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135화.
시련의 시작
“뭐 그렇겠죠. 신경 쓰지 마요, 아파트에서 역적 취급당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세현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사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러곤 손뼉을 쳐서 길드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연설하는 톤으로 외쳤다.
“그럼 여기서 각자 흩어지자! 항상 그랬던 것처럼 메인 퀘스트 정보 얻으면 바로바로 공유해 주고 다음 주간 회의 때까진 자유 활동할 것, 이상!”
그 말을 끝으로 길드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중, 세현은 자리에 남아 백설희에게 진지한 얼굴로 제안을 건넸다.
“설희 씨, 저희는 200레벨 먼저 찍는 게 어떨까요?”
“아, 그 길드장님이 했던 시련인가 하는 거 하려고 하시는 거죠?”
“네네, 맞아요.”
설희는 별 거부감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녀 또한 사카린과 다른 길드원들의 각성기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에, 앞으로 아파트에서 싸워 나가는 데에 각성기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리라.
“좀 피곤하겠지만, 며칠 동안 레벨업에 전념하자고요.”
다행히도 세현과 설희의 레벨은 이미 190레벨 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현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미리 세이메이와 에D츄에게 먹일 음식들을 잔뜩 쟁여 놓고 자신이 기억하는 42층의 몬스터 스팟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포르키테스의 해변.
바다의 노인 포르키스와 그의 누이 케토가 정을 나눠 낳은, 포르키테스라 불리는 해인족이 서식하는 장소였다.
포르키테스들은 인간을 닮았고 전신이 근육질의 체형에 푸른 비늘이 덮인 것이 특징이었다.
개체 하나하나가 강하지는 않지만, 한 마리의 암컷 포르키테스가 수천 개의 알을 해안가에 낳고 번식하는 특성 때문에 그 숫자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로 인해 어지간한 레벨을 갖춘 입주자라 해도 포르키테스의 해변은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레벨 업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뜻이었다.
“쭈인님! 무, 물고기 사람들이 엄청 많아츄!”
해안가의 지평선까지 끝도 없이 늘어선 성체 포르키테스와 그 숫자를 능가하는 알을 보고 에D츄가 외쳤다.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현장.
세현은 모든 소환수들을 소환해 낸 후, 설희의 노래를 이용한 버프를 덧씌우고 전투를 시작했다.
‘이 정도면 거의 분당 100~200마리씩은 잡는 수준인데.’
해변에는 말 그대로 학살극이 벌어졌다.
포르키테스들은 전방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는 두 마리의 룩과 에D츄의 벽을 조금도 넘지 못했다.
그대로 전선을 천천히 앞으로 밀고 나아가 바닷가를 청소하듯 싹 쓸어버렸다.
처음에는 포르키테스들의 비명과 처참히 죽어 가는 모습에 찝찝함을 느꼈지만, 세현은 애써 내면에서 일어나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꾸역꾸역 밀어 냈다.
‘강해지지 않으면 뒤지는 건 나야.’
얼마 전 헤라클레스와의 전투, 관리자 리베르를 만난 것이 더더욱 세현에게 힘에 대한 갈증을 크게 했다.
이미 현재의 힘만으로 자신에게 대적할 입주자는 없었지만, 세현의 시선은 슬슬 입주자나 거주자들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들에게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 더 강해져야 한다!’
거의 10시간에 걸쳐 해변가의 포르키테스를 멸종시키다시피 하자 [포르키테스 학살자]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자 가까운 바다에서 이들의 부모인 포르키스와 케토가 동시에 나타났다. 특정 조건을 충족시킨 탓에 히든 보스로서 등장한 모양이었다.
케토는 히드라와 유사한 외모에 바다뱀의 외형을 지녔고, 포르키스는 그 등에 지팡이를 들고 탄 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각각 B급과 C급, 즉 에픽급과 유니크급의 나름 강력한 수준의 보스급 몬스터였다.
‘헤라클레스랑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쉬운데.’
하지만 세현은 그들을 채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횟감으로 만들어 버렸다.
41층에서 두 마리의 블랙 폰을 잃어 가며 싸워야 했던 헤라클레스에 비교하면 이 둘의 난이도는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아무리 헤라클레스가 메인 보스라지만, 명색이 보스급 몬스터 두 마리가 이 정도로 난이도 차이가 있는 건 지난 보스전에 리베르가 개입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가정파탄범’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보상: 올 스탯+2
[허세현 님이 20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허세현 님에게 ‘시련’이 발생했습니다! 시작의 신전에서 시련을 수행하세요!]
[백설희 님이 20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백설희 님에게 ‘시련’이 발생했습니다! 시작의 신전에서 시련을 수행하세요!]
잠시 후, 타이틀 획득과 레벨 업을 알리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세현과 백설희는 거의 12시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200레벨이라는 목표치를 맞출 수 있었다.
에D츄와 세이메이의 레벨도 올랐으며, 헤라클레스와의 전투에서 잃었던 블랙 폰 두 마리의 레벨 또한 거의 복구했다.
물론 두 보스 몹이 드랍한 아이템도 잊지 않고 챙겼는데 [포르키스의 지팡이], [케토의 비늘] 등 꽤 쓸 만한 장비와 재료가 있었지만, 현재 세현과 설희의 장비보다 성능이 떨어지기에 길드원에게 주거나 차후에 마켓에서 판매하기로 했다.
“그럼 2층으로 가죠.”
세현 일행은 곧장 승강의 방을 통해 2층으로 향했다.
튜토리얼 구간에 위치한 시작의 신전에 도착한 후, 세현과 설희는 각각의 시련을 받기 위해 흩어졌다.
200레벨 시련은 해당 입주자에게 클래스를 부여했던 수녀에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세현은 곧장 가장 안쪽 방의 가장 작은 문으로 들어간 후, 미로를 지나 헬시안의 방에 당도했다.
벽에는 검은색, 흰색 여신상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곳곳에 화려한 켈트 무늬 장식이 수놓아져 마녀의 방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장소.
그 한가운데, 해골 팔을 가진 냉미녀이자 튜토리얼 구간의 관리장인 헬시안이 차분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세현을 맞이해 줬다.
<시련을 받으러 왔겠군.>
“빙고~!”
그녀는 이미 세현의 목적을 알고 있는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좋아. 마음의 각오를 끝내면 내 앞으로 다가와라, 시련을 네게 선사해 줄 테니.>
“질질 끌지 말고 시작합시다. 각오 같은 거 안 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너스레를 떨며 성큼성큼 헬시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해골 팔을 천천히 뻗어 어깨에 올렸고, 그를 통해 자신의 몸에서 뿜어지는 푸른빛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기운이 몸속으로 조금씩 밀려들어올 때마다 세현은 정신이 몽롱해지며 나른한 기분이 느껴졌다.
잠시 후, 세현에게 메시지 알림음과 함께 팝업창들이 눈앞에 출력됐다.
[브레이브킹 ‘허세현’님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메모리얼 던전에 입장합니다.]
그 팝업창의 내용을 눈으로 모두 훑어봤을 때 즈음, 세현은 병든 병아리처럼 고개를 꾸벅이다가 그대로 제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걸 본 헬시안이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자, 구석에서 대기 중이던 수녀 두 명이 걸어 나와 세현의 몸을 들어 방 중심부에 위치한 제단에 가지런히 눕혀 놓았다.
† † †
[메모리얼 던전 PART1 - ‘왕의 탄생’을 시작합니다.]
-검을 뽑아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뭐야 여긴? 조금 전까지 분명 헬시안의 방에 있었는……”
아파트의 아나운서 음성 메시지와 함께 눈을 번쩍 뜨자 펼쳐진 이질적인 풍경.
이에 세현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크게 꺾어야 그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대성당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정문으로 들어가자, 아름다운 꽃과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아름다운 정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의 가장 큰길로 따라가자, 성당과 정원 사이에 거의 성인 남성 두 명 높이 정도 되는 커다란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바위에는 장검 하나가 검집 째로 반쯤 묻혀 있었는데, 그 근처에 장정 몇 명이 그것을 붙잡고 잡아 빼려 낑낑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현이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자 그중 가장 덩치 큰 남자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성을 내듯 말했다.
“너는 어디서 온 뜨내기냐. 우리가 이 검을 못 뽑는다고 비웃는 건 아니겠지?”
“비웃기는 개뿔. 그럴 깜냥도 안 돼 보이는구만.”
밑도 끝도 없는 주장에 세현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그가 근육질의 양팔을 뻗어 멱살을 잡아 번쩍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아앙?”
이에 세현은 피식 웃으며 양다리를 그의 팔목에 교차시킨 후, 엘보우를 반대편으로 꺾어 버렸다.
이종 격투기에서 종종 사용되는 기술, 암바를 시전한 것이었다.
빠득-!
“아아아악! 이… 이런 미친 놈이!”
“괘, 괜찮으십니까, 행님!”
“괜찮겠냐! 이 새끼들아!”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덩치남의 팔이 너덜너덜해졌고,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주변에 함께 있던, 놈의 졸개로 보이던 다른 장정들은 세현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잔뜩 쫄은 얼굴을 지었다.
“아아, 미안하다 미안해. 살짝 힘줬는데 이 정도로 부러질지는 몰랐네. 포션 줄 테니까 잠깐 기다려 봐.”
세현은 인벤토리를 열기 위해 습관적으로 마스터키가 달려 있는 왼손 팔목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잉?”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마스터키의 감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확인해 봤지만, 세현의 SSS급 투명한 마스터키는 팔목에서 확실히 사라진 상태였다.
“아 이거 골 때리네…….”
그제야 세현은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생전 길러 본 적 없던 턱수염, 평소보다 유난히 흰 빛을 띠는 피부, 묘하게 굵어진 목소리와 시선까지….
많은 정보가 한 가지 정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 다른 사람이 된 모양인데?”
헬시안이 내린 시련의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아마도 세현은 그것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아까 메모리얼 던전인지 뭔지 하는 게 이런 형식인 거겠지.’
세현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마 이 메모리얼 던전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된 상태에서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면 클리어가 가능할 터였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검을 뽑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던전에 진입할 때, 처음 출력됐던 메시지의 기억을 떠올리며 바위에 박힌 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날이 날카롭게 벼려진 푸른빛의 검신을 가진 장검. 그 검신에는 음각으로 영어와 비슷하게 생긴 문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검을 뽑는 자가…… 브리튼의 왕이 된다?”
완전히 처음 보는 생소한 문자였지만, 어쩐 일인지 그 문자를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다.
“뭐 어쨌든 이걸 뽑으면 된다 그거지.”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곧장 바위로 나가서 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다리를 바위에 지지한 채 양팔에 힘을 줬다.
“으으으으! 아오 겁나 단단히도 박혀 있네!”
이를 악물고 한참이나 힘을 줘 잡아당겼지만 검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너 따위 불한당이 그 검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마, 맞아! 그 검은 고귀한 피를 가진 존재만 뽑을 수 있다!”
그때, 등 뒤에서 서 있던 장정들이 세현을 손가락질하며 구시렁댔다.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누워 있는 놈처럼 팔을 분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굳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애써 이를 무시했다.
‘가만 보자…. 고귀한 피를 가진 존재만 뽑을 수 있다고 했지?’
한참을 더 낑낑대던 중,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장정들이 뱉은 말 중에 ‘고귀한 피’라는 포인트가 귀에 유난히 거슬렸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고.’
세현은 자신의 팔목을 바위에 꽂힌 검의 검신에 살짝 베이도록 밀어 넣었다.
잘린 부위에서 시뻘건 피가 몽글몽글 올라왔고 그를 검신에 조금씩 떨어뜨렸다.
그러자, 피가 검날 위를 타고 흘러 검신에 새겨진 음각 사이로 스며들었고 ‘이 검을 뽑는 자가 브리튼의 왕이 된다.’라는 글씨가 똑똑히 드러났다.
“역시 이거였구만.”
정답을 맞혔다는 확신에 세현은 입꼬리를 추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