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화.
총 지배인
그러자 커플러는 나무에 걸터앉은 채로 박수를 치며, 입 꼬리를 씨익 올렸다.
<오홍홍! 이게 바로 요즘 트렌드인 빠른 전개군용. 기승전결이 아니라 바로 전~결로 가는 느낌이네용.>
“헛소리 그만하고, 여기서 죽어라.”
세현은 다시 한 번 성령개방을 발동시켰다.
거의 3~4분에 걸쳐 에너지를 모으자 세현의 몸 전체가 작은 태양처럼 보일 정도로 빛을 뿜어내더니 전방으로 그것을 일제히 쏟아 냈다.
<오홍홍홍!>
그 섬광이 플래닛 트리와 커플러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별안간 시간이 아득히 느려지며, 커플러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허세현 군이 연출한 스토리도 좋긴 하지만, 제 마음에 들진 않네용! 이럴 땐 재촬영이 필요한 법이죵.>
그 한 마디와 함께 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뿜어지던 섬광이 뒤로돌아가며 세현의 몸으로 다시 흡수됐다.
이후 시간의 역행이 계속되더니, 무참히 썰어 버렸던 정원사와 헬시안이 멀쩡히 플래닛 트리 위에 되살아나 있었다.
커플러가 시간을 되돌린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죽었을 텐데.>
관리인들은 자신들이 되살아난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지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
콰드드득-!
등 뒤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들의 뒤통수를 파고들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오호호홍!>
커플러의 주둥이가 길게 늘어져서 마치 맹수와 같이 흉악하게 변이됐다. 놈은 그 상태에서 자신이 다시 되살려 낸 관리인들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히이이이이익!!>
<사, 살려 줘!>
그 공포스러운 광명을 본 관리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졌다.
<피곤하니까 얌전히 먹혀 주세용.>
커플러가 박수를 치자 그들의 절대 시간이 거의 10배 가까이 느려졌고, 그들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채 놈의 주둥이에 게걸스럽게 집어 삼켜지고야 말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의식이 끊기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리라. 심지어 서큐버스 군단 길드원들도 그저 커플러가 매우 빠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오직 허세현만이 ‘사선의 왕’의 힘을 이용해 찰나의 시간 속에서 놈이 벌이는 학살극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꺼허억~ 꽤 맛있네요.>
커플러는 모든 관리인을 먹어 치운 후, 자신의 배를 통통 소리가 나게 두드리며 보란 듯이 트림을 해 보였다.
“뭐, 뭐야 저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저런 미친 새끼……”
세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길드원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오호홍, 아~주 기분이 좋네용!>
다른 관리인들을 먹어 치운 커플러의 몸에서 검붉은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압도적인 아우라. 세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시작부터 각성기 전부 때려 박아요. 저놈한테 잔재주 같은 건 일절 안 통할 것 같으니까”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고쳐 잡고, 곧장 각성기를 준비했다.
<오홍홍홍홍!!>
커플러가 헬시안의 무기였던 양손 도끼 ‘헬’을 들고, 광소를 내뿜으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세현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 때려 박아!”
콰과과과과광-!
십여 개의 각성기가 동시에 앞으로 뿜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사슬을 뿜어내는 사카린의 ‘사신물기’, 화염 속성의 정령왕을 소환하는 ‘이프리트’ 등등. 기술 하나하나가 미사일에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스킬들이 커플러를 집어 삼킬 듯 내달렸다.
<어이쿠 위험하네요 위험해용!>
커플러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겨 ‘딱’소리를 냈다. 그러자 놈의 몸을 중심으로 푸른빛이 퍼지더니 이 공간 전체가 푸른색으로 완전히 물들었고, 놈을 제외한 모두의 시간이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씨x 이게 뭐야.’
심해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답답함과 공포가 세현의 전신을 감쌌다. 세현이 있는 이곳은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닌, 완전히 정지한 세계였다. 그나마 ‘사선의 왕’의 권능 때문인지, 세현은 가까스로 커플러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는 것만이 가능했다.
<오홍홍홍홍!!>
커플러는 여유 가득한 얼굴로, 길드원들이 공중으로 뿜어낸 각성기들을 유유히 피해 내며 사뿐히 지상에 착지했다.
그러곤 헬시안의 도끼를 양팔로 붙잡고 가장 앞쪽에 서 있는 길드원의 목으로 천천히 밀었다. 세현은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직후였다.
콰드드득-!
[‘원탁의 기사’ 중 ‘블랙 폰’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뭐, 뭐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길드원 하나의 목이 잘려 나갔다. 길드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냐암~>
커플러는 즐겁다는 듯 히죽이며 바닥에 떨어진 길드원의 머리통과 몸뚱이를 입안으로 밀어 넣고 우물댔다.
<인간고기는 처음인데, 이것도 나름 각별한 맛이 있네용.>
“고, 공격해!”
멍하니 있던 사카린이 가까스로 정신 줄을 붙잡고 두 개의 사슬낫을 날렸다. 그러자 커플러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푸른빛이 다시 퍼지며 모두의 시간이 또 멈췄다.
‘이런 미친!!’
세현은 속에서 광기 가득한 분노를 토해 내며 몸을 움직이려 해 봤다. 하지만 멈춘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놈을 눈으로 겨우 쫓는 것이 전부였다.
콰드득-!
[‘원탁의 기사’ 중 ‘화이트 폰’의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콰드득-!
[‘원탁의 기사’ 중 ‘화이트 룩’의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콰드드득-!
[‘원탁의 기사’ 중 ‘블랙 나이츠’의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이후로도 이 상황은 계속 반복됐다.
시간이 멈출 때마다 길드원들이 하나씩 죽어 갔고, 커플러는 그녀들의 몸뚱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만해 이 개새끼야!!!”
죽음이 전염병처럼 번져 나가던 중, 잠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를 때 세현은 커플러를 향해 분노 가득한 외침을 쏟아 냈다. 그러자 놈은 씨익 웃으며, 세이메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것일까, 세이메이는 세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뭔가를 말하려는지 입을 열렸다.
“주군! 부디….”
그녀가 한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커플러가 다시 한 번 시간을 멈췄다.
콰드득-!
[‘원탁의 기사’ 중 ‘블랙 비숍’의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으아아아아아!’
세이메이의 몸통이, 놈의 흉측한 이빨 앞에 갈가리 찢겨지고 있었다. 세현은 마음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 참을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용감한 왕’ 권능이 당신의 분노와 공명합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사념이 들려오며 세현의 몸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온몸이 쇠사슬에 칭칭 감긴듯, 거의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여전했지만 세현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끄으으으으!”
처음으로 세현의 외침이 푸른 공간 안에서 입 밖으로 작게 튀어나왔다.
커플러는 아직 이 현상을 캐치하지 못한 것인지 신난 얼굴로 입을 우물대고 있었다. 잠시 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츄우우우우!!!!”
“세, 세이메이 씨!”
세이메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에D츄와 백설희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질렀다. 길드원 전체가 다시 커플러를 향해 움직였지만, 놈은 가소롭다는 듯 히죽 웃으며 아슬아슬한 순간에 손으로 ‘딱’ 하는 소리를 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상대를 가지고 노는 최악의 기만이었다.
<오홍홍홍홍!!! 다음은 저 쥐새끼가 맛있겠는 걸~!>
시간이 멈춘 세상 속에서, 커플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에D츄를 향해 달리며 그 추악한 아가리를 벌렸다.
콰드드득-!
에D츄의 흰 털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고, 놈은 으적으적 이빨로 몸뚱이를 으깨며 목구멍으로 고깃덩이가 된 에D츄를 천천히 집어삼켰다.
[‘원탁의 기사’중 ‘화이트 룩’의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용감한 왕’ 권능이 당신의 분노와 더욱 강하게 공명합니다. 당신은 절대자의 권능을 깰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됩니다.]
세현의 머릿속에 사념이 다시 연속적으로 들려온다. 조금 전보다 몸이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에D츄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며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세현은 이를 꽉 깨물고 분노를 속으로 집어삼켰다.
다시 또 시간이 흐른다.
어느덧, 세현을 제외하고 남은 길드원은 둘뿐이었다.
“세현 씨, 좋아해…….”
잠시 시간이 흐르는 사이, 백설희가 싱긋 웃으며 세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그녀의 말 또한, 완성되지 못했다.
콰드드득-!
[‘원탁의 기사’중 ‘화이트 비숍’의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용감한 왕’ 권능이 곧 완전히 개화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폭발하는 분노와 슬픔에 비례해, 세현의 몸 또한 커플러의 시간 정지 능력에서 자유를 얻었다.
세현은 커플러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에서 손가락을 작게 까딱거렸다.
‘제대로 움직인다.’
아직 답답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전투 정도는 가능한 수준으로 몸이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다시 푸른 세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다.
이제 남은 것은 사카린뿐, 그녀는 절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살기등등한 얼굴로 커플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개 같은 새끼, 들어 와봐! 제대로 한 방 먹이고 갈 거니까!!”
<홍홍홍!>
커플러는 별 대꾸도 없이 손가락을 튕겨 다시 시간을 정지시킨 후, 사카린에게 뛰어들었다.
콰득-!
사카린의 목이 찢겨지고,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진다. 세현은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신이 함께 찢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원탁의 기사’ 중 ‘퀸’의 계약자가 사망했습니다. 계약이 해제되고, 소환수가 회수됩니다.]
[‘용감한 왕’권능이 완전히 개화합니다. 당신은 능히 신에 맞서 싸울 자격을 갖춘 존재입니다.]
[다른 존재의 권능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합니다.]
다시 사념이 들려왔다.
세현은 이제 자신이 커플러의 권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느꼈음에도, 동료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눈썹 끝에 투명한 액체가 맺힘과 동시에 눈이 붉게 충혈됐다.
<오홍홍, 허세현 군 하나만 남았네용.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죽일 거면 빨리 죽여, 이 개새끼야.”
세현은 엑스칼리버를 바닥에 내리꽂고 양팔을 벌려 보였다. 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자포자기의 태도였다. 커플러는 이런 반응이 아쉽다는 듯, 서운한 표정을 해 보이며 귀를 펄럭였다.
<히이이잉, 클라이막스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면 아쉬운데 말이죵.>
“……”
세현은 놈의 말에 대꾸해 주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호흡을 단정히 가다듬었다.
딱-!
잠시 후, 커플러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전방에서 어떤 존재가 발을 튕기며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세현은 여태 동료들의 죽음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아 왔던 놈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생생한 영상이 머릿속에 재생되며 놈과 자신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아주 작은 차이까지 미세히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이다.’
찰나의 정확한 타이밍, 그 순간에 세현은 머릿속에 그려 놓은 엑스칼리버의 손잡이를 붙잡아 뽑으며 그 움직임을 이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정확히 올려치며 눈을 떴다.
<끄어어어어억!>
눈앞에는, 흉악한 입을 탐욕스레 벌리고 있는 커플러의 모습이 보였다. 놈의 턱 밑으로 엑스칼리버가 파고들어 놈의 머리통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세현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죽어 버려, 이 쓰레기 같은 개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