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화.
새로운 목적
“커플러, 정말 죽이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은 없는 거냐?”
“넹넹, 당연하지용. 저것들은 게임으로 치면 음…… 버그 같은 거잖아용? 그리고 죽여 봤자 어차피 제가 크로노스의 크리스탈을 써서 다시 되살릴 텐데 솔직히 뭐가 걱정이신지 잘 모르겠네용. 쇼 한 번이면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되실 텐데요.”
커플러의 달변이 이어지자, 세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그 보상이라는 거, 내가 선택할게.”
“호오오옹, 관리자인 저와 거래를 하시겠다 그건가용?”
“왜, 안 돼?”
“아아 물론 안 될 건 없죵! 아무리 입주자라고 해도 천하의 허세현 님인데 말이에용!! 오히려 이 그림이 더 재미있으니 두 의지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으니 일단 말씀해 보세용.”
“나한테, 네놈들을 죽일 힘을 줘.”
“네놈이라 함은……?”
세현의 발언에, 커플러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한테 관리자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세현이 말을 뱉는 순간, 길드원들과 이 공간에 서 있는 관리자들의 표정이 동시에 놀람으로 물들었다.
“오호호호호호홍!! 이럴 수가! 역시 킹갓엠페럴제너럴마제스티 허세현 님이에용! 설마하니 그런 요구를 하실 줄이야. 저는 좋~은 아이템이나 그런 걸 달라고 하실 줄 알았지 뭐에용?”
“내 조건은 무조건 이거다. 협상은 없어, 그게 싫으면 거주자들과 싸우지 않는다.”
“아뇽아뇽! 저는 그 조건이 아~주 마음에 들어용. 다만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이라서용, 두 의지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모를까-.”
“으음…….”
“흐으으음…….”
커플러는 온몸을 비틀며 뭔가를 한참 고민하더니 다시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오홍홍! 생각해 보니 두 의지께 여쭤 보면 간단한 일이겠네용!! 아주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용!”
커플러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선을 긋더니 양팔로 공간을 찢어 내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몇십 초가 지난 후, 놈은 다시 찢어진 공간으로 빠져나오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 위에는 복잡기괴한 붉은 문양이 새겨진 검은 큐브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오호호홍! 다행이에용, 두 의지께서 세현 군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셨어용!! 세현 군이 제가 제안하는 퀘스트를 수락하면 이 아이템을 주라고 하시더라구용!”
커플러가 손을 앞으로 가볍게 휘두르자 검은 큐브가 세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거기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자, 눈앞에 상태 창 하나가 번뜩 출력됐다.
[#.시스템 제어 아이템 / Unknowncube1000 ]
- 인과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아파트의 시스템의 제약 조건을 변경할 수 있는 아이템. 두 의지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커플러가 제시하는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멋진 쇼를 선물하면 이를 사용할 수 있다.
▶ 변경 내용
- 큐브의 사용자는 관리자, 관리장 계급에게 아무런 제약 조건 없이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어때요, 틀림없이 세현 군이 원하는 아이템이죵? 제가 제시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사용 가능하게 변할 겁니당.”
커플러의 말이 끝나자 눈앞에 하나의 팝업창이 추가로 출력됐다.
이번에는 퀘스트 알림창이었다.
[#.히든 퀘스트 / 혁명 전사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 시스템의 오류로 생겨난 혁명 전사들에게 안식을 찾아 주자.
클리어 조건: 보스 룸 내부에 있는 1078명의 거주자를 모두 제거.
- 현재 제거 상태: (0 / 1078)명
[수락하기] [거절하기]
“……”
세현은 멍한 눈으로 팝업창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에 서 있는 거주자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 서려 있는 공포와 두려움이 전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난 몇 년간 쌓아 온 그들에 대한 여러 즐거웠던 추억들이 머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산산조각 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현은 자신이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내 손으로 죽여 주마.’
세현은 아랫입술을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질끈 깨물고, 수락하기 버튼을 터치했다.
“오홍홍홍! 잘 생각했어요, 세현 군.”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커플러.”
커플러가 기쁘다는 듯 박수를 쳤고, 세현이 놈을 보며 한 마디를 더했다.
“흐음, 추가 조건이라니 조금 곤란한걸요. 지금 내건 조건도 솔직히 엄~청 이례적인 케이스인데용.”
“뭐 큰 건 아니고, 여기서 거주자들이랑 싸우는 거. 나 혼자 할 수 있도록 해 줘.”
세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더러운 기분을 길드원들이나 세이메이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호옹!! 그편이라면 저도 당연히 찬성이죠! 그 그림이 훨~씬 재미있겠네요.”
커플러가 히죽거리며 크로노스의 크리스탈을 만지며 고갯짓을 하자, 푸른 구체가 날아와 세현의 동료들이 있는 지점에서 산개했다.
“어어, 이거 뭐야?”
그러자 그 위로 장막 하나가 생겨나 그들을 모두 안에 가둬 버렸다.
“세현 군의 퀘스트가 끝날 때 까지는 아무도 저기서 빠져나오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는 지금 일어난 일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할 거예요.”
“좋아, 그럼 시작해.”
세현 또한 바라던 바였다.
이곳에서 일어날 일은 세현을 제외한 누구도 볼 필요도,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It’s Show Time!!!”
커플러가 신나서 외치자, 크로노스의 크리스탈의 영향으로 돌처럼 굳어졌던 거주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현은 앞으로 걸어 나가 엑스칼리버를 앨리스를 향해 겨누며 말했다.
“앨리스,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서 너희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다. 유언이 있다면 지금 말해.”
“……저희는, 관리자들의 손에서 농락당한 것입니까?”
이에 앨리스는 어느 정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체념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군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희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군요.”
앨리스의 태도에 이곳에 모인 모든 거주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바로 옆에 붙어 있던 벚꽃공주가 앞으로 걸어 나와 애처로운 얼굴로 세현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저희와 싸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세현 공!”
그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응어리진 듯 느껴졌다.
하지만 앨리스는 이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지 벚꽃공주를 붙잡아 뒤로 물렸다.
“공주, 뒤로 물러서 있어.”
“하지만…… 하지만!!”
“이건 피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앨리스의 단호한 한마디에, 공주는 그제야 뱉으려던 말을 집어삼키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유언, 유언이라……. 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부탁 하나 드리지요, 허세현 님. 혹시라도 당신이 이 아파트의 주인이 되실 날이 오신다면, 그날이 온다면. 저희를 이 속박의 운명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둘 사이에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앨리스는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해 창을 크게 들어 올렸다.
창은 크로노스와 싸웠을 때와 다르게 더 이상 붉은빛을 발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관리자 리베르의 도움으로 얻었던 힘이기에 더 이상 그 효과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녀의 손에 들린 저것은 평범한 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군, 공격하라!!”
앨리스가 모든 거주자에게 공격을 명령하는 그 순간이었다.
콰앙-!
순간, 세현이 서 있던 바닥에 먼지가 일며 순식간에 잔영 하나가 앨리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머리가 곧장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남겨진 사방으로 시뻘건 선혈을 쏟아 냈다.
조금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아주 찰나의 시간에 만들어진 죽음이었다.
‘최대한 고통 없이 빠르게 보내 주마.’
이후 세현의 몸은 팽이처럼 회전하며 주변의 병사들을 순식간에 갈아 버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살라웃 왕자, 아니 이제는 술탄이 됐을 그의 몸뚱이가 갈려 날아가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슬픔과, 원한,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듯 보였다.
비명 소리, 갑옷과 살을 베어 내는 손의 감각, 피와 살덩이가 쏟아지며 나는 고약한 냄새, 스스로의 숨소리 등등.
모든 것이 뒤섞여 마치 장송곡처럼 세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가끔 노덴스 같은 강력한 거주자들이 세현의 몸에 상처를 냈지만, 세현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성검 엑스칼리버가 금빛 섬광을 뿜어낼 때마다 그 자리에는 죽음과 죄악감의 잔상만이 남았다.
검을 휘두르고, 급할 땐 주먹으로, 발로, 또 이빨로 잡아 뜯어 죽여 버렸다.
전투의 흥분과 죄악감이 뒤섞이며 세현은 자기 자신이, 여태까지의 인간 허세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고 있는 듯한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몸이 가벼워진다.
복잡했던 생각이 선명해진다.
죄악감이 지워지고 그 위에 누군가를 향한 증오와 복수가 덧씌워졌다.
일전에 최은철에게 느꼈던 것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감히 세상 하나를 족히 멸망시켜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악의였다.
이 감정의 대상은 누구인지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만든, 허세현을 손바닥에서 가지고 논 존재들.
관리자들.
특히 커플러라는, 저 재수 없는 개새끼.
그리고 저런 놈들에게 힘을 주고, 아파트로 수많은 존재의 운명을 농락하고 있는 두 의지라는 것들.
세현의 속에 터져 나온 거대한 감정의 화살은 정확히 그들을 향해 내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거주자가 죽었다.
온몸이 피로 뒤덮혀 악귀 같은 모습을 하며 거칠게 숨을 내쉬는 세현의 앞에, 분홍색 머리를 한 작은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세현 공, 대체……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시즌1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로도 세현과 꽤 친하게 지내 왔던 벚꽃공주였다.
그녀의 흰 얼굴에는 동료들의 피가 선명히 묻어 있었고, 눈빛을 통해 세현이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갈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세현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마디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써걱-!
엑스칼리버가 벚꽃 공주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 사이로 피가 왈칵 터져 나와 옷에 붉은 얼룩을 덧씌웠다. 그것은 마치, 피로 그린 벚꽃 같았다.
[히든 퀘스트 ‘혁명 전사들에게 영원한 안식을’을 클리어했습니다.]
[시스템 제어 아이템 ‘Unknowncube1000’이 활성화됩니다.]
그 직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세현은 거친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인벤토리에 잠시 넣어 뒀던 검은 큐브를 꺼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칠게 으깨 버렸다.
[시스템에 변동 사항이 생겼습니다.]
[’브레이브킹’ 허세현 님은 시스템의 제약 없이 어떤 대상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오호호호, 대단해용 대단해용! 역시 허세현 군! 최고의 쇼를 보여 줬어용! 벚꽃 공주를 굳~이 마지막에 죽이는 게 저는 제일 감동적이었네용.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니깐용?”
그때, 머리 위에서 커플러가 박수를 치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지금이다.’
그때, 세현이 땅을 박차며 쿠자이의 발까지 사용해 빠르게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히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