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라비린토스(3)
“누가 누구더러 더럽다는지 모르겠네.”
세현은 기가 차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까 본 스토리에 따르면, 분명 옹졸한 것은 미노스라는 왕이 분명했지만 도리어 왕비를 더러운 여인으로 매도한 모양이었다.
“음,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세현은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분이 났을 무렵, 허공에서 작은 포탈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그 아래로 떨어졌다.
“세현 씨!”
“오오 무사히 미궁을 잘 돌파하신 모양이군요.”
지난번 미궁 안에서 생이별을 해야 했던 설희와 다이달로스였다.
“다이달로스, 저 무덤은 뭐야. 미궁을 돌파하는데 필요한 힌트 같은 거라도 숨겨져 있는 건가?”
세현은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후, 곧장 파시파에의 무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저기 적힌 그대로입니다. 가엾은 파시파에 왕비께서 묻혀 계신 무덤이지요…….”
다이달로스는 침울한 얼굴로 봉분 앞에 다가가 작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이곳에 잠든 파시파에 왕비의 슬픈 삶에 대해 조의를 표했다.
“입주자이시여, 혹시 이 봉분을 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게 미궁 공략이랑 관련 있는 건가?”
건조한 질문에 다이달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현은 소환수들을 이용해 곧장 왕비의 무덤을 파헤쳤다.
잠시 후, 그 안에서 작은 항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달로스는 항아리에 얹어진 먼지들을 조심스레 떨어내더니 이를 양손으로 들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해 주신 여성분, 혹시 부탁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 저요? 부탁이라면 어떤……”
설희가 흠칫 놀라며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미노타우르스와 싸우지 않고 라비린토스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를 유일하게 사랑했던 한 여인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좀 더 정확히 말해 봐.”
세현이 건조하게 되묻자, 다이달로스는 파시파에 왕비의 유골함을 양팔로 높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유골을 이용해 향수를 만들어 여성에게 뿌리고, 미노타우르스의 적의를 지우는 것입니다.”
“으음…… 괜찮아요. 설희 씨?”
이를 듣던 세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아파트 안이라고 해도, 사람의 뼛가루로 만든 향수를 몸에 바르고 싶어 하는 사람 따윈 없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미노타우르스와 싸운다고 크게 위협이 될 일도, 손해를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세현은 설희에게 이를 강요할 생각이 1도 없었다.
“으음…….”
설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뭔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진지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만 하면 굳이 미노타우르스라는 그 몬스터를 잡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의외로 설희는 순순히 다이달로스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럼 다른 분들이 미궁을 돌파하기 전까지 향수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유골함에서 뼛가루를 한 줌 꺼내 플라스크에 담아낸 후, 다른 약들과 뒤섞었다.
그리고 플라스크를 작은 돌 두 개로 받친 후, 아래의 틈 사이에 고체 연료에 불을 붙여 집어넣었다.
그러자 플라스크가 보글보글 끓자 뼛가루와 액체가 섞이며 분홍색으로 변했다.
다이달로스는 작은 철 막대를 플라스크 주둥이 안으로 집어넣어 이를 신중히 저어 줬다.
한 30분쯤 흘렀을까? 온 사방으로 진득한 사향과 함께 분홍색 연기가 온 사방으로 흩어지며 코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잠시 후, 설희와 다이달로스가 나타났을 때처럼 허공에 포탈이 하나 생기더니 그 안에서 에D츄와 세이메이가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주, 주군! 뵙고 싶었습니다!”
“쭈인님! 보고싶었츄!”
둘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징징대며 자신들이 미궁 속에서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한참을 떠벌떠벌 늘어놓았다.
“완성됐습니다.”
다행히 다이달로스가 향수를 완성했고 세현은 귀에서 피가 나오기 전에 적당히 둘의 이야기를 끊을 수 있었다.
“이 향수를 지니고 계시지요. 차후에 쓸 일이 생길 겁니다.”
“네….”
설희는 향수를 걷네 받아 조심스레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제 미노타우르스가 있는 가장 깊은 곳의 미궁으로 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서 다음 장소로 가는 방법은 뭔데?”
“왕비의 무덤에 저주를 퍼붓던 검들, 저것들이 길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다이달로스가 무덤에서 뽑혀 나와 바닥에 흩어진 수십 개의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그중 하나를 주워 터덜터덜 공중섬의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섬의 끝부분에는 딱 검 하나가 충분히 들어갈 크기의 홈들이 각 방위에 맞춰 새겨져 있었는데, 다이달로스는 자신이 든 검을 홈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단순한 무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방법을 눈치챈 세현이 곧장 검을 들어 다이달로스를 도와 섬 곳곳에 퍼져 있는 홈에 검을 밀어 넣었다.
덜컥-!
그렇게 마지막 검을 홈에 밀어 넣는 순간, 뭔가의 기계음이 들려오더니 섬 전체가 격렬히 흔들리며 상공으로 천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천장이 열렸고, 사이로 빛이 쏟아지며 그 안으로 섬이 빨려 들어갔다.
“저 미궁이 이 라비린토스의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공간 전체가 거울처럼 만들어진 형태의 미궁이었다.
그 복잡도가 상상을 초월해서, 여기저기 비춘 동료들의 모습에서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중력 역전이나 공간 왜곡 등 지나왔던 미궁의 모든 트릭이 동시에 재현되는 지옥 같은 장소였다.
“다이달로스, 여기를 지나가는데 평균적으로 얼마나 걸려?”
“빠르면 2~3개월, 오래 걸린다면 1년도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다이달로스의 터무니없는 대답에 세현은 당황하지 않고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내용을 복기했다.
[다른 부분들도 어려웠지만 마지막 미궁은 정말 지옥이었어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한 단계 한 단계씩 파헤치고 나왔죠.]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라비린토스를 돌파했을 때,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미궁 안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돌파 방법이 있긴 했는데 그 방법이 저희에겐 시도조차 불가능한 방법이어서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미궁의 난이도는 그 당시 최정상급 입주자들로 이뤄진 파티에게조차 경악스러운 수준이었으며, 이를 돌파하는 데만 거의 몇 달이 걸렸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게 갇혀 있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야.’
다른 길드에게 44층까지 최초 공략을 내주기로 한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해도, 여기서 몇 달이라는 시간을 순순히 날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세현은 애초에 다큐멘터리 도중에 언급된 ‘다른 돌파 방법’을 선택할 요량으로 이곳에 들어왔었다.
“더 빨리 진행할 방법이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다이달로스는 설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장 눈치채고 인벤토리에서 조금 전에 만들어 두었던 향수를 꺼냈다.
“잠시 빌리겠습니다.”
그는 향수가 담긴 플라스크를 집더니 거울 미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가늠했다.
그러곤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후, 머리카락이 격하게 흔들리다 못해 날아가는 것으로 그의 위치가 바람이 강하게 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이 가장 마지막 방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 같군요.”
다이달로스는 플라스크의 끝을 열어 향수의 반쯤을 바닥에 흘려 냈다.
그러자 강렬한 사향과 함께 분홍빛 기체가 뭉게뭉게 일어났고, 이는 통로에 부는 바람을 타고 반대편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일련의 작업을 마친 후, 다이달로스는 다시 플라스크의 뚜껑을 닫고 남은 향수를 설희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후에 미노타우르스가 나타나면 이를 쓰시면 될 겁니다.”
“이걸 쓴다고요? 어떤 식으로……”
“향수를 몸에 뿌려 버리시면 됩니다. 미리 뿌리면 향이 약해질 수 있으니 일단은 기다리시지요.”
이후 다이달로스의 말에 따라 세현 일행은 거울 미궁의 초입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한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챙그랑! 콰앙!
유리가 박살 나는 것 같은 파쇄음과 함께, 공간 전체가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는 정확히 다이달로스가 향수를 이용해 분홍빛 기체를 날려 보냈던 통로의 저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으어어어어어!”
거기에 통로 너머에서는 도무지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상한 울부짖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준비하십시오!”
다이달로스의 외침에 맞춰, 설희가 몸에 향수를 들이부었다.
그리고 세현과 에D츄, 세이메이는 곧장 몸을 뒤로 물려 통로 반대편에서 나타날 ‘무언가’의 공격에 대비했다.
잠시 후-.
“어머니임!”
미궁 초입의 거울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그 안에서 거대한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 보스 몬스터 / 라비린토스의 마수, 미노타우르스]
- 포세이돈에게 진상되기로 했던 아름다운 흰색 수소와, 여왕 파시파에 사이에서 태어난 마수.
자신에게 씨앗을 준 두 존재의 아름다움을 닮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라고도 불린다.
등급: 히든(X)
레벨: 230
HP / MP: ???? / ????
반은 소, 반은 인간의 피를 물려받은 마수 미노타우르스.
‘그녀’의 모습은 신화 속에서 묘사된 우악스러운 괴물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담겨 있는 근육질의 육체와, 가슴과 골반이 도드라진 유선형의 몸매. 그것을 덮고 있는 도화지같이, 또는 눈같이 새하얀 피부.
거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왕비의 모습을 꼭 닮은, 서구적인 미인의 얼굴을 지녔다.
그나마 머리에 길게 돋아난 두 개의 흰 뿔, 엉덩이 뒤로 길게 늘어진 꼬리, 발에 채워진 족쇄 등이 그녀가 흰색 수소와 왕비의 사이에서 태어난 미노타우르스라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걸 미궁 안에서 때려잡으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꽤 고생이긴 하겠군.’
세현은 미노타우르스가 그다지 쉬운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
스펙 자체가 메인 보스급에 필적하는데다가 이 까다로운 거울 미궁 안에서 전투를 펼쳐야 한다는 제약 조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도 전투를 벌인다면 충분히 잡아내고 아이템을 수급할 수야 있겠지만, 폰 한두 마리쯤은 잃을 각오를 해야 할 듯 보였다.
“어머니…… 어머니!”
미노타우르스는 울상을 해 보이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에 다이달로스는 고갯짓으로 설희를 제외한 나머지가 뒤로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설희는 상황을 대강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지금 설희가 해야 하는 일은, 눈앞에 있는 미노타우르스가 자신을 그녀의 어머니인 ‘파시파에’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다.
현재는 다이달로스가 만든 향수 덕분에 설희를 파시파에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자칫 말을 잘못했다간 일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여기서 전투를 벌여야 할 테고, 미노타우르스를 죽이지 말아 달라는 다이달로스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게 될 게 분명했다.
설희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미노타우르스를 구슬릴 방법을 떠올렸다.
장고 끝에, 설희는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붉은 두 입술을 뗐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닌 아름다운 노래였다.
이는 설희가 동료들에게 버프를 줄 때 부르는 보통의 노래가 아닌, 듣는 것만으로도 눈동자가 스르르 감기며,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감미로운 자장가였다.
그 아름다운 음색이 미궁 전체에 울려 퍼지자, 미노타우르스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순식간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
그녀는 천천히 설희의 앞으로 다가와 거대한 몸을 갓난아기처럼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