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화.
권능
그날, 세현은 꼬박 밤을 새웠다.
그 시간 동안 ‘구더기왕 알터’의 힘의 사용법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이를 위해 베어 낸 좀비들의 숫자가 족히 몇만을 넘었고, 동원한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었다.
마치 어둠 속을 걷는 듯한 답답함.
이런 면에서는 언제나 빠르게 머리가 돌아가는 세현이지만, 이번만큼은 답이 쉽사리 보이질 않았다.
“이쯤에서 포기해야 하나.”
세현은 차분하게 빌딩 위로 돌아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무작정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방법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구더기, 구더기를 사용한다라.’
일단 세현은 알터가 구더기를 소환해 자신을 공격해 왔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지팡이를 이용해 공간을 찢어 내고, 그 사이에서 거대한 구더기들을 소환해 내는 그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생생히 떠올리려 노력했다.
‘젠장. 졸려서 그런가.’
정신이 몽롱한 상태여서 그런지, 이 생각의 폭주는 멈추지 않아 이윽고 구더기의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입은 에일리언 같고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흉측한 구더기의 모습, 구태여 떠올리고 싶지 않은 놈들의 디테일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파칙-!
‘응?’
그 순간, 세현은 손에 들린 엑스칼리버에서 미세한 스파크가 튀는 것을 포착했다.
‘이거 혹시?’
세현은 순간 머릿속에 힌트가 번쩍 하고 떠올랐다.
그러곤 알터가 구더기를 소환하던 순간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단순히 순간의 장면을 추상적인 느낌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닌, 그 순간을 머릿속에 붓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그린다는 느낌의 감각이었다.
세현은 혹시라도 그 이미지가 머리에서 흩어질까 눈을 감고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의 잡념도 끼어들지 않게 집중한 상태에서 모든 이미지를 디테일하게 그려 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엑스칼리버의 검의 끝부분에는 붉은 기운이 작게 흐르고 있었다.
세현은 집중력을 흩뜨리지 않은 채, 그것으로 허공에 검의 끝자락을 스윽- 그었다.
그러자 허공에 붉은 실선이 그어지며 공간이 찢어졌고, 그 사이로 구더기들이 와르르 쏟아져 지상에 흩어졌다.
구더기들은 지상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맹수처럼 날뛰며 좀비들을 먹어 치웠다.
이는 마치 사자와 토끼의 싸움같이 일방적인 전투로, 좀비들은 식인 구더기들에게 변변한 일격조차 제대로 입히지 못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현격했다.
지상에 족히 수천 마리는 될 좀비들이 겨우 수 분 만에 청소기로 빨아들인 것처럼 싹 정리가 됐고, 세현은 이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분쯤이 지나자, 구더기들의 형체가 서서히 녹기 시작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거…. 쓸 만한데.”
세현이 감탄하며 구더기 왕의 사용 방법을 계속 테스트했다.
‘일단, 최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내는 게 중요하다 그거군.’
말은 쉬웠지만,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단순한 느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수준의 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보통의 집중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실시간으로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실전에서 이런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기술을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용하는 데 제약만 없으면 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이는데 말이야.’
구더기들은 대체로 세현이 머릿속에서 그려낸 이미지대로 움직였는데, 이를 이용해 고기 방패를 만든다던가, 구조물을 만든다던가 하는 일이 가능했다.
게다가 놈들이 좀비들을 먹어 치울 때마다 세현의 HP와 MP가 조금씩 회복됐는데, 이 숫자가 워낙 많으니 회복력 자체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를 잘 쓸 수 있는 방법만 개발해서 적재적소에서 잘만 활용한다면, 포션을 사용하지 않고도 거의 무한에 가까운 HP, MP 수급으로 뛰어난 전투 지속력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뭐, 차차 써먹을 방법은 찾아보자고.’
세현의 대강의 테스트를 마치고 감을 잡아갈 무렵, 마스터키가 번뜩이며 음성을 내뱉었다.
[사용자 ‘허세현’ 님에게 ‘권능’ 탭이 개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뭐, 권능?”
세현은 두 눈을 번뜩이며 마스터키를 조작했다. 그러자 그 음성의 말대로, 마스터키에 [권능]이라는 탭이 하나 추가돼 있었다.
[권능]
- 당신은 ‘입주자’의 한계를 뛰어넘어 권능을 가진 존재로 격상됐습니다. 기존의 입주자가 사용할 수 없는 미지의 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권능은 당신의 의지, 감정, 경험 등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 성장하고 또 때에 따라 예상을 뛰어넘은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초월적 경험들은, 당신에게 또 다른 권능에 눈을 뜨게 할지도 모릅니다.
- 총 보유 권능 개수: 2
(1) 사선의 왕 (LV. 3 / 20)
권능 등급: B-
- 초월적 존재들과 싸우며 수많은 사선을 넘고, 시간의 신의 힘을 오랜 시간 몸속에 담아 온 당신의 경험이 융화되어 새로운 권능을 탄생시켰습니다. 이 권능의 정체는 아직 정확하지 않으며 많은 미지의 힘을 머금고 있습니다.
- 이 권능은 사용자의 인식 속도를 무한에 가깝게 가속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느린 것처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오를수록, 인식 속도를 가속할 수 있는 수준이 증가합니다.
(2) 구더기의 왕 (LV. 1/ 20)
권능 등급: C+
- 당신은 구더기의 왕 ‘알터’의 크리스탈을 이용해 권능 ‘구더기의 왕’을 획득했습니다.
- 탐욕 가득한 구더기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 그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당신의 숙련도가 부족해, ‘알터의 크리스탈’을 매개체로 사용해야만 권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 권능의 등급이 높아지면 구더기의 숫자가 늘어납니다. 해당 권능이 20레벨에 도달하면 알터의 크리스탈이 사용자에게 흡수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힘이라.”
설명 창을 읽은 것으로 세현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확히 자각할 수 있었다.
전투 도중 찰나의 순간을 느리게 인식하는 능력과 거대 구더기를 소환하는 능력, 이 두 가지 모두 ‘권능’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관리인들이 쓰는 힘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듯했다.
‘이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관리인 놈들이랑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
세현은 자신의 힘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런 권능들을 통해 무한히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가지의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세현은 빌딩 아래로 풀쩍 뛰어내려, 저 멀리 좀비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좀비들과의 거리가 2~3m 이내까지 줄어들고, 세현이 자신의 현재 전투 상황에 집중하자 시간이 천천히 늘어지기 시작했다. 권능 ‘사선의 왕’이 발동된 것이었다.
‘이때다.’
그 순간, 세현은 회피나 공격 같은 다음 동작을 곧장 잇지 않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거대 구더기들이 세 방향으로 뻗어 나가 곳곳에 숨은 좀비들을 찢어발기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느려진 감각으로 거의 20~30초 정도로 느껴지는 집중 끝에, 마치 붓으로 한 터치 한 터치 세밀하게 그려낸 듯한 이미지가 눈앞에 떠올랐고, 직후 엑스칼리버의 검 끝이 붉은 기운을 머금었다.
세현은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것을 그대로 허공에 그었다.
촤아악-!
그러자 공간이 찢어지며, 시간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끼에에에엑!”
그러자, 귀를 찢을 듯한 격렬한 비명 소리가 퍼지며 십여 마리의 거대 구더기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놈들은 전방의 좀비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후, 세현이 머릿속에서 그린 이미지대로 세 방향으로 그림 같이 뻗어 나가 곳곳에 숨은 좀비들을 먹어 치웠다.
세현은 자신의 권능이 만들어 낸 참혹한 광경을 보여 옅게 미소 지었다.
† † †
이곳에서 대규모의 실험을 한 듯 전체가 살덩어리와 괴생명체들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끔찍한 공장터. 이 한가운데에 거대한 아기 같이 생겼지만, 몸 군데군데가 괴생명체들과 흉측하게 뒤섞인 돌연변이가 서 있었다.
이놈은 54층의 메인 보스인 ‘도미네이터 D-005’라는 몬스터로, 등에 달린 거대한 태반을 무기 삼아 온 사방에 증식하는 바이러스성 세포를 흩뿌려 공격해 오는 패턴을 가진 놈이었다.
놈의 앞에는 십여 명에 달하는 검은색, 흰색 갑옷을 입은 여성들이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보라색 롱 헤어에 고양이 상의 미인이 각각 검은색과 흰색 사슬낫 두개를 쉴 새 없이 휘둘러 치며, 놈이 태반을 휘두르려는 움직임 자체를 봉쇄했다.
“죽어, 말미잘 같은 놈아!”
그녀는 사슬낫 두 개를 동시에 전방으로 날려 빠르게 돌려 놈의 태반을 쳐 낸 후, 잠시 간의 빈틈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앞으로 날아올라 두 개의 사슬낫을 회전시켜 놈의 두개골을 강력히 찍어 눌렀다.
그 직후 주변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수백 개의 사슬이 뻗어 나와 놈의 머리통을 꿰뚫고 들어갔다.
이는 사카린의 200레벨 각성기인 ‘사신물기’였다.
“다 때려 박아!”
잠시 놈의 몸뚱이가 사슬에 묶인 사이 길드원들은 각자의 궁극기를 동시에 쏟아부었다.
그러자 감히 눈조차 뜨기 힘든 화려한 기술들이 터져 나오며 채 몇 분 만에 보스의 HP가 거의 30% 가까이 줄어들었다. 이는 보통의 입주자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데미지였다.
이들 모두가 ‘원탁의 기사’를 통해 한 단계 진보된 수준의 힘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콰아아앙-!
모든 공격이 사그라든 후, 다시 한 번 사카린이 소환한 사슬이 터져 나가며 놈의 HP를 반 이하까지 떨어뜨렸다.
“우오오오오! 에D츄도 간다츄!”
놈이 비틀거리고 있는 와중, 저 멀리서 에D츄가 빠르게 달려와 거대한 몸뚱이로 놈에게 박치기를 했다.
그러자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너덜너덜해진 ‘도미네이터-D005’가 뒤로 볼품없이 나자빠졌다.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때, 허공에서 거대한 골렘이 떨어져 내렸다.
이는 수km 상공에서 거대한 시키가미를 통해 추락시킨 것으로, 마치 운석과 같은 기세로 놈의 몸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골렘의 어깨에는 리치니, 데스나이트니 스켈레톤이니 하는 수십 명에 달하는 언데드 군단이 함께했다.
콰아앙-!
골렘이 충돌함과 동시에 HP가 다시 한 번 빠져나갔고, 그 위로 소환수들의 공격을 퍼부으며 놈의 생명력은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갸아아아악!”
결국 ‘D-005’는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와 함께 그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축하합니다! ‘서큐버스의 군단’이 54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55층이다!!!”
보스를 잡은 사카린이 기쁜지, 화난 것인지 모르겠는 애매한 말투로 외쳤다.
잠시 후, 놈의 시체가 녹아내리며 시즌6를 클리어하는 데 필요한 필수 아이템인 DNA샘플을 드랍했고, 후방에서 전투를 보조하며 대기 중이던 백설희가 이를 챙겼다.
“빨리, 빨리 다음 층으로 가자!”
“네!”
사카린은 길드원들에게 곧장 다음 층으로 향할 것을 재촉했다.
길드원들 또한 그런 명령에 거부감이 없는지 잔뜩 독기를 머금은 얼굴로 대꾸했다.
과거에 스테이지 클리어할 경우, 잠시 휴식도 취하고 방송도 한 번 쭉 돌며 인터뷰도 했던 시절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초조한 듯, 뭔가에 안달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빨리 가서, 허세현 그 자식 불알을 까 버리는 거야!”
“오오오!”
길드원들이 분기탱천해서 55층으로 향하는 그때, 저 멀리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녀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저것들을 이용해 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