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화.
화려한 휴가(3)
“사내 커플, 아니 길드 커플 가나요?!”
사카린은 와인병을 한 손으로 들고 병째 들이켰다.
이미 얼굴은 딸기같이 새빨간 것이 취할 대로 취한 듯 보였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세현은 벙찐 얼굴로 사카린을 바라봤다.
“허세혀어어언! 나랑, 나라아아앙!”
‘으아아아!’
사카린이 뭔가의 말을 꺼내려고 하자, 세현의 속에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라아아앙!”
‘그, 그 말만은 제발!’
쿠웅-!
그때, 둔탁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으, 으잉?”
한창 난동을 피우던 사카린이 그대로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쓰러진 것이었다.
깜짝 놀란 허세현이 어깨를 흔들자, 잠시 후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과음을 한 덕분에 정신을 잃은 것이리라.
“후우…… 살았다.”
세현은 이마에 촉촉이 맺힌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렸다.
“세현 씨, 언니 방에 눕혀 주고 오는 건 어때요.”
“그러죠.”
설희의 제안으로, 세현이 사카린을 들쳐 업고 숙소로 향했다.
그러곤 침대 위에 그녀를 휙 던져 놓자 설희가 이불을 조심스럽게 덮어 줬다.
“자, 슬슬 돌아가죠.”
방을 빠져나와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설희가 입을 열었다.
“세현 씨, 잠깐 산책이나 하다가 들어갈래요?”
“네? 뭐 저야 좋죠.”
두 사람은 숙소에서 연결된 해안가로 나섰다.
어둠이 드리운 해변가를 따라 세워진 크고 작은 숙소들은 형형색색의 불빛을 내뿜었고, 해안의 파도와 두 사람의 발소리가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참 세현 씨랑 만난 후로, 즐거운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죠?”
설희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에 세현은 머쓱한 마음에 콧잔등을 긁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위험한 일이 더 많지 않았나.”
“아뇨, 저는 그것도 즐거웠어요. 좀 무책임한 말이지만, 위기가 오면 세현 씨가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거든요.”
“제가 하긴 뭘 해요. 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았지.”
“아뇨, 세현 씨가 없었으면 저는 아마 진작 죽었을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흐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또 잠깐 침묵의 시간이 왔다.
숙소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두 사람에게 닿는 빛은 점점 희미해져서 설희의 모습이 아스라이 보이는 정도가 됐다. 이 섬의 더위 때문인지, 현재의 상황 때문인지 세현은 괜히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세현 씨,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요?”
“네, 넵? 어떤 거요?”
“세현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런 쪽에는 워낙 젬병인 세현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묘한 감정의 정체조차 확실히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웠다.
“어…… 그게…… 어떤 의미로 말을 해야 할지.”
그렇게 한참을 허둥대자, 보다 못한 백설희가 입을 열었다.
“저는 세현 씨가 좋아요.”
“네?”
“세현 씨가 좋다고요.”
“저도 설희씨가 좋죠. 등 뒤를 언제든 믿고 맡길…….”
이에 설희가 단호히 끊으며 치고 들어왔다.
“동료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아무리 눈치를 밥 말아먹은 놈이라도 원숭이가 아닌 이상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
잠시 호흡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자 세현답지 않게 진지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도 설희 씨랑 같은… 생각일 거예요.”
“어떤 생각이요?”
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며칠 후면, 아주 높은 확률로 죽을지도 모르는 전투가 펼쳐진다. 세현은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뱉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이를 꿀꺽 집어삼켰다.
“모든 싸움이 끝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설희는 그의 대답이 시원섭섭하다는 듯, 미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보통 그런 대사를 사망 플래그라고 부르지 않아요?”
“클리셰를 비틀어야죠.”
세현은 장난스레 대꾸하며, 근사한 미소와 함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은 산책에 집중하자고요.”
“좋아요.”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어둠의 해변가를 저벅저벅 다시 걸어 나갔다.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은 마치 우주에서 별을 찾아 헤매는 나그네 같았다.
† † †
“망할.”
아파트의 정문 앞, 서큐버스 군단 길드원 전체가 모여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싸움일지라도 여유 가득했던 그들이지만, 오늘은 이곳에는 긴장감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잠시 후-.
[오홍홍 벌써 시간이 다 됐군용. 그럼 약속대로 에필로그를 시작하겠어용!]
[배우들께서는 정문으로 입장을 부탁드려용!]
아파트의 벽면에 커플러의 얼굴이 떠올라서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놈이 떠벌떠벌 얘기를 끝내자, 아래 놓인 정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더니 그 앞으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데굴데굴 굴러 왔다.
“피해!”
길드원들이 삽시간에 뒤로 몸을 재빨리 물렸다.
그러자 위쪽의 커플러 홀로그램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홍! 너무 겁먹지 마세용 배우 여러분, 방금 전 건 그냥 레~드 카펫을 깔아 드린 거라구용.]
그의 말대로, 아파트 정면에는 영화 시상식에서나 볼 법한 레드 카펫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길드원들은 멍한 얼굴로 카펫을 바라보다 몇 번에 걸쳐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 위로 올라가 정문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긴…….’
레드 카펫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주욱 따라 걷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 높이가 족히 수km는 될 듯한 거대한 원형의 홀, 한가운데로는 거대한 나무가 위로 웅장하게 솟구쳐 있었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제각기 아름다운 빛을 내뿜어 은하수를 작게 축소한 것 같은 나무, 길드원 전체는 이 나무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플래닛 트리…….”
입주자들이 플래닛 트리의 잎사귀로 만든 복권을 통해 처음으로 능력을 부여받고 정식으로 입주자로 거듭나는 장소. 이곳은 ‘플래닛 트리 룸’이었다.
<오홍홍홍, 반가워요 배우 여러분.>
나무 위쪽에서 커플러의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플래닛 트리의 굵은 가지에 걸터앉은 커플러와 그 주변으로 수십 명의 관리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헬시안과 시작의 신전의 수녀들, 그리고 이 플래닛 트리 룸을 지키는 ‘정원사’들로 구성돼 있었다.
<제가 연출한 이야기는 시작과 끝을 이 플래닛 트리 룸에서 하게 됐네요. 오홍홍, 애초에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전형적인 양괄식 구성이 됐어용.>
“지랄하고 있네.”
세현은 그에 대꾸하지 않고, 엑스칼리버를 단단히 붙잡고 성령개방으로 곧장 에너지를 응축시켰다.
리베르를 죽이고 얻은 보구 ‘제우스의 선물’ 덕분에 불과 몇 초 만에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응축됐고, 세현은 이걸 가로로 그어 앞으로 힘차게 쏘아 냈다.
그러자 정원사들이 동시에 보구를 휘둘러 거대한 녹색의 장막을 형성했다.
세현은 그들과 싸워 본 적이 없으나 아파트의 코어 같은 역할을 하는 정원사는 ‘지키는’ 존재들인 만큼, 방어에 특화된 스킬을 가졌으리라 확신했다.
콰아아아아앙-!
그들의 장막 위로 노란 섬광이 쇄도하며 굉음이 공간 전체를 가득 메웠다. 정원사들의 몸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며 장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지만, 결국 성령개방의 섬광은 그것을 뚫어내지 못하고 사그라지고 말았다.
‘방어력이 저 정도라 그 말이지.’
하지만 세현은 아직 여유가 넘쳤다.
도리어 기세등등한 상태로 검을 옆으로 뻗어 붉은 선을 허공에 그어 내 탐식 구더기들을 대량으로 소환했다.
이는 곧장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길드장, 시간 좀 최대한 벌어 봐요.”
“오케이.”
세현은 다시 한 번 성령개방을 준비했다.
이전에는 좀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몇 배의 위력으로 에너지를 날려 보낼 심산이었다.
<막아라!!>
<저 공격을 봉쇄해!>
그 모습을 본 정원사들이 당황했는지 허둥대며 앞으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뒤에 있던 헬시안과 무녀들도 그들을 뒤따랐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탐식 구더기들과 서큐버스 군단이 내뿜는 공격의 십자포화가 그들의 전진을 방해했다.
결국 성령개방의 에너지가 앞으로 다시 한 번 쏘아졌고, 정원사들은 부랴부랴 다시 한 번 장막을 전개했다.
콰드드드득-!
하지만, 이번에는 장막에 금이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임계점에 달한 장막이 ‘퍼엉’하는 소리와 함께 와장창 깨져 버렸고,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섬광이 그들의 몸을 쓰나미처럼 덮쳤다.
<끄아아아아아!!>
관리인의 30%정도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기어코 이 정도까지 힘을 길렀군.>
세현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해골 팔의 미녀 관리인 헬시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그녀의 양팔에는 거대 도끼 ‘헬’이 들려 있었고, 헬은 파직 파직 스파크를 뿜어 대며 내부에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었다.
<흐아아아아!!>
그녀를 포함해 살아남은 관리인들은 세현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전에 바로 달려들었다. 원거리 전투를 하는 것보다 근접해서 백병전을 펼치는 것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리라.
콰앙-!
헬의 묵직한 도끼날에 바닥에 내리치자, 공간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일며 탐식 구더기의 반 정도가 한 번에 육편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로 인해 밀집해 있던 서큐버스 군단의 진영이 빠르게 붕괴됐고, 관리자들은 흩어진 그녀들에게 빠르게 하나씩 붙어 각개전투를 벌였다.
<범상치 않은 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군.>
“이하 동문이야!”
헬시안의 도끼는 자연스럽게 허세현에게로 향했다. 두 존재는 근거리에서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았다. 엑스칼리버의 검날과 헬의 도끼날이 충돌할 때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스파크가 맹렬히 튀어 올랐다.
‘강하다.’
세현은 자신이 상대 중인 헬시안이 여태 만나 왔던 관리장 급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강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는 권능을 통한 잔재주 따위가 아닌, 전투에 대한 감각 그 자체였다.
도끼를 휘두를 때, 상대의 대처를 어렵게 하는 절묘한 진입각과 그 이후의 연속 동작들은 차라리 예술이라 부르는 게 나을 정도로 완벽했다.
사카린이 투박하고 실용적인 전투 스타일을 추구한다면, 헬시안은 동작 하나하나가 프로그램으로 설계된 듯한 정교함이 있었다.
아마도 세현에게 인식의 속도를 가속하는 권능 ‘사선의 왕’이 없었다면, 그녀의 움직임에 이렇게 맞대응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방법으로 간다.’
세현은 싸움 속에서 야금야금 주도권을 가져오는 방법을 선택했다.
1:1 전투만으로는 세현의 호흡이 헬시안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듯했지만, 다른 관리인의 권능을 활용하는 것과 탐식 구더기를 이용해 사각에서 치고 들어오는 것으로 이 간극을 충분히 메우고도 남았다.
헬시안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씩 늘어 갔고, 결국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몸뚱이는 세현의 발아래에 깔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
“그동안 고마웠어.”
헬시안은 이 상황을 이미 예측한 것인지 체념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콰득-!
세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엑스칼리버를 휘둘러 그녀의 목을 깔끔히 베어 냈다. 이는 여태 많은 도움을 줬던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후의 선물이었다.
푸른 피가 주변에 흩뿌려졌고, 헬시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슬슬 끝나 가는군.”
세현은 곧장 고개를 돌려 전황을 확인했다. 이미 몇몇 길드원들이 자신이 상대하던 관리인의 목숨을 끊어 내고 동료를 돕기 시작했다.
불과 15분이 지났을 무렵, 플래닛 트리 룸에 살아 있는 관리인은 커플러 하나뿐이었다.
“내려와, 이 개새끼야.”
세현은 엑스칼리버를 한 손으로 들어 나무 위에 앉아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커플러를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대를 향한 진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