저를 사랑해서 그에게 능력을 준 것이 틀림없다고 떠들었다. 하지만 그건 신에게 사랑받은 것이 아니었다. 엔저의 능력을 탐낸 군은 강한 능력을 가진 엔저를 앞세워 수없이 많은 피를 묻히게 했다.

“그게 진실인 줄 알았으니까.”

그래. 그 모든 게 진실인 줄 알았지.

군의 명령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오니 그동안 가득했던 의문이 하나둘씩 풀렸다. 엔저 맥과이어는 명예나 재력, 그리고 권력 따위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군에 들어와 그것도 최전방에 있는 것일까.

“…헤리엇 님 때문입니까?”

엔저는 수긍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헤리엇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대통령이 언젠가 한 번 엔저에게 ‘그걸 거기에 숨겨 두고 있었구나.’ 하고 지나가듯 말했다. 당시에 안쉘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몰랐다. 다음 날, 엔저가 바다 최전방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냥 대통령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만 생각했다.

“대령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엔저의 부대는 아직 최전방 속해 있었다. 엔저가 은퇴를 선언하자 대통령이 머리를 식힐 겸 헤리엇을 감시하라고 이곳에 보낸 것일 뿐, 북쪽 인어와의 전쟁이 시작되면 언제 불려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북쪽 인어들과 전쟁을 치를 순 없었다.

“어쩌긴, 대통령이 원인이면 그 늙은이를 밀어내면 그만이지.”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뚝 끊겼다. 안젤라와 리언이 자신들이 들은 게 진짜인가 싶어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안쉘도 경악해서 소리쳤다.

“쿠데타를 일으키잔 말씀이십니까!?”

그건 제아무리 영웅인 엔저 맥과이어라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엔저는 헤리엇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대통령 자리를 합법적으로 뺏을 수 있는 행사가 곧 다가오잖아.”

‘젠장, 저놈의 싹수가 노란 상사 같으니.’

하지만 곧 엔저의 말의 의미를 깨달은 안쉘이 눈을 크게 떴다.

“대통령 선거.”

그래, 방금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었고, 곧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후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단테 막심을 1인 후보로 두고 찬반 투표가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만약, 만약에… 전쟁 영웅인 엔저 맥과이어가 후보자로 이름을 올리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쩌면 엔저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유서 깊은 가문의 사람이었고 지금 사람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젊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안쉘은 부모님의 복수,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로는 부족해도… 눈앞의 남자를 따르고 지지하자고 다짐했다. 살얼음이 낄 것 같은 방 안에서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안쉘이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들고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니까 네가 대통령 후보에 참가해라, 안쉘.”

“…네.”

대답한 안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엔저가 분명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겠다고 말하는 줄 알고 대답했는데 귀가 나빠서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꿀꺽-.

모두의 심각한 표정이 저를 향한 것을 확인한 안쉘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오로지 헤리엇만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안쉘이 눈이 아주 커다래지며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요?

안쉘은 멍청한 표정이 더 얼간이 같아지기 전에 얼른 정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잠시 저 멀리 지구 밖 행성까지 날아간 정신은 몸에 들어오길 거부하고 있었다.

자꾸 멍청하게 풀어지려는 표정을 다잡은 안쉘의 낯빛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말도 안 나오는구나.

“아니… 왜, 왜 제가…….”

안쉘이 입을 뻐끔거리면서 몇 번이나 말을 더듬거렸다. 계속해서 “왜 제가…….”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말이 목구멍을 뚫지 못하고 안으로 사그라드는 감각을 맛봤다.

지금의 정치 체제는 거의 단테 막심에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안쉘이 생각했을 때 그나마 지금 이 분위기에서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는 전쟁 영웅이기도 한 엔저 맥과이어밖에 없었다.

물론 나이가 너무 젊어서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가 아니라면 대선 후보로 출마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세상이었다.

당연히 엔저가 “내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라고 당당히 선언해야 할 분위기였다. 뜬금없이 공식 석상에 한 번도 나가지도 않았던 자신의 보좌관에게 “네가 출마해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대선 출마가 무슨 학급 반장을 뽑는 행사도 아니고.

“대령은요!?”

안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엔저의 매운 손에 맞은 그의 양 뺨은 붉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안쉘은 엔저의 손속이 딱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생각했을 때 뺨 때리기는 오히려 가볍기 짝이 없었다. 명령 불복종, 혹은 적군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군인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안쉘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나는 헤리엇 선배의 부관이 될 예정이니까.”

“…….”

안쉘은 그냥 차라리 자신이 우주의 먼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멍청하고 얼간이 같은 넋 나간 얼굴을 했다.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이 인사하며 날아가는 영혼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통령 같은 걸 하면 사랑하는 선배님의 용안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안쉘에게 맡기겠다는 소리였다.

파랗게 변했다가 하얗게 변했다가 입술을 뻐끔거리기 시작한 안쉘을 관찰하던 헤리엇이 그만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뻐끔거리면서 잘도 엔저의 욕을 섞어 벙긋대는 모습이 웃겨 그만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 소리에 엔저의 귀가 작게 움찔거렸다. 그는 놓치지 않고 헤리엇의 웃음소리를 귀에 담았다. 옛날, 아카데미 시절부터 봐 온 엔저의 버릇이었다. 그는 헤리엇이 내는 작은 웃음소리를 정말 좋아했다.

“내 부관이 어떻게 될 건데?”

“제가 선배의 소원을 이뤄 드리면, 저를 부관으로 삼아 주세요.”

어린 엔저는 당돌하게 말했지만 작은 몸으로 잔뜩 긴장해서, 땀을 뻘뻘 흘렸었다. 헤리엇을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어린 소년이 늠름하게 자라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고 말해 주었다.

사실 지금 헤리엇의 계급으론 엔저와 같은 소파에 앉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인 데다, 헤리엇은 사관이 아니기 때문에 부관도 필요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엔저의 얼굴은 진지했다. 헤리엇을 돌아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여쁘게 반짝거렸다. 적어도 헤리엇의 눈에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선배의 소원을 이루면, 저를 부하로 삼아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엔저의 목소리에 헤리엇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군은…….”

“군은 선배의 소원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요.”

엔저가 손을 들어 헤리엇의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차마 닿는 것조차도 아까운 듯 손가락 끝이 앞머리만 살짝 건드렸다.

헤리엇의 눈동자가 위쪽을 향했다. 요즘 엔저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그리운 감각에 휩싸였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했다.

“얼른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언제 한번 지나가듯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린 엔저는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헤리엇을 뚫어지게 쳐다봤었다. 그러다가 아카데미 내 있던 작은 연못에서 개구리가 뿅 하고 튀어나와 둘의 시선을 가로챘다.

그때, 헤리엇 선배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봤던 것 같다. 아마 자신의 생일이 가까워져서 선물을 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린 날의 헤리엇은 지금보다 더 눈치가 없었다.

“선배는 전쟁이 끝나면 뭘 하실 건가요?”

귀여운 후배가 당돌하게 질문을 던졌다. 헤리엇은 어린 후배의 검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하얀 손가락 사이로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좋은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엔저는 고양이처럼 한쪽 눈을 감고 헤리엇의 손길을 느꼈다.

헤리엇은 전쟁을 위해 탄생한 실험체였고, 사실 전쟁이 끝난 이후의 무언가를 꿈꾸지 못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헤리엇은 더는 군에 있지 못하고 바다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의 존재는 군에게 수치이며 숨겨야 할 반인륜적인 존재였다.

“글쎄… 아마 군을 나와서 동물학자가 되지 않을까?”

반짝하고 빛나던 그때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아마 그때부터 엔저 맥과이어의 다짐이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헤리엇은 하얀 눈동자를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엔저의 어린 시절 아주 귀여웠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겹쳐졌다. 통통한 뺨이 발그레해져 쫓아오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아주 다른데 이상한 일이었다.

“…….”

‘저기요.’

겨우 육체에 영혼을 욱여넣은 안쉘이 황당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촌극을 감상 중이었다.

지금 그사이에 껴서 피해를 보고 있는 이쪽은 생각하지도 않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서 뭐 하는 겁니까.

욱신욱신 위장이 아파진 안쉘은 주머니에서 위장약 하나를 똑 땄다.

“…이 인어는 어떻게 합니까.”

“앤입니다.”

“…그래요, 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정신지배가 풀린 덕분에 인어를 무작정 증오하기만 했던 감정에서 벗어났지만, 안쉘은 인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부모님을 죽인 것이 인어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오히려 그들이 엘리키스호를 구해 주려고 했던 사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인어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여태껏 군함을 탔던 자신의 과거가 계속 떠올랐다.

“군이 그를 데려가게 할 순 없습니다.”

안쉘은 일단 대통령 출마라는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평정심을 찾아 말했다. 바닥에 나뒹굴던 안경을 주워 꼈다.

‘빌어먹을.’

안경알 한쪽에 금이 가고 테가 찌그러져 있었다.

“바다는 이곳에서 멀고… 아 젠장, 죄송합니다.”

대통령의 강력한 정신지배 덕분에 입 안에 피 맛이 가득하고 아팠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가만히 입을 손으로 막는 안쉘을 바라보던 앤이 씩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안쉘의 턱을 붙잡았다.

“…….”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앤의 얼굴이 다가왔다. 안젤라가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리언의 눈을 가렸다. 앤은 놀랍게도 안쉘의 턱을 붙잡고 그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고 있었다.

안쉘이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앤은 아주 능숙하게 혀를 움직였다. 고른 치열을 훑고 혀 안쪽 깊은 곳에 타액을 흘려보냈다. 터져서 피 맛이 나는 뺨 안쪽을 몇 번이고 혀로 문질렀다.

“아… 아읏…….”

안쉘이 몸을 움찔거리는 사이 앤이 입술을 떼면서 웃었다.

“입 안에 상처가 다 나았죠?”

“네…….”

안쉘이 후들후들 다리를 떨며 주저앉았다. 얼굴은 잔뜩 붉어졌고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젠장. 또 화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안쉘은 입 안의 욱신거림이 없어진 게 어색했는지 몇 번이나 입을 우물거렸다.

“치유 능력이 있었습니까?”

“저희 부족의 타액은 상처를 낫게 해 주거든요.”

그거 인간 쪽 의료계가 알면 난리 나겠군.

안쉘은 혀와 이로 볼을 씹으면서 일어났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인간들 사이에서 그렇게 갑자기 혀를 넣고 키스하면 뺨을 맞아도 모자랄 짓이니 다음부턴 하지 마십시오.”

작게 소곤거리는 안쉘에게 앤이 빵긋 웃었다.

“그건 인어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래.

안쉘은 부들부들 떨며 저 인어의 정수리에 주먹을 콱 박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바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앤은 남쪽 인어들이 숨어 있던 호숫가로 거처를 정했다. 안젤라와 안쉘이 차로 그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준비를 마친 안젤라는 먼저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앤의 뒤에 섰다.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난 건지 안쉘은 엔저와 사무실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젤라는 호랑이에게 다가가는 앤의 등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왕자님은 인간이 밉지 않으세요?”

안젤라가 봤을 때 인어들은 인간을 미워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오히려 앤이 지금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게 더 이상했다. 바다는 원래 인어들의 것이었고, 인간은 바다를 뺏고 싶어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안젤라의 물음에 멈춰선 앤이 턱을 쓰다듬었다. 바다를 가득 담은 그의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 인어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호랑이를 최선을 다해 막으며 리언이 식은땀을 흘렸다.

“밉고, 증오스럽고, 복수하고 싶었는데…….”

앤이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알시타가 계속 미안하다고 울어서, 인간의 사과는 이제 그만 받아도 될 정도로 울고 빌어서 인간들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

인어들은 호구인가, 아니면 바보인가. 너무 착한 것도 문제가 있다. 인어 앤은 마치 그리운 친구를 회상하는 것처럼 말했다.

“인간들은 바다를 침범하고 싶어 했지만… 알시타 같은 인간들이 있다는 걸 알고 도박을 걸고 싶었습니다. 인간을 용서할 도박을.”

자신의 구역을 침범하고, 눈앞에서 동족을 살해한 인간을 앞에 두고도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가 말하는 이유는 더 어이없는 것이었다.

이런 종족에게서 바다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잠시 침묵이 맴돌고, 안젤라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분명 안쉘 중위님이 대선후보로 출마하면, 알시타 님 같은 분들이 계속 나올 거예요.”

전쟁은 싫다. 안젤라는 전쟁이 싫어서 도망친 군인이었다. 그녀의 동기들은 모두 그녀를 겁쟁이라고 비웃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우리 다 전쟁이 싫어서 이곳에 온 사람들이니까.”

리언도 그랬고, 한 달 전 은퇴한 대장님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은 탈영해서 없지만 그 녀석도 인어들과 전쟁이 싫어서 도망치다가 좌천된 사람이었다.

안젤라의 뺨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렸다. 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죄책감에 목이 따끔거렸다.

앤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안젤라에게 땅에 있던 잡초 꽃 하나를 꺾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인간이 있기에 우리는 도박을 걸고 싶었습니다.”

안젤라는 코를 훔치며 훌쩍였다.

“아까 꺾은 조화 엄청 비싼 거니까 돈이나 주세요.”

*  *  *

“대통령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의 진짜 적을 알았음에도 안쉘이 분노로 이성을 잃지 않은 것은 그가 조금 성장해서일 수도 있고 대통령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일 수도 있었다.

대통령은 무서운 사내였다. 본인의 목적을 위해 아들도 죽이는 그의 잔학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못 나온 거지.”

대선 후보가 10여 년 동안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언론이 꾸며 낸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아무도 후보가 되지 못한 것이다. 대통령인 단테 막심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으니까. 안쉘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던 엔저는 조용히 웃었다.

“사실 대통령은 누가 되든 상관없었어. 나는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을 뿐.”

엔저 맥과이어가 온갖 피를 손에 묻히고 더러운 일을 하며 대통령의 장기 말을 자처했을 때, 그의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테 막심의 목적과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단테 막심은 본인의 욕심에 건드려선 안 되는 이를 건드렸다. 그는 감히 엔저에게 헤리엇 알스터를 병기로서 이용하겠다고 선언했다. 헤리엇을 부러 이 조용한 시골로 보낸 엔저의 앞에서.

“아마 저를 죽이려고 들지 모릅니다.”

“건들 수 없게 만들면 돼.”

엔저 맥과이어는 머리가 비상한 사내였다. 안쉘은 신음을 삼키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안쉘은 서 있었기 때문에 앉아 있는 엔저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뜩한 눈동자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헤리엇은 엔저의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멍하니 눈을 껌벅거렸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게 은밀하고 위험해 보이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때 엔저가 고개를 들어 헤리엇에게 말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갈까요, 선배?”

안쉘은 차 키를 챙겨 들고 밖에서 기다리는 앤과 안젤라에게 가려고 했다.

“어딜 가?”

헤리엇이 고개를 갸웃하며 엔저의 멱살을 잡았다. 그건 멱살을 잡았다기보단 부드럽게 엔저의 빗장뼈를 손바닥으로 잡아당기는 몸짓이었다.

본능적으로 경고 신호를 느낀 안쉘이 깨진 안경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뒷걸음질 쳤다.

“정액은 주고 가야지…….”

헤리엇이 엔저의 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안쉘은 빛의 속도로 문을 열고 잽싸게 나가 버렸다.

철컥, 탕!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가 엔저를 내려다봤다. 엔저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방금까지 지었던 표정을 싹 지우고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네, 선배…….”

엔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소년처럼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바지 벨트를 풀었다.

“핥아 주면 돼?”

헤리엇이 고개를 숙여 엔저의 하의 지퍼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저번에 엔저가 자신의 것을 핥아 줘서 기분이 좋았던 게 떠올랐다.

엔저는 상기된 표정으로 헤리엇의 하얀 속눈썹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떻게 선배의 고귀한 입에 자신의 더러운 성기를 핥아 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선배의… 인어 지느러미를 보여 주세요.”

“???”

일단 귀여운 후배의 정액을 얻기 위해 알겠다고 했지만, 사무실엔 욕조가 없었다. 별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돌아오는 내내 엔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헤리엇의 정자 사진을 들고 굉장히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고 있었다. 헤리엇은 고요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엔저, 이리 와.”

집에 도착하고 욕조에 차가운 물을 틀며 헤리엇은 엔저를 불렀다. 조신하게 앉아 헤리엇의 베개 위에서 성기를 쓰다듬고 있던 엔저가 천천히 다가왔다.

엔저는 아직 헤리엇이 욕조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흥분으로 성기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는 헤리엇의 집에 발을 들일 때부터 성기를 바짝 세운 상태였다.

성욕이 왕성한 귀여운 후배를 보면서 곤란한 미소를 지은 헤리엇이 조용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워요… 선배.”

물속에 푹 들어갔다가 수면 위로 나온 헤리엇의 하얀 머리카락이 서서히 바다를 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푸른색으로 일렁거렸다. 귀에 갈퀴가 생기고 하얀 등 뒤로 뾰족한 지느러미가 튀어나왔다. 두 다리는 어느새 아름다운 하얀 비늘로 쌓인 인어의 지느러미가 되었다.

지느러미 한쪽이 흉측하게 어그러져 있음에도 엔저는 그 모습마저도 아름답게 보이는지 숨을 헐떡였다. 그는 욕조 안에 무기력하게 눈을 감고 있는 헤리엇에게 다가갔다.

헤리엇은 인조 인어지만, 인간의 모습보단 인어의 모습이 훨씬 편안했다. 허물을 벗은 듯 헤리엇의 표정이 잠시 풀어졌을 때, 엔저가 제 성기를 인어 꼬리 끝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흠칫하고 헤리엇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역시 푸른 바다를 가득 담고 있었다. 하얗게 바래 없어질 것 같았던 헤리엇의 인상에 색이 덧씌워졌다.

헤리엇이 말없이 엔저를 올려다봤다. 인어가 된 헤리엇을 보며 엔저는 이미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아깝다고 말할 사이도 없이 뜨거운 성기가 비늘에 닿는 감각이 이상했다.

차가운 비늘에 성기가 닿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타오를 듯한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선배… 선배…….”

엔저가 얼굴을 붉히며 헤리엇의 머리 위에서 헐떡거렸다.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던 그가 헤리엇의 비늘 위에서 자위를 시작했다. 점점 욕조 안으로 들어오는 엔저의 몸을 받아 내며 헤리엇이 몸을 비틀었다.

촤아아악-.

욕조를 가득 채우던 물이 넘쳐흘렀다. 헤리엇의 위에서 허리를 흔들던 엔저가, 헤리엇의 유두를 꼬집고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선배… 핥아도 돼요?”

어디를?

헤리엇은 간지럽지만 기분 좋은 감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얼굴에 홍조가 조금 돌았다. 엔저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헤리엇도 조금 흥분했다.

엔저는 혀를 내밀어 헤리엇의 오른쪽 유두를 쪼옥 삼켰다. 한입에 가득 넣고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음…….”

헤리엇이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들었다. 덕분에 꼬리가 엔저의 성기를 조금 더 강하게 문질렀다.

“하아… 하아, 선배.”

헤리엇의 배꼽 아래쪽, 인어의 꼬리 비늘 사이에 기다란 홈이 있었다. 엔저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조용히 벌렸다. 인어의 생식기였다.

헤리엇은 이 부분도 인어와 똑같았다. 그 안에는 성기도 있었고, 또한 그 성기를 담을 수 있는 내장과 이어진 구멍이 있었다.

그 안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자 헤리엇이 작게 눈을 찌푸렸다. 생생한 반응에 엔저는 갈증이 나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선배를 자신의 손으로 희롱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구멍에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자 헤리엇이 말했다.

“거긴 좀… 이상해.”

“어떻게 이상합니까?”

“나쁜 건 아닌데 간지러워.”

헤리엇도 성인 남자이기에 자위 정도는 해 본 적 있다. 하지만 인어의 모습으로 한 적은 없었다.

엔저는 몇 번이고 틈새에 성기를 비비면서 혀를 할짝거렸다. 이 상태로는 그대로 안에 넣을지도 몰랐다. 비늘 하나하나가 성기에 밀려 솟아났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엔저는 정말 미칠 것 같은 기분에 구멍 안으로 조심스럽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윽.”

헤리엇이 말리기도 전에 귀두가 세로로 갈라진 구멍에 살짝살짝 들락날락했다. 헉헉거리면서 엔저는 헤리엇의 꼬리를 핥았다. 어그러진 꼬리 끝에 이를 새우고 핥으면서 엔저가 황홀한 신음을 흘렸다.

“선배… 선배, 아름다워요.”

찰팍-, 찰팍-.

물기 어린 소리가 욕조 가득 울려 퍼졌다. 인어의 지느러미 사이에 있는 갈라진 틈새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헤리엇이 신음을 길게 흘렸다.

몇 번이나 허리를 움직이던 엔저는 헤리엇의 아름다운 인어 지느러미 안에 자신의 더러운 욕망이 모두 들어가는 감각을 맛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헤리엇의 구멍 안에 숨어 있던 성기가 엔저의 성기와 비벼졌다. 이상하고 괴이한 감각이었다. 엔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성기를 빼냈다.

헤리엇은 엔저의 정액이 허무하게 욕조 위에 뿌려지는 것이 싫어 고개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튕겨 나가려는 엔저의 귀두 끝을 입술로 물어 버렸다.

밖에 사정하려던 엔저가 놀라서 굳었지만 헤리엇은 무덤덤하게 정액을 받아 냈다.

“서, 선배.”

감히 선배의 입 안에 사정했다는 생각에 엔저의 붉었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헤리엇은 입 안 가득 엔저의 정액을 물고 고개를 들었다.

꿀꺽-.

“…아, 삼켜 버렸다.”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입 안에 있는 정액을 꿀꺽 삼키며 아차 했다는 듯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술을 타고 입 안에 남아 있던 불투명한 희뿌연 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붉히더니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거리는 엔저의 성기를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한 번 더 사정해, 엔저…….”

“네.”

*  *  *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일곱 살의 그날, 아카데미 기숙사 방을 빠져나왔던 그때부터.

거대한 방 안을 가득 채운 수조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새하얀 인어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일렁이는 물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인어의 하얀 지느러미는 엔저의 붉은 눈동자를 현혹할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였다.

잠을 청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깊고 거대한 고독함을 버티는 것인지 하얀 인어는 몸을 동글게 말고 고요하게 수조 안에 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새하얀 인어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동공마저 하얀 눈동자를 굴려 아래에 있던 엔저를 응시했다.

그래, 여전히 엔저는 그 수조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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