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크로노스(2)
세현이 주먹을 뒤로 크게 당기자, 그 움직임에 맞춰 랜돌프의 거구가 주먹을 크게 내지르기 위한 준비 태세를 취했다.
“다들 허세현을 도와! 이번 한 방에 다 때려 박는 거다!!”
이에 맞춰 사카린이 명령을 내렸고, 각 길드원들도 각자의 최강의 기술을 시전하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간다아아아아아!”
허세현이 악을 내지르며 주먹을 앞으로 있는 힘껏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전 길드원들이 함께 돌진하며 전방의 크로노스를 향해 최강의 기술들을 모두 때려 박았다.
<건방지구나!>
크로노스는 낫을 앞으로 휘두름과 동시에 눈에서 일자 광선을 쏘아 대며 응전했다.
그리고 마장기신과 길드원들의 시간을 모래시계를 발동시켰다.
“움직인다! 아직 움직여!!”
하지만 모래시계가 조금 전 시키가미를 이용한 기습으로 성능이 저하된 것인지 시간을 완전히 정지시키지는 못했다.
쩌저저적-!
도리어 마장기신의 압도적인 힘과 길드원들의 궁극기를 동시에 막아 내기 위해 많은 힘을 쓴 것인지, 모래시계 상단에 난 구멍을 기점으로 균열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관리장이라길래 좀 똑똑하게 싸울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똥멍청이네.”
그 모습을 보며 세현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러자 크로노스의 등 뒤에서 스켈레톤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에!>
크로노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는 세현이 요란하게 마장기신을 이용해 정면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사이, 세이메이가 시야의 사각에서 이들을 미리 보내 놓은 것이었다.
F급이던 시절 허세현이 크로노스에게 사용했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놈의 어깨까지 올라온 수십 기의 스켈레톤들은 빠르게 모래시계 상단에 나 있는 구멍으로 몸을 날려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몸을 내던진 수십 마리 중 안까지 들어간 스켈레톤은 고작 세 마리, 하지만 이거면 충분했다.
“폭발!”
후방에 있던 세이메이가 스킬을 발동시키자 스켈레톤의 몸뚱이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안에서 커다란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안 돼! 안 되에에에!>
순식간에 모래시계의 유리가 박살 났고, 아래로 모래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시간 감속 효과로 천천히 날고 있던 마장기신의 펀치가 삽시간에 놈을 덮쳐 반대편 벽면에 처박아 버렸다.
그 직후, 길드원들의 궁극기가 동시에 놈에게 쏟아졌다.
콰르릉-!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놈의 몸뚱이가 으깨졌다.
세현은 멈추지 않고 쓰러진 놈의 몸뚱이 위로 마장기신의 주먹을 계속해서 연타했다.
한 번 한 번 공격을 내디딜 때마다 크로노스의 HP바가 쭉쭉 줄어들었고, 얼마 가지 않아 놈의 HP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마장기신 랜돌프’의 연료가 0%입니다. 소환을 해제합니다.]
잠시 후, 마장기신의 연료가 다 고갈되며 자연스레 소환이 해제되었다.
세현은 서둘러 먼지가 일어나는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끝났군.”
그 자리에는 몸뚱이가 너덜너덜해진 크로노스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이에 가까이 다가가자 놈의 거대한 몸이 쪼그라들며 세현과 비슷한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놈의 가슴에는 이전에 허세현이 그랬던 것처럼 푸른빛의 크리스탈이 박혀 있었다.
<으흐흐, 50층의 리미터를 무시한 공격이라니. 이건 나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지.>
크로노스가 체념한 듯 읊조리자 세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너, 시즌5의 관리장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널 여기서 죽여야 50층이 클리어되는 거냐?”
<관리자를 죽여? 아하하하,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우리는 두 의지의 뜻에 따라 ‘아파트를 관리’하는 자들이다. 일개 입주자 따위가 나를 제거할 수 있을 리가! 그저 너는 내가 제시한 시련을 통과했을 뿐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세현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엑스칼리버를 놈의 정수리에 내리쳤다.
그러자,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나와 버렸다.
‘뭐야 이건?’
세현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시즌3의 관리자 ‘루이스 캐럴’과 이미 싸워 본 적이 있기에 당연히 관리장 또한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군.>
“흐음…… 분명 루이스 캐럴인지 뭔지 하는 놈은 때릴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는 ‘인과율’을 어긴 자다. 그는 두 의지께서 처분을 내렸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
“처분이라. 결국 니들도 잘난 척해 봐야 두 의지인지 뭔지가 팽하면 끝이라 그거군.”
세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몇 번 더 휘둘렀지만, 마찬가지로 불꽃이 일며 튕겨져 나왔다.
자신에게 빅엿을 먹였던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목을 칠 수가 없으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때 허공에서 느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허세현 님의 복수는 제가 대신하도록 하지요.>
찰나의 순간, 허공에서 벼락같이 붉은 잔영 하나가 추락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크로노스를 훑고 지나갔다.
공중으로 놈의 목이 날아가며 사방으로 피를 흩뿌리다가 추락했고,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지 크로노스의 얼굴은 분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냐!!>
크로노스의 몸뚱이가 뒤로 내달리더니 가슴에 박힌 크리스탈에서 빛을 발하며 시간을 역행시켰다.
그러자 뜯겨 나갔던 목이 다시 돌아와 놈의 몸뚱이에 붙었다.
<오랜만입니다 크로노스 님. 그동안 몸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리베르……. 네 녀석이…….>
크로노스를 공격한 것은, 거대한 사자에 올라탄 붉은 머리의 미남자 리베르이었다.
‘뭐야 이 상황은’
세현 또한 그를 피그말리온의 동굴에서 본 적이 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 관리자는 세현과 길드원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로 으르렁대며 대화를 이어갔다.
<내 힘을 노리던 건 알고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이빨을 드러내는구나.>
<암요! 그럼요! 크로노스 님의 크리스탈에 눈독 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아파트 전체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 강대한 물건을요!>
<이건 두 의지께서 직접 내게 하사하신 물건이다. 시간의 방을 관리하는 것 또한 나의 임무고.>
<그건 크로노스 님이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하셨을 때의 이야기지요. 본인이 입주자의 몸에 처박혀 아파트의 인과율을 제멋대로 왜곡시키지 않았습니까.>
리베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허세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과율을 망가뜨린다라.’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곧장 눈치챘다.
원래는 B급 입주자가 됐을 백설희가 A급 입주자가 된다든지, 몬스터의 등급이 바뀐다든지, 퀘스트의 디테일들이 변경된다든지 하는 것.
세현이 7년 전으로 돌아온 후, 묘하게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들의 디테일이 변한 것들을 말한 것이리라.
이 일련의 사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리베르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 모든 것은 몸속에 잠들어 있던 크로노스의 영향을 받아 생긴 일인 듯했다.
‘기분 더럽군.’
세현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그러졌다.
의도치 않게 관리자들의 알력 다툼에 끼어든 것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이 저것들의 손에서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관리자들의 힘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싸움을 거는 것도 위험할뿐더러, 두 존재의 대화 속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긁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건 실수였다. 나조차도 예기치 못한…….>
<커플러가 루이스 캐럴을 제거했듯, 저도 인과율을 망가뜨린 존재를 제거할 뿐입니다.>
<그런 억지가 통할 것 같으냐?>
<억지인지 아닌지는 제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크로노스는 조용히 분노한 듯 이를 악물고, 가슴의 푸른 크리스탈에서 빛을 뿜어냈다.
관리자가 가진 본연의 힘을 사용한 것일까. 세현이 보스전을 치를 때의 크로노스와 차원이 다른 강대한 힘이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하하, 제가 어찌 크로노스 님을 혼자 된 몸으로 적대하겠습니까. 다~ 수가 있어서 벌인 짓이지요.>
리베르는 저 강대한 힘이 두렵지 않다는 듯 미소 지으며 가볍게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보스룸의 문이 활짝 열렸다.
빛이 쏟아지며 그 너머엔 수많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고, 그들은 빠르게 안으로 치고 들어와 원형으로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얼핏 보기에도 족히 수천은 돼 보였다.
“뭐야 저건…….”
그들의 모습을 본 세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보스룸 전체를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 눈에 익은 자들이 몇 명 있기 때문이었다.
시즌1의 벚꽃공주와 마사무네.
시즌2의 살라웃 왕자.
시즌3의 앨리스와 쐐기벌레.
시즌4의 노덴스와 나이트 건트들까지.
모두 각 시즌의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세현이 익숙히 만나 왔던 거주자들이었다.
“니들, 왜 여기에?”
세현이 의아함과 함께 질문을 던졌지만, 그들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수많은 병사가 대기 중이었는데, 각자의 손에는 붉은빛을 은은히 내뿜는 병장기들이 들려 있었다.
<리베르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다른 구역이 거주자들을 무슨 수로 여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크로노스 님의 힘이 아파트의 인과율을 왜곡시켰다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당신의 힘이 저들을 반복되는 시간선에서 탈출시켰지요. 그리고 저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저항하기 위한 용사가 될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두 관리자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갑옷으로 중무장한 앨리스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자신의 검을 들고 외쳤다.
“아파트의 관리장이여! 당신이 가지고 있는 크리스탈을 우리의 주인인 리베르 님에게 넘겨주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대의 목숨을 살려 주겠소.”
<살려 줘? 거주자들 따위가 나를 살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놈들 따위 내 손짓 한 번이면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
잔뜩 분노한 크로노스가 앨리스를 향해 섬광을 날렸다.
그러자 앨리스는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정면으로 있는 힘껏 던져 버렸다.
촤아아악-!
놀랍게도 그녀의 창은 크로노스의 섬광을 반으로 가르더니 가슴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그는 창에 꿰뚫린 가슴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곤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 무슨…… 리베르 네 녀석 무슨 짓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 수가 있다고요.>
리베르가 이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한쪽 손을 크게 들어 올렸다.
“전군 공격하라!!”
그러자 앨리스가 무기를 들어 올리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전 병력이 자신이 든 병장기를 크로노스를 향해 일제히 발사했다.
마치 창과 화살로 펼쳐지는 비와 같이 공격이 쏟아졌고, 그중 근접 무기를 든 몇몇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크로노스를 향해 용맹하게 돌진했다.
<으아아아아!! 이런 하찮은 것들이!!>
크로노스 또한 포효하며 전방으로 힘차게 달려 나갔다.
몸에 화살과 투창이 고슴도치처럼 촘촘히 박혔지만, 조금의 아픔도 느끼지 않는 듯한 그의 모습에선 전율과 광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시간을 컨트롤하는 능력과 눈에서 광선을 뿜는 것으로 병사들을 잔혹하게 찢어발겼다.
순식간에 보스룸 일대는 거주자들의 피와 살점으로 점칠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사자와 토끼의 싸움을 보는 것 같은 일방적인 싸움.
하지만 병사들 쪽도 희망이 아주 없어 보이진 않았다.
그들이 쓰는 붉은 병장기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크로노스가 전개하는 방어막을 뚫고 들어갔고, 가끔 크로노스의 몸에 유효타를 날릴 때마다 시간 제어 능력을 저하시켰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크로노스의 몸에 난 상처가 병사들의 시체에 비례하며 늘어 가고 있었다.
거기다 잠시 후에는 관리자인 리베르까지 전투에 가세해 크로노스를 몰아붙였다.
그가 타고 있던 거대한 사자와 리베르가 원거리에서 날려 대는 붉은 구체 공격은 근거리에서, 원거리에서 크로노스를 동시에 귀찮게 했다.
“술탄의 용기를 보아라!!”
시간이 지나고 거주자들의 거의 절반이 죽었을 무렵, 살라웃 왕자가 과감히 앞으로 달려들어 붉은 곡도로 크로노스의 오른팔을 통째로 잘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