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전임
헤리엇이 엔저를 처음 만난 건 실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물가가 아닌 지상은 그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고, 아카데미를 다니는 낮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군에서 준비해 준 수족관에서 지냈다.
인어로 변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모든 환경이 달라졌다. 달릴 수 있는 두 다리도, 지상에서 마음껏 숨을 쉬며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도 박탈당했다.
실험은 꽤 아팠지만 헤리엇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넓은 수족관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청하던 헤리엇은 아무도 들어올 리 없는 자신의 방으로 누군가가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소리가 진동으로 변해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헤리엇 자체가 기밀 사항이라,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뜻밖의 손님이네.
헤리엇은 수조 아래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수족관, 사방이 유리로 막혀 있어 더욱 어둡고 넓어 보이는 그곳에서 헤리엇은 천천히 아래로 헤엄쳐갔다.
역시 그곳에는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길을 잃은 새끼고양이인지,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작은 소년이 멍하니 고개를 들고 헤리엇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리엇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무척 작고 귀여운 얼굴을 한 소년의 큰 눈에 박힌 붉은 눈동자가 예전에 책에서 봤던 루비를 닮아 있었다.
헤리엇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과 눈을 마주하며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미소를 지었다. 소년이 천천히 유리 벽에 손을 올렸다. 그 작은 손바닥을 응시하던 헤리엇이 손을 뻗어 손을 마주 잡은 것처럼 대었다.
소년은 밖에 있었고 헤리엇은 물이 가득한 수족관 안에 있었다. 엄연히 다른 곳이지만 그들이 속한 공간은 같았다.
그게 헤리엇 알스터와 엔저 맥과이어의 첫 만남이었다.
* * *
안쉘은 당장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리가 아프고 혼란스러웠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큰 소리로 이 상황에 대해 묻고 싶었다. 엔저에게 묻자니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데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 버려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헤리엇은 태연하게 천으로 물기를 닦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에 남은 물기를 탈탈 털어 낸 천을 엔저가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는 세상 보물을 다 가진 것처럼 붉은 눈동자를 반짝거리더니 그것을 아주 곱게 접었다.
…안쉘은 현명하게 그것도 최대한 못 본 척했다.
짹짹-.
산속에 새들의 지저귐이 울려 퍼졌다. 고요함이 찾아온 산과 마찬가지로 하늘 역시 맑고 쾌청했다. 이대로 소풍을 즐겨도 될 정도의 날씨였다.
헤리엇은 젖은 제복을 벗고 엔저에게 겉옷을 받고 있었다. 엔저는 싱긋 웃으며 헤리엇의 어깨에 제 옷을 직접 걸쳐 주었다.
이곳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혼란스러운 이는 안쉘뿐이었다. 그는 묻고 싶어도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불쌍한 존재였다.
군에서 만든 인조 인어는 대체 무엇이고, 헤리엇이 정말로 그 실험 대상자였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결국 헤리엇 알스터가 인어인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할수록 안쉘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호수는 다시 고요함을 찾았지만, 호숫가는 여기저기 흙과 부서진 잔재들로 엉망이 되었다. 이걸 처리하는 것도 군의 일이었기에 안쉘은 이미 망가진 무전기를 들고 탁탁- 몇 번 내려치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추가 연락 수단으로 군용 휴대전화를 들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안쉘은 뒤를 힐끔 돌아보며 전화를 걸었다.
- 소위, 어떻게 된 겁니까?
“지원군은 오고 있습니까?”
- 네.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진 않지만… 청소부 몇 명을 보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쉘은 남쪽 인어들의 제압이 모두 끝났다고 보고했다. 인어들의 생사는 모두 사망 처리되었다. 딱히 위에서도 인어들을 생포하라는 소리는 없었으니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니, 문제 되는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지.
알아선 안 될 것을 알아 버린 느낌이었다. 안쉘은 그 불안감을 최대한 떨쳐 버리며 둘에게 다가갔다. 푸른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로 변했던 헤리엇은 어느새 색이 빠진 종이처럼 다시 하얗게 돌아가 있었다.
엔저가 남쪽 인어들을 굳이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는 헤리엇 알스터의 능력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을까…….
자신의 상관이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위치추적(GPS)을 허용한 안쉘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둘에게 다가갔다. 엔저의 손에 조심스럽게 들린 천을 안쉘은 최대한 못 본 척했다. 본능이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듯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정말 간결하고 마이페이스적인 무덤덤한 대답이었다. 본인의 비밀이 의도치 않게 알려졌음에도 경계하거나 당황하는 반응은 없었다.
헤리엇은 어제 만나고 인사했던 얼굴 그대로였다. 여기서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이 가장 비정상일까 안쉘은 헷갈렸다.
“네…….”
엔저의 겉옷을 걸친 헤리엇은 짧은 바지만 입고 있었다.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빛나다 못해 무엇이라도 뚫어 버릴 것처럼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에… 안쉘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래에 차를 대기시켰습니다. 돌아가죠.”
헤리엇이 절뚝거리면서 일어났다. 엔저는 결국 헤리엇이 사용한 천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 그 용도를 묻는 게 무서워진 안쉘은 그냥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장!!”
산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안젤라가 내려오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달려왔다. 한 손에는 헤리엇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붉은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받아들며 헤리엇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지팡이가 있어야 걸어 다니기 편했다. 헤리엇을 부축하고 있던 엔저가 아쉬운 듯 숨을 삼키며 멀어지는 헤리엇의 등을 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별일 없었어?”
“대장이야 말로 별일 없었어요?”
어디서 쾅쾅거리는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고 산 아래까지 진동이 계속되었었다. 안젤라가 초조한 얼굴로 능력도 없는 대장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소리친 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헤리엇은 안젤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남쪽 인어들을 제압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엔저의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하루 쉴 틈도 주지 않고 떨어진 명령에 헤리엇은 엔저와의 재회를 제대로 즐길 틈도 없었다.
안쉘은 남쪽 바다 인어들이 항복 선언을 했다고 말했다. 지상의 인간들에겐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곧 매스컴을 통해 알려질 예정이었다.
헤리엇은 떠나는 엔저를 배웅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엔저가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상자를 헤리엇에게 넘기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 이것.”
“……?”
“도청기입니다.”
“도청기?”
“네.”
안쉘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이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도청기를 당당하게 포장까지 해서 선물로 주나.
하지만 헤리엇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엔저가 주니까 뭔가 생각이 있어서 주는 거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안쉘은 당장 저 불길한 범죄의 증거를 잡아 던져 부수고 싶었지만, 그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포장지 안에는 아주 귀여운 달걀 모양의 장신구-도청기-가 들어 있었다.
“선배의 말씀을 어디서든 듣고 싶어서요.”
“전화는……?”
“통화하는 걸로는 부족해요.”
“그렇구나…….”
헤리엇은 이것을 집 안 어디에다가 장식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옆에서 안쉘이 뭔가 말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배가 욱신거리는지 몸을 움츠렸다.
“그래… 집 어딘가에 놔둘게.”
“감사합니다.”
자신은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말이 많지 않으니 집에서 뭘 하든 소리가 나지 않을 텐데…….
곤란한 후배는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 헤리엇은 작게 미소 지었다.
“다시 만나면 좋겠네, 엔저.”
남쪽 인어들 때문에 임무로 만났지만, 후배를 오랜만에 만난 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그토록 따르던 어린 후배가 이렇게 커 버린 건 의외였지만 그의 루비는 여전했다.
“네. 선배…….”
엔저가 뒤를 열두 번 돌아볼 동안 헤리엇은 그에게 받은 선물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옆에서 쭉 보고 있던 안젤라가 께름칙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그녀는 엔저의 팬이었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거 안 버리세요?”
“선물이니까.”
“…….”
자신이 아는 선물의 정의와 헤리엇이 아는 선물의 정의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안젤라 역시 묻지는 않았다.
군용 차량에 탑승한 엔저는 쓰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안쉘은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남쪽 바다 인어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래?”
“네.”
“대통령께서 표창장을…….”
엔저는 곧 국가에서 표창장을 받을 예정이었다. 동, 서, 남쪽 바다를 모두 제패한 엔저의 미래는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영웅으로 많은 추앙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최연소 대령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가 받게 되는 연금과 그에게 돌아올 재력은 지금보다도 천지 차이로 달라질 것이다.
“필요 없어.”
무심하게 말한 엔저는 주머니에서 나무젓가락 하나를 꺼내며 웃었다.
“???”
웬 나무젓가락?
안쉘이 고개를 갸웃했다.
“난 이제 은퇴할 생각이거든.”
“…네?”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안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말든 엔저는 느긋하게 웃으며 나무젓가락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은퇴해서 시골 같은 곳으로 귀향하는 것도 좋겠지.”
설마 그 귀향이 여기는 아니겠지.
군이 엔저를 놔줄 리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불길한 기운은 안쉘의 목덜미에서 떠나지 않았다.
엔저가 혀를 내밀어 젓가락을 날름 핥았다.
이른 아침, 헤리엇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덜 깨 넋을 놓은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가 더욱 불투명해 보였다. 절뚝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간 헤리엇은 칫솔에 치약을 가득 짜 입에 넣고 나서야 눈을 떴다.
헤리엇은 입에 물었던 칫솔을 뺐다.
“…새 거네.”
왜 새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 *
헤리엇은 탄산을 먹지 못했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탄산 방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그런지 밖은 더 더워 보였다. 이제 완벽한 여름이 찾아왔다. 뙤약볕은 매정하게도 헤리엇의 수분을 계속해서 빼앗아갔다.
이런 날씨일수록 수분공급이 중요했다. 사실 물속에 있는 게 가장 좋긴 했지만, 저번 전투로 호수가 엉망이 되어 갈 수가 없었다.
진흙이 가라앉지 않아 호수는 탁한 흙탕물로 변했고, 미처 치우지 못한 나뭇가지 잔재들로 가득했다. 혹시나 싶어 한 번 들어갔다가 나뭇가지에 피부가 쓸려 아팠다.
하지만 다행히 이런 외진 산속 군사 기지라도 군은 에어컨을 설치해 주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은 진즉에 탈수로 사망했을지도 모른다고 헤리엇은 생각했다.
중요한 건 헤리엇이 더운 날씨에 견디기 힘들어하는 체질이지만, 추위에도 딱히 강한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에 안젤라가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 꼼작도 못하고 피부가 파랗게 언 채 서 있던 헤리엇을 측은한 눈길로 쳐다본 적도 있었다.
그녀는 여름에도 강했고, 겨울에는 특히 더 강한 소녀였다. 그 추운 날 반소매 티를 입고 산에서 멧돼지를 잡는 걸 목격한 후로, 헤리엇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헤리엇은 안젤라가 왜 이런 시골로 좌천됐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말해 줄 때까지 굳이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의 손아귀에 들린 탄산음료였다. 마을 노인이 건네주는데 차마 못 먹는다고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아왔다.
멍하니 사이다를 들고 고사를 지내던 헤리엇은 리모컨을 들었다. 달칵하고 TV를 켜자 뉴스 보도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주제는 엔저 맥과이어였다. 그는 오늘 대통령과 알현하는 일정이 있으며 어쩌면 젊은 나이에 진급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역사상 그렇게 젊은 나이에 대령을 달게 되는 것도 이슈 거리였지만, 사실 이번에 남쪽 인어들에게 항복을 받아 낸 게 더 큰 이슈였다.
동쪽 인어들은 괴멸했고 서쪽과 남쪽 인어들은 항복했다. 북쪽에 거주하는 인어들은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니 사실상 인간들의 승리였다. 화면에서 보이는 엔저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며 멍하니 있던 헤리엇의 귀가 살짝 쫑긋거렸다.
쿵쾅쿵쾅.
아주 씩씩하고 늠름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사람은 늠름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작고 귀여운 여성이었다. 안젤라는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히고 땀을 닦으면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안젤라는 이번에 가여운 노부부가 운영하는 1만 5천 제곱미터짜리 마늘밭 수확을 도와주고 왔다 든든하게 새참까지 얻어먹은 그녀는 꿀떡을 소쿠리 채로 받아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사무실에 퍼졌다.
헤리엇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내민 꿀떡을 사양했다. 안젤라도 굳이 강요하지 않고 꿀떡 두 개를 입 안에 구겨 넣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안젤라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어? 엔저 중령이네요?”
안젤라가 살짝 미묘한 표정이 되어 TV를 응시했다. 엔저의 팬이었던 그녀는 엔저를 실제로 만나고 나서 실망한 듯 보였다.
왜 실망한 걸까. 헤리엇은 멍하니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엔저는 헤리엇에게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는, 못 말리는 후배였다.
“그것보다 대장, 그거 가지고 고사 지내요?”
“탄산 날리고 있었어.”
동공까지 하얗게 바랜 눈동자가 제 앞에 놓인 음료수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안젤라는 그 모습에 다음부턴 이온 음료를 준비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헤리엇이 저렇게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가끔 사람이 아니라 인형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하얀색 셔츠를 입고 온 날은 그의 존재감이 너무 희미해서 몇 번이나 재확인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하얀색 머리카락이 그를 처음 봤던 날보다 조금 길어 있었다.
대장이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는지 홀로 고민에 빠진 안젤라의 마음은 심란했다. 그러나 헤리엇은 멍하니 탄산 방울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탄산이 언제쯤이면 다 빠질까 생각하면서.
특별할 것 없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퇴근하는 헤리엇에게 한잔 걸치지 않겠냐고 마을 이장이 권해 왔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 헤리엇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즐길 거리를 찾아다니는 젊은이들은 달랐다. 안젤라와 리언은 눈까지 반짝거리며, 마치 꼬리 흔드는 개처럼 이장의 뒤를 따랐다.
헤리엇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등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곤란한 듯 눈썹 끝을 내리고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집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음…….”
헤리엇은 멍하니 빗을 들고 몇 번이나 갸웃거리며 자세히 관찰했다. 이빨이 빠져서 새로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한 빗이 멀쩡했다. 새것처럼 빠진 이도 없고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번에 읍내로 나갈 때 사야 할 리스트 중 하나였다.
칫솔도 새것이더니 빗도 새것이라… 도깨비라도 들었나.
헤리엇은 이불을 깔기 전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낡아서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화장실과 욕실이 분리되어 있어 헤리엇에게는 좋았다. 그래서 헤리엇은 이곳에 오고 가장 처음으로 욕실 안에 있던 세탁기를 빼고 욕조를 좀 더 넓게 설치하는 공사까지 했었다.
헤리엇은 차가운 물을 받으며 더운 날씨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물이 가득 채워지자 헤리엇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첨벙.
곧이어 물 밖으로 삐져나온 건 사람의 다리가 아닌 새하얀 비늘로 이루어진 지느러미였다.
헤리엇의 꼬리지느러미였다. 꼬리 끝 한쪽 지느러미가 흉하게 어그러졌지만 그것대로 아름다운 빛을 내는 꼬리를 욕조 안에서 몇 번 살랑살랑 움직인 헤리엇은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귀에 갈퀴가 생기고, 하얗게 바랬던 머리카락에 푸른색이 돌아왔다. 눈동자는 호수를 담은 것처럼 푸른색과 하얀색이 일렁였다.
저 멀리 선반 위로 푸른 바다와 조개 문양이 새겨진 달걀 모양의 귀여운 장식이 보였다. 엔저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어디에다 둬야 할까 고민하던 헤리엇은 마땅히 둘 곳이 없어 결국 욕실에다 그것을 두었다.
‘도청기라고 했나…….’
헤리엇이 물속으로 잠수하며 눈을 깜박였다. 말수가 없는 그는 집에서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나마 몇 번 감탄은 내뱉었지만, 딱히 혼잣말은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헤리엇은 후배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도 선배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계급으로 따지면 엔저가 더 높지만.
촤악-.
욕조 위로 올라온 헤리엇이 욕조에 기대며 말했다.
“안녕, 엔저…….”
물론 이 소리를 바쁜 엔저가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눈을 감은 헤리엇의 얼굴 위로 푸른색 머리카락이 너울거렸다.
* * *
“네, 선배…….”
매혹적인 얼굴로 미소 짓던 사내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길쭉하고 튼실한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모습은 화보에 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멋있었다.
사내는 양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감미로운 소리를 감상하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옆에서 조용히 일정을 확인하고 있던 안쉘은 그를 힐끔 쳐다봤다.
“나, 은퇴할 거야.”
안쉘은 느긋하게 말하던 엔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엔저는 지금 대통령과의 면담을 앞에 두고 있었다. 노래를 들을 정도로 태평해 보이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엔저는 제대로 씻지도, 쉬지도 못하고 이곳까지 끌려왔다. 거기다 그가 곧 향할 알현실에는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다. 안쉘은 함께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영웅은 이래서 피곤한 법이구나.
안쉘은 한숨을 쉬었다. 은퇴하고 싶어도 군이 엔저를 놔줄 리가 없었다. 군은 이제 강하고 무자비한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가 가지는 상징성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었다.
엔저는 국민들의 영웅이었고 우상이었다. 군은 그런 엔저를 아주 야무지게 이용해 먹고 있었다. 물론 엔저에게 떨어지는 떡고물도 상당했다.
그가 이번에 받은 휘황찬란한 기지는 대리석 바닥으로 번쩍번쩍했고, 새로 받은 훈장은 총 12개였다. 포상금도 어마어마했다.
“중령님, 이제 곧…….”
“…그렇지.”
엔저가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그는 아주 좋은 명상을 방해받은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언짢은 기색을 느낀 안쉘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전투 중일 때 엔저가 저런 기색을 내보이면 인어들과 같이 아군도 바다에 수장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엔저가 아군을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엔저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한쪽 귀에는 여전히 이어폰을 꽂은 상태였다.
‘설마 그 상태로 대통령을 만날 생각은 아니지요……?’
안쉘이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내 불안한 눈빛과 거친 네 행동…….
안쉘은 바닥에 떨어진 엔저의 겉옷을 챙기다가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가 걸리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전에는 나무젓가락이 나오더니 이번엔 대체 뭐야?
안쉘이 저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들었다.
“…칫솔?”
안쉘은 진공 포장된 칫솔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지어 안에 물기까지 그대로 있었다.
투둑-.
거꾸로 들린 겉옷에서 떨어지는 건 놀랍게도 칫솔뿐만이 아니었다. 이빨 빠진 빗, 컵 손잡이로 추정되는 유리 조각 등등이 튀어나왔다.
대체 이 주머니는 쓰레기통도 아니고 왜 이런 것들이 튀어나오는가.
혹시 쓰레기통이 없어서 기특하게 주머니에 넣은 건 아닐 테고. 안쉘이 아는 엔저는 그렇게 도덕적이지 않다. 옆에 있는 사람을 쓰레기통으로 여기면 여겼지 일부러 챙길 사람은 아니다.
안쉘의 직감과 본능이 이것들과 엮이면 분명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쓰레기통에 넣어 보라는 듯 물건에서 우울한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쉘은 꿀꺽 침을 삼키며 그것들을 차곡차곡 엔저의 주머니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 잡고 다시는 이 물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 * *
그의 이름은 단테 막심.
지상 인간들의 대표이자 정신지배 능력을 가진 그는 늙었지만 온화하고 포근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올해로 취임한 지 대략 20년 정도가 지났고, 역사상 임기가 가장 긴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재신임을 위한 선거를 앞에 두고 있었다.
단테가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의 인간들은 인어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의 서명에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젊고 유능하거나 늙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아들, 딸, 부모 모두가 싸늘한 바다 아래 수장되었다.
온화한 얼굴 뒤로 수없이 많은 피와 증오를 한 몸에 받은 사내는 온화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늙고 주름진 눈가 사이에 숨은 푸른 눈동자는 섬뜩할 만큼 차가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엔저가 두 번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단테가 두 손을 벌려 그를 환영했다.
“어서 오렴.”
친근한 음성이었다. 마치 아끼는 조카를 반기는 삼촌의 그것과도 같았다. 엔저는 쓰고 있는 장교모를 벗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올려 모자를 다시 썼다. 그 순간 갑자기 플래시가 터졌다.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카메라로 찍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한 장면도 놓치기 싫다는 듯 치열하게 셔터를 눌렀다.
눈이 부실 법도 한데, 단테와 엔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단테가 보란 듯이 엔저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기자들을 향해 웃어 주며 그가 엔저에게 속삭였다.
“남쪽 인어들을 해치웠다고.”
지금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들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와 달리 웃고 있는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엔저의 어깨를 잡고 더욱 친근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기자들은 둘의 사이좋은 모습을 담기 위해 더욱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펜을 든 기자는 수첩에 ‘대통령과 국민 영웅 엔저 중령의 사이좋은 모습’이라고 썼다. 엔저는 따분하고 지루한 영화를 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수고했다.”
“…….”
“더러운 인어 놈들…….”
단테의 목소리에 증오가 어려 있었다.
늙은 권력자는 바다의 사는 인어들을 무척 증오했다. 엔저는 코웃음을 칠 뻔했지만, 참았다. 이 지루한 연극을 끝낼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사랑하는 외동아들이 거대한 무역 크루즈를 바다에 띄었다. 그의 배는 무슨 일인지 불행히도 인어의 구역을 침범하고 말았다.
엔저는 그놈을 얼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얼간이는 얼른 아빠에게 전화해 살려 달라고 빌었다. 크루즈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인어들의 구역을 침범한다고 울었다. 단테는 몇 번이고 인어들에게 그의 배를 건들지 말아 달라 간청했다.
이번에 바다 일주를 성공하면 그 얼간이는 기반이 튼튼한 회사를 창립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어들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비는 처절한 메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차가운 바다 아래 가라앉히고 말았다.
사실 바다는 인어의 것이라, 인간들이 이용할 수 있는 해상 경로는 정해져 있었다. 엔저는 그 얼간이가 왜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사건은 매우 크게 보도되었다. 대통령 아들의 죽음은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바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었던 인간들은 그것을 이용해 바다를 지배하는 데 열을 올렸다.
곧 인간의 군함이 바다의 영토를 침범했다. 예상보다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군은 바다에서 누구보다 강하고 자유로운 존재를 원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물을 다룰 수 없고, 그렇기에 드넓은 바다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다를 억지로 지배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그 욕심으로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왔다. 고작 열네 살의 소년이었던 인조 인어가 백 십여 척의 군함을 가라앉히고, 심해로 도망치는 인어들마저 전부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년도 그 전투로 인해 인어의 꼬리 한쪽에 결함이 생겨 능력을 조절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동쪽 바다는 침묵의 바다가 되어 버렸다. 살아남은 이가 없는 그 끔찍한 전투는 지금도 군이 숨겨야 할 비밀 중 하나였다.
“그래… 시골 마을에서 요양을 좀 하고 싶다고.”
엔저는 군을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단테는 그를 놔주지 않을 셈이었다. 그는 이용하기 좋은 장기 말이었고 놔줄 이유가 없었다.
엔저는 붉은 눈동자를 굴려 단테를 내려다봤다. 엔저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와 대비되는 푸른 눈동자가 반쯤 사라지게 미소 짓는 늙은 대통령은 그의 단단한 등을 토닥거렸다.
“…그 인어는 잘 지내고 있니?”
“…….”
“곧 불러야 할 일이 생길 테니까, 잘 간수하고 있도록.”
탁! 하고 등을 소리 나게 치며 단테가 기자들 쪽으로 걸어갔다.
“중령, 아니 엔저 대령! 지금 소감을…….”
“개 같아.”
짧게 대답한 엔저가 알현실 문을 탕- 소리 나게 닫고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엔저의 말을 알아서 해석할 것이다. 이전부터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엔저는 그 늙은이가 닿았던 부분을 오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거칠게 털어 내며 넓고 거대한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단단한 대리석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푹 파이고 갈라졌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엔저는 무표정으로 옆에 전시되어 있던 석고상을 한 손에 잡고 휘둘렀다.
쾅-! 쨍그랑!
석고가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
엔저의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쉘이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니 댁은 또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안쉘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엔저는 무척 화가 나 보였다. 그는 기다란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책상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쾅!
또다시 커다란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무거운 나무 책상이 너무나 가볍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쉘이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아니, 이 미친놈이 갑자기 왜 이래!
엔저는 의자에 앉아 살그머니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는 작은 봉투였다. 입구를 열고 엔저가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또 꺼냈다.
‘모처럼 빗에서 발견한 소중한 것인데.’
안정제를 찾아다니는 사람처럼 이 방법만이 최후의 보루라는 듯이,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바라봤다.
“……?”
하얀색 실?
자세히 보니 실이 아니라 힘없이 늘어져 반짝거리는 게 머리카락이었다. 엔저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렇게 하고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눈앞에 헤리엇의 모습이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아름다운… 나만의 선배.”
성장하는 엘리트 안쉘은 최대한 그의 다리 사이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 *
헤리엇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젤라와 리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물에 젖은 하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술에 잔뜩 취한 안젤라와 리언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횡설수설했다. 헤리엇은 두 젊은이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왜 그래?”
“버… 버버버버, 버.”
“버?”
“범이!”
“…범?”
“범이 나타났어요!”
안젤라와 리언이 콩트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호랑이?”
“네!!”
두 사람… 취했구나. 여기서 멸종위기 동물을 찾고…….
멍하니 술에 취한 둘을 살피던 헤리엇은 살짝 몸을 틀어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이 된 헤리엇의 눈썹이 밑으로 살짝 쳐졌다.
“좁은데… 자고 갈래?”
헤리엇은 애들이 얼마나 취했기에 헛소리를 할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안젤라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심지어 믿었던 리언마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만약에 안젤라가 혼자서 호랑이를 봤다고 말했다면 헤리엇은 작게 웃어 주면서 “응…….”하고 말았을 것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귀여운 안젤라의 술주정으로 받아 주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언이 함께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리언 개인을 더 신뢰해서가 아니라,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리언은 동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따금 인간의 분위기나 행동에 동화되어 인간과도 교감할 수 있었으므로 그의 능력은 전쟁에서 그 자신에게 너무나 잔인하게 다가왔다. 죽기 전 인어들의 공포와 절망감을 그대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것이 그가 이런 평화로운 산골 마을까지 오게 된 이유였다.
리언은 교감 능력 덕분에 상대방의 본질이나 상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변신 능력이 있는 범죄자가 개로 변한 것도 바로 알아차렸다.
그만큼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리언이 호랑이를 봤다고 하면 그건 착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음.”
헤리엇은 일단 둘을 집 안으로 들였다. 목욕 중에 갑자기 나온 터라 조금 어수선했다. 그러고 보니 헤리엇의 하얀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검은색 실내복을 적시고 있었다.
안젤라와 리언이 너무 급하게 문을 두들겨 닦을 시간도 없이 옷만 걸치고 나온 것이다. 헤리엇은 수건을 들고 머리를 털며 욕실을 정리했다.
“호랑이가 있었어요!”
안젤라에게 미안하지만 헤리엇은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힘은 호랑이의 두개골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오히려 호랑이의 이빨이 걱정될 정도로 몸이 단단했다.
헤리엇이 손을 들어 오두방정을 떨어 가며 달달 떠는 안젤라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진정해.”
호랑이가 나타난 게 아니라 용이 나타났었다고 하면 헤리엇이 놀란 척이라도 해 주려나 안젤라가 입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아마 곤란한 듯 웃으며 ‘음…….’하고 말하지 않았을까.
“음료수 먹을래?”
완전 애 취급이었다. 실제로 헤리엇은 자신보다 어린 이들에게 약했다. 안젤라는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유가 있어.”
“왜 두유예요?”
“아침 대용으로… 순해서 좋아.”
그렇지, 탄산도 못 먹고 자극적인 것도 못 먹고, 뜨거운 것도 잘 못 먹는 헤리엇은 편식쟁이였다. 안젤라는 팩으로 된 두유를 받고 빨대를 꽂았다.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리던 리언이 입을 열었다.
“대장, 그… 호랑이가요.”
리언의 두유를 준비하던 헤리엇은 고개를 돌렸다.
“응…….”
“엄청나게 슬퍼했어요.”
“슬퍼해?”
“네 공포에 질렸어요. 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리언은 호랑이하고 교감까지 한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든 헤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수확의 계절이었다. 마을의 아이돌 안젤라가 강철 같은 몸으로 그들의 수확을 돕고 있었다. 그에 마을 노인들도 신이 나서 작물을 수확하는 중이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피해가 생기면 곤란했다.
“도와주고 싶어요.”
리언은 참 좋은 녀석이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순한 인상 그대로였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그 역시 온화하고 편안한 인상이었다. 헤리엇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선 술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헤리엇은 둘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었다. 지금은 해가 져 완전한 밤이었다.
“그래… 내일 한 번 같이 찾아보자.”
일단 지금은 좀 자고.
둘이 자기엔 하나밖에 없는 이불은 불편했을 테지만 술에 취한 둘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호랑이를 목격한 까닭에 올라왔던 흥분을 잠재우니 술기운이 급격하게 몰려온 것이다.
둘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헤리엇은 창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읍내에 갔을 때 사 왔던 초콜릿 과자를 한입 깨물었다.
헤리엇은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집 안은 늘 휑했다. 소유욕이 없어서 굳이 무언가를 모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나마 있는 취미가 용도별로 머그잔을 모으는 것이었다. 우물우물 입 안에 있는 음식을 씹고 있는 헤리엇의 얼굴은 늘 그렇듯 평온했다.
다음 날, 호랑이를 찾기 위해 일행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헤리엇은 절름발이였지만, 산은 잘 탔다.
신기해하는 안젤라에게 웃어 주며 헤리엇은 눈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치웠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있던 잎사귀를 거둬 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호랑이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자국이 나왔다.
“자세히 아시네요?”
이장님이 순찰 가자고 찾아왔던 것을 힘들게 거절하고 쫓아온 리언이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리엇이 작게 웃었다.
“…옛날엔 동물학자가 꿈이었거든.”
“그래요?”
“응. 동물을 좋아했어.”
리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헤리엇은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빈 통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번엔 든든하게 준비해서 2L 물통을 네 병이나 준비했다. 무거웠지만 비우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 벌써 두 병이 사라진 상태였다.
완연한 여름, 지상에 있는 헤리엇의 몸은 다른 때보다 더 많은 물을 요구했다.
산 중턱에서 숙취에 골골대는 안젤라를 이장님에게 보낸 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유유히 날아가던 새가 놀랍게도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리언은 눈을 감고 참새의 부리에 입술을 맞췄다.
헤리엇은 이따금 그의 능력이 부러웠다. 평화에 어울리는 능력을 가진 리언은 산속에 있으면 꼭 동화에 들어가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길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는 어떻게 본 거야?”
리언은 고개를 들어 지난밤을 회상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술은 쭉쭉 잘도 위장으로 골인했다. 둘은 신이 나서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마을 사람들의 아이돌인 안젤라는 술자리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러니 어르신들은 안젤라에게 꿀떡이니 술이니 안주니 모두 퍼다 주었다. 덩달아 옆에 있던 리언도 꿀떡꿀떡 받아먹었다.
따라 주는 술을 모두 받아먹으니 결국 둘은 비틀거리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자고 가라는 어르신들의 만류에도 두 사람은 산을 넘어 집으로 가자고 어깨동무도 해 가며 산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안젤라가 취해서 풀린 눈을 끔뻑였다.
“…리언, 저거 뭐야?”
“으응……?”
취해서 몽롱한 정신으로 리언이 대답했다. 안젤라는 아예 손등으로 눈까지 비비고 있었다.
“저기… 고양이가…….”
“고양이?”
산속에 고양이야 원래 많지 않나.
안젤라의 눈이 게슴츠레했다가 어느 순간 커다래졌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저 멀리 맨눈으로 확연히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랑이가 리언과 안젤라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찢어 죽일 듯이 살기를 내비치던 호랑이는 다행히도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오진 않고 등을 돌려 산속 깊이 들어가 버렸다.
안젤라와 리언은 서로를 보다가 하얗게 질린 채로 대장의 집에 달려가는 짹짹이들이 되었던 것이다.
“너희가 있던 곳이 어디쯤이었는데?”
“한… 저쪽쯤.”
“…….”
낮에 와서 확인하니 호랑이가 발견된 장소와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은 거리감이 상당했다. 헤리엇이 다시 발자국을 확인했다. 발자국은 헤리엇의 손 두 개가 쉽게 들어갈 정도로 거대했다.
멀리서도 그렇게 커 보이는 호랑이라니… 리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크르릉-.
우연치곤 기가 막혔다. 헤리엇이 서 있는 곳으로 집채만 한 호랑이가 소리 없이 튀어나왔다. 뒷다리 하나가 헤리엇만 했다.
호랑이가 원래 이렇게 거대한 생물인가…….
헤리엇의 고개가 호랑이를 따라 끝없이 치켜 올려졌다. 호랑이의 금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피해요!!”
리언이 헤리엇의 어깨를 잡고 뒤로 물러났다. 날카로운 발톱이 스쳐 지나가고 헤리엇이 서 있던 땅이 깊게 파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크게 다쳤을 것이다.
리언은 전투에 능한 능력이 아니었고, 헤리엇도 물속이 아니면 능력을 낼 수 없었다. 도망가는 것도 리언 혼자라면 가능하지만 다리가 불편한 헤리엇은 불가능했다.
“먼저 도망갈래?”
헤리엇이 리언에게 말했다. 말속에 공포심이라곤 없었다. 리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대단히 착한 청년이다. 헤리엇이 상황에 맞지 않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집채만 한 호랑이가 헤리엇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리언이 비명을 질렀다.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리언까지 공격하다니, 어지간히 인간이 싫은 것 같았다.
“이 호랑이, 군인들에게 지독한 짓을 당했나 봐요!”
헤리엇과 리언은 지금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인에게 무슨 짓을 당했다면 당연히 이 옷을 입은 사람이 좋아 보일 리 없었다.
헤리엇이 뒷걸음질로 피하다가, 피해 보려 했지만 결국 불편한 다리가 리언의 다리와 엉키고 말았다. 뒤로 같이 밀려 넘어진 두 사람에게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덤벼들었다. 그 속에 있는 날카로운 이빨의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헤리엇은 무덤덤하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얀 속눈썹이 밝은 햇빛에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콰앙-!
호랑이의 얼굴 주변으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이 들렸지만, 폭약이 터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선배, 괜찮으십니까?”
하늘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둥둥 떠 있는 사람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돌풍이 부는 것처럼 바람이 불었고 헤리엇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호랑이는 갑자기 공격당한 것에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다친 딱히 곳은 없어 보였다.
“엔저?”
“네, 선배.”
엔저는 날렵하게 바닥에 착지해 헤리엇의 어깨를 잡고 부축했다.
“조금 늦었군.”
그가 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눈앞에 있는 집채만 한 호랑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엔저는 끼고 있던 새하얀 장갑을 벗고 호랑이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거대한 호랑이의 몸이 너무나도 가볍게 두둥실 떠올랐다. 호랑이의 주변으로 돌풍이 불어 닥쳤다.
“이놈이 여기 있었군요.”
헤리엇이 바람에 이리저리 엉킨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 모습을 본 엔저는 얼른 손을 내리고 헤리엇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그렇게 헤리엇에게 정신이 팔린 엔저는 호랑이를 구속한 힘이 조금 풀어진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쾅-!
집채만 한 몸뚱이에 비해 호랑이는 땅에 떨어지자마자 매우 재빠르게 도망쳤다. 엔저는 호랑이가 도망가든 말든 눈앞의 헤리엇에게만 집중했다.
그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혹여 한 가닥이라도 떨어질까 봐 세심한 손길로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호랑이가 군과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십니까?”
리언은 혼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호랑이가 도망간 방향과 엔저를 번갈아 쳐다봤다. 엔저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대한 캐리어와 안쉘이 곧 도착할 거라는 그의 말을 들어 보니 여기에 꽤 오랫동안 머물 생각인 듯 보였다.
그 시각, 엔저의 꿍꿍이를 눈치챈 안쉘은 피눈물을 쏟으며 시골로 오는 중이었다. 말만 파견이요, 뜻만 요양이었다.
‘저 빌어먹을 상사 때문에 시골 마을에 억지로 좌천되는구나……!’
* * *
어디서 다시 나타날지 모를 호랑이 때문에 우선 사무실로 돌아온 헤리엇은 사실 호랑이에 대해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군을 증오하는 호랑이, 군에서 찾고 있는 호랑이라고 하면 솔직히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궁금하냐고 묻는 엔저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응.”
헤리엇은 느릿하게 눈을 껌벅였다. 깜박이는 움직임에 맞춰 팔랑거리는 하얀 속눈썹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엔저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음.”
안쉘이 있었다면 그럼 그렇지, 하고 코웃음 칠 일이었다. 역시 꿍꿍이가 있었어!
하지만 귀여운 후배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헤리엇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엇의 허락에 엔저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는 헤리엇의 팔뚝을 조심스럽게 잡고, 상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이…….”
엔저는 무척 뜸을 들이다가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선배의 발을…….”
“발?”
“네, 발을 핥고 싶습니다.”
뭐든 들어주겠노라 장담했던 헤리엇이 침묵했다. 자신의 군화를 내려다보면서 곤란한 듯 웃는 그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내려갔다.
“냄새날 텐데…….”
씻지도 않았고…….
군화는 앞뒤가 꽉 막혀 있었다. 적어도 씻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곳 사무실의 화장실은 안타깝게도 발을 씻을 수 있을 정도로 청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엔저는 얼굴을 더욱 환하게 빛내며 자신의 두 손을 포개듯 깍지를 꼈다. 그의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정말, 제발 핥고 싶습니다…….”
뭐가 좋은 건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헤리엇은 후배의 어리광에 약했다.
“음…….”
잠시 망설이던 헤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엔저의 긴장 어린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가 얼른 침을 삼켰다.
만약 여기에 안젤라나 안쉘같은 정상인이 있었다면 헤리엇에게 제발 한 번 더 고려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 줬을 텐데 현재 이 공간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선배, 다리를…….”
엔저는 혹시라도 헤리엇이 마음을 바뀔까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헤리엇은 항상 그렇듯 곤란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딱히 도망칠 생각은 없었지만, 불편한 다리가 엔저의 큰 손에 덥석 잡히자 긴장되는지 몸이 움찔하고 떨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다리를 잘못 만지면 깨질 듯한 유리 조각을 만지듯 섬세하게 움직였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군복 위로 헤리엇의 피부를 음미했다. 얼굴은 개다래나무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엔저의 어여쁜 손가락이 군화 끈 사이로 들어가는 게 헤리엇의 시야에 보였다. 손톱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딱 적당한 길이였고 가시 하나 없이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손가락은 길쭉하고 적당히 마디가 튀어나왔다. 손등에는 핏줄이 적당히 도드라져 있어 아마 사람들이 섹시하다고 느끼는 손의 표본일 것임이 분명했다.
“손이 예쁘네, 엔저.”
“감사합니다.”
헤리엇이 고개를 살짝 숙여 엔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빤히 감상했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음에도 엔저는 멋들어지게 씩 웃었다.
헤리엇의 머리카락이 귓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번에 읍내에 나갈 때 이발소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헤리엇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을 어떻게 봤는지 엔저는 무릎을 꿇은 그 자세로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워요… 선배.”
근사하고 남자답게 생긴 엔저가 눈앞에 신이라도 나타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군화 끝부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군화가 천천히 벗겨지고 헤리엇이 신고 있던 하얀색 양말이 드러났다. 헤리엇은 냄새가 신경 쓰이는지 살짝 뒤척거렸다.
엔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하얀 양말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한 번 더 쳐다본 엔저가 바짓단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하얀 종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다리는 빈말로도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온갖 실험을 당한 다리는 흉터투성이였다.
“나를 짓밟아 주세요… 선배.”
이 세상에서 엔저 맥과이어를 발아래 두고 짓밟을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헤리엇 알스터뿐이었다. 하지만 엔저의 말에도 그저 곤란한 미소만 지은 헤리엇이 속삭였다.
“…짓밟는 건 좀…….”
아무리 그래도 아끼는 귀여운 후배인 엔저를 밟고 쓰러트릴 순 없었다.
“선배… 아름다워요, 선배.”
황홀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엔저는 이성을 잃은 듯 헤리엇의 발등에 코를 박았다.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이제 시작이라는 듯 엔저가 혀를 내밀어 헤리엇의 발목을 핥았다. 붉은 혀를 내밀고 헤리엇의 발목을 강하게 핥으며 서서히 아래쪽으로 혀를 움직였다. 발목을 지나 발뒤꿈치, 그리고 발바닥 중간까지 혀를 움직이며 질척하게 침을 묻혀 갔다.
“…음.”
헤리엇은 역시 물로 발을 한 번 씻는 게 낫지 않았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엔저는 헤리엇이 그럴 생각 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 혀를 움직였다. 마치 짓밟기라도 한 것처럼 발바닥이 엔저의 볼에 닿았다.
“…….”
엔저는 상관하지 않고 발목의 가장 연한 살을 혀로 강하게 누르고 춥 하고 빨아들였다.
간지러워.
헤리엇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엔저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겨들었다. 그는 이 검은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발바닥이 간지럽고 냄새가 신경 쓰이는 것 빼곤 곤란한 점은 없었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언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냄새 안 나?”
“납니다.”
“…….”
솔직한 대답에 헤리엇은 다시 부스스 미소 지었다.
엔저는 그 틈에도 발바닥을 지나 발가락 사이를 핥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핥아 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엔저가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헤리엇은 엔저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다.
그렇다. 헤리엇은 제 귀여운 후배에게 엄청나게 약했다. 엔저는 헤리엇에게 작고 귀여운 생물체이기 때문이다.
종종 뒤를 돌아보면 새끼 고양이가 붉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지켜봤다. 경계는 풀지 않았지만 헤리엇의 주변을 계속 살금살금 돌아다니던 귀여운 소년.
나중에 그 작은 소년이 신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헤리엇은 처음으로 귀엽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늘 엔저에게 약했다.
“정말… 선배, 너무나…….”
이걸로 사흘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엔저는 대단히 근사한 표정을 지었다. 헤리엇의 발가락 사이를 핥고 있었지만 말이다. 간지러운 건 둘째 치고 이제 발이 엔저의 침으로 축축하게 변했다.
“음…….”
유난히 간지러운 부분을 엔저가 핥자 헤리엇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엔저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흐릿해졌다.
엔저는 발을 핥으며 눈을 감은 헤리엇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피고 전신을 떨었다. 자신의 온 신경을 장악했던 분노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감각이었다.
헤리엇의 엄지발가락에 입을 맞추며 엔저는 감격이 벅차오르는 듯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엔저는 정말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리엇은 침이 뚝뚝 떨어지는 발을 보고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발을 닦으며 엔저를 살폈다.
그는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사람 발을 핥아서 뭐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또 핥게 해 달라고 하면 거절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해 헤리엇은 다시 곤란한 미소를 흘렸다.
엔저는 매우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흥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주워 들었다. 헤리엇은 당연히 제게 줄 것으로 생각하며 기다렸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엔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
양말 없이 군화를 신으면 불편하므로 헤리엇은 곤란한 듯 엔저를 불렀다. 그러자 엔저가 가져온 거대한 캐리어 안에서 새 양말을 하나 꺼냈다. 아직 일회용 봉투에서도 꺼내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게 계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새것인데 괜찮니?”
“물론입니다.”
“고마워, 엔저.”
역시 엔저는 참 착하고, 선배에게 정중한 후배였다.
헤리엇은 얼핏 본 거대한 캐리어를 가득 채운 물건들이 매우 익숙한 것 같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안에는 빗이나 칫솔,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아끼는 물건인지 하나하나 굉장히 소중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봤던 물건들이다 싶더니 집에서 못 쓰는 물건들을 버리기 위해 자신이 밖에 내놓은 것들과 똑같았다.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왠지 모를 뿌듯함에 웃음이 나왔다.
“음… 이런.”
발에 잔뜩 묻은 타액을 닦고 양말을 신으며 고개를 든 헤리엇이 매우 곤란하다는 듯 엔저의 앞섶을 쳐다봤다. 그는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서 있었는데, 헤리엇에게 그것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엔저, 그… 섰네.”
“네.”
엔저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장교모를 썼다. 그 행동 하나하나는 정말 멋있고 근사했지만, 그의 발기한 그곳은 빈말이라도 멋있다고 해 줄 수 없었다.
헤리엇은 특히 리언이 와서 엔저의 그곳을 본다면 충격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마치 인어들과 교전을 앞둔 배 안에서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군인 같았다.
“음…….”
“제겐 이것이 있으니까요.”
그가 비장하게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헤리엇이 아까까지 신고 있던 양말이었다.
“……? 그래,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엔저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헤리엇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절뚝거리며 리언이 기다리고 있을 밖으로 향했다.
엔저는 헤리엇의 양말을 조심스럽게 꺼내,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리고 헤리엇의 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엔저는 이미 제 바지춤을 내리고 성기를 꺼냈다. 군화를 벗길 때부터 그의 성기는 이미 욱신거릴 정도로 빳빳하게 서 있었다.
헤리엇의 희미한 향이 그대로 풍기는 양말에 코를 묻으며 엔저는 성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성을 내듯 거대하게 발기한 성기가 묽은 액을 뚝뚝 흘리며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렸다.
“선배… 선배…….”
이렇게까지 흥분했는데 헤리엇의 앞에서 어떻게 참을 수 있었는지 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엔저는 절대로 헤리엇에게 함부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헤리엇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의 집 안에 어느 것 하나도 엔저의 것을 둘 수 없었다. 엔저는 헤리엇의 모습을 24시간 관찰할 수 있는 CCTV를 집 안 내부에 설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헤리엇의 허락이 필요했다.
엔저는 나른한 맹수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흰색 양말을 내려다봤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했다.
다른 이가 봤다면 덩달아 흥분해 버릴 정도로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사내답지만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얼굴, 또르륵 떨어지는 땀방울과 붉게 물든 눈가까지.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의 손에 들린 양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엔저는 양말을 성기에 가져다 대고 감쌌다. 양말째로 성기를 흔들었다. 헤리엇의 온기는 사라졌지만 향은 그대였다. 그의 보물 1호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손을 흔들어 양말에 사정했다. 울컥, 하얀 액이 양말에 잔뜩 묻었다.
“하아, 하아.”
숨을 들이쉰 엔저는 자신과 헤리엇이 이렇게 섞이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했다. 그는 혀를 내밀어 양말에 묻은 자신의 정액을 핥았다.
* * *
깍, 깍, 깍.
까치가 울어 댔다.
짹, 짹, 짹.
그 옆에서 참새도 작은 몸으로 질 수 없다며 잘도 울어 댔다. 새들이 자신의 기분을 어쩜 이리 잘 아는지 울음소리가 구슬펐다. 안쉘은 2대8 머리가 바람에 잔뜩 휘날려 헝클어지는 것을 막지도 못하고 군용 차량에서 내렸다.
휘이잉-
타이밍 좋게 광고지 한 장이 안쉘의 얼굴에 찰싹- 붙었다가 바람에 날아갔다. 안쉘은 허망한 표정으로 뜨거운 햇빛을 올려다봤다.
빌어먹을 상사 때문에 이런 곳으로 발령을 받는구나.
안쉘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 귀신같은 괴물 상사는 전방 200km밖에서도 제 욕을 들을 수 있는 초인이었다.
안쉘은 트렁크를 열고 커다란 캐리어 세 개를 꺼냈다. 이걸 다 어떻게 한 번에 끌고 갈 수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죽을힘을 다해 끌고 가니 가능해지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안쉘은 허름하고 낡은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겉으로 봤을 때는 장사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좁은 약국 안은 나름 약들로 꽉꽉 차 있었다.
안에서 늙은 할아버지가 약사 가운을 입고 나왔다. 노인은 안쉘의 군복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긴, 이런 시골에 젊은이의 등장이 놀랍긴 하겠지. 그것도 군복을 입고 있는 청년이라면.
“젊은 군인이 또 어찌 이런 곳까지?”
노인인 인자하게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안쉘은 하하- 허무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쯤이면 제 선배 만났다고 헤벌쭉할 상사 덕분이지 뭐.
안쉘은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라 배가 아파졌다. 처음 그의 부관으로 발령받았을 때 기뻐하고 설렜던 지난날의 자신에게 돌아가 뺨 두어 대를 때리며 정신 좀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겨우 말했다.
“위장약 다섯 박스 주십시오…….”
앞으로 엄청 필요할 것 같았다.
* * *
“리언.”
“아, 대장.”
리언이 대화하던 것은 놀랍게도 독수리였다.
이런 시골에 저런 독수리가 있었구나.
굉장히 늠름한 독수리가 날아올라 리언의 머리 위에서 멋있게 한 바퀴 돌더니 상공으로 사라졌다.
“독수리가 호랑이를 찾아 주겠대요.”
리언의 능력은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동물을 이용해 정찰까지 가능하다니, 헤리엇은 유능하고 상냥한 부하의 능력에 미소 지었다. 독수리를 기다리며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헤리엇을 향해 리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대장은 엔저 중령과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헤리엇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쓰게 웃었다. 리언은 도저히 헤리엇과 엔저의 접점을 예상하지 못하는 듯했다. 리언이 헤리엇의 뒤를 따라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절고 이런 시골 마을에 좌천되어 남은 인생을 느긋하게 즐기는 그와 온 국민의 영웅인 엔저 맥과이어의 연결고리를 떠올리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아카데미 때…….”
헤리엇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리언은 상관의 능력이 궁금해졌다. 헤리엇의 능력은 대체 무엇이기에 천재인 엔저 맥과이어와 같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일까.
그리고 엔저의 행동에서 유추해 보았을 때 그는 눈앞의 무기력한 사내를 동경하고 있었다. 리언은 엔저의 감정을 읽어 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온갖 감정의 태풍이 몰아닥쳐 도리어 자신이 집어 삼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길을 잃어버렸길래…….”
새끼 고양이? 누가? 저 엔저 맥과이어가? 바다를 제패한 그 전쟁 영웅이? 바람을 지배하고, 바다를 공격하는 무자비한 그가?
“잠시 말동무가 되어 준 적이 있었는데.”
“…….”
“어느새 따르게 되었나 봐.”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리언은 생각했다. 하지만 헤리엇의 눈은 귀여운 동물의 어리광을 감상하는 것 같은 무기질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리언은 이제까지 헤리엇이 텅 비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도 리언은 헤리엇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감정을 읽지 못한 건 리언에게는 난생처음이었다. 헤리엇 알스터는 비어 있다고 느꼈었다. 아무런 욕심도, 욕구도 없는 사람이었다.
새하얗게 바랜 헤리엇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그의 모든 것은 햇빛 아래 부서질 듯 희미하기 짝이 없어서 리언은 가끔 생각했다.
과연 이 비어 있는 사내를 채워줄 무언가가 나타나긴 할까, 하고.
“…대장.”
“음… 아무래도 호랑이는 신체 크기를 줄일 수 있나 본데.”
“아.”
“애니멀 에스퍼네.”
능력을 가진 동물들이 이따금 나타나곤 했다. 그것들은 대부분 군에서 관리했다. 헤리엇은 나뭇가지가 무성한 땅바닥을 살살 긁어내 고양이 발자국보다 조금 더 큰 호랑이 발자국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헤리엇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운 여름이지만 숲속 바람은 여전히 시원했다. 숲 특유의 청량함이 헤리엇의 몸을 기분 좋게 감싸고 있었다.
바람을 느끼던 헤리엇의 귀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리언이 하늘에 대고 휘파람을 불며 독수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부터 검은 점이 서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독수리는 맹렬하게 하늘을 비행하다가 천천히 하강했다. 날개를 펄럭펄럭하면서 우아하게 내려오는 모습이 꼭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왜 엔저 부대가 독수리를 트레이드 마크로 지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독수리는 리언의 어깨에 가볍게 착지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하게 뾰족한 발톱이 아프지도 않은지 리언은 독수리의 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독수리가 부리를 쫙쫙 벌리면서 목을 흔드는 게 좋아서 저러는 건지 싫어서 저러는 건지 헷갈렸다.
리언은 독수리와 머리를 맞대고 몇 번 휘파람을 불다가, 난감한 듯 고개를 들었다. 독수리는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하늘 위로 다시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올랐다. 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호랑이를 찾는 게 쉽지 않은가 봐요.”
“작게 몸을 변화시켜서 숨으면 아무래도 힘들겠지. 살쾡이도 많고…….”
호랑이가 이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 호랑이는 인간을 미워하고 있었고, 이곳은 힘없는 노인들이 약초나 나물을 캐러 이따금 오르는 곳이었다. 험했지만 나름 길이 트여 있는 산은 노인들의 산책길로도 사용되었다.
헤리엇과 리언이 난감해하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둘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방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고 있는 엔저였다.
“엔저.”
무사히 아랫도리 사정을 끝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헤리엇이 난감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엔저의 하반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엔저는 아까보다 훨씬 상쾌하고 밝게 웃고 있었다. 옆에 있던 리언마저 엔저 맥과이어가 기분 좋다는 것을 알아챌 정도였다.
“잘 처리했니?”
“네,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
뭐가 유익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좋아 보이는 엔저가 귀여워 헤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리언이 거기서 엔저가 뭘 했는지 알았다면 그것 좀 아닌 것 같다고 충고해 줬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
“곧 해가 가장 뜨거워질 시간이군요.”
엔저는 힐끔 헤리엇을 쳐다봤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은 헤리엇에게 독이었다. 엔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지만 헤리엇은 리언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하지 말라는 고갯짓이었다.
엔저는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착하게도 선배의 말을 착실히 들었다.
“아마도 이곳을 지난 건 맞는 것 같아. 몸이 작으니까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헤리엇은 고양이의 것보다 조금 더 큰 발자국을 따라가며 말했다. 물론 고양이들이 산을 무척 잘 타지만, 호랑이는 아마 한평생을 군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잘 모르는 곳에서 많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동물을 좋아했던 헤리엇은 동물에 대해 꽤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특이하게도 개구리였다. 그래서 헤리엇이 가장 아끼는 머그잔에는 개구리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두려웠을까요?”
난생처음 밖으로 탈출한 호랑이가?
헤리엇은 리언의 물음에 그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문득 헤리엇은 젖어서 축축한 곳을 발견했다. 동물의 오줌이었다.
호랑이일까, 아니면 다른 산속 동물일까?
헤리엇이 고개를 드는 동시에 엔저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위험합니다!”
하지만 조금 늦었는지 헤리엇의 턱에 아주 작은 상처가 생겼다. 상처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작았지만, 피가 맺히고 붉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헤리엇의 피를 본 엔저의 눈동자가 피보다 더 붉고 음습하게 빛났다.
“…감히.”
끌어당긴 헤리엇의 어깨를 잡고 엔저가 으르렁거렸다. 그는 헤리엇이 있던 풀숲 사이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엔저의 주변으로 거센 돌풍이 불어 닥쳤다. 바람을 조종할 수 있는 엔저의 능력이었다. 리언이 두 눈을 가리며 몰아닥치는 나뭇잎과 가지에 자신을 보호했다.
호랑이는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엔저에게 덤벼들었다.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엔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엔저가 손가락을 위로 올리자 헤리엇을 공격했던 거대한 호랑이가 있는 곳이 폭발했다. 하지만 흙 때문에 바다에서만큼 위력이 강하지 않았다. 헤리엇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가지고 있던 물통을 들었다.
호랑이가 엔저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든 순간, 헤리엇이 두 손으로 물병을 찢고 손을 휘저었다. 물병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물이 장막이 되어 엔저의 앞을 막아 주었다. 호랑이의 손톱이 물을 뚫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헤리엇의 하얀 눈동자가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다리가 인어 지느러미로 변하진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에 갈퀴가 생겨났다.
엔저는 헤리엇을 껴안아 몸으로 막았다. 호랑이가 있던 곳에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울렸다.
콰아아아앙!!!
흙먼지가 자욱하게 끼고 산이 흔들거렸다. 산사태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이게 대체…….”
산 한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아니, 파이다 못해 지하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거대한 폭발음에 안쉘이 달려왔을 땐 이미 상황은 종결된 다음이었다. 고양이만큼 작아진 호랑이가 밧줄에 꽁꽁 묶여 목줄을 하고 있었다.
군에서 찾아 헤매던 실험체 Z-02221번 호랑이를 설마 여기서 발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산이 이 지경이 된 건 경위서 감이었고 그건 모두 안쉘의 몫이었다.
‘앗… 다시 배가 아파지려고 해.’
안쉘은 창백해진 인상으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귀가 먹먹한지 리언이 해롱해롱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헤리엇은 엔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엔저가 몸으로 막아 주어 기절을 하지는 않았다.
엔저는 대단히 안타까운 얼굴로 헤리엇의 상처를 눈으로 핥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핥고 싶습니다…….”
안쉘은 못 들은 척했지만 가까이 있던 헤리엇은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으로 엔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턱의 상처는 이미 피가 멈추고 주변이 붉게 변해 있을 뿐이라 핥을 것도 없었다.
그걸 핥아서 대체 뭐 할 건데?
안쉘은 아주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저… 군에 데려가는 건가요?”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리언이 옆에 다가왔다. 아직도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됐나 보다.
헤리엇은 전에 엔저가 바다에서 능력을 쓴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신 역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 이 소년은 오죽하랴.
“네.”
안쉘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애니멀 에스퍼 반대 운동을 후원하는 쪽이었다. 어쩌면 아프리카 권역으로 몰래 빼돌릴 수 있을 거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 엔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누구 마음대로 그걸 데려가?”
“네?”
“선배의 얼굴에 상처를 입힌 그 짐승 새끼를 내가 왜 살려 둬야 하는데?”
엔저의 눈동자는 이미 맛이 가 있었다.
리언은 덜덜 떨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폭발에 말려들어 정신을 잃은 호랑이의 앞을 막아섰다.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리언은 호랑이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묻어 버릴 거야. 그 손톱 하나 빼고.”
그 하나는 헤리엇의 턱을 그은 손톱이었다. 그걸 가져가서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차마 묻지 못한 안쉘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는 상관인 엔저 맥과이어에게 대들거나 반론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의 엔저는 푼수처럼 보이겠지만, 엔저는 사실 무서운 사내였다.
그걸 제일 가까이서 지켜본 안쉘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살려 줬으면 하는데…….”
난감한 표정을 지은 헤리엇이 말했다. 헤리엇은 동물을 좋아했고, 리언이 슬퍼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안쉘은 엔저가 한 번 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는다며 헤리엇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엔저는 너무나 감명받은 얼굴로 헤리엇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선배.”
헤리엇 선배의 모든 말씀은 땅이 하늘이 돼도 맞는 말이며,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면서 엔저가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아니, 이 자식이!?
안쉘이 입을 열어 반박하기 전에 철컥- 하고 안쉘의 이마 위에 무언가 닿았다. 엔저가 늘 들고 다니던 장식용 권총이었다.
그가 성인이 되는 날 그의 부모가 선물해 준 값비싼 것이었다. 매우 고가의 것이라고 알고 있는 그것은 총알 장전까지 가능했다.
끼릭-.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안쉘?”
엔저가 반론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상냥한 듯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리엇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쉘은 제 위에서 끼릭끼릭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웃어 보였다.
“…맞습니다.”
‘일단 위장약부터 먹고 보자…….’
안쉘은 몇 시간 만에 폭삭 늙어 버린 얼굴로 품 안에서 위장약 한 알을 꺼내 먹으며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에 단테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소파에 노인이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너와 나는 참 닮았는데, 여태껏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구나.”
인간들의 대표이며 20여 년 동안 권력의 정점에 앉았던 노인은 그 위명과는 다르게 매우 인자하고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쉘은 살아오면서 노인의 얼굴만큼은 질리도록 봤다. 엔저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TV와 신문잡지로, 심지어 아카데미 교육과정에서도 노인에 대해 수업하곤 했다. 어느 의미에선 엔저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단테 막심, 이 나라의 대통령이 어째서 자신을 일대일로 만나고 싶다며 면담을 신청했을까.
안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에 차오르는 땀을 연거푸 옷에 닦아 냈다. 단테가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듯 따듯한 차가 가득 담긴 찻잔을 내밀었다.
군에 소속된 자로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 안쉘은 그 뜨거운 것을 홀딱 삼켜 버렸다. 목이 칼칼하고 아팠다. 맛을 느낄 새도 없어 보이는 그를 보며 단테가 자상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 엔저를 잘 보좌해 주고 있다고.”
매우 자연스러운 하대였지만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함이 있었다. 묘하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안쉘은 계속 풀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문득 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풀어지지 않으려고 온몸을 뻣뻣하게 세워도 꽉 쥔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정신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단테 막심 앞에서 안쉘이 아무리 노력해도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아닙니다…….”
안쉘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단테는 엔저를 지칭할 때, 무척 아끼는 손주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라는 단어를 썼다. 대중들 앞에서 혹은 연설에서 그를 총애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엔저가 대통령이 그토록 바라던 종전을 향하는 데 가장 일조했기 때문에 단테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긴 엔저의 능력은 옆에서 보는 안쉘도 기가 질릴 정도로 굉장히 무섭고 또한 강력했다. 바람을 이용하는 그는 지상뿐만이 아니라 하늘에서조차도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엔저 멕과이어는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참 닮았어.”
증오스러운 인어 놈들.
안쉘은 인어가 밉고 증오스러웠다. 징그러울 만큼.
대통령이 손을 뻗어 안쉘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렸다. 거칠지만 따듯하고, 주름이 많은 노인의 손이었다. 힘줄과 핏줄이 손등에 돋아 있었다.
안쉘은 눈을 껌뻑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렸다.
- 속보입니다. 인어들이 엘리키스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위성에 찍힌 사진에는 바다에서 인어들이 배를 향해 몰려가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어들은 정해진 해상 경로를 벗어난 배를 용서하지 않고 폭발시킨 것이라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안쉘의 부모가 타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벌이가 넉넉하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능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안쉘은 놀랍게도 결계를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립 아카데미에 무료로 입학할 수 있었고, 졸업 후에도 일정한 연금이 보장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입학료는 무료지만 그곳에서 이용하는 모든 것이 무료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부모는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안쉘은 초등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매일같이 일을 나가는 부모님의 등을 배웅했다.
둘은 안쉘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부모 밑에서 능력자인 안쉘이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늘 얘기해 주었다.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에도 부모님은 늘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 주었다. 일하고 피곤할 텐데도, 매서운 추위에 벌벌 떨어 가며 밖에서 노동을 할 때도 잊지 않고 한 달에 두어 번씩 편지를 썼다.
어느 날, 이번에 대통령의 아들이며 평화 국회 위원 중 한 명인 알시타의 배에 선원으로 취직했다는 내용이 편지에 적혀 있었다.
알시타 막심은 거대한 크루즈 사업을 운영 중이었고, 이번 횡단이 성공하면 막대한 자본금을 가지고 커다란 주식회사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안쉘의 부모님은 그 회사의 정규직으로 취직이 보장되었고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건이 터졌다.
뉴스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바다 한가운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당시 안쉘은 너무 어렸고… 부모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들을 다시 마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거짓말이야…….”
안쉘은 제발 인어들이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빌고 또 빌었었다. 배의 어딘가가 고장 나 그들의 영토를 침범해 버렸지만, 인어들이 조금이라도 인간들에게 호의적이기를 바랐다. 인간은 바닷속 인어를 민족으로 받아들였으니까.
하지만 인어들은 호전적이고 잔인했다. 그렇게 큰 배가, 그곳에 타고 있던 수없이 많은 선원과 손님, 그리고 대통령의 하나뿐인 아들과 안쉘의 부모님이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로지 아들만을 위해 살아온 두 사람은 어린 아들만 세상에 남겨 두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바다 밑으로 수장당했다.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고 말하는 부모의 등을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안쉘은 그들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안쉘은 인어를 증오했다. 그래서 군의 가장 최전방을 지원해 들어왔었다.
“네…….”
사랑하는 사람을 인어에게 잃은 두 사람은 어쩌면 닮았을지 모르겠다. 안쉘의 눈동자에 서린 증오에 대통령 단테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땅끝 마을로 전임한다고.”
“…네.”
‘아뇨, 전 정말 가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쉘은 다른 의미로 눈물을 머금었다.
“그곳에서 잘 감시하고 있도록 해.”
“네?”
“우리들의 인어를.”
“…….”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열쇠니까.”
만약 안쉘이 아무것도 모르고 들었다면 대통령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인어가 누군지 안쉘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 표정이 한순간에 드러나 버렸다. 대통령은 그런 안쉘의 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젠장!’
안쉘은 끝까지 뻔뻔하게 모른 척했어야만 했다.
헤리엇 알스터.
군에서 만들어 낸 최초의 인어. 부작용도 많고 사용이 어려운 그 인어를…….
“…….”
“그 인어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속으로 한숨을 쉰 안쉘은 부드럽게 차를 운전하면서 사이드미러로 뒷좌석을 살폈다. 그곳엔 헤리엇과 리언이 앉아 작은 간이 철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호랑이가 지친 듯 쓰러져 있었다. 고양이 크기로 줄어든 호랑이의 목에는 군에서 제작한 작은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그 목줄에는 여러 기능이 있었는데 우선 위치 추적이 되는 GPS 기능과 호랑이의 능력을 억제하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떤 충격에도 끊어지지 않으며 호랑이가 거대해지면 목을 조이는 것도 가능한 목줄이었다.
안타까웠지만 군에 의해 실험당해 인간을 미워하는 호랑이를 그대로 둘 순 없었다.
호랑이는 리언에게 인수되었다. 차 안에서 호랑이를 안타까운 눈으로 관찰하던 리언이 주먹을 불끈 쥐며 비장하게 말했다.
“반드시 이 애와 친해지도록 하겠습니다.”
그 애가 고양이는 아닌데…….
하지만 헤리엇은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리언은 혹시 헤리엇에게 폐가 되었나 걱정하면서 눈치를 봤지만, 헤리엇은 지금 아무 생각도 없었다.
“응… 휴가 써도 돼.”
사유서에 ‘호랑이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 같은 식으로 쓰지만 않으면 되겠지.
어느덧 리언의 집 앞에 차가 정차하고 그가 호랑이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경례하며 차를 배웅했다.
헤리엇이 손을 흔들어 고양이에게, 아니 호랑이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호랑이가 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크게 울부짖었다. 작아도 호랑이는 호랑이라고 산속의 새들이 놀랐는지 동시에 하늘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리언이 내리고 엔저가 재빠르게 뒷좌석으로 이동하면서 앞좌석에는 안쉘 혼자 남아 운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쉘은 엔저가 옆에 없어서 오히려 편했다.
침묵이 차 안을 감돌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안쉘이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전임 발령받게 된 안쉘 리 중위입니다.”
“아.”
헤리엇은 자신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엔저를 돌아봤다. 폭발 때문에 엉망이 된 검은 머리를 정리하던 엔저가 붉은 눈동자를 돌려 매혹적으로 웃으며 헤리엇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매혹적인 표정을 지어 봤자 손에 소중하게 들려 있는 호랑이 발톱 때문에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고양이 크기로 줄어든 호랑이의 앞발을 붙잡고 기어이 손톱깎이로 발톱을 잘라 버렸다. 저 덩치로 고양이를 붙들고 발톱을 깎는 모습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안쉘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었다.
“헤리엇 알스터 중사입니다…….”
헤리엇의 계급은 이곳으로 발령받은 둘보다 훨씬 낮았고 사관 교육도 받지 못했다. 이제 이곳의 모든 책임과 뒷수습은 직급이 가장 높은 엔저 맥과이어가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안쉘은 도저히 엔저가 헤리엇에게 명령을 내릴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호칭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고 부대 대장직을 누가 수행해야 하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차 안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혹시 헤리엇이 딴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안쉘은 불안했다. 그 호랑이는 군의 실험체였고, 아마 헤리엇 역시 그 호랑이와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안쉘은 대통령의 말을 떠올렸다. 군이 실험으로 잔인하게 만들어 낸 인어를 감시하라는 말을. 그 어조에 미안함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을 떠올렸다.
“…군을 미워하진 않으십니까?”
“??”
헤리엇은 안쉘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별로…….”
“…….”
“아팠지만 상관없었어요.”
빈말인가 싶었지만 정말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말과 눈빛이었다. 아무 감정도 깃들지 않은 하얀색 눈동자를 깜박이면서 헤리엇은 말했다.
“그렇게 화나지도 않아서.”
“…….”
그래, 헤리엇은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아팠을 땐 단지 아프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견딜 만하니 별로 상관없었다.
인어가 됐을 때는 범죄를 저질러서 지상에서 살지 못하게 되면 바다로 도망가야지… 같은 쓸데없는 상상을 했었다.
혹시 지금 이 상황이 심각한 건 나 혼자뿐인가.
‘그냥 몇 대 맞았어. 이빨도 안 나갔는데 뭐, 괜찮아~.’라고 말하는 호인보다 몇억 분의 일만큼 성의 있는 대답이었다.
“연금도 꼬박꼬박 나오고.”
헤리엇은 그게 가장 마음에 드는 듯 말했다.
그래… 살아가기 이 삭막한 세상에 돈은 매우 중요하지.
안쉘은 정말 자기 혼자 심각해져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대통령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게 분명했다. 헤리엇은 감시 따위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보다 아까 호랑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지, 엔저?”
“네? 이 세상에 선배를 싫어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 존재를 없애 버릴 테니까.
엔저는 마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확답했다.
“내가 생선이라서 더 싫어하는 걸까.”
“…….”
안쉘은 이 상황에서 저게 유머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웃기에는 너무 민감했고 솔직히 재미도 없었다.
군의 실험으로 인조 인어가 된 헤리엇에게 ‘하하하, 생선이라면 고양잇과 애들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먹잇감이니까요. 아, 혹시 호랑이가 잡아먹으려고 했습니까?’하고 장난을 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상관, 엔저는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또라이였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안쉘은 엔저 맥과이어가 혹시 독버섯을 먹고 미쳐 버린 게 아닐까 무서워 운전대를 꼭 붙들었다. 한참 웃으며 배를 움켜잡던 엔저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유머 감각까지 이렇게 훌륭하시고… 선배, 대체 못 하는 게 뭡니까?”
유머 감각도 뛰어나고, 능력도 아름답고, 우리 선배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똑똑하고. 아무튼 만능이라고 믿고 있는 엔저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런 엔저를 보는 안쉘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래?”
놀랍게도 유머였던 게 맞았는지 헤리엇이 뿌듯한 눈빛으로 작게 웃음을 흘렸다. 늘 팔자로 내려가 있던 눈썹이 자신만만해져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 사이에서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 * *
“선배… 제가 선배의 소원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부관으로 삼아 주세요.”
작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 검은 털을 가지고 경계심이 많았지만 결국 마음을 열어 준 귀여운 작은 소년.
즐거운 기억이 없는 아카데미에서 헤리엇이 유일하게 즐거웠다고 생각했던 광경이 있었다. 경계하느라 아르릉거리는 키가 작은 소년은 한참 동안 헤리엇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첫날에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경계하며 털을 바짝 세우더니 열 밤이 지나자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한 달이 지나고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 뭐예요?’
헤리엇은 웃으면서 그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두 달이 지나자 꼬마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엔저’라고 말해 주었다.
‘귀여워… 귀여운, 나의 루비.’
헤리엇은 즐거운 꿈을 꾸는 것처럼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헤리엇이 자는 방 밖, 창문에 딱 달라붙은 존재가 그 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헤리엇의 꿈속에서 나타난, 누구보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