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화.
Level 50. 피그말리온의 석상
그렇게 또 며칠 시간이 지나고, 길드원들이 속속들이 메인 퀘스트를 완료하고 헤라클레스와의 최종 전투 직전까지 마쳤다.
두 조로 나뉘어 휴식을 취했던 길드원들이 모두 집결해, 촌장의 안내를 받아 움직였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마을 촌장은 절벽 가파른 곳에 위치한 샛길로 안쪽으로 한참을 굽이굽이 들어갔다.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기에 세현조차 침을 꿀꺽 삼킬 정도였다.
잠시 후, 절벽을 따라 난 굽이길이 끝나자 촌장이 그곳에 툭 튀어나온 돌 뿌리를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덜컹-! 하는 기관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절벽이 막힌 곳에서 돌이 위로 올라가며 안쪽에 동굴이 하나 나타났다.
“이곳은 기묘한 장소라 길을 잃으면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다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주의하시길……”
촌장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한 손에 랜턴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가 또 운동장만큼 넓은 공간이 나오기도 하는 등 개미굴 같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넓은 공간이 나올 때면 대체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그들을 상대해야 했고, 좁은 길을 지나다닐 때는 화살이 날아오거나 위에서 가시가 떨어진다거나 하는 기관 장치에 함정들이 있었다.
이런 기이한 공간을 끝도 없이 빙빙 돌다 보니 방향 감각, 시간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여기서는 색이 다른 돌을 밟으면 아래에서 화염이 올라옵니다. 저 앞 블록에서는 공간이 순식간에 역전되는 현상이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저 건너 방에서는 미노타우르스 궁사들이 나옵니다.”
마치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듯한 기묘한 동굴 속의 미궁.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내 중인 촌장이 세세한 디테일을 꿰고 있어 그 정보를 바탕으로 별다른 피해 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으으음, 여기서는 이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거기다 거의 2~3분마다 세 갈래, 네 갈래 길이 나왔는데 자칫 잘못해 여기서 길을 잃었다간 다시는 길을 찾아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흠흠!”
그렇게 몇 시간을 걸어 내려갔을까, 갑자기 촌장이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 뭔가를 말하려는 듯 마는 듯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안쪽으로 더 안내를 받고 싶으시다면 뭐라도 좀 더 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허세현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 저 새끼 봐라?’
“더 달라니 뭘?”
그 말을 들은 사카린이 당황스럽다는 듯 콧잔등을 긁적이며 되물었다.
“돈이든 식량이든 하여튼 뭐가 됐든 좋습니다.”
“으으음~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왜 줘야 하는데?”
“제 안내가 없으면 여러분은 영웅의 협곡까지 가실 수 없으실 테니까요. 이곳은 시공간이 왜곡되는 기묘한 장소입니다. 쉽게 빠져나가실 수 없을 겁니다.”
촌장이 한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실제로 동굴의 내부는 지나치게 복잡했고, 아마 그의 안내를 받지 않는다면 쉽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할배, 받아.”
그때, 뭔가가 날아가 촌장의 명치를 세게 때렸다.
그는 컥-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나자빠졌고 잠시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의 충격이 컸는지 입에서 피를 쿨럭쿨럭 토해 내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두 덩이의 금괴가 놓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전 명치를 때린 물건이 저것인 모양이었다.
촌장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로 금괴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 발 하나가 그의 손등을 자근자근 짓밟았다.
“크아아아악!”
고개를 들자, 허세현이 촌장의 목전에 사복검을 들이밀고 경멸의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하나 좀 묻자. 이거 받으면 어디에 쓸 건데?”
“…….”
“말해. 대답 여하에 따라 이거 너한테 줄 수도 있으니까.”
“돈이, 돈이 생기면 마을 재건에 쓸 생각이었습니다.”
“하…… 겨우 그것 때문에 협박을 해?”
세현의 말을 들은 촌장이 울컥한 듯 고개를 치켜들고 떠들기 시작했다.
“겨우 그것? 당신들은 모릅니다! 윗 존재들에게 농락당하는 우리를, 마을이 살 만해지면 괴물이 나타나고, 영웅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주변을 황폐화시키고! 우리의 처참한 삶을 입주자인 당신이 압니까! 당장 바실리스크가 없어졌다 해도 파괴된 숲이 회복되려면 몇 년이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그때까지 살아남아서 버티려면!”
따악-!
한참 격정적으로 떠들던 촌장의 이마에 세현이 꿀밤을 살짝 먹여 줬다.
딴에는 살살 한다고 친 것이었지만, 애초에 두 사람의 신체 능력 차이가 압도적이기에 그는 뒤로 몇 바퀴를 굴러 볼썽사납게 내팽개쳐졌다.
“아 쫑알쫑알 되게 말 많네. 그깟 감성팔이 하면 내가 아이고~ 슬프네 하고 펑펑 울기라도 할까 봐?”
세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의 앞으로 걸어가 생명력 포션 하나를 건넸다.
촌장은 그것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고, 그제야 살았다는 듯한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세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금괴 한 덩이를 주워 촌장의 앞에 툭 던졌다. 아파트 내부의 화폐로 사용되는 금이지만, 바깥에서 돈으로 환전해도 족히 몇억은 나가는 물건이다.
“내가 딱 한 번 봐줄 테니까, 이거 받고 다시는 협박 같은 거 할 생각 하지 마라. 그럼 메인 퀘스트고 나발이고 여기서 죽여 버리고 어떻게든 빠져나가서 다른 루트로 클리어해 버릴 거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개뿔……”
평소의 짠돌이 세현이라면, 아무리 돈이라곤 썩어나는 현재라 해도 금괴를 거저 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겪어 왔던 일들은 세현에게 아파트 거주자들에 대한 묘한 연민이 싹트게 했다.
그들 또한 사람과 같이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이 아파트를 만든 놈과 관리자들, 심지어는 입주자들에게까지 자신들의 운명을 셀 수도 없이 농락당하고 있다.
‘젠장, 내가 이따위 생각을 하다니…….’
시즌4에서 단지 최종 보스인 아자토스를 소환하겠다고 말살시켰던 마을 사람들의 비명과 표정은 아직도 세현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시스템을 세현이 갈아엎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의 연민을 발휘해 금괴를 건넨 것이었다.
물론 스스로도 자신이 내린 결정이 바보 같다고 생각되어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그때였다.
[‘외딴 마을의 촌장 파트로스’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됐다.
‘으잉? 호감도가 왜 올라?’
세현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촌장이라는 놈은 마조히스트 기질이라도 있는지 명치를, 딱밤을 처맞고도 호감도가 오른 것이었다.
물론 금괴를 준 탓에 오른 것이겠지만, 마음 같아선 몇 대 더 때려 주며 ‘좋냐? 좋아?’라고 묻고 싶었다.
“그럼 다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안내가 시작됐고, 다시 길드원들은 험난한 미로를 굽이굽이 따라 이동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함정의 수준과 몬스터들이 더 강해졌지만, 현재 서큐버스 군단에게는 여전히 크게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촌장 또한 거침없이 미로를 뚫고 나가는 기세에 짐짓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도중, 촌장이 뭔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더니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으으음, 제안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이 근처에 신기한 문이 달린 방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들려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물론 가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촌장의 제안에 사카린이 고개를 돌려 세현에게 곤란하다는 듯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이에 세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댁은 그 문 안에 여태 왜 안 들어갔는데?”
“그 문 앞에 쓰여 있는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방 안에 들어가면 신의 시련을 받게 되고, 그를 이겨 내면 큰 보물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신의 시련을 저 같은 범인이 감히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실력이면 수호자를 상대로도 충분히 해 볼 만할지도요.”
“오호라.”
세현은 촌장의 제안에서 묘하게 대박의 냄새를 맡았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전생에 이 동굴을 지나갈 때 촌장이 따로 안내를 한 적은 없었다. 조금 전 호감도가 상승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히든 퀘스트 같은 별도의 이벤트가 벌어지는 것일 확률이 높았다.
“길드장, 저는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마음속에서는 이미 가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지만, 세현은 형식적으로나마 사카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네가 간다면 말릴 생각은 없는데.”
사카린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길드원들도 딱히 불만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의사를 확인한 세현이 촌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안내해 봐. 대신 이번에도 우리 엿 먹이면 이번엔 명치 한 대 맞는 걸론 안 끝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촌장은 다음에 나온 갈림길에서 가장 좁아 보이는 길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딱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 너비의 길이었다가 그 폭이 점점 좁아져서, 나중에는 기어가야 겨우겨우 지나갈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
에D츄를 마을에 두고 왔기에 망정이지, 여기에 데려왔다간 여기에서 옴짝달싹 못 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아아아! 좀 세게 밀어 봐!”
세현이 앞장서서 지나가던 중, 뒤쪽에서 사카린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몸이 통로에 꽉 끼어 지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에휴. 그러게 살 좀 빼라니까요.”
“살은 무슨 살이야! 가슴이 크게 태어난 걸 어쩌라고!!”
사카린은 버럭 화를 내며 외치자 길드원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로 돌아 우스꽝스럽게 끼어 있는 사카린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몸을 돌릴 공간 따위가 조금도 나지 않았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후아… 진짜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근 20분이 걸려 모든 길드원들이 좁은 길목을 가까스로 빠져나오자 그 반대편엔 제법 넉넉한 공간이 나왔다.
아마 사카린이 중간에 끼이지 않았다면 10분이면 충분했겠지만, 그걸 지적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세현은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여기, 제가 말씀드린 문이 이것입니다.”
촌장의 말대로, 그곳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이 탑을 만든 두 여신의 모습이 음각의 형태로 새겨져 있었고, 그 주변을 수백 명의 관리자로 보이는 것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거 묘하네.’
이런 그림은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이 너머에 분명 평범하지 않은 뭔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 들어갑시다.”
세현이 가장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온 사방에 푸른 보석이 빽빽이 들이찬 원형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심부에 원형의 제단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검은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붉은 머리를 예수같이 치렁치렁 늘어뜨린 서양인 사내가 두 눈을 감은 채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가자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왔는가……. 입주자인 모양이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세현은 붉은 머리의 존재가 관리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관리자들의 목소리에는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묘한 기운이 서려 있기에 그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럼 당신은 관리자 맞지?”
<호오, 내가 관리자인 것을 단번에 알다니 신기하군. 나는 이 시즌5의 부관리장직을 맡고 있는 ‘리베르’이라고 한다.>
“부관리장이라, 그런 사람이 여긴 왜 있는데?”
<이곳에 당도한 자에게 우리 구역 관리자들이 만들어 낸 특별한 시련을 내리기 위함이지. 하지만…… 지금은 애석하게도 시련을 줄 수 없겠군.>
“흐음…… 뭐 때문에 안 되는데?”
세현의 질문에 붉은 머리의 사내가 손뼉을 가볍게 부딪쳐 짝- 소리를 냈다. 그러자 공간 전체가 흔들리며 바닥에서 수십여 개의 석고상이 올라왔다.
제우스나 아폴론, 아테나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신의 모습을 했거나 히드라나 미노타우스 같은 괴수들을 본 따 만든 것이었다.
<이번 시련은 이 석고상들을 상대하는 것. 하지만, 힘이 부족한 탓에 이들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힘이 부족해?”
<부끄러운 말이지만,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 줘야겠지….>
리베르라는 관리자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한 명이 사라진 상태… 원래라면 그가 우리의 권역인 이곳에 힘을 불어넣어 시스템을 유지하겠지만, 그의 부재로 내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지금 이 석상들에 힘을 불어넣을 여유가 없지….>
“이잉, 그러면 시련을 진행 못하는 게 우리 잘못은 아니라는 거네?”
세현은 리베르가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이미 추측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크로노스’, 시즌5의 관리장인 이놈이 부재중이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최대한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뭔가 떡고물이라도 하나 떨어질까 싶어 계속 말을 이었다.
“아, 곤란하네 곤란해. 우리 여기까지 더~럽게 힘들게 왔거든. 안 그래요, 길드장?”
“그치! 더럽게 힘들었지, 동굴 사이에 끼어서 버둥대던 거 생각하면 짜증이……”
“맞아, 더럽게 짜증나죠!”
사카린이 말하면서 뭔가 짜증이 나서 울컥하는 것 같기에 세현은 적당히 말을 끊고 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보고 빈손으로 돌아가라고?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관리자 양반? 뭐라도 좀 줘야 납득을 할 것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시련 없이는 보상도 없다. 그것이 우리의 규칙이다.>
하지만, 이런 수작이 무색하게 리베르는 단칼에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세현이 몇 번 더 설득을 시도했지만, 리베르는 그의 말투만큼이나 고지식하고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 유도리가 없네, 유도리가……. 커플러는 유도리가 아주 넘쳐 났는데 말이야.’
담당 관리인이었던 커플러가 그 속 꿍꿍이는 알 수 없어도 차라리 이럴 땐 낫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에 우뚝 세워진 석당들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세현의 몸에서 순간 푸른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