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141화.
10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뭘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데?”
“제가 저 그로기인지 뭔지 하는 놈이랑 싸워 봤잖아요. 그 수준이면 무조건 45층에서 막혀요.”
“흐음…….”
세현의 주장에 메디아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때 사카린이 그녀의 어깨를 뒤에서 두드리며 말했다.
“허세현 말대로 해 보자고.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잖아?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거면 확실한 감이 있는 거겠지.”
“그럴…까요?”
“내가 보증할게. 만약 허세현이 하자는 대로 해서 잘 안 풀리면, 니들한테 내 장비 다 팔아서 전 재산 N분의 1 해 준다!”
“진짜요?”
“콜콜!”
그 말에 길드원 몇 명이 혹해서 되묻자 사카린이 섭섭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다들 돈에 미쳐선, 뭐 어쨌든 이견 없는 거지?”
“네에~!”
돈의 힘이 대단하긴 한지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구두약속일 뿐이지만, 길드원들은 사카린의 성격상 홧김에라도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했는지 군말 없이 긍정의 뜻을 보낸 것이다.
이에 사카린은 흐뭇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때 허세현,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그건 좀…… 솔직히 부담스러운데요.”
“이잉, 왜? 기껏 보증도 서 줬구만.”
“굳이 전 재산까지 걸건 없잖아요. 방금 전은 내가 생각해도 좀 멍청한……”
“아오 이게! 그냥 고~맙습니다 하면 되잖아!”
냉소적인 리액션이 섭섭했는지 사카린은 양팔로 머리를 세게 끌어안아 헤드락을 걸었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세현은 괜히 오버하며 죽을 것 같은 시늉을 하는 것으로 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냐? 팔콘 유니온인지 뭔지 하는 것들 앞으로 치고 나갈 때까지 그냥 기다리면 돼?”
“네, 레벨 업하고 아이템 파밍하고. 각자 하고 싶은 거 하시면서 편하게 지내세요.”
“그래. 너무 미친 듯이 달리기만 했는데 한동안 좀 쉬엄쉬엄 가자고.”
이날, 서큐버스 군단은 42층의 공략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 † †
이후 세현을 포함한 서큐버스 군단 멤버들은 각자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아파트의 세계를 즐기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아파트 속 맛집이나 잘생긴 NPC를 찾아다녔고, 또 누구는 이곳저곳을 관광지 삼아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물론 세현은 그런 여유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새로 얻은 엑스칼리버의 레벨을 올려야 할 뿐 아니라, 마장기신 랜돌프의 연료를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업을 수행한 곳은 ‘미노타우로스’족이 잔뜩 출몰하는 미노스의 미궁이었다.
“주군! 제가 저 소 요괴들을 몰아오겠습니다!”
푸른 하늘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거대한 미궁 내부, 세이메이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수십 마리의 미노르스 근처에 스켈레톤과 시키가미를 소환했다.
미노르스는 상체는 소, 하체는 인간의 모습을 한 반신반인의 괴물로, 근력과 체력이 뛰어나 동레벨 대비 꽤 준수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놈이었다.
세현이 입주자 시험에서 만났던 히든 보스 ‘미노타우렌’의 상위 호환격 몬스터라 생각하면 쉬웠다.
놈들은 세이메이의 소환수들을 보고 잔뜩 흥분했는지 뒷발을 구르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스켈레톤과 시키가미는 이에 등을 돌려 볼품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금입니다!”
잠시 후, 미궁의 폭이 갑자기 넓어지는 지점의 양옆에서 대기 중이던 골렘과 오니들이 기습을 시도했다.
당황한 미노르스들이 양쪽으로 흩어져 우왕좌왕했고, 세이메이는 몇몇 개채에게 포박술을 걸어 사슬을 이용해 혼란을 더했다.
수십 마리의 소 인간은 서로 얽히고설킨 상태에서 세이메이의 소환수들과 힘겨운 전투를 이어갔다.
그때, 백설희가 노래를 불러 소환수들에게 버프를 걸어 줌과 동시에 생명력을 회복시켰다.
화이트 비숍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었다.
“좋아, 빠르게 가자고.”
그사이 세현이 등에는 엑스칼리버를, 오른손에는 붉은 뱀의 검을 들고 앞으로 내달려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쿠드드득-!
붉은 뱀의 검이 미노르스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놈들의 두꺼운 피부에 작은 상처를 남겼다.
상처가 난 부위는 목 뒷덜미. 세현은 놈들의 등을 발판 삼아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그곳에 엑스칼리버를 박아 넣었다.
그러자 황금빛이 피뢰침처럼 검신을 타고 놈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퍼어어엉-!
미노로스들의 사체가 공중으로 흩어졌고, 그때마다 놈들의 경험치가 엑스칼리버로 빨려 들어갔다.
[엑스칼리버의 레벨이 145에서 146으로 상승했습니다!]
[엑스칼리버의 레벨이 146에서 147로 상승했습니다!]
몬스터의 레벨과 엑스칼리버의 수준 차이가 워낙 크기에 짧은 시간에 몬스터를 몰아 잡는 것만으로도 이미 150레벨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엑스칼리버의 공격력은 이미 17티어 S급, 거의 180렙제 무기의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후우…… 힘들다 힘들어.”
미노르스 한 무리를 모두 쓸어버린 다음, 세현이 기지개를 켠 후 바닥에 남은 사체에 마스터키를 가져다 대자 시체가 녹아내리며 스며들었다.
이는 니알라토텝전에서 우연히 얻게 된 마장기신의 연료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마장기신 ‘랜돌프’의 연료가 0.01% 충전됐습니다!]
“이래서 언제 다 채우냐……”
세현은 크로노스전에서 이를 필살의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꾸준히 연료를 채워 놓고 있었다.
커플러의 말에 의하면, 관리자의 힘이 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각 층에서 낼 수 있는 힘에 한계점, 즉 ‘리미터’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버 스펙의 힘을 가진 마장기신이라면 놈에게 유효타를 날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에 이 지랄 맞은 노가다를 하는 것이었다.
“세현 씨. 정말 이렇게 공략을 늦어져도 괜찮을까요?”
“아, 설희 씨.”
고개를 돌리자 백설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병을 내밀고 있었다.
세현은 이를 받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상쾌한 얼굴로 대꾸해 줬다.
“걱정하지 마요, 그놈들 언젠간 제풀에 지쳐 떨어질 테니까. 우린 천천~히 레벨 업이나 하면서 치고 나갈 준비만 해 놓으면 돼요.”
“그럴까요. 하지만 다른 길드가 먼저 클리어를 해 버리면 아무래도 뒤쳐질 것 같아서……”
설희가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팔콘유니온은 실제로 무서운 속도로 아파트를 오르기 시작했다.
40층을 돌파한 지 고작 20일밖에 안 지난 시점이지만, 오늘 중으로 41층의 공략을 시도할 것이라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언론은 서큐버스 군단이 곧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팔콘유니온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를 쏟아 냈고, 일반 대중들도 여기에 동요했다.
각 층을 먼저 클리어하기 때문에 최초 클리어 타이틀도 독점할 것이고, 보스 최초 클리어 시에 드랍되는 쓸 만한 아이템들도 다 먹어 치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태연하게 있는 쪽이 도리어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걱정 마세요. 다 생각이 있으니까.”
세현은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 위에 플라스크를 하나 소환했다.
그 안에는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이건 회복용 액체가 아닌, 미노르스들의 피를 일부 옮겨 담아 놓은 것이었다.
여기에 검지를 살짝 담근 후, 이를 움직여 미궁 벽에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그러자 벽면이 양옆으로 밀려나며 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컴컴한 통로가 열렸다.
에D츄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널찍한 길이었다.
“이건 뭡니까 주군?”
“여기에 보물이 숨겨져 있거든.”
“오오! 그렇다면 맛있는 음……”
“음식 타령은 그만.”
세이메이의 실없는 리액션에 세현은 손을 뻗어 입을 막아 버렸다.
그러곤 자신이 앞장서서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길이 어두운 탓에, 인벤토리에 쟁여 놓았던 ‘오라나이트’를 몇 개 꺼내 이것으로 길을 밝혔다.
그렇게 약 몇십 분을 내려가자 계단 저 멀리 푸른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빛이 나오는 부근에 도착하자 거대한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절벽 길이 나타났다.
그 절벽 길 너머에는 거대한 정육면체가 둥둥 떠 있었다.
“츄우우? 모든 게 거꾸로 돼 있어요! 뒤죽박죽이에요!”
“호오…….”
그를 본 일행 모두가 놀란 듯 외쳤다.
반투명한 정육면체 내부는 미로와 같은 형태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는 여태 봐 왔던 미궁과 달리 위아래로도 움직일 수 있었으며 곳곳에서 물이 흐르거나 용암이 흘러내리는 등 다채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부분에서는 중력이 역전되거나 공간이 왜곡돼 있었고, 어느 부분은 포탈과 포탈로 공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저것을 돌파하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세현 일행이 절벽 길을 따라 정육면체가 떠 있는 방향으로 다가가자 그 앞에는 거대한 석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는 구불구불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적혀 있었는데, 그 위에 손을 가져다 대자 퀘스트가 발생할 때 항상 출력되는 팝업창이 출력됐다.
[#. 히든 퀘스트 / 라비린토스]
-크레타섬의 전설적인 장인 ‘다이달로스’가 모든 기술을 집약해 만든 미궁 ‘라비린토스’을 발견했다.
앞에 놓인 석판 앞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곳에 다다른 여행자여,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돌아가라. 이 미궁에는 슬픈 이야기와 재앙이 함께 잠들어 있으니…….>
클리어 조건: 미궁 ‘라비린토스’ 돌파.
적정 레벨: 210
[수락하기] [거절하기]
세현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수락하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팝업창이 사라지며 정육면체 형태의 미궁이 좌우로 벌어지며 길을 열었다.
‘영상으로만 봤던 미궁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묘한 느낌이 드는군.’
F급이던 시절, 이곳을 클리어 했던 입주자의 공략 내용을 정리해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앞서 진행했던 히든 퀘스트들에 비하자면 비교적 최근에 봤던 영상이기에 상대적으로 기억이 생생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공략에 대한 완벽한 정보는 아니어도, 큼직큼직한 정보는 세현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자, 출발하자고.”
세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장서서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미궁 안쪽의 반투명한 벽에는 고대 그리스풍의 벽화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은 은은한 푸른빛을 뿜으며 홀로그램이라도 되는 양 움직였는데, 이는 미노타우르스의 탄생 신화를 전반에 걸쳐 보여 주고 있었다.
이 탄생 신화를 알기 위해서는 미궁 전체를 탐색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첫 번째 부분은 크레타섬의 왕 미노스가 포세이돈에게 제물로 바쳐야 할 수소를 빼돌렸고, 이로 인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왕비가 수소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왕비와 수소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표현됐는데, 여기에 적나라한 교성이 함께 출력됐다.
이를 들은 설희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지만, 세이메이와 에D츄는 그걸 빤히 쳐다보며 천진난만하게 떠들었다.
“쭈인님! 저 벽화 속에 소랑 아줌마가 아픈가 봐요! 이상한 소리를 내요! 몸살이라도 걸린 거 아닐까요, 츄츄!”
“그렇군요, 저주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헛소리 말고 빨리 걷기나 해, 멍청이들아.”
잠시 후, 벽화의 색이 붉은빛으로 변하며 다음 내용이 출력됐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수소와 부인의 사이에서 미노타우르스가 탄생했고, 이를 본 왕이 크게 분노해 왕비를 죽이고 크레타의 장인 ‘다이달로스’에게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라비린토스가 완성된 후, 미노타우르스는 이곳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었고 이곳을 만든 장인 ‘다이달로스’도 함께 이곳에 갇혀 버렸다.
앞으로 계속 걷자, 또다시 벽화의 색이 녹색으로 변하며 다음 내용이 출력됐다.
마지막은 미노타우르스를 두려워한 크레타의 왕이 미궁 안으로 매년 제물로 10명의 처녀를 바쳤다는 내용이었다.
복잡한 라비린토스 내부를 빙빙 돌며 이 모든 벽화의 내용을 감상하자,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모든 통로들이 위아래로 넘실넘실 뒤틀리며 기괴하기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스산한 목소리들이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왕을 죽일 거다! 나의 어머니, 가엾은 나의 어머니!!>
<내가 왜 미궁에 갖혀야 하는 것입니까! 국왕이시여!>
<꺄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미노타우로스 님!>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환상과 환청이 쉴 새 없이 몰아쳤고 이에 세현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큐멘터리에서 이 부분에서 기분 더러워진다고 했던 게 이해가 가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