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화.
그의 목적
<커거거거거거걱!!!>
커플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쩌어어억-!
세현은 그대로 검신을 놈의 몸 쪽으로 찍어 누르며 몸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냈다.
마치 장작이 갈라지듯 반 토막이 난 놈의 몸뚱이가 푸른 피와 함께, 수십 개의 크리스탈을 그 안에서 토해 냈다.
“하아…… 하아…… 이런 개자식…….”
세현의 눈에서 그동안 참아 왔던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허무한 감정이 머리를 스치운다.
근 10년간, 싸움 속에서 살아온 삶의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볼품없이 갈라진 커플러의 몸뚱이뿐이다.
그때였다.
<얼레리 꼴레리, 우는 겁니까용, 허세현 군!>
반쪽 난 커플러의 몸뚱이가 버둥거렸다. 그 순간, 세현의 의식이 가속하며 커플러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다.
그 찰나의 순간, 세현은 놈이 손을 튕겨 몸뚱이를 재생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곧장 발꿈치를 아래로 내리쳐 놈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막았다.
<바~보, 반대편 손도 있지롱.>
그때, 시야의 바깥쪽에서 ‘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반쪽이 나 있는 커플러의 시체가 세현이 몸을 튕겨 내더니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재생했다.
완전히 부활한 커플러는 싱긋 웃으며 세현을 응시했다.
<오홍홍홍, 멋진 기습이었네용. 하지만 뭐~ 결과가 아쉽게 됐네용.>
놈은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모습이었다.
<세현 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제 시간 정지 능력에서 벗어난 건 아~까 전부터 알고 있었다구용.>
“……역시 그랬냐? 너는 참 끝까지 개새끼다.”
<매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개니까용>
세현은 더 이상 답하지 않고, 탐식 구더기를 흩뿌렸다.
구더기들은 넓게 흩어진 후 동시에 커플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는데, 그 모습이 피라냐떼처럼 흉포했다.
커플러가 다시 손가락을 튕긴 후 세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상이 푸른빛으로 물들고 세현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이 정도면 싸울 만하다.’
몸은 무거웠지만 움직일 수 있다.
세현은 놈이 도끼를 휘두르는 순간, 상체를 숙이며 안으로 파고들며 발을 뻗어 명치를 걷어찼다. 놈의 몸뚱이가 뒤로 밀려나는 사이, 손가락 튕겨 소환수들을 전부 소환시켰다. 그러곤 곧장, 퀸에게 달려들어 ‘작위 수여’를 발동시켜 힘을 흡수했다.
<오홍홍홍, 허세현 군의 전투 방식은 항상 기발하군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캐슬링을 이용해 놈의 배후에 서 있던 ‘화이트 룩’과 위치를 교체한 후, 검을 내뻗었다. 그 위치가 아주 절묘해서 커플러가 반응했을 때, 이미 검날은 놈의 어깨를 파고들어 잘라 내고 있었다.
<오홍홍 아파용!>
커플러가 웃으며 남은 팔을 튕기려 하자 세현은 발로 남은 손을 걷어차 손가락을 그대로 으깨 버렸다.
놈이 재생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죽어.”
세현은 다시 한 번 엑스칼리버를 가로로 갈랐다.
놈의 상하체가 분리되며 푸른 피와 함께 내장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커플러는 여전히 간사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싫어용.>
놈이 이번엔 이빨을 위 아래로 세게 부딪히며 ‘딱’ 소리를 내자, 시간이 다시 역행했다. 세현은 그것을 쫓아 다시 베어 냈다.
‘천 번, 만 번도 죽여주마.’
시간 역행으로 재생하는 속도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탐식 구더기들도 소환해 커플러의 시체를 물어뜯기 시작했고 소환수들도 이 공세에 참여했다.
단순히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존재 그 자체를 없었던 걸로 만들려는 듯한 처절함이 묻어나는 공격이었다.
<우히히히! 우히히히히!!!>
놈의 시체가 갈가리 찢겨지며 몸속의 크리스탈이 쏟아질 때마다 세현은 그것을 손으로 붙잡아 으깨며, 힘을 흡수했다.
이중 크로노스의 크리스탈을 빼앗을 수 있다면, 그래서 시간 역행의 사용이 불가능해진다면 놈의 패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작위 수여’가 해제됩니다.]
“허억…… 허억… 허억…….”
<오홍홍, 이제 슬슬 지친 느낌인데용 세현 군?>
세현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거의 모든 크리스탈을 파괴, 흡수했음에도 커플러는 죽지 않고 계속 재생했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놈은 자신이 절대 죽을 리 없다는 듯 확신에 차 있었고 세현은 스스로의 힘에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제 차례입니당!>
커플러가 헬시안의 보구를 들고 마구잡이로 휘둘러 온다.
그때마다 놈의 몸이 늘어났다 줄었다 하며, 시간 역행을 이용해 세현의 타이밍을 빼앗으며 몸의 상처를 늘려 갔다. 탐식 구더기도, 소환수들도 하나둘씩 놈의 공격에 휘말리며 사라졌고 전투의 주도권은 점차 커플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젠장…… 대체 어떻게 해야 쓰러뜨릴 수 있는 거야!’
계속 생각했다. 어떻게 몸속의 크리스탈을 모두 제거했음에도 놈이 살아 있는지, 놈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이 최악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지 말이다.
세현은 놈이 퍼붓는 공격을 무의식 속에서 계속 받아 내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을 계속 찾으려 노력했다.
‘혹시……. 그런 건가?’
그러던 중, 세현의 머리를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왜 놈이 이 장소를 무대로 선택했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플래닛 트리 룸’ 이곳은 아파트의 전체에 동력을 제공하는 코어이자, 입주자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세현이 관리자의 입장이라면, 절대로 이런 곳을 전장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으아아아아!”
세현은 탐식 구더기를 다시 한 번 소환했다. 수백 마리의 탐식 구더기가 커플러에게 달려들었고 놈을 잠시나마 떨쳐 낼 수 있었다.
<이런 건 소용없다니까요.>
커플러는 가소롭다는 듯, 도끼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탐식 구더기들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이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1초, 이 시간은 세현에게 충분한 타이밍을 만들어 줬다. 세현은 발을 박차고, 스파크를 일으키며 그 힘으로 힘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다이달로스의 날개가 바람을 뿜어내며 총알과 같은 속도로 육체가 가속하며 플래닛 트리를 향해 내달렸다. 그사이, 성령개방을 사용해 검신이 노란 빛이 응축되고 있었다. 세현은 이것으로 플래닛 트리를 박살 낼 생각이었다.
<세현 군은 역시 눈치가 좋아용. 하지만 플래닛 트리를 공격하는 건 제가 좀 곤란해용.>
그때, 등 뒤에서 커플러의 음성이 들리더니 세현의 몸이 공중에서 멈췄다. 약 1m만 더 나아가면 플래닛 트리에 엑스칼리버를 박아 넣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간격이었다.
“끄으으으으으으!!!!”
저 멀리 서 있는 커플러가 팔을 뻗어 푸른빛의 쇠사슬을 세현의 몸에 옭아맸다. 이것은 놈이 가진 ‘시간 제어’ 능력을 가시화시킨 것으로, 여태 사용한 시간 제어 능력이 공간 전체를 제어한 것에 반해 능력을 한 점에 집중시켰기에 훨씬 그 위력이 강했다.
세현은 안간힘을 쓰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태엽을 거꾸로 감듯이 천천히 몸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홍홍, 저랑 계속 놀자고용.>
커플러가 곧장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곤 세현의 그림자에 숨었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하며 호흡을 흩트리는 것으로 전투를 점점 난전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자신은 시간을 통해 육체를 재생시킬 수 있기에 이런 전략을 선택한 것이리라.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나무에 검을 한 번만 휘두르면, 재수 없는 달마시안의 얼굴을 영원히 뭉개 버릴 수 있는데 그 마지막 한 뼘이 닿지 못했다.
“아아아악!!”
세현은 자신이 흡수해 왔던 관리인들의 권능을 총동원했다. 싸움을 이어가며 커플러의 몸을 베어 내고, 파괴하고, 으깨 버렸다. 놈이 계속 되살아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플래닛 트리를 향해 내달렸고, 커플러가 시간을 되돌리는 도돌이표가 계속됐다.
‘젠장…… 젠장…….’
점점 의식과 시야가 흐릿해져 갔고, 무한에 가깝다 생각했던 체력에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사선의 왕’이 쉴 새 없이 발동되며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 의식이 둥둥 떠다니다 못해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시간은 점점 더 아득하게 느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커플러가 시간 정지의 능력을 사용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장면 속에서 커플러는 물론이고, 세현조차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머릿속에 사념이 들려왔다.
[무능한 놈, 저따위 놈조차 죽이지 못하는 거냐.]
과거의 자신이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자신을 과거로 인도했으며 몸에 오랜 시간을 기생해 왔던 한 관리장의 목소리였다.
‘남이사, 너도 저놈한테 죽었잖아.’
세현은 자신에게 악담을 퍼붓는 존재에게 퉁명스레 속으로 대꾸했다. 그 존재는 세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힘을 빌려주지, 네 손으로 커플러를 죽여라.]
[한때 ‘시간의 왕’이었던 ‘사선의 왕’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냅니다. 아주 잠시지만, 당신의 시간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 메시지를 듣는 순간, 세현의 외침과 함께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엑스칼리버를 붙잡고 커플러의 명치를 발로 걷어 찬 후, 뒤도 돌아볼 것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안 된다니까용!!>
커플러가 곧장 푸른빛의 사슬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이 몸을 칭칭 감쌌음에도 세현의 몸은 멈추지 않고 플래닛 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커플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죵!>
“뒤져 이 새끼야아아아아아!!!”
엑스칼리버가 그대로 플래닛 트리에 처박혔고, 성령개방의 힘으로 노란빛이 뿜어져 그대로 안으로 흘러들었다.
커플러가 뒤늦게 세현에게 달려들어 등에 도끼를 내리찍었지만, 이미 플래닛 트리의 껍데기에는 노란빛을 뿜는 선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적-!
노란 선들이 나무 퍼져 나가며,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들이 나무 전체에 완전히 퍼졌을 때.
퍼어엉-!
플래닛 트리의 중심부가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이 부서졌다. 온 사방으로 나뭇잎과 나무 덩어리가 흩어졌고, 연기가 홀 전체에 자욱이 퍼졌다.
‘아직 안 끝났다.’
세현은 본능적으로 연기 사이에서 퍼지는 희미한 빛을 포착했다. 곧장 그것을 향해 흩어지는 나무를 타고 공중으로 내달렸다. 등 뒤에 박힌 도끼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도무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지만 승리를 향한 집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멈춰!! 멈춰 허세현!!>
세현이 빛과 가까워질수록 커플러의 목소리가 다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승리의 길이라는 느낌이 점점 더 확신에 가까워진다.
‘저거다!’
시야에 두 개의 크리스탈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크로노스의 몸에서 빠져나온 크리스탈이었고, 아마 나머지 하나는 커플러의 것일 터였다.
‘크로노스의 크리스탈 먼저!’
세현은 곧장 크로노스의 크리스탈을 붙잡아 흡수해 버렸다.
[‘크로노스의 크리스탈’을 흡수했습니다. 권능 ‘시간의 왕’이 개방됩니다!!!]
<으아아아아아아!!!>
뒤에서 아가리를 흉측하게 벌리고 달려드는 커플러의 모습이 보였다. 세현은 씨익 입 꼬리를 올렸다.
“게임 오버다. 이 개새끼야.”
그를 농락하듯,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공간 전체의 시간 역행이 시작됐고, 주변의 풍경이 쉴 새 없이 변이했다.
“뭐, 뭐야 이건? 나 분명 죽었었는데.”
“허세현 네가 해낸 거냐?”
“주군! 해내셨군요!”
잠시 후, 플래닛 트리 홀에는 서큐버스 군단 길드원 전체가 다 함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