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화.
구더기의 왕(2)
“으으으으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세현은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시야가 뿌옇게 보이고, 전신이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 지속되었다.
“커헉! 컥! 컥!”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피가 토해져 나왔다.
“아발론…… 아발론은…….”
세현은 더듬더듬 주변을 기어 다니며 한구석에 떨어져 있던 엑스칼리버의 검집, 아발론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그것에 손을 가져가 대자 천천히 전신의 격통이 사라지며, 시야가 또렷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51…층인가?”
주변에는 핵미사일이라도 맞은 듯 완전히 폐허가 돼 버린 대도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앞쪽에는 거대한 싱크홀이 나 있었는데, 아마도 저 구멍이 알터와 마장기신이 함께 폭발해 버린 그 장소일 터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끝도 없이 깊은 어둠이 깔린 무저갱의 공간, 세현은 날개를 펼쳐 안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구멍 전체에서 뿜어지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그렇게 한참을 날아가 지상에 당도했을 때, 그 자리에는 엑스칼리버와 랜돌프의 잔해들이 남아 있었다.
“관리자 놈은 죽은 건가.”
어지간한 보스 따위는 열 번도 더 죽이고도 남을 화력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능력의 제약이 없어진 관리자라는 걸 생각하면 아직 긴장의 끈을 놓기는 일렀다.
세현은 일단 엑스칼리버를 챙긴 후, 놈의 흔적을 찾기 위해 랜돌프의 잔해들을 뒤적거렸다.
“……이건가.”
그러던 중, 그 사이에서 크로노스의 크리스탈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검은색 크리스탈이 보였다.
세현은 그것을 주워 들고 상태 창을 띄웠다.
[#. 알터의 크리스탈]
- 구더기의 왕, 알터의 정수. 그의 본체이자 모든 힘이 여기에 담겨 있다.
등급: 신화(SSS)
레벨 제한: 없음
▶ 추가 능력
- 구더기의 왕(액티브): 알터의 힘을 가집니다.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하나.”
세현은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혹시라도 잘못 사용했다간 크로노스 때처럼 알터가 자신의 육체에 깃들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려 마장기신을 희생시켜 얻어낸 아이템이다. 써먹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써먹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회수하고 싶었다.
‘이거 혹시, 소켓 아이템으로도 사용 가능한가?’
세현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 헤파이토스의 얼굴을 떠올리고 곧장 45층의 헬 포지로 찾아갔다.
† † †
<으으음, 이것도 소켓에 박아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효과가 나올지는 전혀 알 수 없겠군. 그래도 한번 해 볼 것이냐?>
세현은 알터의 크리스탈을 박아 넣을 아이템을 고민했다.
‘그래도 역시…… 이게 낫겠지.’
세현은 숙고 끝에 엑스칼리버를 내밀었다. 이미 다이달로스의 날개 같은 아이템 등을 통해 유틸리티 능력은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기에, 현시점에는 공격력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작업해 주도록 하지.>
헤파이토스는 엑스칼리버를 받아 든 후, 망치와 모루를 이용해 작업을 시작했다.
깡-! 깡-!
그가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엑스칼리버의 위로 강렬한 스파크가 치솟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세현은 머릿속에 여러 개의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마사무네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붉은 머리에 근육질의 체구를 가진 시즌1 구역의 여자 대장장이. 그녀는 세현에게 가장 많은 장비를 만들어 줬고, 꽤 많은 교감이 있었기에 항상 기억의 한 편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세현이 50층에서 거주자들을 상대로 대학살극을 벌일 때, 그녀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마사무네, 벚꽃공주, 살라웃 왕자, 앨리스 등등…….
세현은 50층의 대학살을 벌인 후, 호감을 어느 정도 쌓아 뒀던 거주자들 한번 찾아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세현에게 보인 반응은 한결같았다.
“흐음, 행색을 보아하니 입주자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시오?”
그들은 세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수많은 입주자 중 한 명처럼 대할 뿐이었다.
세현은 씁쓸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 아파트를 완전히 정복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다시 보지 않겠다 다짐했다.
<입주자여, 네 요구대로 그 검은 보석을 넣었다.>
그때 헤파이토스의 외침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세현을 향해 새로운 보석을 박아 넣은 엑스칼리버를 내밀었다.
세현은 곧장 검의 상태 창을 띄워 보였다.
추가 능력의 가장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글이 더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추가 권능
- 구더기의 왕: 당신은 구더기의 왕이 됐습니다.
‘뭐야…… 설명이 이게 끝이야?’
설명이 다소 아리송했기에 세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스킬 설명과는 다르게 스킬 사용 조건이나 쿨타임, 필요한 마나 수치 등이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심지어 능력조차도 너무 설명이 추상적이어서 어떻게 이를 활용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차차 알아 가는 수밖에.’
그러던 중, 세현의 스마트폰에 경매가 끝났다는 푸쉬 알림이 왔다. 51층 보스에게 드랍된 아이템들을 <아파트 마켓>의 경매장에 등록한 것이 벌써 경매가 끝난 모양이었다.
아이템의 성능 자체는 뛰어났기에, 경매 금액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조금 더 들어와 있었다.
‘여기 온 김에 신발도 갈아치워야지.’
세현은 일단 경매장에서 ‘헤르메스의 신발’을 검색해 즉시 구매가로 사 버렸다.
이는 시즌5 구간에서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쿠자이의 신발의 상위 호환 격인 아이템으로, 1단 점프가 아닌 2단 점프를 가능케 해 줬다.
세현은 이를 구입한 후 쿠자이의 신발에서 최상급 토파즈를 뽑아내 다시 옮겨 박았고, 남은 쿠자이의 발을 경매소에 대충 올려 버렸다.
혹시나 갑옷이나 액세서리 중에 쓸 만한 물건이 있을까 해서 경매장과 일반 마켓을 뒤적거렸지만, 딱히 쓸 만한 물건은 없었다.
“후우…… 대충 끝냈군.”
모든 채비를 마친 후, 세현은 곧장 52층으로 향했다.
† † †
한때는 찬란한 번영 속에 살았으나, 현재는 D바이러스의 광풍이 휩쓸고 간 유령도시.
이런 도시의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거대한 빌딩의 정상, 그곳에는 꼭 한 사람이 잘 수 있을 법한 텐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는 붉은 왕관과 두터운 갑옷 차림을 한 남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으으으…”
그, 허세현은 신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13시간이나 잔 건가.”
52층에 도착한 이후, 세현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기에 서둘러 안전한 장소를 찾았다.
그것이 이 빌딩이었고 세현은 이곳에 간이용 텐트를 편 후, 그대로 쓰러져 잠에 든 것이었다.
13시간이나 잤음에도 세현의 몸에는 여전히 통증과 피로감이 가득했다.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싸움을 겪은데다가, 이렇게 아무 곳에서나 퍼질러 잤으니 피로가 회복되길 바라는 게 도둑놈 심보지만 말이다.
차라리 8층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면 나았을 듯싶지만, 그랬다간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아 여기서 휴식을 취한 것이었다.
“하아…… 오늘 딱 하루만 쉬엄쉬엄하자.”
힘을 키우겠다고 51층에 있는 내내 미친 듯이 달렸던 세현이지만, 오늘 하루쯤은 여유를 가지고 컨디션을 되찾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세현은 일단 챙겨 놨던 에너지 바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과 번갈아 가며 먹었다.
‘혼자 먹는 건 쓸쓸하군.’
전생을 한 이후, 설희나 세이메이와 항상 함께 식사를 해 왔기에 혼자 식사를 한다는 행위가 꽤 쓸쓸한 일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자각할 수 있었다.
세현은 먹는 둥 마는 둥 에너지 바 서너 개를 입에 털어 넣고는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뒤적였다.
일단 가장 먼저 체크한 곳은 ‘서큐버스의 군단’ 채널이었다.
[시즌5 보스 ‘크로노스’ 공략!]
신지영이 영상 편집을 모두 마친 것인지, 50층 공략 영상이 업데이트돼 있었다.
“편집 잘했네.”
크로노스와 전투 장면을 박진감 넘치는 EDM 음악을 깔아 둔 후, 박자에 맞게 편집한 것이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했다.
이미 영상의 조회 수는 4억 뷰를 넘은 상황, 역시 신지영답다는 생각에 세현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Jangbob: 와, 근데 허세현 미쳤다. 저 날개로 날아가서 처박는 거 뭐냐.]
[Kumtata: 혼자서 솔직히 10인분은 한 듯;;; SS급이니 뭐니 허세현 앞에 명함도 못 내밀 거 같은데.]
영상의 리플을 확인하자, 허세현의 활약에 대한 극찬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이달로스의 날개를 이용해 보여 줬던 플레이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힌 모양이었다.
이 덕분에 적어도 한동안은 팔콘 유니온 같은 것들이 감히 서큐버스이 군단이나 세현에게 비비려고 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현은 이외에 입주자 커뮤니티나 인터넷 뉴스들을 보면서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체크했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남한 정부에 종전을 제안해 차후 입주자 간의 교류를 통해 파이를 키워 가자 말했다던지, 어떤 연예인이 누구랑 연애를 한다든지, 이번 선거에서 어떤 정당이 참패를 했다던지 하는 정보들.
현재 상황에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바깥의 정보를 이렇게나마 접하고 있는 것은 정신 건강에 꽤 도움이 됐다.
지난 몇 주간, 혼자 틀어박혀 미친 듯 싸움만을 하는 탓에 본인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뭔가의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는데, 이런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공략 보내 줘야지.”
세현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딱-소리가 나게 튕겼다.
그리고 마스터키를 이용해 사카린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이는 51층의 메인퀘스트 공략 방법을 상세히 적은 것으로, 길드원들이 어느 정도 세현의 속도를 맞춰 아파트를 오르게 하려고 정보를 넘긴 것이었다.
아무리 세현이 강해진다고 해도, 브레이브킹의 본질은 ‘소환사’다.
‘원탁의 기사’로 자신의 힘을 길드원들에게 나눠준 이상, 혼자서 아파트를 오르는 데는 한계가 발생할 터.
지금 당장은 스스로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솔로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해도, 이는 서큐버스의 군단이 어느 정도 속도로 따라와 줘야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후우……. 슬슬 몸이나 좀 풀어 볼까.”
대충할 일을 마친 세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엑스칼리버를 한 손에 쥐었다.
오늘은 쉬엄쉬엄하기로 정했기에, 목표는 메인 퀘스트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구더기의 왕인지 뭔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알아내야지.”
그저 자신이 엑스칼리버에 소켓으로 박아 넣은 ‘구더기의 왕 알터의 크리스탈’을 어떻게 쓸 수 있으며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가자.”
세현은 빌딩 끝자락에서 훌쩍 뛰어내려 땅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영화 속에 추락하는 히어로 마냥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끄어어어어어!”
그러자 도시에 흩어져 있던 좀비와 돌연변이들이 세현이 서 있는 방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도 수천은 돼 보이는 숫자. 그렇지만 개체 하나하나는 그닥 강하지가 않기에 부담 없이 기술을 테스트해 보는 데 딱 좋은 상대였다.
“좋아, 기본부터 가자고.”
세현은 좀비들이 가까이 오기를 최대한 기다렸다가 한 발을 가볍게 앞으로 내디디며 외쳤다.
“구더기의 왕!”
스킬창에 표기되는 이름 그대로 시동어를 외친 것이었다. 이는 스킬을 발동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이기에 가장 먼저 테스트해 본 것이었다.
“구더기의 왕!”
“구더기의 왕!”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현은 민망함을 무릅쓰고서 ‘구더기의 왕!’ 이라는 시동어를 몇백 번이나 더 외쳐 보고는 이 방법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하아…. 이 방법은 아니군. 이거,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문득, 오늘 하루가 애초의 계획처럼 쉬엄쉬엄 흘러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