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라비린토스(2)
“제가 갇혀 있던 이 미궁은 라바린토스의 서쪽에 있는 곳입니다. 일단 미노타우르스와 망자들이 갇혀 있는 동쪽 미궁으로 이동해야 할 겁니다.”
“잠깐, 망자들이 갇혀 있다고?”
“네, 미노스 왕에 의해 미노타우르스에게 제물로 바쳐진 자들입니다. 대부분 왕에게 위협이 되는 정치인이나 유력 인사들이 이곳에 버려지지요. 그들은 이 미궁 속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망자가 되어 영원히 미노타우르스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물론 이곳을 탈출하지 못한다면 저희도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겠지요.”
“……미노스 왕인지 뭔가 하는 그 인간, 너무 쓰레기 같은데? 댁도 미궁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더니 여기 가둔 거라며.”
“흐음…. 쓰레기라, 굳이 입에 담고 싶지 않지만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현의 대꾸에 다이달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대답했다.
이후 다 함께 숨겨진 공간을 빠져나왔다. 다이달로스는 세현이 앞서 만들어 놓았던 달빛 길을 따라 기둥과 기둥 사이를 걸어가더니 6~7번째쯤에 놓인 돌기둥 위에 멈춰 섰다.
“이 기둥이 달의 기운을 가장 강하게 받는 보름달의 기둥입니다.”
그의 말대로 돌기둥 위에는 보름달이 음각으로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까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정신없이 돌파하느라 미처 체크하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다이달로스는 품속에서 빛을 뿜는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더니 보름달 그림 한가운데 있는 작은 홈에 그것을 넣고 돌렸다.
철컥-!
열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리자 다이달로스가 빠져나온 방으로 향했던 달빛이 천천히 움직이며 세현 일행이 서 있는 기둥 위로 다가왔다.
쿠구구구구-!
그러자 돌기둥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바닥에 촘촘히 박혀 있던 가시들이 싹 사라졌다.
“저리로 가시면 됩니다.”
다이달로스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킨 후 앞으로 걸었다.
그를 따라 벽면의 터널로 들어가자 그 내부에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미궁이 나타났다.
마치 우주 공간 위에 추상화를 그려 놓은 듯한 기괴한 광경의 미궁.
앞뒤, 양옆, 위아래, 중력이 제멋대로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고, 여기저기 포탈이 놓여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빙글빙글 돌아 이를 계속 쳐다보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여기서부턴 길을 한번 잃으면 정말 힘들어지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다이달로스는 품속에서 작은 실타래 몇 뭉치를 꺼내 한쪽 끝은 팔목에, 다른 한쪽은 미궁의 시작 지점에 놓인 횃불의 횃대에 돌돌 묶었다.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만든 실입니다. 거의 무한한 길이로 늘어나며 웬만해서는 절대 끊어지지 않지요. 혹여나 길을 잃더라도 절대로 아무 곳에나 발을 들이시지 말고 이 실을 이용해 길을 찾아가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미궁의 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게 필요할 정도로 이 내부가 복잡하다 그거지?”
“그렇습니다.”
세현은 탐탁지 않은 듯 턱을 쓰다듬으며 그와 함께 미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다지 복잡해 보이진 않는데, 이 실이 필요할 정도인가?’
중력이 역전되고, 방향이 이리저리 뒤틀려 있어 어렵긴 했지만 그의 뒤에 바짝 붙어 가고 있기에 그다지 길을 잃을 걱정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미궁 안으로 굽이굽이 걸어가던 중, 어느 지점에서 길이 넓어지더니 커다란 사각형의 바닥이 나타났다.
모두가 그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다이달로스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각자가 서 있는 바닥이 정확히 삼등분으로 쪼개져 위, 아래, 옆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설희와 다이달로스, 세이메이와 에D츄, 그리고 허세현이 각각 나뉘어 흩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이건 뭔데!”
“쭈인님! 쭈인님!”
“주군!”
“세현 씨!”
세현은 멀어지는 바닥과 바닥 사이를 뛰어넘어 보려 했지만, 그사이에 정체 모를 결계가 몸을 밀쳐 내 다시 바닥 위로 떨어져 버렸다.
“다들 아라크네의 실을 잘 이용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다이달로스의 외침을 끝으로 각자의 모습이 서로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벌어졌다.
잠시 후, 세현이 서 있는 발판은 미궁의 다른 부분에 가서 붙어 버렸다.
“이래서 아라크네의 실인지 뭔지 가지고 있으라고 한 거구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걸어가자, 미궁의 멀리서 한 무리의 좀비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여기부턴 전투도 있다 그거지?”
세현은 폰을 모두 소환한 후 곧장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침착하게 붉은 뱀의 검을 전방으로 채찍처럼 후려쳤다.
콰드드드득-!
그러자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별다른 저항도 없이 단번에 박살 나 버렸다.
“뭐야, 드럽게 싱겁네.”
굳이 소환수를 쓸 것도 없었다. 좀비들은 42층에서 나온 몬스터 치고는 지나치게 맥없이 무너졌다.
세현은 콧방귀를 내뿜으며 놈들을 밟고 지나쳐 반대편으로 걸었다.
그러던 중, 발목을 무언가가 잡아채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끄어어어어, 사, 살려 줘…….”
“날, 날 남겨 두지 마!”
가루가 되었던 좀비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지며 서서히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재생된 좀비의 팔이 세현의 발목을 잡아챘기에 감촉이 느껴졌던 것이었다.
“하아…. 귀찮아 죽겄네.”
세현은 이번엔 엑스칼리버를 이용해 좀비들을 잘게 잘게 다져 놓았다.
하지만-
“으어어어! 우, 우리도 나가게 해 줘!”
좀비들의 몸뚱이는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아오 진짜! 짜증나게!”
몇 번이고 놈들의 몸뚱이를 뭉개 놓았지만, 좀비는 계속해서 재생해 다시 공격을 시도해 왔다.
미궁 옆의 우주 공간으로 놈들을 날려 보내는 방법도 시도해 봤지만, 그럴라치면 어디선가 다시 날아와 세현이 있는 위치로 정확히 착지했다.
“……이거 짜증나네.”
방법은 놈들을 무시하고 미궁의 안쪽으로 내달리는 것뿐이었다.
좀비들은 쉴 새 없이 음성을 내뱉으며 그 뒤를 따라왔고, 마치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됐다.
애초에 좀비의 전투력은 보잘것없었기에 별 위협은 안 됐지만, 이는 세현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설상가상으로 미궁 자체의 복잡도도 꽤 높았다. 중력이 곳곳에서 역전되거나, 포탈이 나타나 세현을 전혀 다른 곳에 떨궈 놓는다든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한 30여 분을 헤매고 있으니 세현은 자신이 지금 어느 즈음에 와 있는지 감조차 오질 않았다.
미궁을 헤매고 있는 것이라면 어느 기준점이 될 법한 비슷한 풍경이 나와야 하는데, 구간에서 구간을 이동할 때마다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 나오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했다.
‘젠장…… 어디쯤인지 전혀 모르겠다.’
무슨 짓을 해도 탈출구는 나오지 않았고, 좀비들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따라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간에 대한 감각도 점차 흐릿해져 갔는데, 체감상으로는 이 미궁 안에서 이미 몇 달, 아니 몇 년을 헤맨 거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미궁, 단순히 공간만 왜곡된 게 아닌가?’
세현은 잠시 멈춰 서서 소환수들이 좀비를 상대하게 한 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중, 팔목에 아라크네의 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처음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같이 마냥 미궁 속을 헤매 봤자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라크네의 실을 따라 역으로 돌아갔다.
‘뭐야 이건?’
그러자 놀랍게도 불과 몇십 초를 거꾸로 달려 돌아가는 것만으로 미궁의 초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현이 미궁 안쪽으로 내달렸던 아득한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작정 앞으로 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 모양인데.”
세현은 곰곰이 이 미궁에 어떤 요소가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계속 되살아나는 좀비, 새로운 풍경, 아라크네의 실을 따라 돌아오자 바로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게 된 상황까지.
여러 단서를 머리에서 뒤섞던 중, 세현은 한 가지 힌트를 캐치해 낼 수 있었다.
“좀비 놈들, 지금은 어디 갔지?”
무슨 짓을 해도 되살아나 세현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좀비가 보이질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는 귀찮아서 폰들이 놈들을 썰도록 방치했기에 이를 눈치채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린 것이었다.
“혹시……”
세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앞으로 한 열 걸음을 전진했을까? 그러자 저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좀비가 세현에게 달려들었다.
“오호라, 대충 감 잡았어.”
세현은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좀비 중 한 놈의 갈비뼈를 붙잡아 질질 끌며 아라크네의 실이 연결된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횃불이 놓인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
“끄어어어어어!”
그러자 좀비의 피부의 살덩이가 빠르게 썩어 문드러지더니 금세 해골로 변했고, 이윽고 그 해골마저도 검은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한 번에 흐른 것처럼 말이다.
“대충 알겠군.”
세현은 자신이 헤매던 공간이 단순한 미궁이 아니라, 일종의 시공간을 동시에 왜곡시키는 결계 같은 것임을 자각했다.
그렇다면 이 결계 내부에 있는 뭔가의 트리거를 발동시켜서 이를 탈출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트리거… 트리거라….’
세현은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한 것은 입구 근처에 서 있는 수십 마리의 좀비를 시작 지점으로 끌고 와 모두 제거하는 것이었다.
“음…. 이건 아닌가?”
하지만 모든 좀비를 제거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심지어 다시 미궁 안쪽을 탐사하자, 좀비들이 다시 나타나 세현을 쫓기 시작했다.
‘혹시 저건가?’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던 중, 세현은 미궁 내부의 풍경이 계속 새롭게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번뜩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횃불을 붙일 수 있는 횃대였다.
딱히 눈에 띄지 않았기에 넘기던 부분이었지만, 공간이 계속 뒤바뀌는 와중에도 횃대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일단 해 보자.’
세현은 곧장 시작 지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재료로 쓰이는 가죽 하나를 둘둘 말아 이걸 불쏘시개 삼아 끝에 불을 붙인 후 다시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끄어어어어!”
다시 한 번 좀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어쩐 일인지 어느 정도 거리까지만 다가오고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이 횃불 때문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횃불을 앞으로 내밀자, 좀비들은 딱 그만큼 뒤로 주춤 물러났다.
조금 전 추측대로 이 불꽃은 미궁 내부의 시공간 왜곡을 파훼하는 기능이 있는 듯 했다.
세현은 불이 꺼지지 않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 후, 가장 처음 횃대가 보이는 위치에 불을 놓았다.
그러자 불이 활활 타올랐고, 더 이상 좀비들이 이 구역 근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였다.
세현은 앞으로 나아가며 횃대가 보이는 구역마다 모두 불을 놓았다.
그러자 계속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던 미궁이 비슷한 풍경을 반복해서 보여 주기 시작했다.
서서히 이 미궁의 구조가 머리에 읽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횃대가 있는 거의 모든 공간에 불을 놓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이 미궁의 끝으로 보이는 공중에 떠 있는 작은 섬이 나타났다.
그 공중 섬의 한가운데에는 누가 보기에도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봉분이 세워져 있었다.
봉분의 위에는 마치 저주라도 퍼붓듯 날카로운 칼 수십 개가 박혀 있었고, 그 앞에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세현이 곧장 비석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 위로 작은 팝업창이 출력됐다.
[수소와 간음을 한 더러운 여인 ‘파시파에’ 이곳에 묻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