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화.
라비린토스(1)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미노타우르스’ 신화에 얽힌 존재들의 목소리인 듯했다.
“으으으 쭈인님! 무, 무셔워요!”
“주군!”
“으으…….”
공간의 뒤틀림과 환청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고, 세현 일행은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현 또한 이를 계속 듣고 있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다들 내 손 꽉 잡아.”
세현은 세이메이와 설희의 손을 꽉 붙잡았고, 에D츄는 세이메이의 허리에 기다란 꼬리를 감았다.
이후 세현은 눈을 꼭 감고 반복해서 들려오는 환청에 집중했다.
<미궁을 만들라 해서 만들었을 뿐 아닙니까! 국왕이시여! 국왕이시여!>
그리고 그중에 늙은 노인의 목소리를 따라 앞으로 한 발 한 발을 천천히 내밀었다.
“세현 씨. 그쪽으로 걸어가면 안 돼요!”
전방의 공간이 마구 뒤틀리고 있는 탓에 설희가 팔을 뒤로 잡아당겨 세현을 멈췄다.
이대로 앞으로 나갔다간, 쉴 새 없이 왜곡되고 있는 공간들 사이에 끼어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현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걱정 말고, 눈 감고 내 손만 잡고 따라와요.”
“……”
설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눈을 감고 세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제발 부탁하네!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이곳에서 꺼내주게나!>
그렇게 앞으로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다른 환청들이 서서히 작아졌다.
그 반대로 노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이제 눈 떠도 돼요.”
“어라?”
세현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폭풍같이 몰아치던 공간의 뒤틀림과 환청이 깨끗이 사라졌다.
“히, 히이이익! 떠, 떨어져욧, 쭈인님!”
갑자기 에D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발랑 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직 세현 일행이 서 있는 위치만이 기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이 온통 천 길 낭떠러지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바닥에는 가시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거기 놓인 무수히 많은 해골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 반대편까지 건너가야 하는 모양이군요.”
“응, 뭐 그런 것 같네.”
세이메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 약 100~200m 되는 거리에 다른 돌기둥이 연속적으로 놓여있었다.
“이걸 타고 넘어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흐음…… 그래도 명색이 미궁인데 그렇게 쉽게 지나갈 수 있게 해 놨을려고.”
세이메이가 손에 시키가미의 재료가 되는 제비 모양의 종이접기를 꺼내 들며 말하자 세현이 탐탁지 않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일단 한번 날려 보겠습니다.”
제비 모양의 종이접기를 앞으로 날려 보내자 그 크기가 순식간에 사람만 하게 커지며 시키가미로 변했다.
시키가미는 아무런 일 없이 100m쯤을 날아갔고, 세이메이는 됐다는 듯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이었다.
미궁의 벽면에 푸른빛을 내뿜는 점들이 무수히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수천여 개에 달하는 섬광을 시키가미를 향해 쏘아댔다.
이를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시키가미는 공중에서 검은 재가 되어 산화해버렸다.
“저걸 타고 가면 저렇게 될 것 같은데.”
“크윽……”
세이메이가 분한 듯 이를 악물자 세현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여유 있는 말투로 대꾸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부터 해 보자고. 명색이 미궁이면 파훼법이 다 있겠지.”
세현은 일단 인벤토리에 쟁여놓았던 에너지 바 몇 개를 꺼내 나눠줬다.
에D츄도 배가 고프다고 징징대는 탓에 싸구려 사료도 몇 포대 꺼내 바닥에 대충 흩뿌려 놓자,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이를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자 보자아…. 여길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을 텐데.”
세현은 다큐멘터리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쪼그리고 앉아 자신이 서 있는 돌기둥 위에 새겨진 문양들을 훑어봤다.
“여기 뭐라고 적혀 있네.”
손톱같이 작은 상태에서 점차 떠올라, 보름달이 되어 다시 작아지며 아래로 지는 12개의 달의 그림.
그 아래에 구불구불한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고 그곳에 손을 가져다 대자 작은 팝업창이 출력됐다.
[달의 흐름을 따라 건너라.]
“달의… 흐름을 따라 건너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걸 본 세이메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세현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다 허공으로 가볍게 뛰어들었다.
“주, 주군!”
그녀가 놀라 외쳤지만, 세현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허공에 가뿐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봐. 여기 어떻게 건너는지 대충 감이 왔으니까.”
세현은 자신이 발을 내딛는 순간, 허공에 수십~백 개의 문양이 1~2초 정도 생겨나 빛을 뿜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다시 한 번 가볍게 발을 구르자, 그 문양들은 다시 나타나 빛을 뿜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초승달, 반달, 보름달, 그믐달까지…… 그 문양들은 기둥 위에서 봤던 그림처럼 여러 형태의 달을 형상화시켜 놓은 형태였고, 제각기 좌우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세현이 서 있는 발판 위에는 아주 작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었고, 이 또한 옆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달이 차오르는 순서대로 맞춰서 가면 된다 그거지.’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사전 정보를 알고 있던 세현은 이 미궁의 비밀을 단번에 간파했다.
‘이번 기둥에서 다음 기둥까지 딱 12칸으로 이뤄져 있어. 달이 차오르는 순서대로 맞춰서 건너면 된다.’
세현은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이 우측으로 완전히 흐르기 전, 타이밍에 맞춰 앞쪽으로 뛰었다.
조금 전 위치보다 조금 더 달이 차오른 문양이 있던 위치를 밟자 허공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뿜어지며, 전체 문양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세현은 각 단계에 맞춰 달이 조금씩 차오르게 허공을 밟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문양이 좌우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각각의 위치에 따라 그 속도도 달랐기에 타이밍이나 거리를 재기가 쉽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쿠자이의 발’을 이용해 이단 점프를 사용해, 어렵지 않게 다음 칸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3~4번째 발판을 넘어갈 때 즈음엔 묘한 리듬감이 생겨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었다.
“후우~ 이거 그래도 짜릿짜릿한데.”
세현은 채 3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반대편 기둥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자 첫 번째 기둥과 두 번째 기둥에 은은한 빛으로 만들어진 길이 생겨났다.
일행은 그 길을 따라 두 번째 기둥으로 건너왔고, 세현은 조금 전과 같은 방법으로 세 번째 기둥으로, 또 네 번째 기둥으로 이동했다.
그때마다 발판이 이동하는 속도와 패턴이 미묘하게 변하며 난이도가 상승했지만, 세현은 그때마다 적당한 리듬을 찾아가며 어렵지 않게 이를 파훼할 수 있었다.
“후우, 생각보다 할 만하네.”
그렇게 총 12개의 기둥을 모두 뛰어넘자, 그 너머에 안전해 보이는 바위 지형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현 일행은 그곳으로 올라선 후, 한숨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저걸 어떻게 해야 되는 것 같은데요.”
설희의 질문에 세현이 손가락으로 저 멀리 놓인 번쩍이는 물체를 가리켰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에는 골프공을 반으로 잘라 엎어놓은 듯한, 크리스탈 재질의 물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언제나처럼 괴어가 적혀 있었고, 거기에 손을 가져다 대자 팝업창이 출력됐다.
[달의 힘을 이곳에 강림시켜 공간을 깨워라.]
“달의 힘을 이곳에 강림시켜라…?”
아리송한 문구에 세현 일행은 고개를 갸웃하며 머리를 모았다.
그러던 중, 세이메이가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쳤다.
“주군, 저 부분이 뭔가 수상한 것 같습니다.”
세이메이가 가리킨 천장 부분에 균열이 생긴 지점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균열 같았다.
“좋아, 에D츄 네 등 좀 빌리자.”
세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에D츄의 등을 디딤돌 삼아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곤 붉은 뱀의 검을 길게 늘어뜨려, 균열이 생긴 부위를 강하게 후려쳤다.
콰드드득-!
그러자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 사이에서 흰빛이 강렬하게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골프공 형태의 크리스탈은 그 빛을 수백 갈래로 찢어 토해 냈다.
그러자 벽면에 있던 크리스탈들이 이 빛에 감응하여 발광했고, 공간 전체가 마치 작은 우주를 보는 것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와아, 예뻐요~”
모두가 그 광경에 감탄하는 사이, 수백 갈래의 빛은 다시 한 지점에 모여 돌로 된 벽면에 거대한 정사각형을 그렸다.
쿠우우우-!
그 정사각형이 좌우로 갈라지며 안에서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그리스의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흰 천 옷을 둘러 입은 대머리 노인이 멍한 얼굴로 세현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당신이 다이달로스인지 뭔지 하는 사람 아니야? 구해 달라며.”
세현이 대충 대꾸하자 그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지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드디어… 드디어 이곳을 탈출하는구나!”
세현 일행은 잠시 자리에 앉아 그의 얘기를 들었다.
이 라비린토스는 다이달로스가 직접 만든 미궁이지만, 이곳의 정교한 방어 장치로 인해 혼자 빠져나갈 순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 그는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을 이미 수십 년간 기다려왔다고 한다.
‘얘기를 들으니 우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긴 하다만…….’
세현은 그에게 간단히 요깃거리가 될 것을 건네준 후, 다독여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되물었다.
“미노타우르스가 지키고 있는 라비린토스의 심층부를 지나야 합니다.”
“요컨대 그놈을 죽이면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다 그거지?”
이에 다이달로스는 슬픈 얼굴을 해 보이며 대답했다.
“꼭 그를 죽여야 하시겠습니까?”
“그럼 그놈을 안 죽이고 미궁을 빠져나갈 방법도 있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세현은 미노타우르스를 잡을 생각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놈을 쓰러뜨리면 꽤 쓸 만한 장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는 것을 미리 보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이번 히든 퀘스트에 다른 분기가 있나 싶어 질문을 던져 본 것뿐이었다.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만…… 생각해 둔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 방법을 이용하면 이 미궁을 더욱 빨리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히든 퀘스트 / 다이달로스의 제안]
- 미노타우르스가 불쌍하다고 여기는 다이달로스가 당신에게 몇 가지 부탁과 제안을 해 왔다. 이 방법은 확실하지 않으며, 당신이 제안을 거절해도 미노타우르스를 쓰러뜨린다면 미궁을 빠져나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수락하기] [거절하기]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라?’
퀘스트 창에서 대놓고 ‘확실하지 않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세현은 저것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도 별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라는 뜻이라는 걸 알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설희 씨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으음, 저는 되도록이면 죽이고 싶진 않긴 한데요. 앞선 이야기를 다 봤을 때는…… 조금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슬쩍 던진 질문에 설희가 씁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마 미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 영상의 형식으로 출력됐던 미노타우르스 신화의 내용을 보고 그의 신세가 처량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주군! 앞서 봤던 벽화의 이야기에서 미노타우르스라는 요괴는 아주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츄츄 맞아요! 동물 학대 반대! 동물을 사랑해야 합니다 쭈인님!”
그러자 옆에 있던 세이메이와 에D츄가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며 닦달을 해 왔다.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꾸했다.
“너희들… 이렇게 감성팔이에 약한 놈들이었냐.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세현 또한 미노타우르스를 죽이지 않는 선택지에서 뭔가 다른 보상이나 타이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호기심에 다이달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인이시여!”
“감사는 됐고, 이제 뭘 해야 하는지 후딱 읊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