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엔저 맥과이어
“헤리엇 선배.”
“…엔저?”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던 헤리엇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의 어린 후배가 곧은 눈으로 헤리엇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부른 엔저는 그곳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과 마주하는 붉은 눈동자는 루비처럼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다.
신장 때문에 고민하는 귀여운 후배를 보는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아쉽다는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작은 신장을 가진 후배는 군에서도 탐내는 인재였고 자신은 망가진 불량품이었다. 이곳을 떠나면 저 후배를 다시 마주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굳이 저 말을 하기 위해 중등부에서 고등부인 이곳까지 찾아온 걸까.
헤리엇은 조심스럽게 웃었다.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미소만큼이나 조심스럽게 접은 헤리엇이 무릎을 굽혔다.
불편한 무릎을 세우고 엔저와 눈높이를 맞춘 헤리엇은 이참에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를 키워 볼까 생각했다. 검은 털에, 아주 예쁜 붉은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를.
“너라면 잘해 낼 거야, 엔저.”
“…….”
엔저가 속한 맥과이어 가문은 대대로 수많은 능력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현재 가문의 일원들 중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엔저는 천재 소리를 듣는 유망주였다.
군은 일찌감치 어린 그에게 눈독을 들였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만 하면 엔저의 인생은 탄탄대로 그 자체였다. 성인이 되고 길에서 마주쳐도 오히려 엔저 쪽에서 무시할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 자신은 이제 군에 필요 없는 부품이나 다름없으니까.
“…제가.”
과연 이 후배의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싶어 헤리엇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엔저는 땀이 차는지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을 몇 번이나 옷에 훔치며 입을 열었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괴로워 보였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의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선배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내?”
“네.”
왜?
오전이 지나가고 강렬한 태양이 둘의 주변을 내리쬐었다. 엔저의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부서지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헤리엇은 그 흔한 꽃다발 하나 받지 못한 학교의 골칫덩이였다. 그런 그에게 엔저는 그 이름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하지만 헤리엇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헤리엇을 바라보며 엔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가 되면.”
녹음이 진 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싱그러운 향기를 사방으로 뿌렸다. 여름이 찾아오면 헤리엇은 군이 정해 주는 곳에 처박혀 남은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
“저를 선배의 부관으로 삼아 주십시오.”
“…….”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맥과이어 가문의 외동아들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드물게 얼굴까지 붉히고 긴장해 땀까지 흘리며 말하는 어린 후배의 말을 비웃을 수 없었다.
헤리엇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달싹였다. 햇빛에 사그라질 것 같은 흰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헤리엇의 모습을, 엔저는 한시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응시했다.
* * *
커다란 유리잔에 갓 내린 커피를 담고 설탕 네 스푼을 아낌없이 퍼 넣었다. 우유를 붓고 몇 번 휘젓자 좋은 향기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그 위로 얼음을 갈아 넣으니 그럴싸한 모양새가 나왔다.
넋 놓고 커피를 보는 헤리엇의 뒤에서 안젤라가 걱정스러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장. 그렇게 먹다가 당뇨 걸려요.”
헤리엇은 안젤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색이 없는 하얀색 눈동자는 도대체 뭘 담았는지 알 수 없는 멍한 표정이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를 5년 동안 지겹게 봐 왔던 안젤라는 알고 있었다. 요즘 건강에 부쩍 신경 쓰는 헤리엇의 마음을.
“그렇게 걱정되면 단걸 끊으세요.”
“하지만… 그건 죽으라는 거잖아.”
무표정으로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린 헤리엇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조용히 자신이 탄 달콤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직속 부하이기도 한 안젤라는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묶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제 신입이 도망간 건 알고 계세요?”
안젤라와 헤리엇은 군에 소속된 군인이었지만 별다른 임무는 없었다. 사실 그들은 시골에 좌천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쓸모없어진 군인들을 모아 둔 곳이기 때문이다. 그 탓에 이런 곳에서 청춘을 보내느니 차라리 군복을 벗겠다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곳이었다.
따라서 헤리엇을 포함해 5명도 채 되지 않는 이 초라한 부대는 마을 사람들의 자잘한 심부름이나 하고, 야생동물 등을 지키는 자경단과 비슷했다.
“…벌써?”
“네.”
호로록.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헤리엇이 곤란한 듯 머리를 비비 꼬았다.
안젤라는 성큼성큼 사무실 구석으로 걸어가 곡괭이와 삽을 양손 가득 들고 왔다. 안젤라의 능력은 괴력으로 약 200kg까지의 무게를 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 괴력이 무색하게 그녀는 귀여운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 일은 대장이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
헤리엇은 또다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1만 제곱미터가 넘는 땅을 소유한 노인의 일을 도와줘야 하는 날이었다. 허리를 다쳐 밭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우는 노인을 도와주는 게 지금 그들이 할 일이었다.
안젤라는 무거운 농기구를 잔뜩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헤리엇은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절뚝이며 사무실을 나왔다.
그 잠깐 사이 안젤라는 차 문을 열어 트렁크에 농기구를 싣고 헤리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리엇은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커피를 남기고 온 것이 아쉬운지 사무실을 몇 번 흘끔거렸다.
그런 헤리엇을 본 안젤라가 활짝 웃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곧이어 헤리엇이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앉은 헤리엇을 확인한 안젤라가 차의 시동을 켰다.
“…리언은?”
“이장님하고 마을 순찰 돌러 갔습니다~.”
안젤라의 운전은 상냥하지 않은 데다 시골의 찻길은 울퉁불퉁 비포장도로여서 매우 흔들렸다. 헤리엇은 차체처럼 격하게 흔들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땀을 흘렸다.
이곳은 지금 한창 인어와의 전쟁으로 고조된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바다가 아닌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도 지금의 평화에 한몫했다.
안젤라는 흥얼거리다가 심심했는지 라디오를 틀었다.
- …영웅 엔저 중령의 활약으로 남쪽 인어들을 격퇴, 승리를…….
“휴, 이러다가 금방 이 전쟁도 종결 날 것 같은데요?”
안젤라가 라디오에서 들리는 특보에 휘파람을 불었다. 헤리엇은 자신이 들고 있던 붉은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네.”
“인어들도 참 끈질겼죠.”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았겠지.”
“그냥 배 몇 척 좀 바다를 지나가게만 허락해 주면 될 걸.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안젤라가 남 일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약 20여 년이나 지속되었던 인어와의 전쟁도 이제 슬슬 끝이 보였다. 수적으로는 인간이 월등히 많았지만, 바다는 인어들의 힘의 원천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약 20여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런가.”
창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는 헤리엇의 얼굴에 표정은 없었다.
엔저 맥과이어는 군부에서 유서 깊은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의 부모는 군 장교였고, 그 역시 아홉 살에 능력이 발현된 천재였다. 뛰어난 능력으로 이제는 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영웅이기도 했다.
“선배도 아카데미 출신 아니에요?”
아무 말 없이 멍한 표정의 헤리엇에게 안젤라가 물었다.
“…….”
“하지만 엔저 중령이 있던 곳은 그 엘리트 중에 천재들만 모이는 곳이니까 상관없나요?”
헤리엇은 대답하지 않고 제 손끝만 쳐다봤다. 안젤라는 이런 시골 마을로 발령받아 전쟁과는 무관한 일을 하며 지내는 헤리엇이 엔저와 같은 곳을 나왔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헤리엇도 입을 놀리기 귀찮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애초에 안젤라는 헤리엇이 아카데미를 다녔다는 사실도 긴가민가했다. 아카데미는 대부분 능력자가 가는 곳이었고, 헤리엇이 이곳으로 발령받고 5년 동안 단 한 번도 능력을 쓴 적이 없었다.
장교복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곳에 발령받아 온 그의 계급은 중사였다. 아카데미 졸업자 대부분이 밟아 가는 순탄한 엘리트의 길을 걷는 것 같진 않았다.
“…….”
헤리엇은 곤란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논밭이 보이고 곧 차가 멈추었다.
트렁크에서 삽과 녹슨 낫을 챙겨 든 안젤라는 ‘괴력’을 가진 이답게 빠르게 작물을 베어 나갔다. 헤리엇은 불편한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 안젤라가 베어 던져 놓은 보리를 가지런히 묶었다.
온몸에 진흙이 튀어도 안젤라는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길게 한 줄을 끝마친 그녀를 보며 헤리엇은 안젤라가 마을 어르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유가 이것이구나,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한참 동안 낫질을 하던 안젤라가 후련한 얼굴로 방긋 웃더니 헤리엇 쪽으로 성큼성큼 달려왔다. 그리고 헤리엇의 옆에 앉아 숨을 골랐다.
헤리엇이 꼼꼼하게 묶어 둔 정갈한 보리들을 안젤라는 한곳에 모아 땅 주인이 쉽게 가져갈 수 있게 차곡차곡 쌓으며 짧은 휴식을 즐겼다. 그리고 다시 낫을 들고 진격했다가 나와서 쉬기를 반복했다.
헤리엇은 혼자 고생하는 안젤라의 늠름한 등을 응시하며 꼼꼼하게 수확한 작물들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그 사이에서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뿅 하고 튀어나온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손가락 마디만 한 개구리를 손바닥에 올린 헤리엇은 흰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관찰했다. 그러나 개구리는 다리를 잡고 몸통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헤리엇의 손을 피해 바닥으로 도망쳤다.
다시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가는 개구리를 멀거니 쳐다만 보던 헤리엇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신이 나서 낫질을 하던 안젤라도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
헤리엇은 넋 놓고 눈만 깜빡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사내가 절뚝거리는 헤리엇의 팔뚝을 잡으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했다.
“???”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헤리엇보다 훌쩍 커 버린 사내가 헤리엇을 부축한 채로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로 헤리엇이 늘 들고 다니는 지팡이에 달린 붉은 보석을 떠오르게 하는 눈동자였다.
“오랜만입니다. 선배.”
“…어.”
안젤라가 화들짝 놀라 낫을 떨어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엔저!!!”
사내는 잠시 그녀를 돌아봤다가, 다시 헤리엇과 눈을 마주했다.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헤리엇은 자기보다 한참 작았던 후배를 떠올렸다.
말없이 늘 등 뒤를 쫓아다니던 그의 ‘루비’, 우물 속 개구리처럼 그곳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던 어린 소년은 성숙한 어른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 * *
‘아름다워,
너무나 아름다워 견딜 수가 없어…….
나만의 인어.’
헤리엇은 갑자기 나타난 과거의 후배를 보고 당황하여 반가움도 표현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가 과거 아카데미 시절 헤리엇을 따르는 후배였다고는 하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접점 하나 없는 먼 관계였다. 흔한 안부 인사조차 하기 민망할 정도로.
“왜, 여기.”
드물게 당황하는 헤리엇과 다르게 엔저는 한가롭게 주변을 살펴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과거엔 저 머리를 꾸깃 하고 만진 적이 있었다. 참 보드랍고 푹신했지. 엔저는 고양이처럼 헤리엇의 곁에 조용히 앉아 그의 손길을 음미했었다.
뒤에서 안젤라가 몇 번이나 말을 더듬거리다가 종래엔 삽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엔저의 숨은 팬이었다. 그가 나오는 신문은 모두 정독했고, TV부터 라디오, 잡지까지 모두 다 섭렵했다.
사실 지상에 사는 많은 사람이 엔저를 사랑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엔저는 태연하게 안부 인사를 하며 헤리엇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소중한 보석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먼지를 탁탁 털어 주는 엔저의 모습이 과거와 겹쳐 보였다.
엔저는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헤리엇의 지팡이를 소중하게 다뤘다. 먼지를 털어 주고 혹시 흙이 묻으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헤리엇의 손에 조심스럽게 쥐여 주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이 오랜만이지만, 무척이나 낯이 익어 헤리엇은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색소 없는 하얀 눈동자가 담긴 눈을 끔뻑거리며 헤리엇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을 살피는 엔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정적이 맴돌았다.
“…….”
그런 침묵을 깨뜨린 건 엔저의 뒤에 있던 사내였다. 그는 헛기침하며 헤리엇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각 잡힌 군복에 반짝거리는 안경을 쓴 사내였다. 2대8 머리만 아니면 좀 더 젊어 보였을 그는 헤리엇에게 경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엔저 맥과이어 중령의 보좌관 안쉘 리 소위입니다.”
심지어 헤리엇 보다 계급이 높았다. 헤리엇은 멍하니 경례를 받으며 둘을 쳐다봤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리를 옮겨 주시겠습니까?”
보좌관의 말에 헤리엇은 저도 모르게 엔저를 올려다봤다. 느긋하고 나른한 고양이처럼 엔저가 웃고 있었다. 옛날에는 새침한 표정만 지었었는데…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뒤에서 엔저의 등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안젤라가 눈을 빛내며 헤리엇과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미안하지만 그녀에겐 할당된 일이 있었다. 허리를 다친 불쌍한 할아버지를 위해 1만 제곱미터나 되는 보리를 수확해야 하는 사명이.
헤리엇은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자신을 안쉘이라고 소개한 사내를 따랐다. 안젤라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군 시설이라기엔, 소박하군요.”
아마 앞에 무척이나 꽤 많이 소박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마을 이장이 준비해 준 사무실이었기에 군 시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이었다.
폐가로 방치되었던 곳을 이장과 마을 주민들, 그리고 몇 안 되는 군인들이 그럴듯하게 만든 것이다. 2층까지 밖에 없는 좁은 건물 내부로 들어간 헤리엇은 하나밖에 없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은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낡은 소파들로 채워졌다. 대부분 헤리엇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그 아래 부하들은 소파 위에서 뒹굴뒹굴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안젤라가 말하길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 이런 시골에 좌천돼도 살 만하다고 했었다.
헤리엇은 절뚝거리면서 선반으로 다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명색 상관이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엔저는 후배였지만 계급은 한참 위였고, 그의 부관으로 온 안쉘 역시 헤리엇보다 몇 단계 위 계급이었다. 여기서 제일 계급이 낮은 헤리엇이 움직이는 건 당연했다.
“선배, 제가 할 테니까 앉아 계세요.”
“어? 하지만…….”
“안쉘이 전달할 사항이 있다니까 편하게 앉아 계세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또 어쩔 수 없는 일.
헤리엇은 하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엔저와 소파에 앉아 서류 뭉텅이를 꺼내는 안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절뚝거리며 소파로 다가갔다.
엔저는 흥얼거리면서 척척 선반 위에 있는 찻잎과 커피를 꺼내고 있었다. 알려 준 적 없는데 어떻게 저리 귀신같이 알고 찾아내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군인들이 모아 둔 찻잔 세 개를 꺼낸 엔저가 찻잎을 탈탈 털어 넣는 것을 확인하며 헤리엇은 앞을 응시했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을 2대8로 아주 단정하게 정리한 안쉘이 뾰족한 안정을 고쳐 쓰며 말했다.
“남쪽 인어들의 잔당이 이곳으로 도주했습니다.”
서류상에는 어려운 단어들이 가득했다.
“여기는 바다가 없는데…….”
“능력이 높은 인어들은 지상으로 나올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헤리엇 자신이었다. 하지만 왜 인어들이 이런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에……?
안쉘은 헤리엇의 뒤를 한 번 힐끔 쳐다봤다가, 다시 헛기침했다.
“이곳에는 호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넓지는 않습니다.”
산속에 흐르는 강은 얕았고, 맛이 매우 좋은 약수터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는 인어들이 숨어 살 수 없었다. 다만 여기서 좀 먼 곳에 헤리엇이 자주 가는 호수가 하나 있긴 했다.
설마 그곳에 남쪽 인어들이 침범했을까…….
헤리엇은 멀뚱히 눈을 깜박거리며 멍하니 생각하다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호수로 가는 루트를 알려 줬다.
정말 이곳에 남쪽 인어들이 도망쳤는지 긴가민가했다. 이곳에서 바다는 매우 멀었고, 인어들은 대부분 지상에서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했다. 그러니 일부러 이곳까지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이곳까지 유인하지 않았다면.
전쟁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엔저가 뒤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차를 타는 중이었다. 그의 팬인 안젤라가 봤다면 흥분해서 콧김을 내뿜었을 모습이었다.
“정말 질리는 녀석들이죠?”
엔저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찻잔을 들고 와 녹차는 안쉘에게, 커피와 얼음이 가득 들어찬 유리잔은 헤리엇의 앞에 대령했다. 본인은 먹지 않는지 찻잔은 두 잔이었다.
“…….”
뜨거운 걸 먹지 못한다고 그에게 말했던가? 아니면 엔저도 차갑게 먹는 걸 좋아한다거나.
헤리엇은 안쉘의 찻잔을 힐끔 내려다봤다. 아주 뜨거워 보이는 녹차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에 반해 자신의 잔에는 얼음을 갈아 넣어 준 것까지 확인한 헤리엇은 갸웃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설탕 네 스푼, 맞죠?”
“…음.”
헤리엇은 눈을 감고 입 안에서 퍼지는 맛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알았어?”
“…….”
“나 커피 마실 수 있게 된 거… 얼마 안 됐는데.”
아카데미 시절에 헤리엇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마시면 금방 갈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야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그나저나 설탕 네 스푼까지 정확하게 알아채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역시 전쟁 영웅은 뭔가 다르단 건가? 눈치가 비상하게 빠르거나.
무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는 헤리엇의 하얀 머리카락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엔저가 머쓱하게 웃었다.
“감입니다.”
“음.”
역시 감이었구나.
후드득.
헤리엇은 감탄하다가 자신의 앞까지 떨어진 서류뭉치에 시선을 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새하얗게 질린 안쉘이 땀까지 흘리며 헤리엇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인어, 바닷속 또 다른 인류.
처음에는 인간과 인어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지성체인 그들은 서로 교류하는 방법을 알았고, 인간은 인어를 또 하나의 민족으로 받아들였다. 지상과 바다는 사이좋게 공존하며 평화가 지속되리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바다를 지배해야만 했다.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바다, 동화 속 풍경처럼 아름다운 인어 몇백 마리가 수면으로 올라왔다. 아름다운 푸른 지느러미를 휘황찬란하게 움직였다.
인간의 상체를 가진 그들은 묘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닷속에서 거품이 일어나 인어들을 감싸자 마치 보석으로 치장한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바닷속에서도 보이는 뽀얗고 아름다운 피부, 붉은 뺨과 입술은 아름다운 피조물 그 자체였다.
그런 인어의 표정이 사납게 어그러졌다. 이윽고 인어의 손짓과 지느러미 짓에 잠잠했던 바다가 한순간 심하게 너울거렸다. 인어들이 사는 심해, 그 위 너머로 인간들의 군함이 거대한 폭약을 얹고 나타났다.
바다는 인어들의 힘의 원천이며,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런 바다 한가운데서 인간이 인어에게 승리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인어들 대부분이 심해로 도망갔다가 다시 정비하고 나와 인간들의 군함을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파도와 태풍이 몰아치고 바닷속에서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군함이 바다의 제물이 되어 사라졌다.
거대한 군함마저 뒤집어엎을 것처럼 출렁이는 파도에 군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 이십오 척의 군함이 한꺼번에 파도에 휩쓸러 너울거렸다.
심해에서 빠져나온 인어들은 바닷속에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무언가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태풍이 불어 닥친 것처럼 요동치던 바다가 매우 잠잠하게 변했다.
인어들이 하나둘씩 그 자리를 떠나고자 바다 깊은 곳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인어들은 한순간 끔찍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콰과광!!!
하늘에서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바다 수면이 폭발했다.
그리고 검은 군함 두어 대가, 망가진 군함들 사이로 위세 등등하게 나타났다. 아주 거대하고 위협적이었다.
고요하게 지나가는 검은 군함에는 독수리 문양이 찍혀 있었다. 갑판 기둥에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리던 병사 한 명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엔저 부대…….”
하늘을 날고 바람을 지배하는 엔저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독수리는 인어들을 집어삼킬 듯이 기세등등하게 바다를 노닐었다.
군함이 지나가는 주변에 섬뜩한 폭발음이 쏟아진 것과 동시에 미처 심해로 도망가지 못했던 인어들의 시체가 바다 위에 둥둥 떠다녔다. 피를 머금은 바다는 역겨울 만큼 고요하고 섬뜩했다.
끔찍한 광경에 안쉘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금 출렁이는 갑판에 서서 장교복을 들고 경례를 했다. 안쉘의 뒤로 많은 군인이 경례하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때 하늘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가벼운 몸짓이었다. 그가 바닥에 착지하자 거센 돌풍이 불었다. 안쉘의 단정했던 2대8 머리가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엔저가 안쉘에게 겉옷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혹자는 담배이거나, 시가일 줄 알겠지만 아니었다.
그가 꺼낸 건 하나의 사진이었다. 손바닥 크기만 한 사진.
“수고하셨습니다.”
안쉘이 말을 걸었지만, 엔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검은 머리를 한껏 뒤로 쓸어 올린 다음 장교 모자를 썼다. 그리고 다시 사진을 쳐다보며 그 위로 짧게 키스를 했다.
안쉘은 전에 한 번 사진 위로 그의 혀가 기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나빴다.
“…조금만 기다려요, 선배.”
저 사진이 대체 뭔지 모르지만 엔저에게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언제인가 과거 저 사진을 보겠다고 장교 한 명이 멋대로 그것을 뺏었다가 두 번 다시 군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깨졌다.
그의 약혼자 사진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엔저에게 연인이나 약혼자는 없었다.
* * *
딸그락.
침묵 속에서 얼음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사무실 안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지만 헤리엇은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유리잔을 내려다봤다.
“???”
안쉘의 표정이 미묘했다. 마치 그는 불한당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마치 불한당에게 겁탈당하는 이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에 불한당은 없었고, 피해자 역시 없었다.
다시 유리잔을 내려다본 헤리엇이 눈을 깜박거렸다.
엔저는 참 어리고 작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탈 수 있게 되었구나.
자기가 주는 사탕이나 받아먹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시간 참 많이 지났다. 하긴 이제 엔저는 감히 거들떠볼 수 없는 영웅이었고, 헤리엇은 시골 마을에 좌천되어 나날이 시간이나 때우며 보내는 군의 쓸모없는 인력 중 하나였다.
헤리엇은 다시 커피를 홀짝이다가,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안쉘을 발견하고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드시고 싶으신가요?”
“아니요.”
절대로 먹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안쉘을 보고 저 양반은 커피를 싫어하는구나, 하는 한가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코코아 좋아하십니까?”
안쉘이 뜬금없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했다.
“?? …네.”
건강 때문에 요즘 많이 못 먹지만…….
그러자 안쉘의 표정이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변했다. 질색하는 표정도 함께였지만 헤리엇은 눈치채지 못하고 유리잔을 기울였다.
옆에서 엔저가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과거 새침데기였던 그가 저렇게 미소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구나…….
헤리엇은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날은 더워졌고 덕분에 몸의 수분이 부족했다. 벌컥벌컥 음료를 들이켠 헤리엇은 입맛을 다시며 냉장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엔저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헤리엇의 전용 텀블러를 하나 꺼냈다.
헤리엇을 위한 대여섯 개의 텀블러가 냉장고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은 직감이었다. 엔저는 씩 멋진 웃음을 흘리며 텀블러를 헤리엇에게 건넸다.
“선배, 물입니다.”
“고마워.”
안쉘은 먹던 녹차를 질질 흘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기밀이라며 중요시했던 서류가 엉망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헤리엇은 하얀 속눈썹을 껌뻑이며 손을 뻗었다.
“…아, 감사합니다.”
헤리엇의 손짓에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안쉘이 허겁지겁 서류를 모았다.
“남쪽 인어들의 수색은 저희 쪽에서 진행하겠습니다.”
“네.”
지역 관할은 헤리엇에게 있다 해도 사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이곳의 군인은 고작 다섯 명이고, 그중에 한 명은 어제 탈영했으며 대장은 65세 할아버지로 저번 달에 은퇴했다. 덕분에 그다음 직급인 헤리엇이 임시로 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협조 감사합니다.”
별로 협조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말하니 머쓱했다. 뭐라고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안쉘도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텀블러 뚜껑을 열고 안에 든 물을 꿀꺽꿀꺽 삼키는 헤리엇을 보며 안쉘이 물었다.
“물을 굉장히 자주 드시는군요.”
“…날이 더워졌으니까요.”
“네…….”
그래도 좀 심하게 많이 먹는 것 같은데…….
헤리엇은 거대한 텀블러 한 통을 시원하게 마시며 어떻게 이 물통이 냉장고에 있다는 걸 엔저가 알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마 또 감이지 않을까.
“남쪽 인어들은 호전적이고 성향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시계를 확인하니 곧 해가 저물 시간이었다. 지금 당장 남쪽 인어들을 소탕하러 가자고 열의를 불태울 것 같던 안쉘은 의외로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마무리한 뒤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러면 오늘은 묵고 가는 건가, 헤리엇은 엔저를 쳐다봤다. 그리고 안쉘이 일어나는 동시에 엔저가 입을 열었다.
“선배.”
“…음?”
“오늘 선배 댁에서 묵을 수 있습니까?”
안쉘이 앞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엔저는 뻔뻔한 얼굴로 선배에게 묵을 수 있는지 당당하게 물었다.
헤리엇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묵고 있는 곳은 엔저가 자고 가기엔 너무 허름하고 좁았다. 하지만 엔저는 포기하지 않고 웃으며 재차 말했다.
“갑작스러운 발령 때문에 머물 곳이 없어서 그럽니다.”
순식간에 무능한 부관이 된 안쉘은 ‘가까운 도시, 가장 좋은 호텔로 예약했습니다!’라고 말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짝 눈썹 끝이 내려간 헤리엇이 그 말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울 텐데.”
“괜찮습니다. 청소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뭐…….”
안쉘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그는 범죄자를 눈앞에 둔 형사의 얼굴을 했다.
그 시각 오늘 할당된 밭일을 전부 끝낸 안젤라가 나무 뒤에 숨어 초조하게 사무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갈 수 없는 무언가에 막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투명한 벽이 사무실 주변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엔저 보좌관의 능력이 분명했다.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러 봤지만, 꿈쩍도 하질 않는 걸 보면 과연, ‘저’ 엔저의 보좌관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안젤라!”
벽에 가로막혀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안젤라뿐만이 아니었는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나타난 그는 매우 당황한 목소리였다.
“리언!”
리언은 오늘 아침 이장님과 마을 순찰을 하러 나갔었다. 그는 진한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잔뜩 달린 귀여운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젊고 어려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 아래에는 흉기 같은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었다.
“뭐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통통.
리언이 허공을 두들겼다.
“뭐?! 엔저 맥과이어!?”
“조용히 좀 해.”
안젤라는 농기구를 바닥에 잔뜩 떨구고 말했다. 리언 역시 놀란 듯 소리 질렀다. 하기야 자신도 엄청나게 놀랐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리언은 그녀가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안젤라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지금 저 허름하고 좁은 사무실에 전 국민의 영웅이 들어가 있었다.
“엔저가 이런 시골 마을에 왜?”
“아마 우리 대장 때문인 것 같아.”
“대장?”
리언은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장이 어떻게 엔저 맥과이어와 아는 사이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젤라는 마치 기밀 정보를 말하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리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리언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귀를 가까이 댔고 안젤라가 속삭였다.
“글쎄… 엔저가 대장을 선배라고 불렀어.”
“대장을?”
“똑똑히 들었다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선배라고 부르더니 데려가 버렸어.”
다리 한쪽을 못 쓰는 헤리엇이니만큼 일에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혼자 일하는 것과 서로 대화하며 일하는 건 다르다. 안젤라는 그 넓은 논밭을 혼자 정리했다며 눈물을 쏟았다.
괴력의 안젤라라면 논 1만 제곱미터 따윈 두 시간이면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리언은 화들짝 놀라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리엇의 의외의 인맥에 둘이 어떤 관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엔저가 선배라고 불렀다고 했으니 그가 어딘가에서 헤리엇의 후배로 있었다는 소리인데, 그 접점을 도저히 추리하기 어려웠다.
정말 이상한 조합이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영웅과 시골에 좌천된 능력 없는 군인의 조합이라니.
엔저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아카데미도 리언과 안젤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을 나왔다. 그는 군이 운영하는 중앙 국립 아카데미에서도 S급 클래스로 졸업했다.
“설마 대장도 그곳 출신인가?”
“하지만… 대장은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잖아.”
안젤라가 한숨을 쉬었다.
“대장도 나름 아카데미 출신이야.”
“…….”
그렇다고 해도 역시 엔저와의 조합은 너무 의외였다.
헤리엇은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능력을 쓴 적이 없었다. 둘이 추리하기에 너무 능력이 없거나, 혹은 남에게 보여 줄 수 없을 정도나 그 근처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군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이 아니겠거니 하고 결론지었을 뿐이다.
“너 대장이 능력 쓴 거 본 적 있어?”
“없지.”
리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서 더 오래 근무한 안젤라가 모르는 걸 자신이 알 리가 없었다.
헤리엇은 능력자라고 하기엔 너무 약했고, 신체적 조건도 썩 좋지 않았다. 늘 지쳐 보였고 무기력했다. 둔하고 사리사욕이 없어 평화로운 이곳의 배경처럼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특히 어스름한 새벽에는 존재감조차 희미해지는 사람이었다. 하얀 머리에 하얀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도 초반에 몇 번 마주칠 때뿐이었다. 지금은 그들에게 공기처럼 흩어지는 배경 같은 사람이었다.
리언은 초조하게 사무실을 쳐다봤다. 안젤라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저 허름한 사무실에는 그 유명한 엔저 맥과이어가 들어가 있다는 소리인데. 엄청나게 보고 싶었다. 사실 지상에 그의 팬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두 사람이 결계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안젤라와 리언은 소리 지르고 싶은 입을 가까스로 막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오는 헤리엇의 뒤로 검은 무언가가 함께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TV와 신문, 잡지 등 매스컴에서 지겹도록 본 얼굴이었다.
정말로 엔저 맥과이어였다. 그는 엔저 부대만이 걸칠 수 있는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장교복을 입고 있었다.
“…….”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안젤라와 리언을 발견한 헤리엇이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덕분에 엔저도 그 뒤를 따라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계급은 중령, 안젤라와 리언은 고작 하사.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굳어 경례하는 두 사람을 향해 헤리엇은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안젤라, 리언.”
“…네.”
“퇴근해도 좋아.”
붉은색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헤리엇이 말했다.
정말 우리 대장이지만 끝까지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안젤라와 리언은 대답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기 퇴근에 기뻐해야 할지 아닐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헤리엇이 절뚝거리며 걷자 엔저가 그 옆에서 팔을 뻗었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음, 괜찮아.”
정말 친근한 대화였다.
“리언은 좋은 녀석이야.”
군인이 되자마자 이런 곳으로 좌천된 리언은 꽤 순박하고 좋은 청년이었다. 그는 마을 이장과 특히 잘 지냈다.
이장은 일찍이 전쟁으로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군인이면서 젊은 데다 아들 또래인 리언을 무척 아끼고 챙겼다. 리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순순히 끌려다니는 중이었다.
“그렇습니까?”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하는 헤리엇에게 엔저가 웃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지금 엔저는 헤리엇을 부축하고 밤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차를 타자고 했지만, 기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헤리엇의 집이 있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요즘 어떻게 지냈냐는 엔저의 말은 헤리엇의 일상이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부하 이야기를 했다.
“안젤라는 그렇게 작고 귀여운데 능력이 괴력이야. 그래서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
“그렇군요.”
전혀 흥미롭지 않은 듯해 보였지만 엔저는 꼬박꼬박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절뚝거리며 걷다가 넘어지려는 헤리엇의 허리를 잡았다. 커다란 손이 허리에 걸쳐지자 헤리엇이 고개를 들어 엔저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루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두운 산길인데도 그의 붉은 눈동자만큼은 보석처럼 아름답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선배, 역시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
아니 그다지 필요 없는데. 넘어지는 거야 일상다반사니까.
그러나 헤리엇이 거부하기 전에 엔저가 그의 무릎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들어 올렸다. 헤리엇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우적거렸다.
혹시 엔저의 능력이 ‘바람’이 아닌 괴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뜬하게 들었다. 약해 보여도 헤리엇의 몸무게는 상당했다.
“엔저, 이렇게 보여도 내 몸무게가 70kg이야.”
“네. 정확히는 75.3kg이시죠.”
“…….”
소수점 아래까지 어떻게 알았지…….
헤리엇은 역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젊은이의 감은 무시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엔저는 성큼성큼 걸어 헤리엇의 집에 도착했다. 엔저에게 안겨서 온 덕분인지 평소보다도 빨리 도착했다.
“우리 집을 잘도 찾아왔네.”
가깝다고 해도 슬슬 해가 지는 어두운 산길인데다, 잘 보이지 않는 지름길이 있어서 따로 알려 줘야 하나 망설였는데 엔저는 아주 정확하게 찾아왔다.
그의 말에 엔저는 방긋하고 웃을 뿐이었다. 헤리엇은 엔저의 품에서 나와 절뚝거리며 현관문 앞에 서서 품을 뒤적여 열쇠를 꺼냈다. 헤리엇은 뒤를 힐끔 쳐다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말 더러워…….”
“괜찮습니다.”
“이불도 개지 않았어.”
“그거 정말 좋군요…….”
“???”
엔저는 어릴 때부터 가끔 뜻 모를 행동을 하곤 했는데, 지금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도 그랬다.
조금 더 능청스러워진 건가…….
헤리엇은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벽을 더듬거리며 불을 켰다. 다행히도 집 안이 그렇게 엉망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헤리엇의 집에는 물건 자체가 많지 않았다. 책장 사이에 코코아 가루가 상자째로 있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집이었다.
침대보단 이불을 선호하는지 바닥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개지 않은 듯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이불 옆엔 거대한 물병이 나뒹굴고 어제저녁은 집에서 먹지 않은 듯 컵 두 개가 싱크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엔저가 청소해 주겠다고 했지만, 딱히 건들 만한 건 없었다. 설거지만이라도 자신이 해야겠다고 싱크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 풀썩-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고개를 돌려 보니 엔저가 이부자리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엔저?”
“잠시 피곤해서요.”
그는 후-, 하-, 후-, 하-, 하면서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 쉬면 불편할 텐데…….
헤리엇은 눈썹을 팔자로 내리면서 겉옷을 벗었다. 바닥에 옷이 떨어지기 전에 엔저가 귀신같이 그걸 잡아챘다. 그리고 꾸물꾸물 그 겉옷을 챙겼다.
옷은 구겨지겠지만 어린 후배가 챙겨 주는 게 기분 나쁘지 않은 헤리엇은 곤란한 미소를 살짝 지으며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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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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