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179화.
의지를 가진 자
콜로세움의 한가운데,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서로의 검날을 쳐 냈다.
스파크가 튀고, 청명한 파열음이 리드미컬하게 들려온다.
‘빠르게 간다!’
의지와의 전투가 시작된 직후, 세현은 줄곧 자신감 있게 밀어붙이며 검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 것이 확실하다면,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것이 답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흐음, 재미있는데? 이 정도는 돼야 커플러를 죽일 수 있다 그 말이지?”
세현이 전심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는 반면, 델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엑스칼리버를 한 손으로 휘두르며 모든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세현이 간혹 소환수들이나 탐식 구더기, 여러 다른 관리인들의 권능이나 스킬을 활용해 페이크를 넣어도 그 움직임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아…… 하아….”
전투를 시작하기 전, 값비싼 엘릭서와 포션들을 있는 대로 들이붓고 왔음에도 육체와 정신의 피로도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누적된 상태였다.
“벌써 지친 거야?”
델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세현은 소환수와의 캐슬링을 통해 시간을 최대한 벌었지만, 소환수 또한 얼마 가지 못해 모두 제거됐다.
그리고 결국-
푸우욱!
델이 들고 있는 엑스칼리버에 세현의 몸뚱이가 꿰뚫렸다.
아발론이 재빠르게 회복함과 동시에 시간의 왕을 이용해 육체의 시간을 되돌렸다. 델은 그것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성령개방을 사용했다.
“흐음,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볼까?”
“끄으으으으으!!!”
전신이 타오르는 고통에 세현이 비명을 내질렀다. 델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마녀 같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아하하하! 감미로운 비명 소리야!”
그녀가 내뿜는 성령의 빛은 점차 강해지며, 육체의 재생속도가 어느 순간부터 파괴되는 속도를 못했다.
세현의 몸은 잔뜩 달아오른 용광로처럼 빛을 뿜으며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아직…… 아직 안 끝났다.”
한 줄기 최후의 의식마저 끊어질 듯한 절망적인 상황. 이 와중에도 세현은 마지막 가능성을 찾았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집어삼킬 정도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며 엑스칼리버를 천천히 잡았다. 그리고 손을 덜덜 떨며 그것을 델의 가슴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발악하는 거야? 이렇게 질척이는 건 싫은데.”
그녀는 세현의 검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흔쾌히 가슴을 내어 주었다. 엑스칼리버가 그녀의 등을 꿰뚫고 지나가도, 세현이 성령개방을 이용해 빛을 내뿜어도 표정하나 미동이 없을 정도였다.
세현이 원하던 그림은 자신의 괴물 같은 재생 능력을 이용한 치킨 게임이었는데, 그마저도 통하지 않을 듯했다. 미칠 듯이 힘을 추구해 왔음에도 ‘두 의지’라는 존재와 자신이 가진 힘의 격차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죽음을 직감한 세현의 최후의 포효가 허공으로 뿜어졌다.
검게 산화된 피부가 흙조각처럼 후두둑 떨어지며,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시간을 되돌려도, 아발론이 녹색 빛을 내뿜으며 미친 듯 몸을 재생시켜도 죽음의 순간은 시시각각 세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용감한 왕’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당신은 ‘바이브 카흐’와 같은 신격에게 대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마스터키가 세현에게 사념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직후, 세현의 공격에 미동조차 하지 않던 델에게 어떤 징후가 보였다.
“이, 이게 뭐야?”
그녀의 코와 입술, 칼에 꿰뚫린 상처 부위에서 인간과 똑같은 붉은 피가 주륵 쏟아졌다. 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발걸음을 뒤로 물렀다.
“어딜 가.”
세현은 다 타 버린 입으로 쇳소리를 뱉으며, 한 팔을 뻗어 델의 팔을 붙잡았다. 흰 살결에 검은 자국이 크게 남았고, 델은 이에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뿌리치려 했다.
그녀의 팔이 들어 올려지고, 자세가 흐트러지는 그 찰나의 순간.
세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가며 델을 힘껏 밀쳤다.
그녀의 몸이 뒤로 고꾸라지는 와중, 세현은 양 어깨를 강하게 눌러 아래로 처박았다. 또한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이빨을 곧장 그녀의 목으로 가져가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콰드드득-!
그 모습은 인간이라 보기 힘든, 괴물 같은 흉포함이 뚝뚝 묻어났다.
[‘그림자 왕’의 깊은 원한이 상대의 힘을 무력화시킵니다.]
세현의 등 뒤로 달마시안을 꼭 닮은, 검은 실루엣의 괴물이 붉은 눈을 흉흉하게 치켜뜨고 델을 내려다봤다.
“꺄아아아악! 렌! 레에엔! 살려 줘!!”
델의 목에서 피가 쏟아진다. 그녀는 이 상황을 타개하려 여러 가지 제스처를 취해 봤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런 권능도 스킬도 발동되지 않았다. 절대로 파괴되지 않을 불사의 육체도 힘을 잃고, 으깨지고 으스러졌다.
세현의 등 뒤에 스멀스멀 피어난 악귀 같은 형체가 그녀를 함께 물어뜯었다.
“레에에엔!!”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관중석에 앉아 있는 검은 날개의 여신 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델의 죽어 가는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델, 나는 네가 한 계약 때문에 이 싸움에 개입은 불가능해.”
세현이 맺은 델과의 계약.
이것은 신격의 존재와 맺은 것이기에 동격인 ‘렌’으로서는 일방적으로 해제할 수 없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렌이 싸움에 개입한다면,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인과율의 에너지가 폭주하며 본인 스스로의 존재가 붕괴하게 될 것이다. 두 의지 모두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이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하고 맺은 계약, 그 계약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크어어어어어어!!!”
세현의 이빨이 결국엔 그녀의 목을 완전히 끝내 버렸다.
마치 맹수에게 물려 죽기라도 한 듯, 그녀의 완벽에 가까웠던 몸뚱이는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축하합니다! 신화 퀘스트, 창조주와의 대결을 클리어했습니다!]
[의지, ‘델’의 힘을 흡수합니다.]
그녀의 가슴 편에서 흰 아우라가 스멀스멀 일어났고, 그 기운은 새까맣게 타 버린 세현의 전신으로 빠르게 스며들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고 있었다.
“허억… 허억…….”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세현이 자신에 몸에 꽂힌 엑스칼리버와 델의 몸에 박힌 엑스칼리버를 뽑아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그리고 관중석에 앉아 있던 검은 옷의 의지, 렌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엔 네 차례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군.”
렌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눈시울을 훔쳤다. 아마도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리라. 그러곤 손에서 보라색 구체를 작게 소환해 민들레꽃으로 날렸다.
천천히 하늘하늘 날아간 구체가 꽃의 기둥에 닿는 순간, 그 전체로 보라색 빛이 삽시간에 퍼지더니 민들레가 폭발해 버렸다.
쿠구구구구구!
그 빛은 이 콜로세움을 지지하고 있는 아파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파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땅 아래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허세현… 이라고 했나, 언젠간 또 만나자고.”
“누구 마음대로!”
세현이 다이달로스의 날개를 펼쳐 그녀에게 달려들어 두 자루의 엑스칼리버를 빠르게 내질렀다.
촤하학-!
그 순간, 그녀의 몸뚱이가 연기가 되어 흩어지더니 세현의 머릿속에 한마디 사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땐 내가 델의 복수를 해 줄 테니까.>
아주 차갑고, 살의가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젠장.”
세현은 무너져 내리는 아파트를 허망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 † †
[속보입니다! 한국 DMZ 지역에 세워져 있는 아파트가 2시간 전, 갑자기 붕괴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여러 국가가 미사일과 폭약 등을 동원해 파괴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가 불가능했던 아파트가 어떤 이유로 붕괴된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남한, 북한 양국의 조사단이 현재 파견된 상태입니다.]
[전문가들은 오늘 ‘서큐버스 군단’ 길드가 진입한 것이 아파트 붕괴의 제일 주요한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허세현 입주자는 아파트를 만든 ‘두 의지’가 지구에서 추방됐으며, 드디어 아파트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 선언했습니다.]
그날 인류는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여태 자신들의 운명을 농락했던 존재들의 완벽한 소멸, 그것은 그들이 살아오며 느꼈던 환희와 일체감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 줬다.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삶, 이것은 많은 생명에게 수많은 다른 가능성을 선물할 것이다.
[오늘 오후 6시, 허세현 입주자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직접 아파트를 만들 것이라 공표했습니다. 이는 지속적으로 입주자들을 육성해 앞으로 지구에 아파트 사태 같은 사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밝혔으며…….]
모두가 평화의 축제를 즐기는 와중에도, 세현은 무언가와 싸우기 위한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진짜 위험은 저 위에 있다.’
델의 힘을 흡수함과 동시에 그녀의 지식이 머리에 자연스레 각인됐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세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얼마나 광오하고 넓고,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는 이른바 ‘의지’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델과 렌’처럼 여러 별을 이동하며 자신의 뜻대로 우주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들이 언젠가는 이곳을 찾아올 것을 알기에, 그때를 대비해 인류가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미리 학습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저는 신과 싸워 이겼고, 신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세현의 힘과 권능을 목도한 후 모든 경고와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이제는 대다수의 인류가 외부 세계에 수많은 생명과 ‘의지’라는 존재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언제고 ‘아파트’ 때처럼 자신들의 세계를 침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현의 이런 한 마디 한 마디는 자연스레 말씀이 되었고, 모든 종교의 자리를 대체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무지하다 할지라도, 살아 있는 신을 본 이상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존재에게 믿음을 보낼 필요가 없다 생각한 것이리라. 세현은 지구를 대표하는 대표자이자, 신 그 자체가 된 최초이자 마지막 인간이었다.
사건은 역사가 되었고, 역사는 빠르게 신화가 되었다.
그와 함께했던 15명의 인물들은 ‘15사도’라 칭해졌고, 그중 사카린이 최고의 사도로 여겨졌다. 세현이 아파트를 붕괴시키기까지의 이야기는 마치 역사소설처럼 적혀져 서점에 깔렸고, 많은 사람들의 가정집에 인테리어 소품처럼 보급되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허세현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늙지도 병들지도 않았지만, 세상은 진보와 퇴화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내전과 학살, 혐오와 반목은 여전히 넘쳐 났지만, 세현은 이러한 인간 세상의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한 사람의 자연인처럼 살아갔다.
누군가 이를 보면 그를 냉혹한 신이라 비판할 테지만, 여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세현은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휘말려 제멋대로의 인생을 살았다. 그렇기에 자신 또한 타인의 인생과 운명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건 바로 다른 ‘의지’가 지구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 것.
누군가의 운명이 타인의 손에 제멋대로 놀아나지 않도록 맞서 싸우는 것이 힘을 가진 자들의 책무라 생각했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우주에서 여러 존재들이 지구로 흘러들어 왔고, 세현과 그의 동료들은 많은 싸움을 반복하며 이 거대한 공동체의 운명을 그때마다 지켜 냈다. 서큐버스 군단의 의지는 여전히 굳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