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화려한 휴가(2)
세현은 샤워를 마친 후,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 풀 빌라의 자동차 주차장에 놓인 주차용 호스로 에D츄의 몸을 씻겨 냈다.
“아하하하, 시원해요 쭈인님!”
“이거 누가 주인이고 누가 펫인지 모르겠구만.”
에D츄는 기분이 좋은지 축 늘어져서 짜리몽땅한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이를 끝낸 후, 세현은 인벤토리에 미리 넣어 놨던 치즈와 사료를 섞어 바닥에 풀어놓았다.
“카, 카망베르 치즈!”
에D츄가 눈이 돌아가 치즈를 오물오물 먹는 사이, 세현은 풀 빌라에 딸린 식당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앉으시지요.”
밀짚모자 아저씨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의자를 빼 줬고, 세현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이거 참 요란하게도 차렸군.’
랍스터, 타이거새우, 립, 파인애플 볶음밥 등등….
그곳에는 도저히 몇 명이서 먹을 수 없을 양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꽤 허기진 상태였기에 세현은 거리낌 없이 음식으로 포크를 가져갔다.
향신료의 냄새들이 조금 이질감이 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음식의 맛은 훌륭했다.
거기다 옆에 차려진 음료나 술들을 홀짝홀짝 들이켰는데,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각자 훌륭한 맛들을 냈다. 종업원들은 혹시나 부족한 음료나 음식이 없을까 계속해서 세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주 극진한 대접이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허세현 입주자님의 엄청난 팬입니다.”
잠시 후, 맞은편에 앉은 아저씨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왜 허세현 님을 좋아하게 됐냐면…….”
“그때 프링X스 전투에서 활약하신 걸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확 반해 버렸죠~!”
“전투 스타일에 대한 분석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여기 본 영상들에 따르면!”
그의 얘기를 가만히 들으며 맞장구를 치던 세현의 얼굴이 점차 지쳐 갔다.
‘이 아저씨…. 생긴 것만 닮은 게 아니야.’
밀짚모자 아저씨는 한국의 투머치토커를 능가하는 수다꾼이었다.
모두 세현을 사랑하기에 하는 말이라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계속 듣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지다 못해 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아저씨는 갑자기 무게를 잡았다.
“그리고… 가장 고마운 부분은 허세현 님께서 저와 제 가족들을 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네? 그게 무슨…….”
멍한 얼굴로 음식만 바라보던 중, 이 한마디가 세현의 고개를 번쩍 들게 했다.
“우리나라 또한 관리인들이 지배를 받았던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의 말대로 동남아 지역에는 태국을 중심으로 관리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지역도 몬스터가 들끓었고, 입주자의 숫자는 다른 대륙보다 적은 편이었기에 당연히 관리인에 대한 의존도가 더 컸을 것이다.
실제로 세현이 관리인들을 깨부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을 때는, 입주자를 제외한 보통의 사람들은 노예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며 그들을 지원하는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저희 가족은 입주자들에게 계속 학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말도 안 되는 노동을 하며 착취당했고, 밤이면 그들의 놀잇감이 되어 매질을 당해야 했죠.”
아저씨가 말해 주는 지난 몇 년간 태국의 실상은 듣는 것만으로도 그 처참함이 생생하게 가슴을 찌르고 들어올 정도였다.
그들의 지옥 같은 삶을 끝낼 수 있던 것은 서큐버스 군단 덕분이었다. 이들이 관리인들과 그들에게 붙어 민간인들을 착취한 입주자들을 싹 쓸어버린 덕에 이 근방의 사람들은 원래의 지위를 되찾고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또한 그 이후에는 ‘제2군단’이 국가 치안에 도움을 줬다고 하니, 그에게 있어 허세현은 영웅적 존재 그 이상인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나는 별생각 없이 한 짓이었는데.’
세현은 괜히 머쓱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적과 싸우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과 누군가의 삶이 저 위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마음대로 휘둘러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세현의 싸움은 이렇게 실제로 누군가의 삶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치고 있던 것이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세현은 잠시 감상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곱씹었다.
“그럼, 아저씨의 삶을 위해 한 번 건배하죠.”
“하하. 좋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얼큰하게 취해 재미있게 수다를 떨었다.
에D츄 또한 배가 부르고 몇 시간의 비행으로 지쳤던 탓인지 풀 빌라의 주차장 그늘 한편에 대자로 드러누워 쿨쿨 잠을 청했다.
그렇게 4시가 조금 넘어갈 무렵이 되서야 식사가 슬슬 끝나 갔고, 세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이제 슬슬 가 봐야겠네요. 동료들이 올 거거든요.”
“하하, 영웅들이 모두 오셨군요!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가시죠.”
아저씨는 식당 바에 놓인 양주 몇 명을 종이 백에 담아 세현에게 건네줬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술이었지만, 세현은 이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활약할 날이 또 오면 안 되죠.”
“하하, 그런가요?”
세현은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에D츄를 데리고 자신들이 묵어야 할 숙소로 향했다.
“오. 여기도 꽤 좋네.”
이런 일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카린답게 -이미 벌어들인 돈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이 말도 웃기지만- 호화스러운 숙소, 아니 차라리 작은 성이라고 하는 게 나아 보일 정도의 건물이 세현을 기다렸다.
“어서 오세요. 허세현 입주자님!”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대기 중이던 수십 명의 종업원들이 일자로 늘어서 동시에 세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야말로 귀빈 대접이었다.
“아… 아 네.”
세현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키를 받아 자신에게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미쳤네, 이 방을 혼자 쓴다고?”
이 숙소에는 총 10여 채의 독채가 있었는데 사카린은 이 전체를 한꺼번에 빌려 버렸다.
각자 방을 넓게 쓰자는 취지도 있겠지만, 괜히 다른 사람이 섞여 들어 노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이렇게 예약을 한 듯했다.
세현이 에어컨을 틀고,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자 종업원들이 찾아왔다.
“허세현 입주자님, 웰컴드링크입니다.”
싱긋 웃는 종업원의 양 손에 들린 쟁반에 처음 보는 음료와 다과거리가 들려 있었다.
세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메인 수영장은 중앙으로 가시면 이용하실 수 있고, 개인 풀장은 베란다 쪽으로 나가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 네네.”
종업원이 돌아간 후, 세현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곳에 뭐가 있는지 파악했다.
중앙에는 족히 수십 명은 동시에 놀 수 있을 것 같은 수영장과 비치 베드, 방의 베란다 뒤쪽에는 어지간한 목욕탕 냉탕 정도 크기는 되는 풀이 있었다.
세현은 조심스레 챙겨 온 수영복을 입고, 풀에서 풍덩거리며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천국이구만 천국이야."
한참 물장구를 치다 개인 풀장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니, 6일 후에 있을 전투가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그때 아파트에 찾아간다면 높은 확률로 커플러와의 전투가 있을 것이다.
그를 상대로 생존을 장담할 수 없기에, 세현은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것 좀 진작에 더 해 볼 걸.”
이번 여행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세현은 그 예감이 빗나가길 바랐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으아아아, 도착이다!”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한국어 외침이 들려왔다.
‘길드장이구만.’
세현은 한가한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옷을 입고 설렁설렁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주군! 오랜만입니다!”
그곳에는 잔뜩 여행객 느낌을 낸 길드원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안쪽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와 숙소 대박 좋은데?”
“내가 제일 끝 쪽에 있는 방 쓸래.”
“오 허세현, 오랜만이다?”
그녀들은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온 듯 천진난만한 태도로 숙소 곳곳을 들여다보며 각자의 소감을 뱉어냈다.
“자자, 각자 짐정리하고 한 시간 있다가 야시장 갈 사람들은 모여!”
“늬예늬예.”
이후, 코사무이에서의 휴가는 세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날 저녁에는 근처의 야시장에 들려 한상 차림을 크게 차려 먹고, 이후에는 이곳의 유흥가에 있는 클럽을 다 같이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둘째 날에는 패키지여행을 끊어, 섬의 곳곳에 있는 사원이나 유적지, 동물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고.
셋째 날에는 배를 타고 섬 근방에 있는 해양 국립공원을 구경했다.
세현에게는 꿈의 편린 같은 시간들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밤에는 숙소에 딸린 고급 식당에서 다같이 모여 밤새 파티를 하기로 했다.
원래라면 10시에 닫는 식당이지만, 사카린이 돈(?)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했는지 주인이 용케 허락을 해 준 모양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달이 선명하게 내리쬐는 깨끗한 밤하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파티. 이는 그동안 서큐버스 군단이 겪어 온 지난한 전투의 피로를 보상하는 듯했다.
“야야야, 진실게임 하자 진실게임!”
얼큰하게 술에 취했을 무렵,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더티토크나 서로의 감정을 털어놓는 진지한 시간들이 왔다. 이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길드원 중 한 명이, 이름만 들어도 ‘와’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톱스타와 연애 중이라는 것이었다.
“와~대박이네, 나중에 결혼식 때 가면 막 연예인들 잔뜩 오는 거 아니냐?”
“청첩장 돌릴 때 파티해 파티, 우리도 연예인들 좀 만나 보자.”
그렇게 이야기가 하나씩 오고가던 중, 어느 순간 허세현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야, 허세현. 너는 우리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없냐?”
“으으으음……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세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길드원들이 재미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아유와 핀잔을 날려 댔다.
“매번 말하지만, 너 혹시 고자냐?”
“아니라니까요.”
“고자 맞네! 고자야!”
“내가 고자라니!”
“에휴…… 맘대로 생각해요.”
세현은 포기했다는 듯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테이블에 놓인 고급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연애라.’
크로노스의 힘에 의해 7년 전으로 회귀한 이후, 세현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평생에 걸쳐 관심을 쏟았을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않았다기보다는, 상황에 쫓겨 해 볼 수 ‘없었다’는 쪽이 정확했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투쟁 같은 인생에 그런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전부 끝나면, 나도 연애나 해 볼까.”
세현이 고개를 젖히고,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이 ‘전부’라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기에 기약이 없는 허무한 말인 것을 알면서도, 괜히 이런 말이 입에 맴돌았다.
“누구랑요?”
그때, 바로 왼쪽에 앉아 있던 설희가 질문을 던졌다.
아주 작게 중얼거렸는데, 그걸 또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아아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혼잣말한 거예요, 혼잣말. 제가 연애는 무슨.”
세현은 손을 휘휘 저으며 부정했다.
“그래요? 기회가 생겼는 줄 알았는데…… 그거 아쉽네요.”
설희가, 입술을 싱긋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며 말했다.
순간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머스크향이 세현의 코를 강렬하게 간질였다.
“어…. 네?”
당황한 세현은 괜히 목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와인을 또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괜히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음식을 입으로 우겨넣었다.
“야야야 여기 분위기 왜이래! 혹시 허세현 너 고백이라도 받은 거냐?”
그때, 얼큰히 취한 사카린이 슬금슬금 기어와 세현의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이, 이 사람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세현이 강하게 부정하자, 사카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콧방귀를 뀌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럼 안 돼지 안 돼!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야. 고백은 내가 제일 먼저 할 거다!”
그 순간, 길드원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오! 고백해! 고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