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침묵 속에 한 10초가 지났을까?
“에에에에엥?”
세현이 경악하자, 사카린이 뺨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이마를 쿡쿡 찔렀다.
“야, 아무리 나라도 그렇지 너무 대놓고 싫어하는 거 아니냐?”
“뭔 뜬금없이 데이트? 혹시 나 붙잡아다가 어디 인신매매라도 하시려고?”
평생 모쏠로 살아온 세현이기에 사카린의 태도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소원이라고 하면 당연히 아이템을 내놓으라든가, 아니면 누굴 두드려 패 달라든가 하는 부탁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너, 나를 대체 어떻게 보는 거냐…….”
“하지만 나랑 왜?”
“아, 귀찮아 죽겠네! 그런 것 좀 사사건건 물어보지 마.”
얼굴이 시뻘개진 사카린이 정강이를 발로 퍽- 소리가 나게 걷어찼다.
“아아아!”
몰려오는 고통에 세현이 정강이를 양팔로 붙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당연한 거지만, 데이트는 네가 준비해. 재미없으면 다음엔 명치다?”
이에 사카린은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 낸 후,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 이거 어쩌냐.”
세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며칠 후, 한겨울의 대학로.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긴 검은 머리에 선글라스, 빵모자를 푹 눌러 쓴 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김을 호호 불며 손을 녹이고 있었다.
검은 머리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난 보라색 머리가 가발을 덮어썼다는 사실을 알게 했지만,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길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더니 손을 작게 흔들었다.
머리를 포마드 스타일로 말끔히 넘기고, 말끔한 니트를 차려입은 것이 꽤 신경을 쓰고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또한 선글라스를 꼈는데 여자 쪽은 그 모습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져 푸훕-! 하고 실소를 터뜨리더니 한참 웃음소리를 뱉어냈다.
“아하하하하! 이, 이게 뭐야!”
“왜 웃어요?”
당황한 허세현이 민망한 듯 뺨을 긁적이며 묻자, 빵모자를 쓴 여자 ‘사카린’이 선글라스 안쪽으로 손가락을 넣어 웃느라 흘린 눈물을 닦아내며 대꾸했다.
“아니 그게 꼭, 처음으로 어른 흉내 내는 꼬맹이 같아서.”
“……윽.”
그 말대로 이렇게 꾸며 본 적은 없기에 세현 스스로도 지금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아, 귀엽네 귀여워. 너도 할 때는 나름 하는구만!”
사카린이 오른쪽 뺨을 쭉 늘려 흔들었다. 세현은 이를 천천히 잡아 뗀 후,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읽기 시작했다.
“음음, 그럼 일단은~ 이 근처에 있는 방 탈출 카페로 가죠.”
“뭐야, 너 스마트폰에 뭐할지 적어 둔 거야?”
“준비해 오라면서요.”
“아하하하! 귀엽네 귀여워! 그걸 대놓고! 이, 읽어!”
“아 쫌, 가자고요!”
두 사람은 투닥 대며 방탈출 카페로 움직였다.
세현도 나름대로 많이 알아보고 선정한 장소였다. 요즘 데이트 코스로 인기도 좋은데다 격리된 공간에서 진행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신분을 노출될 염려도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자, 저쪽으로 들어가세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폐교를 재현해 놓은 것 같은 방이 펼쳐졌다.
척 보기에도 공포 컨셉의 방 탈출인 모양이다.
“어, 이…… 이거 뭐냐? 허세현?”
“여고괴담 콘셉트로 만든 방탈출이래요. 아, 저기 앉아서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앞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가 놓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글씨가 적혀 있는 A4 용지 한 장과 붉은 색연필이 놓여 있었다.
책상 바로 옆에는 [분신사바 하는 법]이라는 가이드가 친절히 적혀 있었다.
“아, 이거 분신사바 하라는 거네, 재미있겠어.”
세현은 히죽 웃으며 의자에 앉았고 사카린도 맞은 바로 앉았다.
두 사람은 함께 붉은 색연필을 꼭 쥐고 옆에 있는 가이드의 주문을 따라 읊으며 허공에 빙빙 돌렸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잇-데 쿠다사이.”
빠직-!
그러자 색연필의 윗부분이 옆으로 맥없이 꺾여 버렸다.
“꺄아아아아악!”
사카린이 거의 경기에 가깝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세현이 그를 비웃듯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여기 기계 심어 놓고 타이밍 맞춰서 움직이게 한 거구만.”
“미, 미친놈아! 나 무서운 거 잘 못하거든!”
“무슨 소리에요, 얼마 전까지 크툴루니 뭐니 신나게 때려잡아 놓고선.”
귀신을 무서워한다기엔 시즌4는 아예 대놓고 마물들이 튀어나왔기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괴물이랑 귀신이랑 같냐?”
“뭐가 다르길래….”
“다르지!”
뭐 어쨌든, 사카린은 귀신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물론 세현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한껏 괴로워하는 것이 이 방탈출을 즐기는 데 문제가 되기는커녕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퀴즈를 풀었을 때, 천장에서 머리가 떨어진다거나.
“꺄악!”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잠긴 사물함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던가.
“사, 살려 줘!”
복도 너머에서 귀신이 불이 깜빡일 때마다 순간 이동을 해서 앞으로 다가올 때.
“흐아아앙! 내, 내보내 줘!”
“우, 울어?”
사카린의 비명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투명한 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세현은 부랴부랴 챙겨 왔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줬다.
‘뭐야 이게!’
특유의 독한 성품 때문에 ‘마녀’라고 불리는 천하의 사카린이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미친놈아! 데이트하자고 했더니 이런 데를 데려오면 어떻게 해!”
“죄, 죄송해요.”
사카린이 주먹으로 세현의 명치를 퍽퍽 때렸다.
감정이 실렸는지 맞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 왔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세현은 이를 가만히 맞아 줬다.”
[시간 종료입니다.]
잠시 후, 남자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와 탈출에 실패했다는 것을 알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어, 혹시 사카린 씨 아니세요?”
“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두 사람이 얼어붙었다. 그러자 사카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작게 대꾸했다.
“맞는데요.”
“와씨! 대박! 저 와아아안전 팬이에요! 대박! 사,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네네, 그 대신 제가 여기 왔다는 건 비밀로 하기?”
“네, 물론이죠! 근데 옆에 계시는 분은 애인?”
잠시 또 침묵이 흘렀다. 아무래도 옆에 있는 게 허세현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더벅머리를 포마드로 바꾼 것이 사람의 인상을 확 다르게 했기에, 무리가 아니긴 했다.
“아는 동생이에요 동생. 자, 싸인 여기요!”
사카린은 부랴부랴 사인을 넘기고 방을 빠져나갔다.
“하아~ 진짜 큰일날 뻔했네. 하마터면 내일 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얼굴 실릴 뻔했잖아.”
“그러게요.”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히죽 웃었다.
그 덕에 긴장이 풀리며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너 다음 코스도 엉망이면 이번엔 명치가 아니라 가운데를 걷어차 버릴 거야.”
“네네~.”
세현은 시큰둥하게 대꾸한 후, 자신이 준비한 다음 장소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굽이굽이 따라 들어가, 그 끝에 대뜸 놓여 있는 자판기 앞에 섰다.
“……너 또 이상한 짓 하려고?”
“이, 이상한 거 아니니까 좀 기다려 봐요.”
사카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세현은 부랴부랴 준비해 놓은 천 원짜리 한 장을 집어넣고 자판기의 버튼을 차례대로 눌렀다.
철컥-!
그러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자판기의 앞문이 열렸다.
“뭐야, 이번엔 또 뭔데?”
사카린이 노골적으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아무래도 조금 전 방탈출이 그녀에게 꽤 큰 충격을 준 탓에 조심하는 것이리라.
“그냥 식당이에요 식당. 진짜 이상한 곳 아니니까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와중에 대리석 타일 위로 촛불을 은은하게 비춘 실내가 드러났다.
“어서 오세요, 어떤 이름으로 예약하셨습니까?”
“허PD로 예약했어요.”
“예, 따라오시죠.”
잠시 후, 정장 차림에 반가면을 쓴 남자가 두 사람을 인도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간 후, 커튼을 걷고 들어가자 직사각형 형태의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심플한 디자인의 테이블 위에는 향초가 피워져 분위기를 더했다.
“미리 예약해 주신 메뉴로 준비하겠습니다.”
반가면을 쓴,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사라졌다. 세현은 그제야 선글라스를 벗고 의자에 기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여기선 괜찮으니까 안경 벗으세요,”
“뭐야,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데?”
“아영 씨한테 물어봤어요. 그 사람 이런 정보 잘 알던데요? 요즘 이런 비밀 식당이 유행이라나 뭐라나.”
오늘 데이트 코스를 짜기 전, 세현은 신지영에게 조언을 구했다. 평소 정보라면 빠삭한 그녀이기에 이런 것도 잘 알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 때문이었다.
“……그럼 방탈출도 신지영 생각이냐?”
“당연하죠,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으, 이 센스라곤 쥐뿔도 없는 놈아!”
사카린은 손가락으로 세현의 이마를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아, 왜요!”
“신지영이 이런 걸 잘 알겠냐. 완전 지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만 잔뜩 떠들어 댔구만!”
“그, 그런가?”
“생각해봐라 여고괴담 방탈출 같은걸 누가 데이트 때 가라고 하겠냐?”
“왜요, 재미있었구만.”
“퍽이나 재미있었겠다.”
두 사람이 한창 투덕대고 있는 와중-.
“음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티본스테이크에 명란 파스타, 거기에 와인까지, 그럴싸한 요리가 속속들이 테이블에 쌓여 갔다.
“오~ 맛있는데?”
사카린은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흡족한 얼굴로 음식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 그리고 와인이 한두 잔 들어가니 대화는 서서히 부드러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근황, 서로의 가정사, 과거, 많은 얘기가 오갔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건 그렇고 어제, 왜 뜬금없이 대련해 달라고 한 거야?”
세현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몸속에 잠든 보스 몬스터와 싸움을 위해서라고 말하면 너무 얘기가 길어지는데다, 아무리 신뢰가 있는 상태라 해도 쉽게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요즘 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아서 간만에 좀 자극을 받고 싶어서요.”
“흐음, 그렇긴 하지. 팔콘이 나가떨어진 이후로는 경쟁자라고 할 만한 놈들이 없었으니.”
사카린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스마트폰을 꺼내 내밀었다.
“얘가 요즘 핫하다던데 알고 있어?”
[여러분-! 팔콘 길드의 새로운 길~드장을 맡게 된 퀄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화면 속에는 금발 머리의 남자가 팔콘 길드의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이는 이틀 전, 팔콘 길드가 리빌드를 선언하며 공개했던 영상이다.
신입 입주자이지만 SS급 클래스라는 전대미문의 등급을 받은 ‘그로기’가 새로운 길드장에 임명됐다는 것에 온 언론은 집중했다.
[최단기간 3층 돌파!]
[SS급 입주자 그로기, 희귀 타이틀 ‘거미 포식자’ 최초 획득!]
[1달 내에 시즌1 클리어 예측! 아파트 내 지각변동 예측!]
하지만 세현은 심드렁했다.
언론은 최초 클리어니 최단 클리어니 떠들지만, 이미 세현은 다 얻은 타이틀이고 그로기보다 실제로 더 빨리 클리어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즌1의 경우는 세현이 애프터 퀘스트를 클리어해 버려서 오로치를 잡지 않아도 클리어가 가능하다.
SS급이나 되는데다가 팔콘 길드가 밀어주는 놈인데, 세현보다 늦게 클리어하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다. 그의 진가를 보려면 적어도 시즌2, 3 클리어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에이~ 이제 막 입주자가 됐는데 경쟁은 무슨 경쟁이에요. 적어도 시즌5 끝날 때까지는 어림도 없지.”
세현은 가소롭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언론과 대중들은 사상 최초 SS급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그를 띄워 주지만, SSS급 클래스인데다가 크로노스의 힘까지 가진 걸 고려하면 세현의 경쟁자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솔~직히, 팔콘이 무서운 건 SS급이고 나발이고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한성 그룹 때문이죠. 솔직히 저렇게 난리치는 거, 뒤에 한성 그룹이 있어서 더 그럴걸요?”
“뭐, 알고는 있으라고 말해 주는 거야. 사람 일이라는 게 또 모르잖아? 우리가 팔콘을 꺾고 이 자리에 올 줄 누가 알았겠어.”
“네네~ 걱정 마세요.”
대화는 이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됐다. 이후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