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화려한 휴가(1)
커플러가 사라진 직후, 서큐버스 군단에 비상소집령이 내려졌다.
길드원 전체가 회의실에 모이는 데는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확인 결과, 길드원 전체에 허세현이 겪은 것과 동일한 팝업창이 출력됐다.
“일단, 제가 겪은 상황부터 설명 드릴게요.”
세현은 자신이 조금 전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고, 이번에 발생한 퀘스트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공감대가 생겼다.
“일단 몇 명이 가서 아파트 상황부터 체크해 봐. 혹시라도 위험해질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치고.”
“오케이요.”
사카린과 시선이 마주친 길드원 몇 명이 곧장 길드 건물을 떠나 아파트로 향했다.
이 판단은 정확했다.
아파트와 현재의 세계가 합쳐진 후, 아파트에 출입은 불가능해졌다.
입주자들이 입구로 들어갈라치면 눈앞에 수많은 오류 메시지와 함께 붉은 장막이 그들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플러가 에필로그를 ‘아파트’에서 진행하겠다고 한 이상, 이곳의 이상 징후가 있는지는 반드시 확인해 봐야 했다.
“허세현, 일주일 동안 뭘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 같냐?”
“흐으으음…….”
사카린의 질문에 세현이 턱을 한참 쓰다듬다 대꾸했다.
“없어요.”
“이잉?”
“더 이상 올릴 수 있는 레벨도 없고, 장비도 더 강해질 것도 없어요.”
“전략이라도 세워 둬야 하지 않겠냐?”
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안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 전략을 세워요. 여태까지 준비해 놓은 패턴만 해도 썩어 나는데.”
그 말이 맞았다.
이미 서큐버스 군단은 수많은 관리인들과의 전투를 겪으며, 유사시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략들을 수십 개도 넘게 준비해 놨다.
여기서 더 준비를 하기도 어려웠다.
“아오, 그럼 대안이 있어야 할 거야 아니야 대안이. 그러면 넌 뭘 어쩌자는 건데?”
“일단 지금 아파트에 간 인원들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요. 그리고 별 내용이 없다면 그냥 쉬죠.”
“……쉬자고?”
“네, 쉬자고요. 해외여행을 다녀오든, 집에서 만화책을 보면서 귤이나 까먹든, 아니면 넷플릭스 결제해서 밀렸던 미드라도 보든가요.”
“하아….”
세현의 대답에 사카린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주무르며 잠시 생각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네.’
괜히 뭐라도 딴죽을 걸고 싶었는데, 솔직히 허세현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다는 생각에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세현이 한마디를 보태 사카린의 생각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일주일 후, 커플러랑 싸움에서 우리가 무사할 거라곤 생각하지 마요. 감일 뿐이지만, 그놈은 보통의 입주자랑 전혀 성질이 다른 놈이니까.”
“그게 무슨 뜻인데?”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일주일을 알차게 보내라는 소리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길드원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죽을 수도 있다.’ 이는 수많은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던 서큐버스 군단이지만 아주 생소한 표현이었다.
모든 길드원들은 매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를 확신했고, 그 확신은 결과로 드러났다.
하지만, 허세현이 이를 처음으로 부정했다.
실질적으로 서큐버스 군단을 이끄는 존재이자, 전 인류 중 가장 강력한 존재이며, 900명이 넘는 숫자의 관리인을 죽인 그가 말이다.
길드원들의 입장에서는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표현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중-.
“언니, 우리 다녀왔어요.”
아파트로 정찰을 나갔던 길드원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아파트는 여전히 들어갈 수 없는 상태이며, 차이라고는 입장 시 [입장 불가] 오류 팝업창이 뜨던 것이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라는 메시지로 변경된 것뿐이라고 했다.
“하아….”
사카린이 착잡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앞으로 일주일간 휴가를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하루 전에 여기 길드 사옥 회의실에서 모이자고.”
결국은 허세현의 의견 아닌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제안인데 들어줘. 며칠 동안 내가 해외 휴양지로 여행을 다녀올까 하거든? 혹시라도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게 어딘데요?”
“코사무이라고 저기 동남아 쪽에 있는 섬인데.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길드원들이 거의 동시에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창에 ‘코사무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오 예쁜데? 나는 갈래요.”
“나도 나도.”
“저도 따라가요!”
길드원들의 손이 하나둘씩 올라가더니 어느새 세현과 백설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카린을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쭈, 쭈인님은 안 가세요?”
“주군…….”
세이메이와 에D츄, 심지어 백설희까지 뭔가 애원하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현을 쳐다봤다.
아무리 눈치 없는 세현일지라도 그게 뭘 뜻하는 것인지 알았다.
‘어차피 고유권능도 대충 뭔지 알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게다가 자신의 고유권능인 ‘용감한 왕’이 어떤 능력을 가진 것인지 대강 유추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능력이 지금 상황에서는 확인을 해 볼 수 없기에 다른 방법을 시도하며 만에 하나의 기능이 있을 것을 찾던 것이었다.
“나도 갑니다.”
결국 세현은 한 손을 쭉 뻗어 올렸다.
그러자 백설희와 세이메이, 에D츄가 그에 맞춰 손을 번쩍 올렸다.
그 비주얼이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하는 것 같은 올망졸망한 느낌이 있어 썩 귀여웠다.
“좋아, 그럼 내일 바로 출발하자고.”
사카린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 † †
“뭐야, 저기 저 사람들 그거 아니야 그거?”
“그게 뭔데?”
“서큐버스 군단 말이야. 딱 봐도 그 사람들이잖아.”
“대~박, 실제로 보니까 진짜 연예인들보다 예쁜데.”
길드원 전체가 공항에서 모여 있자, 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웅성이며 사진을 찍어 댔다.
“뭐야 이건, 우리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꾸미고 올걸, 그러면 공항 패션이라고 난리 났을 거 아니야?”
그때, 길드원들의 도착을 하나하나 체크하던 사카린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까딱 하더니 백설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설희야, 허세현 어디 갔냐? 세이메이는 여기 있구만.”
“아, 그게.”
백설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카린에게 조심스레 귓속말을 속삭였다.
“뭐? 그 미, 미친놈이 직접 날아서 간다고 했다고?”
“네……. 그게 에D츄를 비행기에 태울 수가 없어서 직접 데리고 날아간다고 했어요.”
그 시각 태평양 바다 상공.
“으아아아 무거워 씨발!!”
“죄, 죄송해요 쭈인님.”
설희의 말대로, 세현은 에D츄를 거대한 그물망에 걸고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비행기 값을 아낀다던가 하기 위해 내린 선택은 아니었다.
처음엔 에D츄를 화물칸에 실어서라도 데리고 갈까 했지만, 코끼리 정도로 거대한 햄스터에 대한 관련 조항이 없는 탓에 비행기에 태울 수 없는 게 문제였다.
결국 세현은 에D츄를 직접 자신이 들고 바다를 건너겠다는 미친 생각을 했고, 현재 그것을 실행 중인 것이었다.
“젠장,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그냥 망할 놈의 쥐새끼 버리고 가는 거였는데.”
“너무해욧! 에D츄도 쭈인님의 가족이라고요.”
500레벨이나 됐고, 근력도 초인적인 수준으로 향상됐기에 이 정도야 가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현재 세현은 헬기가 보급품을 나를 때처럼 몸에 거대한 그물망을 묶어, 에D츄를 거기에 태운 채 날고 있었다.
너무 빠른 속도를 내면 그물망이 끊어질 우려가 있었고, 계속 흔들거리는 탓에 무게중심이 계속 삐거덕거렸다.
게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계속 햇빛을 뿜어내며 등 쪽을 구웠고, 바다에서 반사된 햇빛이 세현의 아랫면을 굽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행시간이 3시간을 넘어갈 즈음, 세현조차도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마치 불판 위에 올려진 삼겹살이라도 된 기분이다.
“도…… 도착했다, 코사무이.”
세현은 자신을 무사히 코사무이까지 인도해 준 ‘구글맵’에 감사하며, 해변에 안착했다.
“우웨에엑! 어, 어지러워욧!”
그물 안에서 세 시간 내내 고문에 가까운 흔들림을 겪은 에D츄가 하얀 모래 사방 위에 토사물을 쏟아 냈다.
평소라면 머리에 꿀밤이라도 한 방 먹였겠지만, 세현은 그럴 힘조차도 없었기에 그 자리에 드러누워 숨을 가쁘게 내쉴 뿐이었다.
그렇게 한 10분쯤 지났을까.
“???????????????????????????????”
[새로운 언어를 접했습니다.]
[마스터키가 상대방의 언어 패턴을 학습합니다. (진행도 2%)]
세현의 눈앞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챙이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묘하게 한국의 야구 선수 박찬호를 닮은 것이, 친숙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뭐라는 거야?”
계속 뭔가의 말을 쉬지 않고 중얼거렸는데, 세현은 그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어딘가로 급히 사라졌다.
세현은 그제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외국에 온 느낌이 나긴 하는구만.”
시야 너머에 에메랄드 빛 바다와 모래사장,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 나무들이 풍경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저 멀리에는 예쁘게 지어진 펜션이나 비치 바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어 순간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세현의 옆으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
[마스터키가 상대방의 언어패턴을 학습합니다. (진행도 77%)]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조금 전 헐레벌떡 사라졌던 박찬호 닮은 아저씨가 빨간색 쥬스를 한 손으로 내밀고 있었다.
유리컵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것이 썩 시원해 보였다.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현은 일단 그걸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 이거 수박 쥬스구만.”
뒤통수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차가운 감각과 함께 달콤한 수박의 맛과 향이 목구멍으로 쏟아졌다. 세현이 수박 쥬스를 한 컵 다 비워 내자 밀짚모자 아저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또 중얼거렸다.
[마스터키가 상대방의 언어 패턴을 완전히 학습했습니다.]
[마스터키가 다음 언어 번역을 지원합니다. (태국어)]
“어때요 좀 먹을 만합니까?”
그러자, 마스터키가 태국어의 번역을 지원하게 되며 아저씨의 목소리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에 세현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 네, 맛있네요.”
“오오, 태국어를 하실 줄 아시는 겁니까?”
“네, 뭐 조금.”
세현이 유창하게 대꾸하자, 아저씨가 짐짓 놀란 듯 감탄사를 뱉었다. 아무래도 마스터키의 언어 번역 기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혹시……. 당신이 ‘허세현’ 씨 맞으신가요?”
“네, 맞는데요.”
“오오오오! 오오오오오! 영광입니다! 저는 굉장히 당신의 팬입니다.”
아저씨는 마치 연예인이라도 만난 듯 들떠서, 세현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세게 흔들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제가 식사를 대접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구해 줬고, 그러니 저는 이걸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의 제안에 세현은 잠시 스마트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오려면 멀었구만.’
지금 시간은 오전 9시 30분, 길드원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못해도 5~6시는 돼야 한다. 간단히 말해, 지금의 세현은 시간 따위는 썩어 나게 많이 남는다는 소리였다.
“다 좋은데, 제가 지금 꼴이 이래서 좀 씻고 싶은데요.”
세현은 모래와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꼴을 보며 어색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걱정 말라는 듯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괜찮습니다! 저는 바로 앞에서 풀 빌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기서 씻고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시죠.”
“오오…….”
그의 말대로, 모래사장 바로 뒤편에는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풀 빌라가 위치하고 있었다.
세현은 그를 따라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