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화.
혼돈의 왕
세현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자 흰 공간과 ‘혼돈의 왕’이라 칭해지는 검은 사람 형태의 존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넌 뭔데 그렇게 강한 거냐?”
이에 혼돈의 왕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나는 수많은 싸움을 겪었고, 그 싸움 속에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 전부다. 이마에 있는 이 관이 내 기억을 모두 지워 버렸지.>
혼돈의 왕은 자신의 이마를 옥죄고 있는 관을 가리키며 씨익 미소 지었다.
세현은 그에게 알아낼 수 없는 정보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엑스칼리버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뭐 좋아,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붙어 보자고.”
이에 혼돈의 왕 또한 흰 이빨을 씨익 드러내며 주먹을 앞으로 내밀어 전투태세를 취했다.
<바라던 바다, 그동안 싸우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거든.>
세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발을 땅에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헤르메스의 신발이 최상급 토파즈의 힘을 빌어 스파크를 튕겨 내며,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세현의 검이 혼돈의 왕의 가슴께로 파고들었다.
<빠르구나!!>
놈은 즐겁다는 듯 손날을 아래로 내리쳐, 엑스칼리버를 바닥에 처박았다.
세현은 그 틈을 타 오른발을 놈의 턱 아래로 쑥 밀어 넣었다.
하지만 놈 또한 그런 공격을 예측했다는 듯 상체를 뒤로 기울이며 반격을 가해 왔다.
초 근접 거리에서 쉴 새 없이 난타전이 이뤄졌다. 기교와 스킬 따위는 거의 대부분이 배제된 투박한 싸움.
하지만 세현은 이 싸움 속에서 묘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하다. 미친 듯이 강하다.’
펼쳐지는 공격 속에서 놈이 겪어 왔을 수도 없이 많은 전투 경험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사선의 왕’으로 인식의 속도를 한없이 가속해 놈의 공격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 공격의 패턴은 끝이 없는 듯 다양한 갈래로 뻗어 나갔다.
도리어 사선의 왕을 사용하는 세현이 간간히 놈의 공격을 허용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까앙-!
가슴 쪽으로 놈의 발차기가 내리꽂혔다. 가까스로 엑스칼리버를 가로로 붙잡아 검신으로 그를 받아 냈지만, 엄청난 충격이 세현의 몸을 뒤로 날려 보냈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고, 세현은 다이달로스의 날개를 펼쳐 몸을 멈춘 후, 곧장 ‘구더기의 왕’을 발동시켜 원거리 견제를 시도했다.
근 수백여 마리의 탐식구더기가 놈을 향해 날아들었고, 세현은 그 사이로 섞여 들어 놈의 시야의 밖에서 공격 기회를 노렸다.
<그깟 잔재주는 안 통한다!>
‘혼돈의 왕’이 자신의 머리로 손을 올리더니 머리카락을 몇 올 뜯어 앞으로 후 불어 내자 그것들이 마수의 형태로 변이해 탐식구더기들을 덮쳤다.
시즌7에서, 아파트 밖에서 상대했던 마수들은 모두 저놈의 권능으로 만들어 낸 것이리라.
‘결국 진검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 그거군.’
세현은 성령개방을 이용해 엑스칼리버에 에너지를 응축시켜 다시 한 번 놈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수백 번의 공방이 오고갔고, 간혹 들어오는 놈이 꼬리를 이용해 넣는 변칙적인 공격 때문에 세현은 다섯 차례의 치명상을 놈에게 허용했다.
다행히도 네크론 세트와 아발론이 있기에 세현의 대미지는 금세 회복됐다.
<네놈은 불사신인 모양이구나, 좋아…. 간만에 재미있는 싸움을 만났는데 쉽게 끝나면 시시하지!>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허세현의 모습에도, 혼돈의 왕은 도리어 즐거운 듯한 태도를 보이며 싸움을 이어 갔다.
두 존재의 싸움은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며, 세현은 마치 의식 자체가 이 싸움에 매몰된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상대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마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이 싸움 속에서 혼돈의 왕의 움직임을 보며 자신이 향상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혼돈의 왕 또한 세현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실시간으로 수많은 다른 패턴의 공격들을 창조해 내며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극도로 팽팽한 싸움.
콰드득-!
그 줄은 어느 한 순간의 파열음과 함께 끊어졌다.
“커허허헉!”
<아하하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격이라니!>
세현의 한쪽 어깨가 뭉텅 날아가며,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토해졌다.
그와 동시에 혼돈의 왕의 몸에는 엑스칼리버가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싸움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무수히 많은 공격 패턴 속에서 혼돈의 왕의 패턴을 처음으로 포착한 세현이 무리해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방어를 포기하고 내지른 공격은 그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그와 동시에 한쪽 어깨가 완전 날아가 버릴 정도의 치명상을 입게 한 것이었다.
그나마도 ‘사선의 왕’이 없었다면, 세현은 머리가 터져 그대로 즉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하하하, 재미있는 싸움이었다!!>
혼돈의 왕은 엑스칼리버를 양팔로 뽑아내 바닥에 내쳤다.
꿰뚫린 부위에서 푸른 액체가 왈칵 쏟아져 나오더니, 그의 몸에 서서히 금이 갔다. 그러다 이윽고 유리처럼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쨍그랑-!
결국 놈의 몸뚱이가 완전히 분해됐고, 그 자리에는 놈이 쓰고 있던 금색 관만이 남았다.
[#. 액세서리 / 제천대성의 관]
- 온 세계에 혼돈을 가져왔던 제천대성의 관, 이 관은 그의 힘을 제약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희귀도: SS
적정 레벨: 1
추가 스킬 :
- 제약되는 힘
: 부처의 권능이 담긴 관, 사용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90% 하향됩니다.
- 불변의 계약
: 이 관을 머리에 쓸 경우, 사용자가 죽기 전까지 절대로 해제되지 않습니다.
“미친…… 원래는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혼돈의 왕, 손오공의 머리에 이것이 씌워져 있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세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관을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그러자 흰색의 세상이 불타듯 사라지며 세현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여전히 마수들과 입주자들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세현이 도착한 지 한 10초 정도가 지났을까-.
“끼에에에에엑!”
별안간 마수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하나둘씩 자리에 쓰러져 불꽃이 되어 산화했다. 입주자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제각기 제스처를 취했다.
[축하합니다! ‘허세현’ 님이 시즌7을 클리어했습니다!]
[‘제천대성의 경지를 초월한 자’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보상: 올스탯 +20
[시즌8이 곧 개방됩니다]
그 순간, 시즌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각자의 마스터키에서 출력되었다.
“하아…… 진짜 죽다 살아났네.”
긴장이 풀린 허세현이 자리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빠악-!
그때, 뒤통수가 묵직한 감각과 함께 흔들려 고개를 돌리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길드원들이 세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어디 갔다 왔냐?”
“보스 잡으러요.”
사카린의 질문에 세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 새꺄, 그걸 왜 혼자 가는데!”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아아! 발로 차지 마요!!”
두 사람이 투닥거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팝업창이 출력되었다.
팝업창 우측 상단에는 LIVE라는 글씨가 출력되고 있었고, 한가운데는 서큐버스 군단에게 익숙한 장소가 실시간으로 출력되고 있었다.
“……저거 우리 길드 회의실 아니냐?”
“맞는 것 같은데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길드원 한 명이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를 검색해 들어갔다.
그러자 ‘서큐버스 군단’ 채널에서 현재 라이브 방송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공에 뜬 저 홀로그램은 현재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왜 저런 영상을?
현재 길드원들은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아, 아아, 안녕하세용 여러분~!]
모두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질 무렵, 화면 한가운데로 익숙한 얼굴이 쑥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에 동글동글한 얼굴, 잠자리 안경을 쓴 아담한 체형의 여성.
서큐버스 군단의 영상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신지영이었다.
그녀는 왼손에 프링X스, 오른 손에 콜라캔을 들고 화면을 바라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저는 서큐버스 군단의 영상 편집을 맡고 있는 신지영이라고 합니다! 언론 인터뷰나 채널에 가끔 등장했으니까 아는 분들도 많으실 거라고 생각해용!]
[제가 오늘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건 여러분에게 재미있는 사실을 공지 드리기 위함이에용.]
[오늘 막~ 시즌7이 클리어됐는데요. 이제 슬슬 아파트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네요, 저는 이런 게 너무너무 아쉬워용~!]
[그래서 아파트가 끝나기 전에 재~미 있는 쇼가 있으면 좋겠다고 고민했어용.]
[지금까지는 아파트를 한 층 한 층 클리어했잖아요? 근데 저는 이게 너무 시시하더라구요. 그래서 훨~씬 재미있는 방법이 떠올렸어용.]
[나머지 2개의 시즌을 통 크~게 합쳐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땅에서 펼치면 어떨까 해요. 어때요? 재미있겠죠? 민간인 여러분들도 입주자들과 몬스터들의 화끈한 싸움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예요.]
신지영의 말을 듣고 있던 사카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쟤 지금 뭐래는거냐, 어디서 마약이라도 빨고 온 거야?”
[뭐~ 너무 자세히 설명하면 재미없을 것 같죠. 지금부터 시즌8, 9, 10 통합 시즌을 시작하도록 할게요.]
신지영이 이 지점까지 말을 내뱉자,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갑자기 다른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경악스러운 비주얼에 다함께 홀로그램을 보던 입주자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씨발, 저게 뭐야.”
그 광경을 보던 세현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홀로그램에 비춰진 신지영의 모습이, 세현이 익히 알고 있는 불쾌한 존재의 모습으로 변해 있기 때문이었다.
“커플러, 저 새끼가 저기서 왜 나와.”
[짜란! 놀라셨죠?]
커플러, 얼마 전 아파트의 ‘총지배인’으로 등극한 관리인.
그는 프링X스를 우걱우걱 먹으며,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아파트의 총지배인인 커플러라고 해용. 항상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달마시안이랍니당!]
[자, 그럼 조금 전에 예고 드렸던 대로 쇼를 시작할게용.]
커플러는 입꼬리를 씨익 추켜올리며 한마디를 보탰다.
[잇츠 쇼-타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튜브 라이브 방송이 곧장 종료되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건데?”
“씨발…… 무슨 말인지 1도 이해 안 된다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주자들이 패닉에 빠져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다시 라이브 영상이 송출됐다. 홀로그램 화면은 이번엔 아파트의 전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후-.
콰와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아파트 아래쪽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아파트의 위로 빠르게 타고 올라갔고, 영상 또한 그 속도에 맞춰 함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빛은, 정상에 있는 거대한 민들레까지 스며들어 맹렬히 빛을 발산했다.
그 빛은 여러 개의 구체의 형태로 갈라지더니 민들레 위에서 수없이 많은 씨앗의 형태로 변이했다.
잠시 후, 그 씨앗들이 빛을 내뿜으며 온 사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별이 둥둥 떠다니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토해 낼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기에 모두의 얼굴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잠시 후, 아파트에서 그닥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 중이던 세현의 곁에도 수십여 개의 씨앗이 추락했다.
콰앙-!
서큐버스 군단은 씨앗의 추락 지점에서 한발 물러나, 무기를 들고 안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지켜봤다.
“츄우우우우…….”
“주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잠시 후 먼지가 걷히고, 그 안에서 에D츄와 세이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