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복수자의 기억
<아, 아하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요?>
길드원들이 서 있는 반대편, 원래대로 복원된 플래닛 트리의 아래에 커플러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정원사들과 헬시안 무리가 있었지만, 그들 또한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했는지 조금 전과 같은 투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세현은 엑스칼리버를 붙잡고, 성령개방을 사용했다.
“길드장, 시간 5분만 끌어요. 이번에야 말로 확실히 끝낼 수 있으니까.”
“오케이.”
사카린과 길드원들이 전투태세를 취하자, 관리인들이 동시에 앞으로 내달리며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전력 자체는 서큐버스 군단 쪽이 미세하게 앞서는 상태. 관리인의 검은 세현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끝이다.”
필요한 만큼 에너지를 모았다 생각한 세현이 검을 위로 들어 아래로 힘차게 내리쳤다.
쿠와아앙-!
노란빛의 반월 형태의 참격이 플래닛 트리를 향해 정확히 쇄도해 들어갔다. 커플러는 멍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 볼 뿐,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날 운명이었군.>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참격이 그의 몸을 게걸스레 집어삼켰고, 플래닛 트리가 폭발을 일으켰다.
이후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커플러를 잃은 관리인들은, 서큐버스 군단과 세현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고 그들의 크리스탈은 모두 회수됐다.
‘커플러…… 이게 그놈의 크리스탈인가.’
플래닛 트리의 잔해를 뒤적이던 세현은, 그 가운데서 검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흉흉한 크리스탈 하나를 주워들었다.
[#. 커플러의 크리스탈]
- 그림자의 왕, 커플러의 정수. 그의 본체이자 모든 힘이 여기에 담겨 있다.
등급: 신화(SSS)
레벨 제한: 없음.
▶ 추가 능력
- 그림자의 왕(액티브): 커플러의 그림자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왕의 기억(패시브): 커플러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 총지배인(패시브): 아파트의 모든 권한을 얻게 됩니다.
세현은 커플러의 크리스탈을 손아귀에 올려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것을 손으로 으깨 버렸다.
[커플러의 크리스탈을 흡수합니다. 권능 ‘그림자의 왕’.]
[총지배인의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은 아파트 시스템의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왕의 기억을 보게 됩니다!]
[메모리얼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ES / NO]
그러자 메시지 출력과 함께 여러 개의 팝업이 출력됐다. 마지막 팝업을 보는 순간, 세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커플러의 메모리얼 던전이라.’
모두를 농락하고, 아파트를 제멋대로 뒤흔든 관리인 커플러.
이는 그의 기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세현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YES] 버튼을 터치했다.
잠시 후-.
[‘커플러’의 메모리얼 던전에 입장합니다!]
메시지가 출력됨과 동시에 세현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지구와 꼭 닮았지만, 커플러와 같은 수인족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느 별이 있었다. 그곳에 ‘두 의지’라 불리는 신들이 찾아와 아파트를 건설했다.
많은 수인들이 재앙을 막기 위해, 또는 자신의 돈과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아파트를 올랐다.
많은 수인이 죽었고, 많은 희생이 있었다.
아파트를 돌파하면 돌파할수록 죽어 가는 입주자들의 숫자는 늘어 갔지만, 공략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공략을 멈춘다는 건 곧, 멸망을 의미하니까.
이 세계에 아파트가 세워진 지 꼭 17년째가 되는 해-.
최초로 100층을 점령한 입주자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커플러’, 20세의 입주자가 된 젊은 수인은 37세의 중년이 되어서 아파트를 정복하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
S급 클래스의 입주자였던 그는, 두 의지에게 ‘그림자 왕’이라는 권능을 하사받고 아파트의 관리인 중 한 명으로 스카우트된다. 모든 게 일단락됐다 생각한 그 순간, 두 의지의 변덕이 커플러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번 별은 너무 빨리 클리어됐는데? 너~무 시시해, 조금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고 싶다구. 안 그래 렌?>>
<<그러면 아파트와 이 세계를 연결해 버리지. 수인들과 아파트의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싸우게 될 거야.>>
<<우와, 그거 엄청 엄청 재미있겠는 걸?>>
두 의지는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 단지 ‘재미있겠다’라는 이유로 아파트와 세계를 이어 버렸다. 수많은 수인이 죽었고, 아파트의 공략에 거의 모든 입주자들을 쏟아부었던 커플러의 세계는 채 20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커플러는 가족과 동료들이 무기력하게 죽어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관리자니까, 관리자는 두 의지의 뜻에 절대복종하며 아파트를 지켜야 하는 존재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것 따윈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간, 언젠가는 이 원한을 풀겠다.’
커플러는 예리하게 벼려진 복수심을 가슴속에 묻어 둔 채, 두 의지를 따라 우주를 여행했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가 세워지고, 세계가 쇄락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았다.
두 의지는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켰고, 그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았다. 커플러는 힘을 길러 언젠간 그들을 죽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격과 계약을 통해 권능을 가진 ‘관리인’들에게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는 힘 따윈 없었다.
두 의지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찾을수록, 커플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무기력감에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렇게 커플러가 아파트에 들어온 후,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새로 도착한 행성인 ‘지구’라는 곳에 97번째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커플러를 비롯한 관리인들은 이곳의 신화들과 이야기들을 조사했다.
그러던 중, 커플러는 ‘아서왕 신화’의 내용에서 한 이야기를 찾게 됐다.
‘바이브 카흐’라는 존재들, 그들의 모습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두 의지들과 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서왕’이라는 자가 그들과 싸웠으며, 그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거다.’
커플러는 그의 힘이야말로 ‘두 의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생각했다. 그는 아파트의 클래스 설계에 참여해 그 사이에 ‘아서왕’의 능력을 집어넣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회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50층의 관리장 ‘크로노스’의 힘 때문에 우연히 아서왕의 힘을 얻은 입주자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허세현’.
커플러는 그가 아서왕의 진정한 힘을 깨워 낼 수 있도록 도왔다. 다른 관리인들의 허세현을 방해하려 들면 그들을 죽이고, 특유의 눈치와 기가 막힌 정무 감각으로 두 의지에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권력을 쟁취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두 의지에게 자신의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냈다. ‘내가 당신들을 죽이겠노라.’라고 말이다.
커플러의 이런 뜻을 하찮게 여긴 것인지, 아니면 재미있는 것에 미친 두 의지의 변덕인지 그녀들은 자신들을 죽이겠다 선언한 커플러에게 도리어 힘을 쥐어 줬다.
그는 스스로의 힘과 영향력을 계속 키워 가며 허세현이라는 열매가 익기를 기다렸다.
커플러는 허세현이 모든 관리인들의 힘을 가져오면, 이를 한 번에 싹 쓸어 담은 후 두 의지에게 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허세현은 쉽게 삼킬 수 있는 열매가 아니었다.
플래닛 트리 룸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서 커플러는 무참히 패배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자신의 이러한 기억과 두 의지를 향한 증오를 크리스탈에 새겨 넣었다.
자신의 힘을 흡수한 누군가가 자신의 복수를 대신해 주길 바라며 말이다.
[‘커플러’의 메모리얼 던전을 종료합니다.]
† † †
‘이거 기분 더럽군.’
메모리얼 던전을 통해 커플러의 기억을 확인한 세현의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더러웠다.
결국 커플러조차 ‘두 의지’의 손에 놀아난 존재이며, 그 또한 세현과 비슷한 동기로 복수를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허세현,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그때 사카린이 질문을 던졌다.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
“집으로 돌아가요. 나는 할 일이 조금 더 있을 것 같으니까”
“무슨 헛소리냐, 우리도 같이 가야지.”
세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승강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길드원 전체가 세현을 따랐지만, 승강의 방으로 들어서기 전 붉은 장막이 그녀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오직 세현만이 승강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길드원들이 세현을 향해 무언가를 애원하듯 소리쳤지만 세현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 정상으로 이동합니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에도, 메시지가 출력되며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세현은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게 그 망할 놈의 아파트 정상이군.”
콜로세움 같은 형태의 원형경기장, 그 한가운데에 한눈에 들어오지 조차 않는 거대한 민들레가 위로 솟구쳐 있었다.
상공의 검은 구름은 둥글게 회전하며 붉은 번개를 내뿜으며 세기말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세현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 풍경을 관찰하고 있는 도중, 멀리서 두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와아, 이건 정말 예상 못한 결말인데? 안 그래, 렌?”
“솔직히 인정할게, 나도 전혀 예측 못 했어. 커플러가 최후의 도전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민들레의 아래 부근, 각각 흰색,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두 명의 의지가 허세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저것들이란 말이지.’
세현은 아무런 징후도 없이 발을 박차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아아, 성격도 급하지.”
지척까지 다가간 순간, 세현의 몸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그녀들은 그런 세현의 꼴이 재미있다는 듯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허세현이라고 했나? 우리가 누군지는 알지?”
“…….”
“원래는 커플러가 너를 쓰러뜨리고 여길 오기로 했거든. 그리고 나랑 1:1 대결을 하려고 했었어,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대했는데 너 때문에 좀 김이 빠져 버렸지 뭐야.”
두 의지 중, 흰색 옷에 검은 날개를 가진 ‘델’이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커플러 대신 나랑 싸워 줘야겠어.”
그 순간, 몸이 얼어붙은 세현의 눈앞에 팝업 하나가 출력됐다.
[#. 신화 퀘스트 / 창조주와의 대결 ]
- 창조주와 커플러가 하기로 했던 대결이 무산됐다.
당신은 커플러 대신 이 싸움에 참여해 그들에게 재미를 선사해야 한다.
- 계약자 ‘허세현’과 싸우는 것은 ‘델’이며, ‘렌’은 이 전투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 상대를 이기면 모든 힘을 흡수하게 된다.
“어때, 끝내 주는 조건이지? 정말 재미있겠지? 네가 나를 이기면 무려 신격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델은 재미있다는 듯 히죽 웃어 보였다. 세현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조건을 내밀고는 ‘재미있겠다’라고 표현하는 그녀에게서 묘한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수락한다.’
마음속으로 긍정의 뜻을 보내자 얼었던 몸이 볼품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세현은 몸에 잔뜩 묻은 먼지들을 털어 대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잘 싸워 델, 나는 그럼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을게.”
“응응!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
“절대 죽지 마, 그러면 나 슬퍼서 자살할지도 모른다구.”
“잉잉~ 내가 렌을 두고 어떻게 죽어.”
약간 맛이 간 듯한 대화를 나누더니 검은 옷의 의지 ‘렌’이 콜로세움의 관중석으로 가볍게 날아가 자리에 앉았다.
“좋아, 준비는 끝났고… 이제 슬슬 재미 좀 봐야지.”
델이 손을 펼치자, 그 위에서 빛이 뿜어지며 검 하나가 소환됐다. 허세현의 것과 똑같은, 엑스칼리버였다.
그녀의 도발에 세현은 이를 악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