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관리장과 부관리장
헤라클레스를 쓰러뜨리는 과정과 연출이 마치 세현이 나쁜 놈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저, 저기 봐!”
그때 길드원 하나가 소리를 치며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걸 본 세현의 미간이 자연스레 찌그러졌다.
“뭐야 저건?”
헤라클레스가 뒤집어쓰고 있던 커다란 사자 가죽, 그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바닥을 꾸물꾸물 기어 다니며 곳곳에 흩어진 살덩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마다 놈의 덩치는 조금씩 커져 가더니 놈은 금세 거대한 사자의 모습을 갖추고 되살아나 있었다.
“허세현 저거 뭐냐? 보스전 끝난 거 아니었어?”
사카린이 긴장 가득한 얼굴로 세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서큐버스 군단은 자신들이 쓸 수 있는 카드를 대부분 쓴 상태. 지금 보스전을 또 벌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일단 움직이지 말고 서서히 뒤로 물러나요.”
다행히 거대 사자는 제자리에서 어슬렁대며 커다란 혀로 자신의 털을 고를 뿐 세현일행에게 당장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 공격이 시작될지 모르기에 세현은 소환수들을 희생시켜 시간을 끌고, 영웅의 협곡으로 연결된 동굴로 다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아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도 관리자입니다. 여러분과 싸울 생각은 없어요.>
그때 허공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사자 옆에 붉은 머리의 미남자가 나타났다.
피그말리온의 동굴에서 마주쳤던, 시즌5의 부관리자 ‘리베르’이었다.
그는 험악한 거대 사자의 머리를 애완 고양이처럼 쓰다듬었고, 사자 또한 리베르에게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관리자 양반, 헤라클레스 난이도가 이 꼴인 거 당신 짓이지?”
그를 보고 있던 세현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헤라클레스의 난이도가 세현이 알고 있던 것보다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강했고, 그것이 눈앞에 있는 리베르의 농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리베르는 조각같이 뾰족한 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대꾸했다.
<헤라클레스의 난이도라…. 당신은 처음 본 보스의 난이도도 알 수 있는 예지력을 가지신 모양이죠?>
‘……저 새끼가 한 짓 맞구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세현은 확신했다.
또한 녀석은 세현이 전생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다른 길드원들이 있는 앞에서 차마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 없기에 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적당히 대꾸했다.
“그냥~ 41층 보스치고는 너무 어렵다 싶어서 말이야. 솔직히 시즌4 마지막 보스보다 어렵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타당한 의견이에요.>
리베르는 노골적으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음흉함이 가득한 모습에 세현은 기분이 더러웠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댁이 여기에 굳이 얼굴을 또 들이미는 이유가 뭐야?”
<흐음~ 제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리베르가 손바닥을 빠르게 두 번 부딪혀 소리를 냈다.
그러자 거대 사자의 눈이 푸른빛으로 이글거리더니 놈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힘차게 포효했다.
쿠웅-!
부러진 나무나 돌 따위가 날려질 정도의 기세의 충격파가 퍼져 나가더니, 이곳 영웅의 협곡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세현은 귓속에 삐이이- 하는 이명이 들려오는 것에 눈을 찌푸렸다.
전황을 파악하려 고개를 돌리자, 길드원들이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이건 또 무슨 지랄…….”
세현은 이런 일을 이미 겪어 봤기에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관리자들의 권능이 시간을 멈춘 것이었다.
<잠시,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리베르가 턱을 쓰다듬는 사이, 거대 사자가 맹렬한 속도로 세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곧장 소환수들에게 왕의 명령을 내렸지만, 시간이 정지한 세계에서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슬로우 모션 비디오를 보듯 굼뜨고 느렸다.
콰드득-!
뼈와 살점이 분리되는 소리와 함께 세현의 상체가 거칠게 뜯겨 나가 공중으로 날려져 버렸다.
‘미친, 이렇게 얼탱이 없이 죽는 거냐고.’
공중에 떠오른 세현의 상체는 찢겨 나간 자신의 하체를 바라봤다.
허리까지만 남은 하체에서는 피가 공중을 솟구쳤고, 심장이 있어야 할 부위에 눈에 익은 무언가가 드러나 보였다.
‘저거…….’
그곳에는 수정 하나가 박혀 있었다.
F급이던 시절, 세현이 크로노스를 쓰러뜨리고 얻었던 크로노스의 크리스탈이었다.
<건방지구나, 리베르. 무슨 낯짝으로 내 숙주를 공격한 것이냐.>
그러자 갑자기 크리스탈에서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오묘한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리베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크로노스의 음성에 대꾸했다.
<역시 크로노스님이 맞았군요. 커플러가 저 입주자에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물러서라.>
<싫습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죠.>
그 직후, 리베르의 오른팔 날카로운 창처럼 변이했다.
그는 상체를 기울여 빠르게 앞으로 달렸고, 그 팔을 크리스탈을 향해 정확히 내질렀다.
<분수를 모르는구나, 리베르!>
크로노스의 분노 섞인 외침과 함께 크리스탈이 사방으로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며 찢겨져 공중으로 흩어진 세현의 상체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리베르의 몸이 검게 물들어 썩기 시작했다.
<젠장!!>
그가 신음하며 황급히 거대 사자의 뒤로 숨어들었다.
사자의 몸이 그 대신 검은색으로 물들며 썩어 문드러지더니 살덩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뼈만 남았고, 얼마 가지 않아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수백 년의 시간에 걸쳐 일어나야 할 일이 찰나의 시간에 벌어진 듯한 광경이었다.
“내 몸 가지고 니들 멋대로 놀지 마라, 이 개xx들아.”
정신이 돌아온 세현이 이를 악물고 붉은 뱀의 검을 단단히 쥐었다.
잠시간의 시간 동안 자신의 생사가 관리자들의 손에 놀아난 것에 감정이 요동쳤다.
저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무기력감을 느꼈고, 또 이에 화가 났다.
여태 세현이 봐 왔던 거주자들이 이들에게 운명을 농락당하며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지 조금이나마 그 심정이 이해됐다.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세현을 장기 말처럼 취급하는 관리자들, 또 그 모습을 위에서 쳐다보며 즐기고 있을 두 의지라 불리는 것들까지….
‘언젠가는 다 찢어 죽여 주마.’
모두 다 쳐 죽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후, 이 공간을 가득 메우던 회색빛의 기운이 빠르게 걷혔고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저 잘생긴 아저씨. 갑자기 왜 이래? 사자는 어디 갔고?”
사카린과 길드원들은 거대 사자가 사라지고, 리베르의 몸이 검은색으로 썩어 문드러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시간의 멈춤을 느끼지 못한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리라.
<…허세현, 당신이랑은 또 보게 될 것 같군요.>
리베르는 쓴웃음을 짓더니 손가락을 딱하고 부딪쳤다. 그러자 세현의 앞에 두 벌의 방어구 세트가 소환됐다.
이는 잊혀진 하수인 세트로, 헤라클레스를 잡던 중 폭발에 휘말려 사라진 두 블랙 폰이 착용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갑자기 이건 왜 주는 건데?”
<인과율이 너무 틀어져 버리면 저도 곤란하거든요.>
“지랄….”
세현은 쓴웃음을 집어삼키며 바닥의 아이템을 챙겼다.
<그럼 저는 이만. 이곳에 계신 모든 입주자에게 두 의지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리베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하아…. 아이템 챙깁시다들.”
이제야 보스전이 일단락이 됐음을 직감한 세현이 터덜터덜 헤라클레스가 죽은 자리로 걸어갔다.
다행히 거대 사자가 아이템까지 먹어 치우진 않았는지, 그 자리에는 다른 보스가 그러하듯 다량의 골드와 아이템, 재료 등등이 잔뜩 널려 있었다.
완성품 아이템으로는 [헤라클레스의 건틀렛], [헤라클레스의 몽둥이]가 떨어졌다.
“오늘은 다들 피곤할 테니 이 아이템 어떻게 할지는 다음 주 주간 회의 때 얘기하자고. 다들 주간 회의 날까지는 터치 안 할 거니까 푹 쉬어.”
“네에~!”
사카린의 오더에 길드원들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흩어졌다.
† † †
41층의 클리어 직후 언제나 그랬듯 언론의 호들갑은 극에 달했다.
아직 헤라클레스의 공략 영상이 공개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신화 속에서나 접하던 대영웅과 서큐버스 군단의 치열한 싸움을 머릿속에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렇게 서큐버스 군단의 독주가 이어졌지만, 이 기간 동안 벌어진 다른 상위권 길드들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오늘 북한의 조선노동당 길드가 러시아의 ‘짜르’ 길드, 중국의 ‘인민전선’ 길드와 한 개의 거대 길드 연합체를 구성했습니다. 이 길드 연합체의 이름은 ‘공산연맹’으로, 총인원 1000명에 넘는 거대 길드가 되었습니다.]
[팔콘 길드가 미국 소재의 ‘토네이도’ 등 7개 길드와 통합을 선언했습니다. 길드의 이름은 ‘팔콘 유니온’으로 개명했으며, 이들은 곧 40층의 아자토스 공략을 앞두고 있습니다. 서큐버스 군단의 라이벌로서 성장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서큐버스 군단의 독주를 막을 방법이 없어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상위권 길드들이 서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길드원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호박 많이 모아 놓는다고 수박 되냐?”
애초에 그들의 길드 연합체 자체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거나.
“어차피 아파트 클리어 못 하면 인류는 끝장인데, 힘을 보탤 놈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은 거지 뭐~.”
그들이 미래의 동료가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쪽이었다.
각자 생각은 조금씩 다르지만,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 외에 특이하다고 할 점은 휴식 기간 동안 사카린에게 정부 고위급 인사가 찾아와 은밀히 제안을 던졌다는 것이다.
얘기의 주요 골자는, 서큐버스 군단이 한국 정부의 직속 길드가 되어 달라는 것.
그나마 팔콘은 정계와 한성 그룹의 긴밀한 유착이 있었기에 이에 대한 불안감이 적었지만, 서큐버스 군단의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사카린을 포함한 길드원들은 정부 입장에선 행동 하나하나가 예측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미리 포섭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사카린의 대답은 뻔했다.
“높은 아저씨, 그럼 나 대통령 시켜 줄 거야?”
“무… 무슨 헛소리를.”
“그럴 거 아니면 싫어~ 당신들이랑 일하면 머리 벗겨진 아저씨들 따분한 소리 들어야 하잖아.”
제멋대로인 발언에 고위 인사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돌아갔고, 후에 주간 회의에서 이 얘기를 듣게 된 세현이 엄지를 추켜올리며 사카린을 칭찬했다.
‘그 새끼들 생각이야 뻔하지.’
정부 산하 기구에 들어가면 분명 귀찮은 행사에 불려 다니거나 각종 요구 사항을 들어줘야 할 게 뻔했다.
하나둘 그런 걸 들어주다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요구가 커질 것이고, 그러면 정작 가장 중요한 아파트 공략에 뒤처질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현 정부는 서큐버스 군단과 적대적인 팔콘 길드, 한성 그룹과 긴밀한 관계기에 괜히 엮이지 않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일해 봅시다아~!”
며칠 간 짧은 휴식과 주간 회의가 끝난 후, 길드원 모두가 새로운 아파트 공략을 위해 승강의 방을 통해서 42층에 진입했다.
42층의 메인 스토리는 승강의 방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간단한 부탁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판테온에서 신탁을 받아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때 제물을 바치고 신탁을 받은 후, 도시의 사제가 겁에 질린 듯 온몸을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다, 당신들 신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오!”
그는 입주자들이 신의 음료인 ‘넥타르’를 훔쳐 먹고 대영웅 헤라클레스를 죽인 것으로 올림포스에 반역자로 낙인을 찍혔다는 말을 전했다.
사카린과 길드원 몇 명이 넥타르는 훔쳐 먹은 게 아니라 신이 직접 내려 준 물건이었다고 항변을 해 봤지만, 별수 없이 도시에서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거, 누명 쓴 것 같은 그림이지?”
도시 밖으로 쫓겨난 직후, 사카린이 세현을 바라보며 질문을 먼저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