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화.
미미크리(2)
“그래, 당연히 우리가 네 최악의 상대가 될 거다.”
“우리?”
미미크리의 대꾸가 다른 곳에서 들려와 세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 공간으로 연결된 통로 입구에서 허세현과 똑같은 모습의 미미크리 네 마리가 눈에 더 들어왔다.
“…이거 실화냐?”
세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스스로를 이렇게 말하는 건 민망하지만, 현재의 세현은 메인 던전 보스를 솔로 플레이로 쓰러뜨릴 정도의 존재다.
평범한 입주자 따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에 도달한 초인.
그나마 입주자 중에 세현을 상대할 수준이 되는 건, 원탁의 기사로 ‘퀸’의 힘을 얻은 사카린 정도나 되어야 가능할 터다.
그런데 그런 존재와 같은 힘을 가진 존재가 5명이다? 이건 아무리 현재의 세현이라 해도, 아니 현재의 세현이기에 도리어 클리어가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아직은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니니까 일단 견제부터 해 보자.’
세현은 미미크리들이 자신의 외형만 복제했을 가능성을 떠올리며 원거리에서 구더기를 소환했다.
수십 마리의 대형 구더기가 앞으로 쇄도해 들어가자 놈은 씨익 웃으며 엑스칼리버로 허공을 갈라냈다.
그러자 공중에 실선이 그어지며, 똑같이 대형 구더기가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서 맞붙은 구더기들은 서로의 몸을 사정없이 잡아 뜯더니 얼마 가지 않아 공멸해 버렸다.
‘최악이다.’
일순간 합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세현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눈앞의 미미크리들은 외형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복제한 존재들이다.
이대로 가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이기에, 세현은 일단 구더기를 소환해 통로를 막아 버렸다.
“어이, 어디로 도망가냐!”
“설마 쫄았냐?!”
통로 너머에서 미미크리들이 소름 돋을 정도로 세현과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공격을 퍼부었다.
세현은 구더기들이 일순간 통로를 막은 틈을 타, 재빨리 이곳으로 올 때 사용했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탈출했다.
“이걸 어쩐다…….”
보스 룸을 빠져나온 후, 세현은 자리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권능을 얻었다고 해도, 상대도 같은 능력을 쓰는 이상 5:1로 싸워서 승리하는 건 망상 같은 일이다.
세현은 클리어를 위해 현실적인 전략을 수립할 필요를 느꼈다.
“최대한 정보를 모으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보스 룸이 탈출이 가능한 구조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탈출이 불가능한 보스 룸이었다면 안에 꼼짝없이 갇혀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을 터였다.
세현은 일단 마켓을 통해, 한 장에 수천을 호가하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수십 장 사들였다.
보스 룸에 들어가서 긴급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탈출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대책을 세워 보자고.”
세현은 이후 보스 룸에 수도 없이 들어가야 했다.
거의 죽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몰리기를 수십 번, 그 과정에서 미미크리들에 짧게 상대하며 정보를 하나둘씩 누적시켜 나갔다.
세현이 알아낸 것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몇 번을 입장하던, 보스로 등장하는 몬스터는 허세현의 모습을 한 미미크리 다섯 명이었다.
둘째.
미미크리의 스킬과 권능, 아이템 구성들은 세현이 처음 보스 룸에 진입했던 순간의 것으로 고정된다.
이는 세현이 엑스칼리버가 아닌 다른 무기 몇 개를 사용해 상대해 보는 것과 레벨 업을 한 후, HP와 MP의 상태를 비교하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셋째.
놈들은 세현과 달리 마스터키나 인벤토리를 통해 소모성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또한 전투를 통해서 알아낸 것으로, 놈들은 엘릭서나 포션 따위를 사용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넷째.
실은 이게 제일 문제였다.
놈들은 세현의 소환 스킬인 ‘왕의 군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무리해서 전투를 이어간 적이 있는데, 놈들이 각자 15마리의 소환수를 소환했다.
세현은 현재 길드원들에게 ‘원탁의 기사’를 사용해, 소환수들을 소환할 수 없는 상태.
이런 와중에 다섯 명의 미미크리가 소환수를 모두 꺼내 총 80:1의 공격을 퍼붓는다? 이때는 정말로 거의 죽다가 목숨만 겨우 건져 살아 나왔다.
세현은 거의 10일을 투자해 이런 사실들을 모두 알아낸 후, 한 가지 결론을 내게 됐다.
“길드원들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잠시 레벨 업과 장비를 다시 맞춰서 클리어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시즌6에서 강해지는 것에는 한계가 명백히 존재한다.
차라리 길드원들과 세이메이, 에D츄를 기다린 후, 제대로 된 작전을 만들어서 시도하는 게 맞는다는 판단이 들었다.
“후우…….”
세현은 일단 머릿속을 정리한 후, 마스터키를 이용해 사카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59층까지의 공략에 대한 모든 정보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서큐버스의 군단이 이걸 읽는다면 아마도 2~3달 후에는 60층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사카린: 야 허세현 이 개자식아! 빨리 안 내려오냐! 엉?! 만나면 아주 불알을…….]
그러자 마스터키에 사카린의 폭언이 담긴 메시지가 폭탄처럼 쏟아졌지만,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화면을 닫아 버렸다.
“그럼 시간이 붕 뜨는 동안은 혼자 레벨링이나 해야겠구만.”
일단 서큐버스의 군단이 60층까지 올라오기까지 최대한 자신의 스펙을 끌어올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들이 올라온다 해도 미미크리들의 능력과 스펙을 생각했을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 최대한 승률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히든 퀘스트나 아이템을 통한 부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이다.
세현은 여태 60층까지 올라오면서 겪었던 여러 장소 중, 레벨링에 최적화된 장소 몇 개를 떠올렸다.
‘콜드렐라 전초기지는 경험치는 많이 주지만 몬스터 밀도가 너무 적고, 코튼시티는 몬스터 수준이 너무 낮고….”
한참을 생각하던 중, 세현의 뇌리에 한 장소가 불현듯 떠올랐다.,
“콜드렐라 서부 연구소.”
콜드렐라가 D바이러스를 통해 제작하려 했던 생체 병기 ‘도미네이터’들. 서부 연구소는 그 프로토타입을 만들던 장소로, 준보스급 수준인 도미네이터들이 좀비들의 숫자만큼이나 넘쳐 나는 장소였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때, 이곳은 도미네이터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몸에 특수한 향료를 뿌려 놈들이 입주자를 아군으로 인식하게 해서 이곳에 숨겨진 키 카드를 찾는 것이 정상적인 흐름이다.
준보스급의 몬스터들이 일반 몹처럼 넘쳐 나는 장소. 보통의 입주자라면 감히 이런 사냥을 할 미친 생각 따윈 절대 안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허세현은 미친놈, 아니 그 수준을 이미 한참 전에 뛰어넘은 생 또라이였다.
“거기서 몇 달 처박혀 있으면 되겠지.”
세현은 인벤토리에 소모품들의 개수를 확인한 후,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다이달로스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 † †
허세현이 60층에서 마스터키를 통해 메시지를 보낸 후, 딱 한 달이 되는 날.
“으아아아아! 허세현 이 개자식아 빨리 나와!”
사카린이 분노한 외침과 함께, 60층 초입에 나타났다.
그녀의 뒤에는 서큐버스의 군단 길드원, 에D츄와 세이메이가 잔뜩 지친 얼굴로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들 대단하네요. 최소 두세 달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한 달 만에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그 반대편에는 엑스칼리버를 든 허세현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길드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몇 달 만의 재회였건만, 감동의 눈물이나 반가움 따윈 없었다.
세현의 얼굴에는 오히려 즐거움과 호기심 외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고, 몸에는 살덩이와 뼈다귀를 엉망진창으로 엮어 만든 것 같은 흉측한 갑옷까지 덧입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허세현에게 한창 짜증이 나 있던 길드원들을 더더욱 자극했다.
“그게 지금 할 말이냐 이 자식아!”
참다못한 사카린이 퀸의 버프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키며 세현을 향해 두 개의 사슬낫을 한 번에 날렸다.
그 동선과 속도가 아주 절묘하게 날아 들어와 도저히 사각이 없어 보이는 공격이었다.
“어후, 공격이 매섭네.”
하지만 세현은 그것을 간단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 냈다.
그 동작은 빠르거나 늦지도 않아서, 마치 사카린의 공격이 어떤 궤도에서 어떤 속도로 들어올지 예지하고 움직이는 듯한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지랄을 한다!”
사카린은 사슬낫이 줄어들며 돌아오고 있는 사이, 퀸의 버프 스킬들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곤 돌아온 사슬낫들을 짧게 쥐고 허세현에게 휘둘렀다.
<눈앞의 저자를 죽여라.>
그녀의 머릿속의 저 너머에서 뭔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천천히 감정을 무디게 만들며 취하게 했고, 이성을 점차 흐려지게 해 공격을 더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퍼엉-! 퍼엉-!
사슬낫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혹은 세현의 엑스칼리버에 막힐 때마다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와 엄청난 기세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역시 길드장이네,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네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해졌네요? 허세현 너 이 새끼 많이 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점점 가속하며 난타전으로 이어졌다.
어지간한 고 랭크 입주자는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 것이 불가능할 경지의 싸움, 이를 지켜보는 길드원들도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관찰했다.
“세이메이, 쭈인님이 원래 저렇게 강했었나요?”
이를 지켜보던 에D츄가 자신의 등에 타고 있던 세이메이에게 질문을 던졌고, 이에 세이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주군은 아마도 새로운 힘을 얻으신 모양인 것 같습니다만……”
누가 보더라도 세현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강한데 ‘원탁의 기사’로 허세현이 가진 최강의 기물 ‘퀸’의 힘까지 얻게 된 사카린은 현재 다른 입주자들이 감히 넘보기 힘든 절대적인 존재다.
그런 사카린의 공격을 허세현이 어렵지 않게 받아 낸다는 것은 그의 힘이 적어도 동급, 혹은 그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찢어 버려!!>
“허세현 이 자식아! 날파리처럼 계속 피할래!!”
거의 10분이 넘는 전투를 지속하던 중, 허세현이 자신의 공격을 계속 요리조리 피해 대자 사카린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사념이 그녀의 마지막 이성의 끈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야수처럼 분노한 사카린은 궁극기인 ‘사신물기’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허공에 수백 개의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그곳에서 사슬들이 뻗어 나와 세현을 향해 동시에 날아갔다.
“길드장님, 안돼요!!”
“언니!”
이에 당황한 백설희와 길드원들이 그녀를 말리려 달려들었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이미 분노와 투쟁심으로 눈이 돌아가 버린 사카린이 일순간 기합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길드원들을 떨쳐 내 버렸다.
일순간 폭주한 사카린의 모습은 흡사 야수와도 같았다.
“죽어어어! 허세현 이 멍청한 새끼야!!”
콰득 콰득- 콰드드드득-!
하지만 이미 사슬들은 허세현의 몸을 사정없이 관통해 꿰뚫었다.
공중에서 세현의 몸뚱이가 정육점에 걸린 돼지고기처럼 매달렸고, 사슬들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만두세요!”
백설희가 다시 한 번 달려들어 사카린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사카린은 여전히 맹수처럼 투지를 펄펄 내뿜으며 계속 앞으로 달려들었다.
잠시 후, 세현이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그녀는 불길 속으로 자신의 몸뚱이마저 밀어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길드장 막아!”
“붙잡아!”
그제야 길드원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사카린의 몸을 찍어 눌렀다.
“다들 꽉 붙잡아라츄!”
잠시 후, 폭발이 불길이 몰아쳤고 에D츄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서 그것을 막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