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화.
<오호홍, 그 질문들은 어째 다른 분들은 들으시면 안 될 것 같네요.>
커플러가 음흉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딱’하고 부딪히자, 손끝에서 회색 기운이 빠르게 흩어졌다.
주변을 둘러봤을 땐, 세현과 커플러를 제외하고 모든 것들이 회색으로 변하더니 시간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오호홍 어때용? 이번에 제가 승~진을 한 덕분에 이젠 이런 것도 할 수 있게 됐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부터 알려 줘.”
<히이이잉…….>
커플러는 모처럼 만의 자랑을 세현이 들어 주지 않자 노골적으로 섭섭한 듯 두 귀로 눈을 가렸다.
“아, 알았어 알았어! 부럽다! 이런 능력 있어서 너~무 부럽습니다. 대킹갓제러널엠페러 관리자 커플러님!”
<오호호홍! 역시 그렇죵?!♥>
비아냥이 섞인 칭찬 아닌 칭찬이었음에도 커플러는 기쁜 듯 귀를 펄럭였다.
<일단, 허세현 님이 이번에 수행한 퀘스트는 저 니알라토텝을 쓰러뜨리는 게 조건이 아니예용! 퀘스트 창에 표시됐던 대로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버티고 포탈을 빠져나가는 거죠.>
“……그럼 저 마장기신인지 뭔지 하는 걸 탈 수 있게 만들어 놓으면 안 되는 거잖아.”
<당.연.히. 보통의 입주자라면 저걸 절~대로 탈수 없어용. 제 생각엔 허세현 님이 가진 뭔가가 저걸 컨트롤할 수 있는 권한을 준 모양이네용.>
커플러가 세현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두드리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마장기신 랜돌프에 타기 직전 출력됐던 메시지창이 기억났다.
[사용자의 사용 권한을 확인합니다.]
[관리장 ‘크로노스’ 님의 권한이 파악됐습니다. 마장기신의 사용을 허가합니다.]
‘아.’
아마도 마장기신을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은, 세현의 몸속에 암세포처럼 잠들어 있는 크로노스 덕분인 듯했다. 괜히 또 놈의 힘을 빌려 썼다는 생각에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저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뭐, 일단은 허세현 님이 가지고 계세용. 두 의지께서도 뜻이 있으니까 히든 퀘스트를 배치하셨겠지용.>
커플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더 궁금한 점은 없으세용?>
“음…… 궁금하다고 할 만한 거라…….”
세현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시즌3 구간에서 내가 캐럴인지 뭔지 하는 놈이랑 싸웠었던 거 기억나지? 그놈 관리인이었잖아.”
<네, 관리인이죵. 지금은 소멸됐지만용.>
“그런데 여기 있는 니알라토텝이니, 마장기신이 그놈보다 훨씬 강한 것 같은데. 이게 시스템적으로 가능한 일이야?”
이것은 꽤 중요한 정보였다.
앞으로 싸워야 할 몸 속의 크로노스 또한 관리자고, 시즌3에서 검은 로브를 쓰고 세현을 공격했던 캐럴도 관리인이었다. SSS급 능력을 가진 세현의 입장에서 랭커급 입주자들보다는 관리자들이 훨씬 위협적인 상대인 것이었다.
<오호호홍! 세현 씨 이 개구쟁이! 관리인에게 약점일 수도 있는 부분을 콕! 집어서 물어보시네용.>
“곤란한 질문이면 대답 안 해도 되고.”
<오 노우 노우~ 저 커플러는 대.인.배이기 때문에 말씀드릴게용!>
그는 즐겁다는 듯 킬킬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허세현 님은 아파트의 각 층별로 레벨의 한계선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용?>
“그야 당연하지, 레벨이 오르면 필요한 경험치가 많아지니까…….”
게임과 마찬가지로 아파트는 각 층별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 수준이 상이하다.
때문에 10층에서 50레벨 입주자가 사냥을 한다면 의미 있는 수준의 경험치를 얻어 레벨 업이 되겠지만, 200레벨 입주자가 10층에서 사냥을 해 봤자 거기서 나오는 경험치는 레벨 업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각층에 등장하는 몬스터나 입주자들에게도 레벨의 한계선이 존재한답니당! 우린 이걸 ‘리미트’라고 불러용, 관리자들도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해당 층의 ‘리미트’ 내에서 아파트에 개입해야 해용. 리미트 한계를 벗어나면, 즉 아파트의 인과율에 벗어나면 캐럴처럼 처분 받게 되는 거죵. 아마 캐럴이 죽기 직전 한순간 강해진 걸 느끼셨을 텐데용?>
“아…….”
설명을 듣고 나니, 그때의 상황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루이스 캐럴을 쓰러뜨린 직후, 놈은 다시 힘을 각성해 강력한 붉은 전기를 응축해 쏘아 냈는데 그것이 리미트를 해제한 일격인 듯했다.
그 후에 헬시안과 커플러가 직접적으로 개입했던 것 또한, 그가 아파트의 룰을 완전히 어겼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시즌4의 보스가 놈보다 강한 것도 당연한 거군.’
이는 관리인들 또한 높은 층에 있을수록 더욱 강력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현은 이 정보가 차후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기에 똑똑히 기억해 뒀다.
<저 또한 지금은 시즌4에 있는 이상,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시즌4 신화급 보스 이상의 능력을 낼 수 없어용. 그리고 저 니알라토텝과 마장기신은 시스템의 예외 사항이니 저것들보다 이곳에서 강한 힘을 쓰기도 어렵겠죵.>
“시스템의 예외 사항?”
<니알라토텝과 마장기신의 스펙은 시즌8에서 등장할 몬스터들과 대등한 수준이거든용. 메인 퀘스트들은 관리자들이 만들었지만, 히든 퀘스트는 모두 두 의지께서 직접 넣은 예외 사항이라 저렇게 리미트를 넘는 스펙의 존재들이 종종 등장한답니당.>
“오호라…….”
조금 전 커플러의 답변으로 아파트의 시스템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아파트의 각 시즌은 관리자들이 제작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이 아파트에 지배자들인 ‘두 의지’라 불리는 존재들이 히든 퀘스트를 끼워 넣는 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세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커플러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뭐 더 궁금한 점은 없으신가용?>
“저 랜돌프인가 하는 마장기신을 크로노스와의 대결 때 써도 괜찮은 거야?”
<호옹, 그거 참 대담한 질문이네요.>
커플러는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론상 가능은 할 거예용.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할 겁니당.>
“그게 무슨 말인데?”
<저 마장기신은 강한만큼이나 엄청난 생명 에너지를 먹어 치워야만 작동하거든용. 뭐 연료야 채울 수 있겠지만, 시즌8 스펙의 몬스터를 제물로 바쳐도 에너지를 채우기 힘든 저놈을 시즌4~5의 몬스터들로 채운다라……. 솔직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해용.>
“아…….”
<뭐,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너무 주눅 들지 마세용. 허세현 님은 아주 특~별한 입주자시잖아용? 오호호호홍.>
커플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검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회색으로 물들었던 세계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고,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서큐버스 군단이 35층을 최초 클리어했습니다!]
[‘최초로 혼돈을 잠재운 자들’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보상: 올 스텟 +4
[승강의 방에 36층이 개방됐습니다!]
그 직후, 스테이지 클리어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메시지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러자 길드원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며 허세현에게 와르르 달려왔다.
“깨, 깼다! 대박!”
“해, 해냈어요, 쭈인님!”
“허. 세. 현! 허. 세. 현!”
“헹가래를 태우자! 하나 둘!”
길드원들이 잔뜩 흥분해서 허세현의 이름을 외치며 헹가래를 쳐줬다.
조금은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세현은 지금 이 순간을 적당히 즐기며 길드원들에게 몸을 맡겨 버렸다.
† † †
[보스 ‘베일을 가르는 자 달로스의 파편’(을)를 쓰러뜨렸습니다.]
[36층을 최초로 클리어했습니다!]
[타이틀 ‘고물상’(을)를 획득했습니다!]
보상: 올 스텟 +3
[허세현님의 레벨이 144로 올랐습니다!]
[보스 ‘죽음의 별 그로스의 눈물’(을)를 쓰러뜨렸습니다.]
[37층을 최초로 클리어했습니다!]
[타이틀 ‘달의 파괴자’를 획득했습니다!]
보상: 시즌4 거주자 전체 호감도 상승
[보스 ‘꿈의 마녀 이드라의 분신’(을)를 쓰러뜨렸습니다.]
[38층을 최초로 클리어했습니다!]
[타이틀 ‘마녀 사냥’(을)를 획득했습니다!]
보상: 지능 +8
[허세현님의 레벨이 154로 올랐습니다!]
[보스 ‘부왕 요그소토스의 사념’(을)를 쓰러뜨렸습니다.]
[39층을 최초로 클리어했습니다!]
[타이틀 ‘2인자를 처치한’(을)를 획득했습니다!]
보상: 올 스텟 +3
[허세현님의 레벨이 158로 올랐습니다!]
† † †
그렇게 또 반년의 시간이 지났다.
서큐버스 군단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순조롭게 시즌4의 공략을 헤쳐 나갔다.
매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마다 난이도가 하락하며 상위권 길드들이 빠르게 뒤를 따라붙었지만, 가장 높이 올라온 몇 개 길드들조차 2~3개의 층수 차이가 났다.
물론 이건 말이 좋아 2~3개의 층수 차이지, 시간으로 따지면 스테이지 난이도가 하락한 것을 감안해도 3~4개월의 차이가 있다.
팔콘 길드의 새로운 길드장 ‘그로기’의 성장세가 무섭긴 했지만, 적어도 이번 시즌은 서큐버스 군단을 위협할 길드 따윈 없어 보였다.
세현은 그동안 40층의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며 꾸준히 레벨링을 해 왔다.
현재 레벨은 159, 늦어도 오늘 오후면 160을 찍을 수 있을 듯 보였다.
이미 소환수의 숫자는 15명을 꽉꽉 채워서, 허세현 일행은 설희, 세이메이, 에D츄를 합치면 총 19명이라는 대 인원이 되었다.
“아, 이거 써먹긴 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세현은 마장기신 ‘랜돌프’를 운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봤다.
[랜돌프 연료: 0.2% - 1.78초 ]
랜돌프의 연료를 충전시키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몬스터를 잡은 후, 몬스터의 시체를 새로 생긴 ‘제물 바치기’기능을 이용해 랜돌프에 바치는 것.
이렇게 하면 몬스터에게 드랍되는 아이템과 골드, 경험치도 증발해 버리지만, 세현은 랜돌프의 힘이 이 정도의 투자를 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태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먹였음에도 연료는 겨우 0.2%. 이는 랜돌프를 2초도 채 가동시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연료를 채우지 않았다면 레벨을 4~5는 더 올릴 수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속에서 피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일격 필살용으로밖에 못 쓰겠구만.”
세현은 대 크로노스전에 랜돌프를 제대로 쓰는 것은 반쯤 포기했다. 그저 연료를 몇 %만이라도 채워, 일격 필살의 공격을 먹일 때 사용하겠노라 생각했다.
현재 진행 중인 메인 퀘스트는 ‘네크로노미콘’이라는 퀘스트로, 시즌4의 최종 보스인 ‘마왕 아자토스’를 만나기 위해 마도서 네크로노미콘을 만드는 퀘스트였다.
무려 수백 장에 달하는 네크로노미콘을 한 페이지씩 모아야 하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서큐버스 군단 전체가 흩어져 모았기에 벌써 80% 이상의 재료가 모인 상태였다.
이 속도로 가면 늦어도 1~2주 뒤면 보스 공략을 위한 메인 퀘스트는 완전히 진행될 것으로 예측됐다.
“다들 좀 쉽시다.”
세현이 박수를 치며 말하자 세이메이, 백설희, 에D츄가 슬슬 전투를 멈추고 슬슬 모여들었다.
“드, 드디어 휴식이다츄….”
“후우-.”
다들 얼굴에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이 지금쯤 한 번 끊어 가는 게 맞겠다 싶었다.
세현은 소환수들에게 ‘순찰’ 명령을 내려 자동 사냥을 하게 해 놓은 다음 바닥에 커다란 돗자리를 깔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에D츄, 여기 가로로 누워.”
“쮸? 무슨 이유가 있는 건가요?”
“너 배 좀 베개로 쓰자.”
“……쭈인님, 에D츄를 베개 취급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츄! 배에 사람 머리가 닿아 있으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느낌이 든단 말이다츄!”
에D츄는 뭔가 못마땅했는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징징거렸다.
이에 세현은 품속에서 커다란 에멘탈 치즈 두 판을 꺼내 양손에 하나씩 잡고 에D츄의 눈앞에서 붕붕 흔들었다.
“야아~ 이거 줄 테니까 배 좀 빌려주라~ 너 뱃살 엄청 부드럽단 말이야.”
“츄… 츄르.”
에D츄의 입에서 침이 주륵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