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헤리엇 알스터
헤리엇의 방에는 그 흔한 TV조차 없었다.
전자기기라곤 구식의 커다란 라디오뿐이었다. 그것마저 상단에 먼지가 뽀얗게 올라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하지 않는 듯했다.
신문이나 잡지는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머그잔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헤리엇의 방에는 머그잔이 굉장히 많았다. 엔저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스캔하며 자신의 품에서 수첩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얼핏 보이는 내용으로는 ‘182cm, 75.3kg. ★작년보다 0.5kg 줄어듦.’ 등이 쓰여 있었다.
영문 모를 내용이 적혀 있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은 엔저는 태연한 얼굴로 그것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그런 엔저를 등지고 헤리엇은 헤리엇 나름대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헤리엇의 취미는 머그잔을 모으는 것이었고, 그것들 전부 용도를 다르게 사용했다.
그는 머그잔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세세히 살폈다. 이건 코코아를 타 먹는 컵이고, 옆에 있는 건 책을 볼 때 사용하는 컵이었다. 유리컵은 대부분 커피를 타 먹으니 패스하고, 이건 물 전용 머그잔이다. 불행히도 손님용으로 산 머그잔은 그저께 실수로 깨트리고 말았다.
고민하는 헤리엇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엔저는 은근슬쩍 방구석에 놓아둔 쓰레기통을 뒤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헤리엇은 그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잘생긴 엔저가 무표정하게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다가 그 안에서 나무젓가락 하나를 발견하고 부들부들 떨더니 살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영접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달리 엔저의 표정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사이 헤리엇이 결정한 듯 벚꽃이 그려진 머그잔과 하얀색 머그잔을 들고 뒤를 돌았다. 안에는 놀랍게도 진한 코코아와 율무차가 들어 있었다.
“엔저, 율무차 좋아하지?”
“네.”
사실 좋아하지 않았다.
헤리엇이 가진 건 대부분 달기만 한 것들이었고, 그것들은 어릴 때부터 단 음식이라면 질색하는 엔저의 기호에 맞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눈앞의 헤리엇이, 햇볕에 부서질 것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속눈썹을 가진 그가 이따금 타 주는 게 율무차였을 뿐이었다.
“여전히 코코아만큼은 뜨겁게 드시는군요.”
“코코아 타는 법은 이 방법밖에 모르거든.”
“얼음을 넣으면 되잖아요.”
엔저의 평온한 말에 헤리엇은 곤란하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끈질기게 바라보던 엔저가 입을 열었다.
“선배.”
“엔저.”
엔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헤리엇이 고개를 내렸다. 헤리엇은 무기력하며 의욕이 많지 않고 둔감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던 수재였다.
“왜 남쪽 인어들을 이쪽으로 몰아넣은 거야?”
“역시 알고 계셨군요.”
“…….”
헤리엇은 딱히 엔저를 타박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냐고 경계하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곤란한 표정으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색소가 부족한 하얀 눈썹을 팔자로 구부리면서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한 미소를.
“선배, 약속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율무차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던 엔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헤리엇은 눈만 깜박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날, 아카데미를 떠나는 헤리엇에게 엔저가 그렇게 속삭였다. 긴장해서 땀을 흘리고, 붉어진 뺨을 감추지 못했던 그 귀엽고 작은 모습으로 엔저는 일방적으로 통보했었다.
엄청 귀여웠지, 작았고.
헤리엇은 웃으면서 자신이 들고 있는 머그잔을 쓰다듬었다.
“기억하지.”
“저도 그렇습니다.”
“…….”
“한 번도…….”
헤리엇의 넓은 등에 닿고 싶어도 도저히 닿지 못했던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엔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싸구려 형광등 조명에도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단 한시도 잊은 적 없습니다.”
그것으로 남쪽 인어를 이곳에 몰아넣은 이유가 성립되는 건 아니었다. 헤리엇은 난감한 표정으로 엔저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그날 이후로 몸만 큰 것 같았다.
그러다 헤리엇이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불이 하나밖에 없어.”
“네.”
“아무래도 같이 자야 할 것 같은데.”
엔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얼굴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몸을 들썩거리며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부디.”
뭐가 부디 인지는 잘 모르겠다.
먼저 씻으라는 엔저의 등쌀에 못 이겨 샤워실에 들어간 헤리엇이 밖으로 나왔을 땐 방이 매우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청소 안 해도 됐는데.”
“제가 좋아서 한 겁니다.”
드물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엔저가 접어 올렸던 와이셔츠 소매 깃을 내렸다. 하나하나가 화보처럼 아름다운 동작들이었다.
걸레질까지 했는지 바닥이 반짝반짝했다. 엔저는 흥얼거리면서 헤리엇이 나온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오지 않았다.
전쟁 영웅은 씻는 방법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엔저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헤리엇은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엔저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샤워실에서 나왔을 땐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인기척에 잠시 일어난 헤리엇은 졸린 모양인지 먼저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엔저가 뒤따라 그의 옆에 누웠다.
역시나 이부자리가 넓고 커다랗다고 해도 장정 두 명이 눕기엔 매우 좁았다. 엔저를 근처 모텔이라도 잡게 해야 했다고 생각한 헤리엇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좁지?”
“아뇨.”
“음…….”
눈을 감은 헤리엇의 하얀 속눈썹을 뚫어지게 내려다본 엔저가 속삭였다.
“딱 적당합니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암흑이 찾아왔다.
* * *
얼씨구.
안쉘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코웃음을 쳤다.
멀리서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헤리엇의 실루엣이 보였다. 어스름한 새벽이라 그런지 헤리엇의 이미지가 무척 희미했다. 그 뒤로 존재감이 가득한 사람이 함께 있으니 더욱 그랬다.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 엔저의 모습에 안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묻고 싶어졌다. 그의 보좌관을 하면서 저놈이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쉬셨습니까.”
안쉘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엔저가 손을 내밀었다.
이런 소갈머리가 엔저 맥과이어지.
안쉘은 안심하며 그의 손에 서류를 건넸다. 종이를 펄럭거리면서 제 입술을 쓰다듬던 엔저가 씩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뜻대로 움직여 주니까 허무한걸.”
“혹시 이 근처에 호수로 가는 배관이 있습니까?”
안쉘의 물음에 헤리엇이 고개를 흔들었다.
“배관은 없지만… 동굴은 있습니다.”
“동굴?”
안쉘의 뒤로 두 명의 군관이 서 있었는데 둘 다 능력자인 듯 보였다. 하긴 엔저의 군대는 모두 능력자들이라고 들었다. 아카데미에서 끌어다 모아도 그렇게 모이기 힘들 텐데, 저들을 통솔하는 엔저가 세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헤리엇은 그들을 이끌고 기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좁은 동굴 입구에 섰다.
“조심하십시오.”
안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그가 다친다면 엔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만 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 안쉘에게 작게 웃어 준 헤리엇이 지팡이를 옆에 있는 안젤라에게 건넸다.
리언은 오늘도 이장님에게 끌려갔기 때문에 오지 못했다. 그는 엔저를 옆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아쉬워하며 이장님의 뒤를 따라갔다고 했다.
“다치신 겁니까?”
헤리엇의 뒤를 바짝 따르며 동굴 안으로 들어온 안쉘이 물었다.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렇게 크지 않았다.
“네, 상어에게 물렸습니다.”
“상어?”
“네.”
“바다에 사는 그 상어입니까?”
“네.”
헤리엇이 간결하게 대답하며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면 바다에 사는 상어에게 물린단 말인가. 안쉘은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헤리엇은 익숙하게 동굴을 더듬거리며 불편한 다리로 잘도 걸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어디로 연결됐는지 알 수 없는 연못이 있었다. 넓지 않지만, 무척 깊어 보였다.
헤리엇이 연못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 아래에 호수로 향하는 길이 있습니다.”
“얼마나 걸리죠?”
의외로 호수가 가까운가 보군.
안쉘이 진지하게 물었다.
“호수까지 얼마나 걸리죠?”
“한… 20분.”
“…인어도 아니고 이런 곳을 어떻게 지나갑니까.”
안쉘은 이곳을 통해 호수로 향하려던 계획에 X 자를 표시했다. 헤리엇은 다시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죠.”
인어들은 기본적으로 물을 다룰 수 있었지만, 세세하게는 능력이 조금씩 달랐다. 인어들의 능력은 각양각색이었다. 물을 산성으로 바꾸는 능력도 있었고, 바다의 날씨를 조종하는 것처럼 폭풍과 태풍을 만들어 내는 능력도 있었다.
인간에게는 모두 하나같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능력들이었다. 마치 모든 물의 권능은 인어에게 있다는 듯 지상의 인간들 단 한 명도 물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인어들은 지상의 것을 굳이 탐하지 않고 바닷속에서 조용히 사는 민족들이었다. 사실 그들의 공간을 먼저 침범한 것은 인간들이었다.
인간들은 바다를 좀 더 쉬운 무역로로, 혹은 넓고 다양하게 이용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인어들에게 그들의 보금자리 위를 가로질러 지나갈 것을 통보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재물과 인명을 실은 무역 배들이 바다 한가운데 가라앉았다. 억지로 인어들의 영토를 침범한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고 인어의 힘의 원천인 바다에서의 전쟁은 너무나 큰 피해와 많은 희생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 수백 척의 군함이 바다의 제물이 되어 사라진 전투도 하나 있다. 지금은 인어들이 모두 멸망한 동쪽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에 백여 척의 군함과 수백 마리의 인어가 전쟁을 치렀고, 결과는 양쪽의 전멸이었다. 인어들의 힘은 인간이 상상했던 것보다 강하고 무서웠다. 군함을 녹이는 산성,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가 바닷속에서 휘몰아쳤다.
바다에 빠진 인간들을 인어들은 살려 두지 않았다. 그렇게 바다는 한동안 거대한 피를 머금고 있어야만 했다.
* * *
‘이 바다는 모두 당신의 것.’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처음 온 장소는 익숙하지 않았고, 모든 게 새로운 것투성이였다.
물론 소년이 낯을 가리거나 예민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건 모두 운명처럼 정해진 것이었다.
참방.
학원의 작은 못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에 엔저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그래,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잠수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인어가 매복해 있을 가능성이 커 산에 올라야 할 것 같습니다.”
“지리적으로 충격이 가해지면 산이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 아래는 마을이 있으니 최대한 적은 인원으로 출발하죠.”
동굴에서 나온 안쉘의 말을 듣고 두 명의 부하가 차례로 의견을 냈다. 두 사람의 이름은 반과 노엘로, 검은 머리의 흑인이 반이었고 금발의 백인이 노엘이었다.
두 사람은 탐지 능력이 뛰어나 최전방에서 땅속의 지뢰나 바닷속에 숨어 있는 인어를 탐색하는 업무를 맡았다.
많은 인원이 필요 없는 작전이니 부대의 임시 대장인 헤리엇이 인어를 쫓아 산을 오르고 안젤라는 산 중턱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다리도 안 좋은 대장이 남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하며 헤리엇을 말렸을 그녀지만, 흘러가는 분위기를 읽은 안젤라는 그저 입을 다물고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의 내용을 들으며 헤리엇은 무릎을 꿇고 군화 끈을 단단하게 묶은 뒤 고개를 들었다. 그 옆에서 안젤라가 미묘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엔저를 힐끔 돌아보고 헤리엇에게 받은 지팡이를 내려다봤다.
헤리엇은 안젤라가 든 자신의 지팡이에 시선을 잠깐 주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지팡이는 매우 고가라고 했다.
지팡이에 박힌 붉은 보석은 다이아몬드라고 들었다. 헤리엇은 처음엔 붉은색이니까 당연히 ‘루비’라고 생각했었다. 지팡이의 테두리는 순금을 박은 것이고, 뼈대는 고가의 나무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팡이는 헤리엇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그의 후원자에게 받은 것이었는데 그 후원은 그가 단 한 번 전투에 나간 이후로 모두 끊겼다. 그런고로 지금의 헤리엇에게는 사치 그 자체인 물건이었다.
“잘 좀 부탁할게, 안젤라.”
“네. 조심하세요, 대장.”
헤리엇은 안젤라의 걱정스러운 대답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군모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걷자 엔저가 옆으로 다가왔다.
“선배, 부축해드릴까요?”
“음, 가서 힘들면.”
“알겠습니다.”
안쉘이 소총을 챙기면서 뒤를 힐끔 쳐다봤다. 멀리서 봐도 절름발이인 헤리엇이 이 험한 산을 과연 잘 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끝이 보이지 않던 전쟁에서 종전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피운 ‘저’ 엔저 맥과이어 중령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엔저의 행동으로 확실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기대했는데 결과는 영 꽝이었다. 대화를 나눠 본 그는 생각보다 더 약했고 무기력했다. 능력이 무엇인지 궁금해 어제 군 데이터를 뒤져 봤지만, 건진 건 없었다.
능력에 대한 것도 불명이었고, 다른 능력치도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니까 이런 시골에 좌천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쉘은 솔직히 헤리엇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외모에 반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동공마저 하얗게 바랜 눈동자가 특이할 뿐 어디 한 군데 특출난 구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희미한 사람. 안쉘이 느낀 지금 헤리엇의 인상이었다.
솔직히 그가 엔저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엔저가 졸업한 국립 아카데미는 상상하기도 힘든 엘리트 집단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저 위쪽의 사람들이 침을 바르고 노리는 곳. 나름대로 인재라고 촉망받던 안쉘도 그곳에 입학하진 못했었다.
안쉘은 지도를 펼쳐 호수 위치를 찾으면서 계속 헤리엇을 힐끔거렸다. 멍한 표정으로 엔저와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마이페이스가 강한 사람 같았다.
대체 저 사람의 어디에 그렇게 강렬하게 끌린 걸까? 우리 중령님은.
솔직히 이곳에 엔저가 오게 된 이유도 이상했다. 남쪽 인어들을 이곳으로 몰아넣은 건 엔저였고 그 뒷수습도 엔저 스스로가 자처했다.
도망친 인어들의 수는 대략 대여섯 마리. 쉽지는 않겠지만 안쉘과 그 부하들이 해결할 수 있는 숫자였다. 물론 엔저가 있다면 더 편하기야 하겠지만 이런 일에 직접 나서는 그의 행동이 더 이상했다.
그럼에도 안쉘은 엔저가 이곳에 볼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고, 그 중심이 헤리엇인 것도 알아챘다. 하지만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호기심보단 목숨이 최고였다.
안쉘은 총의 잠금장치를 풀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바닷속 인어에게 총은 무용지물이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니 챙기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상을 나돌아 다니는 인어에게는 총을 사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인어가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기분 나빴다.
바닷속 생물은 바닷속에서 사는 게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
예상외로 헤리엇은 네 사람을 잘 따라왔다. 절뚝거리면서 불편하게 걸었지만, 속도를 늦추거나 거리가 뒤처지지 않았다.
앞서 걷다가 멈춘 반이 바닥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 곧 호수가 보입니다.”
안쉘은 그 소리에 생각하던 걸 멈추고 조용히 총을 들어 노엘과 함께 앞장섰다.
산을 넘어 호수로 가는 게 걸어서는 처음인 헤리엇은 의외로 호수가 멀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슬 숨이 가빠오고 목이 말랐다. 헤리엇은 숨을 고르며 그들이 경계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후…….”
호수는 거대했고 잠잠했다. 파동 하나 없는 호수를 보며 생각보다 깊고 넓은 것을 파악한 안쉘이 노엘을 불렀다. 노엘이 호수 안으로 손을 넣고 눈을 감았다.
“구멍이 너무 많이 뚫려 있어서 탐색이 어렵습니다.”
호수를 감싼 절벽이 방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이 깊고 넓은 호수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상으로 나온 인어들은 약했지만, 물속에서는 최강이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도망친 남쪽 인어들은 모두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놈들이었다. 계속되는 패전과 지상으로 도망쳤다는 굴욕으로 아마 눈이 뒤집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인어가 이곳으로 도망친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노엘이 손을 호수에 넣은 채 중얼거렸다.
호수에 독을 퍼트리자니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정화기가 중간에 있을 테지만 인어를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독은 그것만으로 정화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언론이 발달해 있으니 이런 시골 마을이라도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특히 엔저 맥과이어와 관련된 것이라면.
안쉘은 지원군 몇 명을 더 불러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무전기를 꺼냈다. 휴대전화로 연락하는 것이 빠르겠지만 이번 일은 기밀이었고 도청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사용을 자제해야 했다.
“맥을 부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호수에 불을 집어넣어 끓는 물로 만든다면 인어들이 튀어나오겠지.
안쉘이 잔인한 혼잣말을 하며 무전기를 연결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수는 잠잠했고 풍경은 아름다웠다. 헤리엇은 그저 옆에서 침만 꿀꺽 삼켰다.
바위에 걸터앉은 엔저가 헤리엇에게 손짓했다.
“선배 이리 와 보세요.”
“음?”
“저기 개구리가 있습니다.”
엔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말 개구리 한 마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잡아 드릴까요?”
헤리엇이 옛날에 개구리를 잡아들고 이곳저곳 흥미롭게 살펴본 걸 기억한 것일까. 엔저가 물었다. 말에 담긴 장난기를 눈치챈 헤리엇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전에도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당시의 엔저는 정말 작고 귀여웠는데.
“선배, 달릴 수 있습니까?”
“음?"
뜬금없는 물음에 헤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호수 안으로 돌멩이를 던지던 엔저가 다시 물었다.
“지금 달릴 수 있습니까?”
“아니.”
헤리엇이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달릴 수는 없었다. 그러자 엔저가 다가와 헤리엇을 품에 안았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
“안쉘.”
엔저가 헤리엇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호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달렸다. 안쉘이 사색이 되어 호수에 손을 담근 노엘에게 소리쳤다.
“손 빼 노엘!!"
“네? 으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엘의 손이 마치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호수 속으로 점점 빠져갔다. 반이 벌떡 일어나 노엘의 몸을 잡으려는 동시에,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노엘의 몸이 완전히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노엘!”
반이 소리 지르며 뒤를 따르려고 했지만 안쉘이 막았다.
호수 아래로 내려가는 노엘의 모습이 보여 안쉘은 급하게 노엘의 근처로 보호막을 쳤다. 동시에 날카로운 삼지창 같은 것이 노엘의 몸을 뚫으려다가 실패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노엘은 호수 속 인어에게 몸이 찢겼을 것이다.
“인어.”
호수 속에서 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인어가 호수 아래에서 엔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배 제가 말씀드렸죠?”
“…….”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마치 조롱하는 듯한, 아니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엔저가 손을 뻗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내 호수 안쪽에서부터 폭발이 시작되었다. 공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엔저의 최고 무기였다.
물속에서 공기를 압축시켰다가 폭발하게 만드는 그 능력으로 엔저는 수없이 많은 인어를 학살했다.
“노엘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안쉘이 기함하며 소리쳤다. 그러는 동안 호수 속에서는 연달아 폭발이 터지며 물이 크게 튀어 올랐다. 호수를 감싼 절벽도 큰 소리가 나며 흔들렸다.
안쉘은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나 엔저의 저 무지막지한 공격을 버틸 수 있을까 초조해했다. 노엘의 몸이 호수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노엘을 잡아끌었던 인어들은 폭발을 피해 호수 깊은 곳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미처 폭발을 피하지 못했던 인어의 시체가 호수 수면 위로 떠올라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둘? 아니 셋이다.’
그 와중에 보이는 인어의 수를 파악한 안쉘은 자신이 준비했던 소총을 꺼냈다.
엔저가 공격할 때마다 호수 속 공간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안쉘은 드러난 공간과 함께 보인 인어의 모습을 확인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높은 소리와 함께 인어가 한쪽 팔을 감싸며 피를 흘리는 게 얼핏 보였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쾅-!
다시 산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힘 좀 조절하세요!”
안쉘이 소리치는 말에 엔저가 주변을 살피며 한숨을 쉬었다. 공격을 멈추자 호수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는 동안 인어 시체가 하나 더 떠올랐다.
남은 인어는 둘, 혹은 셋일 수 있었다. 안쉘은 호수 아래에서 떠오르는 노엘의 몸을 잡아 호숫가로 잡아끌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물에 젖은 얼굴을 몇 번 치자 노엘의 숨이 트이더니 쿨럭쿨럭하고 물을 뱉어 냈다. 다행히 결계가 단단하게 그의 몸을 잘 보호해 준 듯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후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쉘이 기절한 노엘을 챙기면서 말했다. 남쪽 인어들이 이곳 호수 아래에서 이를 갈고 있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 큰 소득이었다. 무전기가 망가지기 전에 지원군을 불렀으니 지원은 금방 올 것이다.
엔저의 능력으로 호수를 뒤집었다간 산이 무너질 게 자명했다. 지금 같이 중요한 시기에 엔저의 평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안쉘은 인어들의 시체를 회수하며 엔저에게 후퇴하자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엔저는 뭘 생각하는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턱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안쉘은 한숨을 쉬고 인어 시체 두 구를 나란히 놓았다. 인간들의 미의 기준에 대입하자면 인어들은 매우 아름다운 편에 속했다.
사람과 다른 물갈퀴를 가진 귀나, 지느러미가 있는 하체는 인간과 거리가 멀었지만, 상체는 확실하게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대단히 아름다운.
과거에 인어들을 납치하여 개인 수족관이나 어항에서 길렀다는 보고서를 몇 번 본 적 있었다. 확실히 탐미주의적인 사람들이 좋아할 만했다.
인어들은 전부 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외모까지도 바다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안쉘은 그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손을 모으고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 엔저가 헤리엇을 거뜬하게 들고 어디론가 향했다.
“너는 내려가서 병원으로 노엘을 데려가.”
반이 안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노엘을 업고 엔저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안쉘은 고요한 호수를 노려보다가 뒤를 돌았다.
산새들의 지저귐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호숫가에 맴돌았다. 첨벙 소리와 함께 수면 위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인어들이었다. 지상으로 나오는 두 마리의 인어들은 놀랍게도 지느러미 꼬리가 아닌 인간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첨벙첨벙 호수 밖으로 나와 죽은 동료들을 감싸 안았다. 둘은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동료의 몸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또르륵, 떨어지는 눈물이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탕-! 탕-!
총성과 함께 두 인어가 쓰러졌다.
안쉘이 연기가 나오는 총을 들고 호수와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비겁한 방법을 써야 하는 게 전쟁의 슬픔이지.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총에 잠금장치를 걸었다.
헤리엇은 인어들의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목이 말랐다. 물은 챙겼지만 부족했고, 산에서 내려가기 전까지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헤리엇은 한숨을 쉬며 호수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인어들의 시체를 살피던 안쉘이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아직 살아남은 인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근처로 가는 건 위험했다. 그러나 헤리엇은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축이고 고개를 들었다.
촤악-!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헤리엇의 목덜미를 붙잡고 호수 아래로 끌어당겼다.
“!!!”
헤리엇의 몸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호수 안으로 곤두박질쳤다.
풍덩!
순식간이었다. 안쉘이 결계를 치기도 전에 호수 어두운 바닥으로 헤리엇의 몸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호수 아래로 끌려간 헤리엇의 무기질적인 하얀 눈동자에 울고 있는 인어의 얼굴이 비쳤다. 인어는 계속 울고 있었다. 터전을 잃고, 동료를 잃은 슬픔과 분노가 느껴졌다.
헤리엇은 한숨을 쉬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안쉘이 핼쑥한 얼굴로 엔저에게 다가왔다. 엔저가 당장이라도 호수에 달려들까 봐 조마조마한 표정이었다.
엔저가 강하고 인어들의 공포 대상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지상에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엔저라도 물속에서는 인어를 이기긴 힘들었다.
인어는 물속에서 최강이었고 또한 잔인했다. 심지어 호수 속에 남은 인어는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인어였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헤리엇의 몸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엔저는 태평했다.
“물러나야 할 건 너야, 안쉘.”
놀랍게도 엔저는 웃고 있었다. 흥분한 얼굴이 잔뜩 상기해 있었다.
“……?”
“선배는 아군 적군 구분할 줄 모르거든. 조절할 수 있는 게 망가졌으니까.”
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당황스러움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요하기만 하던 호수에 작은 파문이 일더니 물 아래에서 마치 엄청난 압력으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수면이 요동쳤다. 그리고 안쉘이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호수 아래에서부터 용오름이 치솟았다.
콰아앙-!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충격음이 들렸다. 엔저의 얼굴에 더욱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그토록 웃는 걸 안쉘은 처음 봤다.
“아름다워…….”
엔저가 호수를 바라보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용오름이 솟아오르고 호수 전체에 태풍이 부는 것처럼 회오리가 쳤다.
“아름다워, 역시 아름다워요, 선배!”
엔저가 격앙되어 소리쳤다. 황홀하다는 듯 소리치는 그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곧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다.
안쉘은 입을 떡 벌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회오리가 일고 호수가 뒤집힐 것처럼 휘몰아치는 기둥 사이로 헤리엇이 상체를 지탱하고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기엔 말이 이상했다.
“…말도 안 돼.”
안쉘의 단정했던 2대8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헤리엇 알스터의 모습이 이상했다.
그는 마치… 그래. 마치 인어 같은 모습이었다.
새하얗던 머리가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하얀 동공이 희미하게 푸른색을 띠었다. 등을 비롯해 꼬리뼈까지 이어지는 지느러미와 하얀색 비늘로 뒤덮여 묘한 색으로 빛나는 꼬리까지. 아무리 봐도 인어 그 자체였다.
지금 인간은 바닷속 인어들과 격렬한 전쟁 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어인 그가 지상의 군 소속이란 말인가. 비록 시골 마을에 좌천되었어도 그가 군인이란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인어는 지상에 오래 있지 못하는 종족임에도 그는 지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활동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헤리엇 알스터가 인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용오름으로 튕겨 나간 인어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다시 호수 아래로 떨어졌다. 회오리 사이에 서 있는 헤리엇의 모습은 어항에 갇혀 있는 듯했다.
“선배는 군에서 만든 최고의 인조 인어야. 단지 조금 망가져 있을 뿐이지.”
헤리엇의 아름다운 꼬리의 지느러미 한쪽이 흉하게 어그러져 있었다. 과거 헤리엇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쪽 바다 전투에 참여했다가 다친 상처였다.
그때 헤리엇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이었다. 그 전투에서 헤리엇은 아군과 적군 가리지 않고 모두 동쪽 바다에 수장해 버렸다. 그를 사용하려면 군은 너무나도 커다란 위험부담을 져야 했다.
“아름다운, 나만의 인어…….”
엔저가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격에 차서 눈물을 흘리는 엔저를 보던 안쉘은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엔저는 발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