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화.
에필로그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모일 때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꿔 온 광화문 광장.
이곳에 셀 수 없이 많은 흰색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찾아와 차곡차곡 벽돌을 쌓듯 자리에 앉았다.
“크으…… 결국 우리 길드에도 사내 결혼이 나오는구나!”
좌석의 가장 앞쪽에는 서큐버스 군단 멤버들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영화제 시상식이라도 온 듯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기자들은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대포같이 생긴 카메라로 쉴 새 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길드원들 중 일부는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여유를 보여 주기도 했다.
바로 뒤쪽 줄에는 한국뿐 아니라, 미, 중, 일본 등 굵직굵직한 국가들의 대통령들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는 카메라는 몇 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아아아, 여러분! 안녕하시냐 츄! 오늘 결혼식의 사회를 보기로한 에D츄다츄!! 10분 후에 식이 시작하니 자리에 모두 앉아 달라 츄!]
메인 무대의 좌측에 놓인 단상에 검은 정장을 크게 둘러 입은 에D츄가 두 발로 서서 마이크를 붙잡고 있었다.
“오오 짱 귀여워.”
“실물로 보니까 장난 아니다. 햄스터가 말을 하네!”
하객들 사이에서 열렬한 반응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에D츄는 이런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코를 문질문질하더니 말을 이었다.
[후후후, 그럼 오늘 결혼식을 시작하겠다츄! 세계의 구원자이자 신의 능력을 가진, 나의 쭈인님이자 노벨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어마어마한 대영웅! 허세현 쭈인님 입장!]
에D츄가 이상한 멘트를 끝내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오케스트라가 신랑행진곡의 연주를 시작했다. 그 인원만 거의 20명이 넘어서 음악 자체에서 웅장함이 이 공간을 묵직하게 뒤덮었다.
‘저 망할 놈의 쥐새끼…… 오늘도 트롤링이냐.’
잠시 후, 객석의 중앙에 길게 늘어진 카펫 위로 검은 정장에 머리를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우어어어어어!”
“사랑합니다, 허세현 님!”
“믿습니다!”
세현이 걷자, 하객들의 반응은 조금 전 에D츄에게 보냈던 것과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결혼식 하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종교 부흥회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가한 5만 명의 인파는, 인터넷 추첨을 통해 5000:1의 경쟁률을 뚫고 온 사람들이니 만큼 이런 반응을 보일 법도 했다.
잠시 후, 세현이 스테이지 중심에 놓인 단상 앞에 도착하고 연주가 멈췄다.
[짜, 다음은 신부입장이다츄!]
그 즉시 다른 음악이 연주되며 뒤쪽에서 신부가 카펫을 타고 걸어 들어왔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은 그녀가 보통의 신부들처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 그녀의 펫인 흰색의 여체를 가진 반인반수 ‘미노타우르스’의 어깨에 앉은 채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와, 저게 미노타우르스인가 봐?”
“우어어어…… 신부 진짜 예쁘다.”
머메이드 실루엣의 웨딩드레스는 백설희의 몸을 보기 좋게 잡아 주어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연출했다. 드레스와 기다란 베일에 달린 보석이 반짝이는 태양빛을 받아 쉴 새 없이 빛을 발하는 것이, 그 모습을 ‘여신’이라고 호칭하는 데 조금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하객들의 열렬한 환호 끝에 이번 결혼식의 두 주인공의 입장이 끝났다.
“오늘 이 자리에서 현재의 지구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곧이어 한국 대통령이 뻔하디 뻔한 말로 축사를 건넨 후 사라졌고, 주례를 봐줄 사람이 단상 위로 터벅터벅 올라왔다.
보라색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차갑고 도도한 인상을 주는 고양이상의 눈매, 그리고 굴곡진 몸매를 시원시원하게 드러내는 검은색 롱드레스에 킬 힐을 신은 미녀.
서큐버스 군단의 길드장이자 사람들에게는 15사도 중 하나로 불리는 ‘사카린’이었다.
“우아아아아! 망할! 나랑 결혼하지 허세현!!”
사카린이 단상에 서자마자 갑자기 소리를 빼액 내질렀다. 다행히도 마이크를 꺼 놓은 상태였기에 근처에 있는 사람들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하하하! 사카린 언니 저기서 뭐하냐!”
“열등감 대폭발!”
얼핏 보면 심각해질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길드원들은 도리어 그런 사카린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심지어는 이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허세현과 백설희의 얼굴에도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대놓고 보일 정도였다.
“시끄러 이년들아!”
사카린이 이에 울컥했는지, 곧장 보라색 구체를 소환해 길드원들에게 날려 버렸다.
“히이이익!”
“경호원!!”
갑작스러운 상황에 바로 뒤쪽에 앉아 있던 각 국가의 지도자들이 혼비백산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길드원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 앉아 손을 앞으로 뻗어 장막을 만들어 내 사카린의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상황이겠지만, 그녀들에게는 이는 그저 재미있는 장난일 뿐이었다.
“후우- 진정하자 진정해.”
사카린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마이크를 붙잡았다.
[아아, 사카린입니다. 오늘 두 길드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도 결혼이 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조금 배알이 꼴리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많은 축복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사카린은 축사라고 하기 애매모호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축사를 대신했다. 순간 회장에 정적이 맴돌았고, 사회 석에서 곤란한 얼굴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던 에D츄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츄! 사카린 공의 좋은 말씀이었다츄! 바, 박수!!]
박수를 유도해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산발적으로 박수가 나와서 분위기만 더 어색해졌다. 이럴 땐 그냥 강행 돌파가 답이다.
[그러면 이어서 축가가 있겠츄! 신부 ‘백설희’ 공이 축가를 준비했다고 하니 다들 환호와 박수 부탁드린다츄!]
에D츄의 말이 끝나자,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도우미들이 무선 마이크를 들고 백설희에게 다가왔다. 설희는 마이크를 붙잡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세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 모습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러웠고, 세현은 순간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오케스트라에서 전주가 흘러나왔고 설희가 붉게 물든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그렇게~ 대단한 운명까진,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설희가 이선희의 ‘그 중에 그대를 만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선율. 첫 마디를 떼는 것만으로 하객들은 소름이 오싹오싹 돋을 정도로 전율했다. 이는 그녀가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로 아군을 보조하는 ‘팬텀싱어’ 클래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너의~ 기적이었다면…….”
설희가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끝내자, 일제히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 정도의 반응을 충분히 받을 만한, 완벽한 무대였다. 세현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맞잡아 무대의 중앙으로 다시 이끌었다.
‘후우……. 다행이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세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금 전, 사카린이 완전 죽여 놓았던 결혼식 분위기를 백설희가 강제로 되살려 낸 것에 조금 안심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의 흐름은 평범한 결혼식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세현과 설희가 준비해 놓은 성혼선헌문을 함께 낭독했고, 준비해 놓은 영상을 통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연인의 관계가 됐는지 설명했다.
[츄 그러면! 신랑신부 행진!!]
행진곡과 함께, 두 사람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자로 도열해 있는 수백여 명의 결혼식 관계자들이 꽃가루를 쉴 새 없이 뿌리거나 폭죽을 터뜨렸고, 사진기자들도 바쁘게 셔터를 눌러 댔다.
백설희의 눈에는 투명한 액체가 그렁그렁 맺혔고, 세현은 머쓱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 하객들에게 연거푸 손을 흔들어 그들의 열렬한 환호에 화답했다.
“고마워 세현아.”
“그런 말은 왜 해, 고마운 건 나지.”
두 사람 모두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현재의 행복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지난 몇십 년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파트에서 입주자 시험을 볼 때, 처음 서로를 마주했던 순간부터 수많은 위기를 함께 헤쳐 온 시간들까지… 어느 한 순간도 중요치 않은 시간이 없었다.
회상이 끝나 갈 무렵, 두 사람이 카펫의 끝에 도달했다. 길드원들이 두 사람을 둥글게 둘러싸고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뭐해 이것들아! 빨리 뽀뽀 안 하고!”
사카린은 여전히 심통이 났는지 허세현의 엉덩이를 퍽-소리가 나게 걷어찼다.
“그럼…….”
세현은 설희의 허리를 끌어안고 잡아당기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두 입술이 포개지는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며 주변에서 하객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감격스러운 순간, 평소 눈물과 거리가 먼 허세현이건만 괜스레 코끝이 찡해짐과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히 인생에 다시없을 최고의 순간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신랑신부는 웨딩 카를 타고 퇴장츄!]
두 사람의 앞에, 기다란 흰색의 카운터택 리무진이 다가와 멈췄다.
“타시지요. 편히 모시겠습니다.”
앞에서 신사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운전수가 걸어 나와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에스코트했다.
그때였다.
콰르르르르릉-!
상공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하객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설희야 미안한데, 잠깐 내려야 될 것 같다.”
“응.”
세현의 말에 반쯤 차 안에 몸을 걸쳤던 설희가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도, 도망쳐!”
“시민 여러분, 경찰 통제에 따라 주십쇼!”
조금 전만해도 두 사람을 축복하던 하객들은 혼비백산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기에 결혼식을 통제하기 위해 상당수의 경찰 병력이 대기 중이었고, 지난 십수 년의 경험으로 민간인들 또한 위기 상황에 대한 훈련이 잘돼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웨딩드레스, 조금 더 입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인벤토리를 조작해 곧장 옷을 전투복으로 환복 했다.
여신같이 아름다웠던 신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 명의 전사로 돌변했다.
그러는 사이, 잠시 떨어져 있었던 미노타우르스가 빠르게 다가와 설희를 어깨에 올렸다.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세현과 설희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주군, 저 소용돌이는…….”
“응, 적이야. 그것도 ‘두 의지’급.”
세이메이의 물음에 세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잠시 후,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림자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허세현, 약속대로 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검은 날개에, 검은 옷, 짧은 단발머리를 한 차가운 인상의 여성이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세현을 노려봤다.
수십 년 전, 지구에 ‘아파트 사태’를 일으켰던 두 의지 중 하나인 ‘렌’이었다.
세현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양팔로 두 자루의 엑스칼리버를 앞으로 뻗어 그녀를 겨눴다.
“나야 말로, 한 마리를 놓쳐서 찝찝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 줘서 너무 고맙네.”
문답무용. 세현은 곧장 두 자루의 엑스칼리버에 동시에 성령개방을 발동시킨 후, 두 개의 노란 반월을 하늘로 쏘아 냈다.
콰과과과광!!
공중에 흩어지는 그림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이건 대체 무슨 힘…….>
압도적인 힘에 렌의 얼굴이 굳어졌고, 세현은 그 광경을 보며 악마처럼 입 꼬리를 씨익 추켜올렸다.
“이게 마지막 게임이다.”
<레벨업 아파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